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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02:52:18

곤양대전

곤양대전
昆陽之戰
시기 23년
장소 중국 허난 성 핑딩산 시 애 현
원인 왕망의 폭정과 유수의 한(漢)복원 운동
교전세력 현한(玄漢)신(新)
지휘관 유수
종조
이질
왕봉
왕상
부준
왕읍
왕심†
엄우
진무
거무패
병력 10,000~12,000 명 30,000명[1]
50,000~60,000명[2]
430,000 명[3]
피해 피해 규모 불명토벌군 궤멸
결과 현한의 대승
영향 신(新)의 몰락, 유수의 입지 상승

1. 개요2. 병력 규모에 대한 의문3. 신나라군의 곤양 파견4. 곤양성의 위기5. 진 유수무쌍6.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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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한나라 시기의 전투로, 광무제의 대표적인 초기 승전이다.

2. 병력 규모에 대한 의문

신나라 군대의 규모는 사료에 따라 차이가 크며, 후한서에서 크게 과장되는 경향을 보인다. 후한 초기 관찬사서인 동관한기에서는 5~6만으로 서술되었고, 후한 중기 왕충(27년 ? ~ 97년)의 저서인 논형에서는 3만으로 다뤄졌다. 이러던 숫자는 유송의 역사가 범엽후한서에 이르러 크게 과장되어, 43만 설[4], 100만, 60만 등 과장된 수치가 등장하기 시작하여, 관찬이거나 혹은 후대 서술일수록 과장이 심해지는 편이다. 현실적으로는 3~5,6만 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물론 병력 수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고 호왈백만의 중국사의 기록이니만큼, 60만이니 100만이니 하는 것은 과장된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광무제 유수가 천하를 차지하게끔 만든 전투이며, 사실 최소병력인 논형의 3만 설만 해도 이미 아군의 3배인 만큼, 결코 병력 규모의 의문으로 폄하될 전쟁은 아니다.

3. 신나라군의 곤양 파견

기원후 23년 경시제 유현을 중심으로 유연, 유수등 유씨 일족은 한나라의 재건을 선포했다.[5] 왕망은 3월에 현한의 유수, 성국상공 왕봉 등이 곤양, 정릉, 언릉 등을 함락시키자 이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사공 왕읍, 사도 왕심을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으로 삼아 토벌군을 보낸다.

5월에 왕읍, 왕심 등은 영천에서 납언장군 엄우(嚴尤), 질종장군 진무(陳茂)가 이끄는 군대와 합류했다.[6] 현한에서 곤양성을 지키는 병력은 8, 9천 명 정도인데, 그 중 태반은 전까지 창칼도 잡아본 적 없는 농민군이었기에 모두가 겁에 질려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신나라 군은 곧장 곤양성 북쪽에 이르렀다.

4. 곤양성의 위기

이 때 곤양성에 있던 훗날의 광무제 유수가 성국상공 왕봉, 정위 대장군 왕상 등을 성에 남기고 자신은 지원군을 데려오겠다면서 밤에 몰래 표기대장군 종조, 오위장군 이질 등 13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남문을 돌파, 정릉과 언성에서 지원군을 데리고 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유수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는 군사와 식량이 매우 부족하고 밖에 있는 도적은 강하고 크지만, 힘을 합쳐서 이를 방어하면 공로를 거의 세울 것이다. 만약 흩어지면 안전할 수 없고 아직 완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서로 구원해줄 수 없는 상황이다. 곤양이 함락되면 하루 사이에 여러 부대는 멸망할 것이며 지금 마음과 담력을 함께해 공명을 떨치지 않고 처자와 재물을 지키려 한단 말인가?"라고 했다. 이에 유수가 이끄는 13명의 결사대는 신나라 군의 포위를 뚫고 빠져나갔다.

신나라의 장수 왕심, 왕읍 등이 곤양을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군영 수백 개를 세우면서 십여 장 높이의 운거를 놓아 성 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엄우는 왕읍에게 저들을 항복시킬 것을 권유했으나, 왕읍은 7년에 적의를 포위했을 때 산 채로 잡지 못한 죄에 연루된 일이 있어 이를 거부했다. 신나라군이 땅굴을 파거나 충차, 팽차, 화살 등을 이용해 공격하자 왕봉 등 수비대가 항복을 요청했지만 신나라군이 거부했다.

또한 엄우는 왕읍에게 포위망 한 곳을 비워 수비대를 도망가도록 유도, 완성을 공포로 몰아넣자고 했으나 왕읍은 그 제안 역시 거부했다. 왕심, 왕읍 등은 스스로 공을 세울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여겨 흐트러진 태도를 보였으며, 밤에 유성이 진영 가운데에 떨어지고 낮에는 구름이 무너진 산처럼 군영으로 떨어져 내려 땅 가까이에 이르러 흩어지자 신나라의 관리, 병사들은 놀라서 모두 엎드렸다.

