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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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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책후 | ||||||||||||||||||||||||||||||||||||
신규 책봉 | ← | 초대 원술 | → | 칭제 |
중 초대 황제 袁術 | 원술 | |||
출생 | 155년 | ||
후한 예주 여남군 여양현 | |||
사망 | 199년 6월 (향년 44세) | ||
중나라 양주 회남윤 수춘 | |||
재위 | 중의 황제 | ||
197년 ~ 199년 (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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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술(術) | ||
자 | 공로(公路)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연호 | 불명 | ||
부모 | 부친 원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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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군벌로, 예주 여남군 여양현 사람.사공 원봉의 삼남으로 4대에 걸쳐 삼공의 직위에 오른 원가의 적자 후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원소와 사촌 관계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소가 아들이 없는 원성의 대를 잇기 위해 입적된 원봉의 얼자(孼子)라는 기록이 있어 호적상으로는 사촌 관계, 생물학적으로는 이복형제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원술/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3.1. 전통적 평가
漢末刀兵起四方(한말도병기사방)
한나라 말기 군벌이 사방으로 일어나더니
無端袁術太猖狂(무단원술태창광)
원술이 감히 미쳐 날뛰었네
不思累世為公相(불사누세위공상)
대대로 공경 벼슬 누린 것은 생각않고
便欲孤身做帝王(변욕고신주제왕)
갑자기 홀로 제왕이 되려 하였네
強暴枉誇傳國璽(강포왕과전국새)
난폭하고 부질없이 전국옥새를 자랑하다가
驕奢妄說應天祥(교사망설응천상)
교만하고 사치하여 망령된 말을 하니 응당 천벌을 받았구나
渴思蜜水無由得(갈사밀수무유득)
목이 말라 꿀물을 찾지만 얻지 못하고
獨臥空床嘔血亡(독와공상구혈망)
텅빈 침대에 외로이 누워 피 토하고 죽었도다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원술의 최후에 대해 평한 시
한나라 말기 군벌이 사방으로 일어나더니
無端袁術太猖狂(무단원술태창광)
원술이 감히 미쳐 날뛰었네
不思累世為公相(불사누세위공상)
대대로 공경 벼슬 누린 것은 생각않고
便欲孤身做帝王(변욕고신주제왕)
갑자기 홀로 제왕이 되려 하였네
強暴枉誇傳國璽(강포왕과전국새)
난폭하고 부질없이 전국옥새를 자랑하다가
驕奢妄說應天祥(교사망설응천상)
교만하고 사치하여 망령된 말을 하니 응당 천벌을 받았구나
渴思蜜水無由得(갈사밀수무유득)
목이 말라 꿀물을 찾지만 얻지 못하고
獨臥空床嘔血亡(독와공상구혈망)
텅빈 침대에 외로이 누워 피 토하고 죽었도다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원술의 최후에 대해 평한 시
사치스럽고 음란하다는 말만으로는 원술의 거대한 악행을 간단히 평할 수 없다.
배송지, 정사 삼국지 주석
배송지, 정사 삼국지 주석
3.2. 현대의 평가
원술에 대한 전근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항상 최악이었고, 모자라는 능력으로 분수에 넘치는 야심을 부리다 비참하게 몰락했다는 점에서 현대에도 딱히 재평가를 받지 못했다. 동탁은 종종 파격적 재해석이라는 명목 아래 사실은 개혁자였다는 어그로성 논평이나 각색이 유행을 탔던 것에 반해 원술은 그런 것도 없고, 오히려 소인배적 면모가 극대화되며 희화화되었다.그러나 번역된 역사적 기록들이 인터넷 상의 관련 커뮤니티에 퍼지고, 원술에 대한 분석적 담론들이 나타나는 팬덤 문화 발전의 과정에서 원술은 일정 부분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는 강한 자의식으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복합적인 평가를 받아왔을지언정, 한때는 대단히 인기 있던 유력 정치 주자였고, 가문만 믿고 행패부리는 소인배라는 관념과 달리 나름대로 소탈하고 대범한 측면이 있었으며, 나름의 분명한 현실 인식을 통해 때때로 날카로운 논리를 구사하기도 했다.
원술 역시 나름대로의 전략적 시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동탁을 피해 맨몸으로 달아났지만 녹림의 호걸들을 포섭하고, 그를 기반으로 손견이라는 강력한 무장과 손을 잡으며 드넓은 남양군을 장악하여 형주와 예주를 뜻대로 움직였다.
반동탁 연합이 동탁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지지부진하며 헌제의 정통성 문제와 유우 추대라는 일종의 분리독립 이슈로 표류하게 되었을 때, 오직 손견을 포섭한 원술만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었기에 그대로 친헌제와 반동탁, 그리고 헌제 구출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고수하며 낙양을 수복하게 되었다. 이후 이어지는 원소와의 대결에서도 공손찬, 장연, 어부라, 도겸을 동원해서 원소와 친원소 군벌들에게 대항하는 대포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하지만 야전 사령관으로서 원술 자신의 군사적 역량이 형편없다는 점은 손견이 죽은 뒤로 원술의 발목을 크게 잡았으며, 원술은 북양주를 장악한 것 외에는 판도를 결정지을 군사적 승부처에서 사실상 전패를 거듭하며 중대한 전투에서 번번이 패배하는 종이 호랑이 같은 처지가 되었다. 또한 부족한 군사를 메우기 위해 테러와 협잡을 동원하며 이리저리 태도를 바꾸는 모습은 그의 정치적 신뢰도를 적잖이 훼손했다. 실제로 그의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여포가 일방적으로 혼약을 깨고 조조에게 붙어버린 사건은 여포의 줏대없음과 어리석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런 원술의 행보에 시달려 온 여포가 원술에 대한 감정적 원한과 불신을 가지게 되면서 촉발된 것이다. 여포만큼이나 원술의 몰락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손책의 이탈 역시 원술이 여러 차례 말을 바꾸며 손책에게 감정적 피해의식을 심어준 것이 크게 작용했다. 손견 부자와 여포는 부족한 원술의 군사를 채워줄 만한 자들이었고, 실제로 이런 식으로 써먹었다.
또한 원술이 자신의 전략 구상을 강력히 추진하며 중국 정세를 뒤흔들던 바탕에는 유협적 카리스마를 기반으로 변방인, 태평교도, 흑산적, 흉노 등을 위시해 당대의 교양 있는 식자층의 관념 질서 상에서 야만 그 자체로 인식되던 흉포한 무력 집단들을 정치판 전면에 내세우고 이들의 폭력성을 부추기며 내전기의 지옥도를 형상화한 가혹한 학정이 깔려 있었다. 이들의 지지를 바탕 삼아 공권력을 상대로 점령지를 넓혀가며 합의를 요식 행위로 여기는 명분 없는 세력 확장만을 거듭하고, 원초적인 폭력과 공포를 전면에 동원한 지배와 수탈을 일삼으며 기세 등등하게 참칭까지 벌였던 원술의 행보는, 한나라 최대의 유서 깊은 명문가라는 배경을 가진 정치가로 보기에는 너무나 천박했으며 어떤 점에서는 유목제국의 선우나 농민 반란군 지도자에 더 가까운 측면이 있었다. 원술에 대한 기록을 남긴 기록자들과 기록 속의 주체들은 원술의 이러한 행적에 대해 일관되게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원술의 전기에서 그가 이미 반동탁 연합 시절부터 무군지심을 품은 것으로 묘사되는 점이나, 193년 이후의 행적이 끊어진 채 도참에 심취해 황제를 참칭하는 모습으로 곧바로 넘어가는 점에서 보이듯 사서에서 나타나는 원술은 처음부터 참칭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나타나는 원술의 칭제 시점 상황은 그보다는 훨씬 더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원술이 역적의 상징으로 불리는 증언들 위주로 기억되고, 그 증언들이 부정적 시선 아래 편집되면서 실제 원술과는 괴리가 있는 굴절된 인물상을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사실 원술은 여러모로 그 형인 원소와는 외형적으로는 다르면서도 그 본질은 같은, 후한말이 낳은 원소와는 다른 종류의 괴물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괴물이라는 것은 아우구스투스 같은 정치 괴수의 이미지가 아니라 후한말이라는 시대가 낳은, 시대를 파괴하는 뒤틀린 존재로서의 괴수이다. 이는 원소나 원술이나 다를 게 없다. 후한이 지방과 변경을 소홀히 한 대가로 낳은 양주 촌놈 동탁과, 후한이 비틀린 채로 방치한 예교를 통해 성장한 사세삼공의 명사 원가가 낳은 경사의 도련님들인 원소와 원술이 후한의 숨통을 끊었으니, 후한은 그야말로 앞뒤로 자신이 낳은 극과 극의 괴물들 간 환장의 콤비네이션으로 망한 셈이다.
