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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1:09:59

고고학자

1. 개요2. 상세3. 고고학자의 현실
3.1. 인문학계의 3D 직업?3.2. 진로3.3. 유물 복원3.4. 발굴 전문 인부
4. 고고학의 발생에 도움을 준 사람들5. 유명 고고학자 일람
5.1. 국내5.2. 해외
6. 창작물 속의 고고학자
6.1. 고고학자 캐릭터6.2. 마비노기타이틀6.3. 주인공 아버지의 인기 직업

1. 개요

考古學者[1]
Archaeologist

유물과 유구 및 각종 물질 자료를 대상으로 과거를 복원하는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 역사학 같은 인문 계열 지식은 물론 고생물학물리학(연대측정을 위해)처럼 자연과학 계열의 지식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2] 때문에 서구의 발굴에는 과학자들이 팀에 가담하는 경우가 흔하다. 아니 아예 미국 및 유럽에서는 고고학자도 과학자로 취급 받는다.

2. 상세

특성상 어디 산골에 가서 땅을 파는 일이 많으나, 고고학에서 '필드'라는 분야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보고서가 발간되지만 직접 발굴을 한 사람과 보고서만 본 사람의 관점은 차이가 있을수 밖에 없다. 도면이 제시되지만 도면과 실제 유물, 사진은 또 다르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에게는 '필드'가 중요하며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한 사람이 알기에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주제별, 지역별로 학문이 나뉘며, 통계 같은 문과생들에겐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수학 계산법이나 측량도구 조작법 등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고고학 분야 중에 형질인류학이나 고인골학 같은 경우는 아예 의대에서 해부학 과정을 수료해야 배울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의대 나와서 고고학자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때문에 한국에는 제대로 된 고인골학자는 없다. 몇몇 연구자가 일본에 유학 가서 방법을 배워와 어느 정도 흉내만 내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교수로 임용된다 또한 성서고고학 같이 종교적 신념이 작동하는 특수한 분야도 있다.

이렇게 광범위한 주제와 계열에도 불구하고 늘 일반인의 인식은 가장 양호한게 역사학자, 심해지기 시작하면 인디아나 존스 아니면 고생물학자[3], 탐험가, 모험가, 인사동 고미술품 감정사 취급이다. 여기서 진짜 심해지면 성가신 인간, 공식 도굴꾼의 인식이 박히기도 한다(...). 실제로 일본을 포함한 서구 고고학의 발달 초기에는 식민지나 약소국의 문화재, 유물, 화석 등을 강탈하듯이 가져온 사례가 부지기수라 이 경우는 정말로 공식 도굴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그런 후다닥 뛰어다니는 모험보다 훨씬 천천히, 세밀하게 진행한다고 보면 된다. 어쨌든 돈 좀 있는 제국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이상한 쪽으로 촉이 발동해서 너도나도 답사 다니고 여행 다니고 골동품 사 모으고 블로그질 하며 고고학자를 사칭하므로, 좆문가들이 가장 많은 분야이기도 하다.

한편 고고학자들에 의해 유물이 일단 발견되기만 하면 거기가 어디든 그 주변의 개발 특히 건설사업이 올스톱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를 비유하자면 '도시 한복판에 갑자기 그린벨트가 발생하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들에겐 전혀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정부차원의 지역 매입, 보상이 빠르게 이루어지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당사자 입장에선 속 터질 노릇이다. 규모에 따라서 수백, 수천억, 심지어 조 단위의 예산이 필요한 경우가 발생한다. 대표 사례가 풍납토성인데 '땅값 보상'만 수조원이 들 전망. 아무리 역사가 중요하다지만 군사, 경제, 보건, 교육, 과학 등의 급박하고 현실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보다 우선순위가 높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에 예산 경쟁에서 밀린다.

한국에서 역사학계와 고고학계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은 편. 특히 고대사에서 충돌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역사책 삼국사기에선 신라백제가 기원전 몇십년에 건국해 1~2세기부터 주변 작은 나라를 정복한다고 나오지만 고고학적으로는 3~4세기까진 경주 같은 도시 단위의 작은 정치체였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주변 정복을 한다고 해석되는 식이다. 그러니 사학과 학생이 졸업해서 땅 파먹고 산다고 생각하지는 말기를. 하지만 사이의 좋고 나쁨과는 별개로 학문 차원에서 서로 영향을 많이 받으며 또 그래야 한다.

완전히 남남은 아니고 어느 정도는 관련성이 있는 분야다보니 고고학과가 학부에 없는 학교는 사학과에서 인원을 충당해서 석박사학위를 주기도 한다. 또한 사학과를 졸업한 후 고고학 관련 업종으로 취업하는 경우도 많은 편인데, 이는 취직할 데가 정말 마땅찮은 사학계에 비해 그나마 고고학 전공자들이 일하는 '매장문화재 조사기관'들이 워낙 노동집약적 분야다보니(...) 어느정도 고용창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사 또는 미술사 등의 연계된 전공자들 또한 고고학 라인으로 취업하는 경우가 적지않게 보인다.

사족으로 영국의 유명한 추리소설가 애거서 크리스티는 첫 남편과 이혼 후 14세 연하였던 고고학자 맥스 맬로원과 재혼했는데 이때 재혼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고고학자는 여성에게는 최고의 남편감이에요. 여자가 늙으면 늙을수록 남편이 더욱 흥미를 가질테니까요"(...).

3. 고고학자의 현실

3.1. 인문학계의 3D 직업?

고고학은 어쩌면 인문학의 공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인문계에서는 전공을 살려 취직하기가 대단히 쉬운 편이다. 역사학, 미술사학 등의 인접학문과 다르게 박물관, 지자체 큐레이터 외에도 고고학에는 전국의 200개가 넘는 발굴기관과 문화재청 산하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을 전문으로 하고 있고 물론 박물관과 큐레이터가 공장이나 회사처럼 많지는 않다, 이외에 일부 국립, 시립 또는 대학 박물관에서도 문화재 발굴을 하기 때문이다. 문화재 발굴은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일정 규모의 건설, 토목 공사에는 반드시 수반되는 작업이므로 발굴에 필요한 조건, 전문인력의 수준과 인원 수 제한 등이 엄격히 정해져있다. 이 때문에 전공을 살려 취직하는 것은 굉장히 수월한 편에 속하며 실제로 많은 문화재조사기관, 심지어 국가유산청 산하의 국립문화유산연구소들도 구인난에 시달릴 정도다.

