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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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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 | Xia Dynasty
파일:하나라.jpg
붉은 색은 후기 신석기 씨족인 양사오 문화(仰韶文化)의 범위,
녹색은 초기 청동기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 유적의 분포로 추정되는 화하족 성읍의 범위[1]이다.
기원전 2070년?~기원전 1600년?
별칭 화하(華夏)
위치 중국 화베이(?)
국성 사(姒)
하후(夏后)
국가원수 왕(?)
주요 군주 우왕(기원전 22/21세기?)
언어 상고 중국어
문자 알 수 없음
종교 토속 종교
성립 이전 황하 문명
멸망 이후 상나라, 기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연원3. 실존한 나라였는가?4. 도시 국가5. 역대 국왕6. 존속 시기에 대한 가설들7. 기타8. 매체

[clearfix]

1. 개요

황하 문명의 한 갈래로 중국의 문헌에 최초의 세습 왕조로 기록된 나라이다.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을 화하(華夏)족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국명과 위치(화산 일대)에서 유래된 것이며 후대 하나라들의 어원이 되었다.

실존했는지는 후술되어있듯 견해차가 있는데, 만약 실존했다면 오늘날 학계에선 하나라의 도읍지로 이리두(얼리터우) 문화를 많이 거론하는 편이다. 다만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직까진 섣부르다는 게 신중한 국제 학계의 다수론이다.[2]

2. 연원

기록에 따르면 국성은 (姒), 씨는 하후(夏侯)이다. 건국자는 다.

상서》 등 문헌에 의하면, 요순시대에 엄청난 홍수가 일어났는데, 우의 아버지 치수에 실패하여 추방당하고 죽자, 그 뒤를 이은 우가 중국 전토에 이르는[3] 치수 사업을 벌였다.[4] 그리고 이를 성공한 공로로 임금에게 선양받아 중국 최초의 세습 왕조인 하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우의 한자인 '禹'(성씨 우)의 형태는 손으로 을 쥔 형상에서 비롯되었는데[5], 이는 우임금이 뱀으로 상징되는 강의 범람이라는 환란을 평정한 위인으로 여겨졌음이 암시된다.

상서》 및 《사기》 등에 따르면 우의 사후 백익이 선양받아 정치를 하였으나 그를 미흡하게 본 제후들이 따르지 않자 익이 우의 아들 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면서 왕위 세습이 제도화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착 등에게 왕통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소강왕이 다시 부흥을 이뤄낸다.

마지막 왕인 걸왕상나라주왕과 더불어 하걸은주라고 불리는 고대의 2대 폭군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인간 말종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말희라는 미녀에게 현혹되어 나라를 망치고 대략 기원전 1600년경 상나라의 시조인 성탕에 의해 멸해졌다고 하는데, 물론 승자의 기록인지라 100%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하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3. 실존한 나라였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상나라보다 오래된 얼리터우(二里頭, 이리두) 문화[6]는 고고학적으로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러나 이리두 문화를 문헌상의 하나라와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개연성은 있어보이지만, 엄밀한 의미의 동일시는 섣부르다"라는 말을 중국 학계와 외국 학계에서 강조점만 (중국 학계에서는 전자에, 외국 학계에서는 후자에) 다른 곳에 찍고 주장한다.

간혹 이 문제를 단순화하여 "중국 학자들은 있었다고 하고, 중국 바깥 학자들은 없었다고 한다"고 이분법적으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중국 학계가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와 결부시키고 중국 바깥에서 더 조심스러운 경향은 있지만, "이 정도면 이리두를 하나라로 봐도 될 것이다"와 "아직 입증할 수 없다"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이리두와 하나라를 완전히 동일시할 순 없음을 중국 학자 역시도 인정한다. 동시에, 외국 학자라고 해서 이리두=하나라 관점에 막연히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중국 고대 문헌에는 하왕조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지만, 1970년대 이전에는 전설적인 것으로 보아 그 실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사 문화의 연구가 고고학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문헌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게 되었다. 따라서 하왕조 때의 문자나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 후반, 특히 1980년대에 들어와서 중국 역사상 첫 번째 국가로 하왕조를 내세우고 있다.
하왕조의 실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이리두(二里頭) 문화'였다. 1958년부터 하북성 서쪽에 하왕조의 유적이 있을 것이라 추정하고 이 지역을 탐사하였는데, 그 결과 정주(鄭州) 낙달묘(洛達廟), 낙양의 동간구(東干溝)), 언사현(偃師縣)의 이리두를 중점적으로 발굴하였다. 이 지역은 바로 문헌상에 나오는 하족(夏族)의 활동 중심이었던 하북성의 서쪽과 산서성의 남쪽이었으며, 시간적으로도 하남 용산 문화와 정주 초기의 상(은) 문화의 중간에 해당되었고, 그 발견된 유적지의 지명에 따라 이를 각각 '낙달묘', '이리두 문화'라고 부른다.