원소의 경우 애초에 한실에 대한 충성이 그리 있지도 않았으면서 후한말의 경직되고 위선적인 예교 윤리 그 자체가 되어 청류의 흐름을 조종하며, 그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제어해 멋대로 이득을 보려다가 제대로 이득을 보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뒷배가 된 후한 체제만 부수는 꼴이 되었고, 나아가 본인도 그 흐름에 손발이 묶여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케이스라면, 원술은 나름대로 한실의 충신이었으나 애초에 처음 시작할 때부터 기존 후한이 추구하던 것과는 어긋나는 가치관을 가졌던 무력 집단을 권력 추구의 도구로 사용했고, 나중에는 이를 바탕으로 중가를 세워 한실이라는 반상을 깨려 시도하는 인생사가 포인트이다. 원술은 아예 원소와 정반대의 방향성으로 기존 사족들과 다른 계층인 하층 임협, 호걸들과 친하게 지내며 이들의 힘으로 후한을 장악하고 후한을 손에 넣으려 했으나 결국 중앙 파워게임에서 나가리 각이 보이니, 아예 본인만의 장기를 이용해 새 그릇을 만들며 나가리 직전인 한 왕조와는 다른 새 판도를 열심히 짜려고 발악하다가 대역적으로 전락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시도에 일리가 없지는 않았으나, 큰 그림만 그릴 줄 알았지 정작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발목을 잡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하다못해 손견이 일찍 죽지 않거나 손책이 좀 더 성장해서 원술 곁에 계속 있었으면 후한말 대권 게임플레이어로서의 행보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손견과 원술의 공동 활동은 낙양 수복, 주씨 형제와의 대결, 유표와의 대결 등 세 가지가 전부인데, 원술과 손견의 관계가 그리 깊지 않았다는 점에서, 손견이 원술의 뜻대로 완전히 움직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원술이 적극적인 한실 수복의 의지 없이 할거의 태세를 보였더라면, 손견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미지수다. 특히 훗날 패역까지 흘러간다면, 손책이 원술의 정적이 될 가능성도 오히려 더 높을 것이다.
하나의 시나리오로서, 원술의 전반적인 평가를 보면, 후한 말의 분위기와는 다르면서도 파천황적인 게임플레이어로 재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그는 후한 말의 고루하고 위선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색다른 맛을 제공했으며, 후한 말의 흐름에 역행하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더 나아가, 원술이 중앙 파워게임에서 밀려나면서 남중국 중심의 게임플레이어로 재기했을 때, 남중국만의 구심점을 모아 그들만의 천하가 가능하다는 판짜기를 보여준 것이, 휘하에 있던 손책과 주유에게 지대한 영감이나 성격적 요소, 세력의 잔재, 반면교사를 남겨 준 덕에 강남 남중국인의 정신적 시초인 손오 정권에게 영향을 줬다는 측면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손오의 정권이 원술의 영향을 받은 부분은 상당하며, 손오 특유의 강렬한 역동성에는 원술의 카리스마적 요소와 무인정권의 성격이 일정 부분 반영되었음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원술이 천하에서 좌충우돌하며 정권을 잡으려고 발악하는 과정에서 그 역량이 모자라 민중과 사인 모두에게 각종 민폐와 웃기는 짓들을 자행하여 지금까지 경멸받아 왔지만, 이렇게 세운 큰 그림은 손오 정권의 성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오늘날 남중국인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지방사적 토대를 제공했으니, 나름대로 이것도 업적이라면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원술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3.2.1. 호걸로서의 명성
원술은 공손찬이나 여포, 손견처럼 전장에서 무쌍을 찍어 보이며 개인적인 무용담을 과시한 기록도 보이지 않고, 동탁처럼 한 눈에 봐도 티가 날 정도로 기본적인 신체스펙이 압도적인 것도 아니었으나 어려서부터 무예를 좋아하고 거침없는 성격으로 언제나 폭력배들 사이에서 카리스마적인 존재감이 있었고 당대의 호걸로서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또한, 그는 내전기 이전의 실전 참여 경력은 확인되지 않으나 신병의 훈련을 감독하는 절충교위와 오환족 돌격기병을 지휘하는 장수교위를 지내며 영제 치하에서 나름 상당한 공이 들어갔던 한제국 중앙군의 실전적 요직들을 맡은 경험이 있었고, 이 경력들 또한 원술이 호걸로서 고평가되던 것에 일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원술을 대단히 후대했던 동탁이나 이후 원술을 중심으로 모여들며 깊은 관계를 맺었던 손견, 공손찬, 도겸, 장연, 여포 등의 인사들과 원술의 정치적 노선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황건, 백파, 흑산, 흉노의 무리들은 하나같이 낮은 출신배경과 깡패처럼 거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여포의 편지에 따르면 훗날 황제를 자칭했을 무렵에도 원술은 언제나 이러한 부류의 칼잡이들을 측근에 두며 가까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술의 유협적 배경은 평역이나 창작물 상에서는 대체로 무시되거나 혹은 단지 소싯적에 일진 짓을 하다 가문 빨로 출세했으며 그저 성질이 더러울 뿐인 무능력자로 묘사하는 장치로 쓰여 왔던 경우가 많아 진지하게 주목되는 경우는 손에 꼽는 편이다.[1]
다만 대표적인 명문가 자제임에도 유협으로서의 명성이 높았고, 주변에 유협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던 것은 원술의 인맥이 매우 다양했고, 나름대로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2.2. 처참한 군재
정작 군벌의 가장 기본적인 필수요소인 군재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원술의 치명적인 결점이었다.유력 패권주자로 꼽혔으나 마찬가지로 군재가 형편없었던 유표가 원술과 비견될 수 있겠는데 그나마 유표는 중요한 군사적 고비마다 적당한 행운이 따랐고, 그 행운을 살려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체급을 키우고 세력을 더 오래 지탱할 수 있었으나[2], 원술은 모험적 전략을 고수하면서 판돈만 키우고 정작 판도를 결정지을 전투에서 연전연패했기에 빠른 몰락을 피하지 못했다.
