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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魯 | Lǔ[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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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489년의 강역 |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 주(周) | 초(楚) | ||||
| <colbgcolor=#5d8a00> 위치 | 중국 산둥성 서남부 | ||||
| 존속 기간 | 서기전 11세기~서기전 256년[2] | ||||
| 수도 | 곡부 | ||||
| 국성 | 희성 노씨(姬姓 魯氏) | ||||
| 작위 | 후작 | ||||
| 주요군주 | 문공 단 태공 백금 경공 수 | ||||
| 언어 | 상고한어 | ||||
| 문자 | 금문 → 전서 (대전체) | ||||
| 종교 | 중국 토속 종교[3] | ||||
| 종족 | 화하족 | ||||
| 현재 국가 | 중국 | ||||
1. 개요
중국 서주시대부터 존재하던 나라로 지금의 산둥성 일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조는 주공 단의 장남인 노태공 백금이었으며 수도는 곡부였다.본래는 '로'(魯)나라이다. 두음법칙 때문에 국내에서는 노(魯)나라로 부른다.
주공 단은 주나라의 원로 관직인 주공이 되어 주 문공으로 일컬어지며, 장남 백금에게는 노나라를 주고 차남 군진에게는 자신의 주공 자리를 물려주니 그가 주 평공이다.
유학을 창시한 공자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주나라의 예절을 따지는 노나라의 기풍을 생각하면 과연 공자에 걸맞은 고향이라 할 수 있다.
2. 역사
사마천의 <노주공세가>, <춘추좌씨전/번역> 참조.2.1. 서주시대
2.1.1. 주공 단
노나라의 시조인 주공 희단은 서주 문왕의 4남이자 서주 무왕의 아우였다. 주공 단은 무왕 즉위 이후 언제나 무왕을 보좌했다. 무왕 9년 무왕이 첫번째로 맹진(盟津)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무왕 11년 두번째로 맹진을 건넜을 때도 주공 단은 무왕 곁에 있었다. 목야대전에서 제신을 이긴 무왕은 주공 단을 소호(少昊)의 옛 땅인 곡부(曲阜)에 봉했으니, 이에 주공 단은 초대 노공(魯公)이 되었다. 다만 주공 단은 봉지로 가지 않았고, 주나라에 남아서 무왕을 보좌했다.무왕이 제신을 죽였으나 상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 무왕은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제신의 아들인 무경록보(武庚祿父)를 상나라의 다음 왕으로 봉하는 동시에, 그를 감시하기 위해 자신의 동생들인 문왕의 3남 숙선(叔鮮), 5남 숙도(叔度), 8남 숙처(叔處)를 각각 관(管), 채(蔡), 곽(霍)의 군주로 봉했다. 이렇게 봉해진 관 숙선, 채 숙도, 곽 숙처는 세 명의 감시자라 하여 '삼감'(三監)이라 불렀다.
무왕이 목야대전 2년 후 병에 들었다. 당시 주나라는 불안정했기에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했다. 이에 주공 단이 태왕(太王), 왕계(王季), 문왕(文王)에게 제사를 드리며 말했다.
"그대들의 후손 왕 발(發)이 병에 들었습니다. 만약 그대들 삼왕께서 자손을 하늘에 바치려 하신다면 저 단으로 왕을 대신하소서."
이에 무왕의 병이 나았다. 몇 년 후 무왕이 죽었다. 이때 무왕의 아들 성왕이 어렸다. 주공 단은 천하가 무왕의 죽음을 듣고 주나라를 배반할까 두려워, 자신이 성왕 대신 섭정하며 나라를 다스렸다. 관 숙선과 채 숙도 등은 주공 단이 어린 성왕의 왕위를 찬탈하지 않을까 의심하며 천하에 소문을 퍼뜨렸다.
"주공이 장차 성왕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주공 단은 아들 백금(伯禽)으로 하여금 대신 노(魯)를 다스리도록 했다. 그가 바로 노 태공(太公)이다. 주공 단은 백금을 보내며 이렇게 훈계했다."나는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아우이며, 성왕의 숙부로서, 천한 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머리를 감으며 세 번 머리를 쥐었고, 한 번 식사하면 세 번 입에 든 것을 뱉으며 선비를 맞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너는 노(魯)에 가거든, 삼가 나라를 가졌다고 하여 사람을 교만하게 대하지 말아라."
관(管), 채(蔡), 무경(武庚) 등이 과연 회이(淮夷)를 거느리고 반역했다. 주공은 이에 성왕의 명을 받들어 동벌(東伐)했다. 삼감의 난은 실패했고, 주공 단은 핵심 세력인 관 숙선과 무경을 죽이고 채 숙도를 추방했다. 주공 단은 상나라의 유민들을 둘로 나누어, 제을(帝乙)의 아들 미자(微子) 계(啓)를 송(宋)에 봉하여 동남쪽에서 상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문왕의 9남인 자신의 친동생 봉(封)을 상나라의 수도였던 조가(朝歌)에 봉하여 위(衛)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주공 단은 상나라의 저항세력을 완벽하게 진압하고 주나라의 패권을 확립했다.성왕 7년, 주공이 성주(成周)라고 불리는 낙읍(雒邑)을 건설했다. 이곳이 바로 낙양(洛陽)의 기원이다. 성왕은 낙읍에 도읍했다. 성왕이 장성하니 주공 단은 성왕에게 정권을 넘겨 주었다. 주공이 풍(豐)에서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두고 말했다.
"반드시 나를 성주(成周)에 묻어서, 내가 감히 성왕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라."
이후 성왕은 노나라에 명하여 그들이 문왕에게 교제(郊祭)를 지내게 했다. 이때부터 노나라에 천자의 예악이 있게 되었다.2.1.2. 노태공
주공 단이 죽고 아들 백금이 노공(魯公)이 되었다.태공 백금이 노(魯)에 처음 봉해지고 3년 후 부친인 주공에게 정치를 보고했다. 이때 주공이 말했다.
"어찌하여 이리 늦었느냐?"
백금이 말했다."풍속을 바꾸고, 예를 바꾸며, 상복 입기를 3년을 한 연후에야 벗었으므로 늦었습니다."
강태공이 제(齊)에 봉해졌는데, 5개월 만에 주공에게 정치를 보고했다. 이때 주공이 말했다."어찌하여 이리 급했습니까?"
강태공이 말했다."군신의 예를 간결히 하고, 그 풍속에 따랐습니다."
이에 주공 단이 탄식하며 말했다."아, 후세에 노(魯)가 제(齊)에 북면(北面, 신하 노릇)하겠구나! 무릇 정치란 간결하지 않고 쉽지 않으면 민(民)이 가까이함이 없다. 쉽고 민(民)에 가까우면 민(民)은 필히 따른다."
백금이 즉위한 후 삼감의 난이 벌어졌을 때 회이(淮夷)와 서융(徐戎) 역시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백금은 군대를 이끌고 서융(徐戎)을 평정하여 노(魯)나라를 안정시켰다.2.1.3. 노고공 ~ 노효공
노 태공 백금이 죽고 아들 고공(考公) 추(酋)가 즉위했다. 고공이 고공 4년에 죽고 동생 양공(煬公) 희(熙)가 즉위했다. 양공이 양공 6년에 죽고 아들 유공(幽公) 재(宰)가 즉위했다. 유공 14년 유공의 동생 비(沸)가 형 유공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니 그가 위공(魏公)이다. 위공이 위공 50년에 죽고 아들 려공(厲公) 탁(擢)이 즉위했다. 려공이 려공 37년에 죽고 노나라 사람들이 동생 구(具)를 세우니 그가 바로 헌공(獻公)이다. 헌공이 헌공 32년에 죽고 아들 진공(眞公) 비(濞)가 즉위했다.진공 14년(기원전 841년), 주나라의 려왕(厲王)이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국인의 폭동을 당해 체(彘)로 달아났다. 이때 주나라가 공화(共和) 정치로 다스려졌다. 공화시대는 기원전 841년 ~ 기원전 828년의 기간이다. 공화시대 이전의 기록은 연대가 불분명하다.
진공 29년, 주 선왕(周宣王)이 즉위했다.
진공 30년, 진공이 죽고 동생 오(敖)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무공(武公)이다.
무공 9년 봄, 무공이 큰아들 괄(括), 작은아들 희(戲)와 함께 주나라의 선왕을 배알했다. 선왕은 희를 총애해서 그를 노나라의 태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이에 주나라의 번중산보(樊仲山父)가 선왕에게 간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고, 어린 자가 나이든 자를 섬기는 것이 순리입니다. 만약 왕께서 어린 자를 제후로 세우시면 이는 인민들에게 반역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노나라에서 작은아들이 즉위하고 다른 제후들도 이를 본받는다면 왕이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선왕은 간언을 무시하고, 끝내 희를 노나라의 태자로 세웠다. 무공이 여름에 돌아와 죽자 희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의공(懿公)이다.
의공 9년, 의공의 형 괄의 아들 백어(伯御)와 노나라 사람들이 함께 모의해 의공을 시해하고 백어를 임금으로 세웠다.
백어 11년, 주 선왕이 노나라를 공격해 백어를 죽여버리고는, 살해당한 의공의 아우 칭(稱)을 세우니 그가 바로 효공(孝公)이다. 주나라 왕실이 통치 체제의 근본이 되는 종법제를 망가뜨린 이 사건 이후, 제후들이 주나라의 왕명을 듣지 않는 일들이 잦아지게 되었다.
효공 25년(기원전 771년), 견융(犬戎)이 주나라의 암군이었던 유왕(幽王)을 죽였다. 이로써 서주가 멸망했다.
기원전 770년 주나라의 평왕이 낙읍으로 동천했다.(동주) 이후 천하는 장장 550년 동안 이어질 난세인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했다.
효공 27년(기원전 769년), 효공이 죽고 아들 불황(弗湟)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혜공(惠公)이다.
2.2. 춘추시대
2.2.1. 노혜공
동주 평왕 연간에 영성 조씨 진나라의 문공이 천자의 예로 하늘의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자, 노 혜공은 평왕에게 자신도 상제에게 제사지낼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평왕이 이를 거부하자, 혜공은 그냥 허락받지 않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평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로써 천하의 종주국인 주 왕실의 권위가 훼손되었다.노 혜공 23년(기원전 746년), 희진에서 문후(文侯)가 죽고 아들 소후(昭侯)가 즉위했다.
노 혜공 24년(기원전 745년), 희진의 소후가 숙부인 성사(成師)를 곡옥(曲沃)에 봉했다. 그가 바로 곡옥 환숙(曲沃桓叔)이다.
노 혜공 30년(기원전 739년), 희진 소후의 신하인 반보(潘父)가 주군인 소후를 살해하고 곡옥의 환숙(曲沃桓叔)을 끌어들였으나 희진 사람들이 그것에 불복하여 들고 일어나 실패했다. 이후 곡옥 환숙은 본거지인 곡옥으로 도주하고 역적 반보는 처형되었다.
노 혜공 37년(기원전 732년), 곡옥 환숙이 죽고 아들 곡옥 장백(曲沃莊伯)이 즉위했다.
노 혜공 45년(기원전 724년), 곡옥 장백이 종가인 희진의 효후(孝侯)를 공격해 살해했다. 하지만 희진 사람들이 곡옥 장백을 내쫓고 다시 극(郄)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악후(鄂侯)다.
노 혜공 46년(기원전 723년), 혜공이 죽고 서자 식(息)이 섭정하니 그가 바로 은공(隱公)이다.
2.2.2. 노은공
원래 노 혜공의 정부인한테는 아들이 없었고, 혜공의 첩인 성자(聲子)가 식을 낳았다. 서자 식이 자란 뒤 송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했는데, 그녀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혜공이 아들의 여자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다. 그녀가 바로 중자(仲子)다. 중자가 윤(允)을 낳았다. 혜공은 중자를 부인으로 높여주고, 윤을 태자로 삼았다. 혜공이 죽자 윤이 어렸기 때문에 노나라 사람들은 서출인 식이 섭정을 하도록 시켰으나 즉위를 시켜주지는 않았다. 공자 식과 공자 윤 두 사람의 어머니는 모두 혼인 때 딸려오는 잉(媵)이었다. 윤의 어머니 중자는 우잉(右媵)으로 정실부인 다음의 지위였으므로, 식의 어머니였던 성자보다 지위가 높았다. 고대인들은 자식이 어머니의 지위에 따라 귀천이 달라진다고 보았기에 공자윤은 공자 식보다 어렸음에도 지위가 높았다.노 은공 5년(기원전 718년), 은공이 당(棠)에서 고기 잡는 것을 보았다. 이에 장희백(臧僖伯)이 간언했다. 장희백은 공자 구(公子 彄)이다. 노 효공(魯孝公)의 아들이며 장손씨(臧孫氏)의 시조이다.
