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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환후(桓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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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직위 | 거기장군(車騎將軍)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 ||
성 | 장(張) | ||
휘 | 비(飛) | ||
자 | 익덕(益德)[1][2] | ||
출생 | 165년 추정[3] | ||
후한 유주 탁군 (現 허베이성 바오딩시 줘저우시) | |||
사망 | 221년 6월 (향년 55~56세) | ||
촉한 익주 파서군 낭중 진영 (現 쓰촨성 난충시 랑중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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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유비 휘하의 장수. 자는 익덕(益德). 유주 탁군 사람.[6]젊었을 적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으며, 주군인 유비를 따라 수십 년간 전쟁터를 전전하며 숱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촉한 건국에 이바지했다. 그 기세가 마치 곰과 호랑이처럼 장렬하여 당대의 여러 인물들이 장비를 두려워했고 만인지적이라 불리며 중원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동시에 유비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죽음을 불사하고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달려나가 항상 승리를 쟁취했던 그 끝모를 충성심과 용맹함 덕분에 사후 수백 년간 관장지용으로 칭해지며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용력과 지용을 갖춘 호걸로 받들여졌다.
허나 인자하고 덕이 높았던 유비나 오만함은 있었어도 아랫사람들과 우군이라 판단된 자에겐 잘 대우했던 관우, 공명정대했던 조운과 달리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무례하고 기준이 엄격하여 흉악한 일을 초래하기도 하였다.[7]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와 강렬한 이미지로 인해 중국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삼국지평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2. 생애(정사)
자세한 내용은 장비/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연의
나에게 어느 정도 재산이 있으니 고을 안의 용사들을 불러 모아 공과 함께 큰일을 도모해 보는 게 어떻겠소?[8]
《삼국지연의》에서는 자(字)가 동음의 익덕(翼德)으로 나온다. 이것은 장비의 이름에 '飛(날 비)'가 있기 때문에 이에 어울리고자 '翼(날개 익)'을 대신 사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의미를 고려하면 정사의 자(字)인 익덕(益德)이 맞는다. '덕을 더욱 더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연의에서는 그야말로 8척 장신 호걸에 전형적인 막내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주호 속성이 붙어서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선의에서 한 일이 안 좋게 되어 유비를 곤란하게 만드는 등[9], 왠지 말썽꾸러기 막내동생(?) 이미지로, 굵은 사람에겐 굵게 대하고 가는 조무래기들은 하찮게 여기는 호걸다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연의의 첫 장면에서[10] 술을 팔고 돼지를 잡는다고 스스로를 소개하지만[11] 의외로 삼형제 중 돈셔틀 포지션으로 시작한다.[12] 바로 위의 소개문에서도 대대로 탁군에 살면서 논밭도 꽤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비가 의병을 일으킬 돈이 없다고 말하자, 흔쾌히 자기 돈을 쓴 사람도 장비.[13] 그리고 도원결의의 장소를 유비네 복숭아밭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본문에서는 장비네 복숭아밭이다. 모종강의 경우는 이 장면에다가 아예 "결국 돈이 많아야 큰일을 도모하기 쉽다"고 협평을 끄적여놓기도 했다.
연의의 여러 각색 판본 중 하나에 따르면 장비가 돼지고기를 팔고 있었는데 관우가 커다란 항아리를 장비 근처까지 들고 와서 그 항아리 속에 든 고기를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줬다. 장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상황이다. 옆에서 자기 물건보다 싸게 팔아도 열받는데 아예 공짜로 나눠주고 있다. 관우의 이 행동 때문에 관우와 장비는 싸움이 났다. 이 싸움을 유비가 중재해서 이를 계기로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를 맺었다. 단 이는 여러 판본 중 하나일 뿐이다.[14][15]
싸움에서 관우와 함께 여포를 제외하면 천하무적. 연의에서는 여포와 라이벌 구도를 세워 두 번의 결투를 벌였다. 첫 번째 삼영전여포에서 여포와 50합 정도를 겨루다[16] 이어 합세한 유비, 관우와 함께 3대 1로 싸워 여포를 패퇴시켰다. 덕분에 여포와 독특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다. 여포에게 호승심 같은 것을 느끼며 싸움에서 도전하려 하지만, 여포의 인성에 대해서는 가루가 되도록 깐다. 삼영전여포에서 여포가 정원, 동탁을 양부로 섬겼기에 삼성가노[17]라는 불명예스런 이명을 지어준다. 이후에도 여포만 만나면 분노를 참지 못하여 유비와 여포 간의 갈등 요소를 여러 번 만들기도 한다.[18]
여포가 서주에 있던 유비에게 투항한 이후로도 계속 장비는 여포 늑대론을 주장하며 끝까지 여포를 미워하는데, 이 때문에 역으로 여포의 장인으로 설정된 조표가 끌어들인 여포가 서주를 뺏는다. 간신히 우여곡절 끝에 소패로 돌아온 유비였지만 다시 장비는 여포가 상인에게 구입한 말을 대량으로 도적질하면서 또 전쟁을 일어나게 한다.
서주에서는 여포와 1:1로 맞짱떠서 밀리는 기색없이 100합을 싸웠는데 연의에서 무신급으로 띄워주는 여포와 이 정도로 대등한 매치를 벌인 건 장비가 유일하다. 게다가 여포가 서주를 기습할 때, 장비의 용맹을 알고 있어서 추격하지 않았다는 서술까지 있다. 반면 조표는 장비에 대한 원한으로 무리하게 추격했다가 취한 와중에도 그를 알아본 장비에 의해 목이 달아난다.
"당치도 않습니다. 제 의제인 장비는 저보다 무용이 뛰어나, 적 장수의 목을 가져오기를 마치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물건 꺼내듯 합니다."
조조가 안량을 베고 온 관우를 치하하자 관우가 한 말.
조조가 안량을 베고 온 관우를 치하하자 관우가 한 말.
관우가 조조에게 신세를 지고 있을 때 안량의 목을 벤 직후 조조가 관우의 무예를 찬탄하자 관우는 조조에게 "저는 별것 아닙니다. 제 아우 장비는 적장의 목베기를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이 합니다."라고 말하여 장비의 무서움을 각인시켜준 바가 있다.[19] 이는 고사성어 낭중취물의 유래가 된다. 이에 조조는 "장비란 이름을 옷깃에라도 적어두었다가 가볍게 상대하지 말라."라며 부하들에게 주의를 주었고, 이것은 장판파에서 현실화된다.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서주를 빼앗기고 삼형제가 흩어졌을 때 고성에 원래의 주인을 내쫓고 고성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찾아온 관우를 의리를 저버리고 조조를 섬겼으며 자신을 잡으러 왔다고 오해해 죽이려고 한다. 심지어 감부인과 미부인이 관우가 조조에게 투항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손건이 관우를 변호하나 듣지 않는다.
조조의 부하 채양이 오자 장비는 관우에게 북을 세 통[20] 치는 사이에 적장의 목을 베면 오해를 풀겠다고 말한다. 결국 관우는 한 통을 채우기도 전에 채양을 베고, 그제서야 오해를 풀고 관우에게 잘못을 빈다.
연의에서의 장판파 이야기는 좀 더 각색된다. 우선 병사들에게 뒤에서 흙먼지를 일으키게 만든 장비는 장판교에서 서서 조조군을 가로 막는다. 조조의 장수들이 잇따라 도착했지만 동쪽 숲에서 흙먼지가 이는 걸 보고 제갈량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장비는 우레와 같은 큰 소리로 겁을 주고 그 기세에 하후걸이란 장수가 말에서 떨어지니 조조를 비롯한 대군이 밀물 빠지듯 줄행랑을 쳤다.
조선의 경연장에서도 선조가 장판파 대목을 언급했던 걸 가지고 유학자들이 갑론을박하기도 했다. 아무대로 이 장판교 대목은 연의 안에서도 꽤나 임팩트가 크긴 컸나보다.