일단 원술의 개인적인 성격 자체는 유협에 매우 친화적이었으며, 모험적 전략을 고수해서 그런지 유표와 달리 매우 적극적인 친정 기록이 돋보이는데 원술이 친정에서 거둔 승리도 나름 적지는 않다. 그는 자신을 거부했던 양주자사 진우와 단양태수 주흔, 원소 편에 서서 양주자사가 된 원유를 격파하며 쫓아내고 북양주를 점거했으며 서주에서는 유비를 격파했고, 진국을 쳐서 유총을 격파하고 죽였다.
그러나 내실을 따져볼 경우 실질적인 군재는 형편없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유비의 경우 전황에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채 국지적 승패만 반복하다 여포를 끌어들이는 책략에 의존해서 겨우 승리해서[3] 이기고도 결국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했고, 유총의 경우 역시 자객을 동원한 승리였던 데다 곧바로 이어진 조조의 개입에 부하들을 방패막이로 세우고 달아나는 등 꼴사납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며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유총은 무려 후한의 제후왕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서 난세를 만나 거지꼴로 굶어죽던 다른 고위 황족들과 달리 자신의 능력으로 지역적, 군사적 기반을 갖추는 데 성공하고 어느 순간부터 본래 원술이 예주에서 가지던 입지를 대체하며 세를 급격히 불린 끝에 197년 시점에서는 10만의 무리를 이끌며 보한대장군을 자칭하는 등 예주의 지역 군벌 수준을 뛰어넘어 조조, 유표, 원소, 원술, 공손찬 등과 비슷한 급의 메인 플레이어로 도약할 잠재성이 충분했던 초 거물급 황족이었기에 유총의 사망은 결과적으로 원술 자신에겐 별다른 이득도 없이 조정을 장악하려는 조조의 아주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만 줄여준 격이었다.[4]
역사 기록에 남은 원술의 군사적 승리 중 그나마 지도자로서의 군사적 성과를 과시하고 그 성과를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끈 깔끔한 승리라면 사실상 북양주 점령이 유일한데 이조차도 엄밀하게 따진다면 군재를 보여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술은 이 군사적 성과로 인해 양주와 사예 일부를 아우르는 상당한 세력을 구축 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은 정말 좋지 않았다. 동탁과 싸우던 손견을 불러와야 했으며, 기록과 정황을 살펴봤을때 정규군이 아닌 난민에 가까운 무리를 이끌던 주씨 형제에게 성을 뺏기고 고전하는 등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게다가 오랜 앙숙이었던 단양태수 주흔을 쫓아내는 과정은 깔끔하지 못해서 선봉으로 세운 오경이 주흔에게 패배하자 백성들에게 보복학살을 벌이고 이에 충격을 받은 주흔이 자진해 군사를 해산하는 결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일화들은 승리를 거두고도 원술의 극단적인 잔혹성과 날 것 그대로의 야만성을 돋보이게 했을 뿐이다.
사족들의 일관된 혐오를 받고 외정에서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번번이 대군을 끌고 군사원정에 나서며 관할지역의 통제력만큼은 분명하게 확보하는 듯 보이는 원술의 행보는 공포정치를 통해 현지 호족들을 철저히 굴복시켰다는 해설 외엔 달리 설명할 방법조차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볼 경우 원술은 적어도 직계세력들을 동원해 비협조적인 지방 관리나 호족들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진압봉을 휘두르는 능력만큼은 나름대로 뛰어났다고 볼 수 있고, 무예에 능하며 때때로 광기에 가까운 만용을 통한 공포로서 군중을 통제하는 재주가 뛰어났고 비슷한 성향의 하층민 출신 부하들을 잘 대해주며, 나름대로 전략적인 통찰력이나 식견 자체는 상당한 편이었던 원술의 개인적 특징들과 맞물려 어느 정도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원술의 개인적 특징들은 내전기 이전까지 그의 주요 군경력이었던 교위처럼 연대 규모의 지휘관으로 사령관을 보조하는 스페셜리스트로 남거나, 영내에 흩어져 있는 비한족 원주민 집단에 대해 폭력을 동반한 강제적 동화정책을 수행하는 중화제국 변경의 총독 같은 역할로 남았다면 거칠고 잔혹하지만 분명하게 목표를 수행하며 성과를 내는 유능한 인물로 역사에 남았을 여지도 있다.
요컨대 원술의 군사적 포트폴리오는 강약약강 그 자체. 대권주자로서 정세를 결정지을 중요한 싸움에서 참패를 거듭하는 와중에 대권주자로서 자신보다 무게감이 확연히 떨어지는 지역 맹주들을 상대로도 망신을 당하거나 고전 끝에 간신히 졸렬한 승리를 거두는 식이었다., 그나마 군사적 경력, 기반이 튼튼하지 않은 정치인이나 관료들을 상대로는 무난하게 승리를 거두며 겨우 전국구 주자로서의 체면을 차리는 수준이었는데, 이토록 의아스럽게 보이는 원술의 졸전은 원술의 부곡들이 개별적으로는 정예했을지 모르나, 유협이라 불리는 온갖 부류의 무력집단들을 분별없이 끌어들인 결과 제대로 된 조직화가 불가능했고 원술 자신도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주먹구구식의 유협 논리만을 앞세운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용장 손견이 중심을 잡고 있을 때는 결과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손견이 죽은 뒤에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호걸로 이름을 떨쳤던 원술의 무예와 군사적 재능은 원소나 조조를 상대로 대권을 다투는 순간에는 빛이 바랬으나 자신이 직접 육성한 야만적인 사병들을 풀어 비협조적인 지역 토호들의 요새화된 장원을 대상으로 군사작전을 벌이며 짐승 몰듯 사냥하여 공포를 각인시키고 복종하게 만드는 순간 만큼은 낙양 거리의 한귀라 불리던 시절처럼 나름의 역할을 다했을 것이다.