凡物不足以講大事 其材不足以備器用 則君不擧焉 君將納民於軌物者也 故講事以度軌量 謂之軌取材以章物采 謂之物 不軌不物 謂之亂政 亂政亟行 所以敗也 故春蒐夏苗秋獮冬狩 皆於農隙 以講事也 三年而治兵 入而振旅 歸而飮至 以數軍實 昭文章 明貴賤 辨等列 順少長 習威儀也 鳥獸之肉不登於俎 皮革齒牙骨角毛羽不登於器 則公不射 古之制也 若夫山林川澤之實 器用之資 皂隷之事 官司之守 非君所及也
"모든 물건이 큰 일(제사나 전)을 논하기에 부족하거나, 그 재료가 기물(器用, 국가의 공식 도구)을 만들기에 부족하다면 군주는 그것을 거론(취하지)하지 않습니다. 군주는 백성을 궤물(軌物, 법도와 규범)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를 논의하여 법도와 분량을 가늠하는 것을 궤(軌)라 하고, 재료를 취하여 사물의 문채(색채와 문양)를 밝히는 것을 물(物)이라고 합니다. 법도에 맞지 않고(不軌) 규격에 맞지 않는 것(不物)을 일컬어 난정(亂政, 어지러운 정치)이라 하며, 어지러운 정치가 자주 행해지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봄의 수(蒐), 여름의 묘(苗), 가을의 선(獮), 겨울의 수(狩)(이상 사계절의 사냥 명칭)는 모두 농한기를 이용하여 군사 업무를 익히는 것입니다. 3년에 한 번씩 군대를 정비하여, (훈련하러) 나갈 때는 진려(振旅, 군대를 정돈)하고, 돌아와서는 음지(飲至, 종묘에서 잔치)를 하여 군사의 실수를 점검합니다. 이는 문채와 장식을 밝히고, 귀함과 천함을 분명히 하며, 등급과 서열을 분별하고, 젊은이와 어른의 순서를 따르게 하며, 위엄있는 거동(威儀)을 익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새와 짐승의 고기가 제사 그릇(俎, 도마 조)에 오를 정도가 아니고, 그 가죽·이빨·뼈·뿔·털·깃털 등이 국가의 기물을 만드는 데 쓰일 정도가 아니라면 군주는 활을 쏘지(사냥하지) 않으니, 이것이 옛 제도입니다. 산림과 천택(시내와 못)에서 나는 산물이나 기물에 쓰일 자재, 하인(皂隷, 조례)들이 할 일, 각 관청 관리들이 지켜야 할 직분 같은 사소한 일들은 군주가 직접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은공이 이를 듣고 말했다."모든 물건이 큰 일(제사나 전)을 논하기에 부족하거나, 그 재료가 기물(器用, 국가의 공식 도구)을 만들기에 부족하다면 군주는 그것을 거론(취하지)하지 않습니다. 군주는 백성을 궤물(軌物, 법도와 규범)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를 논의하여 법도와 분량을 가늠하는 것을 궤(軌)라 하고, 재료를 취하여 사물의 문채(색채와 문양)를 밝히는 것을 물(物)이라고 합니다. 법도에 맞지 않고(不軌) 규격에 맞지 않는 것(不物)을 일컬어 난정(亂政, 어지러운 정치)이라 하며, 어지러운 정치가 자주 행해지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봄의 수(蒐), 여름의 묘(苗), 가을의 선(獮), 겨울의 수(狩)(이상 사계절의 사냥 명칭)는 모두 농한기를 이용하여 군사 업무를 익히는 것입니다. 3년에 한 번씩 군대를 정비하여, (훈련하러) 나갈 때는 진려(振旅, 군대를 정돈)하고, 돌아와서는 음지(飲至, 종묘에서 잔치)를 하여 군사의 실수를 점검합니다. 이는 문채와 장식을 밝히고, 귀함과 천함을 분명히 하며, 등급과 서열을 분별하고, 젊은이와 어른의 순서를 따르게 하며, 위엄있는 거동(威儀)을 익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새와 짐승의 고기가 제사 그릇(俎, 도마 조)에 오를 정도가 아니고, 그 가죽·이빨·뼈·뿔·털·깃털 등이 국가의 기물을 만드는 데 쓰일 정도가 아니라면 군주는 활을 쏘지(사냥하지) 않으니, 이것이 옛 제도입니다. 산림과 천택(시내와 못)에서 나는 산물이나 기물에 쓰일 자재, 하인(皂隷, 조례)들이 할 일, 각 관청 관리들이 지켜야 할 직분 같은 사소한 일들은 군주가 직접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나는 그 땅을 순행하련다."
하고는 마침내 가서 고기잡는 장비를 늘어놓고 보았다. 이에 장희백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는 따라가지 않았다. 《춘추》의 경문에 '공시어우당'(公矢魚于棠)이라고 한 것은 노 은공의 행위가 예에 맞지 않고, 또 먼 곳까지 갔음을 말한 것이다. '시'는 벌여 놓는다는 뜻이다.
곡옥의 장백(曲沃莊伯)이 정나라, 형나라와 함께 익(翼, 희진 본국)을 치자, 천왕(天王, 주나라 왕)이 윤씨(尹氏)와 무씨(武氏)를 보내 장백을 도우니, 익후(翼侯)가 수(隨)로 도망쳤다. 수는 희진의 땅이었다. 장백을 지원한 윤씨와 무씨는 모두 주나라의 세족대부(世族大夫)였다.
곡옥이 종주인 주왕(周王)을 배반하니 가을에 주왕이 괵공[4]에게 명하여 곡옥을 토벌하고서, 익후의 아들 광(光)을 애후(哀侯)로 세웠다.
9월, 중자(仲子)의 궁(宮)을 완성했다. 예(禮)에 따르면 제후(諸侯)는 두 적부인(嫡夫人)을 둘 수 없으므로, 중자를 위한 묘(廟)를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춘추》의 경이 궁이라고 한 것이다. 노 애공이 만무(萬舞)를 추고자 중중(衆仲)에게 깃발을 들고 춤추는 사람의 수를 물었다. 이에 중중이 대답했다.
천자는 여덟(8x8, 64명)을 쓰고, 제후는 여섯(6x6, 36명)을 쓰고, 대부는 넷(4x4, 16명)을 쓰며, 사는 둘(2x2, 4명)을 씁니다. '무'(舞)는 팔음(八音)을 절제하고 팔풍(八風)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에서 아래로 내려 씁니다.
8음(八音)은 금(金)‧석(石)‧사(絲)‧죽(竹)‧포(匏)‧토(土)‧혁(革)‧목(木)이고, 8풍(八風)은 8방(八方)의 풍기(風氣)다. 8음의 악기로 8방의 풍기를 전파하고, 손과 발로 무도(舞蹈)하여 황음(荒淫)하지 않도록 절제하고 울결(鬱結)하지 않도록 감정을 발산하는 것이다. 8풍(八風)은 동방 곡풍(谷風)‧동남 청명풍(淸明風)‧남방 개풍(凱風)‧서남 량풍(凉風)‧서방 창합풍(閶闔風)‧서북 부주풍(不周風)‧북방 광막풍(廣莫風)‧동북 융풍(融風)이다. 여덟 가지의 악기가 함께 울리면 무곡(舞曲)이 갖추어지므로 춤은 8음(八音)을 절주로 삼는 것이고, 8방의 풍기는 춤으로 인해 펼쳐지므로 춤은 8방의 풍기를 펼치는 것이다.노 은공이 이를 따랐다. 이에 처음으로 6우(六羽)를 올렸으니, 비로소 6일(六佾)을 사용한 것이다.
겨울 12월 신사일, 장희백이 졸하니, 은공이 말했다.
"숙부(叔父)가 과인에게 유감이 있었으나, 과인은 감히 잊지 못한다."
이에 장사를 지낼 때 한 등급을 더했다. 명복(命服)의 등급을 올려준 것이다.자기가 고기잡는 것을 보려고 할 때, 장희백의 간언을 듣지 않음을 한으로 여겼다는 말이다.
노 은공 8년(기원전 715년), 노나라가 정(鄭)나라와 협의하여 정나라가 제사를 지내는 태산(太山)의 읍(邑) 팽(祊)을 허전(許田)과 바꾸니, 군자들이 이를 비웃었다. 원래 태산 밑에 있는 팽전은 태산에 제사를 지내는 정나라의 땅이었으며, 허(許) 땅에 있는 허전은 노나라의 땅이었다. 정령 팽전은 노나라 근처에 있었고, 노령 허전은 정나라 근처에 있었다. 3월 정백이 완을 노나라에 보내어 팽을 노나라에 주었으니, 이는 정나라가 다시는 태산에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었다. 서주 초기 성왕이 왕성(낙읍, 곧 낙양)을 경영할 때 동천할 뜻이 있었기 때문에 숙부인 주공 단에게 허전을 주어 노나라의 조숙읍[5]으로 삼게 했으므로 후손들이 그곳에 주공 단의 별묘를 세웠다. 정나라의 환공은 서주 선왕의 동모제로 정나라에 봉해졌는데, 태산의 제사를 돕는 탕목읍(湯沐邑)이 팽에 있었다. 정나라는 주나라의 천자가 다시는 순수(巡狩)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정령 팽전을 노령 허전과 바꾸어 각각 본국에서 가까운 편의를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노나라가 시조인 주공 단의 별묘가 있다는 이유로 의심할까 두려웠기 때문에 이미 태산의 제사를 폐지하고, 노나라를 위해 주공 단의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는 겸손한 말로 요구한 것이었다. 허전은 허(許)에서 가까운 토지였다.
노 은공 11년(기원전 712년) 겨울, 공자 휘(揮)가 은공에게 아첨하며 말했다.
"백성들이 군을 좋아하니 군께서 즉위하셨는데, 이제 공자 윤이 장성했습니다. 먼저 공자 윤을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군을 위하여 자윤(子允)을 죽이겠으니 군께서는 저를 상(相)으로 삼아 주십시오."
이에 노 은공이 놀라 말했다. "어찌 그런 소리를 하는가? 윤이 임금이 되라는 것이 선군의 명령이다. 나는 윤이 어렸기 때문에 대신 섭정한 것이다. 이제 윤이 장성했으니 나는 토구(菟裘)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려 한다. 군주의 자리는 이미 태자 윤에게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공자 휘는 은공의 말을 듣고, 이 일이 공자 윤에게 새어나가면 그가 자기를 죽일까 두려웠다. 이에 공자 휘가 공자 윤에게 은공을 모함했다."임금이 그대를 죽이고 진짜 임금이 되려고 합니다. 제가 그대를 위해 임금을 죽이겠습니다."
이에 공자 윤이 허락했다. 11월, 공자 휘가 사람을 보내 노 은공을 시해하고 공자 윤을 세우니 그가 바로 환공(桓公)이다.
2.2.3. 노환공
노 환공 원년(기원전 711년), 정나라가 노나라에 벽옥을 선물했다. 일전에 노나라와 정나라가 팽전을 허전과 맞바꿀 때 팽전은 작고 허전은 커서 노나라가 더 손해였으므로 그만큼의 값나갈 물건을 더 얹어준 것이었다.노 환공 2년(기원전 710년), 송나라가 뇌물로 바친 세발솥을 주공 단의 종묘인 태묘(太廟)에 두자 군자들이 이를 비웃었다. 당초 제후국들이 송나라에서 발생한 내란을 평정하려고 했지만 송나라가 뇌물을 주었으므로 그만두었다.
노 환공 3년(기원전 709년), 공자 휘를 제나라로 보내 부인을 맞이하니 그녀가 바로 문강(文姜)이다. 그녀는 제 희공의 딸이자, 제 양공과 제 환공의 누이였다.
노 환공 6년(기원전 706년), 문강이 아들을 낳았는데 환공과 생일이 같았으므로 이름을 동(同)이라고 했다. 동(同)이 자라서 태자가 되었다.
노 환공 16년(기원전 696년), 환공이 송공, 채후, 위후와 조(曹)나라에서 모여 정나라를 치는 일을 꾸미고는 마침내 정나라를 쳐 려공(厲公)을 정나라에 들여보냈다.
노 환공 18년(기원전 694년) 봄, 환공이 문강과 함께 제나라로 가려고 했다. 이때 노나라 대부 신수(申繻)가 말했다.
"여자에게는 남편이 있고,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어 서로 모독하지 않는 것을 예가 있다고 하니, 이를 어기면 반드시 패망합니다."
하지만 환공이 이를 무시하고 그냥 갔다. 노 환공이 제나라에서 제 양공(齊襄公)이 문강과 근친상간하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격노한 환공이 문강에게 화를 내자, 문강이 오빠인 제 양공에게 알렸다. 여름 4월 병자일, 제 양공이 노 환공에게 연회를 베풀어주었고, 환공이 취하자, 제 양공이 공자 팽생(彭生)을 시켜 노 환공을 안게 하여 늑골을 부러뜨리니 환공이 수레에서 죽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게 말했다.
"우리 임금이 제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했으나 책임을 물을 데가 없다. 팽생을 죽여 제후들 사이에 퍼진 나쁜 소문을 없애라."
제 양공이 이에 팽생을 토사구팽하고 죽였다.억울하게 시해당한 환공의 뒤를 이어 문강의 아들이자 제 양공, 제 환공의 외조카인 태자 동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노나라의 장공(莊公)이다.
2.2.4. 노장공
남편인 노 환공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문강은 노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제나라에 머물렀다.기원전 696년 위(衛)나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위 혜공(衛惠公)을 치고 위후 검모를 임금으로 세웠다. 위 혜공이 제나라로 달아났다.
노 장공 5년(기원전 689년), 위나라를 치고, 위 혜공을 위나라로 들여보냈다.
노 장공 8년(기원전 686년), 처음에 제 양공은 연칭(連稱)과 관지보(管至父)로 하여금 규구(葵丘)를 지키도록 했는데, 오이가 나오는 철에 가서, 오이철이 되면 교대하도록 했다. 이에 연칭과 관지보가 가서 1년 동안 수자리를 섰으나, 오이철이 되었는데도 양공은 그들을 교대시키지 않았다. 둘은 화가 나 제 장공의 손자인 공손 무지(公孫無知)와 모의했다.
제 양공이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를 쏘았다. 멧돼지가 일어서서 울었는데 양공이 이를 보고 자기가 죽인 공자 팽생인 줄 알고 깜짝 놀라 수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고 신발을 잃어버렸다. 돌아와서 자기 신발 담당자를 채찍질했다. 공손 무지, 연칭, 관지보가 이를 듣고, 사병을 거느린채 궁을 습격했다. 신발 담당자를 만나자 그가 말했다.
"일단 기다리십시오. 궁인들이 놀라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공손 무지가 믿지 않았다. 이에 신발 담당자가 자기 상처를 보여주니 믿고 기다리며 신발 담당자가 먼저 들어가도록 했다. 신발 담당자가 즉시 들어가서, 양공을 지게문 사이에 숨겼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공손 무지가 불안해하며 궁에 들어갔다. 신발 담당자가 돌아와 양공의 신하들과 함께 공손 무지를 공격했으나 전부 죽었다. 무지가 궁에서 양공을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이 지게문 아래로 사람의 발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양공이었다. 공손 무지가 즉시 양공을 죽이고 제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제나라 공자 규(糾)가 노나라로 도망쳐왔다. 공자 규는 어머니가 노나라 여자였다.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이 그를 보필했다. 또 다른 공자 소백(小白)은 거(莒)로 도망쳤고, 포숙(鮑叔)이 그를 보필했다.
