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 黃巾之亂[1] Yellow Turban Rebellion | ||
<colbgcolor=#E78C11,#444444><colcolor=black,white> 시기 | CE 184년 | |
장소 | [[중원| 중원지방 ]] (한나라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2] | |
원인 | - 환관, 외척 세력의 득세로 인한 혼란 - 태평도의 급격한 세력 확장 | |
교전 세력 | 한 (진압군) 승 | 황건적 (반란군)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영제 (한 황제) 노식 (북중랑장) 황보숭 (좌중랑장) 주준 (우중랑장) 조겸 (여남태수) 왕윤 (예주자사) 추정 (교위) | 지휘관 장각 (대현량사 겸 천공장군) 장보 (지공장군) † 장량 (인공장군) † 조홍 † |
참가자
| 참가자 | |
병력 | 5만 명 이상 | 최대 100만 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한나라의 반란 진압 성공 - 황건적 잔당 및 태평도 세력에 대한 가혹한 처벌 | |
영향 | - 청류파에 대한 사면 - 한 황실의 지방 통제력 약화 - 군웅할거 시대 개막 - 삼국시대의 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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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후한 말, 장각을 필두로 한 황건적이 일으킨 반란이자 간당간당 하던 400년 역사를 지닌 한나라의 명줄을 끊어버리고 중국 전역을 혼란으로 이끈 사건이다. 황건적의 난 이후 한나라 조정의 권위가 추락해 황건적을 진압하기 위해 세력을 모았던 군벌들을 통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며, 중국 각지에서 영웅호걸이 할거하면서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춘추전국 500년 난세를 마무리했던 한나라 400년의 치세에 마침표를 찍고 이후 수당제국에 의해 평정되는 천하대란 400년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사건이다.
2. 내용
위의 표어는 오행설, 그중에서도 상생설을 차용한 것이다. 오행에 의하면 한(漢)은 화(火)의 덕에 의해서 흥한 나라이기 때문에 한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던 세력은 하나같이 오행상생 중에서 火生土에 의해 토(土)의 덕을 타고 났음을 자처했고 모든 상징에 토의 덕을 상징하는 노란색을 사용하였다. "창천이 죽고 황천이 일어난다"는 말도 후한에 반기를 든 황건적(노란색 두건을 쓴 무리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오행설에 끼워맞춰서 자신들이 토덕의 대표임을 자처한 데서 만들어낸 프로파간다이다.당시에는 오행으로 모든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는 '오행도참설'이 유행했으며, 오행도참설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생겨서, 처음에는 오행의 상극 순서(목-금-화-수-토)를 따른다고 여겼지만 후한 말에는 상생 순서(목-화-토-금-수)라는 게 정설이 됐다. 상술했듯 한나라는 화의 덕으로 흥한 나라라고 여겨졌으며 따라서 한나라를 상징하는 색은 화에 해당하는 붉은색이었다. 그래서 장기에서 한나라의 각인색이 빨강색.
그리고 역시 상술했듯, 한나라의 후계자를 자처한 세력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토의 덕을 지녔음을 강조하며 토에 해당하는 황색을 상징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은 것으로 정통성을 주장한 위나라는 최초의 연호로 황초(黃初)를 사용했다. 오나라의 손권도 오왕을 칭하며 사용한 첫 연호는 황무(黃武), 황제를 칭한 뒤 사용한 첫 연호는 황룡(黃龍)이다.
반대로 왕조 교체를 인정하지 않고 한 황실의 정통성을 이어 갈 것을 천명한 촉한은 263년에 연호를 바꾸어 '염흥(炎興)'을 사용했다. 바로 그해에 나라가 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반란은 결국 실패했지만 통일왕조가 무너지고 난세로 들어가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초한지》의 진승·오광의 난이나 후삼국시대의 원종·애노의 난과도 겹친다.
3. 배경
<rowcolor=black,white> 드라마 〈삼국연의〉 속 '황건적의 난' 묘사 (1994년 ~ 1995년 방영) |
한나라(전한)는 치세 내내 외척세력을 견제하지 못해 왕망으로부터 찬탈을 당하고 신나라가 세워지지만 종친 군벌인 광무제가 다시 한실을 부흥시키며 다시 한번 사직을 이어갔지만 이렇게 광무제가 부흥시킨 후한 중기가 되면서 환관 세력이 성장하면서 다시 한번 관료사회의 부정부패가 심해졌고 외척과 환관들은 조정을 농단하며 많은 관직을 사고 팔았고, 이렇게 관직을 사서 지방수령으로 임명된 사람들은 백성들을 쥐어짜서 본전을 뽑으려 했고 후한은 전한 한무제의 원정으로 흉노족이 멸망하고 난 후 그 공백지에 새롭게 등장한 오랑캐 강족과 계속 전쟁을 벌이면서 엄청난 전비를 써야 했고, 이 때문에 세금은 무거워지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런 모순은 환제, 영제시절에 폭발하여 184년에 일어난 종교집단 태평도의 교주 장각을 중심으로 아예 한왕조를 교체하자는 역성혁명 운동으로 발전하니 이것이 바로 황건적의 난이다.
거록 출신인 장각이 후한 말기에 성행한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는 종교인 황로도(태평도)를 통해 신도들을 모아서 스스로를 "대현양사"라 자칭하고, 그 무리들을 모아 신봉자들에게 과오를 깨우치게 하고 부적이나 부적을 태운 재를 탄 물 따위를 사용하여 주문을 외우며 병을 고치는 등의 전형적인 종교집단의 활동을 전개하여 무리들을 이끌어 모았다고 한다.
장각은 제자들을 사방에 보내 황로도를 전파하여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 등의 8주에 무리들이 퍼졌으며, 황실의 환관들과 내통 약속을 받아내는 등 치밀하게 거사 준비를 했으나, 이 사실이 제자들의 밀고로 발각되자 동생인 장보, 장량과 함께 184년에 전국적으로 난을 일으켜서 각지의 주ㆍ군들을 약탈하고 관리들을 죽이는 등 온 세상에 세력을 떨쳤다.
그 뒤, 조정에서 황건적 때문에 고전하게 되자 당인(청류파)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져서 그들을 중심으로 관군들이 편성되었고, 각지에서 황건적들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점차 진압이 되었고, 그 와중에 난의 주모자인 장각이 도중에 병사하여 중심을 잃었다.
그럼에도 황건적 잔당이 완전히 소탕되지 않아서, 각지에서 독립적인 군소 세력이 할거[4]하였고, 이 때문에 때때로 지방관이 계속 토벌에 나서야 했다.[5] 이들 잔당의 일부는 각 군웅의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청주병. 황건적의 난은 후한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이어져 온 셈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더 나아가서 앞으로 4백여 년 동안 이어질 위진남북조시대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하다.