조운이 아두를 구할 때마다 장비가 나서서 마무리한다. 장판파에서 조운을 쫓던 조조군을 막아낸 것도 장비였고, 손부인이 아두를 동오에 데려갈 때에도 장비가 배를 몰고 온 덕에 조운이 아두를 데리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마초와도 승부를 내지 못한 둘뿐인 캐릭터이기도 하다.[21] 1:1로 하루종일 싸우고도 승부가 나지않아 횃불을 켜놓고 밤중까지 싸운 일화도 있다. 이 일화에서도 끝내 승부를 내지 못하자 이대로라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을 거라 염려한 유비가 제갈량에게 계책을 듣고 마초를 생포하는 것으로 결판난다.
최후 묘사는 정사에서는 단순히 수급을 취하는 것만 나온 반면, 연의에선 관우의 죽음을 애도한다며 3일 내로 휘하 장병들이 쓸 흰색 깃발과 흰 갑옷을 준비하라는 명령의 기간을 늘려줄 것을 요청한 범강, 장달을 오히려 채찍으로 벌하는데[22], 앙심을 품은 두 사람이 장비의 목을 베어 오나라로 도망친다. 향년 55세라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연의에서는 167년생으로 설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에선 오에 귀순한 범강과 장달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연의에서는 귀순 후 손권이 유비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돌려보내 둘 다 장포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나온다.
3.1. 연의의 피해자?
소설적 재미를 위해 인물이나 사건을 각색한 부분이 많은 연의에서도 정사의 묘사와 큰 차이점을 보이는 인물 중 하나다.정사의 장비는 지용을 겸비한 호걸이다. 힘은 세지만 계책에 서툴고 경솔하고 단순 열혈이며 정이 많은 연의에서의 이미지와는 크게 다르다.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 칭호로 명성이 자자했고 인간흉기이자 용병에 능한 장수로서, 위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장합이 이끄는 군세를 한중에서 완전히 초토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연의에서는 술에 취해 실수하는 일이 많지만 정사에서는 술에 취해 실수한 기록은 물론이고 애초에 술을 좋아했다는 내용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연의에서는 술에 취해서 조표에게 갑질을 하고 결국 하비성을 빼앗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사에선 조표와 다툰 이유가 나와있지 않다. 또한, 연의에서는 꾀를 쓰는데 서툴다거나 어진 선비를 몰라보고 날뛰는 등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포로로 잡은 적장도 뛰어난 인물이라면 격식을 갖추어 엄중하게 대했다. 연의를 통해 정립된 힘만 센 망나니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23] 게다가 실제 기록 상에는 단순히 범강, 장달에게 살해당했다고 나오고 그 이유조차 상세히 적혀있지 않지만, 연의에서는 장비가 수십만 대군이 쓸 흰색 갑옷과 기를 사흘 안에 장만하라는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당연히 못해내자 죽도록 팬 다음 내일까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사실상 범강과 장달은 상관의 말도 안되는 개억지 갑질에 오직 살고자 선수를 친 셈이다.
하지만 연의의 묘사가 단순히 장비를 깎아내린 것만은 아니다. 정사에서의 장비는 호걸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의로움을 제외하면 전무하다. 그러나 연의로 인해 구축된 용맹무쌍하면서도 단순하고 순진한 장비의 성품은 서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확실히 연의에서 장비가 벌이는 실책은 독자의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긴 하지만 미워할 마음이 들게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탐관오리를 매질하거나 형제의 정에 눈물을 쏟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거나 민초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경향이 있다.[24] 개그 캐릭터로서의 일면도 존재해서 제갈량의 초려에서 유비와 나누는 대화는 만담에 버금간다.[25][26]
이는 유비나 여포 등 연의에서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과도 공통되는 점이다. 연의에서 묘사되는 유비의 무위의 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무능력자로 비쳐질 수 있으나, 연의가 저술될 당시에는 매력적인 인물상으로 생각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규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노답인 인물이지만 당대 인물들에게는 매력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연의의 묘사 때문에 '힘만 세고 무식한 돌격대장'이라는 이미지가 장비에게 붙어서 이러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이 다수 생겨났고[27], 이러한 2차 창작물의 영향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장비는 용맹하기는 한데[28] 성미가 급해 트러블을 일으키는 인물로 박혀버렸다.
하지만 이 마저도 결국 현대에 와서 생긴 이미지라는 걸 감안해야한다. 당시 삼국지가 집필되던 당시에 이 소설을 읽었을 독자들의 교육 수준을 생각해보면 장비같은 인물상이 인기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는 유비가 너무 어리숙하게 그려져서 연의의 피해자 소리를 듣지만 당대에는 이런 어리숙한 유비가 군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단 점과 비슷하다.
장비는 일반 대중의 관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예컨대 당대 탐관오리들로부터 수탈을 당해오던 민중들 입장에서 독우가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고 거만하게 굴다가 장비에게 묶여 매를 맞는 장면을 보고 '그래도 나라에서 보낸 공무원인데 저렇게 쓰면 되나. 장비가 잘못했다.'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시대상과 도덕관념이 다르다고는 하나 현대에서도 나라에서 파견한 공무원이 하라는 일은 안하고 시민들 재산을 빼앗고 행패를 부리는 걸 보다 못한 누군가가 그 공무원을 두들겨 패면 누가 그 사람을 탓하겠는가?
비슷하게 여포가 서주를 빼앗은 직후 장비가 여포의 말을 훔치는 장면도 현대의 교육 수준이 높고 상황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사람들 입장에서는 여포가 서주를 뺏은 건 뺏은거고 말을 훔쳤는데 여포가 광분하지 않을리가 없다며 장비의 행동이 경솔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장비는 이 장면에서 오히려 '여포놈은 서주를 뺏었는데 내가 말 몇 마리 뺏은 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슈?'라며 유비에게 따지고 드는 장면은 당대 독자들로 하여금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유비보다 훨씬 진정성 있고 이해하기 쉽게 다가온다. 여포는 나쁜 놈이고 먼저 잘못을 했으니 장비가 이 정도 행동을 하는 건 전혀 심하지 않고 그거 가지고 따지고 드는 여포가 나쁘다는 식이다.[29]
당장 장비의 정사상 캐릭터성을 그대로 현대에 옮겨 온다고 하면 대통령에게는 충성하고 유력 정치인이나 학계에 유명한 교수급한테는 주기적으로 편지나 인맥을 동원해 친밀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자기 휘하에 있는 하급 장교나 병장 이하급 병사들은 끊임없이 굴리고 사람 이하의 대우를 하며 무시하는 케이스이다. 현대에도 이런 인물상이 좋은 소리를 듣기는 커녕 능력있는 사람에게만 아첨해서 한 자리 해먹으려는 기회주의자라고 욕먹기 딱 좋은데 교육 수준이 훨씬 낮고 기득권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컸던 과거에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장비가 위와 같은 단순하지만 쾌남 이미지가 있어서 인기를 얻은 것이지 가뜩이나 문무겸비형 장수로 묘사돼서 관우랑 장비랑 이미지가 겹치면 차라리 (독자들이 감정이 입하기 딱 좋은) 아랫사람에게 잘해준 관우나[30] 오직 주군에게 충성하는 이미지만 있는 조운을 좋아하지 뛰어난 사람에게만 잘해주고 아랫 사람을 무시하는 장비를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즉 굳이 따지면 '소설 캐릭터 장비'는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에 비해 (군사적 능력 외에) 다른 능력 면에서는 너프를 당했으나, 인간적인 매력 면에선 버프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위 서술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정사에 기록된 장비의 모습은 상대방 지위를 두고 차별을 하기보다는 인격 내지는 됨됨이를 보고 태도를 달리하는 것에 가깝다. 그가 갈등을 했던 조표는 당시 하비상으로서 장비보다 관직도 높고 입지도 높으면 높았지 아래라고 보기 힘든데도[31]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반면 포로로 잡힌 엄안에게는 예의를 갖춰 대했다. 여기서도 보면 자신에게 패한 엄안을 꾸짖고 목을 베려고 하다가 엄안이 당당한 모습을 보이자 그를 빈객으로 삼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능력과 인품이 뛰어난 인물은 존중하고 본인이 보기에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인물이면 막 대했다는 의미로, 그리 호감형 인물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지만 상대방 직위에 따라 태도가 바뀌는 강약약강 기회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인물이라면 세력 내 입지가 유비를 위협할 정도였던 조표를 노골적으로 적대할 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 '군자를 경애한다'는 면은 당대 인물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장비의 성격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결국 아래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부분이다. 물론 이 점 역시 독자들의 호감을 사긴 무리인 부분이 맞다.