공손 무지가 얼마 못가고 죽자, 고혜(高傒)와 국의중(國懿仲)이 먼저 거나라에 있었던 소백을 불렀다. 노나라도 역시 군대를 보내 공자 규를 제나라에 보내으며, 관중은 따로 군사를 데리고 거나라의 길을 막았다. 매복했던 관중이 소백의 띠걸이에 화살을 맞추었다. 소백은 죽은 척 했고, 관중은 사람을 시켜 노나라로 가서 자신이 소백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이에 공자 규는 천천히 제나라로 갔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소백이 들어와 있었다. 그가 이른바 춘추 5패의 첫번째 패자가 된 제나라의 환공(桓公)이었다.
가을, 건시(乾時)에서 제나라와 노나라가 싸우니 노군이 패배해 달아났다. 제나라가 노나라에 편지를 보냈다.
공자 규는 우리 형제라 차마 죽일 수 없으니 노나라가 죽여주시오. 소홀과 관중은 우리의 원수라 그들을 젓갈로 만들면 만족하겠으니 그들은 보내주시오.
이에 소홀이 자살했다. 노나라 사람 시백(施伯)이 말했다."제나라가 관중을 얻으려 함은 그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쓰려는 것이니, 제나라가 그를 얻으면 노나라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차라리 죽여서 시체를 보내야 합니다."
노 장공이 듣지 않고 관중을 산 채로 제나라로 보냈다. 제 환공이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다.노 장공 13년(기원전 681년), 제 환공이 노나라를 침공하자 노나라 군대가 패배했다. 노 장공이 수읍(遂邑)을 바쳐 강화하고자 하니 제 환공이 허락하고 노 장공과 가(柯)에서 모였다. 이때 조말(曹沬)이 비수로 환공을 제단 위에서 위협하며 말했다.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시오!"
제 환공이 땅을 돌려주겠다고 하자, 조말이 비수를 버리고 물러갔다.제 환공이 뒤늦게 후회하며 땅도 돌려주지 않고, 조말도 죽이고 싶어했다. 이에 관중이 말했다.
"협박당해 허락했더라도 맹세는 맹세입니다. 이를 어긴다면 제후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제 환공이 노나라에 땅을 돌려주었다. 노 장공 23년(기원전 671년), 노 장공이 제나라에 가서 토지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참관했다.
노 장공 32년(기원전 662년), 당초 장공이 누각을 쌓다가 당씨(黨氏)의 집을 내려다보았는데, 맹임(孟任)을 보고 반해 그녀를 부인으로 삼겠다고 약속하며 팔을 베어 맹세했다. 맹임이 반(斑)을 낳았다. 반이 자라서 량씨(梁氏)의 딸을 좋아하여 그녀를 보러 갔다. 그때 말 사육사인 락(犖)이 량씨의 딸과 같이 놀고 있었다. 이에 반이 화가 나 락을 채찍질했다. 노 장공이 이를 듣고 말했다.
"아예 죽여야지, 채찍질만 하고 내버려두면 안 된다."
하지만 반은 락을 죽이지 못했다.때마침 장공이 병들었다. 장공한테는 동생이 셋 있었는데, 제일 나이든 동생이 경보(慶父)였고, 그 다음이 숙아(叔牙)였으며, 그 다음이 계우(季友)였다. 계우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노 환공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니 점쟁이가 말했다.
"사내아이이고, 이름은 우(友)입니다. 계우가 없으면 노나라가 번창하지 못합니다."
계우가 태어나고 보니 손바닥에 友 같은 모양이 있어 그것을 이름으로 하고, 호를 성계(成季)라고 했다. 노 장공은 애강(哀姜)이라는 제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들였으나 애강은 자식이 없었다. 애강의 여동생은 숙강(叔姜)이라고 했는데, 장공과 숙강은 아들 개(開)를 낳았다. 장공에게 적자가 없었고, 장공이 맹임을 가장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반을 세우고 싶어했다. 장공이 둘째 동생인 숙아에게 후계자를 누구로 할지 물었다. 숙아가 이에 말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대를 잇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대를 잇는 것은 노나라의 관례입니다. 경보가 있어 대를 이을 수 있거늘 군께서는 무엇을 근심하십니까?"
이에 장공이 두려워하며 숙아를 내보내고, 막내 동생인 계우에게 물었다. 계우가 말했다."죽음으로 반을 세우겠습니다."
장공이 말했다."숙아는 경보를 세우려 하던데, 어찌해야 하나?"
계우가 말했다."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계우가 장공의 명령이라 하며 형인 숙아를 침무씨(鍼巫氏)의 집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침계(鍼季)를 시켜 숙아에게 짐주(鴆酒)를 마시도록 겁박하며 말했다."이것을 마신다면 후손에게 제사를 받겠으나, 그러지 않는다면 후손도 없을 것이오."
숙아가 결국 짐주를 마시고 죽었으며, 이후 노나라는 숙아의 후손을 숙손씨(叔孫氏)라고 했다.8월 계해일, 노 장공이 죽고, 계우가 반을 옹립했다.
2.2.5. 노군반, 노민공, 노희공
이전에 노 장공의 첫번째 동생인 경보는 형 장공의 정실부인으로 그에게는 형수였던 애강(哀姜)과 간통하면서 애강의 여동생인 숙강(叔姜)의 아들 개(開)를 임금으로 세우고자 했다. 장공이 죽고 계우가 맹임의 아들인 반을 옹립하자 10월 기미일에 경보가 반에게 맞았던 말 사육사 락(犖)을 시켜 반을 시해했다. 이에 계우는 그의 어머니가 진(陳)나라 여자였기에 진(陳)으로 달아났다. 경보가 마침내 개(開)를 옹립하니 그가 바로 민공(湣公)이다.노 민공 2년(기원전 660년), 경보와 애강이 갈수록 심하게 간통했다. 이에 경보와 애강은 민공 개를 죽여버리고 경보를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후 경보가 복의(卜齮)를 시켜 민공을 무위(武闈)에서 습격하여 시해했다. 계우가 이를 듣고 진(陳)나라에서 민공의 동생인 신(申)과 함께 주(邾)나라로 가서 노나라에 들어가려고 했다.
노나라 사람들이 두 명의 임금을 죽인 역적 경보를 죽이려 하자, 경보가 거(莒)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계우가 신(申)을 받들고 들어와 진(陳)군의 도움을 받아 그를 옹립하니, 그가 이른바 희공(釐公)이다. 경보와 간통하여 역적질을 한 애강은 주(邾)나라로 달아났다.
계우가 뇌물을 가지고 거나라로 가서 형인 경보를 요구하며 죽이려 하니, 경보가 해사(奚斯)를 보내 망명하기를 청했다. 계우가 들어주지 않고, 해사에게 울면서 돌아가라고 했다. 해사가 울면서 돌아가자, 경보가 이를 듣고 절망하여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제 환공은 분란을 일으킨 애강을 주(邾)나라에서 불러 죽인 다음 노나라에서 욕보였다. 노 희공이 그녀를 묻어달라고 청했다.
노 희공 원년(기원전 659년), 희공이 계우에게 문양(汶陽)과 비(鄪)를 봉했다. 계우가 재상이 되었는데 그의 후손을 계손씨(季孫氏)라고 했다.
경보가 자살한 뒤 노 희공은 계우의 요청에 따라 경보의 아들인 맹손오(孟孫敖)를 성(成)에 봉했다. 역적 경보의 후손을 맹손씨(孟孫氏)라고 했다.
노 희공 17년(기원전 643년), 제 환공이 죽었다.
노 희공 24년(기원전 636년), 희진에서 희중이가 즉위했다. 그가 바로 춘추 5패의 두번째 패자가 된 문공(文公)이다.
노 희공 25년(기원전 635년), 희진의 문공이 양번(陽樊)에 이르러 온(溫)을 포위하고, 종주국인 주(周)나라에 양왕(襄王)을 들여보낸 뒤 왕의 동생인 대(帶)를 죽였다.
노 희공 27년(기원전 633년), 초 성왕이 송나라를 포위했다.
노 희공 28년(기원전 632년), 성복(城濮)에서 희진군이 초군을 크게 이겼다.
노 희공 30년(기원전 630년), 희진의 문공과 영진의 목공이 정나라가 초나라의 편을 든 것을 이유로 정나라를 포위했다가 목공이 자국인 영진에 이득이 될 것 같지 않아 돌아가자 문공 휘하의 희진군도 돌아갔다.
노 희공 32년(기원전 628년), 희진에서 문공이 죽고 아들 양공(襄公)이 즉위했다. 영진의 목공이 군대를 보내 정나라를 쳤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던 도중 양공의 희진군이 효산에서 영진의 군대를 습격패 대파했다.
노 희공 33년(기원전 627년), 희공이 죽고 아들 흥(興)이 즉위하니 그가 문공(文公)이다.
2.2.6. 노문공
노 문공 원년(기원전 626년), 초(楚)나라의 태자 상신(商臣)이 그 아비인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즉위하니 이가 바로 초 장왕의 아버지 초 목왕이었다.노 문공 3년(기원전 624년), 희진의 양공이 노 문공에게 진나라에 와서 조회하지 않는다며 성토했다. 이에 문공이 희진으로 가니, 여름 4월 기사일 양공이 대부 양처보에게 명령하여 문공과 결맹하도록 했다. 희진의 일개 대부인 양처보가 한 나라의 제후인 노 문공과 결맹했으니 이는 희진이 노나라는 자신들의 아래라고 보며 노나라를 모욕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희진은 노나라에 사과하며 임금끼리 결맹하기로 했다. 그렇게 노 문공은 희진의 양공(晉襄公)을 알현했다.《춘추》는 노 문공이 희진에 간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
노 문공에게는 부인이 둘 있었는데, 첫번째 부인은 제나라 여자인 애강(哀姜)으로, 아들 악(惡)과 시(視)를 낳았다. 두번째 부인이었던 경영(敬嬴)은 총애를 받았고, 아들 퇴(俀)를 낳았다. 공자 퇴는 동문양중(東門襄仲)과 내통했는데, 동문양중이 그를 세우려 하자 숙중(叔仲)혜백(惠伯)이 불가하다고 했다.
동문양중은 희성 동문씨이며 이름은 수(遂)였다. 노 희공의 아우였으며 노 장공의 아들이었다. 노나라의 동문에 거주했으므로 동문씨를 사용했다. 동문수, 공자 수, 중수(仲遂)라고도 불렸고, 시호가 양(襄)이었다.
숙중혜백은 희성 숙중씨이며, 이름은 팽생(彭生)이고 시호는 혜(惠)다. 숙아(叔牙)의 손자였으며 무중휴(武仲休)의 장남이었다.
맹목백(孟穆伯)은 희성 맹손씨이며, 이름은 오(敖)이고 시호는 목(穆)인데 공손 오(公孫敖)라고도 불렸다. 그는 역적인 맹경보(孟慶父)의 아들이었으며, 노 환공(魯桓公)의 손자였다. 맹목백은 거(莒)나라에서 대기(戴己)와 결혼하여 맹문백(孟文伯)을 낳았고, 대기의 여동생이었던 성기(聲己)는 함께 시집을 와 맹혜숙(孟惠叔)을 낳았다. 대기가 죽자 맹목백은 다시 거나라에 가서 재혼하려고 했으나, 거나라 사람들은 성기가 있지 않냐며 거절했다.
노 문공 7년(기원전 620년), 서(徐)나라가 거(莒)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맹목백이 거나라에 가서 동맹을 맺고, 동시에 사촌형제인 동문양중(東門襄仲)을 위해 혼인을 주선했다. 그런데 맹목백이 거나라 여인을 보고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자기가 그녀와 결혼했다. 이에 분노한 동문양중이 맹목백을 공격하려 했고, 노 문공도 이를 허락하려고 했다. 그러나 숙중혜백이 간언했다.
"전쟁이 안에서 일어나면 난(亂)이라 하고, 외부에서 일어나면 구(寇)라고 합니다. 구라도 사람을 해치는데, 난은 스스로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지금 신하들 사이에서 난이 일어나는데도 군주께서 막지 않으신다면, 외부의 적이 침입할 때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노 문공이 이를 듣고 맹목백을 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숙중혜백이 둘을 화해시켜, 동문양중은 거나라 여인을 아내로 맞지 않고, 맹목백은 그녀를 돌려보냈다. 노 문공 8년(기원전 619년), 맹목백은 주 양왕의 장례에 참여하고자 성주(成周, 낙읍)로 가던 도중, 예물을 갖고 거나라로 튀었다. 노나라는 그의 아들 맹문백을 맹손씨의 종주로 세웠다. 맹목백은 제나라에서 두 아들을 낳고 귀국을 요청했다. 맹문백이 대신 청했지만 동문양중은 그가 노나라 조정에 복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맹목백은 명령을 따르며 귀국한 뒤에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고, 3년 뒤 다시 가족을 데리고 거나라로 떠났다.
노 문공 9년(기원전 618년), 초나라의 투월초(鬪越椒)가 사신으로 왔는데 태도가 매우 교만했다. 이에 숙중혜백이 예언했다.
"저자가 반드시 약오씨(若敖氏)를 멸망시키리라."
노 문공 11년(기원전 616년) 10월 갑오일, 노나라가 함(咸)에서 적(翟)을 무찌르고 장적(長翟)의 교여(喬如)를 사로잡았으며, 부보종생(富父終甥)이 그 목을 찔러 죽이고 그 머리를 자구(子駒)의 문에 묻고는 자신의 아들 선백(宣伯)에게 그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당초 송 무공(宋武公) 때 수만(鄋瞞)이 송나라를 치자, 사도(司徒) 황보(皇父)가 군대를 거느려 이를 막으니, 장구(長丘)에서 적(翟)을 무찌르고 장적(長翟)의 연사(緣斯)를 사로잡았다. 희진이 로(路)나라를 멸망시키고 교여의 동생 분여(棼如)를 사로잡았다. 제 혜공 2년, 수만이 제나라를 침략하자, 제나라의 왕자성보(王子城父)가 그 동생 영여(榮如)를 사로잡아, 그 머리를 북문에 묻었다. 또한 위(衛)나라 사람들이 그 막내동생인 간여(簡如)를 사로잡았다. 수만이 이로써 멸망했다.