이리두 문화는 방사성 탄소 측정으로 기원전 1900년 전후로 보며 4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초기는 1· 2층으로, 후기는 3· 4층으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형태로 산서성 하현(夏縣) 동하풍(東下馮) 문화가 있다. 이곳은 바로 『우공(禹貢)』에서 지적하고 있는 9주 가운데 중심이었던 기주(冀州)가 되는 곳으로, 확실히 이리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 하왕조의 실재를 더욱 확실하게 해 주었다.
신승하(고려대 동양사학과 교수), 『중국사』, 대한교과서, 1998, pp.49-50
죽서기년(竹書記年)의 기록에 따르면 하 왕조는 471년 동안 유지되었다. 신자이 유적지[7]와 얼리타우 유적지가 전후로 계승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850년에서 3520년 전으로, 고대사에서 서술한 하 왕조의 존속 시기와 기본적으로 부합한다.

다만 이 기본적인 시간의 특징 외에, 후예(后羿)가 왕권을 찬탈했다는 등의 고대사에 기록된 하 왕조의 과거사는 아직 고고학에서 검증되지 않았다. 게다가 얼리터우의 고고학 발굴은 역사서에 전혀 기록되지 않은 많은 현상을 드러냈다.
리숴李碩 (칭화대학 역사학과 박사), 『상나라 정벌: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翦商:殷周之变与华夏新生 (2022), 홍상훈 번역, 2024, 글항아리, ebook

애초에 문헌 속 하나라를 이리두 문화와 동일시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고고학적 시각에서 상나라 전 중국은 이미 도시를 건설할 정도로 발달했고, 충분히 국(國)이라 불릴만한 정치체들이 있었다. 그리고 단기간 반짝 나타나고 해체된 도시 문화들과 달리, 이리두는 신채(新砦, 신자이)를 제외하고 봐도 약 250년이 지속되었고 이리두 문화를 지배한 왕조를 개연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얼리터우 이전의 100여 년 동안 장난에서 화베이 지역까지 이미 스자허(石家河)와 량주(良渚), 타오쓰(陶寺), 스마오(石峁), 칭량쓰(凊凉寺) 등의 찬란한 고대 국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건립한 대규모 도시는 '문명' 및 왕조와 단지 한 걸음의 거리에 불과한 듯했으나, 짧은 번영을 거치고 나서 모두 자연적으로 해체되어, 단순한 무위(無爲)의 삶을 이어가는 부락 시대로 복귀해버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얼리터우는, 우담바라처럼 반짝 나타났다 사라진 고대 국가들의 악순환에서 벗어났을까? 그것은 그들이 새로운 통치 기술인 청동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 화베이의 타오쓰와 스마오, 남방의 량주와 같은 그 전의 각종 고대 국가들에는 모두 이런 규모의 전당이 없었으니, 이것은 얼리터우가 통치하던 강역과 소집할 수 있는 노동력이 뚜렷하게 증가하여 엄연한 왕조 ㅡ 비록 이제 막 형성되는 시기의 것일지라도 ㅡ 의 기상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리숴李碩 (칭화대학 역사학과 박사), 『상나라 정벌: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翦商:殷周之变与华夏新生 (2022), 홍상훈 번역, 2024, 글항아리, ebook
이러한 二里頭유적의 특징을 종합해 보면, 약 기원전 18세기에서 16세기까지, 연속된 하나의 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계획적으로 도시를 개발하였고, 이륜 수레를 사용하였으며, 청동기와 綠松石을 제작하는 공방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二里頭에 농업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전문적인 직업군이 있었고, 상업도 어느 정도 발전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제사유적은 이들에게 공통된 어떤 종교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계획 된 도시와 전문적인 직업군, 상업과 종교 활동을 통해, 이를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공공 권력의 존재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綠松石 공방과 청동 공방, 그리고 골기 공방과 토기 공방 또한 ‘宮城’ 내, 혹은 그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지배층의 ‘威勢品’이라 할 수 있는 청동기, 綠松石器, 골기 등의 공방이 ‘宮城’ 주변에 위치하기 때문에, 당시 전문 수공업 생산을 지배계층이 직접 통제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당시 二里頭에는 이 지역을 아우르는 공공 권력을 지닌 지배계층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유표. 「‘夏文化’의 함정 ― ‘禹’, ‘夏’, ‘二里頭’의 관계 ―」 중국고중세사연구 no.58(2020) : 28-29