4. 전투
우측의 (#)은 《삼국지연의》에 나온 전투를 의미한다.4.1. 대흥산 전투(#)
대흥산 전투 大興山戰鬪 | ||
<colbgcolor=#E78C11,#444444><colcolor=black,white> 시기 | 184년 | |
장소 | [[바오딩시| 대흥산 ]] (한나라 유주자사부 탁군 대흥산) | |
원인 | 황건적의 유주 침공 | |
교전 세력 | 유언군 (진압군) 승 | 황건적 (반란군) 패 |
지휘관 | 교위 추정 | 정원지† |
장수 | 유비 관우 장비 | 등무† |
병력 | 5백명 | 5만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유언군의 승리 및 황건적군 지휘관 전사 |
184년, 황건적 장수 정원지는 5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주 탁군을 침략했다. 유주자사 유언은 유비에게 500명의 군사를 주면서 저들을 막으라 명령했고 유비는 겨우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50,000명의 황건적과 싸워야 했다. 유비는 대흥산 아래에서 황건적과 대치했고 유비는 적장 정원지에게 소리쳤다. “나라를 배반한 역적놈아! 어찌 어서 항복하지 않냐!”
이 말을 들은 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출진시켰고 장비 또한 장팔사모를 들고 돌격하였다. 등무는 장비를 찌르기도 전에 장비의 장팔사모에 명치를 찔려 몸이 뒤집히며 말에서 낙마했다.
등무가 장비에게 손쉽게 당하자 대장 정원지가 칼을 들어 장비를 향해 말을 몰면서 칼을 휘두르며 돌격했다. 그러자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정원지를 맞이했다. 정원지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관우를 보고 미쳐 대처하지 못했고 관우는 청룡언월도로 정원지를 두동강 내버렸다.
대장 정원지가 베이자 남은 황건적들은 창을 거꾸로 들어 달아났고 유비가 이들을 추격하자 이들에게 투항하는 황건적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유비가 황건적을 격퇴하고 성으로 돌아오자 유주자사 유언은 이들을 직접 맞이해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며 감사를 표했다.[7]
4.2. 청주성 전투(#)
청주성 전투 青州城戰鬪 | ||
<colbgcolor=#E78C11,#444444><colcolor=black,white> 시기 | 184년 | |
장소 | [[쯔보시| 청주성 ]] (한나라 청주자사부 제국 임치현) | |
원인 | 황건적의 청주 침공 | |
교전 세력 | 공경군 (진압군) 승 | 황건적 (반란군) 패 |
지휘관 | 교위 추정 | 불명 |
장수 | 유비 관우 장비 | 불명 |
병력 | 유비군▶ 5백명 추정군▶ 5천명 | 병력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공경군의 승리 |
관우, 장비는 유비가 신호를 보내자 황건적을 공격했고 유비 또한 뒤로 돌아 공격하였다. 적이 세갈래로 공격하자 결국 황건적은 무너졌고 유비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황건적이 청주성 앞으로까지 도망쳐 나오자 공경은 군사를 이끌고 황건적을 무찔렀다. 청주성의 포위가 풀렸고 공경은 유비에게 음식을 주면서 감사를 표했다.[8]
4.3. 완성 전투
교전기간: 184년 3월 ~ 11월184년 3월, 장각이 거병하자 그의 명령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킨 장만성은 스스로 신상사(神上使)라고 칭하고 형주 남양군(오늘날 허난성 난양시)을 공격해 남양태수 저공을 죽였다.
남양군 완하에 머물던 장만성은 같은해 6월 조정에서 파견한 남양태수 진힐에게 죽었는데, 조홍이 이끄는 황건적이 남양군 완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우중랑장 주준, 형주자사 서구, 장초 등이 완성을 점거한 황건적을 공격했고, 2달 간의 공성전 끝에 8월에 조홍은 주준에게 전사하고 한충이 황건적의 수령이 되었다.
한충은 완성을 포위한 주준이 갑자기 포위를 풀자 관군을 공격하기 위해 완성 밖으로 나왔는데, 기회를 노린 주준의 관군에게 격파당해 항복했으나 분노한 진힐에게 죽었다. 한충 사후 황건적 손하(孫夏)가 항복하지 않고 항전했으나, 184년 11월 완성 전투에서 주준에게 패배해 사망하면서 남양의 황건적은 관군에게 토벌당하게 된다.
4.4. 광종 전투
광종 전투 廣宗戰鬪 | ||
<colbgcolor=#E78C11,#444444><colcolor=black,white> 시기 | 184년 | |
장소 | [[싱타이시| 광종현 ]] (한나라 기주자사부 안평군 광종현 (현 광쭝현)) | |
원인 | 황건적의 광종 점령 | |
교전 세력 | 한 황실 (진압군) 승 | 황건적 (반란군) 패 |
지휘관 | 대장군 하진 | 대헌양사 장각† |
장수 | 북중랑장 노식 좌중랑장 황보숭 동중랑장 동탁 | 인공장군 장량† 지공장군 장보†[9] |
병력 | 병력 불명[10] | 병력 불명[11]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한군의 승리, 황건적 수뇌부의 전멸 |
조정은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황보숭을 임명해 보낸다. 첫 전투에서 황보숭은 장량이 이끄는 정예 병사들에게 패하지만, 야습으로 반격하여 장량을 죽인다. 마지막으로 장보가 저항하지만, 이미 뒤바뀐 전황을 뒤집지 못하고 패해 처형당한다. 1년 만에 수뇌부가 전멸함으로서 황건적은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후 황보숭은 공을 모두 노식에게 돌렸다. 아직 후한의 행정력이 붕괴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워낙 기록이 간략해 세부적인 전황은 알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황건적 또한 치열하게 싸웠음을 보여준다.[13]
4.5. 하곡양 전투
하곡양 전투 下曲陽戰鬪 | ||
<colbgcolor=#E78C11,#444444><colcolor=black,white> 시기 | 184년 11월 | |
장소 | [[진저우시| 하곡양현 ]] (한나라 기주자사부 거록군 하곡양현) | |
원인 | 황건적의 하곡양 점령 황보숭의 북진 | |
교전 세력 | 한 황실 (진압군) 승 | 황건적 (반란군) 패 |
지휘관 | 대장군 하진 | 지공장군 장보 |
장수 | 좌중랑장 황보숭 동중랑장 동탁 거록태수 곽전 | 기록없음 |
병력 | 병력 불명 | 병력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한군의 승리, 장보 세력의 전멸 |
184년 10월, 광종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좌중랑장 황보숭은 광종에서 북진하여 장보가 거점으로 삼은 하곡양을 포위했다. 거록태수 곽전이 황보숭군에 합류해 장보군을 상대로 크게 활약했다.
하곡양 전투에서 한나라군은 장보를 포함한 10만여명을 참수하거나 생포해 시체를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고 한다.
