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인 부분에 대한 내용은 분묘발굴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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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
도굴(盜掘)은 고분, 유적을 몰래 발굴해 거기에서 꺼낸 부장품들을 업자나 후원자에게 파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행위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도굴꾼이라고 한다.2. 상세
고대 이집트 파라오 당시에도 밑으로는 생활비, 위로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툭하면 피라미드 및 당시에도 횡행했던 도굴꾼들을 피하고자 조성된 왕가의 계곡에서도 횡행했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와 전문성을 자랑하는(?) 분야. 이 때문에 인류사에서는 매춘, 첩자, 도둑과 더불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오래된 직업으로 꼽는다. 영어로는 Grave Robber,[1] 또는 Tomb raider.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 항목에도 나오듯, 도굴꾼은 다른 여타 도둑과는 다른 끈기와 고고학적 전문지식을 요구한다. 특히 현대에 오면서 더더욱 중요하다. 다른 도둑들의 목표는 분명하고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도굴꾼의 목표는 과거 유명하고 부유했던 이들의 유적이나 무덤에 묻히거나 안장된 부장물이다. 이 때문에 고생에 비해 건질 건덕지가 없을 게 뻔한 무덤은 부관참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물론 봉분이나 비석, 특징적인 조형물 같은 단서가 있다면 찾기 쉽지만, 아무 티를 내지 않고 지하 등에 숨겨 위치를 모르는 경우도 있으므로 다수의 분업이나 협업을 요구하기도 한다. 개중엔 왕가의 계곡처럼 대대손손 가업으로 삼은 이들도 존재했다. 무덤 하나를 완전히 파내려고 몇 대가 무덤 옆에서 거주하고, 나중에는 이들이 모여 마을까지 이루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무덤은 자손을 위한 예금통장(?) 목적으로 손을 안 대고 보존하기도 했다.
이미 죽은 이의 무덤을 파헤치는 데다가, 더욱이 도굴꾼들의 주 목표는 왕가 등 높으신 분들의 무덤이므로, 동서고금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처벌이 매우 엄했다. 도굴한 사실이 적발될 경우 얄짤없이 사형을 때릴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도굴꾼들은 계속해서 생겨났다.
설령 무덤을 찾더라도 해당 분묘가 어떤 곳인지, 그것을 얻기까지 어딜 얼마나 많이 파내야 하는지 등은 나름대로 상당한 지식과 기술이 요구된다. 또한 거기에서 얻은 부장품이 시장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도 알아야 하는데, 장물아비 업자에게 장물을 헐값으로 파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여담으로 상당수가 석실이나 옹곽묘 같은 것만 뒤지고 자잘한 부분이나 봉분에 해당하는 외곽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일부 무덤은 거기에 유물이나 부장품이 남아있어 학자들에게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도굴꾼이 그들의 학술논문을 입수해 그곳에도 제법 값나가는 부장품이 있음을 알고는 그마저도 선수쳐 쓸어가기도 했다.
그밖에도 순례객이나 등산객으로 위장하고 유적지나 사원 터 등을 돌아다니며 탐침봉으로 마구 찌르고 돌아다니다 손끝의 느낌으로 무덤이나 부장품을 찾아내는 이들도 존재했다. 이 때문에 도굴꾼들의 탐침봉 사용으로 인하여 생긴 유물의 흠이 진품이라는 증명으로 통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도굴꾼들은 무덤을 쉽게 찾기 위해 심지어 풍수지리를 배우기도 한다. 풍수적으로 명당이라 할 만한 곳을 뒤져보면 옛 무덤이 나온다고 한다. 사실 명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땅의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현대의 풍수지리로도 옛 무덤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도굴이 아닌 정식 발굴 조사에서도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무덤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무덤과 같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고, 현대 무덤의 근처에서 존재조차 몰랐던 삼국시대 무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다.
동서양 막론하고 연구를 목적으로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유적, 유물을 조사한 다음 본국의 박물관[2]으로 보내거나 개인 소유로 돌리는 학자들도 도굴꾼이나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일부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현지에서 도굴꾼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랭던 워너, 알베르트 폰 르콕, 오타니 고즈이 등 실크로드 고고학자들.
제국주의 식민제국에 대한 반감으로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서양 고고학자들을 '도굴꾼이나 다름없다.'고 매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현지 통치세력으로부터 정당하게 허락을 받고, 또는 구매하여 반출한 사례들도 있다. 문화재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현지 지배세력이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이를 용인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남의 나라 문화재들을 혼란한 시기에 가져가서 자기들 보물로 여기고 원래 국가에 돌려주지 않는 사례는 현대 사회에서 어느 나라도 영 좋게 보지 않는다.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도 자기들 맘대로 유물을 가져간 영국 및 식민열강들과 그리스 및 여러 피해자 국가들처럼 마찰이 존재한다.