그러나 이 일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필드고고학이며, 학예사 등의 일자리는 다른 인접학문과 마찬가지로 그 전체 파이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다. 때문에 많은 고고학도들은 중앙박물관 학예사를 가장 선호하며 그 다음으로는 지자체 학예사와 문화재청 학예사를 선호한다[4], 정작 인력이 많이 필요한 문화재조사기관은 상대적으로 학예사에 비해 처우도 좋지 않고 당연히 중노동+전국을 떠돌아야 하기 때문에 선호되지 않는다. 이 덕분에 많은 문화재조사기관들이 조사인력을 채우지 못해 보고서 작성해야할 인력을 돌려막기하거나 비전공자들을 채용해 수급하기도 한다. 당연히 기존 인력의 처우는 안좋아지는 것은 덤이고 이는 또 기존 조사인력의 탈주(...)를 불러와 다시 돌려막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고고학의 꽃은 유적 발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고고학 발굴은 선호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고고학 발굴 작업은 대단한 중노동으로 3D 업종 수준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발굴법은 발굴할 땅을 바둑판처럼 다 나눠서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파내는 것.[5] 당연히 유물이 훼손되면 안 되기 때문에, 판다고 같은 걸로 푹푹 파는 게 아니라 끌 같은 것으로 살살 긁어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호미를 사용한다. 티스푼 공사 유적의 흙은 그 자체로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땅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층위가 잘 드러나도록 파야지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망한다. 뭔가 정교한 유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끌도 호미도 아니라 을 써야 한다.

파낸 흙 자체도 버리는 것 없이 몽땅 마대자루에 담아다가 뭔가 들어있나 다 뒤져야 한다. 야외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흙을 체로 치는 경험이란.. 개활지 발굴은 말할 것도 없고 동굴 발굴을 한번 해도 흙더미 마대자루가 수십개가 나올 정도. 이걸 보고 그냥 땅 파는 노동자로 오해한 지나가던 어머님이 데리고 가던 아이에게 공부 열심히 해야 커서 저런 일 안 한다고 하면서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지나갔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데 이 일화의 주인공이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 여학생이라고 한다.[6] 심지어 문화재 기관에서 재직중인 대부분의 조사원들은 석사물은 먹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물론 논문을 쓰는 비율이 생각만큼 많지 않기에 대학원에 기부한 대졸인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대학원 나와서 위와 같은 소리를 들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물론 대부분의 중노동은 현장에서 흔히 '어르신'이라고 불리는 발굴 인부들이 한다. 특히 인부들 중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발굴 과정에서의 그러나 인부들에게 일을 시키려면 조사원도 이러한 단순작업을 할 줄 알아야하며, 중요한 유구나 유물의 조사시에는 조사원이 직접 수행한다.

유적은 발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각종 도면과 사진을 남겨야하고 그를 토대로 보고서도 작성해야 한다. 또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을 하나씩 사진찍고 mm단위로 실측하여 도면을 만들고 문양을 탁본으로 찍어서 남겨야 한다.[7] 보고서는 발굴로 2년 내 발행이 원칙이라 현재 새로운 발굴을 하면서 2년전 발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이럴 경우 낮에 하루종일 일하고 밤에는 보고서 작성을 하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야외에서 하는 일이다보니 , , 폭염, 태풍 등 오만가지 요소에 몸도 시달리고, 파낸 구역도 이런 것에 훼손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

원칙은 저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돈과 인력의 문제로 원칙대로 다 못하고 대충 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발굴조사기간이 크고 아름답게 줄어들었다.[8]

그리고 금관 같이 번쩍거리거나, 유명하고 관심가는 물품만을 발굴하는 게 아니라서 대개의 경우 발굴품은 산산조각난 토기 쪼가리 같은 사소한 일상용품이나 먹다 버린 뼈다귀 등등이 출토된다. 한번 발굴을 하면서 수만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되지만, 대부분은 그저 창고 신세. 박물관의 수장고에는 전시하는 유물의 수십 배에 달하는 잡다한 유물이 쌓여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인 과거의 총체적 복원이라는 점에서 사소한 일상용품이나 먹다버린 뼈다귀가 때로는 황금 왕관이나 청동 검, 뽀대나는 철제 갑옷보다도 더 중요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문헌사적으로 이미 알려진 것에 대한 증거로서 나오는 금은보화보다는 왕후장상의 일이 아니기에 문헌에 실리지 않은 즉, 고고학적 증거 없이는 티끌만큼도 알 수 없는 생활상에 대한 증거로서 나오는 사소한 일상용품이나 먹다버린 뼈다귀가 학술적인 가치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신석기 시대 논문 찾아보면 주로 나오는 것이 발굴할 때 층위도 골때리게 뒤죽박죽이어서 짜증나는 패총관련 논문이다. 패총은 순수 한국어로 조개무지라 해석되지만 실제 그 용도는 쓰레기장... 사실 쓰레기장만큼 과거 문화사 복원에 좋은 곳은 없다.[9]

관심이 없으면 예산도 없고, 예산이 없으면 발굴탐사를 못가고, 그러면 관심이 없어지곤 한다. 오죽하면 일본의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관심을 받고 싶어 출토유물을 조작하기까지 했을까…

이는 고고학자의 비애이다. 실제로 큰 돈이 걸린 민감한 재개발 구역이나 4대 강같은 대기업 회장 또는 대통령, 국회의원이 밀어주는 사업 구역에서 국가사적급의 중대한 유적과 함께 국보급 유물이 나올 경우 발굴 작업 중에도 상시 중단이나 철수의 대비를 해야한다. 실제 사례로는 서울시 경계 안쪽이면서 한강의 남쪽인 노른자위 땅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백제 왕성인 풍납토성 발굴이 있다.[10]

그나마 일반인에게 관심가는 유물은(도자기나, 장신구 계통) 무덤을 발굴할때 주로 출토되며, 미도굴분(=처녀분, 과거부터 이어지던 관행적 호칭으로 지금도 이런 성차별적 표현이 남아있다.)을 학술발굴(구제발굴은 시간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괴율이 커지고, 보존율이 낮아진다.) 할 경우 의외로 멀쩡한 고대 유물이 잔뜩 나오기도 한다. 다만 이쪽은 한 발 앞서 다녀간 도굴꾼의 자취를 보며 좌절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어지간한 규모의 무덤은 묻힐 때부터 도굴꾼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다, 비싼 부장품이 있을 확률도 높기 때문이다. 이집트에는 수십대를 이어온 도굴꾼 마을이 있기도 할 정도다. 이집트의 도굴꾼 같은 경우에는 무덤을 하나 발견하면 후손을 위한 예금 정도로 생각하고 안 건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1] 이는 국내도 마찬가지라서 백제 무령왕무령왕릉 덕분에 인지도가 높다.

3.2. 진로

철학과, 역사학과 등과 더불어서 먹고 살기 힘든 순수 학문의 비애를 보여준다.# 이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인맥이 정말 필요하다.[12] 애초에 교수 정원도 넉넉하지 않거니와, 시간강사, 조교에서 교수까지 가려면 그야말로 인고의 세월.