5. 평가
5.1. 한나라 쇠퇴의 본격적인 기점
황건적의 난의 의의는 내부적으로 쇠약해있었던 후한의 세력을 대내외적으로도 크게 위축시켰다는 시발점과 중국 각 지역의 군웅들이 할거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난세의 시작인 것이다. 이 시기부터 시작된 중국 내부의 혼란은 589년 수나라의 문제 양견이 중국을 다시 재통일할 때까지 무려 400년 이상 이어졌다. 즉, 황건적의 난은 보통 역사교과서에서 말하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서막을 여는 대사건이었다.황건적의 난 이후부터 후한 왕조가 멸망하는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일단 황건적의 난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한나라의 중앙정부(조정)가 지방 통제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중세시대 제국에게 있어 "교통과 통신수단의 제약 속에서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 중 하나였고,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위축될 경우 지방에 대한 통제력 역시 함께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한 왕조는 황건적의 난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이 실추'되고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각 지방의 통치기구들이 군사력을 확대하고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각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상실하게 된 것이다.
후한의 왕공족 또한 황건적의 난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자신의 봉국을 보존하는데 성공한 진민왕 유총을 제외하면 난세가 도래하자 조세 수입이 끊겨서 노략질을 당하거나 굶어죽었다고 한다.
즉, 이전까지 한나라 낙양 조정의 영향력 아래있던 '지방관'들이 황건적의 난 이후에는 '군웅'(=군벌)으로 변모한 것이다. 한나라 이전의 통일제국인 진은 아직 통일제국의 체제가 정착되기 전에 영향력을 상실했기에 진나라의 쇠퇴기에 나타난 현상은 '지방 세력의 독립'이라기보다는 '진에 병합되었던 6국의 부활'에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이후 오대십국시대로 대표되는 당•송 교체기까지 반복적으로 나타난 통일제국 멸망사의 효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후 시대에 비해 진-한-당 시대에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약해지면 바로 지방세력들이 독립 해 나가면서 제국이 분해되어버리는 현상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송나라의 멸망 이후 송-원-명-청 교체기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없지만은 않았고 지방세력의 독립 현상은 간간히 나타났다. 이자성과 청나라에게 치명타를 입은 이후 남명 정권의 분열상이라거나, 삼번의 난,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 성립기에 다시 대규모의 군벌 난립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나 원말•명초에 등장한 여러 군벌들의 사례가 있다.
다만, 존속기간이 실질적으로 겨우 한세대에 불과한 진나라나 수나라는 빼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멸망사와 이후 시대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멸망사를 보면 상당히 의미있는 특징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예로 든 남명 정권의 분열상을 보면, 이는 정확히 말하면 지방 세력의 할거라기보다는 주씨 황족들을 구심점으로 삼은 중앙정부의 잔여세력 내에서 벌어진 권력투쟁과 그로 인한 의견일치 실패의 결과물에 가깝다. 남명의 사례,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례로 남송의 사례를 보면 이 두 사례는 분명 지방정권이기는 하나 '중앙정부의 권위와 통제력이 실추되면서 지방세력이 중앙정권의 영향력 바깥으로 이탈하여 발생한' 사례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외부의 적에 의해 중앙정부가 붕괴된 상태에서도 그 잔여세력조차 여전히 강력한 지방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지방으로 도피하여 지속적인 저항을 시도할 수 있었던 사례라고 봐야 한다.(물론 이쪽 사례의 효시는 동진이다.) 요약하자면 <지방 통제력과 구심력 부족으로 나라가 분해되어 망한 사례> 가 아니라 <나라가 망했음에도 남아있는 지방 통제력과 구심력으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 사례>가 된다. 다만 그 저항세력이 150년간이나 끈질기게 버텨낸 남송의 사례와 달리, 심한 내분을 겪은 남명은 20년만에 지리멸렬해져 멸망했다는 차이가 있으나, 어쨌건 이는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자 지방이 분열되어 이탈한 사례>는 아니다. 그리고 앞서 동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한말에서 보이는 제국의 공중분해가 서진 멸망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황건의 난은 후한 멸망 이후 백여년간의 사회제도 개혁을 거진 서진보다도 낙후된 체제였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 외에 송나라 이후 군벌 난립시대의 전형적인 사례를 찾아본다면 원말•명초 홍건적의 난을 중심으로 한 사례가 있으나, 이 경우는 중앙정부의 장악력이란 측면에서 원나라는 전대의 송나라에 비해서도 크게 퇴보하여 반원 봉기의 중심지였던 강남 지방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통제력이나 장악력이 낮은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삼번의 난 같은 경우, 중원 진입 직후에는 지방 통제력이 약했던 청나라가 한족 출신 항장들의 지방정권을 인정했지만 이후 통일제국으로써의 통제력을 확보하면서 지방정권(번국)들을 흡수(철번)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다만, 청나라의 멸망에서 중화민국의 성립 무렵까지 다시 한번 군벌들의 할거기를 거치게 된다.
결국, 송나라 이후 역대 중국의 통일왕조 멸망사를 보면 일단 이민족 왕조는 한족 왕조에 비해 지방 통제력이 약한 편이었고, 반면 중앙집권을 지향한 한족 왕조에서는 멸망과정에서 외곽지역의 이탈 현상을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셈이다.