당시 노 문공이 숙손득신을 보낼까 하여 점을 쳤는데 매우 길했다. 숙손득신이 장적의 우두머리 세 명인 교여(侨如), 훼(虺), 표(豹)를 사로잡았다. 숙손득신은 이 세 적장의 이름을 따서 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그리하여 아들들이 바로 교여, 훼, 표가 되었다.
노 문공 15년(기원전 612년), 계문자(季文子)가 희진에 사신으로 갔다.
맹목백의 관이 노나라로 돌아왔다. 동문양중은 장례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 숙중혜백이 설득했다.
"시작이 좋지 않았더라도 끝을 잘 맺을 수는 있다."
동문양중이 이를 듣고 장례에 참석했다.노 문공 18년(기원전 609년) 봄, 제 의공이 노나라에 대한 공격 날짜를 정했지만 곧 병이 들었다. 의사가 그에게 가을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노 문공은 이를 듣고 점을 치게 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1. 제나라의 의공은 출병하기 전에 죽는다. 2. 병 때문은 아니다. 3. 노 문공은 이를 볼 수 없다. 4. 숙중혜백에게 재앙이 생긴다. |
제 의공이 공자였을 때 병융(丙戎)의 아버지와 사냥하다가, 노획물을 다투어 이기지 못했다. 즉위하자 병융의 아버지의 발을 자르고, 병융을 시종으로 삼았다. 또한 용직(庸職)의 아내가 아름다웠으므로, 공(公)이 궁궐로 들였고, 용직을 마부로 삼았다. 5월에 제 의공(懿公)이 신지(申池)에서 유람했는데, 두 사람이 목욕하며 장난을 쳤다. 용직이 말했다.
"발 잘린 놈의 자식!"
병융이 말했다."아내 뺏긴 놈!"
서로 교감한 둘은 함께 모의하여 원수인 제 의공과 대나무숲으로 놀러 갔을 때 수레 위에서 의공을 시해하고, 그 시체를 버려둔채 달아났다. 이에 제나라 사람들이 위(衛)나라에 있었던 공자 원(元)을 맞이하여 세우니, 그가 바로 제 혜공(惠公)이었다.노 문공이 죽은 뒤 노나라의 동문양중은 문공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경영(敬嬴)과 결탁했다. 이 때문에 동문양중은 경영의 아들인 공자 퇴를 임금으로 세우고 싶어했다. 그는 애강의 아들인 태자 악이 어리다는 이유로 숙중혜백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때 숙중혜백이 말했다.
"네가 정사를 맡고, 내가 군주를 보좌하면 된다. 군주가 어려도 문제가 없다."
거절당한 동문양중이 제 혜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혜공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노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으므로 동문양중의 요청을 허락했다.겨울 10월, 동문양중이 두 조카손자인 태자 악과 공자 시를 죽이고 공자 퇴를 세웠다. 그리고는 살해당한 태자 악의 명의로 숙중혜백을 불렀다. 숙중혜백의 가신이었던 공염무인(公冉務人)은 궁에 가면 반드시 죽는다며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이에 숙중혜백이 말했다.
"군주의 명령으로 죽는다면 괜찮다."
공염무인이 말했다."정말 군주의 명령이라면 죽어야겠으나 군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숙중혜백은 듣지 않고 궁에 들어갔다. 결국 정변을 일으킨 역적 동문양중이 숙중혜백을 죽이고, 그 시체를 말똥 속에 묻어버렸다. 공염무인은 채나라로 도주했다.공자 퇴가 바로 선공(宣公)이다.
두 아들 악과 시를 잃은 애강이 제나라로 돌아갈때 시장을 지나면서 크게 곡하며 외쳤다.
"하늘이시여! 양중이 무도하여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웠습니다!"
시장 사람들이 모두 곡하니, 노나라 사람들이 이때부터 그녀를 애통함이라는 뜻을 담아 애강(哀姜)이라 불렀다. 이후 노나라의 공실은 쇠약해지고 삼환(三桓.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이 강성해졌다.2.2.7. 노선공
노 선공 4년(기원전 605년), 초나라의 약오씨(若敖氏)가 멸문당했다.노 선공 8년(기원전 601년), 노나라의 정경 동문양중이 죽자 그의 아들인 공손 귀보(公孫 歸父, 동문귀보)가 정경이 되었다.
노 선공 9년(기원전 599년), 진(陳)나라의 대부(大夫) 하징서(夏徵舒)가 그 주군인 영공을 시해했다.
노 선공 10년(기원전 598년), 초 장왕(楚莊王)이 진(陳)니라를 쳐 역적 하징서를 죽였다.
이해에 주 정왕(周定王)이 유강공(劉康公)을 노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노나라의 경•대부들에게 예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계손행보(季孫行父) 계문자(季文子)와 맹손멸(孟孫蔑) 맹헌자(孟獻子)는 매우 검소했고, 숙손교여(叔孫侨如)와 동문씨의 공손 귀보(公孫歸父)는 사치스러웠다. 맹손멸은 맹문백(孟文伯)의 아들이자 맹손씨의 제4대 종주였으며, 흔히 중손멸(仲孫蔑)이라고도 불린다. 숙손교여는 시호가 선(宣)이어서 숙손선백(叔孫宣伯) 또는 숙손선자(叔孫宣子)라고도 불린다. 그는 숙손득신(叔孫得臣)의 아들이었다.
유강공이 주나라로 돌아가자 주 정왕이 물었다.
"노나라의 경•대부들 중 누가 현명한가?"
유강공이 대답했다."계손행보와 맹손멸은 검소하니 가문이 보전되겠으나 숙손교여와 공손 귀보는 사치하므로 화가 닥칠 것입니다."
주 정왕이 다시 물었다."그들이 얼마나 가겠는가?"
유강공이 말했다."공손 귀보는 숙손득신보다 지위가 낮지만 더 사치하므로 2대 이상 녹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숙손교여는 계손행보와 맹손멸보다 지위가 낮고 역시 사치하므로 3대를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노 선공 12년(기원전 597년), 초 장왕(楚莊王)이 정나라를 포위했다. 이에 정 양공(鄭襄公)이 항복하니 초 장왕이 돌아갔다. 희진이 정나라를 구하러 왔으나 필(邲)에서 초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초나라의 장왕이 세번째로 천하의 패권을 잡았다.
노 선공 15년(기원전 594년), 계손행보 계문자(季文子)가 초세무(初税畝) 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토지 면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로, 공전(公田) 이외의 사전(私田)에 대해서도 면적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이후 춘추시대의 양강인 북방의 희진과 남방의 초나라 등이 이를 모방했다. 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초세무는 예(禮)가 아니며, 곡식 생산량이 1/10을 넘지 않게 하여 재정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좌전》(左傳)
《좌전》(左傳)
왜 초세무를 기록했는가? … 밭의 면적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음을 비판한 것이다.
《공양전》(公羊傳)
《공양전》(公羊傳)
초세무는 공전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밭의 면적을 따라 세금을 매겨 1/10을 거두는 것이다.
《곡량전》(穀梁傳)
정전제(井田制) 아래에서 토지는 다음 두 종류로 나뉘었다.《곡량전》(穀梁傳)
공전(公田): 귀족에게 봉토로 지급된 토지이며, 그 면적에 따라 상위 귀족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사전(私田): 귀족 개인이 소유한 토지로, 상위 귀족에게 세금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생산력이 증대되며 황무지가 개간되었고, 세습 귀족들이 토지를 계속 겸병하면서 사전의 수가 증가했다. 이에 따라, 초세무는 기존의 노역으로 공전을 경작하는 제도를 바꾸어, 공•사전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토지를 면적에 따라 과세하는 제도로 전환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실제 점유한 토지 면적에 따라 토지세를 부과하는 제도였다. 또한 사유 토지의 합법성을 사실상 인정하고 토지세를 징수하기 시작한 사건으로, 이후 2600여 년 동안 이어지는 토지세 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초세무는 정전제가 붕괴되고 토지가 약탈·겸병된 이후 농민에게 직접 세금을 부과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중국 고대에는 원래 '임대료(租, 조)'라는 개념이 없었지만, 공전을 함께 경작하던 '조'(助)가 점차 '조세'(租稅)로 변해가는 역사적 과정을 반영한다.
노 선공 16년(기원전 593년), 희진이 수회를 시켜 적적(赤狄)을 멸망시켰다.
노 선공 17년(기원전 592년), 희진은 극극(卻克)을, 노나라는 계손행보 계문자를, 위(衞)나라는 손량부(孫良夫)를, 조(曹)나라는 공자 수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들에게는 모두 장애가 있었는데, 그들이 무슨 장애를 가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나라는 그들이 가진 장애와 똑같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붙여 손님을 접대하니, 제 경공(齊頃公)의 모후가 그 모습을 보고 폭소했다. 이에 희진의 사신인 극극이 분노하여 황하에 걸고 제나라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노 선공 18년(기원전 591년), 선공이 죽고 아들 흑굉(黑肱)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성공(成公)이다. 남쪽에서는 패자인 초 장왕이 죽었다.
2.2.8. 노성공
노 성공 원년(기원전 590년), 계손행보 계문자가 작구갑(作丘甲)이라는 지역 단위의 군사·행정 편제를 시행했다.계손행보 계문자가 말했다.
"동문양중이 노나라에서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워 대국의 도움을 잃었다."
노 성공 2년(기원전 589년) 봄, 제나라가 노나라를 쳐 륭(隆)을 빼앗았다. 이에 노나라가 위나라에 구원 요청을 했고, 위나라는 강국인 희진에 구원 요청을 했다. 여름, 희진이 극극(卻克) 등을 보내 안(鞍)에서 제 경공(齊頃公)을 무찌르니 제(齊)나라가 노나라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었다.
노 성공 3년(기원전 588년), 제 경공(齊頃公)이 희진으로 가서 진 경공(晉景公)을 천자의 예절로 알현코자 했으나 진 경공(晉景公)이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희진이 처음으로 6군(六軍)을 창설하고 한궐, 공삭, 조천, 순추, 조괄, 조전을 경(卿)으로 삼았다.
노 성공 4년(기원전 587년), 노 성공이 희진에 가서 진 경공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했으나 희진이 그를 공경하지 않자 노 성공이 분노하여 희진을 배신하고 초나라를 섬기려 했으나 노나라 내부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노 성공 7년(기원전 584년), 오나라가 담(郯)나라를 쳤다. 담나라는 노나라와 가까웠다. 계문자가 경고했다.
"중국(中國)이 군사를 정비하지 않으니 만이(蠻夷)가 쳐들어온다."
노 성공 8년(기원전 583년), 희진의 사섭(士燮)이 노나라에 사신으로 와서는, 담나라가 오나라를 섬기니 희진이 치려 한다고 말했다. 노 성공은 재물을 주며 공격을 늦춰주길 요청했지만 사섭이 거절했다. 이에 계문자가 숙손득신에게 군대를 이끌고 희진, 제나라, 주(邾)나라 군대와 함께 담나라를 치게 했다.
노 성공 10년(기원전 581년), 희진의 경공이 죽었다. 노 성공이 희진에 가니 희진이 성공을 억류해 성공이 강제로 경공의 장례를 치렀다. 경공을 장사지낼 때 노 성공 말고 다른 제후는 참석하지 않았으니 노나라 사람들이 이를 치욕으로 여겨《춘추》가 기록하지 않았다.
노 성공 13년(기원전 578년), 노 성공이 주 간왕(周簡王)을 알현하기 위해 낙읍으로 가려 했다. 이때 숙손교여가 간왕의 하사품을 받고 싶어서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했다. 숙손교여가 낙읍에 도착하자 주나라의 대부 왕손설(王孫說)이 그를 만나보고, 주 간왕에게 보고했다.
"숙손교여는 다른 속셈이 있습니다. 예물은 빈약하면서 말은 지나치게 아첨하니 이는 분명 그가 스스로 요청해 온 것이며, 그렇다면 하사품을 받으려 한 것입니다."
주 간왕이 몰래 확인해보니 정말이었다. 이에 숙손교여를 일반 사절과 같은 예로 대접했다. 이후 노 성공이 직접 알현하러 오자 맹헌자(孟獻子)가 수행했다. 왕손설이 대화해 보니 맹헌자는 숙손교여와는 달랐다. 이에 주 간왕이 맹헌자에게 많은 하사품을 주었다.노 성공 14년(기원전 577년), 숙손교여가 제나라로 가서 여자를 데려오니 그가 노 성공의 부인인 제강(齊姜)이다.
노 성공 15년(기원전 576년), 오왕(吳王) 수몽(壽夢)과 종리(鍾離)에서 처음으로 모였다.
노 성공 16년(기원전 575년), 성공의 부인 정사(定姒)가 아들 오(午)를 낳았다.
숙손교여가 노 성공의 어머니인 목강(穆姜)과 간통했다. 그들은 계문자와 맹헌자를 제거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음험한 계획을 세웠다. 목강이 아들 노 성공에게 계문자와 맹헌자를 추방하라고 요구했으나 당시 언릉(鄢陵)의 전투 문제 때문에 노 성공이 이를 미루었다. 목강이 분노하여 말했다.
"네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네 동생 공자 언(偃)이나 공자 서(鉏)를 세우겠다!"
노 성공이 이에 궁궐 방어를 보강한 뒤 제후 회담에 늦게 도착했다.6월, 희진과 초나라가 언릉에서 싸웠다. 이때 초 공왕이 눈에 화살을 맞고 패주했다. 이로써 초나라의 패권이 쇠락해졌다.
숙손교여는 희진의 장군 극주(郤犨)에게 뇌물을 주며 말했다.
"노나라에는 계(손)씨와 맹(손)씨가 있어 마치 진나라(희진)에 난씨와 범씨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명령이 그들에게서 나옵니다."
그리고 또 말했다."노나라가 진나라(희진)가 아니라 초나라나 제나라를 섬기려 합니다. 진나라에서 계손행보를 죽여주시면 저는 맹손멸을 죽이겠습니다."
9월, 희진이 계문자를 체포했다. 노 성공은 자숙성백(子叔聲伯)을 보내 진나라에 사과했다. 희진이 이를 받아들여 계손행보를 풀어주었다. 10월, 노나라의 대부들이 숙손교여를 추방하기로 했다. 이에 숙손교여가 제나라로 도주했다.
숙손교여가 동생인 숙손표(叔孫豹)에게 말했다.
