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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1 14:06:10

적미

적미군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3. 기타4. 적미군 추대 대립황제

1. 개요

적미(赤眉, 붉은 눈썹)는 신나라 때인 18년에 산동 지방의 낭야에서 번숭(樊崇), 서선(徐宣)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군으로, 당시 승승장구하던 여모의 반란군을 대거 흡수하며 초반부터 세력을 과시했다. 왕망의 신군과 자신들의 편을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칠했으며, 신나라의 여러 군현들을 공격하여 노략질했다.

2. 역사

적미의 우두머리는 거현의 번숭이었는데, 그는 초기에 수백 명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관군을 습격하며 세를 급격히 불렸다. 번숭은 자신을 '삼로(三老)'라 칭하고, 낭야의 봉안(逢安), 동해의 서선 등과도 힘을 합쳤다. 번숭의 무리가 수만에 달했을 때, 그들은 "살인한 자는 죽이고, 남을 해친 자는 똑같은 상처를 남긴다."는 간단한 규칙 하나로 조직을 통제하였다.[1] 삼로인 번숭 아래로는 종사(從事), 졸사(卒史)를 두었으며, 나머지는 서로를 '거인(巨人)'이라 불렀다.

지황 2년(21년),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왕망은 익평연솔 전황(田況), 태사희중 경상(景尙), 경시장군호군 왕당(王堂)에게 명을 내려 청주와 서주의 도적을 모두 토벌하게 했다. 하지만 막상 전황이 번숭의 무리와 여러 차례 교전해 전승하자, 전황의 명망이 높아지는 것을 꺼렸던 왕망은 그를 사위대부로 좌천시키고 대신할 사람을 보냈다. 전황이 떠난 후 신나라군은 싸울 때마다 패했고, 번숭은 왕망이 보낸 군대와 1년간의 혈투를 벌인 끝에 경상을 전사시키고 신군 1만여 명을 참살했다. 전황이 연달아 적을 이기는 것을 본 왕망이 번숭의 무리를 얕잡아 보고 오히려 전황을 경계한 것이 패인으로 작용했다.

지황 3년(22년) 4월, 왕망은 다시 태사 왕광(王匡)과 경시장군 염단(廉丹)에게 정예병 10만 명을 주어 번숭의 도적 무리를 토벌하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두머리 번숭이 왕망의 신군과 자신들의 편을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칠하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적미(赤眉)라 불리게 되었다. 한편, 왕광과 염단의 토벌군은 지니가는 지역마다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기행을 벌이니, 청주의 백성들은 도적떼에 불과한 적미를 더 지지했다.

그 해 겨울, 연주에서 삭로회(索盧恢)가 거병하여 무염(無鹽)으로 들어가 적미에게 귀순했다. 왕광과 염단은 무염을 공격해 삭로회를 격파하고 그 무리 1만여 명을 참수했다. 이에 왕망은 왕광, 염단을 공작에 봉하고, 공을 세운 10여 명의 관리들에게 상을 하사하면서 설레발을 쳤다. 첫 승리로 기세등등해진 왕광과 염단은 뒤이어 무염 인근 성창(成昌)에서 적미의 동헌(董憲)을 공격해 크게 싸웠지만, 이번에는 크게 패배하여 군대가 궤멸하고 염단은 전사했다. 왕광은 목숨만 부지해 수도로 달아났다. 왕망이 보낸 군대를 모조리 패퇴시키며 더이상 꺼릴 것이 없어진 적미군은 초(楚), 패(沛), 여남(汝南), 영천(潁川) 등의 군을 약탈하고 복양(濮陽)에 이르렀다

지황 4년(23년), 곤양대전에서 녹림군에게 패배한 신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경시제현한 정권이 들어섰다. 번숭은 경시제에게 복종할 것임을 선언했고 적미의 장수 20여 명과 현한의 수도 낙양에 입조하여 열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경시제가 그들에게 식읍을 하사하지 않으니, 적미의 간부들은 모두 복양으로 돌아갔고 이내 현한 세력과 결별하기로 하였다.

경시 2년(24년) 겨울, 현한에서 떨어져 나온 적미군은 영천군에 주둔하며, 경시제가 보낸 군대와 싸워 매번 승리하였으나 병사들은 피곤해져 울면서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병력이 흩어질 것이 뻔하다 생각한 번숭은 경시제가 얼마 전에 천도한 현한의 수도 장안 공략해 크게 약탈하는 것으로 병사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했다. 장안에 온갖 귀한 보물이 있다는 달콤한 말로 병사들의 마음을 수습한 번숭은 군을 2개로 나눠, 자신과 서선은 무관(武關), 사록, 양음은 육혼관(陸渾關)을 공격하였다. 이에 경시제는 정국상공 왕광[2], 항위장군 유균(劉均) 등을 보내 적미군을 막았다.