5.2. 한나라의 멸망은 과장되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한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주장도 있으나 이는 너무 과장된 관점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황건적의 난 자체가 한나라가 쇠락해진 상태였다는 강력한 증거이고, 난을 겨우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니 이후 조정이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한나라가 본격적인 멸망 수순에 돌입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후에도 한나라가 회생불가의 수준에 이르러 멸망이 실질적으로 확정되었다고 여겨지기까지는 몇 차례 더 중요한 분기점, 또는 역사적 이정표를 지나치게 된다.예를 들어, 황건적의 난 이후에도 상당히 남아있던 중앙정부의 조직력을 결정적으로 실추시켜 사실상 정부 붕괴의 상태로 몰아넣은 십상시의 난이 있고, 십상시의 난 이후 공백이 된 중앙정계에 서북지방의 군벌인 동탁이 진입하여 헌제를 협박하여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직위를 부여받아 온갖 국정농단과 전횡을 일삼고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면서 황제의 권위까지 크게 실추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현실적으로 한나라의 체제가 복구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는) 왕윤의 동탁 암살이 일어난다. 동탁을 암살한 후 동탁의 부하였지만 사이가 벌어진 여포를 끌어들여 '왕윤 자신이 조정의 수장이 되고 여포를 중앙군의 수장으로 삼는다'는 왕윤의 정치적 구상은, 이후 등장한 삼국시대의 군웅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진 영역 확보를 위한 전쟁보다는 중앙정계를 장악하기 위한 군사력을 이용한 정쟁의 성향이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난다. 즉, 해당 시점에서 왕윤은 한나라 황제와 조정의 권위를 복원함으로써 후한의 체제(더 나아가 제국의 영향력)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동탁 세력의 반격에 의해 왕윤이 무너지고 삼보의 난으로 황제가 군벌들에게 무력하게 끌려다니고 도망다니는 처지가 되면서 황제와 조정의 권위가 또 무너졌다가 결국 조조의 옹립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지만 조조에 의해 지속적으로 황제파가 숙청되면서 한나라의 쇠망이 도저히 돌이키기 어려운,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멸망이 도래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실상의 멸망'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황건적의 난이 한나라의 멸망의 과정의 시작임은 명백하지만 한나라의 실질적인 멸망을 설명하기에는 그 이후에도 의미있는 과정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5.3. 농민운동으로서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종교집단에 의해 조직/주도된 최초의 농민봉기로서 황건적의 난이 가지는 가치를 높게 보고 있으며 삼국시대보다 더 깊게 연구한다고 한다. 진승·오광의 난 등 민란은 이전부터 많이 있었지만, 민간 종교집단이 주도한 반란은 이때가 최초였다.전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노동자를 혁명의 주체로 인정했을 뿐, 농민은 그저 조역에 불과했으며 마르크스는 농민을 소부르주아지로 폄하했으나, 이미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도시 혁명만으로는 혁명이 불가능한 것이 입증되었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은 노농동맹론을 주장하면서 농민의 가치를 높게 보았다. 러시아 제국보다도 공업화가 부족했던 중국에서는 농민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고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초기인 1923년부터 농민을 혁명주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내 경쟁자들은 소련의 예를 쫓아 노동자를 규합해 사회주의정권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런 시도가 모두 실패한 반면, 마오쩌둥은 농촌을 근거로 한 게릴라전으로 국민당을 패퇴시키고 중국을 통일하면서 농민중심의 민중사관이 국가의 공식역사관이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의 난"으로 격하되었던 역대 농민반란들이 모두 재평가되었다. 그리하여 '이자성의 난'이나 태평천국을 일부러 높게 평가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전시대까지는 보통 '黄巾之乱'(황건지란)으로 표기했지만, 오늘날 중국에서는 '黄巾起义'(황건기의)라고 높여서 부르기도 한다. 84부작 삼국지이나 《장정일 삼국지》도 이와 같은 난의 가치를 높이는 표현을 따랐다.[14]
황건적의 지도부인 장각등의 인물들은 농민이 아니라 하급관리나 낙오한 지식계층일 가능성이 높지만, 수많은 백성들이 한나라의 실정에 분노해 봉기했기 때문에 "농민이 주체가 된 변혁운동"이라는 의의를 딱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근대적 평등사상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진승 오광의 난보다도 못하다는 이야기를 주장하는 역덕들도 있지만, 일단 암울하고 부패한 현실에 불만을 갖고 타락한 왕조[15]를 거부하면서 하층민부터 지역의 호족 출신들까지 민중들이 한 뜻으로 모여서 봉기와 민란을 일으킨 것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애당초 2000년전의 농민반란에 근대적인 평등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며, 압제를 당하던 백성이 지배계급에 대항했다는 것으로만도 의의가 있다. 삼국지연의/피해자 문서를 보자.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난 당시 진나라의 체제는 아직 공고화되지 못하여 심각한 불안정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던데 비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당시의 한나라의 체제는 물론 심각한 혼란기-침체기에 빠져있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400년에 걸쳐 통일제국을 유지할 정도로 나름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즉 진승과 오광의 난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체제를 무너트린 사건' 이라면 황건적의 난은 '사회적 관성이 될 정도로 강하게 정착된 체제를 무너트린 사건' 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는 것이다.
또한, 현대의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진승·오광의 난을 상징하는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구호가 대단한 상징성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구호가 현대의 평등주의적 가치관을 만족시킬 정도로 명확한 반 봉건적-반 신분제적 의미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며, 이 민란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합류한 이들 역시 대부분은 민중 해방을 꿈꾸는 혁명가들이 아니라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6국의 부활을 꿈꾸는 잔존세력들, 즉 나쁘게 말하자면 복고주의자들이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진승이 주장한 왕후장상 영유종호는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라는 인간평등의 의미라기보다는 "내가 어째서 왕후장상의 지위에 오를 수 없다는 말이냐!" 라는 야망을 표출한 의미에 더 가까웠다. 당장 진승도 본인이 왕이 되고 그 밑에 장상들을 거느렸다. 민중반란으로 왕조를 뒤엎어봤자, 고대, 중세 사회의 특성상 전 왕조와 크게 다를것 없는 신분제 사회를 다시 만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식의 지도자가 그런 구호 아래 성공하고 성공 이후에도 자기 정치에서 그런 구호를 진실하게 실현해 나간 경우는 거의 없다. 사상의 측면에서 수준 높은 학설을 피로한 사상가들은 있지만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 근현대 유력 유럽 국가들의 경우를 봐도 내부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근대적 인권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으나 대외적으로는 식민지로 만들어 압제하고 있었거나 최소한 식민지 침략을 시도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한 민란 세력의 정체성을 따지자면 지방 호족 세력의 참여로 급성장한 황건적의 난이나, 6국의 부활(=구 6국 지배계층의 부활)을 원하는 잔존세력의 합류로 급성장한 진승·오광의 난 사이의 차이가 그리 크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이는 상당부분 시대적 한계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현대와 같이 시민권과 참정권이 상식화되고 강력한 공교육 시스템을 갖춘 것도 아니었던 고대에는 자신의 소양을 갈고 닦아 능력을 계발하는 것 자체가 귀족들의 특권이었기에 유능한 지식인은 대부분 호족 등 유력자 출신이었던 것. 결국 이 시대에 현대인의 평등주의적 감성을 만족시킬만한 '진짜 민초들의 반란'이 체계적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16] 황건적의 난이 성공했어도 그들이 만든 국가는 그냥 왕조만 새롭게 정권교체가 된 전통적인 동아시아 왕조국가였을 것이다. 실제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한 14세기에 일어난 홍건적의 난은 동계 홍건적 출신인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대륙에 명나라를 건국해서 2세기에 일어난 황건적이나 19세기의 태평천국과는 달리 민초들의 승리로 끝났으나 홍건적이 건국한 명나라 역시 동아시아의 왕조국가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었다.
