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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3 15:05:30

강왕(주)

파일:주 금문.png
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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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강왕(康王)
(姬)
조(釗)[1]
생몰 기간 기원전 1040년 ~ 기원전 996년
재위 기간 기원전 1020년 ~ 기원전 996년

1. 개요2. 주 강왕의 내정3. 외치4. 최후5. 평가

1. 개요

주나라의 제3대 이자, 천자. 주문왕의 증손자이며, 주무왕의 손자고, 주성왕의 아들이며, 주소왕의 아버지다. 아버지 주 성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성강지치라고 부른다.[2]

2. 주 강왕의 내정

주 성왕이 주공의 보좌를 받으며 나라를 다스리다가 병으로 죽은 뒤 주 성왕의 유언[3]대로 소공 석[4]과 필공 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가 바로 주 강왕이 21세 때로 주 강왕 원년(기원전 1020년)이다.

주 강왕은 주 문왕과 주 무왕의 공적을 찬양하는 글을 천하에 돌려 주나라에 대한 복종심을 키웠다.[5] 이 글을 강고(康誥)라고 한다.

필공 고에게 명해 신하들에게 자신의 임무를 다할 것을 당부하게 했다. 그리고 호경을 수도로 확정지었다.[6] 일찍이 풍궁(鄷宮)에 거주했을 때 제후들을 불러 모으니 이것을 풍궁의 조회라 한다. 이것은 주 무왕 대 맹진에서의 서약과 진문공의 천토 지맹과 같은 의미로 열린 행사였다.

주 강왕 12년(기원전 1009년) 6월에 풍경에서 선조에게 제사를 지냈다. 필공 고가 주 강왕을 호위했다. 주 강왕은 이 제사를 필명이라고 불렀다. 필공 고는 상나라 유민들을 교화시켰다. 그리고 이름난 산과 큰 강에 가서 성을 세웠는데, 그 이름은 주 강왕의 이름을 따서 쇠성이라고 불렀다.

3. 외치

주 성왕과 주 강왕 시기에 동이(東夷)[7]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 강왕은 숙부 위강백, 태보인 소공석에게 명해, 군대를 이끌고 여러 길에서 나눠 진격했다. 그리고 그 반란을 평정하러 갔다. 그 전투로 동이의 사기가 꺾여 다시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위강백에게 북정을 명해 경양 부근에 이르렀다.

그리고 중국 서부의 유목민인 귀방족을 쳐서 5039명을 죽이고, 4명의 수령과 1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많은 양의 전차를 얻고, 전투용 [8]을 얻었다. 그리고 이 싸움에 공을 세운 대신들에게 활과 화살 그리고 상을 내렸다.

4. 최후

주 강왕은 왕이 된지 25년 만인 기원전 996년 죽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희하(姬瑕)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주 소왕이다. 그 때부터 서주의 국력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5. 평가

그 역시 옛날의 임금인데다가 공화 시기 때 그 이전의 기록이 산일한 탓에 기록은 많지 않으나 남은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주나라의 내치를 잘해 제후들의 단결이 여전히 단단했으며, 외치에서 동이족과 귀방족을 쳐서 무력도 건재함을 과시해 주나라가 여전히 강한 국력을 지닌 나라임을 보여주어 성강지치라고 했다. 내정과 외치에 두루 능한 명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쇠라고 적혀있는 곳도 있는데, 이 "쇠 쇠"라는 훈과 음은 한국식 국훈이다. 여기서는 희조 내지 희교라고 읽어야 한다. 교냐 조냐는 각종 자전이나 주석에 따라 다르다.(후대로 가면 거의 조로 읽었으며, 일반적인 자전이나 운서에는 둘 모두 실려있고, 사기색은에서는 교로 나온다) 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2] 주성왕과 주강왕의 치세라는 뜻이다.[3] 근검절약하고 탐욕을 억제하며 나라를 다스리는데 힘쓰도록 하라.[4] 연나라의 시조다.[5] 봉건제의 한계 탓인데, 제후에게 내린 봉토에서 세금만 거두는 것이 아니라 군사권이나 정치권 등도 지닐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주 성왕 대 삼감의 난이나 춘추전국시대가 대표적 사례다.[6] 주 유왕 때 견융족에게 약탈당할 때까지 수도 기능을 하게 된다.[7] 여기서 말하는 동이는 당시 중원 기준 동쪽에 사는 종족을 뜻하는 멸칭으로 한민족과는 관계가 없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이들은 대부분 한인에 동화되고 이후 동이(東夷)는 한반도, 만주, 일본 등지에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뜻이 변하게 된다.[8] 당시 말의 품종이 사람을 태울만큼 크지 않아 전차용 말이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