다만 이를 통해 정치 깡패로서의 원술을 과잉해석 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후한 당대의 사족들은 근본적으로 지역호족들이 대부분이라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호걸들과 관계를 맺었었다. 청류파의 극소수 몇몇 정치인들을 제외할 경우,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후한 시기 대부분의 사족들은 정치 깡패처럼 굴었고 자신의 관할지역에서는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원술이 젊은 시절 낙양에서 유명한 유협 우두머리로 명성이 있었으며, 유협 출신 부하들을 많이 거느리고 다닌 것도 사실이지만 조조나 유비, 공손찬 같은 군웅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원술이 좀 이들 중에서도 유별난 점도 있는건 사실이지만 일단은 그 역시 당대의 게임 룰에서 놀던 플레이어라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어쨌든 원술은 출발점 자체가 다른 군웅에 비해 독보적이었고 초반에 많은 성과도 거두었지만, 부족한 군재로 인해 결국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3.2.3. 인간성
악평일색인 군재와 달리, 개인적 인품에 대한 일화는 오히려 원소와 대조적으로 인간적인 부분이 많아서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로는 삼국지연의 속 장비나 수호전의 이규와 결을 같이 하는 고전적인 중국식 안티히어로의 면모가 있었다. 후술되는 육적회귤 고사도 그렇고, 서소와 관련한 일화도 그렇고, 후궁 풍씨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칭제 이후 몰락의 기점이 된 진국에서의 패배 당시에도 다 팽개치고 도망가는 판에 죽자고 뒤를 지켜주는 장수들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원술은 난폭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자기 사람으로 인식되는 범주의 안에서만큼은 의외로 대단히 섬세한 감수성을 발휘했고, 출신과 사회적 평판을 가리지 않은 채 누구와도 거리낌없이 어울렸던 그의 행보는 사족사회 안에서 늘상 혐오에 가까운 평가를 받으며 천박하게 여겨졌지만 원술은 언제나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유교적 소양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도참에 심취해 있었다는 점에서 보이듯 신비주의에 무척 관심이 많아 나름대로 아는 게 많고 박식한 편이었으며 그의 거침없는 행보나 직접 쓴 것으로 남아있는 서신들을 보면 기본적인 말솜씨도 상당히 뛰어났을 것이다. 일관된 원칙없이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 동기로 움직이며 주변인을 제외한 다수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점을 제외하고 본다면 그는 인간적 매력이 상당했다.손견과의 관계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일단 왕예, 장자의 살해 등으로 손견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한다면,[5] 둘의 관계는 최소한 처음에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맞춰주는 관계였다. 한실수복을 원하는 손견은 장사에서 낙양[6]까지의 기나긴 거리의 후방안정과 대군의 보급이 필요했고, 손견 개인의 역량으로는 무조건 무리였다. 원술은 후방안정과 보급 그리고 권위와 명분까지 줄 수 있는 확고한 파트너였고 딱히 이렇다할 대안도 없으니 둘이 손을 잡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에 가깝지 손견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7]
이후 허리가 끊기는 손견이 장안을 못 치고 돌아와서 주씨 형제와 싸우고 유표와 싸우는 것도 만약 손견이 동탁 토벌의 의지를 여전히 불태우고 있다면 당연한 수순이다. 원술의 인간적 매력을 논하기에는 오히려 보급을 끊어버리는 졸렬함이 가장 빛났다고 봐야 한다. 끊자마자 바로 원술에게 와서 동탁이랑 원수진 것도 아닌데 왜 싸우겠냐며 애국심 일장연설을 뱉었던 것을 보자면 그냥 손견의 한실수복 의지가 강해 보인다. 물론 원술의 능력이나 보급을 끊던 졸렬함에 비하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손견이 1~2년 동조하는 행보를 보였기에 손견은 원술의 아랫사람이 되었다, 원술의 인간적 매력이 뛰어나다고 논할 수도 있겠지만 한실수복의 의지가 엄청나다고 하면 손견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행보기도 하다.[8][9] 그래도 완전히 인간적으로 싫은 사이일 것이라고 하기에는 왕예, 장자 살해 등 급수와 흉수를 남발하던 손견과는 원술이 코드가 좀 맞는 것은 있어 보이긴 한다. 그리고 원술이 손견의 불타는 애국충정을 알아주는 인간적이고 호탕한 귀공자상이었을 것이라는 서술도 뭐 딱히 무리 없는 서술로 보이는 것은 맞다. 단지 그런 인간적 매력 하나로 둘이 결합했다던가 손견이 원술에게 헌신했다던가 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손책과의 관계도 잘 보면 원술이 자꾸 손책을 이용해 먹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조가 조인을 휘하에서 쓰려고 태수로 임명하는 대신 의랑으로 임명해 곁에 두고 아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원술 또한 손책을 직속으로 두고 싶어서 독립을 막았을 가능성이 있다. 원술이 손책을 아들과 같이 대하며 손책이 원술의 군영에서 법령을 어긴 것을 사죄하자 오히려 손책을 두둔하는 등 노골적으로 손책을 편애해서 군중에서 더욱 손책을 두려워하고 꺼렸다는 기록도 남아있기 때문. 심지어 자치통감에 따르면 원술은 칭제 당시 부하들의 숱한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손책의 절연장을 받아들자 크게 상심하며 몸져 누웠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이러한 원술의 면모는 손책을 이용만 하는 갑질상사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들이고 나름대로 일관되게 손책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10]
잘생긴 외모에 매력이 넘치고 우스갯소리를 잘 하던 손책 자신의 인품과 원술의 전폭적인 총애로 손책은 장훈과 교유를 비롯해 원술군의 주요 무장들에게도 진심으로 경애의 대상이었다고 하는데, 보통 손책의 매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나, 화의를 위해 파견된 사신에게 냅다 창을 던져 현장에서 살해하거나 지역민들의 지지를 받던 고대와 우길을 개인 감정문제로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등 현대적 관점에선 명백한 정신병자로 보일 법한 손책의 병적인 다혈질적 성향이 원술의 유협적 특성과 맞물려 조명되면서 손책같이 병든 인성의 소유자를 원술과 그 부하들이 진심으로 경애했다는 것은 애초에 손책의 그런 성격적 특성이 원술이 추구하던 원술 진영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주장도 나타났다. 광증과 매력적인 면모가 공존하던 손책의 성격적 특성은 원술의 취향이 반영된 원술군 물이 잔뜩 들어간 결과이며 그렇게 육성된 손책의 모습이야말로 원술이 바라 마지않던 이상적인 무인상에 가까웠다는 것.
문제는 손책은 이런 원술의 총애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구실을 얻자마자 원술을 배신하고 독립해 버린다.[11] 난세의 패배자에게 불리한 서술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화봉요원에서는 원술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꿀물도 못 먹고 죽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꿀물 찾을 때 주방에 보리가 30곡이었다는 사서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 갈 데까지 간 상황이라 사실상 거지떼나 유랑도적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원술의 잔당들을 탐낸 손책과 유훈이 대립하는 기록들에서 드러나듯 원술의 일족들을 비롯한 원술의 직계세력들은 수만 명에 달할 정도로 여전히 많기는 했는데, 패기 넘치게 황제를 자칭하고 저 지경까지 몰려버린 상황도 기막히지만 반대로 저 지경까지 몰리고도 여전히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상황 역시 기막힌 일이긴 했다. 어떤 의미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귀족적이었던 인물.
원술의 잔당들은 최종적으론 손책의 세력에 흡수되지만, 손책이 원술의 아들 원요를 낭중으로 삼고 원씨의 여식들이 손권과 혼맥으로 묶여진 것은 어쩌면 깊은 영향을 끼친 원술에 향한 손책 나름대로의 예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12]
3.2.4. 원씨 본가와의 관계
원소와 원술은 젊은시절부터 원씨 본가의 바깥에서 나름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점이 있었지만 유교적 도덕성이 인물평의 기준이 되는 사족사회의 여론으로 볼때 열사 원소가 실천하는 지성이자 사세삼공 원씨의 명예를 되살려낸 촉망받는 소장파였다면, 협객을 자처하는 노중한귀 원술은 폭력과 공포를 숭배하는 우민들의 무지성적 지지를 받을 뿐인 원씨의 수치스러운 치부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고 해석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지 못한 과한 해석이다.애초에 원술 측 진영 중에는 원씨 가문 출신으로 보이는 인물이 여럿 보이고 어느 정도 활약을 보이는 반면, 원소 측 진영에는 원소의 직계자손 외에는 원씨 가문 출신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13] 평소 원씨 문중과 원소가 대립했고 원술은 원씨의 본적에 있는 여남을 기반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원씨 문중에서는 대체로 원술을 지지했던 것은 확실하다. 물론 멸문을 당하기 이전 원씨 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협객으로서의 원술의 행보가 그다지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겠지만, 애초에 원씨 일족 자체가 청류파가 전혀 아니었던데다가 당시 귀족들의 도덕적 해이나 신분제에 대한 인식을 본다면 원술의 정치깡패 같은 행보도 그다지 큰 결점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청류파의 강성 사족들의 지지를 통해 원씨 문중과 대립하던 원소와 달리 원술은 딱히 본가와 대립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애초에 원술이야말로 원씨 문중의 적통 중의 적통이었기 때문이다. 낙양에서 형 원기와 숙부 원외를 비롯한 주요 일족이 몰살당한 이후 원가의 적통은 원술밖에 없었고 본인이 원씨 문중 자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실제로 원술은 스스로 원씨의 적통을 이어받았다는 인식을 강하게 드러내며 원소가 원씨 일족의 몰살에 책임이 있다고 여겼고, 원소 생모의 출신성분을 헐뜯고 원소는 원씨가 아니라고 단언하면서 원소의 비밀스러운 출생에 대한 논란이 될만한 발언들을 늘어놓는다. 물론 원술 본인의 행적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원씨 멸문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기에 이는 그저 남 탓이라고만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가문에 대한 원술 나름대로의 강한 귀속의식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다.