이와는 별개로 시체 자체를 노리는 도굴이 많았다. 주요 범인들은 의사들. 해부학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시체들이 도굴당해 낭자당했다. 이는 망자의 시체를 부관능지하는 동서양 막론하는 극악한 범죄였기 때문에 의사들은 주로 법의 사각에 있던 흑인, 하층민, 외지인들의 무덤들을 노렸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의사들이 일반 시민들의 무덤까지 건드렸고, 이게 들통나면서 의사폭동 같은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3. 방지책
도굴을 막기위해 여려 방지책이 나왔지만, 당연히 부장품을 노리는 도굴꾼들도 여러 방법으로 파훼를 시도했다.- 시독(屍毒) - 시체의 독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단점은 너무 오래되면 시체의 독이 사라져서 효과가 없는 경우도 있다.
- 허묘(虛墓) - 한 마디로 가짜 무덤. 다 파보자는 식으로 나오는 도굴꾼도 조조같이 72개나 되는 무덤이면 노가다도 이런 노가다가 따로없다.
- 위산위릉 - 산 하나를 무덤으로 쓰고 산 절벽에 입구를 만드는 방식으로 당나라의 황릉에 쓰였다. 단점은 눈에 띄다 보니 오대십국시대 온도에 의해 당고종과 측천무후가 묻힌 건릉은 제외한 나머지 황릉은 털렸다.
- 철수봉릉 - 쇳물을 바위 틈새에 부어 입구를 막는 방식. 당나라의 황릉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건릉에 쓰인 방식이지만, 분뇨를 이용해 철을 부식시키면 털리는 게 단점.
- 적사적석(積沙積石) - 관 주변에 모래나 또는 무거운 돌덩어리를 섞어넣어서 도굴꾼이 도굴통로에서 모래나 돌에 깔려 죽게 하는 방식. 유사한 것으로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 있다.
- 자래석 - 석문에 스스로 내려오는 돌을 설치, 석문을 지지해 막는 방식. 단점은 장방형의 수직 자래석은 국자형의 도구를 이용하면 손쉽게 뚫리고 다른 방식도 군벌시대 때에는 폭약 같은 것을 이용한 사례가 있어서 완전히 막진 못한다.
- 연환변판 - 밟으면 판이 뒤집히면서 아래로 떨어지는 방식. 단점은 무리를 지은 도굴꾼 중 선발대의 실패를 보고 다시 오는 경우나 다른 도굴꾼들의 실패 사례를 참고해 준비하면 되므로 일회용에 가깝다.
- 미궁암실(迷宮暗室) - 미궁을 지어 헤매게 하거나 묘실 아래나 옆에 암실을 지어 묘실에는 가짜 관을 안치하고 진짜 관과 부장품은 암실에 두는 방식 이때 가짜 관에 남의 시신을 훔쳐넣는 경우도 있었다. 단점은 전문 도굴꾼의 경우 연대 측정을 해서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이 백골이면 가짜라는 경우를 눈치채거나 묘실 주변을 두드려서 소리가 다르게 나면 눈치 챌 수 있는 것이다.
- 도창암전(刀槍暗箭) - 창과 쇠뇌가 발사되는 방식. 단점은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에서 발굴된 궁노의 나무부품이 부식된 사례처럼 부품의 부식으로 작동이 안 될 수가 있다.
- 경고문 - 도굴꾼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저주문, 이미 도굴당했다고 알리는 경우, 이 무덤에 부장품이 없다고 적는 경우가 있다. 여담으로 당태종은 "천하가 나의 집인데 왜 보물을 무덤에 감추겠느냐, 괜한 수고하지 말라"고 경고문을 적었지만 결국 도굴을 당한다.
- 살인멸구 - 무덤 건설에 참여한 장인들을 모조리 죽이는 가장 잔인한 도굴 방지책. 초나라 평왕의 무덤이나 진시황의 진시황릉이 이 방법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빠져 나가는 데 성공해서 무덤구조가 드러나거나 그냥 그런 거 없이 털리는 단점이 있다[3].