직업 진로로는 한국에서는 교수 외에도 크게 매장 문화재 발굴 전문기관에서 일하거나, 박물관이나 각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재 담당 학예사가 되는 방법이 있다. 매장문화재발굴전문기관쪽은 이명박 정권 이후로 위축상태에 있고, 문화재 담당 학예사는 미대 친구들까지 경쟁대열에 일부 끼어들어 경쟁이 엄청나서 힘들다고 한다. 학예분야 직종은 기본적으로 자격요건이 석사이상이나 일부 지역에선 관련분야 학사 이상부터 채용하기도 한다. 지방자치단체의 학예연구사는 정규직 연구사 채용이 많지 않지만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계약직으로 뽑는 경우가 많다. 계약직의 경우 7급에서 8급수준의 대우를 받는다. 학예연구사의 직급은 6급 상당이나 소수직렬이다 보니 진급이 힘들다.[13] 채용은 시험으로 뽑는 정규직 공무원이나 면접을 통해 뽑는 임기제 공무원으로 채용되지만 채용이 매우 드문 편이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박물관 사업소가 아닌 본청에서 근무하는 학예연구직은 1~2명 정도로 자리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채용공고가 뜨면 엄청난 경쟁률에 학을 땔 정도(...) 업무는 도청이나 시청에서 근무하는 학예연구사라면 연구보단 매장문화재 및 발굴과 관련된 행정적 업무를 주로한다. 공립박물관의 학예연구사는 전시와 연구활동을 하게 되지만 연구활동은 극히 미미한 수준으로 주로 전시실 관리, 특별전시 기획, 기타 프로그램 기획 등의 업무를 한다. 국립박물관의 학예연구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괄적으로 시험을 보게되며 시험 합격 후 중앙박물관이나 지방의 국립박물관으로 배치된다. 국립박물관에서는 자체적으로 학예연구원을 채용한다. 학예연구원은 학예직에서도 제일 아랫 직급으로 기간제 근로자로 채용된다. 계약기간은 대체적으로 1년 안쪽으로 학예연구원도 이쪽 분야에서는 서로 못들어가서 안달이다. 그만큼 학예직의 길은 매우 좁고, 경력을 중요시하기때문에 박물관 학예직을 꿈꾼다면 엄청난 노력과 인고의 시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사립 박물관의 학예사는 대우가 매우 열악하다. 특히 사립 박물관은 관장의 막강한 권한으로 파리목숨이나 다름없다. 또한, 공부한 기간에 비해 급여수준이 매우 열악하다. 2016년 기준 준학예사 급여는 158만원 수준이다.

각 진로의 차이점은, 1. 매장문화재발굴전문기관에 가면 현장에서 직접 뛰는 고고학자가 될 수 있다. 2. 지방자치단체 학예사가 되면 지역의 현장을 직접 파보지는 못하지만, 인허가 서류를 취급하기 때문에 지역내 발굴현장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습득할 수 있고, 현장견학도 쉽다. 3. 박물관 학예사가 되면 1과 같이 현장에서 직접 뛰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국립박물관이나 대학박물관에서 가능하다. 또는 수집된 유물을 정리하고 연구할 수 있다. 연구된 유물을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거나 기타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경우도 있다. 4. 대학에서 교수가 되면 박물관이 있는 학교라면 1과 비슷한 고고학자가 될 수 있고, 운이 없어 학교에 박물관이 없다면 현장 견학을 다니면서 연구하는 2와 비슷한 고고학자가 될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인디아나 존스가 한창 인기가 있던 시절에는 고고학자가 꿈인 사람들이 꽤 있었다. 지금도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과 픽션의 차이는 넘사벽임을 잊지말자. 애초에 인디아나 존스가 하는 짓은 고고학이 아니라 도굴이다. 유적에서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벗어난 유물은 심하게 말해 골동품 이상의 의미가 없다. 골동품 취급이라도 받으면 다행.

3.3. 유물 복원

또한 유물 복원(ex:도자기 파편 맞추기)도 직접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는 따로 과가 나뉘며, 말만 고고학과지 배우는 것은 이과 계통이다. 한국에도 문화재보존과학과가 있는데,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보존과학과, 공주대학교의 문화재보존과학과, 한서대학교의 문화재보존학과, 용인대학교의 문화재학과, 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등이 존재한다.

유물 복원의 경우 얼마나 압박적인지 고고학이라는 이름에 보험회사에서 단순 문과계열 보험금을 책정했다가 현장을 보고 나자빠진 사례도 있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도자기의 경우, 복원 현장의 습도부터 시작해서 각종 환경에 민감하기 때문에 세세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고고학도들이 생각하기에는 학술적인 유물을 더 이렇게 잘 보존하고 싶어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비싸고 뽀대나는 유물이 더 우선이 된다.

이게 정확히 무슨 짓인지 간단하게나마 체험해 보고 싶은 용자는 다음의 과정을 따라해 보기 바란다.토기편(토기조각)은 발굴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종류이다. 다만 편을 붙여서 하나의 토기로 복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일례로 2002년 부여 궁남지 대형건물지 발굴시 발견된 토기편의 절반만 꺼내서 늘어놨더니 부여 문화재연구소의 큰 강당 바닥을 꽉 채우는 수준이었다. 이걸 하나하나 다 재질과 문양, 파단면을 비교해가면서 찾아 맞추는 즐거운 퍼즐을 해야 한다. 실제 사례로는 2명의 연구자가 그 파편들 중에 100cm정도 높이의 연질토기 하나를 한달 정도만에 다 찾아 조립하는데 성공했다.[14]

사실 토기는 그래도 양반이다. 단단한 도질토기[15]는 단면이 잘 남아서 붙이기가 생각보다 쉽고, 와질토기[16]나 연질토기[17]는 더하다. 복원의 알파요 오메가는 철기라고 할 수 있다. 조각들을 모아 붙이기도 하며 (상상이 안가겠지만 철기도 접착제로 붙인다.) 탈염처리 등으로 박물관에 전시할수 있는 그런 보존처리가 된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알고보면 굉장히 어려운 작업들이다.

3.4. 발굴 전문 인부

고고학 현장에서 고고학자와 함께 일하는 인부들 중에는 일반 현장에서는 볼 수 없는 굇수들이 많이 존재한다. 포크레인으로 현장을 cm단위로 파는 중장비기사라든가.[18] 물론 숙련된 학생들 가운데에서도 모종삽으로 수 시간내에 수십 평을 파내는 굇수가 있지만. 더구나 이런 중장비는 표층에서만 잠시 쓸 뿐이지[19], 나머지 작업은 인력으로 한다.

물론 일본측 학자들이 와서는 보고 기겁을 하는데, 일단 현장에서 중장비를 쓰는 자체에 기겁을 하고, 그 포크레인 기사분들이 토층선 칼같이 맞춰서 정리해놓는데 또 기겁을 한다. 여러모로 대단한 분들이시다. 그런데 사실 발굴에서 장비 사용은 일본이 원조이다. 80년대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선생님들이 90년대부터 한국 현장에 적용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인부들은 수십 년을 발굴 현장에서 일하신 분들이라 고고학에 관해서는 웬만한 전공자 이상으로 빠삭하시다.(지방국립 K대의 최교수의 말씀에 따르면 지금 다시 발굴하고 있는 석장리 현장도 손보기 교수가 발굴할 때의 인부들이 계속하고 있다.[20]) 다시 말해 발굴 전문 인부. 그러나 대부분의 인부 "어르신"들은 경력이 오래 된 경우도 거의 없을 뿐더러, 고령으로 인해 일반적인 용역회사에서 일을 할 수 없어 발굴 전문 인부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 물론 은퇴 이후 집에서 놀기는 그렇고 용돈벌이도 할 겸 일을 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건물 공사 도중 갑작스럽게 유적이 나오는 상황에 대비해서 이런 발굴 전문 인부들을 알선하는 용역업체도 따로 있다. 혹은 재학생이랑 휴학생들을 상대로 임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발굴 일이 3D에 속하는지라 이 분야에 일할 사람을 제외하곤 대학생들에게서 그렇게 인기 있는 아르바이트가 아니다. 매우 힘들고 고된 일로 2017년에는 발굴 도중 흙이 무너져 발굴 인부 2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4. 고고학의 발생에 도움을 준 사람들

