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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20:08:17

후주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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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周)

<colcolor=#fff>
파일:후주.png
북중국의 연갈색 부분
951년~960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후한 북송
별칭 <colbgcolor=#fff,#1f2023> 후주(後周), 곽주(郭周)
위치 중국 화북
수도 변경(汴京)
정치 체제 군주제
국성 (郭) → 시(柴)
국가원수 황제
주요 황제 태조 곽위
세종 시영
주요 재상 풍도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족 한족
종교 대승 불교, 도교, 유교
통화 주원통보(周元通寶)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1. 나라
1.1. 개요1.2. 역사1.3. 고려와의 관계1.4. 역대 황제
2. 기타

[clearfix]

1. 나라

파일:중국 창저우 철사자 1.jpg
허베이성 창저우 시에 남아있는 후주시기 철사자상 (沧州铁狮子). 953년에 세워졌으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철제 조각상으로 손꼽힌다.

1.1. 개요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로 951년에 곽위(郭威)가 후한을 무너뜨리고 개봉(開封)에 건국한 국가이다. 국호는 주(周)이지만 과거 무왕(武王)이 세운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주, 성씨를 따라 곽주(郭周), 시주(柴周)라고 부른다.

1.2. 역사

곽위는 후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지만 거병할 때 자식이 모두 살해되어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954년에 죽을 때 처남의 아들인 시영(柴榮)을 양자로 세워 제위를 잇게 하니 이가 후주 세종(世宗, 954년 ~ 959년)이다. 세종은 북한(北漢)과 싸워 승리를 거둔 뒤(고평 전투) 내정에 충실을 기하고 군대를 정비해 천하 통일의 야심을 품고 남당(南唐)과 북한을 압박하고 요나라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959년, 겨우 39살에 병사한 뒤 그의 어린 아들인 시종훈이 제위를 잇자, 군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로서 통일 왕조의 초석을 닦은 후주도 겨우 9년 만에 멸망하고, 조씨에 의한 이 개창되었다.

그러나 이 오대 최후의 왕조인 후주의 황족인 시씨는 조광윤의 쿠데타 때에 선양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대귀족으로서 대우받았고, 시종훈 본인도 조광윤의 후한 대우와 보호를 받았다.[1] 그래서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에서 시씨 일족은 남송의 최후의 군대와 함께 항전하여 남송과 최후를 함께했다.[2]

1.3. 고려와의 관계

고려와도 관계가 있다. 이 나라 출신 인물인 쌍기(雙冀)는 956년, 광종 시대의 고려로 들어와 귀화하고, 한림학사와 문형에 올랐다. 그는 958년 과거 제도를 창설하고 첫 지공거가 되었다. 이 과거 제도는 세습이 아닌 실력으로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로서 그동안 군림하였던 호족 세력을 누르고 광종의 왕권 강화에 일조하였다. 대표적인 중국계 한국인인 셈인데, 후손은 단절되었다.

1.4.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신조(信祖) 예화황제(睿和皇帝) 곽경(郭璟) - - 온릉(溫陵)
- 희조(僖祖) 명헌황제(明憲皇帝) 곽심(郭諶) - - 제릉(齊陵)
- 의조(義祖) 익순황제(翼順皇帝) 곽온(郭蘊) - - 절릉(節陵)
- 경조(慶祖) 장숙황제(章肅皇帝) 곽간(郭簡) - - 흠릉(欽陵)
1대 태조(太祖) 신성공숙문무효황제(聖神恭肅文武孝皇帝) 곽위(郭威) 광순(廣順) 951년 ~ 953년
현덕(顯德) 954년
951년 ~ 954년 숭릉(嵩陵)
2대 세종(世宗) 예무효문황제(睿武孝文皇帝) 시영(柴榮)
곽영(郭榮)
현덕(顯德) 954년 ~ 959년 954년 ~ 959년 경릉(慶陵)
3대 - 공황제(恭皇帝) 시종훈(柴宗訓)
곽종훈(郭宗訓)
현덕(顯德) 959년 ~ 960년 959년 ~ 960년 순릉(順陵)

2. 기타



[1] 물론 이 부분은 조광윤 개인이 숙청과 보복의 릴레이를 끊으려고 결정을 내린 것도 크다. 실제로 그는 부하들에 대해서도 피비린내 나는 유혈 숙청을 단행하지 않고 술자리를 연 뒤 정중하게 '부탁' 하여 병권을 넘겨받는 형태로 군권을 모으는 등 최대한 온건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다.[2] 소설『수호전』에 나오는 소선풍 시진(柴進)도, 이런 역사적 사유 때문에 아마 후주 세종의 후예로 그려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