물론 이 모든 근거에도 불구하고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와 '동일시'하는 건 현재로선 섣부르다. 한 가지 이유는, 이리두 문화 유적에서 아직 문자가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라는 하(夏) 형태의 문자가[8] 발굴되기 전까지는 실존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문자가 출토되긴 했는데 그게 상(商)이었다면, 이리두 문화와 하나라를 묶은 모든 연구는 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고고학적 성과를 문헌 속 국가로 '개연적으로' 추정하는 건 중국 바깥 학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9] 이리두가 하나라이면 좋겠다고 먼저 목표를 잡고 연구를 해온 중국 학계의 동기부여는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이리두 문화가 하나라인지 여부와는 아무 상관 없이, 도시를 건설하고 왕조를 지속할 정도로 발달한 문명이 상나라 전 중국에도 있었고, 이미 그 시점에서 이 문명을 굳이 하나라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고고학은 막연하고 건조한 역사적 상상력에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따라서 역사와 고고학의 만남은 우리가 사료로 구성된 ‘史實’에서 과거의 ‘事實’로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孫慶偉가 주장하는 ‘역사적 맥락에서 고고학을 연구(歷史語境下的考古學硏究)’하는 방법론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다만, ‘夏문화’라는 함정에 빠져, 二里頭를 섣불리 ‘夏문화’라는 틀 속에서 연구하는 것은 연구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상존한다.
전설 속의 ‘禹’가 실존 인물인지 여부를 떠나, 또 ‘夏’ 나라가 실존했는지 여부를 떠나, 중국 고대 문명의 유구성과 우수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二里頭 유적 같은 경우 龍山 시대 이후 처음 등장한 문화적 중심이라는 것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앞서 말한 대로, 이리두 유적을 통해, 당시 이곳에 공공 권력을 지닌 지배 계층의 군림 또한 예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夏’일 필요는 없다. 許宏이 말한 대로 고고학은 구체적인 역사 사건과 인물 등을 밝히는데 능하지 못하지만, 역사 문화 발전에 대한 장기적인 관찰에 능하다. 그러나 반대로 二里頭가 ‘夏文化’가 아니라는 것도 현재로서는 완전히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二里頭가 ‘夏文化’인지 여부는 최소한 연구의 결과가 되어야지, 결코 전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유표. 「‘夏文化’의 함정 ― ‘禹’, ‘夏’, ‘二里頭’의 관계 ―」 중국고중세사연구 no.58(2020) : 40-41

4. 도시 국가

이와 더불어, 하나라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하가 일개 성읍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원에는 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성읍 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하는 그 수많은 성읍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사마천 등 후대의 중국인 역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 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하를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 하를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를 이었다는 상, 주 등 중원의 '왕조'들도 진, 한 등과 같은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성읍 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한규, 《천하국가》, 57쪽

현재 중국 사학계는 하나라가 얼리터우(이리두)라는 전제가 맞다면, 하나라 즉 얼리터우 문화는 후대에 문헌상 기록된 내용보단 세력 범위가 많이 협소한, 그럼에도 당시 다른 고대 문화보단 많이 커진 종주 도시국가 정도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황하강 일대 지역의 종주권을 차지한 일종의 느슨한 연합체 수장 역할을 한 큰 성읍 국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의 중국 대륙은 지금과 매우 다른 식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황하와 회하 유역 일대의[10] 대부분의 땅들이 강수량이 많은 아열대 내지 열대성 기후였고, 덕분에 습지가 많은 아열대 밀림이 대부분이었다. 물소는 물론 아시아코끼리, 인도코뿔소, 자바코뿔소, 수마트라코뿔소, 군자긴팔원숭이, 오랑우탄, , 호랑이, 표범, 구름표범을 포함한 각종 동물들과 전설의 속에 등장하는 의 모티브가 되었을 물왕도마뱀, 코브라, 버마비단뱀, 바다악어, 양쯔강악어를 비롯한 대형 파충류[11], 봉황, 주작, 의 모티브인 듯한 조류들이 살고 있었던 험악한 열대밀림의 땅이었다는 것. 상고 시절에는 그냥 밀림 문명이 맞았지만 춘추전국시대로 가면서부터 황하 유역 일대는 기후 변화와 수천 년 동안의 개간을 통해 밀림이 사라지고 평야로 바뀌었으며, 장강 유역 일대만 밀림이었다가 이내 한나라 이후에 개간되었다. 물론 거기에 서식하고 있었던 동물들 역시 서식지 파괴와 무분별한 사냥으로 사라졌다.