결국 이제 와서는 삼국지연의의 피해자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당시에 나관중은 장비를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수준과 당대의 감성에 맞춰 장비라는 인물을 솔직하면서 독자의 답답함을 풀어주고 호쾌한 이미지를 가진 쾌걸로 묘사한 것이다.[32] 결과적으로 집필할 당시에는 작가가 장비를 비하할 의도가 없었는데 시대가 지나고 독자의 수준이 올라가니 비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3.2. 연의에서의 장비의 지략
다만 연의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 역시 오해가 될 수 있는 것이, 장비를 단순한 감성 넘치는 협객으로 보는 시선은 연의보다는 그 연의에 의해 파생된 2차 창작에서 보여주는 모습에 가깝다. 애시당초 역사 속의 장비도 지용을 겸비한 호걸인 만큼 그 활약상을 그려내면서 장비의 용병술이 잘 드러난 부분이 생겼고 이로 인해 연의에서도 처음엔 단순무식 캐릭터에서 차츰 성장하여 지략까지 겸비한 완전체로 성장하는 모습을 잘 그려주어 극에 또다른 재미를 부여한다. 제갈량이 장비의 계략을 알아채고 보조해주며 직접적으로 "장비 장군님이 이제 책략도 능히 쓰실줄 아는 지장이 되셨다." 라며 칭찬하기도 한다.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일명 낚시인 것 같다. 심지어는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33]를 이용해 적장을 낚시하기까지 하니, 심리전에도 상당히 능한 장수라고 할수 있다.[34]
연의에서 장비가 보여준 지략은 다음과 같다.
- 유비가 조조의 밑에 잠시 의탁했다가 원술과 원소의 합류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빌려 탈출한 뒤 서주를 점거하고 조조는 유대와 왕충을 보내 토벌하게 한다. 첫 전투에서 관우가 왕충을 사로잡자 장비는 호승심에 자신도 유대를 잡아보이겠다며 나선다. 물론 유비가 넌 그 성질머리에 사로잡지 않고 죽일게 뻔하니 안된다고 반대하자 각서까지 쓰고 나선다. 그런데 장비가 며칠동안 문자 그대로 개지랄부르스를 춰도[35] 유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장비는 야습을 계획하는 한편, 주정을 하는 척하며 부하 중 한 사람을 트집 잡아[36] 죽도록 패고 야습전에 제사지낼 산제물로 쓴다고 한 후 측근들에게 몰래 명해 풀어주라 한다. 그 병사는 적진에 가서 야습을 알리고 적장도 야습에 대비하는데 장비는 무슨 생각인지 병력을 셋으로 나눠 여러 방향에서 처들어 가게 한다.[37] 드디어 적진에 입성했지만 야습에 대비해 진을 비워서 함정에 걸려서 도주하는 장비를 추격하던 유대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린 장비가 맹공을 퍼붓자 후퇴하는데 이미 진은 장비가 산을 넘어 뒤를 치게 한 부대가 점령한 상태.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유대를 장비가 창대로 후려쳐서 낙마시키고 생포한다. 병사를 때린 것이 고육지계였는지, 아니면 장기말로 이용한 것인지는 언급이 없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짜고친 고스톱, 즉 고육지계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결과 보고를 받은 유비는 이제 장비도 계략을 쓰니 내가 안심이 된다고 기뻐한다.[38]
- 위의 사건 뒤에 조조가 직접 서주를 정벌하러 오자 먼길을 오느라 지친 틈을 타서 야습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유비도 "너 지난번에 유대 잡을 때도 머리 제법 쓰더니만 오늘 계책도 병법에 맞는구나."라고 평가한다. 비록 이 계책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건 계략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갑자기 바람이 불며 조조군의 깃발대을 꺾어버리는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나서 순욱에게 묻자 이건 적이 야습을 할 징조라며 방비하게 한 것이다. 연의 저자도 하늘이 조조를 도왔다는식으로 얘기한다.
- 장판파에서 병사들에게 빗자루로 땅을 쓸고 말꼬리에도 빗자루를 달아서 수풀뒤에서 먼지를 일으키게 하여 대군이 숨어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장판파에서 사자후를 발하여 하후걸을 말 위에서 떨어트리는 등 조조와 부하들에게 겁을 줘 쫓아버린다. 이때 연의에서는 조조가 과거 관우가 잠시 자신의 휘하에 있을때 했던 자신의 아우 장비는 적장의 수급을 취하는것을 주머니속 물건 꺼내듯한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정말 그럴 놈이로구나!" 라고 질색한다. 막상 그래놓고 후환이 염려된답시고 다리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조조가 다리를 끊은걸 보니 대단한 병력은 있지 않다고 판단해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둔덕에 마침 관우가 강하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와서 조조의 추격을 쉽게 물리친다. 조조가 다리가 멀쩡하게 유지 될 때만해도 정말 대군이 있는건지 아니면 그저 허장성세(虛張聲勢)[39] 인지를 의심하고 있었으나 장비가 다리를 부숴버린 시점에서 허장성세임을 확신했다. 다만 원작자의 의도대로라면 이 부분은 장비의 지략보다는 용맹을 강조한 대목이다. 정사에서는 허세 없이 막아냈으니 용맹을 강조했고, 연의는 의병계를 썼으니 지략이 강조되었다는 서술을 나무위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연의에서 장비가 단순 고함소리만으로 하후걸을 낙마시키고 조조군을 패닉 상태에 빠지게 했다는 점만 봐도 강조된 것은 오히려 용맹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나중에 유비가 장비를 평가할 때에도 되도 않는 허세를 성공시킨 용맹은 대단했지만 마무리가 2% 부족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 파촉 점령 당시 엄안이 성 안에 틀어박혀 우주방어에 들어가자, 장비는 시일을 끌 수가 없어 샛길 기습을 계획한다. 샛길을 찾느라 공격이 들어오지 않자 의심을 품은 엄안은 장비의 진영으로 첩자를 보냈는데, 이 때 장비는 특유의 성질과 호령으로 첩자들이 듣고 착각에 빠지도록 일부러 계획을 누설한다. 이에 엄안은 역기습을 하기 위해 선봉에 선 장비를 보내고 군량이 있는 행렬의 중간을 공격한다. 그러나 앞서 지나간 장비는 그와 닮은 사람이 연기한 대역이었고, 행렬의 중간에 숨어있던 장비에게 공격을 당해 사로잡힌다. 이에 사로잡힌 엄안이 충의를 내세워 어서 자신을 죽이라면서 장비를 맹 비난하며 혼을 내자, 되려 흥분할줄 알았던 장비는 엄안의 밧줄을 풀어주고 기개와 충심에 탄복했다며 머리숙여 절을 하며 설득하여 결국 엄안을 등용시킨다. 그리고 이 엄안 등용은 신의 한 수가 되어 나머지 관문을 문자 그대로 하이패스로 통과 할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었고[40] 장비가 빠르게 유비를 지원하러 갈수 있었다. 심지어 같이 이동했던 제갈량과 그 외의 장수들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 이 부분은 병사 한명을 장비와 같은 가짜 수염으로 분장시키고, 가짜 투구와 장팔사모로 변장시켜 이용했다. 이같은 전략으로 매우 빠르게 유비를 구하러 올 수 있었다.[41]
- 한중 공방전 당시 산 지형을 이용해 장합을 두 번이나 크게 패퇴시켰다. 심지어 위나라측도 장합을 믿고 요충지를 맡긴 것이어서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었고 보험으로 둔 관문에서 뚫린 것이라, 장합의 두번의 실패 때문에 한중을 얻을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전공이었다.
