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二里頭[1]/Erlitou[2]중국 황하 중류부터 하류를 중심으로 발달했었던,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친 문화이며[3], 주변 지역과 비교시 상당히 차이나는 규모와 수준의 도시와 궁전을 건축했었다. 한국 한자음대로 이리두 문화라고도 한다.
2. 유적
이러한 二里頭유적의 특징을 종합해 보면, 약 기원전 18세기에서 16세기까지, 연속된 하나의 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계획적으로 도시를 개발하였고, 이륜 수레를 사용하였으며, 청동기와 綠松石을 제작하는 공방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二里頭에 농업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전문적인 직업군이 있었고, 상업도 어느 정도 발전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제사유적은 이들에게 공통된 어떤 종교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계획 된 도시와 전문적인 직업군, 상업과 종교 활동을 통해, 이를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공공 권력의 존재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綠松石 공방과 청동 공방, 그리고 골기 공방과 토기 공방 또한 ‘宮城’ 내, 혹은 그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지배층의 ‘威勢品’이라 할 수 있는 청동기, 綠松石器, 골기 등의 공방이 ‘宮城’ 주변에 위치하기 때문에, 당시 전문 수공업 생산을 지배계층이 직접 통제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87) 따라서, 당시 二里頭에는 이 지역을 아우르는 공공 권력을 지닌 지배계층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유표. 「‘夏文化’의 함정 ― ‘禹’, ‘夏’, ‘二里頭’의 관계 ―」 중국고중세사연구 no.58(2020) : 28-29
이유표. 「‘夏文化’의 함정 ― ‘禹’, ‘夏’, ‘二里頭’의 관계 ―」 중국고중세사연구 no.58(2020) : 28-29
얼리터우(二里頭, 이리두)란 이름은 유적지의 이름에서 유래됐으며 유적지는 중국 허난성 뤄양시 동쪽에 위치해 있다.[4] 1959년 발견된 이후, 발굴 및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 1960년에는 대규모의 궁전터가 발견되었으며 이것은 현재까지도 중국 초기 왕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가장 오래된 궁전 건축이라고 한다.
기원전 1800년부터 1500년경의 유적으로 추정되며, 과거에는 상나라로 보기도 했지만 오늘날엔 상나라와 구분되는 별개의 집단으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특히 문헌에 기록된 하나라와 시기가 결부되기에 하나라로 보는 시선이 상당히 많지만 명확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현재는 "얼리터우와 하나라간 개연성은 있어보이지만, 엄밀한 의미의 동일시는 섣부르다"라는 말을 중국 학계와 외국 학계에서 강조점만 (중국 학계에서는 전자에, 외국 학계에서는 후자에) 다른 곳에 찍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기자 출신 역사학자 리숴에 따르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는 얼리터우 문화의 특징은 궁전 등 계급 분화가 이뤄진 흔적이 있긴 하지만, 예를 들어 궁궐 지역과 청동기 제조 지역 등의 풍습이 다소 달랐던 흔적도 있어[5] 왕이 도시 전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했던건 아닌 것으로 보이고, 서로 분업화된 여러 집단이 있고 그 집단 내부의 자치권이 제법 높게 인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리숴는 얼리터우가 길어봤자 채 100~2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쇠퇴한 주변의 부족 문화와 달리 제법 오래 유지된 문화를 성립할 수 있었던건 청동 기술의 발달에서 찾았는데, 얼리터우인들은 본인들의 고도화된 청동 기술이 외부에 유출되는걸 꽤나 꺼렸던 모양으로, 애초에 청동기가 후대의 철기만큼 많이 제작될 환경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청동기는 교역도 안했고[6] 내부적으로도 상류층만 쓰고 하층민들은 여전히 석기 등을 이용해 농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7] 그러다보니 이런 차이가 빈부격차 등으로 하류층의 불만이 높아져도 이전 문화들과 달리 상류층의 지배권력을 공고히 해[8] 쉽게 말해 반란 여건을 차단해 제법 오래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허나 이들 역시 400~500년이 지난 후[9] 종국엔 멸망하는데, 제4기 100년 중 말엽인 50년 동안 외부 세력에 침략을 당한[10] 흔적이 보인다. 이때 궁궐 지역과 달리 청동기 제조 집단 구역은 훼손 정도가 덜해, 침략 집단에 협조했거나 심지어 궁궐 세력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애초에 내통한 거 아니냐는 추정도 한다. 어쨌든 새로운 정복 집단은 얼리터우 건축물을 방치한 채 본인들만의 건축물을 짓기도 했는데, 이 형식이 상나라 초기와 상당히 흡사하다는[11] 주장이 있다. 어쨌든 이들은 얼리터우에 그렇게 오래 있진 않았고, 이들이 새 도읍을 찾아 떠나면서 얼리터우는 오랜 기간 잊히게 된다.