"우리 선조의 공덕이 있으므로 노나라는 결국 우리 가문을 유지할 것이다. 노나라가 너를 부르면 돌아가겠느냐?"
숙손표가 말했다."이미 그럴 생각입니다."
12월, 노나라가 숙손표를 불렀다. 숙손표는 형인 숙손교여에게 알리지 않고 곧바로 돌아갔다. 노나라가 그를 숙손씨의 종주로 삼았다. 숙손교여가 제나라에 있을 때 그의 딸 목맹희(穆孟姬)가 제 영공(齊靈公)에게 시집을 가 총애를 받았고 공자 저구(杵臼)를 낳았다. 그가 바로 제 경공(齊景公)이다. 그러나 숙손교여는 다시 제 영공의 어머니인 성맹자(聲孟子)와 간통했다. 이후 숙손교여는 제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도주했다. 위나라에서도 그는 여전히 존귀했다.노 성공 18년(기원전 573년), 성공이 죽고 아들 오(午)가 즉위하니 그가 이른바 양공(襄公)이다. 이때 양공의 나이 불과 3세였다.
2.2.9. 노양공
노 양공 원년(기원전 572년), 희진이 도공(悼公)을 세웠다.노 양공 4년(기원전 569년), 어린 양공이 희진에 조회했다.
노 양공 5년(기원전 568년), 계손행보 계문자가 졸했다. 그의 장례는 검소했다. 계손씨 집안의 여인들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말들은 곡식을 먹지 않았으며, 창고에는 보옥이 없었다. 군자가 말했다.
"계문자는 청렴하고 충성스러웠다."
계손행보의 아들 계손숙(季孫宿) 계무자(季武子)가 뒤를 이어 계손씨의 종주가 되었다.노 양공 7년(기원전 566년), 계무자가 계손씨의 영지인 비(費)에 성을 쌓았다.
노 양공 9년(기원전 564년), 희진과 함께 정나라를 쳤다. 이해의 노 양공은 12세였다. 희진의 도공이 위(衛)나라에서 노 양공의 관례(冠禮)를 행했는데, 계무자가 주군을 따르며 예를 도왔다.
노 양공 11년(기원전 562년), 삼환씨(三桓氏.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가 3군(三軍)을 각각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노나라에는 본래 중군(中軍)이 없고 오직 상•하 양군(上下兩軍)만이 있어 모두 공실에 소속되었으며, 전쟁이 있으면 3경(卿)이 번갈아 가며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정벌했다. 영진(秦)이 희진을 공격했다.
노 양공 12년(기원전 561년), 양공이 희진에 조회했다. 오왕 수몽이 죽었다.
노 양공 13년(기원전 560년), 오왕 제번이 상을 마치고 현명한 계찰(季札)에게 양위하고자 했으나 계찰이 한사코 사양하니 포기했다.
노 양공 14년(기원전 559년), 희진의 도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서쪽의 영진(秦)을 쳤다. 희진군이 경수(涇水)를 건너 영진(秦)군을 크게 무찔러 역림(棫林)에 이르고서 돌아갔다.
노 양공 15년(기원전 558년), 희진의 도공이 죽었다.
노 양공 16년(기원전 557년), 희진 도공의 아들 평공(平公)이 즉위했다. 희진이 제 령공(齊靈公)을 미하(靡下)에서 패퇴시켜 제 령공이 달아났다. 희진군이 추격하여 수도 임치를 포위하고 외성 안을 살육했다. 제나라가 성을 수비하니 희진군이 돌아갔다.
노 양공 21년(기원전 552년), 양공이 희진의 평공을 배알했다. 희진의 난령(欒逞)이 제나라로 도주했다.
노 양공 22년(기원전 551년), 공자가 태어났다.
노 양공 23년(기원전 550년), 제나라의 후장공(後莊公)이 난령을 곡옥으로 은밀히 보내고 제나라군이 태항산을 오르며 난령이 곡옥의 군사로 강(絳)을 습격했다. 난령이 패배하여 곡옥으로 달아났으나 곡옥 사람들이 난령을 죽였다.
노 양공 25년(기원전 548년), 제나라의 최저(崔杼)가 주군인 장공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인 경공(景公)을 세웠다. 오왕 제번이 죽었다. 오왕 제번이 동생들에게 나라를 넘기면서 마지막으로 현자인 계찰에게 주려고 했다. 계찰이 연릉(延陵)에 봉해졌기 때문에 연릉계자(延陵季子)라고 불렸다.
노 양공 28년(기원전 545년), 제나라의 경봉(慶封)이 오나라로 도망쳤다.
노 양공 29년(기원전 544년), 오(吳)나라의 현인인 연릉계자(延陵季子)가 노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주악(周樂)에 대해 묻고 그 뜻을 모두 알아차리니, 노나라 사람들이 존경했다.
노 양공 31년(기원전 542년), 양공이 죽었다.
노 양공의 아들 노군 야(魯君 野)가 이어받았으나 슬퍼함이 지나쳐 3개월 후인 9월에 죽었다.
노 양공(襄公)의 부인 경귀(敬歸)의 동생 제귀(齊歸)의 아들인 주(裯)를 숙손목숙(叔孫穆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무자(季武子)가 옹립하니, 그가 소공(昭公)이다.
2.2.10. 노소공
소공 주는 어리석어 19살이 되어도 어린아이 같았다.숙손표(叔孫豹) 목숙(穆叔)은 숙손훼(叔孫虺)의 아들이며 숙손씨의 제5대 종주였다. 그는 공자 주(裯)를 세우길 꺼리며 말했다.
"태자가 죽으면 나이든 공자를 세우고, 나이가 같으면 어진 이를 세우고, 의로움이 같으면 점을 칩니다. 지금 주(裯)는 적자가 아니며, 상중인데도 슬퍼하기는커녕 기뻐하는 얼굴입니다. 만약 그를 세운다면 필히 계씨(季氏)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계무자가 이를 듣지 않고 공자 주를 세웠다.공자 주는 장례를 하며 상복을 세 번 바꾸었다.《주례》에 따르면 상례 동안 상복을 바꾸면 안 되었다. 이에 군자들이 말했다.
"그는 오래가지 못하리라."
노 소공 원년(기원전 541년), 초나라의 공자 위(圍)가 정나라를 방문했다. 그는 공손 단(公孫 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 이때 오거(伍擧)가 부사(副使)로 수행했다. 초나라 일행이 정나라의 객관(외국 사신 숙소)으로 들어가려 하자 정나라 사람들이 이를 꺼렸다. 그래서 행인(외교 담당 관리) 자우(子羽)를 보내 공자 위에게 설명하고 성 밖에 머물게 했다. 외교 의례(聘問)가 끝난 뒤 공자 위는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성 안으로 들어와 신부를 맞이하겠다고 요구했다. 이때문에 정나라의 재상 자산(子産)이 걱정했다.
"초나라가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나라를 기습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자우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우리 나라(정나라)는 작고 좁아서 당신의 수행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습니다. 성 밖 들판에 제단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혼례를 거행하기를 바랍니다."
즉 입성을 거절한 것이었다. 이에 초나라는 무장하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초왕 겹오가 병들었음을 전해 듣고 공자 위가 본국으로 돌아갔다.12월 기유(己酉)일, 공자(公子) 위(圍)가 들어가 겹오의 병을 문병하는 척하며 목을 졸라 시해하고, 이어서 왕의 아들들인 막(莫)과 평하(平夏)를 죽인 다음 즉위하니 그가 바로 초 령왕(楚靈王)이었다.
노 소공 3년(기원전 539년), 희진(晉)에 조회하러 가다가 하(河)에 이르러 진 평공이 오지 말라 하여 되돌아오니 노나라가 이를 수치스러워했다. 제 경공(景公)이 안영을 희진에 보내니 안영이 숙향에게 말했다.
"제(齊)나라의 정권은 마침내 전씨(田氏, 규성 전씨)에게 돌아갈 것이오. 전씨는 큰 덕은 없으나, 공적인 권력을 사사로이 쓰면서도 민(民)에게는 은덕이 있으니, 민(民)들이 그를 사랑하오."
노 소공 4년(기원전 538년), 초 령왕(楚靈王)이 신(申)에서 제후들을 모으니 노 소공은 칭병하고 가지 않았다. 희진(晉), 송(宋), 노(魯), 위(衛) 모두 참여하지 않았다.
노 소공 7년(기원전 535년), 계무자가 죽었다. 계무자의 아들 흘(纥)이 있었지만, 그는 대부로 임명되기도 전에 죽었다. 결국 계손숙 무자의 손자인 계손의여(季孫意如)가 다음 계손씨의 종주가 되었다.
노 소공 8년(기원전 534년), 초 령왕이 장화대(章華臺)를 다 짓고 노 소공을 불렀다. 소공이 가서 축하하자 초 령왕이 연회석에서 우호를 표하려고 소공에게 대굴궁을 주었는데 곧 이를 후회했다. 이에 왕의 마음을 읽은 초나라의 대부가 노 소공을 만나, 제(齊), 희진(晉), 월이 대굴궁을 갖길 원하는데 소공이 그를 가져가면 대굴궁을 얻겠다고 노나라를 공격할 거라 겁을 주니 소공이 초 령왕에게 대굴궁을 돌려주었다. (《좌전》은 7년의 일로 기록한다)
노 소공 9년(기원전 533년), 초 령왕이 공자 기질(棄疾)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진(陳)나라를 치게 하니 규성 진씨의 진나라가 멸망했다.
노 소공 10년(기원전 532년), 희진의 평공이 죽고 아들 소공(昭公)이 즉위했다.
노 소공 11년(기원전 531년), 초 령왕이 채 령후(蔡靈侯)를 불러 술에 취하게 한 뒤 죽였다.
노 소공 12년(기원전 530년), 희진(晉)에 조회하러 가다가 하(河)에 이르러 진 소공이 또 오지 말라 하여 되돌아왔다.
노 소공 13년(기원전 529년), 초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태자 녹(祿)이 살해당하고, 공자 비(公子 比)가 왕이 되었으며, 공자 석(皙)이 영윤으로, 공자 기질이 사마(司馬)가 되었다. 이에 초 령왕이 절망하여 떠돌아다니다가 우윤(芋尹) 신해씨(申亥氏)의 집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이후 신해가 두 딸을 순장했다. 공자 기질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공자 비와 공자 석이 자살하고 기질이 즉위하니 그가 초 평왕(楚平王)이다.
노 소공 15년(기원전 527년), 소공이 희진(晉)에 조회하러 갔다. 초 평왕이 비무기(費無忌)를 영진(秦)에 보내 태자 건(建)을 위해서 태자비를 맞아들이게 했다.
노 소공 16년(기원전 526년), 소공이 희진에 있을 때 진 소공이 죽었다. 희진(晉)이 진 소공의 장례를 치르라며 노 소공을 억류하니 노나라가 이를 수치스러워했다.
노 소공 13년(기원전 523년), 초 평왕이 오사(伍奢)와 오상(伍尚)을 죽이니 오서(伍胥)가 도주했다.
노 소공 21년(기원전 521년), 희진의 경공(頃公)을 알현하러 가다가 하(河)에 이르러 희진(晉)이 오지 말라 하니 되돌아왔다.
노 소공 22년(기원전 520년), 주 경왕(周景王)이 죽자 왕자들이 왕위를 다투었다. 희진(晉)의 6경(六卿)이 주 왕실의 혼란을 평정하고 경왕(敬王)을 세웠다.
노 소공 25년(기원전 517년), 계평자(季平子) 계손의여[6]와 후소백(郈昭伯) 후손악(郈孫惡)이 투계(닭싸움)를 했다. 계손씨는 닭 날개에 갑옷을 입혔고, 후손씨(후씨)는 발톱에 쇠를 끼웠는데 계손씨의 닭이 졌다. 이 결과에 계손씨가 화가 나서 보복으로 후손씨의 택지(宅地)를 빼앗아 자기의 집에 보태었다. 어이없는 일을 당한 후소백이 계평자 계손의여에게 화를 냈다. 한편 장소백(藏昭伯)의 동생인 회(會)가 장(손)씨를 거짓으로 참소하고는 계손씨의 집에 숨으니, 화가 난 장소백이 계손씨의 사람을 가두었다. 이에 계평자 계손의여가 분노하여 장손씨의 어른을 가두었다. 결국 계손씨와 사이가 벌어진 장손씨(장씨)와 후손씨(후씨)가 주군인 노 소공에게 이 난리를 아뢰었다.
9월 무신일, 소공이 병력을 이끌며 계손씨의 집으로 치고 들어갔다. 이때 계평자가 누대에 올라 말했다.
"군께서는 참소를 들어 신의 죄를 살피지 않으시고 죽이려 하시니, 청컨대 저를 기수(沂水) 기슭으로 보내주십시오."
소공이 불허했다. 계평자가 다시 비읍(鄪邑)에 가두어달라고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수레 다섯 대만 가지고 망명하겠다는 요청을 했지만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자가구(子家駒)가 말했다."군께서는 허락하십시오. 정치가 계손씨에게서 비롯된 지 오래이고 따르는 무리도 많으니 무리들이 일을 꾸밀 것입니다."
소공이 듣지 않았다. 후손씨가 말했다."반드시 계손씨를 죽여야 합니다."
이에 소공이 후손씨를 맹의자(孟懿子)에게 사절로 보내 맹손씨를 회유하고자 했다.맹의자는 중손하기(仲孫何忌)였는데, 시호(諡號)는 의(懿)였다.
그러던 와중 숙손씨의 사마(司马) 종려(鬷戾)가 휘하 병사들에게 말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종려가 다시 말했다.
"나는 가신일 뿐이라 나라일은 감히 논하지 못한다. 그러나 계손씨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어느 쪽이 우리에게 이득인가?"
모두가 말했다."계손씨가 없다면 숙손씨도 없습니다."
종려가 말했다."그렇다면 계손씨를 구하자!"
마침내 사마 종려가 달려가 숙손씨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성 서북쪽 모퉁이를 무너뜨리고 들어갔다. 이에 노 소공이 패퇴했다. 한편 맹의자(孟懿子)는 사람을 서북 모퉁이에 올라가게 하여 계손씨 쪽을 살피게 했다. 그는 숙손씨의 깃발을 보고 이를 맹의자에게 보고했다. 이에 맹의자는 후손씨의 후소백을 붙잡아 남문 서쪽에서 후소백을 죽였다. 맹손씨는 이어서 주군인 소공의 군대를 공격했다. 삼환이 모두 소공을 치니 패배한 소공은 달아났다.