- 박장(薄葬) - 무덤에 비싼 부장품을 넣지 않는 경우. 대표적으론 조선왕릉이 있다. 당연히 비싼 부장품이 없으니 도굴꾼들이 건드리지는 않지만, 단점으로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처럼 시체 자체를 가지고 거래를 시도하는 경우나 굴묘편시, 부관참시 등 시체를 훼손하는 경우를 막지는 못한다.
4. 사례
4.1. 한국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왕조가 망하면 지키는 권력이 없어진 왕과 귀족 고관대작의 무덤은 도굴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정복전쟁으로 멸망한 경우는 패전국에 대한 약탈 및 보복 격으로 군대에 의한 조직적인 도굴이 벌어지기도 했다. 백제가 망한 후에 당나라군에 의해 백제왕릉은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하며, 고구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왕릉과 백제왕릉이 모두 삼국시대에 도굴된 것은 아니고, 후술하듯 많은 내외의 침략 약탈에 따라 관련 기록이나 도굴갱의 수 등 신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여러 차례 도굴되었다.반면 한국사 왕조들 사이에서 섬멸전 없이 항복 형식이나 자연스레 정권이 교체된 경우는 약탈도 없고 망한 나라의 무덤이라도 관리를 명령하기도 했다. 신라시대의 수로왕릉 등 가야 고분들, 고려시대의 신라 왕릉 그 외 다른 많은 고분들이 그렇다. 금관가야의 왕족은 신라 진골로 편입됐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고려 왕실과 결혼까지 하며 지배층이 됐으니, 현 왕조가 예전 왕조의 무덤들을 굳이 도굴할 일이 없었다. 전쟁으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도 망한 백제와 고구려 지배층들에게 관직을 주어 달래고 포섭하는 쪽을 택했지,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서 수탈하고 유명 고분들을 도굴했다는 기록이 없다. 조선 왕조의 경우 왕권이 안정되면서 고려왕실에 대한 탄압을 거두고 살아남은 고려 왕씨들을 통해 고려 왕조의 제사까지 지원해주기도 했다.
사실 통념상으로도 도굴 자체가 일반적으로 금기시되는 일이기도 했다. 고조선 시대의 고인돌조차도 외부 자연환경의 변수가 적어 유실 피해가 없으면 비파형 동검과 청동거울 등의 고급 유물들이 아직도 쏟아져 나온다. 수백 수천년 동안 고인돌이 무덤인 걸 사람들이 모르진 않았을텐데 유물들이 비교적 온전한 것은, 조상들이 무덤을 그만큼 신성시한 덕분이다. 유교와 불교의 정착과 풍수지리설까지 유행하며 무덤자리를 골라주는 지관까지 엄연한 직업으로 정착한 사회에서 도굴이란 가장 몹쓸 짓이었다. 왕조와 집권세력이 바뀌어도 현 왕실 혹은 권력층이 도굴을 명한다는 것은 그 시대 윤리관념으로도 미친 짓이었고, 피정복지역 혹은 예전 왕조에 향수가 깊은 백성들에게 반발을 사기 딱 좋은 짓이므로, 역사에 기록된 바가 없다. 20세기까지 유명 고분 및 왕릉들이 비교적 온건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지역민들[4]과 역대 왕조들이 이전 시대의 능묘들을 파괴하거나 도굴하지 않고 관청에 보호대상으로 인지가 되면 관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국내 도굴에 관한 오피니언
그러나 돈독 오른 인간들에게는 불가능은 없었다. 도굴꾼들에게는 그런 의식과 제약이 없었고, 고구려와 백제의 굴식돌방무덤들은 입구를 친절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5] 도굴이 쉬워 거의 대부분 탈탈 털렸고, 고려시대 무덤들도 딱히 도굴 방어장치가 없는데다 고려청자를 발굴하기 위한 도굴꾼들의 욕심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나 임진왜란 때 건너온 일본군이 일부 고분들을 도굴했으며 일제강점기부턴 '오구라 컬렉션'으로 대표되는 골동품 수집가들의 수요에 힘입어 도굴이 대놓고 판을 쳐서, 수많은 무덤들을 속 빈 강정으로 만들어놨다.