유수가 정릉과 언성을 돌며 구원병을 모았으나 장수들은 재물을 욕심내고 아까워해 병사를 나누어 지키려고만 하여 곤양 구원에 응하지 않았다. 유수는 "적을 깨뜨리면 진귀한 보배는 만 배가 되고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며, 진다면 목숨이 남아나지 않는데 어떻게 재물을 가질 것이냐?"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징발했다.

5. 진 유수무쌍

이렇게 유수가 각고의 노력을 통해 3천의 군사를 징발했다. 사료에 따라서는 5천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있다. 6월 1일에 유수가 스스로 보병,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신나라군과 4,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진을 쳤으며, 왕심, 왕읍 등이 이에 맞서 군사 수천 명을 보내자 유수가 이들을 격파하고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모두가 기뻐하며 "유 장군께서 평소에 작은 적을 겁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 큰 적 앞에서 용감한 걸 보니 기이한 일"이라며, 다시 선봉에 설 때 자신들도 돕게 해달라고 말했다.

초전에 승리를 거둔 유수가 진격하자 왕심, 왕읍이 군사를 물렸고, 유수군은 기세를 몰아 신나라의 군사 수백 또는 수천을 참수하였다. 당시 유연이 완현을 빼앗은지 사흘이 지난 때였는데, 유수는 이를 알지 못했지만 가짜로 사자를 보내 완현의 군사들이 곧 도착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일부러 떨어뜨렸다. 왕심, 왕읍 등은 그 편지를 얻자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유수는 이 때를 노려 1만의 지휘부에 그대로 5천여 군을 끌고 돌격했다.

왕심, 왕읍은 한군을 얕보고 스스로 1만여 명을 인솔하며 다른 군영에는 부대를 장악하되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해놓은 상태였기에 다른 부대는 대응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왕충의 논형에 따르면 비바람으로 인해 지휘부를 구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즉, 유수의 돌격은 자연재해에 힘입은 결과일 가능성이 열려 있다. 더불어 광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성 안에서 호응의 기록되어 있기에, 실제 교전이 진행된 전장에서 광무제군은 상대에 비해 수적으로도 우세였을 가능성이 있다.

유수는 이 돌격을 통해 사령관 중 하나인 왕심을 사살했고, 신나라군은 사기가 떨어져 흩어지게 되었다. 크게 무너지고 도망치는 사람이 서로 올라서서 밟으니 엎어져 죽은 시체가 100여 리에 걸쳤다. 때마침 우레가 크게 울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집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비가 쏟아 붓는 것 같더니 치천의 물이 차서 넘쳤다.

신나라의 군사가 도망가면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만 명을 헤아리니 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며, 현한군이 획득한 치중(輜重, 군수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양이라 몇 달이 걸려도 다 실어 나르지 못해 나머지는 불태웠다고 한다. 살아남은 신나라의 군사들은 목숨만 건져 각자 출신 군현으로 돌아갔고, 지휘관인 왕읍, 엄우, 진무 등은 갑옷을 벗고 말에 올라타 죽은 시체를 밟고 강을 건너 도망치기 바빴다. 왕읍이 간신히 수습한 패잔병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6. 영향

유수가 적은 군대로 대군을 정면으로 상대해 격파하고 지휘관까지 참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 관중이 두려워 떨었고, 수많은 자들이 신나라가 임명한 지방관을 죽이고 현한에 붙으며 신나라는 급속도로 몰락했다. 경시제 유현은 대 전공을 세운 유수와 유연 형제를 경계하여 유연을 트집잡아 죽이고, 유수는 나머지 군벌을 평정하란 명목으로 제대로 된 군대도 없이 하북으로 쫓아내, 사실상의 사형 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유수는 끝까지 살아남아 하북을 평정하고, 현한과 대치하다가 적미군의 난으로 현한이 멸망하고 유현이 참살당하자 현한의 세력을 흡수, 통일 한나라의 황제가 되어 후한의 역사가 시작된다.

[1] 논형, 후한대 편찬[2] 동관한기, 후한대 편찬[3] 후한서. 유송 범엽이 편찬.[4] 후한서 광무제기에 따르면 100만 군사와 함께 갑사 43만 명을 파견했다고 나온다.[5] 이때의 왕조는 훗날 광무제의 후한과 구분짓기 위해 현한이라고 표기한다. 다만 경시제란 칭호는 정사에는 남지 않고, 훗날 황제가 된 광무제가 무순 회양왕이라는 왕호를 내렸다.[6] 이들은 육양현(淯陽縣) 소장안취(小長安聚)에서 유연에게 한 차례 격파당한 패잔병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