기해일, 소공이 제나라에 왔다. 제 경공(齊景公)이 말했다.
"청컨대 1,000사(社)로 군을 대우하고자 하오."
25가(家)가 중심이 되어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 1사(社)이다. 1,000사(社)는 25,000가(家)이다.자가(子家)가 말했다.
"주공 (단)의 업적을 버리고 제(齊)나라의 신하가 되라는 것인데 가하겠습니까?"
이에 관두었다.자가가 말했다.
"제 경공은 믿을 수 없으니 서둘러 희진(晉)으로 가는 것만 못합니다."
소공이 듣지 않았다.이후 숙손씨가 제나라로 와 노 소공을 만난 뒤 귀국하여 계평자를 만났다. 계평자는 노 소공을 다시 맞이하고 싶어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노 소공 26년(기원전 516년) 봄, 제나라가 노나라를 쳐 운(鄆)을 빼앗고는 소공이 거기서 살도록 했다.
여름, 제 경공이 노 소공을 좀 돌려보내고 싶어했다. 이에 노나라 본국으로부터 뇌물을 받지 못하게 했다. 계손씨의 가신들인 신풍(申豐)과 여고(汝賈)가 제나라의 대신들인 고흘(高齕)과 자장(子將)에게 곡식 5,000유[7]를 주겠다고 했다. 뇌물을 접수한 자장(子將)이 제 경공에게 말했다.
"여러 신하들이 노군(魯君, 노 소공)을 섬기지 못하니 괴이한 점이 있습니다. 송 원공(宋元公)이 노나라를 위해 희진(晉)에 가서 (노 소공을) 들여보내려 했으나 가던 길에 졸했습니다. 숙손소자(叔孫昭子)가 그 임금을 들여보내려 했으나 병도 없는데 죽었습니다. 하늘이 노나라를 버린 것입니까? 아니면 노군(魯君, 노 소공)이 귀신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까? 원컨대 군께서는 잠시 기다리십시오."
제 경공이 이에 노 소공의 귀국을 돕지 않았다.노 소공 27년(기원전 515년), 위(衛), 송(宋)이 사신을 보내 희진(晉)에 노 소공을 귀국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노 소공 28년(기원전 514년), 노 소공이 희진(晉)에 가서 돌아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계평자가 범헌자(范獻子)에게 뇌물을 받았으므로 진군(晉君)에게 간하니 진 경공(晉頃公)은 곧 그만두고 노 소공을 건후(乾侯)에 살게 했다.
노 소공 29년(기원전 513년), 소공이 운(鄆)에 갔다. 제 경공이 편지를 보냈는데 그 안에서 노 소공을 '주군'(主君)이라 불렀다. 당시 대부도 '주'(主)라고 불렸기 때문에, 제 경공이 노 소공을 대부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한 것이었다. 노 소공은 이를 치욕으로 여기고 분노하여 다시 건후로 갔다.
노 소공 30년(기원전 512년), 희진의 경공(頃公)이 죽고 아들 정공(定公)이 즉위했다.
노 소공 31년(기원전 511년), 희진(晉)이 노 소공을 귀국시키고자 하여 계평자를 불렀다. 이때 계평자가 베옷에 맨발로 와서는 6경을 통해 사죄했다. 6경이 그를 위해 말했다.
"진(晉, 희진)이 (노) 소공을 돌려보내려 해도 민중이 따르지 않습니다."
이에 희진의 정공이 그만두었다.노 소공 32년(기원전 510년), 노 소공이 병에 들었다. 12월 기미일, 건후에서 죽었다. 향년 51세였다.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소공의 아우 송(宋)을 임금으로 삼으니 그가 이른바 노 정공(定公)이다.
2.2.11. 노정공
노 정공이 즉위하자 희진의 조간자(趙簡子)가 사묵(史墨)에게 말했다."계(손)씨가 망하겠는가?"
사묵이 대답하여 말했다."망하지 않습니다. 계우가 노나라에 대공을 세워 비(鄪)를 받고 상경(上卿)이 되었으며, 문자(文子)와 무자(武子)에 이르도록 대대로 그 공업을 늘렸습니다. 노 문공(魯文公)이 졸하자 동문수(東門遂)가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우니 이에 노군(魯君)이 국정을 잃었습니다. 정권이 계(손)씨에게 있은 후 지금까지 네 명의 임금이 있었습니다. 민(民)이 군(君)을 알지 못하니 어찌 나라를 얻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기'(器, 실권)와 '명'(名, 명성)에 신중하여 남에게 빌려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노 정공 4년(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에게 말했다.
"처음 그대들은 영(郢, 초나라의 수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과연 어떠하오?"
둘이 대답했다."초나라의 장수 자상은 탐욕스러워 당(唐)과 채(蔡)가 모두 원망합니다. 왕께서 반드시 크게 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당과 채를 얻으셔야 할 것입니다."
합려가 이에 군대를 전부 몰아 당과 채와 함께 서쪽으로 초나라를 쳐 한수에 이르렀다.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가 출전을 청했으나 합려가 허락하지 않았다. 부개가 말했다."왕께서 이미 신에게 군사를 맡기셨고, 군사는 이득을 으뜸으로 삼는다. 더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마침내 군사 5,000명으로 초군을 기습하니 초군이 대패하여 달아났다. 오왕 합려 역시 추격하니 영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 싸워 초군이 다섯 번 졌다. 초 소왕(楚昭王)이 영(郢)에서 빠져나와 운(鄖)으로 달아났다. 이때 운공(鄖公)의 동생이 소왕을 시해하고자 하니, 소왕이 운공과 함께 수(隨)로 달아났다. 오군이 마침내 영에 들어갔다. 오자서와 백비가 초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하여 그 아비의 원수를 갚았다.노 정공 5년(기원전 505년), 계평자가 졸했다. 이후 계손의여 계평자의 아들인 계손사(季孙斯) 계환자(季桓子)가 계손씨의 종주가 되었다. 공산불뉴(公山不狃)가 장례를 잘 지내니 계환자가 그를 비(费)의 재(宰)로 삼았다. 숙손주구가 숙손씨의 종주가 되었다. 숙손주구(叔孙州仇)는 숙손무숙(叔孙武叔)이라고도 불린다. 숙손성자 숙손불감(叔孙不敢)의 아들이었다.
계평자 계손의여의 가신들 중 양호(陽虎)라는 자가 있었다. 양호는 맹손씨 일족이었으며, 계손씨의 가재(家宰)였다.
양호는 계환자 계손사에게 계평자의 옥 장식을 요구했다. 그러나 계평자의 장례를 맡은 중량회(仲梁怀)가 이를 주지 않았다. 양호는 원한을 품고 공산불뉴를 찾아가 중량회를 제거하자고 상의했다. 그러나 이때 공산불뉴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후 계환자가 장례를 치르며 비성을 지나갈 때, 중량회가 예를 갖추지 않자 공산불뉴가 분노하여 양호의 계획에 동의했다.
가을, 양호는 중량회를 가두었다. 이에 계환자가 화를 내자 양호는 계환자까지 감금해 버렸다. 양호는 중량회를 추방한 후 계환자가 강제로 맹약을 맺자 계환자를 풀어주었다.
노 정공 7년(기원전 503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쳐 운을 빼앗고, 이를 양호에게 주었다. 양호가 노나라를 장악했다. 양호가 계오(季寤)를 세워 계손씨를 장악하고, 숙손첩(叔孙辄)을 세워 숙손씨를 장악하며, 자신이 맹손씨를 장악하려고 했다.
노 정공 8년(기원전 502년), 양호가 계환자 계손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10월 3일, 양호가 앞에서 수레를 몰고 임초(林楚)가 계손사의 수레를 몰고, 양호의 사촌 양월(陽越)이 맨 뒤에서 따랐다. 그러나 계환자가 임초를 설득하여 배반시키는 데 성공했다. 계환자는 임초에게 명령해 양월을 활로 쏘아 죽이게 했고, 그 결과 양씨 세력은 크게 패배했다. 양호는 노 정공과 숙손무숙(叔孙武叔) 숙손주구를 인질로 잡아 맹손씨를 공격하려 했으나 맹손씨의 가신이었던 공렴처보(公斂處父)에게 패배했다. 이후 양호는 환읍[8]과 양관[9]으로 들어가 반란을 일으켰다.
노 정공 9년(기원전 501년), 노나라가 양호를 치자 양호가 제나라로 달아난 후 희진의 조간자(趙簡子)에게 달아났다.
노 정공 10년(기원전 500년), 후읍(郈邑)의 재(宰)였던 공약묘(公若藐)가 후범(侯犯)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숙손주구와 맹의자(孟懿子)가 군대를 일으켜 토벌했고, 후범은 패배하여 제나라로 도망갔다.
여름, 노 정공과 제 경공이 협곡(夾谷)에서 회합했는데 공자가 그 일을 도왔다.
리서(犁鉏-《사기》)/리미(犂彌-《좌전》)가 말했다.
"공구(孔丘, 공자)는 예를 알지만 용기가 없으니, 래인(萊人)들을 보내어 무기로 노후(魯侯)를 위협하면 반드시 우리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제 경공이 이를 따르자, 공구는 노 정공을 모시고 물러가면서 말했다."병사들은 저들을 쳐라! 두 임금이 화친을 맺는 자리에 예이(裔夷) 포로가 병기로 난을 일으키니, 이는 제군(齊君)이 제후(諸侯)에게 명한 바가 아니다. 예(裔, 변방)는 하(夏, 중국)를 도모할 수 없고, 이(夷, 오랑캐)는 화(華, 중화)를 어지럽힐 수 없으며, 포로는 맹약에 간섭할 수 없고, 병기는 친선을 핍박할 수 없다. 이는 신(神)에는 불상(不祥, 상서롭지 못한 것)을 행하고, 덕(德)에는 건의(愆義, 도리를 어기는 것)를 행하며, 인(人)에는 실례(失禮)를 행하는 것이다. 임금은 반드시 그러지 아니한다."
이는 무기로 래인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예이(裔夷)란 먼 곳에 사는 오랑캐를 말한다. 래국(萊國)이 이미 망했기에 먼 후손이라 한 것이다.제 경공이 이를 듣고 그들을 물렸다.
맹약을 하려 할 때 제나라 사람이 맹서문(載書)에 다음과 같은 조항을 덧붙였다.
제나라 군대가 출정할 때, 갑차 300승을 이끌고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 맹약과 같이 될 것이다.
공자는 자무환(玆無還)으로 하여금 읍하며 대답하게 했다."만약 그대들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문양(汶陽)의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왕명을 함께 받드는 자로서 또한 이 맹약과 같이 될 것이다."
제후가 장차 노 정공을 연회로 대접하려 하자, 공구(공자)가 양구거(梁丘據)에게 말했다."제와 노 두 나라 사이의 옛 일을 그대는 어찌 듣지 못했습니까? 일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또 연회를 베푼다면 이는 집사들을 번거롭게 하는 일입니다. 또 희준(犧尊, 소를 새긴 술잔)과 상준(象尊, 코끼리를 새긴 술잔)은 문 밖으로 가져가지 않고, 가악[10]은 들판에서 연주하지 않습니다. 향연을 마련하여 (희준, 상준과 종, 경을) 다 갖추어 쓴다면 이는 예를 버리는 것이고, 만약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쭉정이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쭉정이를 쓰면 군주가 욕을 당하고, 예를 버리면 명성이 더러워집니다. 그대는 어찌 이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저 연회란 덕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드러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이에 그만두었다.제나라 사람이 와서 운(鄆), 환(讙), 귀음(龜陰)의 땅을 돌려주었다.
제 경공은 공구(孔丘, 공자)가 노(魯)나라의 재상이 되어 그가 패업을 이룰까 두려워했으므로, 이서(犁鉏)의 계책을 따랐다. 회합할 때, 래악(萊樂)을 올렸다. 공자가 계단을 지나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래인(萊人)을 붙잡아 목 베게 하고, 예로써 경공을 꾸짖었다. 경공이 부끄러워하여, 노(魯)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고 사죄한 뒤, 회합을 파하고 물러갔다. 그 해에 안영(晏嬰)이 죽었다.
노 정공 12년(기원전 498년), 공자가 대사구(大司寇)로서 삼도를 허무는 정책(堕三都)을 시행했다. 삼도는 다음 세 성을 말한다.
계손씨의 비(费): 현 산둥성 린이시 페이현
숙손씨의 후(郈): 현 산둥성 타이안시 둥핑현
맹손씨의 성(成): 현 산둥성 타이안시 닝양현
삼환(三桓)은 휘하의 가신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모두 이 정책에 동의했다. 중유(仲由)가 이를 맡았다.
먼저 후가 파괴되었고, 비의 재 공산불뉴(公山不狃)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평정되었다. 그러나 맹의자는 성의 재였던 공렴처보(公敛处父)의 권유를 받아들여 성을 허무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계손사(季孙斯)와 숙손주구가 맹손씨를 지지하게 되었고, 결국 공구의 삼도 파괴 정책은 실패했다.
노 정공 14년(기원전 496년),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하자 월왕 구천(句踐)이 취리(檇李)에서 맞아 싸웠다. 월나라가 오나라를 고소(姑蘇)에서 패배시키고 오왕 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혔는데 합려의 상처가 도져 죽었다. 죽기 전 합려가 아들 부차(夫差)에게 말했다.
"너는 네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겠느냐?"
부차가 말했다."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노 정공 15년(기원전 495년), 정공이 죽고 아들 장(將)이 즉위하니 그가 이른바 노 애공(哀公)이다.
2.2.12. 노애공
노 애공 원년(기원전 494년), 오왕 부차가 숙적인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초산(夫椒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패퇴한 월왕 구천은 회계산(會稽山)에 머무르면서 오왕에게 용서를 빌었다. 오자서가 반대했으나 오왕이 월왕을 살려주었다.노 애공 5년(기원전 490년), 제 경공(齊景公)이 죽고 안유자(晏孺子)가 즉위했다. 공자 수(壽)와 공자 구(駒) 그리고 공자 검(黔)은 위(衛)나라로 달아났고, 공자 서(駔)와 공자 양생(陽生)은 노나라로 도망쳤다. 6월, 전걸(田乞)과 포목(鮑牧)이 대부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고소자(高昭子)를 쳤다.