3.2.5. 원소와의 악연
많지 않은 젊은시절의 기록부터 꾸준하게 언급되는 악연으로, 원술은 원소 뿐만이 아니라 원소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을 전부 증오하며 업신여겼다.만약 원소가 얼자가 아닌 친형이라면 그냥 따랐을 수도 있고, 이복동생이었다면 아랫사람들은 나름 챙기던 원술답게 항렬로 찍어누르면서 아랫사람으로 대했을 수도 있었지만 원소의 항렬이 더 높다는 문제가 있었다. 골치아픈 것은 두 사람의 생년은 불명이지만 원소의 행적을 역추적했을 때 원소의 생년은 153~157년 사이에서 유년기부터 조조와 친구였다는 기록을 감안해 조조와 동년인 155년에 가까운 방향으로 범위가 좁혀지는데, 원술 또한 진규와 어린시절부터의 친분이 언급되고 170년대 초반생인 진규의 장남 진등의 나이를 고려할 때 진규가 원술보다 몇 살 연상일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원술과 원소와 나이 차이가 크다고 보기 어렵다. 어쩌면 나이 자체는 같으나 생일의 차이로 항렬이 갈린 수준이었을 수도 있고,[14] 이렇게 볼 경우 원술로서는 더욱 피가 거꾸로 솟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6년상과 낙양 불출사 등으로 사족사회의 유교근본주의적 여론에 영합하며 청류파의 아이돌로 떠오른 원소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원술의 행보는 상당히 대조적인데 원소의 첫 삼년상의 대상이 원술의 어머니였다는 일사전의 기록이나 원소가 명성을 얻고 정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던 과정을 감안하면 원술은 원소에 대해 적지 않은 피해의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원씨 가문이 청류파가 아니었기에[15] 원씨 가문의 적통이던 원술은 정치적으로 이러한 퍼포먼스를 할 이유도 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청류파를 중심으로 한 식자층들에게 원소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만큼 원술 자신과 원씨 가문이 폄하됐을 수 있다.
어쨌든 원술은 원소가 여론의 추앙을 받고 자신은 비난을 받는 악역을 떠맡던 현실에 곧잘 분개하며 역정을 냈으나 말년에는 원소에게 애처롭게 목숨을 구걸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는데, 원술 자신이 상징했던 '한나라 최고위층 사족'과 원소가 상징했던 '청류파에서 가장 떠오르는 정치인' 사이의 차이를 감안하면 원술이 원소 아래로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년의 행보는 그만큼 원술이 모든 면에서 몰락했음을 보여줄 뿐.
3.2.6. 사상
앞서서 언급했듯이 원술 역시 당대 대권주자들의 게임 룰에서 놀던 플레이어라고 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또 그 행보를 원소나 유표 등과 대조해서 해석함에 있어서 원술이 원칙이 없고 야만적이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문명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고대인들은 다 그랬다고 보는 것도 잘 해석해야 한다. 원술의 행적 중에 싸움에 졌다고 백성들을 학살해 주흔을 충격받게 해서 자진하야시킨 것은[16] 고대인 관점에서 봐도 원술이 심각한 놈이거나 최소한 이 순간만은 심각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또한 이뿐만이 아니라 원술의 행적은 그냥 굳이 현대인의 관점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반사회적인 부분, 반골적인 부분, 원칙이 없는 부분이 많았다. 당장 원술과 여포의 반목만 봐도 원술 본인이 왔다갔다 하면서 여포에게 감정적인 골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으니 말이다. 원칙을 잘 구사했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또한 다 그랬는데 참칭자인 원술만 역사의 부당한 평가를 받는다는 해석이 분명히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겠지만 그러면 과연 원술이 그런 나쁜 평가가 다 남들 하는 건데 누명을 쓴 거고 완벽히 자유로운가? 주흔이 원술과 맞선 동기는 애초부터 원술이 잔인하고 포악한 놈이라는 것을 알아서 맞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경우에도 나쁜놈 원술을 만들기 위한 곡필이었다고 해야 하는가? 또한 마일제 억류 후 스트레스성 사망이나 유총 암살 건 같은 것을 봐도 후한시대 호족, 군웅들은 다 그런 놈들이었다거나 참칭자에 대한 곡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비열한 수나 암수, 잔혹한 흉행 같은 행적이 분명히 다른 많은 군웅들과 공유하는 것도 맞지만 모두와 공유하는 행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공유한다 해도 이런 원칙 없는 기행을 그 누구보다 제일 많이 한 것이 원술이다.[17]
또한 현대 호사가들은 이 당시의 학문과 신비주의, 도가 등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상에 기반해서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지나친 도참설이나 신비주의 등이 정설로는 물정 모르는 소리 취급받는 것은 똑같았다.[18] 애초에 고대부터 중국의 주된 학문경향은 서로가 얽혀 들어가는 정치학과 윤리학이다. 도가 역시 유가보다는 좀 희한하고 판타지 같은 소리를 많이 했지만 그래도 도가의 주요 주제 역시 윤리, 정치적인 주제였지 그 어떤 신비주의 같은 게 아니었다.[19] 그런 도가의 신비주의 도참설 등을 이용해서 끼워맞추기를 하는 어떤 정치적 주체가 있다고 할 때 당장 자기들이 하는 짓거리가 끼워맞추기고 자기들이 끼워맞추기로 프로파간다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20]
분명 이 시대 사람들이 현대에 비춰볼 때 신비주의적인 사고를 많이 했던 것은 사실이고 특히 민간층에 널리 퍼져 있던 것도 사실이나 제대로 된 정치가들일수록 사고와 평가의 기준은 신비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거나, 프로파간다용 명분 만들기로 이용할 뿐이었다. 단지 옛날에는 아직 과학이 많이 발달하지 못해서 학문과 종교의 구별이 미진해서 현대에 비춰보자면 이상한 말이 많지만, 그래도 정설은 정설이고 헛소리는 헛소리다. 그나마 변방의 중산층 출신인 공손찬 같은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중앙 명문가의 귀공자인 원술이 헛소리에 혹하고 다닌 것은 별로 평가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고 기껏해야 본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멍청했다는 얘기밖에 더 되지 않는다. 가장 극명한 대조가 유교적 가치의 진가를 알고 제대로 이용한 원소가 있다.