일본인들은 이미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고려시대 고분에 있음을 알았는데, 고려 멸망 이후 조선 중후기 이후 청자의 맥이 끊기고 흥선대원군 시절 전세품[6]까지 대부분 소실된 이상 고려시대 청자를 구하기 위해선 고려시대 고분을 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부를 만든 후 벌인 일 중에는 고려청자를 얻기 위해 조사를 벌이고 개성시의 고려 고분들을 파낸 것이 있다.[7] 이는 당시 일본인 학자들과 도굴꾼들의 회고록 및 책자를 통해 다수 교차검증된다. 지금도 이렇게 원무덤 주인의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의 빛을 본 국보급 고려청자들의 대다수가 외국에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신라의 무덤들, 특히 돌무지덧널무덤은 엄청난 무게의 봉토와 그 속의 돌무지를 전부 걷어내기 전에는 목곽 안으로 못 들어가는 구조상 도굴이 힘들어서 대놓고 도굴하진 않았으나[8] 금관총을 비롯하여 왕릉급 무덤 다수가 조선총독부의 발굴이라는 명목 하에 사실상 도굴되었다. 비슷한 시기 이집트에서 투탕카멘의 피라미드가 발견되면서 고고학의 탈을 쓴 무덤 파헤치기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신라 고분에서 황금이 쏟아져 나왔다는 소식이 퍼지자, 백인들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받고 사실상 무덤 사냥을 하러오거나 구경하는 추태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경주 서봉총과 그 옆의 데이비드총[9]이 그 예다. 꼴 좋게도 데이비드가 판 고분에서는 부장품이 별로 나오지 않았고 데이비드는 허탕을 쳤다고 한다. 다행히 이런 경위가 있는 고분들 말고는 지금까지도 경주 시내 중심 대릉원 고분들 중 대부분은 도굴된 적이 없다.
가야 무덤은 도굴피해가 위의 신라보다는 심하지만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덜하다. 이유는 순장 풍습 때문인데, 가야 공통적으로 순장을 했고 특히 대가야는 한국사에서 독보적으로 순장을 많이 했다. 다른 고대국가들은 왕릉급 무덤에 1~6명 순장했고 그나마도 나중엔 금지했지만, 대가야는 한 왕릉에 많게는 40여 명씩 순장했다.
그래서 무덤 주인이 묻힌 주곽 외에 주변에 순장곽이 여럿 있었는데, 도굴꾼들은 고급 유물이 많은 주곽을 노리고, 땅 속 이곳저곳에 퍼졌고 상대적으로 부장품 유물의 급이 낮은 순장곽은 찾지도 못하거나 찾아도 가성비가 안 좋아서 건드리지 않기도 했다. 이런 순장곽은 어차피 파도 금은보화는 거의 없고 녹슬어버린 가야 판갑, 마갑, 산산조각난 가야토기 같은 거나 나올까 말까 할텐데, 도굴꾼들은 어디까지나 관군이나 현지 주민 몰래 후딱 파고 도망가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얘들이 후배 도굴꾼들에게 "어디부터 어디까지 도굴 진도 나갔다"고 기록을 남겨놓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도 혹시나 타겟이 되더라도 저런 식의 전개가 반복된다. 덕분에 미발굴분이 거의 없어서 포기하고 들어가는 고구려ㆍ백제와 다르게 가야 고분군에서는 미발굴분도 많이 발견된다. 순장풍습이 현대인 기준으로 영 좋게 볼 수만은 없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순장풍습 덕분에 그나마 잊힌 역사를 더 추적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문화에 따라 화려한 부장품은 따로 묻지 않고 간소하게 묻어서 부장품을 노린 도굴은 거의 없었다. 다만 직접적인 귀금속이 적었다는 것이지, 부장품이 있는 무덤은 많았다. 대부분 고인이 살아 있을 때 즐겨 쓰던 물건들[10]이나 편지 등을 같이 묻었다. 이런 것들은 당대에는 크게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고 도굴꾼이 노릴 만한 물건도 아니었지만, 후대에는 역사적 가치가 더해져 귀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말 혼란기에 도굴이 성행했는데, 부장품이 아닌 바로 고인의 시신 자체를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는 경우가 잦았다. 자녀들의 입장에서 부모의 유해를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니 피눈물을 머금고 돈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도 온전한 시체를 가지고 하는 놈들은 그나마 질이 좀 나은 편이었고, 진짜 심한 이들은 시체를 훼손하기도 했다. 부장품도 아니고 시신을 도굴하는 행각은 현대에도 그렇겠지만 당대에는 악질 중의 악질로 생각해 민간이나 심지어 왕족들의 무덤을 상대로 도굴을 벌인 짓도 있는데, 선정릉 도굴사건이나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주 예시다. 그나마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미수로 끝났지만, 선정릉 도굴사건은 아직도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 선정릉은 성종(아버지)과 중종(아들)의 무덤인데 도굴 때문에 시신이 사라졌고, 아직도 시신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신은커녕 도굴범들도 정체조차 알 수 없다.