한편, 고고학적으론 얼리터우 문화와 비슷한 형태의 청동기 유물들이 1972년 안후이성 페이시현에서 출토되는데, 문헌상 기록에 하나라 걸왕이 도망쳤다는, 얼리터우에서 동남쪽으로 500km 남짓 떨어진 남소(차오후호)의 서쪽 기슭에 있어 일각에선 하나라와의 연관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애초에 이 지역 유물 일부는 제3기 시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때문에 당시 얼리터우에서 내분 등으로 나온 일부 세력이 이곳에 이주해 장기 거주했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된다. 다만 대형 취락은 발견되지 않아 그 규모가 엄청 크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굳이 하나라와 연관 지어보면 갈 곳이 없어진 걸왕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까지 왔다고 볼 수도 있다. 허나 이곳 역시 걸왕을 쫓아온 정복 세력들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얼리터우 문화에서 출토된 고대 유물을 보면 용으로 추정되는 장식이 보인다. 용은 전설상의 동물이지만 후대 기록을 보면 주로 물에 살다 하늘에 오르기도 했다고 묘사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 본다면 모티브가 된 동물은 당시 황하강 유역에 살던 뱀이나[12] 양쯔강악어 등이었을 확률이 높아보인다. 이런 해로운 짐승들을 쫓아내는 한편, 사람한테 해 끼치지 말라는 일종의 의식도 치르면서 역설적으로 용을 숭상하는 문화가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13]
[1] 또는 二里头라고도 한다.[2] 또는 Èrlǐtóu.[3] 참고로 문화와 문명의 차이는 (대형)도시, 야금술(혹은 계급분화), 문자의 존재 여부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문자가 없어도 일부 문화를 문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야금술까지 빼도 문명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이진 않다. 참고로 얼리터우는 문자 자료는 출토된게 없지만, 청동기를 제조하는 야금술은 주변 지역에선 독보적인 수준이었다고 추정된다. 즉, 얼리터우가 하나라가 맞고 이후 상나라에 멸망당한 것이라면, 도시 문화에서 야금술이 추가되는게 얼리터우(하나라) 시기고, 갑골문이 추가되어 이른바 문명이 완성되는게 상나라 시기라고 볼 수도 있다.[4] 다만 얼리터우 문화로 볼시엔 얼리터우 유적으로 이주하기 이전 허난성 정저우시 구역의 '신자이 유적'도 초기 얼리터우 문화로 거론된다. 신채(新砦, 신자이)는 얼리터우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취락으로, 고고학 분석 결과에 따르면 얼리터우 사람들은 기존 토착민이 아닌 신자이에서 이주해온 이주민 세력이었다.[5] 얼리터우는 기본적으로 인신공양 풍습이 아예 없진 않아도 의외로 적은 곳이었지만(순장 흔적은 딱히 없고 인신공양 흔적이 간간이 발견된다), 다른 지역 대비 청동기 제조 지역만큼은 인신공양 풍습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금속 기술자들이 좋은 품질의 금속을 염원하며 종교적 의식에 매달린 것과도 연관이 있어보인다고 추정했다. 그 외 거형갱에선 돼지만 이용해 제사를 지내는 등 딱히 국가적으로 통일된 종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6] 그렇기 때문에 얼리터우 주변의 속국 혹은 연합국들도 문화 양상은 상당히 차이가 난다. 반대로 말하면 얼리터우인들은 외부적 확장과 약탈도,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도 크게 하지 않은, 비교적 고립된 생활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7] 사실 이런 양상은 중국 기준 춘추시대까지도 이어지다 철기 시대가 도래하는 전국시대 가서야 해소된다. 청동기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8] 실제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본격 계층이 나뉘기 시작했다고 학자들은 본다.[9] 고고학적으론 얼리터우 유적의 시기를 크게 1~4기로 구분한다. 제2기까진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세력 확장기였고, 청동기에 접어드는 제3기에 도시 국가로 그 정점을 맞았다가 점점 쇠락하기 시작, 제4기에 멸망한다.[10] 이 시기 아무렇게나 방치된 유골의 수량이 크게 늘어난다.[11] 담장에 바짝 붙여 건물을 짓고, 정원 중앙에 독립된 중심 전당을 짓지 않는 등.[12] 얼리터우 유물에서 보이는 전체상은 구불구불한 뱀의 형상에 가까워 뱀을 주 모델로 다른 동물들을 섞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사족으로, 얼리터우와 별개로 오늘날 용의 모티브로 왕도마뱀류, 또는 지금은 멸종한 거대한 파충류가 거론되기도 한다.[13] 참고로 용 추정 장식 자체는 얼리터우 문화 이전, 1000여년 전 훙산 문화나 조금 뒤의 링자탄과 량주 문화, 얼리터우 문화가 태통하기 300~400년 전인 산시 스마오 고성 돌담# 등에서도 발견된다. 즉, 얼리터우 문화만의 고유한 요소는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얼리터우의 유물에서 나타난 용은 규격이 더 크고 가장 화려한 무덤에 나타나며, 무덤 주인의 상반신에 엎드려 누워있는 등 이전보다 더 신성시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