- 장합이 성에 처박혀 안 나오자 뭔 생각을 했는지 몇날 며칠을 술판을 벌이고 논다.[42] 이를 보고 받은 유비는 그 이전에 술로 인해 벌인 실수들을 생각해서[43] 강제소환을 하려고 했지만, 그 작전을 눈치챈 공명은 장비의 계략을 설명하여 유비를 안심시킨 뒤, 좋은 술을 한 수레 실어서 보내되 한 술 더 떠서 "군전공용미주(군중에서 다함께 마시는 고급 술)"라는 깃발까지 달아준다.[44] 장비가 사고를 칠 것이라 우려하는 유비에게, 공명은 되려 "장비 장군이 머리도 쓰실 줄 알게 된거라며 믿고 맡겨달라"고 한다. 한편. 술이 도착하자 장비는 역시 공명이라면 눈치 채고 도와줄 줄 알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더욱 더 크게 술판을 키운다.[45] 그 꼴을 본 장합은 "저 털보 자식이 날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하며 전군을 동원해 기습 공격을 하지만 술판의 상석에 있던 장비는 허수아비 인형. 그리고 진짜 장비가 술에 전혀 안 취한 채 나타나서 장합을 공격하여 1차전을 승리하고 첫 관문을 접수한다. 즉 장비는 술판으로 함정을 파서 장합을 낚은것. 게다가 병력들도 당연히 술은 마시지 않고 있었다.
- 장합은 대패한 뒤 성으로 숨어 들어가 두번째 관문에서 농성을 하고 조조의 본대를 기다리지만, 그사이 장비는 주변 백성들을 탐문하여 알아낸 정보를 통해 두번째 관문의 우회로를 알아내 산을 타고 넘어가 기습한다. 이렇게 이어진 2차전에서도 역시나 장합은 대패한다.[46]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여기서 술판을 지나치게 키워서 장비의 병사들이 발가벗은 여자를 구경하느라 장합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장비는 처벌로 병사들을 신나게 두들겨 패고, 이에 열받은 병사들은 이후 장합군을 다시 물리칠 때 일부러 창대로 두들겨 패서 장합군은 전사자보다 부상자가 더 많은 현상이 벌어진다.
4. 가족 관계
- 하후씨 - 장비의 아내, 하후연의 조카딸.
- 장포 - 장비의 장남.
- 장소 - 장비의 차남.
- 경애황후 장씨 - 장비의 장녀, 유선의 황후.
- 장황후 - 장비의 차녀, 유선의 황후.
- 장준 - 장비의 손자, 장포의 아들.
장비의 가족 관계는 상당히 재미있는데 장비의 아내는 하후연의 조카딸인 하후씨라는 기록이 있다. 장비와 하후씨의 결혼에 대한 내용은 하후씨 문서 참조.
장비의 아들은 요절한 장포, 시중을 지낸 장소가 있다. 장비의 손자는 장포의 아들로, 면죽성에서 제갈첨과 함께 등애의 공격에 맞선 가운데 전사한 장준이 있다. 장비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후주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황실의 외척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위상이 촉한에서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47]
5. 평가
일신의 용맹은 물론이고 군대의 지휘, 전술, 전략 모두 최상급인 용장이다.하동의 관우 운장, 동군의 장비 익덕은 두 사람 모두 영웅 장사로, 선주의 무장이 되었다.
장비와 관우는 용맹이 삼국의 수위에 섰으니, 만인의 적이라고 칭해졌다.
화양국지, 유선주지
장비와 관우는 용맹이 삼국의 수위에 섰으니, 만인의 적이라고 칭해졌다.
화양국지, 유선주지
관우와 더불어 당대에 이미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용맹과 무용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을 받았고, 후대에는 아예 관장지용이라는 말로 용맹의 대명사가 되었다. 삼국지 시대에 수많은 걸출한 무장들이 있으나[48]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무장이었던 것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삼국지에서 기록이 부실한 촉의 장군이었고, 관우에 비해서도 기록이 매우 적은 부분은 아쉬운 점이라고 볼 수 있다.[49]
기록된 것으로도 그의 장수로서의 면모가 충분히 드러나는데, 장판파에서 단기로 조조의 대군과 맞서 용맹을 과시했으며, 유비의 입촉 시절에 형주에서 출발하여 파서를 박살내며 낙성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기동전에 능한 것을 입증했다. 한중 공방전에서 훗날 제갈량의 진격을 여러번 막아내는 명장 장합을 박살을 내며 한중 방어선을 초토화시켰다. 이는 이후에 조조가 한중을 회복하려 출병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며 작지 않은 공임을 알 수 있다.
수천년의 중국사에서도 장기전에 능한 장수는 드물다. 장비의 주군이자 군사적 재능으로 조조 다음가는 군웅이었던 유비조차도 이릉에서 장기전을 벌이다 대패한 것만 봐도 장비의 군사적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성 공방전에서 온 천하를 진동시킨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이라는 평을 받은 유이한 장수. 연의에서 부각된 면인 무력이 뛰어난 장수의 모습에 더해 유능한 야전사령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50]
다만 관우에 비해서도 검증된 정사에서의 자료는 더더욱 적은데, 확실한 것은 관우와 더불어 독보적인 당대 제일의 무장으로 칭송받았다는 정도이다. 정사 삼국지에 직접 묘사된 것 이외에도 화려한 군공이 있었을 것으로 추즉되며, 정사에서의 기록들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51]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되는 관우와 장비의 이미지는 관우는 침착하고 장비는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정사 삼국지에서 보이는 모습은 관우는 열혈, 장비는 냉혈로 연의와는 오히려 정반대다. 관우는 끓어오르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장비는 호걸이지만 유비가 우려할 정도로 차가운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관우는 이름 있는 명사들에게는 오만했지만 병졸에겐 관대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52]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장비에겐 못난 사람을 어루만져줄 포용력이 부족했다. 이는 장비의 인생에서 잘 드러난다.[53]
- 사로잡히고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 엄안을 존중하여 회유했다.
- 식자로 유명한 유파와 교류하려다 대놓고 모욕을 받고도 그냥 덮고 넘어갔다.[54]
- 유비가 자신을 추천하는 중신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병졸 출신 위연을 한중태수로 삼았을 때도 군말없이 수긍했다.
- 평소 수하들에게 가혹했고 하필 이릉대전을 앞두고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 의해 살해당한다.
- 수하들에게 가혹했다는 수준이 주군인 유비가 형벌로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지나치고, 매일 장정들을 채찍질한다고 말했으며, 계한보신찬의 최종 평가도 사람들과 교제하는데 있어서는 무레했으니 화를 불렀다고 나온다.
군자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인품이 고결하여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소인은 둘 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다. 능력과 인품이 모두 평이한 사람이 출세할 확률은 낮으니 장비는 자연스레 부하들에게 가차없는 상관이 되었고, 사대부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소인이 있으면 그들에게는 무례하게 대했다.
특히 어리석고 아둔하며 깨우치지 못한 자인 유교적 의미의 소인에게는 무례했다는 것을 떠나 자기 부하들한테는 악덕 상관이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매일마다 장정들을 폭행한다, 형벌로서 죽이는 것이 지나치다고 까지 나와있으니 그 때 기준으로도 사정 봐주지 않고 부하들을 패고 죽였다는 거다. 이쯤되면 포용력이 부족한 것을 떠나 자기 부하 한정으로는 인성이 나쁘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연의에서는 술을 먹고 팼다고 나오지 정사에서는 제정신이다.