조선왕릉은 검소함을 위해 부장품이 왕릉에 맞지 않게 간소했고, 석회를 발라 굳혀서 상당한 견고함을 자랑하여 도굴할 가치도 없고 리스크만 크기 때문에, 대부분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말이 '석회를 발랐다'지, 석회로 수십 cm ~ 1m 두께의 콘크리트층을 하나 만든 수준이라서, 조선 왕릉 대부분은 시멘트 구조물이 보호하는 형태였다. 이걸 뚫으려면 중장비나 폭약을 동원해 며칠 동안 대공사를 해야하다 보니 몰래 도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조선시대에는 현역 왕조의 왕릉이었기에 경비가 삼엄했다.
조선이 망한 후인 일제강점기에도 아직 왕릉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았고, 형식상으로나마 조선 왕족들이 일본 왕실 다음가는 서열의 이왕가로 일본 계급사회에 편입되어 큰 대접을 받았는데다가 조선왕릉을 도굴했다간 조선인들의 반발과 독립운동이 터질 것은 불보듯 뻔했기에 조선총독부를 포함해서 누구도 감히 왕릉을 도굴할 생각을 함부로 못했던 것도 한 몫했다. 그러나 일제는 경복궁의 대부분을 파괴한 것처럼 조선왕조의 태실은 교묘히 파내어 그 정기를 훼손하고 조선인들이 조선왕조를 잊게끔 만들었다.조선왕실의 정기 차단, 일제의 태실 옮기기
8.15 해방 이후에는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 왕족의 후예를 자처[11]했고, 대한민국 들어서는 이제 전국의 유적을 문화재로서 국가가 체계적으로 인력을 붙여 현대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정착되었기 때문에 도굴되지 않았다.
다만 조선왕릉 중에서도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은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 사실 이때 일본군은 왕릉이라고 하기에 명종의 강릉과 문정왕후의 태릉을 도굴하려고 했다가 너무 튼튼해서 실패하자 선릉과 정릉을 도굴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잘 알려져있다시피 고종 시기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무덤을 도굴하려 했으나 워낙 석회로 단단히 보호되어 도굴에 실패했다.
참고로 일제 당시 가루베 지온은 고고학이란 명분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일대에 조성된 고분들을 여기저기 파헤쳐 발굴된 유물들을 일본으로 빼돌렸는데, 만약 이것들이 다 환수되면 역사서 상당수가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전에 가루베 본인은 물론 그의 후손들도 2006년에 꼴랑 기와 4점을 돌려주고는 더 이상 없다고 발뺌하는 중이다. 다만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자기가 송산리 6호분을 파헤치며 생성된 인공주산이라고 여겨 손을 대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8.15 광복을 맞은 후에도 황룡사지를 발굴해 조사하기 위해 민가들을 매입해 헐어버렸는데, 그 틈을 타 도굴꾼이 난입하기도 했다. 이 황룡사지를 턴 도굴꾼들은 그걸로도 모자라 석가탑을 털려하기도 했으나 미수에 그쳤는데, 도굴범들 때문에 파손된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만약 그들이 석가탑도굴에 성공했더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문중의 압력으로 무덤 발굴을 하기가 어려워 구제발굴을 주로 하는 한국고고학의 특징상 도굴 행위가 학술 발굴의 시작점이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12] 도굴 행위는 전근대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있는데 바로 임당동 고분군의 도굴 사례가 대표적이다.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 고분군 인근의 영남대학교 교수의 제보로 도굴 행위가 고발#되었고 나아가 해당 고분이 발굴되어 임당 지역 및 신라사·고고학적인 자료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물론 문화재 관리당국과 그 행정의 구조적 문제일 뿐 도굴 행위가 이런 이유에서 절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현대에 와서도 도굴 사례가 있기도 한데, 롯데그룹 명예회장 신격호회장의 선친 신진수의 묘가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이 신격호 관련 도서를 보면서 신진수의 무덤 속에 보석과 귀금속이 매장되어 있다는 소문을 알게 되고, 당시 빚을 탕감하고자 감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보석도 귀금속도 없어 유골을 훔치게 되었다. 범인 정씨는 징역 5년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2003년 성탄절 특사로 출소한 지 얼마 안 되어서 2004년 9월 무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조부모의 묘지 도굴을 저지르고, 공범들은 유골 5점을 훔쳤다. 수사망을 피해 달아났지만 1개월 만에 체포되고 또 다시 징역 5년형 선고받고 풀려났다가, 얼마 안 가서 2009년 11월 태광그룹 이임용 회장의 묘를 또 도굴했으나, 동일범의 소행일 거라 직감한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이틀 만에 또 다시 체포된다. 그리고 2개월 뒤 해당 사건의 범인은 미결수 신분으로 쓸쓸히 교도소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다. 이후 잇단 재벌그룹 선산 도굴사건이 발생하자, 아직 피해를 당하지 않은 재벌 그룹들은 자신들의 선산 보안 관리를 강화했다고 한다.