또다른 좋은 반례가 동시대의 유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서 말하는 신비주의로 따지자면 본인부터가 대학자였고 특히 주역의 전문가인 유표가 당대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열손가락 안에 넉넉히 꼽힐 것이다. 그러나 유표의 정치행보는 주역의 뜬구름 잡는 헛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원소나 유표나 군재가 없는 군벌이자 한실에 반기를 든 것은 같지만 가식적이고 계산적인 유표가 주변 사람 잘 챙기고 감성적이며 신비주의나 밀던 원술보다 훨씬 더 좋은 통치자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원술의 행적은 정상적인 정치적인 윤리적인 계산법으로 따지자면[21] 터무니없이 변화무쌍했다. 즉 원칙이 없다는 얘기이다.[22]
원술의 이런 생각과 행보가 현대인이 사상적으로 봤을 때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동아시아 역사의 큰 줄기에서 보자면 결국 서양 사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반항심이건 경멸심이건 무슨 이유건 간에 유교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아봤자 재미없고 허황될 뿐이라는 수많은 반례 중 하나를 당대의 공손찬과 더불어 쌓아줬던 것에 불과하다. 결국 유교라는 것이 중국 기준으로 뭐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를 가장 잘 표명해준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조조, 원소, 유표를 비롯한 다른 수많은 군웅들처럼 도참과 신비주의 천응감응설을 자기한테 유용하게 이용하는 것은 이롭지만 그걸 넘어서 공손찬, 원술처럼 유교적 가치관을 거스르고 날뛰어봤자 별로 쓸 데가 없었던 것이다.[23]
정리하자면 원술이 유교적 원칙에 어긋나는 행보를 많이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동아시아 지배계층들에게 유교가 확고한 승자가 된 것은 정치, 윤리, 교육에 있어서 유교가 최고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확실시 되었기 때문이고 원술은 그 체제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할만한 무언가를 내놓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유교 역시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변화도 많았고 다른 사상들을 받아들인 것은 많았지만 최소한 원술의 시절에는 이미 유가와 법가의 조합이라는 정치 유교의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다 이루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원술이 여기서 유교 중심으로 짜여진 판을 결국 완전히 깨는데 실패했다는 점으로 보면 그의 예교에서 벗어난 행동은 결국 대안을 찾는데는 실패했고 결국 후대에 입장에서는 원칙도 없이 깽판을 친 것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긴 했던 것이다.
3.2.7. 칭제
당대부터 현대까지 원술의 칭제는 원술을 패망으로 이끈 결정타로 취급되고 궁지에 몰린 원술이 대놓고 칭제를 하며 막나가다 스스로 패망의 길을 걸어간 것 같지만 원술이 마냥 멍청해서 이런 짓을 벌인 건 아니고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일단 원술은 기존에는 제 나름대로 충신 코스프레를 하려고 했지만 이미 마일제 능욕 사건 등으로 책을 잡혀 충신 코스프레는 더 이상 붙잡을 길이 없어진지 오래고 본인의 연이은 삽질로 조조와의 맞대결에도 참패한 건 물론 지지세력을 제대로 지원하지도 못했고 조조와의 힘싸움과 조정 장악 거기다 서주 정벌 여포 암살까지 모조리 실패한 상황이었고 조조가 헌제를 끼고 조정까지 장악한 시점에서 원술은 더이상 충신 코스프레를 유지할 수 없게 됨은 물론 이제 역적으로 지명되어 토벌될 일만 남게 됐다는 것.
따라서 원술 나름의 입장에 따라 호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원술의 칭제는 이미 붙잡을 길이 없어진 충신 이미지를 과감히 버리는 한편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며 후한 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해 후한의 신하를 자처하면서 조정에 거역하는 기존의 논리적 모순을 바로잡고, 도참사상을 통해 지배의 당위성을 세우고 명문 원씨의 적통이라는 브랜드 네임으로 부귀영화를 보증해 손책, 여포 등의 지지세력을 최대한 결집하는 방책으로 볼 수 있는데, 엄청난 모험 수이긴 하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생각이라고 보긴 어렵다.
당시 칭제 직전 시점에서 강남을 장악한 손책은 원술이 거리낌없이 아들처럼 대하던 관계였고, 조조와 크게 척을 지고 있던 여포 역시 원술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했다. 이원전쟁의 승리자인 원소, 조조, 유표간의 서열다툼은 벌써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원래는 원술 본인이 헌제의 정통성에 가장 옹호적인 입장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헌제가 정통성에 약점이 뚜렷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단지 조조가 근거지에 모셔둔 채 정부 재건을 선언했을 뿐이었으므로, 원술 자신의 주요 지지세력들과 동맹자들이 폭넓게 공유했던 반골적 정서와 원술이 좋아하던 신비주의를 통해 적당한 비전을 내세울 수 있다면 그것이 설령 야합일지라도 이념을 이용한 것이므로 상당한 결속력을 가질 수도 있었으며, 이미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가던 태평교도들을 원술은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던 바 있었다.
조조가 단결된 원술 진영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고전한다면 원소와 유표는 조조의 건안 정부에서 이탈하거나 스스로 조조의 역할을 대체하려 했을 것이기에 원술의 운신 폭은 더 넓어지는 건 물론 조조가 그들까지 견제하는 틈에 힘을 기를수도 있었을 것이며 잘하면 이전에 손견을 이용해 영토 확장에 써먹었듯 손책과 여포를 이용해 세력을 불릴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술의 칭제 전략은 얼핏 보면 무모했으나 본인이 남은 지지자들을 얼마나 잘 규합하는지 그리고 손책과 여포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서 중국의 패권은 몰라도 잘하면 훗날의 오나라가 그랬듯 장강을 중심으로 한 할거 정권까지는 노려볼 만했다는 것. 즉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작정 막 나갔다기 보다는 본인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결정적인 승부수를 띄웠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게 해볼 만한 도박이긴 했다지만 원술은 큰 실수를 범했는데 정작 본인의 지지세력을 신경 쓰는데 상당히 소홀했기 때문에 원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지세력이나 마찬가지였었던 손책은 원술의 칭제가 본격화되자 사실상의 절연장을 보내며 이탈했고 여포 또한 원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결국 원술은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일단 둘 다 원술과 절연한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원술이 역적이라서긴 한데 실상은 비록 여포가 잘못한 거라고는 해도 원술 본인이 쫓아낸 것은 물론 나중에는 진궁 학맹 등을 사주하여 반란까지 유도하여 화나게 만든 여포는 말할 것도 없고, 손책 역시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받은 유요 등을 공격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 협천자를 하고 싶어 했다거나 허도를 급습할 계획을 꾸몄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훗날 그의 동생 손권이 기어이 황제에 오른 걸 보면 손씨 일가에게 애초에 딴마음이 있었음은 명확하다. 여포 역시 아무런 불화도 없고 본인에게 잘해준 상관조차 죽여버리고 라인을 갈아탈 정도의 개망나니인 만큼 여포가 충신이라 원술과 절연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고 사실상 원술의 행태에 질린 데다 원술보다 조조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여포가 조조에게 붙은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원술 입장에서는 칭제가 걸어볼 만한 무리수였다지만 원술이 이미 제어할 수 없게 된 손책의 입장에서 보자면 굳이 확률이 낮은 원술의 무리수에 동참할 필요가 도의나 의리를 제외하면 전혀 없는 것이며 원술의 칭제는 황제에 대한 충이라는 이유로 손책이 아주 쉽게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준 상황이다.