유비도 "경은 형벌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친데 또 매일 장정들을 채찍질 하고는 그들을 좌우에 있게 하니 이것은 화를 초래하는 길이오." 라고 하였고, 계한보신찬에도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면 가혹행위로 인한 상관 살해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냉혈인 성격을 떠나서 진수가 장비의 평가로 "난폭하고 은혜롭지 못해 자신의 단점으로 패망한 것이 이치의 상례다" 라고 평가한 것을 보면 군자 이외에는 난폭하고 무례하게 대했던 걸로 보인다. 삼국지연의에서의 난폭한 이미지가 그냥 나온 건 아니였다는 것.
심지어 주군이며 은혜가 형제, 부자와 같았다는 관계를 지닌 유비가 이를 지적했는데도 끝내 고치지 못했으니 꽤 치명적인 단점이다.
장비가 살았다면 이릉대전은 물론이요, 제갈량의 북벌도 그 판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당장 이릉대전 때 그가 살았다면 거기장군, 영 사례교위라는 그의 직책 상 풍습 대신 대도독이 되어 선봉에 섰을 것이다. 또 제갈량의 1차북벌 때 장비가 살아서 마속 대신 가정을 틀어막았다고 생각해보자. 장비가 철저하게 격파한 적 있는 장합이 상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후에 딸인 경애황후가 죽자 유선의 태자를 낳은 후궁이 있는데도 언니의 뒤를 이어 장황후가 황후가 되었다. 장비의 두 딸이 연속으로 황후가 되는데, 조조가 자기 딸 셋을 황후+후궁으로 들인거 생각하면 촉한에서 장비의 존재감은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관우는 촉 땅을 밟은 적도 없으니...그럼에도 장비 일가가 외척으로서 촉한 정계에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55]을 생각하면 촉한이 얼마나 공신+외척이 활개치지 못하는 국가인지 알 수 있다.[56]
정리하자면, 장비는 천하에 위용을 떨친 용장이었으나 장수로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사람으로서의 포용력이 부족해 결코 덕장이 될 수 없었고, 그것이 본인의 발목을 잡게 된 무장이라 할 수 있다.
6. 기타
- 서민에게 친근한 이미지 덕분인지 삼국지가 연극으로 공연되기 시작하던 송나라, 원나라 시대에는 장비가 주인공이었으며, 현대에도 장비는 중국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삼국지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래서 장비가 관련된 민간 설화나 야사 또한 굉장히 많은 편이다. 호즙주에 관련된 이야기[57]라든가, 적장과 지혜를 겨루기 위해 한 벙어리 문답[58] 등이 유명하다.
- 장비가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설이 있는데, 명나라 탁이창(卓爾昌)의 <화수원전(畫髓元詮)>과 청나라 <역대화정록(曆代畫征綠)>에서는 장비를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기를 좋아한다고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탁주고루(涿州鼓樓)>의 북벽 상에 쓰인 <여와보천도(女媧補千圖)>와 장비의 고향부근 방수촌 만불각의 벽화에서는 모두 장비의 손재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청나라 때 <역대화기록(歷代畵記綠)>에 보면 ‘장비는 줘저우인으로 미인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줘저우에서는 "줘저우 시내 고성(古城)의 성벽이나 이웃마을 팡수(房樹)촌의 만물각(萬佛閣)에 그려진 벽화는 장비의 서화 솜씨를 후대 사람들이 그대로 모방해 그린 것"이라고 한다. 또 장비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13살 때 이미 춘추를 깨우치고 손자병법에 능했다고 한다. 원나라 오진의 <장익덕사(張益德詞)> 서문에서는 '관후가 풍자하여 말하길 장비는 문예에 더 소질이 있다고 하였다. 문과 무의 운치는 다르지만, 옛사람들은 항상 여유를 두었다. 창을 휘두르는 힘이 손목에 들어가 붓을 휘두르는데 위나라의 종요와 오나라의 황상의 실력도 이보다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1961년 류보경이 편집하고 북경출판사가 충판한 글자 배우기의 부록 <정해 서예명가의 약력과 이력>에서는 '중국서예가들은 문인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무장 중에서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있다. 장비와 악비 등이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정딩(正定)현 조자룡 사당에 있는 장비가 썼다는 비문 '장비입마명'의 탁본.
- 서화에 능했다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장비의 글이나 그림은 없다. 남북조 양나라 시기의 인물 도홍경의 <도검록(刀劍錄)>에는 신정후 촉대장이라고 도검에 쓴 글이 있다고 한다.[59][60] 명나라 때 쓰여진 <태평청화> 등의 역사서에는 실제로 쓰촨성 류장(流江)현에서 장비가 절벽에 새긴 입마명이 발견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장비입마명(張飛立馬銘)> 또는 <팔몽마애명(八濛摩崖銘)>이라고 부른다. 청나라의 문학가 기효람은 '어찌 누가 글자를 절벽에 새길줄 알았겠는가 거기장군 장비가 직접 쓴 글씨였다.' 라고 하며 장비를 칭찬하였다. 이 서예는 단정하고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웠으며 호방하고 생동감이 넘쳤으며 힘이 넘치는 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한편의 우수한 서예 작품 못지 않았다. 다만, 장비입마명은 후대의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는 만큼 주의가 요구된다. 입마명은 위작이며 장비는 미남이 아니다라는 글도 중국웹 상에 많이 퍼져있다. 일각에서는 실제 장비의 외모가 출중했다, 당대의 꽃미남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돌고 있는데, 딱히 근거는 없다. 애초에 장비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이 없고, 삼국지에서는 그저 '웅장위맹'하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 사천 요리 중에선 장비가 만들었다는 장비우육이라는 요리도 있다. 다만 실제 장비가 만든거라고 볼 순 없고 후세에 덧붙인 것이다. 또 다른 관련 요리로는 쥔뚠쿼쿠이라고 자기가 쓰던 투구를 솥 대용으로 활용해 만들어먹었다는 전설이 붙은 페이스트리와 흡사한 튀김빵도 있다. 사천에는 취운랑(翠雲廊)이라는 곳도 있는데 고촉도(古蜀道)라는 옛 길에 속하는 검문촉도(劍門蜀道)의 일부구간으로서, 길가에 가로수 모양으로 3백리에 달하는 오래된 측백나무를 심어놓은 길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뜻은 푸른 빛 구름 같은 측백나무 숲길, 이쯤 되겠다. 서로는 재동(梓潼), 북으로는 소화, 남으로는 랑중으로 이어지는 세갈래 길인데, 이 길은 장비가 만든것으로서 장비가 파서태수를 지낼 때 랑중에서 소화에 이르는 구간을 산을 깍아 석판대로를 만들고 길 양편으로 측백나무를 심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측백길은 군대 행군 뿐 아니라 상인들과 백성들도 다니기 편리했다. 그래서 이 길을 장비백(張飛柏)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장비가 타고 다니는 말의 이름은 표월오(豹月烏)라고 한다.
- 임진왜란 당시의 민간 야사에 의하면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며, 전란 중 관우가 도와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만력제는 유비라서 《임진록》에는 만력제의 꿈에 관우가 나와서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라며 파병을 역설하는 장면이 있다. 서민들 사이에서 장비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 명나라 시대의 소부에 따르면 양귀비와 장비가 등장하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들판의 해골을 수습해줬는데 그날 밤 "비요. 비요."라는 말을 듣고 문을 열어주니 양귀비의 혼령이 와서 고맙다면서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흑심을 품고 들판의 해골을 수습했는데 다시 그날 밤 "비요, 비요."라는 말을 듣고 문을 열어주니 장비가 나타나서 '내가 시원하게 바람을 쐬면서 누워 있었는데, 왜 함부로 너희 집으로 들여놓은것이냐?'하면서 호통을 쳤고, 흑심을 품었던 사람은 겁을 먹고 다음날 유해를 원래 있던곳에 되돌려 놓았다는 이야기다. 좀더 섹드립성이 강한 이야기로는, 장비가 항문을 들이대라고 요구하는 이야기도 있다. 흥부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놀부가 박을 타다가 안에서 "비로라" 소리를 듣고 동생 흥부가 양귀비를 첩으로 삼았던 것을 떠올려 양귀비냐고 물었다가 자기는 장비 장군으로 박 안타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서 꺼내주는 대목으로 나온다. 당연히 꺼내준 뒤에는 놀부를 가지고 공기놀이를 했다.