5. 유명 고고학자 일람

5.1.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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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의미에서 볼 때 한국 최초의 고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빈(비엔나) 대학에서 일제강점기때 고고학 학위를 취득했다. 해방 이후 월남했다가 46년에 다시 월북해서 북한 고고학의 기반을 마련했다. 사실 이 인물 덕분에 북한 고고학은 60년대까지 발굴 건수와 학문적 업적에서 남한보다 훨씬 앞서갔다.[24]
그는 한반도 고고학에서 최초라 할 수 있는 업적은 대부분 차지해서 한반도 구석기 유적중 최초 발굴인 굴포리 유적을[25] 발굴하고,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존재를 확실히 확인한 나진 초도 유적을 발굴했으며, 한반도 최초의 농경 증거 유적인 지탑리도 발굴했다. 또 그가 1961년 저술한 한국 최초의 고고학 개설서인 조선원시고고학은 그 완성도가 탁월해서 김원용을 비롯한 동시대 남한 학자들의 저술을 능가한 것은 물론 남북 통틀어 당시 제대로 교육 받은 고고학 전문가가 없던 시절에 선구적인 업적으로 볼 수있다. 30년도 훨씬 더 지난 90년대까지도 남북한 통틀어 이보다 나은 개설서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60년대 문헌사학자들의 고조선 재만주설을 비판하고, 고고학 증거를 토대로 고조선 평양설을 주장하고 낙랑의 위치도 평양이라고 주장했으며 한반도 문화의 발전은 한흥수와 같은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혼자서 발전한게 아닌 타 문화의 영향과 전파를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에 맞게 발전시켰다는 전파론적인 입장을 내비치고 문화권설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 이론에 비교하여 반동이라고 낙인 찍는 행위를 교조주의라하면서 비판했다.[26] 하지만 김일성이 민족의 주체적 발전설을 지지하고, 그가 63년에 발굴한 최초의 구석기 유적인 굴포리의 발굴은 웃기게도 주체적 발전을 주장하는 자들의 입지를 강화시켰고(그러나 구석기 단계에서 이런 자체 발전을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억지다.) 이는 도유호의 입지를 점차 약화시켰다.
도유호와 입장을 같이 하던 학자들이 살기 위해 하나하나 뜻을 꺾어 연구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라는 입장을 취할때도 그는 학자로서의 양심을 지켰고, 그 대가로 도유호는 학계에서 점차 밀려나 60년대 중반 주체사상의 등장으로 소식이 끊어졌다. 궁금하게 여긴 남한인사들이 조총련계를 통해 알아본 결과 북부의 탄광으로 끌려갔다는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만 전해진다.[27] 북한에선 아무리 학자라 해도 정치의 영향을 벗어날수 없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
도유호가 아직 학계에 거두로 있을 때는 남한 고고학자들과의 연구 교류를 시도했었고 실제로 제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연구 덕분에 남한에서도 구석기-신석기-청동기 고고학 연구 발전에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만약 이 당시 서로 연구를 교류했으면 아마도 지금보다 남북한의 고고학 발전이 훨씬 더 발전했지 모르지만, 그가 숙청 당한 이후 작금의 북한 고고학은 이제 학술 교류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일본의 조총련계 학교를 통해 국내연구자들도 북한 고고학 논문을 구해볼 수 있는데 논문들은 그 성과도 보잘것 없지만 하나같이 서론에서 김일성, 김정일 교시를 언급하고 결론에서 교시한 내용이 맞았다며 찬양하는 이른바 김승전김형식을 띄고 있어 순수 학문으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상실했다.
남한학계에서는 60년대 중반 이후의 북한 고고학 자료는 불신하고 있으며, 고조선 연구에 대해서는 사실상 답보 상태에 놓여져 있다.[28]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 옥저, 동예 등의 고대국가들의 강역이 지금의 만주와 북한 일대였던 데다 고려의 수도 역시 지금의 개성시에 위치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북한의 고고학 연구가 지금과 같은 수준이라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기타 나무위키에 개별 문서가 있는 한국 고고학자들

5.2. 해외

독일의 고고학자.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직업으로서의 전문 고고학자는 아니고 그 때 무슨 고고학자가 있었다고 그래? 아마추어였으며 본업은 사업가다.

* 크리스티안 톰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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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코펜하겐 박물관 학예사로 1836년 당시 전시 유물을 흔히 우리가 쓰는 석기-청동기-철기와 같은 3시기 구분법에 따라 구분하고 이를 정립한 학자다. 이러한 구분은 고고학이 '학'이라는 칭호, 즉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 이유는 이전까지 과거 인류의 문화 발전을 기록이 아닌 유물만으로 설명한 최초의 시도였기 때문이다.[30] 이후 3시기법은 J.러벅에 의하여 석기시대가 구석기-신석기 시대로 구분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구분이 전세계에 적용하기 힘들고 그 기준이 달라 이 구분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이 많다. 일단 먼 예로 아메리카 원주민을 들 수 있으며 가까운 예로 일본은 구석기-조몬-야요이 시대-고분 시대라는 선사시대 구분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한국은 3시기법을 도입하여 쓰고 있지만 사실 한국의 청동기는 유럽-서아시아, 아니 중국의 청동기 시대와 비교해도 청동기시대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청동기가 거의 없다. 반면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순동기시대라는 구분법이 따로 있을 정도로 동(銅)을 특징적으로 이용한 시대가 길었다.

그래서 최근 과거 한국에 유학했던 한 일본 학자의 편년안을 최근 들어 다시 받아들여서 구석기-즐문토기(신석기)-무문토기(청동기)시대로 부르자는 의견이 많으며 실제 청동기시대의 경우 무문토기시대라는 명칭이 최소한 고고학계 내에서는 일반화되고 있다.
파일:Oscar Montelius.jpg
스웨덴의 학자로 형식학의 창시자다. 형식학은 고고학 편년체계의 하나로, 이 방법의 탄생은 기존 역법 이외에는 편년 산출이 불가능했던 고고학의 편년산출 방식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31]

형식학진화론에 입각하여 같은 지역의 유물의 변화는 특히 서서히 변하는 것은 시기차를 반영한다고 보았다.[32] 즉 유물, 유적과 같은 고고학 자료도 서서히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이의 순서를 나열해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 정한다.