4.2. 중국
후장(厚葬) 풍습이 성행하여 보물을 부장품으로 무덤에 같이 묻자, 당연히 도굴도 기승을 부렸다. 역대 왕조가 도굴을 엄금했음에도 지켜지지 않았다. 사서에 기록된 것과는 달리 진시황릉은 도굴되지 않았지만 사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후의 황릉들은 도굴당하지 않은 걸 찾기가 더 빠르고, 진시황릉 이전에 조영된 지배층의 무덤도 무사하지 못했다. 낙양의 북망산 같은 대표적인 무덤군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산 전체가 무덤으로 가득차 더 이상 묏자리를 찾기 힘들자 백성들이 왕가의 계곡처럼 기존의 무덤을 파서 시체를 버리고(⋯) 내부를 손질한 다음 재사용하기까지 했다.- 한나라: 서한의 황릉은 적미군이, 동한의 황릉은 동탁이 도굴했다.
- 삼국시대: 조조는 아예 군자금 확보를 위해 제왕관민들의 무덤을 전문적으로 도굴하는 발구중랑장, 도금교위 관직을 설치하여 부대까지 운영했고, 손권도 마찬가지로 왕릉을 몇 개 도굴했었다. 특히 손권은 자사의 형을 위한 사당을 짓겠다는 이유로 도굴하기도 했고 조조의 아들인 조비는 신하를 놀려주려고 도굴하기까지 했다.
- 송(남조) : 전폐제가 계모이자 당고모 은귀비의 묘지를 파헤치고 부장품을 싹쓸이 털어갔다. 전폐제도 대단히 악질적이었던 것이, 패륜행위도 문제지만 이놈도 조조처럼 도굴관직에 관심이 많았는데, 조조는 그래도 군자금 확보라는 나름의 이유라도 있지 이쪽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관심은 많았지만 실제로 만들지는 않은 모양이다.
- 수나라: 수문제의 태릉은 검소한 탓에 부장품이랄 것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중화민국 때 군벌들이 도굴하려고 할 때 지역 주민들이 "별 것 없으니 하지 말라"고
어떻게 알았지?했음에도 도굴했지만 정말 별 게 없었던 모양. - 당나라: 당십팔릉 중 당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은 서쪽 반을 파도 안 나와서 포기했지만, 나머지 황릉 17기는 오대십국시대에 온도가 모두 도굴했다.
- 송나라: 북송팔릉은 금나라가 세운 괴뢰 정권 유제가, 남송육릉은 원나라의 요승 양련진가가 도굴했다.
- 금나라: 베이징 대방산에 있던 금나라 능묘군은 원나라 때 도굴당해 껍데기만 있었는데, 천계제 때 명나라 조정이 후금의 기운을 끊는다며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 명나라: 명십삼릉은 도굴당하지 않았지만 지상부의 건축물은 청나라가 능묘공사에 쓰려고 대부분 훼손했다.[13]
- 청나라: 청동릉은 순치제의 효릉을 제외하고[14] 모두 청 멸망 후 군벌 난립 시대에 도굴당했다. 동릉 도굴 사건 문서 참조. 청서릉은 광서제의 숭릉을 제외하고는 도굴당하지 않았다.