- 청두 유비혜릉에는 장비의 상이 관우, 제갈량의 상과 같이 모셔져 있다.
- 속담에서는 큰 소리로 몹시 야단스럽게 꾸짖음을 이르는 말로 '장비 호통이라', 상대편이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이쪽에서 상대하지 아니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로 '장비하고 쌈 안 하면 그만이지', 몹시 급하게 서두르는 일을 이르는 말로 '장비 군령이라'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 민담의 영향을 받아 《삼국지평화》의 주인공이다. 여포가 장비와 싸우다 겁에 질려 도망가니 말 다 했다. 본격 장비 헌사 소설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장비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민중들을 위해 장비의 활약이 많이 과장되어 있다. 여포에게 포위되자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기위해 왕복해서 총 6번이나 여포의 포위망을 뚫질 않나, 장판파에서 고함소리로 장판교를 끊어버리질 않나,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오나라로 가려할때 장비가 고함을 지르자 손부인이 수치심에 자살을 하질 않나 한마디로 장비가 나서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망탕산에 들어가 있을 때는 황제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연호가 쾌활이었다. 유비와 재회하자 황제 자리를 유비에게 준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하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장비에 대해 일본 학자 이나미 리츠코는 이 작품이 민중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보니 폭발적인 활력을 가진 장비의 매력에 중점을 두어서 파천황적인 재미가 있다고 얘기했다. 삼국지평화에서 술주정뱅이에 다소 거친 캐릭터상이 이미 완성되지만 민중들이 즐기는 평화에선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유교의 영향으로 주인공의 위치는 유비, 제갈량에게 뺏기면서 거친 이미지만 남았다.
- 평생을 통틀어 섬긴 주군이 오직 유비 단 하나밖에 없다. 관우가 관도대전 당시 잠깐 조조를 섬긴 것, 조운이 아주 잠깐 공손찬을 섬긴것이나 위나라 오자양장들 중 서황(백파적 출신으로 한섬과 양봉의 부하 출신), 장합(원소의 부하 출신), 장료[61]가 전부 다른 사람을 섬기다 조조에게 들어온 것, 오나라에서도 태사자가 유요의 부하로 있다가 들어오고 감녕이 유표의 부하로 있다가 들어오는 등 모시는 주군을 갈아타는 장수들이 꽤 많았던 것과는 대조되게 장비는 오직 일편단심 유비 하나만 섬겼다.
7.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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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배우자 하후씨 · 자녀 2남 2녀 · 손자 장준 · 사돈 유비 · 사위 유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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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翼德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이건 모종강의 창작이다. 그런데 모종강본 연의가 널리 읽히자 翼德으로 알려진 것. 당장 위의 그림만 봐도 益이 아니라 翼으로 나와있다. 사실 장비의 자 益德의 益은 강한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잘 날으는 새를 뜻하는 鷁의 통가자로, 춘추 희공 16년 편 중 六鷁退飛(육익퇴비)에서 따온 말이다.[2] 이 자(字)를 지어준 장본인은 다름아닌 유비이다. 이 때문에 장비의 운명은 평생 유비 단 한 사람만 섬기게 되어 있었고 싧제로도 장비는 가끔 포악하게 행동하더라도 유비의 말에는 칼같이 복종했다.[3] 논란이 있는데 '관공연보'에 따르면 유비보다 4살 연하라는 기록이 있고, 연의에서는 향년 55세로 사망한다고 서술되어 167년 생으로 설정되어 있다.[4] 하후연의 조카.[5] 장비의 딸이 유비의 아들인 유선과 결혼했기 때문에 장비와 유비는 사돈관계이다.[6] 유비, 간옹과 동향이다.[7] 계한보신찬의 내용. 달리 말하면 호탕하고 밑도 끝도 없이 무례한 연의와는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기준이 엄격하다는 말은 사람을 구분함이 명확하다는 것이니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 융통성이 부족한 것일 수 있다.[8] 그야말로 유비네 진영의 시작을 연 대사이다. 모종강본에는 여기에 돈있는 사람은 일을 하기 편하다는 투의 평도 추가되었다[9] 그 일도 대부분 고생하는 형님들을 도와야한다는 나름 의도는 좋은 경우들이다. 단지 이게 장비 본인의 술버릇이라던가 성격, 혹은 주변 상황 때문에 의도하곤 멀어질 뿐이지. 삼고초려 에피소드에서도 세번째로 제갈량을 만나러 가는 유비를 관우까지 뜯어말릴때 자기가 직접 새끼줄로 꽁꽁 묶어 대령하겠다면서 '우리 형님이 누군 줄 알고 건방지게 안나오는거냐.'고 툴툴거리는 것만 봐도 장비가 하는 일이 의도만큼은 좋았던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10] 나관중본과 모종강본 모두.[11] 그래서 중국에서는 장비를 도축업자의 시조로 보는 곳도 있다.[12] 애초에 백정이 정치적으로 천대받던 조선에서도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경우가 많았고, 중국은 도축업자 천대 전통도 없어서 유력 인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 같은 시대의 하진이 도축업자 출신이고, 가공 인물이긴 하지만 수호전에서 정도라는 도축업자가 지역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내용이 있다.[13] 다음 장면에서 등장하는 관우는 떠돌이 한량이기에 당연히 돈이 없다. 어느 판본에는 유비도 어머니가 이런 날을 대비해 모은 패물과 전답 등을 기꺼이 내놓고, 탁군에 사는 유씨 종친 네트워크나 스승 노식밑에 구축한 인맥을 동원해 일부라도 보태는 장면이 있지만 장비의 액수보다는 부족하다는 식이다. 실제로 유비가 어렸을 때 유자평을 비롯한 친척 어른들이 공부에 필요한 비용을 보태주기도 했지만 유자평의 아내가 '우리도 먹고 살기 버거운데 걔한테 왜 돈을 줘요?'라고 타박할만큼 넉넉하지는 못했다.[14] 다른 판본인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선 술에 취해 관리를 때려눕히고 깽판을 치던 장비가 관아에 생포되어 그 처분을 논할 때 유비가 나서서 장비를 꺼내주고 그런 유비의 사람 됨됨이에 반한 장비가 먼저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한 뒤 나중에 유비가 소쌍과 장세평의 장사 이권 다툼에 휘말린 관우와 장비의 일기토, 나아가 소쌍과 장세평의 이권 다툼을 중재하면서 세 사람이 인연을 쌓는 것으로 묘사된다.[15] 물론 원본은 황건당의 창궐에 혼란한 나라 상황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벽서를 본 유비가 한숨을 쉬자 때마침 옆에 있던 장비가 사내가 한숨을 그리 쉬어 되겠냐면서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본문 위에 있는 자신에게 돈이 많다는 말을 하며 주막에 가 일을 도모할 것을 의논하는데 이때 관우가 홀로 들어와 술을 시킨다. 