고소자(高昭子)가 이 소식을 듣고 국혜자(國惠子)와 함께 안유자를 구원했다. 안유자의 군대가 패배하자 전걸(田乞)의 무리가 이를 추격했고, 국혜자(國惠子)는 거(莒)로 도망쳤으며, 전걸의 무리는 마침내 돌아와 고소자(高昭子)를 죽였다. 안영의 아들 안어(晏圉)는 노나라로 달아났다.
노 애공 6년(기원전 489년), 8월, 병의자(秉意茲)가 노나라로 도망쳤다. 전걸(田乞)이 두 재상을 무너뜨리고, 사람을 노(魯)로 보내 공자 양생(陽生)을 불러왔다. 양생(陽生)이 제나라에 이르자, 전걸(田乞)의 집에 몰래 숨어 지냈다.
제(齊)의 전걸(田乞)이 그 임금 유자(孺子)를 시해했다. 오왕 부차가 제나라의 혼란을 듣고 제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오자서가 반대했으나 끝내 북진하여 애릉(艾陵)애서 크게 이겼다.
노 애공 7년(기원전 488년), 강성해진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제(齊)나라를 쳐 증(繒) 땅에 이르렀고, 노나라에게 백뢰(百牢, 소, 양 돼지 100마리)를 요구했다. 이에 계강자(季康子, 계손비)가 자공(子貢)을 보내 오왕과 태재 비(太宰 嚭, 백비)를 설득하여 예로써 그만두게 했다. 오나라가 추(鄒)를 위해 노나라를 치고, 성 밑까지 왔다가 맹약을 하고 돌아갔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환읍(讙邑)과 천읍(闡邑)을 빼앗았다. 당초 공자 양생이 노나라에 망명해 있었을 때 계강자(季康子)가 여동생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양생이 돌아와 제 도공으로 즉위하자 그녀를 모셔오게 했다. 계희(季姬)가 계방후(季魴侯)와 사사로이 간통하고 있다가 그 진상을 말하자 노나라가 감히 보내지 못한 까닭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끝내 계희를 모셔간 것이었다.계희가 총애를 받게 되면서 제나라는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노 애공 10년(기원전 485년), 제나라의 남쪽 변경을 쳤다. 이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쳤다. 계(손)씨가 염유(冉有)를 써서 공을 세우자 이에 노나라가 공자를 불렀다. 제(齊)나라의 전항이 주군인 간공(簡公)을 서주(徐州)에서 시해했다. 공자가 역적 전항을 치자고 청했으나 애공이 무시했다.
노 애공 12년(기원전 483년), 오왕 부차가 노나라와 위나라의 임금을 불러 탁고(橐皐)에서 회견했다.
노 애공 13년(기원전 482년), 오왕 부차가 황지(黃池)에서 제후들을 불러모아 중국의 패자가 되고자 했다.
6월 병자일,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공격했다. 병술일, 오나라 태자 우(友)를 사로잡았다. 정해일, 월군이 오나라의 도성에 진입했다. 오왕 부차는 이 소식이 알려지는 것이 싫었으므로 누군가 이를 누설하자 격노하여 군막 안에 있었던 7명을 전부 죽였다.
7월 신축일, 오왕 부차가 희진의 정공(晉定公)과 쟁장(爭長)했다. 오왕이 말했다.
"주실(周室)에서는 내가 어른이다."
희진 정공이 말했다."희성(姬姓)에서는 내가 우두머리다."
조앙(趙鞅) 간자(簡子)가 분노하자 희진 정공을 패자로 하기로 했다. 오왕이 송나라를 치려 하니 태재 백비가 말했다."이길 수는 있겠으나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에 오왕 부차가 돌아갔다. 노 애공 14년(기원전 481년) 8월 신축일, 맹의자 중손하기(仲孫何忌)가 죽었다.
노 애공 15년(기원전 480년), 자복경백(子服景伯)을 사신으로 삼고 자공이 돕게 하여 제나라로 가게 하니 제나라가 빼앗은 노나라 땅을 돌려주었다. 전항이 막 집권하여 기반이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노 애공 16년(기원전 479년), 공자가 졸했다.
노 애공 17년(기원전 478년), 월왕 구천이 다시 오나라를 쳤다.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노 애공 19년(기원전 476년), 월왕 구천이 다시 오나라를 쳤다.
노 애공 20년(기원전 475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의 도성을 포위했다. 희진의 정공(晉定公)이 죽고 출공(晉出公)이 즉위했다.
노 애공 22년(기원전 473년) 11월 정묘일,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를 용동(甬東)으로 보내고, 100가(家)를 주어 살게 하려고 했다. 이에 오왕이 말했다.
"내가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 내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빠진 것을 후회한다."
그러고는 자살했다. 월왕이 희성 고발씨의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태재 백비를 불충의 죄로 죽이고는 돌아갔다.노 애공 24년(기원전 471년), 애공이 공자 형(公子 荊, 애공의 서자)의 어머니를 총애하여 장차 그녀를 부인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예관 하헌(夏獻)에게 부인을 책립(策立)하는 예법을 물었다. 하헌이 대답했다.
"그런 예는 없습니다."
애공이 노하여 말했다."그대는 종사(宗司)가 아니냐. 부인을 세우는 것은 나라의 큰 예이다. 어찌하여 그러한 예가 없다고 하는가?"
하헌이 대답했다."주공(周公)과 무공(武公)은 설(薛)에서 아내를 맞이했고, 효공(孝公)과 혜공(惠公)은 상(商, 송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했으며, 환공(桓公) 이후로는 제(齊)에서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이와 같은 예라면 있습니다. 그러나 첩을 부인으로 삼는 것이라면 본래 그러한 예는 없습니다."
애공이 무시하며 그녀를 부인으로 세우고는 공자 형을 태자로 삼았다. 국인(國人, 노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다.윤월에 노 애공이 월나라로 갔다. 애공이 월나라 태자 적영(適郢)과 친해졌기에 적영은 애공을 사위로 삼고자 하며 그에게 많은 땅을 주고자 했다. 공손유산(公孫有山)이 이를 계강자에게 알리자 계강자가 두려워하며 태재 비(太宰 嚭)에게 뇌물을 바쳤다. 이에 그 일이 중지되었다.
노 애공 25년(기원전 470년), 애공이 월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니 계강자(季康子)와 맹무백(孟武伯)이 노나라의 남쪽 변방인 오오(五梧)에서 맞이했다. 이때 곽중(郭重)이 애공의 수레를 몰았는데, 두 사람을 먼저 만나보고서 애공에게 말했다.
"저 두 사람이 (임금을) 험담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애공이 오오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맹무백이 주군인 애공에게 술을 올리고서 곽중을 헐뜯었다."어찌 그리 살이 쪘는가?"
계강자가 말했다."체(彘, 맹무백)에게 벌주를 내리소서. 노나라가 원수와 가까이 있으므로 신이 이 때문에 임금을 따르지 못했고, 다행히 대행(大行)을 면했는데, (저놈은) 또 곽중이 살쪘다고 말합니다."
애공이 말했다."이 사람(곽중)은 식언(食言)을 많이 했으니, 어찌 살찌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술은 마셨으나 즐겁지 않았다. 이때부터 군신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맹무백은 맹의자의 아들로 씨는 중손씨(仲孙氏)였으며, 이름은 체(彘)였다. 대단히 공교롭게도 '체'라는 글자는 돼지를 말했다.
'식언'이란 말을 먹는다는 것인데, 상나라의 시조인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인 걸왕을 정벌하겠다고 말하며 '나는 (내가 뱉은) 말을 먹지 않겠다' 고 한 것이 시초였다. 즉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노 애공은 이걸 문자 그대로 이용해서 '이놈은 지가 뱉은 말을 몇 번이고 처먹었는데 살이 안 찌고 배기겠냐?'라는 식으로 농담한 것이었다.
노 애공 26년(기원전 469년) 여름 5월, 숙손서(叔孫舒)가 군대를 거느리고 월(越)나라의 고여(臯如), 후용(后庸), 송(宋)나라의 악벌(樂茷)과 회합하여 위후(衛侯) 첩(輒)을 들여보내려고 했다. 공손미모(公孫彌牟) 문자(文子)는 그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숙손서는 숙손무숙(武叔, 숙손주구)의 아들 숙손문자(文子)였고, 고여(臯如)와 후용(后庸)은 월나라의 대부였으며, 악벌(樂茷)은 송나라 사성(司城)의 아들 로(潞)였다.
의자(懿子)가 말했다.
"임금(위 출공 첩)은 고집이 세고 포악하니, 조금 기다리시오. 반드시 민중에게 해독을 끼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민중은) 곧 그대와 화목해질 것이오."
월군이 외주(外州)를 침공하여 큰 전과를 얻었다. 이에 위군이 출동하여 맞아 싸우다가 대패했다. 위 출공이 저사정자(褚師定子)의 무덤을 파헤친 뒤, 시체를 평장(平莊) 위에서 불태웠다. 저사정자(定子)는 저사비(褚師比)의 아버지였으며, 평장(平莊)은 능(陵)의 이름이었다.
노 애공 27년(기원전 468년), 월왕이 후용(后庸)을 보내 빙문(聘問)하고, 노나라가 침탈한 주(邾)의 땅을 말하며 태상(駘上)을 국경으로 삼자고 했다. 2월, 평양(平陽)에서 맹약했다. 계강자(季康子), 숙손문자(叔孫文子), 맹무백(孟武伯)이 모두 참석했다. 계강자가 오랑캐인 월족과 결맹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자공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가 여기 있었다면 우리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오."
맹무백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어찌하여 그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계강자가 말했다. "나도 본래 부르려 하였소."
숙손문자가 말했다."나중에 정말로 부르셔야 합니다."
여름 4월 기해일, 계강자가 죽었다. 노 애공이 조상할 때 예를 갖추지 않았다.
여름, 노 애공이 삼환(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을 두려워하며 제후들을 이용해 그들을 겁박하려 하자, 삼환 역시 애공을 적대시했다.
노 애공이 릉판(陵阪)에 유람을 가다가 길에서 맹무백을 만나 말했다.
"내가 제명에 죽겠는가?"
맹무백이 대답했다."알 수 없나이다."
애공이 세 차례나 물었으나, 맹무백이 끝내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노 애공이 패자인 월나라를 이용해 삼환을 치려고 했다.
8월 갑술일, 노 애공이 형씨(陘氏)에게 갔다. 형씨란 곧 공손유산(公孫有山)이며, 공손유형씨(公孫有陘氏)라고도 한다. 애공이 공손유산의 집에서 위(衛)나라로 가고, 주(邾)나라로 갔다가 드디어 월나라로 가니, 국인(國人, 노나라 사람)이 공손유산에게 형벌을 내렸다. 노 애공이 월나라로 도주한 문제를, 국인들이 공손유산에게 덮어씌운 것이었다. 국인들은 애공을 맞이하여 복귀시키려고 했으나, 공손유산의 집에서 죽었다. 애공의 아들인 녕(寧)이 즉위하니 그가 이른바 도공(悼公)이다.
2.3. 전국시대
| 연대는 양관(楊寬)의 고증을 따른다. |
노 도공 15년(기원전 453년), 삼진(三晉. 희성 위씨, 희성 한씨, 영성 조씨)이 지백(智伯, 지양자)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노 도공 31년(기원전 437년), 도공이 죽고 아들 가(嘉)가 즉위하니 그가 이른바 원공(元公)이다.
노 원공 21년(기원전 416년), 원공이 죽고 아들 현(顯)이 즉위하니 그가 목공(穆公)이다.
노 목공 원년(기원전 415년), 목공이 박사 공의휴(公儀休)를 노나라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마침내 삼환에게서 정권을 회수하고, 법을 받들며 이치를 따르기 시작했다. 계씨(季氏, 계손씨)는 그 봉읍들인 비(費)·변(卞)·동야(東野)에 의거하여 독립적인 작은 나라, 즉 비국(費国)이 되었고, 맹(손)씨와 숙(손)씨는 제나라에 의해 차례대로 멸망했다. 계손씨의 비나라는 언제 멸망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노 목공 4년(기원전 412년), 제나라가 노나라의 거(莒)와 안양(安陽)[11]을 공격했다. 이에 노 목공은 오기(吳起)를 장군으로 삼아 제군을 격파했다.
노 목공 5년(기원전 411년), 오기가 위나라로 달아났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도(都)를 점령했다.
노 목공 8년(기원전 408년), 제나라가 노나라의 성(郕)을 빼앗았다.
노 목공 22년(기원전 394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성(郕)을 점령했다. 삼진 중의 하나인 한나라(韓)가 노나라를 구원했다.
노 목공 26년(기원전 390년) 노나라가 평륙(平陸)에서 제나라를 격파했다.
노 목공 33년(기원전 383년), 목공이 죽고 아들 분(奮)이 즉위하니 그가 공공(共公)이다.
노 공공 30년(기원전 353년), 공공이 죽고 아들 둔(屯)이 즉위하니 그가 강공(康公)이다.
노 강공 9년(기원전 344년), 강공이 죽고 아들 언(匽)이 즉위하니 그가 경공(景公)이다.
노 경공 21년(기원전 323년), 경공이 죽고 아들 숙(叔)이 즉위하니 그가 평공(平公)이다.
노 평공 20년(기원전 303년), 진 혜문왕이 죽었다. 평공이 죽고, 아들 고(賈)가 즉위하니 그가 후문공(後文公)이다. 문공은《세본》(世本)에서는 민공(湣公)으로 기록되어 있고,《한서》(漢書) <인물표>에서는 민공(愍公)으로, <율력지>(律曆志)에서는 민공(緡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음이 같아 서로 통용되는 표기다.
노 후문공 8년(기원전 295년), 초 회왕이 진(秦)나라에서 죽었다.
노 후문공 23년(기원전 280년)에 후문공이 죽고 아들 수(讎)가 즉위하니 그가 경공(頃公)이다.