또 당시 개별적인 성읍국가들의 직접적인 통치 영역 바깥에는 완전히 서로 다른 문명들이 존재하였다. 이런 열대밀림 사이에 세워진 '성읍 국가'들은 다양한 문자 문화와 금속 문명을 가지고 있다가 일부 국가는 후대의 중국 문명으로 계승되고 일부는 단절되었다. 당연히 성읍 국가 이외의 지역에는 아예 인간이 살지 않거나 완전히 다른 풍속을 지닌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 심지어 주나라 후기인 동주 시절에도 수도인 낙양 서쪽의 산에 이민족 부락이 있을 정도였고, 현대 중국에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중국 땅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이민족 성읍국가들이 존재했을지는 명확한 일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고대 시기(이를테면 춘추전국시대 즈음)를 거치며 서로 교류하거나 정복하는 과정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한나라한족의 정체성을 확정지었다. 이런 사실이 확정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진 이후로는 황하 문명과 장강 문명을 합쳐 중국문명이라는 범칭으로 칭하는 것이 대세이며, 하나라가 실존했다고 가정한다면 황하 문명권에 속한, 중원 지역의 성읍 국가 중 하나로 보는 정도다.

일각에서는 제 도당씨와 제 유우씨가 실존하고, 이들이 하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후일 하나라를 건국하는 집단을 이끌던 일종의 족장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하 왕조 역시 상 왕조와 함께 존재한 다른 왕조였으며 한때 하 왕조가 우세했다가 이후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가져갔다고 해석한다면 갑골문의 기록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개연적 추정이지, 하나라를 이리두와 동일시할 수 있는지 확정된 건 아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나라 문화와 구별되는 별개의 큰 도시 문화가 상나라보다 더 오래 전에 있었던 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

5. 역대 국왕


하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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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우왕
임시

익왕
제2대

계왕
제3대

태강
제4대

중강
제5대

상왕
비정통

후예
비정통

한착
제6대

소강
제7대

저왕
제8대

괴왕
제9대

망왕
제10대

설왕
제11대

불강
제12대

경왕
제13대

근왕
제14대

공갑
제15대

고왕
제16대

발왕
제17대

걸왕
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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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왕명 재위 기간
(죽서기년)
추존 숭백(崇伯) 곤(鲧) -
01 우왕 우(禹) 45년[12]
임시 - (益)[13] 3년
02 계왕
제성황제(齊聖皇帝)[14]
계(啟) 10년
03 태강왕 태강(太康) 39년
04 중강왕 중강(中康) 13년
05 상왕 상(相) 28년
찬탈 - 후예(后羿) 8년
찬탈 - 한착(寒浞) 40년
06 소강왕 소강(少康) 21년
07 저왕 저(杼) 17년
08 괴왕 괴(槐) 26년
09 망왕 망(芒) 18년
10 설왕 설(泄) 16년
11 불강왕 불강(不降) 59년
12 경왕 경(扃) 21년
13 근왕 근(廑) 21년
14 공갑 공갑(孔甲) 31년
15 고왕 고(皐) 11년
16 발왕 발(發) 11년
17 걸왕 이계(履癸) 52년

6. 존속 시기에 대한 가설들

하왕조의 존속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설들이 제기된다.