이러한 방법은 이후 플린더즈 페트리의 연속순서배열법과 W.S. 로빈슨과 G.W. 브레이너드에 의해 빈도순서배열법이 등장하며 더욱더 정교해졌다.
독일의 고고학자로 거주지 고고학의 창시자이자 훗날 고고학 문화 변화에 전파와 이주를 중시한 고든 차일드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학자, 다만 고든 차일드와 달리 이 사람은 진성 인종주의자였으며 훗날 나치의 폴란드 침공의 명분을 제공해주는 사람 중 하나다.
파일:Vere Gordon Childe.jpg
호주 출신으로 영국에서 수학한, 전통고고학(또는 문화사고고학)의 최고 권위자다. 고고학의 문화에 대해 정의하였고, 우리가 흔히 국사와 세계사 고대파트에서 중요하게 배우는 이주와 전파에 의한 문화 변화는 이분에 의해서 나온 것이다. 즉 고고학의 문화를 정의했으며 이 문화의 변화에 이주와 전파를 중요시하게 설명한 분이시라고 하겠다.(물론 말년에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지만)

젊었을 적에는 전파론에 의거해 문화적 변동을 설명하였고 사회진화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으나 1935년 소련방문을 전후로 하여 유물론적 원칙으로 설명하려는 소련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감명받아 소련고고학이 가진 장점을 수용하여 새로운 해석의 틀을 고안했다. 이후 마르크스 이론에 보다 충실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사회진화에도 관심을 가져 『인류가 만든 역사』등을 집필했다. 2~30년대는 당시 시대분위기 때문에 인종차별적 시각도 있었는데, 나중에 이에 대해 반성하고 이를 비판했었다.

말년에 들어서는 위에서 말한대로 자신의 젊었을 적 주장을 비판했는데, 이 때 당시 주장은 훗날 자신을 비판하며 등장하는 과정주의 고고학과 또 과정주의 고고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후기 과정주의 고고학과 비슷했다고 한다.
파일:François Bordes.png
프랑스의 고고학자로 구석기 고고학의 최고 천재로 불렸던 사람이다. 석기 분류 및 제작방법의 복원에 대해서 선구자이며, 특히 클라크의 분류법과 석기 분류에 있어서 많이들 참고하는게 보르도의 분류법이다. 다만 석기 실측은 그리 뛰어나지 못해서(뭐 그나마 이 사람에게 시비 튼 루이스 빈포드는 아예 석기실측을 못했다) 당시 프랑스 유명 만화가 피에르가 대신 실측하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이 피에르의 석기 실측 및 트레이싱은 뗀석기 실측의 모범이 되었다.
파일:Lewis R. Binford.jpg
(인상 좋게 보이지만이 면상이 좋다고? 상당히 호전적이고 논쟁을 좋아했다고 한다.)

과정주의 고고학의 사실상의 창시자로 당시는 신고고학이라 불렸다. 과학과 같은 연역적 방식의 고고학 연구를 시도하는 과정주의 고고학은 진짜 과학연구처럼 가설 설정과 이를 통한 통계적 분석을 중요시했으며, 인류학으로서의 고고학을 천명했다.

과정주의 고고학은 인간의 행위에는 패턴이 있으며 이러한 패턴은 과학의 법칙과 같다고 생각하고 이를 밝혀내려고 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고고학 자료만으로는 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는 추가적으로 이를 증명할 방법론으로 중간범위이론을 창시하고 그와 관련되어 민족지고고학을 만들었으며 실제로 누나미웃 이누이트인(에스키모)들을 민족지로 관찰했다.(이외에 실험고고학도 이때 생겨났다)

파일:attachment/고고학자/2.jpg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상징하는 그림)
이를 바탕으로 그는 다른 민족지학자가 조사한 사막의 !Kung San[33]인들 자료를 통해 수렵-채집민의 이동 양상을 다양하게 정리했으며 당시 이들의 생계 전략을 Collecter와 Forager로 분류하였다.(각각 해석이 전자는 병참적 이동전략이고 하나는 주거지 이동전략으로 해석되었었다.)[34] 물론 수렵-채집민의 이동전략은 이보다 더 다양할 것으로 보았고 이 두 전략은 그중 일부일 뿐이다.

파일:attachment/고고학자/3.gif
(네안데르탈인과 관련된 무스떼리앙 문화의 르발루아 공작)

그의 논문은 읽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하는데 그는 통찰을 통해 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이에 다른 사람들이 그의 논문을 정리해서 다시 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논쟁을 상당히 좋아해서 다른 고고학자와 많이 싸웠다. 하지만 무스테리안 논쟁에서 구석기 잘 모르면서 보르도의 무스테리안 문화를 까다가 프랑스의 천재 구석기 고고학자 보르도에게 역으로 털렸다. 그리고 이 논쟁에서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누나미웃 에스키모 관찰하러 알래스카로 고고싱했다.

참고로 이 당시 민족지고고학 관찰후 쓴 논문의 제목은 Willow smoke and dogs’ tail 즉 버드나무 연기 그리고 개의 꼬리라는 상당히 희한한 논문명을 올렸는데, 그 이유가 당시 자신이 관찰하던 마을의 어느 에스키모인에게 "네 인생은 뭐냐"라고 빈포드가 물으니 당시 에스키모인은 "음...아마도 버드나무 연기하고 개의 꼬리겠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버드나무는 알래스카 일대에 주로 서식하는 관목으로 일상생활에 매우 많이 쓰이며, 개의 꼬리의 경우는 그들이 개 썰매를 이용하면서 자주 개의 꼬리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위에서 설명한 수렵-채집민들의 생계 전략에 대한 빈포드의 분류가 잘 나와있고 지금도 선사시대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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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더의 페이스 북에 올려진 사진)

탈과정주의 고고학(또는 후기과정주의 고고학)의 창시중 하나 기존의 과정주의 고고학을 비판하면서 생겨났으며 소위 과학적인 고고학 연구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일단 호더마저도 초기에는 과정주의 고고학자였기 때문인데, 그는 과정주의 고고학자들처럼 통계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일반화를 시켜본 결과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하나의 결과에 여러 가지 원인을 대입하여 계산을 했을 때 같은 결과가 나오는 equifinality(이인동과성異因同果性 또는 등결과성)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보통 다량의 화재주거지는 전쟁의 결과로 해석되고 이를 통해 갈등이 심화되는 사회라는 해석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인동과성의 원리에 따르면 실제 이런 다량의 화재주거지는 전염병에 의해 태워버린 걸수도 있고 또 실화에 의한 화재의 확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다량의 화재주거지라는 결과에는 전쟁 이외에도 전염병, 실화 등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과연 인간의 행위라는 것을 과정주의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패턴화시킬 수 있냐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가졌다. 즉 위에서 처럼 고고학 자료를 하나의 패턴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도 있지만 실제 인간이 그런 패턴되로 움직이냐도 회의적인 것이다. 그래서 호더는 일반화에 의한 과거 자료의 해석에 상당히 회의감을 가지고 또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과정주의 고고학을 비판하면서 탄생한 것이 탈과정주의 고고학이다.

하지만 탈과정주의는 다양한 이론적 사조의 집합이기에 딱히 한가지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굳이 특징을 살펴보면 다양한 담론에 대해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면이 강하다. 즉 고고학 연구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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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에서의 과학에 대한 여러 접근법)

참고로 과정주의 고고학과 후기과정주의 고고학을 이해하려면 엄청난 과학철학 이론과 다양한 사상적 연구를 참고해야 하는데 이유는 고고학부터가 탄생 과정이 상당히 잡탕스러울 정도로 타 학문의 이론적 사조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아니 탄생부터가 자연과학 분야인 층서학과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고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요소를 마구 흡수했으니...