이에 겉모습이 위풍당당한 관우에 모습에 유비와 장비는 합석을 권하고 이로써 도원의 결의가 완성된다.[16] 모종강본 기준. 가정본에서는 300합을 싸워서 슬슬 열세에 몰렸다고 기록된다.[17] 성 셋 가진 종놈[18] 단, 순욱이 이호경식지계를 폈을 때엔 '조조가 너 죽이라고 연락했다'고 기밀을 누설했고 유비가 이를 인정했으나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유비와 여포의 단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19] 장비와 관우 중 누가 더 강한가는 삼국지연의의 오래된 떡밥 중 하나이다. 작중에서 둘이 확실히 겨룬 묘사가 없는데다 둘 다 세계관 최강급으로 묘사되기 때문인데, 사람에 따라서 관우를 높게 치는 경우도 있고 장비를 높게 치는 경우도 있다. 일단 기령을 전투력 측정기로 삼아서 비교하면, 기령은 관우와 30합을 싸워서 패색을 보이는 정도에 그쳤지만, 장비와 싸울 때에는 10여 합에 목숨을 잃는다.[20] 999번을 치는 것을 뜻한다.[21] 다른 한 명은 허저다.[22] 일부 판본에서는 열심히 만들었지만 절반만이라서 맞는다.[23] 물론, 연의에서도 엄안에게 예를 갖추는 등 영 안나오는 건 아니다.[24] 하지만 유비를 죽이려 한 차주의 죄없는 일가를 몰살한 행위는 예외. 유비도 너무 잔인했다고 비난했다.[25] 제갈량을 두번째로 만나러 갈때 눈보라가 치자 뭔 놈의 눈이 이렇게 휘몰아치냐며 허공에 대고 꽥꽥 소리를 지른다거나 세번째로 만나러 갔을 때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걸 보곤 뚜껑이 열려 "저 새끼 저거 내가 확 불을 싸질러도 안튀어나오고 자빠져 자나 보자!"라며 길길이 날뛰다가 관우에게 제지당하는 장면 등이 나온다. 그 이전에도 황건적 토벌 때 유비가 관군들의 홀대에 열받아서 날뛰는 장비를 몇번 달랬는데 나중에 동탁이 대놓고 모욕을 주며 초소로 향하자 또 투덜대면 유비가 말릴까봐 일부러 입을 꾹다물고 칼을 뽑은 채 동탁을 죽이려고 초소로 들어가려다가 유비에게 제지당하는 장면도 나왔다.[26] 삼국지 판본에 따라 관우나 제갈량 같은 인물들은 경어체의 정중한 말을 쓰는데, 장비는 구어체를 쓰며 속어를 남발하는 등 속된 말로 양아치스러운 말을 사용한다. 예를들면 삼고초려 장면에서 관우는 유비에게 대형(大兄), 형님 등 정중하고 격식있게 말한다면, 장비는 시종일관 꺼꺼(哥哥)거리며 마치 진짜 동생이 형한테 투정을 부리는 것 같다. 국내 삼국지 만화 콘텐츠에도 일부러 장비에게 사투리 속성을 부여해 "성! 성님!" 같은 식으로 투박한 느낌을 부여하기도 한다.[27] 특히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28] 연의 후반과 정사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장비가 병법을 어느정도 쓴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머리가 나쁘다 라는 인식은 줄었다. 유비가 요즘들어서 의외로 칼좀쓰는 인물처럼 그려지는것과 마찬가지. 어차피 여포, 원술, 유선, 유장 등 장비 이상의 돌대가리들이 산재하고 있다.[29] 당시의 대다수의 농민들은 현대로 치면 초등학교 저학년보다 오히려 교육 수준이 낮았다. 요새도 (아이가 삼국지를 읽었다는 가정 하에)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서주를 빼앗은 여포에게 말을 빼앗은 장비가 잘못했냐고 물으면 아니오라는 대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30] 정사에서 관우는 오만하다는 평이 있지만, 일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겉과속이 동일한 인물에 가깝다. 게다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면서 여색을 밝히지 않는 것도 아니니, 실존인물 관우는 연의에서 묘사된 고고한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연의판 장비같이 인간미가 넘치고 다혈질인 캐릭터에 가깝다.[31] 연의의 이미지가 강해서 조표가 단순한 부하로 여겨지는데, 사실 둘의 관계는 좀 복잡하다. 일단 연의에서는 장비가 아랫사람으로 표현된 조표에게 술을 먹이면서 그가 사양하자 두들겨 패는 갑질을 한게 분명하다. 그러나 정사에서 그는 하비상으로, 당시 장비는 유비가 평원상이던 시절 받은 별부사마직 뿐이었고 아직 장군도 아니었기에 조표는 오히려 관직이 그보다 높았다. 물론 장비는 서주지배자 유비의 왼팔이었기에 공식 관직 이상의 권한이 있었다. 즉 당시 장비는 하비를 지키라는 유비의 명을 받은 심복이고, 같이 하비의 수비를 맡은 조표는 공식 직위는 장비보다 높은 다소 애매한 관계였다는 것. 어쨌거나 당시 조표와 장비는 서로 반목하고 견제하는 관계였지 상하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당시 서주는 유비가 접수한지 얼마안되어 외부에서 들어온 유비파+유비에게 호의적인 기존의 서주호족파(진규/진등 등)와 도겸에게 충성하던 단양파 사이 갈등이 있는 상황이었는데, 유비파 중 가장 강경한 장비와 단양파의 중심이었던 조표 간의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32] 만약 정사 이미지 그대로 지략도 뛰어나고 신중한 인물로 설정해버리면 관우나 조운과 설정이 겹친다. 역사적으로는 몰라도 자칫 개개의 인물의 캐릭터성이 묻히기 쉬운 소설로 보면 다소 무식하지만 솔직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자신의 답답함을 긁어주는 장비라는 캐릭터는 완벽히 성공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33] 술을 좋아하고 난폭하다는 것[34] 반대로 지용겸비처럼 2차 창작에서 그려지는 관우도 연의에서의 활약을 잘 보면 용맹한 모습이 대부분이지 지략을 쓰는 모습은 의외로 적다.[35]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온갖 입에 담기도 힘든 패드립과 욕설로 도발했다고 나온다.[36] 판본에 따라 다른데 예전에 여포한테 서주 빼앗겼던 이야기 같은 자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했다는 이유가 많다.[37] 셋 중 한 부대는 산을 돌아 후방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았다.[38]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시에는 전쟁이 일상이며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군들은 당연히 머리도 기본 이상으로 좋아야 한다. 단 장비는 문보다 무가 더 강조되는 장군인지라 티가 안 났을 뿐.[39] 실속이 없음에도 큰 소리 치거나 허세를 부린다는 뜻의 사자성어다.[40] 엄안이 관문마다 앞서서 "나조차도 유현덕께 항복 했거늘 너희가 감히 버티겠단거냐? 어서 문을 열고 항복하거라!" 식으로 회유하고 엄안의 높은 명성에 힘입어 엄안 장군께서 항복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것이라 판단한 나머지 관문의 군사들도 줄줄이 항복한다.[41] 그래서 유비가 장비를 크게 칭찬한다.[42] 판본에 따라서는 장합이 성에 처박혀 술판을 벌인다. 이에 장비는 공격을 개시하지만 장합의 반격에 후퇴하고, 이후 장비 역시 성을 포위한 채 술을 마시면서 욕을 퍼붓는다. 장합 역시 마찬가지.[43] 가장 큰 사고가 바로 서주 사건. 유비와 관우가 출정하면서 주의를 줄때 절대 술 안 마신다고 하고 그 새를 못참고 술판을 벌인다. 그런데 여포의 장인 조표만 안 마셨고 이에 술을 강요하지만 조표는 계속 거부한다. 꼭지가 돌아서 패려고 들자 조표가 내 사위 여포의 얼굴을 봐서라도 용서해달라 했지만 오히려 뚜껑 개방된 장비에게 미친듯이 맞는다. 앙심을 품은 조표가 소패의 여포에게 가서 입을 털어 여포가 군사를 일으키고 결국 서주를 빼앗긴다. 