경시 3년(25년) 정월, 무관과 육혼관이 모두 적미 손에 넘어갔고, 왕광과 유균은 패배해 장안으로 도주하였다. 2개로 나뉘었던 적미군이 홍농(弘農)에서 다시 집결하자, 경시제는 토난장군 소무(蘇茂)를 파견해 요격을 시도했지만 대패했다. 적미군의 명성이 관중을 진동시키면서 그 무리는 더더욱 불어나 어느덧 30만에 달했다. 적미의 30만 대군은 계속 서쪽으로 진군해 모향(蓩鄉)에서 현한의 장수 이송(李松)을 크게 격파하고 현한군 3만여 명을 전사시켰다.

그 해 6월, 경시제는 왕광, 진목(陳牧), 성단(成旦)을 신풍(新豐), 이송을 고(槁)에 주둔시키며 적미를 막는 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회양왕 장앙의 반란 모의가 들통나면서 진목, 성단은 경시제의 의심을 받아 참수되고, 왕광은 두려워 장앙에게 가담했다. 이때 이송이 고에 주둔시킨 군대를 돌려 신풍에서 장앙과 왕광을 공격했다.

동년 8월, 장앙과 왕광은 이송에게 격파당해 도주하다가 고릉(高陵)에서 적미군에게 투항했다. 장앙의 패잔병들까지 흡수한 적미군은 장안성 동도문을 총공격하였다. 이송이 급히 달려와 장안을 구원하려 했지만 적미군에게 사로잡혀 인질이 되니, 그의 동생 성문교위 이황(李況)이 형을 살리기 위해 동도문을 열어 적미군을 맞이했다. 북문인 주성문(廚城門)으로 탈출한 경시제는 위수(魏水)에서 식후 유공(劉恭), 정도왕 유지(劉祉), 우보도위 엄본(嚴本)와 만나,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릉으로 도주했으나 금방 현실을 깨닫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경시제는 옥새를 바치면서 적미에게 항복해 외위후(畏威侯)라는 치욕스러운 작위에 봉해졌다가 장사왕(長沙王)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장안에 입성한 적미군이 방화와 약탈, 살육을 한 탓에 백성들은 오히려 왕망과 경시제의 정권을 그리워하게 되자, 적미의 우대사마 사록은 경시제를 겁박해 그가 목 메어 죽게끔 유도하였다. 유공은 슬퍼하며 경시제의 시신을 빼돌려 적미로부터 숨겨두었다.

진작에 적미군은 관동에서 장안으로 진격할 때, 장안과 낙양의 중간 지점인 화음에서 한나라 황족 중에서도 산동에서 신으로 숭배되어 온 성양경왕 유장의 자손 중 적미군 내에서 목동 일을 하던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했고, 이후에는 서진하여 경시제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장안에 웅거했다.

하지만 오랜 전란과 이들의 약탈로 옛 수도 장안은 폐허가 되었고, 식량도 떨어져 이들은 장안을 떠나 서북 지역에 있던 군벌 외효를 공격하기 위해 나섰다가 대다수가 얼어 죽고 굶어 죽게 되었다.

이에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한나라 역대 황릉들을 도굴하고[3] 부장품을 모두 꺼냈지만 먹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들은 관동의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서기 27년에 광무제에게 공격당했고 항복했다.

광무제는 꼭두각시 황제 유분자와 우두머리 번숭을 포함한 모든 적미군을 사면하고, 반란 위험이 있는 간부급만 낙양 인근에 저택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살게 하였다. 번숭과 봉안은 훗날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주살당했고 경시제를 살해한 사록은 식후 유공에게 살해되었으나, 나머지 간부들은 광무제가 마련한 거주지에서 조용히 살다 죽었다. 유분자는 나중에 병으로 눈이 멀었지만, 후한 조정에서 그를 계속 지원해주었기에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3. 기타

적미의 난 이외에도 신나라 조정에 대항한 민중봉기로 녹림의 난이 있는데, 이는 지명인 녹림산에서 따온 것이다. 이들 녹림군은 경시제를 추대했다.

4. 적미군 추대 대립황제

비고 출생 사망 연호 재위기간 능호
적미 세력 추대 유분자(劉盆子) 10년 ? 건세(建世, 25 ~ 27) 25~27 -



[1] 애초에 번숭을 포함한 휘하 장수들이 죄다 농민이나 천민 출신이라 복잡한 규칙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마을의 말단 관리인 옥리를 지냈던 서선이 그나마 제일 학식이 있었을 정도.[2] 신나라의 태사 왕광과 동명이인이다. 참고로 신나라의 왕광은 낙양이 함락되면서 경시제에게 잡혀 이미 참수되었다.[3] 예외로 문제는 태평성대(문경지치)를 열었다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문제의 릉은 적미군이 유일하게 도굴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