그래서 고고학사를 보면 과정주의 고고학을 탈과정주의 고고학자들이 비판할 때 과학철학 이론인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과 (패러다임이라는 용어 제창)과 페이어아벤트의 사회구성주의 이론이 나오며(과학은 사회 시스템과 연관되어 있다는 이론), 이외에 체계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과 프로이트의 심리학, 언어학의 구조주의(언어학의 아버지 소쉬르가 제창한), 마르크스주의 등 별별 학문의 선을 넘어가면서 그 영향을 받고 이를 통해 비판하고 또 연구하기 때문에 고고학은 종합과학이자 무진장 어려운 학문 중 하나로 꼽히며 위에 이안 호더와 같은 탈과정주의 고고학자들의 담론의 활성화라는 것도 말이 쉽지 왜 저런 주장을 했는지 이론적 기반을 살펴보면 토 나올 정도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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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고학의 선구자 중 하나로 원래는 도쿄제국대학(現 도쿄대) 건축학과 교수다. 사실 이 사람은 일제 감정기의 한반도에 들어와 낙랑 전실묘와 낙랑 목곽묘(특히 채협총), 그리고 고구려의 석실묘(특히 벽화묘)발굴로 유명해졌는데, 이 사람이 일본 고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건축학 교수로서의 능력과 그리고 동경대의 인맥을 이용하여서 자신의 건축학과 제자들과 동경대 미술과 교수들을 초빙해서, 뛰어난 고분 실측과 유물 실측을 보여주었고, 이는 발굴 보고서와 논문에 우수한 실측도가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고구려의 고분을 연구한 이유는 고대 일본의 건축을 알려면 일본이 문화를 받아들인 한반도의 건축 문화를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적과 유물의 보존을 위해 전시기법 중에서 모사도를 전시하는 방법을 도입하여 유물을 직접 전시하지 않고 관람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도 제시했다.

(세키노의 조수가 그린 실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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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노가 꼬셔서 온 미술대학 교수가 그린 낙랑 철검 실측도)

재밌는 것은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뛰어난 고고학자가 별로 없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 유적에 대한 보호에도 관심이 적었는데, 오히려 조선 내에는 뛰어난 일본 고고학자들이 대다수 머물러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세키노를 중심으로 한반도 내의 고구려, 낙랑 유적의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상황이었다.(본격 일본인이 자국 유적 버리는 상황)[35]

하지만 이러한 연구에는 식민사관 중 하나인 타율성론이 바탕으로 되어 있어 그가 1932년에 출판한 조선미술사에서는 고구려 벽화를 아시아 최고의 예술품이라며 극찬하지만(그나마 처음 조사할 당시에는 좀 폄하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럼에도 꼭 고구려 벽화를 육조문화의 영향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할 수야 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다만 변명을 하자면 이 사람은 다른 관학자들에 비해 그나마 조선문화를 폄하하는 정도도 옅었고 훗날 한국 학자들도 하나의 자료로서 참고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측도를 남기고 이후 한국, 일본 고고학의 실측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는 면에서 마냥 비판만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고고학, 건축학사, 미술사 등을 배우면 이 사람에 대해 꼭 언급하게 된다.
스웨덴의 국왕. 평생 동안 고고학을 좋아하였고 특히 고대 이탈리아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의 권유로 경주 서봉총의 발굴 작업에도 참가한 적 있다.
주한미군 출신으로 연천 전곡리 유적의 주먹도끼를 발굴하여 한국 선사시대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공룡 화석 발굴 등 고생물학자로 유명하지만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6. 창작물 속의 고고학자

어째 도굴꾼들이 섞여있다.
창작물의 고고학자는 무시무시한 피지컬을 지닌 전투종족이다. 전 세계의 오지를 돌아다니면서 고대 왕국의 유물을 찾아낸다는 이미지 때문인 듯. 이과의 전투종족이 물리학자공돌이라면 문과에는 고고학자가 있는 것이다. 다들 인지력이 10이거나, 매의 눈과 완전기억능력은 패시브로 가지고있는지 유물을 한번 딱 훑어보면 "세상에! 이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어느 인간이 어떻게 쓰던 유물이잖아?" 하고 주르륵 나열하는 것도 특징.

이는 인디아나 존스를 포함한 고전 모험물들의 영향이 크지만, 실제로는 현실과 200년 정도 떨어져 있다. 제국주의 시대 돈 있는 젠트리들이 일꾼만 풀로 돌린 시절이 있긴 했지만 요즘은 학자들도 일일이 몸으로 삽질해야 한다. 인디아나 존스는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낚여 고고학과로 온 수많은 학생들은...

거기다 발굴은 실제로 돈이 참 많이 든다. 마스터 키튼을 본 사람들이면 조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폰서가 없이는 힘들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고고학자 카터도 카나본 경의 지원을 받고서야 발굴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발굴이 투탕카멘의 무덤처럼 희귀한 부장품들이 쏟아지는 게 아닌 것이 문제. 이와 비슷한 예로 마스터 키튼 작품 자체의 에피소드처럼 현재 거기 살고 있는 현지인이 중시하는 유적과 스폰서가 중시하는 유적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충돌이 현실에서도 종종 있다.

남들이 보면 참 이상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옛날 모 학습만화에서는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타서 눌은 흙[37]을 발견하고 슐리만이 마구 날뛰면서 좋아하자 인부들이 '흙이 타서 눌은 게 그렇게 좋은가?', '부자들의 생각은 알 수가 없어' 라고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6.1. 고고학자 캐릭터

6.2. 마비노기타이틀

L 로드로 유물과 유적을 100개 찾으면 얻는다. 최대 생명력, 마나, 스태미나를 20씩 깎는 대신 모든 능력치를 +10 시켜준다.

6.3. 주인공 아버지의 인기 직업

주인공 아버지의 인기 직업이다. 특히 미연시 주인공일 경우에는 높은 확률로 아버지가 고고학자이다. 멀리 나가서 일하는 직업 특성상, 자유방임주의 아버지일 경우가 많고[57], 어머니는 고생이 심해서 일찍 돌아가셔서 안 계실 경우가 많다. 밥은 잘 못 챙겨먹지만 상관없다. 소꿉친구가 있으니까 때문에 아들은 자유롭고 상대적으로 구속이 덜한 청소년으로 설정된다. 집안에 아무도 없으니 여자도 마음대로 들일 수 있고

반면, 나는 친구가 적다 같은 라노베에서는 고고학자를 아버지로 둔 주인공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데, 오히려 이쪽이 현실에 가깝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고고학자이며,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고등학생 밖에 안 된 주인공이 실제 가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느라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고, 보통 아이들의 센스를 이해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다 보니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가 동년배 아이들에게는 기이하게 비춰진다.[58] 결국에는 왕따에 집단 구타가 일상이 되었고,[59] 어렵게 사귄 친구마저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한 이사 때문에 헤어지게 된다.

