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商)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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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16350> 상(商) 초대 왕 태조 | 대을 太祖 | 大乙 | ||
묘호 | 태조(太祖) / 고조(高祖) | |
왕호 | 대을(大乙) | |
시호 | 태무왕(太武王) / 무왕(武王) | |
성 | 자(子) | |
휘 | 리(履) | |
아버지 | 기종(夔宗) 주계(主癸) / 시계(示癸)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1589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5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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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湯王상나라의 초대 국왕. 묘호는 태조(太祖)[1], 왕호는 대을(大乙), 휘는 리(履). 성탕(成湯), 성당(成唐) 등 여러 이칭으로도 불린다. 시호는 태무왕(太武王).[2] 아버지는 기종(夔宗) 시계(示癸).
재상 이윤(伊尹)의 보좌로 명조(鳴條) 전투에서 대승하며 하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패사시켰다. 박(亳)에 수도를 정하고 상(商) 왕조를 건국했으며 제도를 정비했다.
2. 행적
《사기》에 따르면 상은 설부터 탕왕까지 총 8번을 천도했다고 하며, 이후 제후 정벌에 나섰다.탕왕은 하나라를 치기 전 우선 명분과 군수 물자를 얻기 위해 갈국(葛國) 정벌에 나섰는데, 탕왕이 연설한 것을 기록한 <탕정>에 따르면 탕은 천명을 강조한다. 갈국의 군주인 갈백(葛伯)이 포악무도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지 않자 먼저 하늘에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소와 양을 갈국에 보냈으나, 갈백은 이를 모두 잡아먹어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농사일을 도울 일꾼들을 보내고, 이들에게 새참을 주기 위해 소년을 보냈는데, 갈백은 상나라에서 온 일꾼들은 모두 노예로 삼아버리고, 소년은 죽여버리자 하늘의 명을 대신해 갈국을 정벌한다며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후 하나라의 걸왕이 이를 문제삼자 이윤을 보내 조공을 바치면서 이를 설명하는데, 걸왕은 별 말을 못했다고 한다. 일단 걸왕이 황음한 짓을 계속 일삼자 제후인 곤오씨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에 탕이 제후들을 통솔해 곤오씨를 정벌한 후, 본격적으로 하나라 걸왕을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탕은 걸왕을 정벌할 때도 마찬가지로 천명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탕이 군사들에게 한 말이 전해진다.
"이리 가까이 오라 여러 군사들아, 이리 와서 모두 짐의 말을 경청하라. 내가 감히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 걸이 죄가 많기 때문에, 내 비록 너희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상제의 뜻을 두려워하여 하나라를 감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죄를 너무 많이 저지른 하걸을 하늘이 명하여 죽이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들 가운데 ‘우리 임금이 우릴 걱정해주지 않아 농사를 그만두게 하고 수탈하는 정사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거나, 아마도 '하왕(夏王)이 죄를 지었다는데 어떤 죄를 지었다는건가?'라고 말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하나라 왕은 백성의 힘을 빼고 군신들이 서로 거느리고 하나라 고을을 수탈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두 게으르고 화합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저 해는 어느 때나 없어지려나? 우리가 너와 함께 모두 사라지리라!’[3]라고 하였다. 하나라의 덕이 이와 같이 무너졌음으로 지금 내가 반드시 가서 벌하고자 한다.
만약 너희들이 나 한사람을 도와서 하늘의 벌을 이루게 한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너희들은 불신하지 말라, 나는 (내가 뱉은) 말을 먹지 않는다.[4] 허나 너희들이 내가 서약까지 한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들의 처자식까지 죽임으로써 너희들을 욕보이고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탕이 이 말을 관리에게 알려 그들로 하여금 <탕서(湯誓)>를 짓도록 했다.
결국 하나라로 쳐들어간 탕왕과 상군은 걸왕과 하군을 패퇴시켰고, 이윤이 탕의 승리를 제후들에게 공포하자 제후들이 복종했으며, 탕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너희들 가운데 ‘우리 임금이 우릴 걱정해주지 않아 농사를 그만두게 하고 수탈하는 정사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거나, 아마도 '하왕(夏王)이 죄를 지었다는데 어떤 죄를 지었다는건가?'라고 말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하나라 왕은 백성의 힘을 빼고 군신들이 서로 거느리고 하나라 고을을 수탈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두 게으르고 화합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저 해는 어느 때나 없어지려나? 우리가 너와 함께 모두 사라지리라!’[3]라고 하였다. 하나라의 덕이 이와 같이 무너졌음으로 지금 내가 반드시 가서 벌하고자 한다.