4.3. 이집트
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을 트레저 헌터들이 노리고 도굴해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위 사례들과 다른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노동쟁의에 의한 도굴로, 파업 수준으로 임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자기가 지은 피라미드를 털어가는 일도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무덤은 고대에 다 털려나갔고 온전한 무덤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수준이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조차도 귀금속과 보석들은 이미 도굴당하고 그나마 다시 봉인된 후 더 이상은 도굴되지 않아서 나머지 부장품들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파라오의 무덤들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무덤은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뿐이다. 더 자세한 사항은 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을 참조.5. 법규정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31조(도굴 등의 죄) ①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지정문화유산(임시지정문화유산을 포함한다)이나 그 보호물 또는 보호구역, 「자연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에 따른 천연기념물등(임시지정천연기념물 또는 임시지정명승을 포함한다)이나 그 보호물 또는 보호구역에서 허가 또는 변경허가 없이 매장유산을 발굴한 자는 5년 이상 15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개정 2017. 12. 12., 2019. 11. 26., 2023. 8. 8.> ② 제1항 외의 장소에서 허가 또는 변경허가 없이 매장유산을 발굴한 자, 이미 확인되었거나 발굴 중인 매장유산 유존지역의 현상을 변경한 자, 매장유산 발굴의 정지나 중지 명령을 위반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2019. 11. 26., 2023. 8. 8.> ③ 제1항 또는 제2항을 위반하여 발굴되었거나 현상이 변경된 국가유산을 그 정황을 알고 유상이나 무상으로 양도, 양수, 취득, 운반, 보유 또는 보관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7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2023. 8. 8.> ④ 제3항의 보유 또는 보관 행위 이전에 타인이 행한 도굴, 현상변경, 양도, 양수, 취득, 운반, 보유 또는 보관 행위를 처벌할 수 없는 경우에도 해당 보유 또는 보관 행위자가 그 정황을 알고 해당 국가유산에 대한 보유ㆍ보관행위를 개시한 때에는 같은 항에서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 <개정 2023. 8. 8. ⑤ 제3항의 행위를 알선한 자도 같은 항에서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 ⑥ 제17조를 위반하여 매장유산을 발견한 후 이를 신고하지 아니하고 은닉 또는 처분하거나 현상을 변경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2023. 8. 8.> ⑦ 제5조제2항을 위반하여 공사를 중지하지 아니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⑧ 제1항부터 제6항까지의 경우 해당 국가유산은 몰수한다. <개정 2023. 8. 8.> 제32조(가중죄) ① 단체나 다중(多衆)의 위력(威力)을 보이거나 위험한 물건을 몸에 지녀서 제31조의 죄를 저지르면 같은 조에서 정한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한다. <개정 2023. 8. 8.> ② 제1항의 죄를 저질러 지정문화유산(임시지정문화유산을 포함한다)이나 천연기념물등(임시지정천연기념물 또는 임시지정명승을 포함한다)을 관리 또는 보호하는 사람을 상해에 이르게 한 때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사망에 이르게 한 때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개정 2019. 11. 26., 2023. 8. 8.> 제33조(미수범) ① 제31조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② 제31조의 죄를 저지를 목적으로 예비하거나 음모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2023. 8. 8.> 제34조(과실범) 업무상 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제31조제3항에 따른 죄를 저지른 자는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해당 국가유산을 몰수한다. <개정 2023. 8. 8.> 제37조(양벌규정) 법인의 대표자나 법인 또는 개인의 대리인, 사용인, 그 밖의 종업원이 법인 또는 개인의 업무에 관하여 제31조, 제32조 및 제34조부터 제36조까지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위반행위를 하면 그 행위자를 벌하는 외에 그 법인 또는 개인에게도 해당 조문의 벌금형을 과(科)하고 벌금형이 없는 경우에는 3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법인 또는 개인이 그 위반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해당 업무에 관하여 상당한 주의와 감독을 게을리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
6. 창작물에서의 도굴꾼 및 도굴 행위
상당수의 RPG류 게임의 플레이어나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은, 특히 문화적/기술적 배경이 대충 중세 유럽 수준인 세계관이라면 거의 틀림없이 전업 도굴꾼이거나 도굴꾼을 겸업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들이 들쑤시고 다니는 던전이 오래된 무덤인 경우가 많으며, 주인공은 대놓고 이런 무덤들을 지키는 수호자를 죽여서 소지품을 강탈하거나 보물상자(=부장품)을 털어서 시장에 유통하는 도굴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다. 그런 연유에서 타국의 유적이나 무덤을 멋대로 휘저어 놓는 인디아나 존스, 몬타나 존스, 라라 크로프트, 네이선 드레이크[15]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16]물론 그 주체가 주인공인 만큼 이런 행위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작품은 사실상 없다. 보통은 게임 마스터(또는 작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거나, 대충 어물쩡 넘어가거나, 아니면 주인공 보정으로 주인공이 하면 학문의 발전이며 별 문제도 아닌데 다른 등장인물이 하면 얄짤없이 도굴꾼 취급한다. 반면 이런 똑같은 짓을 하는 주인공의 동종업계 악당들의 경우는 대부분 얄짤없이 무덤지기들에게 당해서 끔살당하거나 권속 노예로 전락해버리는 배드 엔딩을 당하니 극과 극. 그래서 일부 작품에선 도굴한 유물을 가지고 있어서 탈을 당하니 원주민들에게 결국 반환한다거나 제 자리에 돌려놓는 전개도 생기기도 하였다.