주인공의 여동생은 더 어려운데, 오빠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얼굴 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보니 오빠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상황이다. 친구라고는 TV에서 나오는 만화캐릭터 밖에 없고, 이것을 여동생에게 타이를 어른이 하나도 없으니 자동적으로 만화캐릭터에 심하게 빠지게 된다. 결국, 만화캐릭터를 자신과 동일시하여 옷을 만화캐릭터처럼 입고, 현실에서 사용하지 않는 말만 하다보니, 어휘력이 심하게 떨어져서 4~5살 아래의 꼬맹이에게도 발린다. [60]

여기까지 본다면 고고학자를 직업으로 가진 아버지를 두는 것이 비교적 좋지 않은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실제로도 남자친구나 남편으로서는 고고학자가 매력적인 선택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돈 문제와 연구열 때문에 늦게 결혼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결혼해서도 가정에 신경을 잘 못쓰게 되기에 가족과의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월급은 박봉에 학위 따느라 돈은 안 모이지 그리고 발굴 현장 나가면 강제 주말부부지

고전게임 동급생 2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연심이 있는 미사코가 외로움에 못 이겨 술을 마시다 만취하여 “나를 방치해두고 있다”고 주인공에게 불평한다.[61]

EXTRAVAGANZA ~벌레를 사랑한 소녀~에서는 주인공의 남자친구가 티벳 오지에 몇 년씩 가 있기도 한다. 주인공 부부의 양녀가 되는 아야카가 “유메미를 버려두고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냐”면서 혼내기도 한다.[62]

마스터 키튼에서는 주인공 키튼과 그의 아버지가 아내에게 이혼당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이혼한 아내보다 수입이 시망이다.