노 경공 9년(기원전 271년)에 진(秦)나라가 초나라의 수도인 영(郢)을 점령하자, 초 경양왕이 동쪽의 진(陳)으로 거처를 옮겼다.
노 경공 19년(기원전 261년), 초나라가 노나라를 쳐 서주(徐州)를 빼앗았다.
노 경공 24년(기원전 256년), 초 고열왕이 희성 노씨의 노나라를 멸망시켰다.
노 경공은 도망쳐서 소읍(小邑)으로 옮겨 평민이 되니 노나라의 제사가 끊어졌다. 노 경공은 가(柯)에서 죽었다.
3. 유력 세경가
3.1. 삼환(三桓)
노 환공의 장자인 노 장공을 제외한 자식들인 서장자 경보, 서차자 숙아, 적차자 계우의 후손으로 노나라의 멸망 때까지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양호가 이들의 척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공자도 삼환이 가진 권력의 약화를 노리며 헌신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맹손(孟孫)씨: 맹(孟)씨 혹은 중손(仲孫)씨라고도 한다. 노 환공의 서장자로, 두 임금을 죽인 역적 맹공자 맹경보의 후손들이었다.
- 숙손(叔孫)씨: 노 환공의 서차자로, 동생 계우에게 살해당한 숙희자 숙아의 후손들이었다.
- 계손(季孫)씨: 계(季)씨라고도 한다. 노 환공의 적차자인 계성자 계우의 후손들이었다.
3.2. 삼환이 아닌 세경가
- 장손(臧孫)씨: 장(臧)씨라고도 한다. 노 효공의 아들인 장희백 장손구의 후손들이었다. 노나라의 성인이라고 불리던 장무중 장흘의 대에 가세가 절정에 이르렀으나 계(손)씨의 후계 문제에 참여했다가 중손씨, 맹손씨의 후계 문제에까지 엮이면서 장무중이 제나라로 망명한 후 가세가 기울었다.
- 동문(東門)씨: 자가(子家)씨라고도 한다. 노 장공의 아들인 동문양중 동문수의 자손들이었다. 동문양중의 아들인 동문귀보가 계(손)씨 집안과 대적한 뒤 패배하여 제나라로 도망간 후 자가씨로 개칭되었다.
- 공(孔)씨: 상나라의 후예인 송나라에서 망명온 집안이었다. 유력한 가문은 아니었으나 성인 공자를 배출했다.
- 남궁(南宮)씨: 맹희자의 차남이자 맹의자의 동생인 남궁경숙 남궁괄이 분가하여 세운 가문이었다. 남궁괄은 공자의 제자로도 유명하다.
- 전(展)씨: 노 효공의 아들인 희전의 후손들이었다. 유명한 인물들로는 전획, 전척, 전희 삼형제가 있었다. 이 삼형제는 사실 유하혜(전획)[12]나 도척(전척)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유하혜는 훗날 유씨(柳氏) 집안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 유(柳)씨: 앞서 말한 노 효공의 아들인 희전의 후손으로 전획, 곧 유하혜가 시조였다. 유하(柳下)는 식읍이고 혜(惠)는 시호다. 후손들이 유씨(柳氏)로 삼고 유하혜를 시조로 받들었다. 남북조시대에서 수당시대에 이르기까지 문벌귀족으로 성장했다. 중국의 유씨는 노나라 공실(公室)의 자손들로, 주공(周公) 희단의 후손이자 주(周)나라의 기반을 다진 문왕(文王) 희창의 후손들이다.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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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태공(太公) 백금(伯禽) ? ~ 서기전 998년 : 주공 단의 아들. 원래 주공 단이 노나라를 다스려야 했으나 삼감의 난 진압과 주나라 내부의 정무에 힘써야 해서 대신 아들 백금을 보낸 것이었다.
- 2대 고공(考公) 추(酋) 서기전 997년 ~ 서기전 994년 : 노공 백금의 아들.
- 3대 양공(煬公) 희(熙) 서기전 993년 ~ 서기전 988년 : 노공 백금의 아들이며, 노 고공의 아우.
- 4대 유공(幽公) 재(宰) 서기전 987년 ~ 서기전 974년 : 노 양공의 아들.
- 5대 위공(魏公) 희(晞) 서기전 973 ~ 서기전 924년 : 노 양공의 아들이며 노 유공의 아우.
- 6대 여공(厲公) 탁(擢) 서기전 923년 ~ 서기전 887년 : 노 위공의 아들
- 7대 헌공(獻公) 구(具) 서기전 886년 ~ 서기전 855년 : 노 위공의 아들, 노 여공의 아우
- 8대 진공(眞公) 비(濞) 서기전 854년 ~ 서기전 825년 : 노 헌공의 아들.
- 9대 무공(武公) 오(敖) 서기전 824년 ~ 서기전 816년 : 노 헌공의 아들. 노 진공의 아우.
- 10대 의공(懿公) 희(戲) 서기전 815년 ~ 서기전 807년 : 노 무공의 아들.
- 11대 폐공(廢公) 백어(伯御) 서기전 806년~ 서기전 796년 : 노 무공의 손자.
- 12대 효공(孝公) 칭(稱) 서기전 795년 ~ 서기전 769년 : 노 무공의 아들, 노 의공의 아우.
- 13대 혜공(惠公) 불녈(弗涅) 서기전 768년 ~ 서기전 723년 : 노 효공의 아들.
- 14대 은공(隱公) 식고(息姑) 서기전 722년 ~ 서기전 712년 : 노 혜공의 아들. 노 은공 원년부터 《춘추》의 기록이 시작된다. 신하에게 시해당한 뒤 동생인 노 환공이 즉위했다.
- 15대 환공(桓公) 윤(允), 궤(軌) 서기전 711년 ~ 서기전 694년 : 노 혜공의 아들. 노 은공의 아우. 형이 살해당한 뒤 노후가 되었다. 제 희공의 딸인 문강과 결혼했지만, 그녀와 근친상간 관계였던 문강의 이복 오빠 제 양공의 밀명을 받은 제나라의 공자 팽생에게 살해당했다. 여담이지만 삼환(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은 바로 이 사람의 자손들이었다.
- 16대 장공(莊公) 동(同) 서기전 693년 ~ 서기전 662년 : 노 환공과 문강 사이에서 난 아들로, 첫번째 패자가 된 제 환공의 외조카였다. 제나라에게 영토를 빼앗겼으나 조말의 도움으로 땅을 되찾았다.
- 17대 노군반(魯君斑) 서기전 662년 : 노 장공의 아들로 숙부인 공자 경보(맹손씨의 시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 18대 민공(閔公) 계(啓) 서기전 661년 ~ 서기전 660년 : 노 장공의 아들로 역시 숙부인 공자 경보가 죽였다.
- 19대 희공(僖公) 신(申) 서기전 659년 ~ 서기전 627년 : 노 장공의 아들. 노 민공의 아우.
- 20대 문공(文公) 흥(興) 서기전 626 년~ 서기전 609년 : 노 희공의 아들.
- 21대 선공(宣公) 뇌(餒) 서기전 608년 ~ 서기전 591년 : 노 문공의 아들.
- 22대 성공(成公) 흑굉(黑肱) 서기전 590년 ~ 서기전 573년 : 노 선공의 아들.
- 23대 양공(襄公) 오(午) 서기전 572년 ~ 서기전 542년 : 노 성공의 아들.
- 24대 희야(姬野) 서기전 542 : 노 양공의 아들. 노나라의 군주가 된지 3개월 만에 사망했다.
- 25대 소공(昭公) 조(稠) 서기전 541년 ~ 서기전 510년 : 노 양공의 아들. 계(손)씨가 정권을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국외로 망명했다.
- 26대 정공(定公) 송(宋) 서기전 509년 ~ 서기전 495년 : 노 양공의 아들. 노 소공의 아우. 공자를 등용해 나라를 안정시켰으나 이후 제 경공의 미인계에 넘어가[13]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노 정공의 변심에 공자는 크게 실망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그가 자신의 구상을 실현해 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 27대 애공(哀公) 장(將) 서기전 494년 ~ 서기전 468년 : 노 정공의 아들.《춘추》는 이때까지 기록된다.
- 28대 도공(悼公) 영(寧) 서기전 467년 ~ 서기전 437년 : 노 애공의 아들.
- 29대 원공(元公) 가(嘉) 서기전 436년 ~ 서기전 416년 : 노 도공의 아들.
- 30대 목공(穆公) 현(顯) 서기전 415년 ~ 서기전 383년 : 노 원공의 아들.
- 31대 공공(共公) 분(奮) 서기전 382년 ~ 서기전 353년 : 노 목공의 아들.
- 32대 강공(康公) 둔(屯) 서기전 352년 ~ 서기전 344년 : 노 공공의 아들.
- 33대 경공(景公) 언(匽) 서기전 343년 ~ 서기전 323년 : 노 강공의 아들.
- 34대 평공(平公) 숙(叔) 서기전 322년 ~ 서기전 303년 : 노 경공의 아들.
- 35대 민공(緡公)[14] 고(賈) 서기전 302년 ~ BC 280년 : 노 평공의 아들.
- 36대 경공(頃公) 구(仇) 서기전 280년 ~ 서기전 256년 : 노나라의 마지막 군주이자 노 민공의 아들. 초나라 고열왕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15]
5. 기타
- 유교의 성인인 공자의 모국이다. 공자 말고도 묵자 등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나라로 정치, 군사적으로는 별 거 없었지만 사상, 이념 등 문화적으로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동의 히브리와 비슷하다. 사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예법을 정리했다고 알려진 주공 희단에게 봉해진 나라[16]이기도 해서 상징성은 클 수밖에 없었다.
- 다만 문화적인 융성함과는 별개로 나라가 안정적으로 오랜 기간 잘 다스려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예법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군(弑君)[17], 정변, 세도 가문의 권력 독점 등 풍파가 적지 않은 편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사마천도《사기》〈노주공세가〉에서 노나라의 역사를 서술하다가 말미에 \'겉으로 보이는 예는 (예전) 그대로였건만 벌어진 일들은 어찌 정반대였는가?'라며 깠다. 사실 공자도 그래서 생전 삼환을 몰아내려 애쓰기도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 실각하고 천하를 주유했다. 그래도 결국 권신들에게 국가를 찬탈당한 희진과 강제와는 다르게, 개혁을 통해 공실이 삼환에게서 권력을 되찾아오는데 성공함에 따라 전국시대까지 아득바득 살아남았고, 노 공공 때까지는 위나라와 연합해 제나라(전제)를 칠 정도의 여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다른 나라들의 성장세를 따라가지 못해 전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초(楚) 고열왕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상전이었던 주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기 몇 개월 차이로[18] 멸망하여 이미 군주의 작위를 박탈당한 위나라를 제외하면 전국 7웅을 제외한 제후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사라진데다, 마지막 군주였던 노 경공도 끔살당하는게 아닌 초나라의 배려로 천수를 누리다 갔으니 나름 호상이라 할 수 있다. 먼 훗날, 전한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였던 평제가 노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경공의 6대손, 공자 관을 찾아내 제후로 봉했다.
- 초한전쟁 말기,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한 직후 서초의 잔여 세력이 모두 한군에게 항복하던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항우에게 충성하겠다며 유방의 한나라에게 저항했던 곳이 이 노나라 지역인 노현 일대였다. 유방은 본래 노현의 저항을 유혈 진압하려고 했으나, 마지막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항우의 목을 보여주며 노현의 세력을 항복시킨 뒤, 항우를 노나라의 제후라는 뜻의 노공(魯公)으로 봉하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 현대 중국에서는 성(省)별로 그 지역의 옛 나라 이름을 따서 자동차 번호판을 다는데, 산둥성의 자동차 번호판이 바로 '노'(魯)다. 정작 더 강국이자 이웃 국가이기도 했던 제(齊)는 무시된 것인데, 사실 지금도 옛 제나라 땅의 도시들이 노나라 땅에 있던 도시들보다 훨씬 더 잘 나가는데도[19] 이렇게 된 것은 역시 노나라가 쌓은 문화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rˤaʔ/ 또는 /*r.ŋˤaʔ/. 현대 발음은 lǔ(루). 魯.[2] 사기에선 249년.[3]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4] 虢公, 서괵(西虢)의 공작[5] 제후가 내조(來朝)했을 때 숙박하도록 수도 근교에 있는 읍(邑)을 하사한 채지(采地)를 조숙읍(朝宿邑)이라고 했다.[6] 季孫意如. 계무자 계손숙(季孫宿)의 손자였다.[7] 庾, 유는 곡식 16말[8] 讙邑, 지금의 산둥성 닝양[9] 陽關, 지금의 산둥성 타이안[10] 嘉樂, 종(鍾)과 경(磬) 등의 악기[11] 지금의 산둥성 양곡현 동북[12] 본명이 전획, 시호는 혜. 유하는 그의 식읍 봉지였다.[13] 당연히 제 경공이 직접 미인계를 부린 건 아니었고(...) 우호를 위한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제나라의 미녀들을 노나라로 보냈다.[14] 달리 시호가 문공(文公)이라, 먼저 있는 노 문공과 구별하기 위해서 노 후문공(魯後文公)이라고 한다.[15] 당시 노나라는 정말 말할 것도 없는 약소국이었지만, 초나라도 회왕과 양왕의 잇딸은 실정으로 기울어져 가던 중이었다. 특이하게도 이때 초나라는 노 경공을 살려주고, 노나라 땅에서 그 대를 잇게 해주었다. 전국시대의 트렌드가 서로 대를 끊는 것이었음을 감안하면 나름 자비로운 처우였다.[16] 물론 주나라 본국에 주재했던 주공 단이라 본인의 장자인 백금(노 태공)에게 노나라를 관리하게 했다.[17] 특히 노 은공이 죽고, 노 희공이 즉위하기까지 약 50년 동안의 기간은 동생이 형을 죽이고 숙부(맹경보)가 조카를 죽이며, 계모가 의붓자식을 죽이는 등 매우 어지러웠다. 그나마 노 장공이 제나라의 침략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나라를 잘 다스렸다.[18] 《사기》에 따르면 7년 뒤, 다른 책에 따르면 동일년도.[19] 칭다오시, 지난시, 쯔보시, 옌타이시 등등이 옛 제나라의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