황건적과 홍건적은 중요한 차이점이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홍건적들은 형식적으로도 국가체계를 만들면서 원나라에 대항했지만 황건적은 그거조차도 하지 못했다. 황건적은 기껏해야 장각이 천공장군을 자칭하고 그의 동생들도 장군을 참칭했을 뿐이다. 그 장군직도 천지인의 원리를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장각은 8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태평도의 교주치고는 기본적인 조직체계가 형편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홍건적은 주원장의 명나라 말고도 동계홍건군이 유복통이 한림아를 옹립한 후 대송국을 세웠으며, 서계홍건군은 서수휘를 중심으로 천완국을 세웠다. 주원장의 라이벌 진우량도 진한을 세우고 한왕을 자칭했다. 둘째는 전투력인데 홍건적들은 무려 원나라 여름수도 제나두를 함락시키고 황궁을 불태웠으며 원나라 황제 옥새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타국인 고려를 침략하여 고려의 수도인 개경마저 일시적으로나마 점령했다. 고려가 말기적 증상을 겪고 있다고 해도 나성의 보호를 받는 개경을 함락한 것은 홍건적의 전쟁수행능력이 굉장히 뛰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려도 반격을 개시했을때 정규군 지방군을 닥치는대로 20만이나 모아서 개경탈환에 성공했다. 심지어 원나라의 반격과 내분으로 수뇌부를 잃었음에도 바퀴벌레처럼 끝까지 살아남아서 원나라를 장성이북으로 몰아냈다. 반대로 황건적은 여러 주에서 동시에 일어났음에도 정부군이 의병들까지 조직해서 반격을 가하자 각지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수뇌부인 장각이 병사하자 단번에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잔당들이 설치다가 삼국지 군웅들에게 흡수당했다. 황건적들은 전쟁수행능력이 홍건적보다 많이 뒤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쨌든. 긍정적 혹은 부정적 면이라는 지나치겓게 단순화된 이분법을 배제하고 순수히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이후 일어나는 종교에 기반한 민란은 거의 전부 이 황건적의 난의 도식을 따른다. 난세마다 제2, 제3의 황건적들이 이름만 바꾸어 일어난 셈. 다르게 말하면, 혼란한 시기를 틈 타 적절한 이데올로기(종교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결집시킨 세력은 중국 통일 왕조의 근간마저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이 처음으로 증명된 사건으로, 이후 자그마치 1800여년 동안 중국 통일왕조의 천자들은 자신의 잘못된 통치로 인한 대가가 하늘의 버림, 즉 자연재해와 그로인한 백성들의 민심이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안적 신격을 내세운 집단 종교 운동이 가문과 국가를 멸망시키는 기수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까 늘상 전전긍긍해야 했고, 심지어 중국 역사에서 황제가 사라진 지금도 이를 민감하게 경계하고 있다.[17][18]
6. 기타 창작물에서
삼국지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무대로 자주 쓰였으나, 길어서 중간에 관두는 사람이 많은 삼국지라는 특성상 황건적의 난+동탁 토벌전만 보다 관두는 라이트 유저들에 대한 배려인지, 삼국지 관련 작품에서는 삭제되거나 간략화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난세가 시작된 터닝 포인트라 프롤로그 격으로 잠깐이라도 설명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황건적 구성원들이 이렇다할 개성을 지닌 인물도 없이 줄줄이 털려나가기 일쑤다 보니 미화할 필요 없이 사악한 요술과 약탈을 하며 응진받아야할 악당으로 묘사해 아예 아동도서나 영상매체에서는 도원결의 다음에 아동들이 몰입하기 좋은 유비 관우 장비 심형제가 소수병력으로 대군을 물리치며 역사 고증 신경 안 쓰고 마음껏 날뛸 수 있는 무대가 될 수준이다. 가령 드라마 신삼국은 황건적의 난을 프롤로그로 설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참고로 영걸전 시리즈에서는 조조전에만 황건의 난이 나왔다. 단 한 스테이지이다. 황건적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웬만한 매체에서는 주인공 능력치용 사이비 잡졸들로 나와서 3형제를 포함한 모두가 쓸려나가는 일이 다반사. 토탈워 삼국을 제외하면 어느 쪽으로든 미화되는 경우가 매우 적다.- 영걸전 - 오프닝에만 등장.
- 공명전 - 겪어 보지 못한 일. 당연한 게 황건의 난 당시 제갈량은 겨우 3살이었기에 기억에 남는게 힘들었고, 되려 이 후에 일어난 서주대학살 쪽이 더욱 비중있게 다뤄진다.
- 조조전- 영천 전투(潁川の戦い)가 황건적의 난을 다루는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이다. 단, 황건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황건적의 잔당을 토벌하는 전투인 청주 황건적 토벌전(青州黃巾討伐戦)에서 황건적을 다시 만난다.
- 조조전 온라인 - 장각전, 손견전, 동탁전, 관우전, 유비전에 등장
- 장각전에서는 황건난 전과 후만 등장, 장각이 남화노선에게서 태평요술서를 받고, 찾아오는 사람을 도와주고, 백성들을 구출하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 이후 엔딩은 병사라서 등재가 안 됐다.
- 손견전에서는 완성 전투
- 동탁전에서는 곡양 전투
- 관우전에서는 대흥산 전투
- 유비전에서는 대흥산 전투, 청주성 전투, 광종 전투, 양성 전투
6.1. 삼국전투기
단적으로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도 식상한 주인공 유비 삼형제 활약 파트란 이유로 생략되었다. 그런데 초반 캐릭터 설정을 보여주는 황건적 편을 빼버리니 캐릭터를 살리기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괜히 고전이 아니고, 쓸모 없는 부분은 없는 것이다.그리고 2016년 2월, 삼국통일 챕터가 끝나고 황건적의 난을 에필로그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전반부 인물들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독자들이 많고, 원작처럼 진나라가 통일하는 결말은 허무하기에 아예 초반에 생략한 황건적의 난을 에필로그로 돌려버린 것이다. 각 인물들의 초창기 모습을 재조명함으로써 그들의 인물상의 완성도를 높였다.[19] 댓글창에서는 황건적의 난을 에필로그로 돌려서 오히려 신선하다는 반응과 오랜만에 전반부 인물들이 나와서 반갑다는 반응[20] 등 전체적으로 여론이 호의적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실수였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10년간의 연재를 특별하게 마무리하는 신의 한수가 된 셈.
上편에서 토벌 삼중랑장 황보숭, 주준, 노식이 등장하며[21] 선택의 기로에 놓인 장합[22], 어떤 꿍꿍이[23]를 숨기고 있는 관료 시절의 원소와 허유, 영천에서 야망을 꿈꾸는 조조와 하후돈이 등장한다.
下편에서는 소개컷에 장각, 장보, 장량 3형제가 라면 삼총사로 등장하고, 나라를 쌈 싸먹으려는 동탁[24]과 서영, 앞으로의 싸움을 예견하는 손견과 정보, 황개, 한당, 조무가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하라는 큰 뜻을 품은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등장한다.
6.2.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하진 세력과 장각(황건) 양강구도에다가 손견, 유언, 동탁 등 군소세력이 등장하나[25], 예외적으로 삼국지 8과 9는 세력이 1:1 대전을 치르는 시나리오로 등장한다. 동탁과 마등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쳐들어올 수가 없고 애초에 국력 차이가 나기 때문에 웬만큼 하진에게 말린게 아니라면 먼저 시비걸지 않는다. 근데 이들의 휘하 장수들이 무시무시하기 때문에[26] 만일 쳐들어온다면 가차없이 스노우볼링 당하기 쉽다.[27]황건세력의 경우 초보와 고수의 체감 난이도가 매우 큰데 초보는 여러 방면에서 동시공격하는 한나라와 군소세력들의 우수한 무장들에 치여 실제역사처럼 순식간에 밀려버리는 반면, 고수들은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손견, 유언, 공손찬 등 군소세력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인재를 흡수해서 황건의 시대를 연다. 사실 동아시아 역사를 보면 훈련도 인재풀도 별볼일 없는 농민봉기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새로운 왕조를 연 경우는 홍건적 출신 주원장이 유일하고 나머지 농민봉기군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어찌보면 나름대로 고증을 한 것이다.