[1] 옛날(古)을 살펴본다(考)는 뜻.[2] 너무나도 당연한게 당장 해당 유물이 어떤 표층에서 발견되고 당시의 상황을 추측하기 위해서다. 특히 역사 기록이 전무한 선사고고학으로 넘어가면 표층분석은 필수 상황이다.[3] 그것도 공룡을 다루는 사람으로 취급한다.우린 구석기 전공, 보존과학할 거 아니면 자연과학 안 배워! 그런데 이쪽도 고고학자 마냥 흔하지 않은 직업에 대우도 공부한 거에 비해 시궁창이라...[4] 왜냐하면 문화재청 학예사는 행정처리와 함께 난이도 높은 S급 유적의 학술 발굴도 촐괄 담당해야하며, 국가직 공무원이라 전국을 떠돌아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박물관이나 지자체 학예사보다는 덜 선호되나[5] 이를 그리드법(Grid Method)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10mx10m의 정방형에 ㄱ자나 ㅣ자형의 참호(Trench)를 파서 시굴을 한다.[6] 사실 인부오해일화는 학계에서 선생님 소리 듣는 분들 외에도 필드연구자들이 1회 이상은 듣고다니는 소리다. 가끔 자신이 뭐하고 있는지 모르는 자괴감에 빠지기도.[7] 유물에 새겨진 문양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탁본 외에도 점묘나 일반 회화처럼 선묘로 그리는 방법도 있다. 서로 장단점이 있는데, 탁본은 왜곡이 덜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고, 회화적 기법은 현실감, 즉 입체감이 느껴진다는게 장점이다.[8] 대구 k기술원은 "정밀발굴조사" 기간이 20일(...)로 잡힌적도 있다.뭐 어때 무령왕릉은 하룻밤에 유물 다들어냈는데 그래서 망했잖아[9] 예를 들어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은 현대에는 신라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알 수 있는 문화재지만, 원래는 경주 월성 해자 물에 버려진 생활 쓰레기였다.[10] 풍납토성은 언론을 크게 탄 덕분에 발굴조사가 이후 큰 외압없이 이루어졌으나 경당연립 재건축을 진행하던 건설사는 그대로 도산해버렸다. 발굴기간이 공사 기간을 잡아먹으면서 일어난 일로, 이런 관계로 건설관계자와 고고학자는 서로 뗄 수 없으면서도 최악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실제 풍납토성의 보고서 중(여러차례 발굴이 이루어졌다) 조사 일정 부분에서 시공사인 모 건설사의 부도로 현장 철수라는 부분이 있다.[11] 괜히 투탕카멘이 유명해진 게 아니다. 무덤에 부장품이 남아 있었던 거의 유일한 파라오. 투탕카멘은 사실 별다른 치적도 없이 요절한 파라오였지만,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은 몽땅 도굴꾼에게 털렸는데 그의 무덤만이 도굴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대에 유명해진 것이다. 치적보다 무덤[12] 나는 친구가 적다의 외전에서도 하세가와 하야토가 이 점을 지적하는데, 고고학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에 연줄이 중요하다고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13] 6급 학예사로 들어와 5급의 학예관으로 승진하지 못한 채 18년째 있는 사람도 있고, 학예관 대우로 10년을 넘긴 사람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가 학예관으로 승진하는데 5~10년이 걸리는 것과 비교하면 맥 빠지는 일이다.[14] 물론 일부 완전 유실된 부분의 경우 토기와 색이 다른 에폭시 퍼티로 메꾼다. 그게 토기 복원의 정석이다.[15] 쉽게 말해서 장독항아리와 비슷한 내구도를 갖는 토기를 말한다. 쇠붙이 같은 것으로 두드려 보면 쨍쨍거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16] 도질토기보다 내구도가 약간 떨어지는 토기를 말하는데, 와질이란 '기와와 같은 내구도'를 가진이란 뜻이다. 다만 기와에도 고려후기-조선시대로 넘어가면 도질토기와 같은 내구의 기와가 나오기 때문에 연구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 구절을 읽는다면 '단단하기는 한데 표면이 손에 묻듯한 느낌 혹은 무른 느낌이 나는 토기'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17] 이들 토기는 800-900℃ 정도에서 구워졌기 때문에 사용 중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장기간 땅 속에 있으면 바스러질 정도로 내구가 약하다. 박물관의 전시토기 중 색이 붉으스름하거나 노란색인 토기 중 돌알갱이가 박혀있는 토기를 볼 수 있는데 이들 토기가 바로 연질토기.[18] 중장비 용자 중에는 공텐이라 불리는 대형 포크레인으로 cm단위로 파는 용자도 있고, 그 무거운 바가지의 감촉으로 유물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다. 포크레인 바가지에 칼을 달고 두부썰기는 이쪽 계통에서는 웃기지도 않는 묘기.[19] 정확히 말하면 '문화층'이라 불리는 문화재나 생활흔적이 확인되는 층위까지 파내려간다. 이런 경우 지상에서 표토 몇 cm만 까는 것이 아니라 m단위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물론 문화층 찾는 것은 연구자들 몫.[20] 현재는 대부분 사망했고, 그 분들 따라다니며 일을 배운 어르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데 연구만 안 할 뿐이지 경력은... 한마디로 군대에서 준위같은 분들이다.[21] 번호기록과 유물 발굴 당시의 현장 스케치 등[22] 사실 마르크스는 인문학, 사회과학 전체에 영향을 안미친 분야가 없다.[23] 돌 등에 새겨진 비문 따위를 발굴, 해석하는 학문[24] 50년대 말까지 신석기 시대 조사 유적만 보더라도 북한은 지표조사 유적 97개와 발굴조사 유적 31개였던데 반해 당시 남한은 지표조사 유적 32개와 발굴조사 유적 1개였다. 게다가 북한은 학술 간행물도 다양하면서 각각 수천부씩 찍어내어 대중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해방 이전의 중국과 소련 문물은 물론 기독교 같은 신사상이 창궐하던 북측의 고유한 전통 때문에 지금 북한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공개된 토론회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북도 1960년대 초중반까지는 학문 분야에선 상당한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고, 심지어 경제학계에선 생산성 향상을 위한 차등적 임금체계(부분적 시장경제 원리) 도입 같은 주장도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60년대말 주체사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우상숭배가 시작되면서 모든게 어긋나기 시작한다.[25] 한반도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석기 유적은 종성 동관동 동관진 유적 이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26] 참고로 그는 이러한 전파론을 반동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에 대해서 반박하는 논문을 49년과 57년에 작성했었고 반동이론일지라도 그것이 과학적으로 맞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50년대 까지는 도유호가 승리했다. 이는 이 사람이 학문적 소신에 따라 움직였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북한이 최소한 학문 분야에선 그렇게 억압적이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27] 다만 백두산의 어느 중학교 교사로 유배보내졌다는 소문도 있다.[28] 도유호의 위대함은 이 사람 거의 혼자서 당시 아무 것도 없었던 북한의 고고학을 공산국가에서는 그나마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과 중국정도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데 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한 쓰레기 논문들만 넘쳐나거나 과거의 것을 재탕 삼탕하고 있는 지경이다. 혹시 어느 정도 쓰레기가 됐는지 보고 싶으면 단군릉 관련 북한 논문을 찾아보면 간단하다.[29] 이전 버젼에는 깡패에게 습격을 당해 비명횡사 했다고 적혀있었는데, 1965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장암이 사망 원인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만 고고학계에서 활동하던 시절, 깡패에게 습격을 당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30] 참고로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과거 인류의 행위를 물질문화를 통해 밝혀내는 학문이다.[31]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이 나오기 전까지는..물론 탄소연대측정 이외에 다양한 절대연대측정법이 나온 현대에도 형식학은 유효하다.[32] 일례로 과거 휴대폰에는 안테나가 있었는데 이것이 점점 줄어들다. 나중에는 휴대폰 내부에 넣을 수 있게 변하다. 현재는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33] 앞의 느낌표는 잘못 쓴게 아니다. 흡착음으로써 혀끝을 잇몸에 대고 떼며 발음하는 방식(...)이다. 굳이 이들을 한글로 쓰면 (쯧)+꿍산[34] Forager-Collector 전략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전자는 이동형 수렵채집민(Forager), 후자는 정주저장형 수렵채집민(Collector)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출처 : 하부 준코, 2016, 일본 조몬 고고학[35] 물론 이러한 세키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동대지진 이후 총독부는 예산 부족으로 조선 내 유적 관리가 어려웠고 심지어 1923~1924년 사이에 무려 600개의 낙랑 고분이 도굴되는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한다.[36] 엄밀히 말하면 고고학자는 맞지만, 최악의 사기꾼이다. 결국 현재까지도 욕먹는 인물이 되었다[37] 일리아스에 의하면 트로이의 최후에 화재가 났다. 즉 슐리만은 자신이 발굴하고 있는 곳이 트로이의 옛 터가 분명하다면 화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38] 이쪽은 유적 하나 파기 위해서 선원들이 죽도록 고생하는 케이스(...).[39] 토모미 루트 한정.[40] 이 인간은 이과 계열 전투종족이기도 하다.[41] 정확히는 만능종족이지만 유물만을 전문적으로 팔 경우 고고학자 타이틀을 가질 수 있다. 이리아에서 삑삑거리는 다우징 머신 하나 들고 묻힌 유적과 유물부터 개미지옥에, 산 채로 파묻힌 엘프에, 그거 지키는 몬스터까지 전부 발굴하고 다닌다.[42] 사실 고고학자가 아니라 이과의 전투종족이라는 물리학자다. 그러나 고고학계에서도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고고학 전문가다. 그야말로 최강의 전투종족.[43] 프로토스학 권위자. 젤나가 유적을 탐사하던 중 한 프로토스 계승자를 발견하고, 테란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프로토스의 역사와 기억을 계승한다.[44] 아놀드의 이모할머니. 이름 자체는 인디아나 존스 패러디지만 땅을 파거나 일지를 기록하는등 현실의 고고학자처럼 행동한다.[45] 원래 고고학자였으며 금화까지 발견했으나 모 시즐랙에게 금화를 뺏기고 현재는 범죄자가 되었다.[46] 유자키 나사의 아버지. 직업이 고고학자다. 예전에는 도쿄대학 교수였다.[47] 스포일러 주의.[48] 설정 상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병행하기 때문에 학자 겸 선생이다.[49] 고고학자이지만 조사하는 것이 죄다 요괴와 관련있고, 이를 학계에 증명할 방법이 있을리 만무하기에 일단 학계에서는 이단아 취급받고 있다.[50] 이미지 직업: 고고학자[51] 시로가네 스바루의 아버지. 직업이 고고학자다.[52] 하워드 카터를 모티브로 했다.[53] 특히 리부트 이후로는 제대로 학위를 가지고 나온다.[54] 본업은 역사학자 겸 고고학자이며, 신오지방 포켓몬 리그의 챔피언을 겸하고 있다. 그녀의 화강돌을 보면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55] 초기의 지구인 호크맨 카터 홀[56] 분위기는 인디아나 존스 풍의 고고학자이고 고고학(Archaeology) 스킬이 존재한다. 그런데 정작 고고학 스킬이 높은 캐릭터 세명은 전부 과학자(Scientist)로 분류되어있다. 이 중에서 두 명은 분명 인문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공계 스킬 활용에도 보너스를 받는다.[57] 근데 실제 고고학자들은 자유방임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군인 같이 엄격하거나 이상한 꼰대기질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는 사실 발굴현장이 군대식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고 실제 야외발굴 기법을 정립한 사람이 피트 리버스 장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여자가 하기에는 매우 힘든 직업 중 하나다. 다만, 최근에 들어선 열정적인 여자 선생님이 임신 중에도 현장에서 발굴하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58]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집념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시비걸기나 삥뜯기로 보인다.[59] 덕분에 코다카는 몸이 튼튼해지고 싸움 스킬이 오르는 기현상을 겪는다.[60] 밥해주는 사람이 오빠밖에 없어서 먹는 것도 부실하고 편식하는 것을 뭐라 하는 아버지도 없어서 성장에도 지장이 있다.4~5살 아래의 꼬맹이보다 가슴이 더 작을 지경.[61] 주인공 아버지는 오지에서 족장의 딸을 건드리다 죽을 뻔 하기도 하고, 부하직원과 검열삭제하느라 더 이상 편지 쓸 기운이 없다는 드립을 치기도 하는 등, 즐길 거 다 즐기고 사는 인간이다.[62]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전화가 안 터지는 오지에서 몇 년씩 처박혀 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