이 다음으로 큰 사건이 바로 황건적 토벌후 십상시들이 구색용으로 준 벼슬인 안희현 현위 자리에 오른 유비에게 뇌물을 받으려고 와서 시비 걸던 독우를 술에 취해 피떡이 되게 팬 사건이었다. 다만 정사에서는 유비가 직접 독우를 팼다. 정사와 연의를 섞어서 창작한 웹툰 삼국지톡에선 유비와 장비가 같이 독우를 팬다.[44] 당연히 장비와 공명이 서로 합의하고 짠 것이다.[45] 판본에 따라선 심지어 즉석에서 씨름 대회까지 벌였고 그 대회에서 우승한 병졸이 장비가 하사한 술 한 사발을 들이킨 뒤, 마찬가지로 우승 상품으로 준 그럴싸한 갑옷을 입고 성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 조홍과 장합을 비웃는 도발을 하자 다른 병사들도 신나서 같이 비웃고(...) 그 꼴을 보다 못한 장합이 야습을 감행하는 것으로 묘사된다.[46] 장합은 당시 조조군 장수 중에서 손꼽히는 장수인데 이 두번의 패배때문에 조홍한테 제대로 욕먹었다. 조홍은 아예 저놈을 처형하라고 닦달하나 곽회가 삼군은 모을 수 있어도 좋은 장수는 모으기 어려운데 장합이 그러하니 처형은 삼가달라고 말렸다.[47] 장비가 생전 마지막으로 승진했던 거기장군은 보통 황실 외척에게 내리는 직책이다.[48] 여포, 공손찬, 손책, 태사자, 조인, 장료, 감녕, 방덕, 정봉, 문앙 같이 개인 무용 면에서 엄청난 모습을 보여준 인간병기들이 즐비하지만, 당대인들의 평가에서 이들 중 가장 위명을 떨친 것은 만인지적이라는 관우, 장비였다.[49] 드라마, 게임 등 대중매체에서는 해석에 따라 관우라는 이름의 상징성과 위엄있는 이미지로 인해 관우의 무력을 더 높게 쳐주기도 하고 단순무식하지만 화끈한 무력의 이미지인 장비를 높게 쳐주기도 한다. 중국 쪽에서는 아무래도 무신으로까지 모시는 관우를 높게 쳐주는 경향이 강하다.[50] 오히려 장비의 굵직한 군공의 대부분은 삼국지 연의에서도 대부분 묘사되었는데 대중에 허저에 버금가는 무력돼지로만 대중에 인식되는 것이 의아하기까지 하다. 다만 이건 '소설캐릭터' 장비의 캐릭터성 때문이기도 하다. 연의는 집필 당시 삼국지평화 등을 통해 중국 대중들에게 친숙했던 (실제 인물 장비와 전혀 다른) '단순무식하고 좌충우돌하는' 장비의 캐릭터성을 잘 살렸다. 예를 들어 조표와 갈등, 이에 따른 조표의 배반으로 서주를 뺏기게 된 것을 '술 좋아하는 장비가 술에 취해 사고를 쳤다'로 각색하거나 실제론 유비가 패버린 독우를 장비가 팬 것으로 각색하는 등. 워낙 그 묘사가 맛깔났고 원래부터 '단순하지만 매력적인 장비' 캐릭터 자체도 인지가 높았기에 장비=싸움 잘하지만 단순함이 확연히 각인되어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51] 곽가와 정욱은 장비를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이라 평했으며, 주유 역시 관우와 장비는 맹수처럼 용맹한 장수라 평하면서 둘을 자신이 지휘할 수 있다면 대업이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했다. 실제로 남군 공방전 때는 유비에게 장비를 잠깐 빌려서 지휘해본 경험이 있다.[52] 관우와 장비는 제갈량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자 곧바로 제갈량을 인정했다.[53] 뚜렷한 단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다.[54] 정확히 말하면 격노했다는 기록은 있긴 한데 그냥 화만 냈지 딱히 뭘 했거나 앙심을 품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이때 유파의 행동은 촉한 진영은 물론 동오에서도 이 얘기를 두고 떠들 정도로 퍼졌을 만큼 소문이 좍 났으니 장비 입장에서는 개망신을 톡톡히 당한 셈인데, 화만 내고 넘어간 수준이면 관용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55] 끽해야 장비의 차남인 장소가 중신으로 활동하고 장손인 장준이 무장으로 활동한 기록 밖에 없는데 관우나 조운의 자손들하고 비교해봐도 딱히 어마어마한 차이는 아니다. 오히려 오호대장군 중 친족이 가장 높은 관직에 올라간 것은 유비 세력 소속의 역사가 가장 짧았던 마초이며 종제인 마대가 평북장군까지 올라갔었다.[56] 이는 유비 세력이 유비라는 존재 단 하나로 뭉친 세력이기에 충성심이 뛰어난 자들이 뭉쳤으며 힘든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한 이들이 많으니 여기서부터 다른 세력과는 차별화 된다. 더군다나 위연마저도 유비에게 충성했으니. 그런데 제갈량이 내정하면서 철저한 관료제/능력중심 국가를 만들고 철저한 법치에 따라 국가를 관리하였는데 유비가 죽을 때 제갈량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으니 이엄말고는 이미 공신 세력이 다 죽고 자식들만 남은 촉한에서 누구도 제갈량의 권위를 위협할 순 없었다. 유비 세력의 마지막 맏어른인 조운도 공명정대하고 청렴했기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신이고 외척이고 감히 누가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을까. 즉, 안 그래도 공신 세력은 유비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했고 번성~이릉 전후로 갑작스럽게 관우, 장비, 법정, 황충, 마초, 미축 등 공신 세력들이 사망하였는데다가 살아남은 조운은 욕심이 없으며 유비가 사망하면서 제갈량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고 그에 따라 철저한 관료제 형식의 법치 국가를 세웠으니 공신의 자손이나 친척들이 감히 권위를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57] 방통이 뇌양현 현령으로 임명된 후 아무 업무도 하지 않고 놀고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비가 감독관을 보내려 했는데, 뇌양현에 호즙주라는 명주가 있다는 걸 알고있던 장비가 자처해서 감독으로 떠난다. 당연히 뇌양현에 도착해 호즙주로 거하게 취하려고 술집부터 찾았지만 모든 술집에서 물을 타 밍밍한 호즙주를 팔고 있었는데, 방통이 애주가 장비가 온다는 것을 알고 마을의 모든 주점에 장팔사모를 든 사내가 오거든 호즙주에 물을 타서 내놓으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 이후엔 연의의 그 이야기로 진행되며, 장비도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 진짜 호즙주를 마시고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58] 헌데 이런 부분은 착각물 스럽게 상대방이 진지한 질문을 던짐 - 장비는 상대적으로 유치한(시세를 논한건데 먹을거 얘기인줄 안다든가...) 질문으로 여김 - 장비가 대답함 - 그런데 상대방은 진지한 대답으로 착각 - 이하반복 - 상대방이 장비에게 놀라며 이야기 끝으로 흘러간다.[59] 그러나 한나라 장군직을 했던 장비가 스스로 촉대장이라고 할 리 없다는게 중론이다. 노필이 살피길 '익덕이 칼을 만들어 새겼으면, 마땅히 스스로 한장(漢將)이라고 적었을 테지, 필시 촉장(蜀將)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은, 몽산(濛山)에서 돌에 새기며 스스로 한장이라 썼으므로,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60] 제갈량이 처음 입촉해서 법률을 지을때 '한과'가 아닌 '촉과'로 지었다는 이유로 장비 역시 촉대장이라고 자칭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노필의 주장을 반박하는 설도 있지만, 촉과는 촉 자역을 다스리는 법이라는 의미에서 촉과라고 하는 것이지 유비의 정권 전체를 아우르는 법이 아니다.[61] 여포를 따라다니느라 주군이 계속 바뀌었는데 하진 - 정원 - 동탁 - 여포 순서로 바뀌다가 여포가 사망한 후 조조의 부하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