사실 칭제 선언이 도박수라곤 하나 정치적으로 위험요소가 너무나 무리한 결정이었는데, 당시 '황제는 인간을 대표해 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 한 사람'이란 인식을 갖고 있던 중국인들 입장에서 한 황실이 존재하는데 칭제한다는 것은 대놓고 역적 선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조위는 한나라의 자발적인(사실은 강압적인) 양위를 통해, 촉한은 유비가 전한 황실의 혈통이란 점과 헌제의 밀명을 받은 반 조조파의 거두였단 점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했고, 손오는 이런 정통성이 없었지만 당시 조위/촉한이 바로 토벌할 수 없을 정도의 국력을 확보했기에 칭제가 가능했다.[24] 즉 칭제란 것 자체가 주변국들과 맺을 수 있는 관계가 크게 제한되는 상황인데, 그렇기 때문에 당시 원술과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세력을 갖고 있는 원소나 훗날 조조도 칭제만큼은 못했던 것이다. 위에 언급된 원술의 지지세력인 손책과 여포의 경우, 칭제한 이후 원술을 돕는다는 것은 그의 칭제를 지지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되며 황제가 제후와 동맹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론 황제 원술의 수하가 되겠다는 의미로 받여들여질 여지가 있다. 또한 자동적으로 칭제한 원술을 역적으로 보는 포지션에 놓일 수 밖에 없는 원소/조조/유표/유비/유언 등과 적대적으로 놓이게 된다. 게다가 여포는 이전에 바로 옆에 (원술을 적대할 수 밖에 없는)유비가, 그리고 지척에 원소와 조조의 세력권이 있으며, 방어하기도 어려운 서주를 지배하고 있었다. 조조가 헌제의 칙명을 이용해 유비에게 원술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유비는 이를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한 황실 입장에선 원술은 너무나 명확한 역적이니 한 황실의 충신 포지션을 잡고 있으면 원술을 치라는 명령을 거부할 명분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즉 만약 저기서 중나라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조조의 세력이 커지고 동맹세력이 늘어남에 따라 그에게 가해질 압박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위에서 원술이 지지세력에 소홀했다고 지적되었지만, 손책은 이미 반독립해 동맹 가깝던 상황이었고 여포는 느슨한 동맹 관계였을 뿐이었다. 설령 손책과 여포가 원술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도 위에 언급됐다시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화되고 사방의 세력들로부터 노려질 수 있는 상황에서 원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가능성은 희박하다.[25] 결국 당시 원술의 상황으로선 애초부터 지나친 무리수였던 것이다. 친분을 떠나 주변의 세력이나 지지, 인정을 기대하기엔 원술의 정통성이 너무나도 없고 세력이 미미했기 때문.
어쨌든 지지세력을 제대로 규합하지 못한 원술은 그대로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한때는 유우와 원소 양쪽 동시에 러브콜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보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한 몰락이었다.
4. 가족 관계
5. 여담
- 훈훈한 일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어린 육적이 부모에게 주려고 귤을 품에 숨겨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귤을 더 퍼주었다는 육적회귤의 고사가 있다. 다만 원술의 이미지가 워낙 시궁창이라서 그런지 이 고사는 주로 육적의 효심을 강조하는 쪽이 많고 원술의 훈훈함은 별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후 육강은 원술과의 관계가 틀어져 부임지 여강을 손책에게 공격받아 패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육적은 친척 육손 등과 함께 고향 오군으로 피신하여 훗날 오의 신하가 된다. 훗날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오에 왔을 때 설전배틀에서 무참히 깨지는 역할로 재등장했다.
- 헌제의 명을 받아 유우에게 가던 그의 아들 유화를, 중간에서 붙잡아 억류한 적이 있다. 헌데 이게 오히려 유화에게 득이 되어서, 유우가 일가친척과 같이 공손찬에게 살해당할 때 그 혼자 살아남았다.
- 낙양가람기와 태평광기에 실린 북위 종친의 돈지랄 썰에서도 언급된다. 장무무장왕 원융은 북위에서 재력으로는 재종형제 고양왕(高陽王) 원옹(元雍)[26] 빼고 지 미만이라며 돈지랄에 부심을 부렸다. 그러자 다른 재종형제 하간왕(河間王) 원침(元琛)[27]이 석숭과 왕개가 그랬듯이 돈지랄 병림픽에서 이기려고 더욱 사치를 부리고 종친들을 잔치에 부르니 원융이 이걸 보고 기가 질렸다. 그러자 원침은 원융에게 "내가 석숭을 못 봄은 안 아쉽다만 석숭이 나를 못 보니 아쉽다." 고 부심을 부리고 원융은 지보다 더 한 돈지랄에 열폭해서 부자(負玆)[28]하여 드러누웠다. 그래서 3종조부[29] 강양왕 원계가 원융의 문안을 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그대는 회남의 원술 같이 되어 세상에 유비가 있는 것도 모를려고 하시오?" 라고 하였고, 원융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30] 원술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다.
- 죽기 직전 꿀물을 찾았다는 점 때문에 삼국지 매체들에서 원술을 다룰 때 꿀물 관련된 댓글 개그들이 자주 나온다. 또 원술군의 식량이 떨어졌을 때 부들을 먹기도 했다는[32] 사실이 알려져서 부들을 씹는 사람들의 사진을 올려놓고 이것이 중가제의 핫도그라고 키득거리는 삼국지 팬들도 있다.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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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나마 부론손의 《패(覇) 로드(Lord)》나 마사토끼의 《삼국지 가후전》에서 원술의 유협적 특성이 비중있게 조명되었다.[2] 대표적으로 채씨 가문이나 유비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 컸다.[3] 사실 그 과정을 자세히 보면 유비와 원술이 국지적 승패를 반복하며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었고, 유비의 근거지인 서주가 조표의 모반으로 인해 (그전에 원술이 끌어들인) 여포에게 뺏기고, 근거지를 잃은 유비군이 패배한 것이다. 나름대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하고 의기양양하게 원정에 나서며 주요 대권주자로 손꼽히고 있던 원술이 반토막난 서주를 접수한 유비를 자력으로 온전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고전 끝에 책략을 동원해 승리했다는 의미라 빛이 바랜다.[4] 이런 측면 때문인지 원술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묘사한 편인 화봉요원 같은 작품에서는 유총 살해의 진짜 배후가 사실 조조 측이었으며 이들이 원술의 악명을 이용해 역사의 진실을 은폐했고 적어도 이 사건에서 원술은 순수한 피해자의 입장이라는 음모론적 각색이 들어가기도 했다.[5] 딱히 다른 반동탁 연합군 제후들끼리 싸워도 뭐 그것만으로 누가 갑자기 궁지에 몰리는 일은 없다. 그리고 누가 맹주 역할을 하고 어떤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는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서 손견을 벌할 것인가? 이것도 애매하다.[6] 장안까지 동탁이 도망치지만 일단 최초 목표는 낙양이기에.[7] 오히려 손견은 남양태수 장자를 죽인 후 그 위세를 이용해 독자적으로 현지보급을 하며 진군하고 있었다. 