7. 기타

8. 매체



[1] Area of the Erlitou culture (1900–1500 BC) in northern China, based on Liu Li and Chen Xingcan (2012), The Archaeology of China: From the Late Paleolithic to the Early Bronze 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64310-8, p257.[2] 이리두 문화 자체가 고고학적으로 실존하고 주변 지역의 타 문화보다 월등한 차이점을 보이고 한 국가라고 부를만큼 수준높은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라고 부를만한 고고학적 유물은 발견되지 않아 이를 동일시 하기에는 어렵다.[3] '중국'은 본래 황하 중하류 지역에 국한하는 영역으로, 현재의 용법으로의 의미 확장은 춘추전국시대 종결로 이루어진다. 쉽게 말해 과장된 용어라고 보면 된다. 후술되어있듯 하나라는 실존했다 치더라도 느슨한 연맹체 수장 정도의 성읍국가 수준이었을 확률이 높다.[4] 학자 중에는 하나라를 이전까지 중국 북부에서 주로 행해지던 (필요할 때만 물을 주면 되는) 산기슭에서도 할 수 있는 농사가 아닌, 를 기르기 쉬운 낮고 습한 지역에서의 농사를 남부 지역에서 받아들여 시작한 부족으로 보기도 하는데, 밭과 논농사 둘 다 가능하다는건 기후변화가 있더라도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청동 제련 기술까지 겹쳐 이전 한동안 번영했다 쇠락한 여러 부족 문화들과 달리 하나라가 고대왕조사회로 진입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당연히 낮은 습지에서 물을 가둬 농사하려면 치수는 필수다.[5] 하나라로 추정되는 얼리터우 문화에서 나오는 고대 유물을 보면 으로 추정되는 장식들도 보이는데, 용은 후대 기록을 보면 주로 에 살다 간혹 날기도 했다는둥 전설상의 동물이지만, 모티브가 된 것은 당시 황하강 유역에 살던 이나 악어(양쯔강악어 등) 등이었을 확률이 높아보인다. 치수 과정에서 당연히 이런 해로운 짐승들도 밖으로 쫓아내는 한편, 사람한테 해 끼치지 말라는 일종의 의식도 치르면서 역설적으로 용을 숭상하는 문화가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6] 여기서 '문화'는 '문명'과 대비되는 소위 '미개한' 원시인 부락이란 의미가 아니다. 은허를 '은허 문화'(Yinxu culture)라 하는 것과 유사한 원리로, 서구권에서도 이리두 문화는 초기 중국 문명(Early Chinese Civilization)에 속한 한 문화로 본다. 이리두 문화가 부락이 아니라 도시국가들 수준인 건 중국 학계만의 시각이 아니다. "이리두 문화는 중국 문명의 초기 단계라고 합당하게 불릴만하다."we may legitimately call it an early stage of Chinese civilization. (Sarah Allan, Erlitou and the Formation of Chinese Civilization: Toward a New Paradigm, 2007, 초록)
후술할 이유표의 비판 역시도 "이미 상나라 전에 도시국가들 실존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고 중국 문명의 유구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왜 굳이 하나라에 집착하냐?"는 요지다.
[7] 발췌자 주: 신채(新砦, 신자이)는 이리두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취락으로, 고고학에 의하면 이리두 사람들은 토착민이 아니며 신채에서 왔다.[8] 물론 이 당시는 갑골문도 없던 시기니 상식적으론 한자도 있었을리 없긴 하다. 그나마 문자 형태의 유물이라도 발견되면 도움이 되겠지만, 애초에 문자가 없었던건지 발견되지 않았다.[9] 당장 한국 고대사의 고조선만 하더라도, 문헌상 최초 언급은 BC 7세기의 『관자』이고 관자의 본문 비평에 따라선 BC 4세기로 볼 수도 있지만, 요서 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BC 9세기~8세기경 발호)를 '개연적으로' 고조선이라 보는 건 한국 제도권 학계에서도 있는 시각이다. 물론 이런 개연적 추정은 '동일시'와 구분되어야 하지만, 중국 학자라고 이리두 문화를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라와 '동일시'하는 건 아니다.[10] 당시에는 중화문명권으로 보기 어려웠던 장강 유역 일대까지 포함할지라도.[11] 또한 화석 기록을 통해 중국 남부에 15세기 초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보이는 한유수쿠스(Hanyusuchus)가 6m에 달하는 대형 악어였다는 게 밝혀진 이상, 이쪽이 용의 기원이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어 보인다. 한유수쿠스는 화석의 칼자국 등과 고고학적 증거 등을 토대로 보아 인간의 직접적인 해수구제를 명목으로 한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조선과 명나라 초에 멸종한 것으로 추정된다.[12] 하나라가 기원전 1600년에 멸망했다고 볼 경우 기원전 2090년 ~ 기원전 2045년이다.[13]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설도 있지만, 우의 3년상이 끝나자 우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기산(基山)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사기엔 전한다. 상고 8대성의 하나인 영성(嬴姓)의 시조로 전국 7웅의 진나라, 조나라가 이 사람의 후손을 자처했다. 전승에 따라 소호 금천씨, 또는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14] 무주 성신황제 추존.[15]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메데이아의 아들이 콜키스의 이름을 바꿔서 메디아를 세웠다는 설이나, 헤라클레스와 에키드나의 막내아들이 스키타이가 되었다는 설과 아브라함 문서에 있는 민족간 관계 정리와 비슷하다.[16] 부서진 신의 교단이 섬기는 메카네와 동일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