하진과 장각(황건) 세력 양측의 능력을 비교하자면,
- 군주의 능력: 하진 < 장각
이건 사실 별 의미가 없는데 장각과 하진 둘 다 일찍 죽기 때문이다. 보통 후임으로 조조와 장보가 임명되는데 장보도 뛰어난 장수이긴 하지만 조조가 훨씬 좋으므로 장기적으로 보면 장각 측이 불리할 수 있다.[28] 그러나 삼국지 11 이후로는 장각처럼 병에 걸려서 죽은 인물은 자연사로 취급되어 그 해에 거의 반드시 죽는 반면 하진처럼 칼에 맞아 죽은 인물은 비자연사 취급을 받기 때문에 둘 다 일찍 죽으니 의미가 없다는 것도 옛말이 되었다. 현재는 장각이 능력 자체는 좋으나 수명 문제가 있고 하진은 능력은 바닥이나 훨씬 오래살 수 있는 식으로 차별화 되었다. 어찌되었던 수명을 제하고 능력만 보면 장각이 더 유능한 건 여전하다. - 군주와 장수의 직함: 하진 > 장각
하진은 애초부터 대장군 또는 대사마나 그와 동급의 직함으로 시작한다. 게다가 천자를 알현할 수 있다. 그래서 각 휘하 장수의 직함도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 장각은 세력만 클 뿐이지 직함은 그냥 개털이다. 결국 하진의 휘하 장수들은 군주의 직함빨로 각종 장군직을 차지해 병력을 많이 보유할 수 있지만 장각은 군주부터 직함이 허접하니 장군직을 가진 휘하 장수가 아무도 없다. 이런 문제로 인해 마음먹고 징병을 실시하면 장각은 보유병력의 한계 때문에 하진보다 어렵다. 다만 삼국지 11같이 한실에 반발한 황건적의 특징을 살려 지휘와 상관없이 황건장수라면 많은 군사를 이끌 수 있도록 되어있는 시리즈나, 14처럼 고유의 관직을 부여할 수 있는 작품도 가끔 있는데 이경우 부등호가 뒤집히기도 한다.[29] - 장수들의 능력: 하진 > 장각
말이 필요 없다. 하진은 군웅이 될 장수진을 휘하에 두고 있다. 자체적으로도 수석 군사가 조조라는 거의 개사기급 옵션에, 장합 같은 무력 파이터 혜자 옵션이 있고 순유, 노식, 황보숭 등 A급 무장들을 확보하고 있다. 반면 장각의 무장들은 장각 3형제를 제외하면 문관이 없고 무관들도 장만성, 관해를 제외하면 삼국지 시리즈의 도적떼 능력치와 별차이가 없을 정도의 쓰레기급 무장들이 대다수다. 그것도 다 무관 쪽이니 한숨만 나온다. 때문에 인재등용을 장각 삼형제가 손수 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마법이 있는 삼국지 시리즈라면, 마법의 성능에 따라 그 격차가 크게 좁혀진다. 환술이 터지면 일발역전이 가능한 삼국지 5, 삼국지 8, 삼국지 9와 희대의 사기특기 귀문이 있는 삼국지 11이 그렇다. 장각과 장보가 병사 1 군량 1로 낙뢰를 갈겨대면 하진의 무장들이 아무리 잘싸운들 답이 없다.[30] 또한 장수제에 중국 전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장수제도 격차를 얼마든지 좁힐 수 있다. 장각이 등장하는 184년 시나리오에선 대부분의 장수와 모사들이 재야에 머무르고 있고[31] 매력이 유비 다음으로 높은 장각은 인재등용에서 매우 유리하다. 몇번만 돌아다니면 특급 인재들을 말 그대로 쓸어모아 질과 양 모두 하진을 압도할 수 있다. 군주제도 허창과 남피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순욱, 종요, 안량, 문추, 전풍이 등용이 가능하고 훗날의 주군이 될 원소, 조조를 각각 안량, 문추, 전풍, 하후돈, 하후연, 조인이 다굴치는 풍경 같은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반대로 하진 세력은 특급 인재들에게 다굴 당하기전에 초반부터 진류, 허창, 복양을 차지해야 한다. - 초기 자원: 하진 < 장각
초기 자원은 모두 장각이 월등히 많다. 이 때문에 하진 세력이 정비를 끝내기 전에 속전속결로 승부를 보는 것이 일반적인 장각 세력의 공략법이고, 하진 세력은 장수의 성능과 방어시설을 이용해서 힘을 키운뒤 장각의 오합지졸들을 철거해 나가는 것이 하진 세력의 공략법. 군소 세력이 존재하는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장각이 손견한테 초기 병력을 쏟아부어 잡아먹은 뒤 인재를 흡수하면 장각측의 떨어지는 인재를 만회할 수 있다. 하진한테 빈틈을 찔려 피해를 입는 걸 감수하더라도 이득. - 도시 수: 하진 < 장각
이는 플레이하는 삼국지가 도시의 성능이 장수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냐, 빈 도시를 점거했을 때의 페널티가 있냐 없냐에 따라 하진과 장각의 유불리가 결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도시의 연계성: 하진 > 장각
위의 도시수가 장각에게는 하나도 안 유리하다. 그 이유인즉 도시의 연계성 때문인데 하진의 도시는 숫자가 적은 대신 죄다 인접해있어서 옆에서 쳐들어오면 바로바로 지원이 가능하지만 장각의 도시는 숫자가 많은 대신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어서 특정도시가 적에게 공격을 당하면 다른 도시가 타국에 막혀 지원을 못 한다. 또한 이 때문에 물자수송이나 장수 이동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즉, 장각의 경우는 도시 하나하나가 다 따로 노는 형국이다. - 병력: 하진 < 장각
병력은 분명 장각이 훨씬 많다. 하진 휘하에 있는 장수 중 조조가 끝장나게 좋다지만 조조는 신분이 군사라서 휘하 병력은 없다. 그리고 하진 휘하의 병력은 하진 본인과 원소, 노식, 주준, 황보숭 등 제한된 인원만 보유하고 있는 반면 장각은 장각 본인부터 시작해서 장수 전원이 휘하에 병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위의 도시의 연계성 문제 때문에 이 병력들을 합칠 수 없어서 그 많은 병력의 숫자값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면 하진은 누구 하나 정해놓고 병력을 몰빵할 수 있어서 둘이 맞붙으면 되려 하진이 장각을 각개격파하는 모양새가 나온다. - 동맹: 하진 > 장각
장각은 제일 큰 대신 사방이 적이다. 반면 하진은 여러 동맹이 있다. 동맹 싸움으로 장각이 하진을 상대하려면 저기 서량에 짱박혀 있는 동탁을 움직여서 하진을 공격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삼국지 6과 삼국지 13에서는 동탁마저 하진의 동맹이라 이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동맹수가 하진이 많다는 것은 오히려 하진의 단점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하진의 동맹국으로 처리될 군주들은 다른 시리즈였으면 하진의 부하로 취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정반대로 장각은 하진의 동맹이 많으면 많을수록 각개격파할 수 있는 세력이 많다는 의미이므로 하진에게 더 유리하다. 대표적으로 삼국지 9는 하진의 동맹이 하나도 없고 공손찬, 유관장 삼형제, 손견이 싹다 하진의 부하라 장각이 뭘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비해 삼국지 14은 하진의 동맹이 아주 많아 유언도 별개 세력, 손견도 별개 세력으로 존재하는지라 이런 세력을 흡수하면 상대적으로 장각이 훨씬 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다.[32]
또한 신군주로 플레이를 할 경우 가장 쉬운 시나리오가 바로 황건적의 난인데 익주, 형주, 양주와 같은 남쪽 땅들이 죄다 공백지라서 삼국지 특성상 공백지를 거점으로 시작하는 신군주에게는 굉장히 날로 먹는 시나리오다.