엘더스크롤 시리즈 의 주인공들이 주로 하는 일 중 하나가 고대 유적들을 도굴하는 것이다. 탐리엘엔 수많은 고분과 유적들이 있으며, 작중 온갖 인물들과 집단들이 그러한 곳에서 뭔가 찾아오라는 임무를 주다보니 자연스럽게 도굴꾼이 될 수 밖에. 물론 대부분의 유적들은 특정한 위인의 무덤같이 털면 큰일날 것 같은 장소도 있지만, 대부분은 악당이나 쇠퇴하거나 멸망한 지 오래인 막장 족속들의 유적과 무덤이 많다 보니 작품 내에서도 딱히 주인공들을 비난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한 유적에는 온갖 언데드와 기계같은 위험한 무언가가 득실거리는 건 물론, 무지막지하게 위험한 존재가 봉인되어 있었더라며 뒤늦게 깨닫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도굴꾼 노릇하는 것도 영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 이외에 이런저런 막장 인생들[17]도 영웅으로 등장하는 다키스트 던전에서는 도굴꾼(Grave Robber)이라는 영웅 캐릭터가 등장한다. 장비하고 있는 무기로도 도굴에 사용되는 곡괭이가 존재하고 있다.
현대 중국에선 도굴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 영화가 많고 인기도 높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에선 101회차의 세계에서 세계정복의 자금마련을 위해 뮤 엘리나스의 무덤에 있는 부장품을 터는 내용이 나온다.
[1] 강도를 의미하는 Robber에서, 무덤(Grave)을 턴다는 뜻이 합쳐진 것.[2] 대표적인 사례가 대영박물관.[3] 앞서 사례의 초평왕의 무덤이 저렇게 털려 굴묘편시를 당했다.[4] 구전으로 '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이라 하더라~'라고 세대마다 전해졌기에 계백의 사례처럼 보호의 대상이 되거나 원균의 사례처럼 이야기 거리가 되곤 했다.[5] 주위를 빙 50cm씩만 파보면 큰 입구가 나온다. 나름 막아놨기는 하지만, 도굴꾼들에겐 하이패스급의 가치를 지닌 포인트다.[6] 옛날부터 세상에서 애완(愛玩)·전래(傳來)된 물건. 주로, 미술품을 가리킨다.[7] 이토 히로부미 본인도 떳떳한 짓은 아니라고 인식은 했는지, 고종이 고분에서 파낸 유물을 들고 자랑하는 이토에게 "다 좋은데 그거 어디서 난 거냐"는 식으로 물어보자 대답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다.[8] 현대라면 중장비를 동원하면 하룻밤만에 도굴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경주시의 경우 왕릉 주변에 주민도 많이 살았으므로 야밤에 몰래 도굴하기란 매우 어렵다.[9] 데이비드가 팠다고 '데이비드' 총이다.[10] 특히 의복[11] 다만 자처만 했지 왕이 되려고 했다든가 왕족을 우대했다든가 하는 건 없었다. 이승만 본인도 해외에서 활동하며 인지도와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이왕가의 일원임을 내세웠을 뿐, 미국물을 몇십년 먹은 사람답게 군주제 자체를 매우 혐오했다. 사실 왕릉 보존도 그냥 모두가 관심이 없어서 온전했다고 봐야 한다. 왕릉 보존 같은 것에 관심을 쓸 정도로 시대가 여유롭지 않았다. 왕릉에 부장품이 많다든가 하면 도굴이 많이 일어났겠지만 조선 왕릉은 그런 것도 없었다.[12] 조선시대 무덤의 경우 부장품이 별로 없다고 해도 발굴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때 어느 문중의 무덤을 복구하는데 이 와중에 당시 일기장이 나와서 화제가 된 바 있다.[13] 2013년에는 홍희제의 헌릉을 도굴하려다 계단만 훼손하고 미수에 그친 사건도 있었다.#[14] 부장품이 부채와 신발뿐이라고 전해졌다.[15] 네이선은 진짜로 전문 도굴꾼이다.[16] 오랑의 판타지 사전에선 판타지 속 던전들은 타종족의 마을, 무덤, 신전인데 모험이라는 명목 하에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라며 인디아나 존스도 결국 한낱 도굴꾼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17] 이교적 주술에 심취한 신비학자, 어떤 집단에 의해 고문에 시달리던 중 그들을 모두 죽이고 탈출한 괴인, 사람을 죽이고 마차를 털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죄의식을 느낀 살인강도, 한센병에 걸린 시한부 인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