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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1 21:38:54

문경지치

고사성어
글월 문 볕 경 갈 지 다스릴 치
1. 개요2. 유래3. 한국 세계사 수업에서4. 유사 표현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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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나라 문제경제의 치세를 일컫는 말로, 태평성대를 가리킨다.

2. 유래

중국주나라 이래 장장 550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가난의 고통을 받고 살았고,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바꿔보기 위해 제자백가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진나라시황제천하를 통일했으나 강력한 억압과 법 질서를 내세운 진나라 아래서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어지러웠고, 결국 곧이어 벌어진 항우한고제 유방초한전쟁으로 진나라도 박살이 난다. 게다가 항우가 가는 곳마다 전대미문의 학살을 벌인 데다가, 유방은 유방대로 항우를 이기기 위해 한계까지 한나라를 쥐어짜며 적국의 영토 또한 여력이 닿는대로 약탈하거나 파괴했다. 그리고 그 후엔 다시 흉노가 강성해져 한나라를 위협했고, 이러한 일련의 전쟁고 속에서 백성들의 삶은 한없이 피폐해져만 갔다.

그런 와중에 들어선 한나라의 5 ~ 6대 황제 문제경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여 전쟁 등 여러 대외사업을 자제하고 나라를 윤택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과장은 좀 있겠지만 당시 대다수 백성들이 노새를 타고 다녔고, 땅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를 않았으며, 창고에는 쌀이 썩어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문경지치는 태평성대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로 후대의 황제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이 문경지치는 경제의 아들 한무제가 끝장냈는데, 무제가 군사 부문에서 업적을 남겼지만 다른 부분에서 비판을 받는 이유도 문제가 남긴 정책에 마음대로 손을 대다가 경제를 말아먹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제는 진시황 마냥 자신의 능을 짓기 위해 예산을 과도하게 써서 많은 백성을 혹사시켰다. 또 문제 이래 원만하게 지내던 흉노와 쓸데없이 데스매치를 벌여 결국 승리는 했지만, 그 결과 문제와 경제가 쌓아논 국고는 대거 탕진되고 백성들의 삶은 도로 피폐해진다.

3. 한국 세계사 수업에서

중, 고등학교 수준의 세계사 교과서에서 한나라 역사를 배울 땐 이렇게 자세하게 문경지치에 할애할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문제와 경제의 업적은 문경지치 시절이었다, 정도로 짧게 넘어가고, 반면 무제는 흉노, 고조선, 남월 토벌, 비단길 발견 같은 대외적으로 굵직굵직한 활동이 많아 서술량이 비교적 많은 관계로 마치 무제가 한의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황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시피 여후에 대한 극과 극의 평가를 차치하고서라도 한무성세의 위세를 가능케 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닦은 황제는 한문제와 경제였다고 할 수 있겠다.

4. 유사 표현

문경지치 외 중국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시절로는 요순시대, 지치나 광무중흥, 개황성세, 정관지치, 개원지치, 불야성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함평-경력 치세, 지치, 강건성세 등이 거론된다.

다만 요순은 거의 전설상 인물이고, 수는 안락했던 태평성대가 무색하게 나라가 2대만에 멸망했으며, 당은 둘 다 말년으로 갈수록 삐딱선을 탔고, 송은 경제와 문화 같은 다른 성과에 비해 군사력이 허약했으며,[1] 명은 홍희제의 재위가 1년도 안될 정도로 짧았고 선덕제 역시 후계자인 정통제가 암군이라 빛이 바랜감이 있다. 청은 어찌됐든 만주족 국가라 피지배층이던 한족에게는[2] 취급이 묘한 편인데다, 건륭제 역시 말년에 삐딱선을 탄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문경지치와 제일 비슷한 치세가 강건성세이긴 하다. 조부(= 문제, 강희제)가 기틀을 닦고, 아버지(= 경제, 옹정제)가 이를 물려받아 완성한 다음, 아들(= 무제, 건륭제) 대에서 절정을 달리다 슬슬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5. 여담

세월이 흘러 마냥 악녀로 평가받던 유방의 아내 여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여후가 이 문경지치의 기반을 어느 정도 마련해줬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여후가 잔인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는 황실 내부 문제로, 통치 면에선 전후 복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게 이 주장의 요지다. 다만 한문제 자체의 공이 엄청나기 때문에 이 주장은 반박도 많다. 사실 그렇게 치자면 유방의 역할이 더 크다.[3]

'문경지치'라고 묶어서 말하긴 하지만 한경제도 문제에 비하면 평가가 떨어지는 편이다. 한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혁신적인 생각으로 국가나 왕의 재산을 필요에 따라 개방하였으며, 산림과 하천을 개발하는 정책을 펼치고 공업과 상업을 발달시켜 결과적으로 공상잡세가 토지세를 능가하게 만들었다. 이런 문제의 정책 결과 과거 중요했던 자원인 소금과 철의 생산이 크게 늘었으며 여러 직업이 생기고 상품 생산과 유통도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지세와 인두세 등을 내릴 수 있게 되었으며, 전문적으로 요역을 맡아 하는 사람들도 생겨 농민들의 요역 부담도 대폭 줄었다. 게다가 문제 본인이 매우 근검절약하는 성격으로 국고의 낭비도 꼼꼼하게 막았다. 한문제가 얼마나 국력을 불려놨는지 한경제 때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킨 지방 호족들은 중앙이 너무 강해져서 경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영조사도세자에게 "문제와 무제 중에 누가 나았느냐?'고 하문한 적이 있었다. 사도세자는 "문제와 경제가 펼친 정치가 무제보다 나았다."는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영조는 뜬금없이 "너 같이 거친 놈은 평소에도 무제를 본받으려 했을 것이며, 그 답은 나를 속인 것이다."라고 꾸짖고는 세자가 전에 썼던 시까지 트집을 잡아[4] 옆에 있던 시독관이 세자를 변호해야 했다.



[1] 한문제와 경제는 흉노와 전면전을 안했을 뿐 방어는 제법 잘했다.[2] 당도 엄밀히 따지면 지배층이 선비 혼혈이긴 하지만 한화된 선비족이라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 당 고조 이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남들이 뭐라하든 당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한족 명문의 후손이라고 믿었고 자부심까지 느꼈다. 혈통 세탁 완료.[3] 이후 몇대에 걸친 세금을 낮추고 토목공사와 혹형을 자중하는 풍조는 유방이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여후에게는 딱히 이렇다할 업적도 없고 또, 고황후는 황제도 아니었던 만큼 업적이 있을 일도 없었다. 여후가 실권을 잡았을 때는 사실 소제(전소제, 후소제)때 뿐인데 애시당초 깜도 아닌 어린 황제들을 허수아비로 세워놨던 시기라 공보다 과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4]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 때 바람이 크게 분다'는 구절이었는데, 이걸 두고 '무제처럼 기가 뻗치고 성급하니 그런 시구를 쓴다'고 핀잔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