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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末唐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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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원 왕조가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교체된 시기로 수당교체기(隋唐交替期)라고 불리기도 한다. '수말'이라고 하지만 사실 수나라가 시대를 더 세분화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단명한 국가인 것을 생각해 보면 '수 + 당초'가 더 옳은 표현이라고 하겠다.2. 경과
2.1. 배경
581년 양견이 북주의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된 수나라는 589년 남진을 멸망시켜 위진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키는데 성공하고, 개황성세라 불리는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604년에 즉위한 수 양제의 폭정과 대운하 건설, 그리고 무리하게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수나라 내 민심이 점점 돌아서기 시작했다.2.2. 고구려-수 전쟁과 반란의 발생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면서 징병과 물자 조달에 대한 반발로 화북 지방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했지만 수 양제는 고구려 원정에만 집착하여 민란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598년[1], 612년[2], 613년, 614년 4차례에 달한 고구려 원정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이미 반란은 겉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하지만 양제는 반란을 진압하려 하지 않고 617년 강도[3]로 피난을 가버렸고 결국 반란군 중 하나였던 태원유수 이연이 남진하여 617년 11월 장안을 점령하고, 양제가 폐위되었음을 선언한 뒤 양제의 황태손 양유를 수공제로 옹립한 다음 자신을 스스로 '당왕'(唐王)으로 칭했다.
2.3. 양제 시해
결국 반란군들이 군벌화되어 각 지방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수 양제는 제2수도인 동도 낙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도에 머무르며 자포자기하고 있었고 결국 618년 황제의 친위대 조직인 효과군의 병사들이 우문화급을 지도자로 내세워 양제를 시해했다.2.4. 당의 건국
618년 양제의 시해 소식을 들은 장안성의 이연은 수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건국했고, 이후 수나라의 잔당과 반란군을 제거하여 중원을 재통일했다.3. 영향
3.1. 중국
수당교체기는 중국사에서 단순한 왕조 교체기가 아니었다. 이는 후한 말 황건적의 대란 이래 수세기 동안 이어진 분열기인 위진남북조시대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은 유례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모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이후 중국사는 오대십국시대의 잠시 분열기와 3번의 왕조 교체기(송말원초, 원말명초, 명말청초)가 있을지언정 끝까지 통일국가를 유지해나갔다.[4]수나라 시절 시행된 3성 6부제, 과거제 등의 제도는 청나라때까지 수백 년 동안 중국 정치제도의 근간이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주변국들의 정치제도에도 영향을 주었고[5] 당나라는 활발한 교역과 한자, 유교, 불교, 율령(형법과 행정법)의 전파를 통해 동아시아 문화권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또한 수나라는 통일되자마자 곧바로 고구려와 베트남 남부의 참파 왕국을 공격했고, 당나라는 아예 북방의 돌궐(튀르크)과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주변국들이 통일 중국의 국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3.2. 한반도
수당교체기는 한반도의 삼국통일전쟁을 가속화시켜 삼국시대가 종결되고 남북국시대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수 문제의 통일로 고구려는 4차례에 걸친 수나라의 침공을 받았고, 살수대첩 등에서 크게 활약하며 4차례 모두 승리했지만, 이후에 들어선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복을 포기하지 않고 신라와 동맹을 맺어 전쟁을 계속했다.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서도 상당히 선전했지만 국력의 한계가 오면서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했고, 백제 역시 660년 나당연합군의 전격전으로 멸망했다.하지만 당 고종은 고구려 영토에는 안동도호부, 백제 영토에는 웅진도독부, 신라 영토에까지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냈고, 이에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과 손을 잡고 대항하여 당군을 크게 물리쳤다. 당나라는 때마침 발흥한 토번(티베트)의 공격과 돌궐 부족들의 반란 등으로 전쟁을 계속할 수 없어 신라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면서 신라는 676년 삼국통일을 완수하게 된다.
한편 698년 고구려 유민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들을 규합해 당군을 물리치고 동모산에서 발해 건국을 선언하면서 한반도는 남북국시대로 접어들었다.
4. 사건 목록
5. 관련문서
[1] 수 문제의 원정[2]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 일어난 전쟁이다.[3] 현 장쑤성 양저우시.[4] 반면 유럽에서는 한나라와 동시대에 있었던 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두 번 다시 유럽을 통일한 국가가 나오지 않았다. 프랑크 왕국이 유럽 중앙부를 정복했지만 얼마 못 가 3개국으로 분열했고, 동로마 제국도 서로마 제국의 영토 일부만 일시적으로 회복했다가 쇠퇴하여 멸망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에 한정되었다.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아돌프 히틀러의 유럽 정복도 역시 일시적인 점령만 가능했고 결국 처절하게 몰락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좀 미묘해졌는데 유럽 연합 출범으로 유럽이 서서히 통합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보면 다른 의미의 통일이 이뤄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5] 특히 과거제도는 훗날 저 멀리 유럽에 전파되어 관리를 시험으로 선발하는데 영향을 주었고, 이 제도가 또 미국으로 건너가 공무원 실적제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