만약 너희들이 나 한사람을 도와서 하늘의 벌을 이루게 한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너희들은 불신하지 말라, 나는 (내가 뱉은) 말을 먹지 않는다.[4] 허나 너희들이 내가 서약까지 한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들의 처자식까지 죽임으로써 너희들을 욕보이고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탕이 이 말을 관리에게 알려 그들로 하여금 <탕서(湯誓)>를 짓도록 했다.
이때 걸왕은 예전 자리(탕)를 불러 하대(夏臺)라는 감옥에 가두기도 했으나 얼마 뒤에 풀어준 일화를 거론하며, “내가 하대에서 탕을 죽이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다.”라고 자책하며 죽었다고 한다. 물론 폭정을 계속 했으면 탕을 죽였더라도 제2, 제3의 탕이 나왔겠지만..
하나라의 법령을 폐지한 탕은 박(亳)으로 돌아와 제후국의 군주들에게 선포하였다.
"그대들이 무도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내가 그대들을 크게 징벌할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서경》의 <중훼지고>(仲虺之誥) 편에 의하면, 걸을 정벌하고 천하를 도모한 이후 탕은 요순시대처럼 선양하지 못하고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한 점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자 본래 걸의 중신이었으나 상나라에 귀순한 재상 중훼(仲虺)가 탕에게
"하나라는 덕을 잃어 백성들이 진흙탕과 타오르는 숯불에 빠졌습니다."(有夏昏德 民墜塗炭)
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궁핍한 실정을 비판할 때 나오는 '도탄(도탄지고)' 혹은 '도탄에 빠지다'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3. 실체?
현재 전해지는 주요 역사서의 내용과 달리, 1차 사료라 할 수 있는 (상나라 후기의) 갑골문에 따르면 탕왕이 하나라의 걸왕이나 그에 해당할 만한 강력한 세력을 무너뜨리고 상나라를 건국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5]갑골문에서 탕왕은 그저 중흥의 군주로 묘사되며, 상나라는 삼황오제의 제곡 고신씨로부터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설도 있다. 어쨌든 탕왕 자체는 갑골문에도 나오는만큼 실존 인물이라고 할만한 근거가 충분하지만, 주요 역사서에 전해 내려온 행적과 실제 행적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주나라의 건국신화와 상나라 탕왕의 건국신화 내용이 유사한 것을 감안했을 때, 상나라 멸망 이후 상나라 역사가 실전되고, 신화적인 국가인 하나라를 역사의 영역에 집어넣으면서 주나라의 건국신화를 차용한 것 아니냐고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4. 여담
한번은 탕이 교외에 나갔다가 사방에 그물을 쳐놓고 신에게, “천하 사방의 모든 것이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라고 기원하는 사람을 만났다. 탕왕은 그 장면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그물을 펴 놓으면 숲 속의 짐승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잡히고 말 것이니 너무도 잔혹하다.” 그리고 그물을 거두고 이렇게 기원하게 했다. “가고자 하는 대로 가되, 하늘의 법도를 어기고 자기 스스로 그물에 걸리는 놈만 잡히게 하소서.” 이 이야기를 들은 제후들은 “탕의 덕망이 금수에까지 미치는구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 일은 여러 제후국에 전해져 40여 개의 제후국이 탕에 승복했다고 한다.봉신연의의 태을진인이 이 탕왕과 태을구고천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 혹은 고조(高祖).[2] 혹은 무왕(武王).[3] 이 말은 걸왕이 "내가 천하를 다스림은 저 하늘에 해가 떠 있는 것과 같으니, 저 해가 끝날 때라야 내 다스림도 끝날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기인한다.[4] 爾無不信 朕不食言. 식언(食言)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유래했다.[5] 이에 대해 반대 측에선 갑골복사는 주로 신령에게 제사 지내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신경 쓴 기록이기 때문에 왕조 변천사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거나 이미 없어진 갑골문에 있었을지 모른다고 보기도 한다.[6] 사실 고고학적으론 상 초기엔 인신공양 풍습이 아직 발견되지 않거나 두드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상나라의 인신공양 풍습은 약 100년 이후부터 본격 성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