6.3. 연희 시리즈
진 연희무쌍 애니메이션에서는 장3자매가 원래는 태평요술서[33]를 이용해서 아이돌이 되었지만 10화에서 악덕관리의 행동에 분노한 나머지 장보가 일을 크게 벌려 결국 태평요술서를 이용해 세뇌를 시켜 저지른 행각으로 나온다. 이를 화타가6.4. 진삼국무쌍 시리즈
대대적으로 오프닝 맵으로써 빠질수 없게 나온다. 보통 개인 무쌍모드에선 초기 인물의 시작 시나리오로 나오고 진영별 무쌍모드에선 각 진영의 첫 시나리오로 편입된다.주로 등장하는 기믹은 도술 기믹으류 장씨 3형제가 도술을 여러 가지 부려서 진행해 방해하는 요소가 있지만, 파해법은 많은 편이라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5편의 황건군 본진 뒷쪽에 있는 배경은 아무리 봐도 둔황 막고굴이다.
이 외의 경우 개근하는 시리즈는 스탠드 얼론 확장팩인 엠파이어스(쟁패) 모드. 저 모드가 진삼국무쌍을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인 삼국지 시리즈처럼 플레이하게 해주는 모드인데 삼국지의 맨 첫 배경이 되는지라 쟁패모드 첫 번째 시나리오를 항상 선점중이다. 시나리오 구성은 당연히 기존 삼국지 시리즈와 비슷하게 기본적으론 군웅할거 틀에다가 하진군과 장각군을 양강구도로 놓는 식으로 구성된다.
6.5. 토탈 워: 삼국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토탈 워: 삼국의 그랜드 캠페인 스타팅이 반동탁 연합군의 해체 시점(190년)이라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상황이지만 황건적 팩션 역시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예약 구매 특전 DLC인 "황건적의 난"이 있으면 황건적 팩션을 플레이할 수 있으며, 역대 시리즈에서 공공질서가 낮아져서 나오는 반란군은 해당 작품에선 황건적으로 다뤄진다.2020년 1월 16일 DLC '천명(Mandate of Heaven)'이 고유 캠페인으로 출시되었으며 해당 시점이 182년이라 살아있는 장각 3형제가 모두 플레이어블 팩션으로 나온다. 트레일러에선 여타 삼국지와는 다르게 황건적의 황천을 창백한 구름(창천)이 걷히며 나오는 샛노란 햇빛으로 표현해 망해가는 나라의 최후의 충신 노식과 대립하는 구도와 구름이 걷히면서 색채를 잃은 세상에 다양한 색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삼국지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연출했다. 서양권의 자유로운 시각이 반영된 신선한 연출이 호평받았다.
하지만 이후 삼탈워가 관도전투를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를 종료한다는 사실이 발표되면서 빛이 바랬다. 황건적의 난이 삼국시대보다 역사적으로 더 중요한 사건이라 해도 삼국지라는 이야기 안에선 프롤로그 역할일 뿐인데 도입부는 거창하게 만들어놓고 정작 본 게임은 때려친 격이다. 팔왕의 난 DLC과 마찬가지로 제작진의 힙스터질에 불과했던 셈이다.
6.6. 삼국지 가후전
동탁이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했지만 일부러 조정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아 세력을 불리기 위해 일부러 여러 번 패배하는 것으로 나오며, 일부러 패배하는 것임을 모르는 유비 일행은 동탁을 도와줬다가 욕을 들었고 유비는 그가 일부러 패배한 것임을 알아챈다.동탁이 패하자 황보숭이 대신 임명되었고 조조가 황건적 토벌의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황건적과 싸우면서 일부러 그들의 움직임을 조절해 황보숭이 황건적의 주력과 싸우도록 하지만, 황보숭은 이틀 만에 황건적 본진에 도착하고 조조를 도와주기까지 하고 영천 일대의 황건적을 토벌한다.
6.7. 삼국지톡
파트 1에서 다루었으며 이후 파트의 중심인물들이 등장해 개성을 드러내는 정도를 빼면 큰 특징은 없지만 21세기 현대 테이스트를 섞은 작품답게 황건적 토벌에 참가하는 이들이 인증샷을 올리고 거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운 유비가 혹해 참가한 걸로 나왔다. 해시 태그의 킬(Kill)건적이 압권.6.8. 삼국지:창천이사 황천당립
네이버 시리즈에서 연재중인 작품. 현대에 살던 주인공이 후한말로 회귀하면서 벌어지게 되는 일을 끄적였다.황건적이 주류가 되어 후한말 중원을 평정하고 현대의 ISIS처럼 광신적인 믿음으로 주인공을 따르며 후한말의 영웅들을 상대로 싸우다 종국에는 천하까지 통일하는 내용이다.#
은근히 삼탈워 느낌이 난다(...)
6.9. 삼국지: 황건적의 난(2018)
황건적의 난을 소재로 조조가 주인공인.... 판타지 영화.
장량이 좌자와 마법 대결을 펼치며 유비와 수염안난 관우만이 의형제를 맺고 장비는 유비 따라다니는 꼬맹이로만 나오고 곽가는 TS되어서 좌자의 제자라며 나와서 조조와 유비를 흩날려라, 천본앵으로 구해주는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영화다.
