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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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경왕(頃王) |
성 | 희(姬) |
휘 | 임신(壬臣) |
아버지 | 양왕 |
생몰 기간 | 기원전 ???년 ~ 기원전 614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619년 ~ 기원전 614년 |
1. 개요
주나라의 제19대 왕. 양왕의 아들. 광왕과 정왕의 아버지다. 춘추오패를 둘[1]을 만난 양왕이 죽고 그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왕이다.2. 재위 기간
경왕 원년(기원전 619년), 왕실의 재정이 적자였다.[2] 그래서 양왕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해 그는 경사 모백위를 노나라에 보내 장례 비용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노나라는 예를 중시하는 나라기 때문에[3] 노문공(魯文公)은 장례 비용을 대주기로 약조하였다.[4]경왕 2년(기원전 618년), 문공의 원조 덕택에 양왕의 장례를 치렀다.
경왕 6년(기원전 614년), 주(邾)나라의 문공 즉 주 문공(邾文公)이 역산으로 천도하고 오래지 않아 죽었고, 주 문공의 중신들은 그 일로 의견이 분분했다.[5] 그리고 주 경왕도 오래지 않아 죽고 그 아들 희반(姬班)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광왕이다.
[1] 제환공과 진문공(晉文公)을 말한다.[2] 주나라의 금싸라기 땅을 진(晉)나라에게 넘겨준 여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3] 그 사례를 하나 들자면 노나라의 예법이 복잡하므로 제나라에게 눌릴 것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예를 중시하였다. 그런 노나라에서 나고 자란 공자는 예에 관심이 많아 유가를 확립하였다.[4] 여담으로 이런 초라한 모습은 훗날 일본에서도 나오게 되는데 전국시대 덴노는 거지 신세나 다름없어서 생활비를 알아서 벌어야 했고 즉위식, 장례식 같은 일에 쓸 돈이 없어서 주변 다이묘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치러야 했다.[5] 아무래도 무슨 일로 암살이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