노양에서 손견과 원술이 만난 후 그 역할을 원술에게 넘기고 손견은 전투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8] 손견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서로 주고받는 조건도 맞고, 벼슬도 원술이 더 높으니 나름대로 지시받아도 명분이 있고, 그리고 한실수복하려면 당연히 동탁이 도망친 장안까지 수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뒤통수를 갈긴 원소 일파를 정리해야만 한다. 장안 수복이 장난도 아니고 먼 원정길을 떠나는 것인데 후방의 불안이나 허리가 끊길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손견이 한실수복 의지에 불타고 있다면 동탁 척살을 방해하는 반역도에 가까운 주씨 형제와 유표는 원술과의 의리니 매력이니 원술의 아랫사람이니 뭐고 간에 그냥 당연히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9] 뭐 이미 원술의 아랫사람이 되었다, 부장이다 해도 딱히 그것을 부인할 만한 근거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확정시킬 만한 근거도 없다. 그것을 확정할 만한 기록이나 발언은 없고 있는 것은 손견의 행적뿐인데 손견이 한실수복의지에 불타고 있었어도 말이 되고 원술의 아랫사람이었어도 말이 된다. 단지 손견의 언행의 일관성으로 따져 보자면 동탁의 삼족을 멸하겠다는 등 한실수복의 의지에 불타고 있는 것이다.[10] 손책 개인에 대한 애정만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손책을 비롯한 부하들과 장강 남부 지역의 상실, 이반, 숙적화라는 거대한 사건이기도 했다.[11] 물론 충분히 등 돌릴 만한 명분(=원술의 칭제)이었고, 원술이 여러차레 말을 바꾸며 손책에게 독립적 지위를 주지 않고 직속으로 붙잡아 두던 것은 손책의 시점에서는 원술이 충성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 자신을 이용만 한다는 피해의식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또한 원술이 칭제하려 했을 때 직접 서신까지 보내 만류하는 등 부하로서의 역할은 다하고 독립했다. 손책의 속마음이야 어쨌거나 큰 명분상 원술을 따르는 것은 한나라에 대한 배신이자 역적질이기 때문.[12]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좀 과장이 있는 것이 손견이 대충 191년쯤에 죽었다고 하면 175년생인 손책은 충분히 아버지를 인식하고 위풍당당하던 아버지를 충분히 존경할 만한 나이다. 대충 195년쯤에 손책이 독립했다고 하면 손책이 원술 휘하에 있던 시기는 4년 정도다. 청소년 시기였으니 인격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얘기지만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좀.... 뭐 숙부 정도의 존재감은 충분했을 수 있다.[13] 다만 원유처럼 원소와 동맹을 맺고 원술과 싸우다 패사한 군벌도 존재한다.[14] 비슷한 사례가 두어달 차이로 항렬이 갈려버린 예시가 건륭제와 애신각라 홍주. 다만 이 경우는 건륭제가 아버지 옹정제나 할아버지 강희제가 공인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홍주는 형에게 함부로 도전하지 못하고 망나니 행세나 하며 목숨을 보전해야 했다.[15] 영제에 의해 청류파가 조정에서 모두 쫒겨났던 시기, 원씨 가문은 삼공을 역임하는 등 조정의 중심이었다. 즉, 십상시라는 환관 세력과 결탁한 대표적인 탁류파가 원씨였던 것이다.[16] 애초에 맞서 일어난 것이니 아예 강단이 없는 문약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17] 조조도 기행을 많이 하긴 했지만 기행을 하는 한편 나름대로 원칙이 확고했으며 또한 조씨가 중국의 패권을 차지했다고는 하나 원칙에 따르지 않는 자기중심주의적 기행은 조조, 조비, 조예 3대가 다 공유하는 문제점이었고 결국 조위가 빨리 무너지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된다.[18] 손권이 장소랑 도사 등에 관해서 환담하고 있을 때 우번이 지나가면서 죽은 놈들이냐고 꼽을 주자 손권이 화를 냈는데 요는 이 시절도 정설은 똑같았다는 것이다.[19] 도가의 발전상이나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진지한 도가와 혹세무민하는 도사와의 차이는 있다. 도사들이 신비주의에 탐닉했던 것은 사실이고 도가 자체가 좀 그런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차이가 있다. 장자가 명가의 혜시를 비판할 때 그의 논리학, 언어학 부분에서 마은에 안 드는 부분을 신비주의만으로 공격하고 그러진 않았다. 장자가 많이 만들어낸 우화나 인용인지 창작인지 모를 전설들이 신비주의 입맛에 아주 딱 맞는 것은 사실이나 그 안에 있는 엄밀한 논리학적인 요소는 접어두고 그런 부분에만 과몰입하면 우번한테 꼽이나 당하기 십상인 것이다.[20] 즉 원술이 하던 거랑 똑같이 프로파간다성 끼워맞추기, 아부하기 등으로 이용하는 것이거나 조예가 이슬 마시고 하던 것처럼 장수 따위의 기복을 욕구하는 종교적 차원이었다. 한무제가 이슬 마시는 걸 비웃던 것처럼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안 믿었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은 중국의 베스트셀러 정치철학서로, 여기서도 저자가 이런 신비주의를 이용한 끼워맞추기 프로파간다를 과거인물들을 이용해 수없이 창작해서 써놨다.[21] 정치와 윤리는 분리하기 어려우며 고위 정치가의 차원으로 갈수록 더욱 그렇다.[22] 유교란 게 뭐가 착하고 뭐가 나쁜 것인지, 뭐가 예의 바른 것이고 지도자에 걸맞은지 올바른 다스림인지에 대한 얘기가 많은데 이게 아무리 현대에 와서 시대적 한계나 다른 사상들과의 비교 가운데 비판을 많이 받는다 해도 당대에 주요 조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식자들이 공감하고 있으며 전통적이기까지 한 가치라면 유교를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반항하는 건 불이익만 있지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이런 원칙이 없다는 얘기에 대해서 원술은 신비주의적인 원칙을 따랐다고 한다면 더더욱 유표와의 대조가 될 뿐이다. 또한 이렇게 원술이 원칙이 없는 게 아니라 신비주의적 원칙을 따랐다고 한다면, 원술의 중나라 건국은 도대체 원술의 도박적인 정치적 한 수인가, 아니면 도참설이란 원칙에 따른 일관된 원술의 한 수인가? 결국 까고 말해서 중나라 건국조차 그냥 제대로 된 원칙 없이 모든 가능성이 좋게만 돌아갈 것이라는 몽상적인 도박이었을 뿐이다.[23] 군주의 가치관이나 성향에 따라 그것과 비슷한 인물들이 꼬이고 상이한 인물은 하야하게 된다. 군주가 (자기 기준에서) 현명하거나 건의를 받아주면 머물고 아니면 떠나라는 이 성향은 중국의 고대시대부터 지식인 계층에게 전해지는 격언과도 같다. 인재등용이란 측면에서도 유교적 가치관을 철저히 따르는 게 맞다. 극단적인 사례인 공손찬의 경우 점쟁이 상인처럼 정치와는 맞지 않는 인물들이 꼬이게 되고 인재들이 줄줄이 하야하니까.[24] 조위는 촉한/손오에 비해 압도적인 국력을 갖고 있었지만 양국 모두와 적대하면서 이민족까지 적대하는 입장상 한쪽에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는게 불가능했다. 촉한은 삼국 중 최약체란 특성 때문에 (유비 사후) 주적인 조위와 적대하는 동안 명분은 접어두고 손오와 동맹하는 선택을 했다. 어쨌거나 촉한과 조위 둘 다 "칭제를 하더니 손권 이놈 역적이다!"라며 토벌을 시도할 상황이 아니었다.[25] 그나마 여포에 비해 손책은 주변에 큰 세력이 없으므로 당장 멸망할 가능성은 적은 편이지만, 아직 젊고 세력을 규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손책은 강동 지방의 호족들 지지를 받는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 세력도 그리 크지 않고 정통성도 없는 원술을 지지한다면 이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받는게 거의 불가능하다.[26] 헌문제의 아들, 효문제의 아우[27] 문성제의 손자, 제군순왕(齊郡順王) 간(簡)의 아들[28] 본래 제후의 앓음을 뜻하나 나중에 종친의 앓음으로도 쓰였다.[29] 할아버지의 3종형제[30] 즉, '네가 원술도 아니고 세상에 너보다 뛰어나고 잘난 사람들 많은데 왜 고작 그거 가지고 드러눕느냐'고 면박을 주는 것이다.[31] 다만 시조 원지형(袁持衡)이 원술과 같은 여남 원씨인지는 알 수 없다.[32] 부들의 열매는 가르거나 으깨면 안에 있는 솜털같은 씨앗이 잔뜩 터져나온다. 배에 뭐라도 채워 넣으려고 이랬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