[1] 한국어로는 '황건의 난', 한자로는 '黃巾起義(황건기의)'로도 불린다.[2] 한나라 13개 주 중에서 '8개 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3] 장각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반란 모의 사실을 하진에게 알리며 반란군에서 이탈했다.[4] 황소, 하의, 관해, 유벽, 서화, 사마구 등.[5] 사서의 황건적 토벌기록이 경우에 따라 184년이 아닌 시기에도 있다. 도겸의 파견기록이 그 예시.[6] 단 《삼국지연의》의 기준이다.[7] 또한 유비, 관우, 장비를 따로 불러 후한 상을 내리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8] 공경 또한 마찬가지로 유관장 3형제에게 상을 후하게 내리면서 구원에 대해 진심으로 감격해하고 고마워한다.[9] 장보는 실제 참전 여부가 불명확하다. 후에 장량, 장각의 토벌 이후 기록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장보가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기록은 없어 서술했다.[10] 초기 노식의 병력은 크게 열세였다고 나온다.[11] 수만 이상[12] 다만 후한서 황보숭전에서는 장량에게 격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언제 패한 건지는 불명이다. 다만 성으로 몰아넣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의 공성전에서는 패한 것일 수도 있다.[13] 황건적 지휘부 중 누가 어떤 전투를 지휘했는지 알수는 없으나, 일단 장량의 경우 황보숭을 격파했다고 확실히 나온다. 장보는 이미 서술했듯이 장각, 장량이 모두 전사한 이후에만 등장한다.[14] 이는 꼭 중국뿐만 아니라 다른나라도 마찬가지다. 대한제국-일제 시절 동학농민전쟁은 "동학난"이라고 불렸으나, 1980년대까지는 동학 농민운동, 현재는 동학 농민 혁명으로 불린다.[15] 당시 한실은 조정의 환관과 외척의 다툼으로 리더십이 붕괴되어 더이상 존속하기 힘든 상태였다. 이후에도 이런 상태를 보이는 왕조는 비슷하게 멸망했다.[16] 그리고 이런 것은 보통 진짜 아무 것도 없는 육체노동 민초들을 겪어보지 못한 상류계층이나 현대 도시인들의 환상이다. 현대에도 하버마스 같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지역 공동체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조금씩 확산되려고 하는 한국의 지방자치제도도 긍정적인 반응만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지방에서 그들끼리의 리그를 만들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사례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물론 소위 말해지는 민초들에게도 얕볼 수 없는 지혜와 식견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건 그거고 현실적으로 전근대 시대 민초들은 거대한 정치적 공동체를 성립시키고 관리할 만한 능력이 없다. 나름대로 상류층 생활을 오래하고 지방관 노릇도 남 못지않게 했던 동탁만 해도 멋대로 돈 찍어내다가 망했다. 민초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거대한 정치적 공동체를 성립하고 관리하는 데 필수적인 경제학적인 능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경제학적인 능력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17] 상기된 바와 같이, 황건적의 난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진승·오광의 난 당시의 진나라는 아직 6국의 흔적과 잔재들이 강하게 남아있었기에 통일 왕조에 의해 정착된 체제 자체를 뒤흔든 사례라 보기는 어렵다.[18] 근대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황건적의 난과 여러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유사 종교 결사에서 출발해서 반란을 통해 순식간에 제국의 막대한 영토를 점령하였지만, 호족이나 신사계급같은 지방의 지배계층의 반격으로 점차적으로 수세에 몰려 결국 궤멸하고, 무력한 중앙군대신 반란을 진압한 지방 지배계층의 군벌들은 점차적으로 중앙 황제의 권력에 도전하는 독립세력으로 성장하면서 결국 제국을 붕괴시키는 패턴은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거의 1700년의 시간이 지난 태평천국의 난에서도 되풀이되었다.[19] 인물의 묘사를 보면 연재 초반과는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관념이 바뀐 부분이라 할 수 있다.[20] 특별출연이 아닌 순수한 사망씬을 기준으로 上편에서 가장 최근에 등장한 캐릭터는 장합으로, 사망신 연재분이 2013년 6월 13일로 무려 2년하고도 8개월 만에 생전 모습으로 등장했다.[21] 부연 설명을 하자면 황보숭은 화공을 했다는 점 때문에 아카이누로, 노식은 유비의 스승이라는 점 때문에 정상전쟁까지 "한껏 해이해진 정의"를 모토로 삼은 아오키지로 패러디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은 주준은 자동으로 키자루 당첨이 되었다.[22] 실제로 장합은 원래 관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가 징집 명령에 무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 케이스다.[23] 아마도 십상시의 난.[24] 실제로 황건적에게 일부러 패한 근거는 없다.[25] 장각을 제외한 모든 군주는 동맹 or 하진에게 종속 or 연합세력으로 맺어져 있긴 하다.[26] 장수들이 기마특성을 갖고 있어 시너지를 일으키는 공손찬, 여포가 있는 정원, 유관장이 있는 유언. 게다가 하진 세력은 군사가 조조이고 대표장수가 황보숭과 주준, 장합에, 전투력이 높은 본인과 정보, 황개, 한당이 있는 손견이다.[27] 하지만 하진에게는 무려 조조가 참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조조를 인사 담당관으로 임명해서 여포를 금으로 포섭하면 충성심이 낮은 여포답게 바로 합류한다.[28] 단 하진군 장수 중 특히 후한 계열이나 원소 계열 장군들은 상성이 100으로 조조 25와 정반대이기 때문에 집단 하야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반면 장각이 장보로 교체되면 요화와 주창 둘의 충성도만 떨어질 뿐이다.[29] 11의 경우는 격차가 꽤 심한데, 관직과 기교 '군제개혁'이 모두 없을 때 대부분 세력은 병력 5,000을 이끌 수 있으나, 황건적은 처음부터 10,000명이 넘는 병사를 한 장수가 통솔할 수 있다.[30] 이게 가장 잘 드러나는게 삼국지 11 결전제패의 역적토벌전인데, 여기서는 백출 + 귀문 콤비를 쓰기 때문에 운이 안좋으면 순식간에 수만 병력이 녹아내린다.[31] 시나리오 시작하는 184년만 쳐도 진류에서 하후돈, 하후연, 조인, 평원에서 화흠, 남피에서 안량, 문추, 봉기, 업에서 전풍, 저수, 심배, 북해에서 손건, 허창에서 순욱, 종요, 복양에서 진궁, 정욱, 우금, 완에서 황충이 등용할 수 있고 유관장 삼형제가 방랑군으로 구현된 시리즈에서 하북에 방랑군으로 떠돌고 있는데 세력이 약해 손쉽게 멸망시키고 등용할 수 있다.[32] 가령 삼국지 9에서는 장각이 하진군 '태수 유언'을 물리치고 계땅을 차지하고 확률적으로 계 소속의 장수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봤자 하진군을 멸망시키기 전에는 하진군 소속으로 충성도가 100으로 잡혀있는 장수 누구도 등용할 수 없는데 반해 장각이 유언군 '군주 유언'을 물리치고 계땅을 차지하면 100% 확률로 유관장 삼형제를 포함한 유언군 장수를 모조리 포획할 수 있고 세력이 없는 이들을 상대적으로 쉽게 등용할 수 있게 된다.[33] 게임 등에서는 지력+10정도를 올려주는 아이템으로 등장. 실제로는 만민 평등 등을 주장한 저서로서 한제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당한다.[34] 거기다 장 삼자매는 태평요술서를 가지고 있어서 사실상 요력이 무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