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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2:10

위기(조위)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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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覬
? ~ 229년[1]
1. 개요2. 생애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서예가. 는 백유(伯儒)로 사례 하동군 안읍현 사람.

2. 생애

어렸으나 조숙해 재능과 학문으로 칭송받았으며, 조조가 불러 사공연속으로 삼았다가 무릉의 현령과 상서랑에 임명되었다. 조조가 원소를 정벌할 때 유표는 군대를 일으켜 원소를 구원하려고 했지만 관중의 모든 장수들은 중립을 지켰으며, 유장과 유표의 틈이 벌어지자 치서시어사가 되어 익주에 사신을 보내 유장에게 군대를 파견해 유표를 견제하게 했다. 장안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혀 나아갈 수 없자 관중에 남아 진지를 구축했다. 당시 많은 유민(流民)들이 관중으로 돌아왔는데, 관중의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그들을 불러서 부하로 만들었다. 위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냈다.
관중(關中)은 비옥한 땅이지만 갑자기 기근과 동란을 만나, 백성들 중에서 형주로 흘러들어간 자가 10만 명이나 되는데, 이들은 고향의 안녕을 듣고 모두 돌아오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자는 스스로 살 방법이 없고, 장수들은 각기 다투어 불러서 부하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군현의 사람들은 가난하고 연약하므로 그들과 싸울 수 없고, 병사들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일단 변고와 동란이 발생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소금은 국가의 큰 보물인데, 동란 이래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응당 옛날처럼 사자를 두어 소금 매매를 감독하여야 하며, 그 이익으로 얼룩소를 사서 만일 돌아오는 백성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공급하십시오. 농경을 장려하고 곡물을 축적하여 관중을 풍요롭게 하십시오. 먼 곳에 있는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반드시 주야로 다투어 돌아올 것입니다. 또 사예교위(司隸校尉)에게 관중에 남아 다스리도록 하여 그들의 주인이 되게 한다면, 장수들의 힘은 나날이 적어질 것이고, 관리와 백성들은 나날이 풍성해질 것이니, 이는 근본을 강하게 하고 적을 약하게 하는 유리한 계책입니다.

조조가 이를 받아들여 알자복야를 파견해 염관[2]을 감독하게 하면서 사예교위에게 홍농군을 다스리게 했으며, 관중이 복종하자 위기가 중앙에 부름을 받았다가 상서로 승진되었다.

《위서》에 따르면 당초 한 왕조가 수도를 옮길 때 대각의 옛날의 제도들이 흩어져 없어졌다. 허창으로 수도를 정한 이후 점차 기강이 잡혔는데 위기는 고대의 법도를 참고하여 많은 부분을 바로잡았다.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태조(조조)가 순욱을 보내 위기에게 물으니 위기가 대답했다,
서방의 제장들은 모두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천하에 웅거할 뜻이 없으니 실로 눈 앞의 안락을 구할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 작호를 더해주어 그 뜻을 이루게 해 준다면 중대한 사고가 없는 한 변고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당 그 후에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들어가 장로를 토벌한다면 장로는 깊은 산에 있어 도로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저들이 필시 의심이 품을 것입니다. 한번 놀라서 동요하게 되면 땅이 험하고 무리들이 강성하니 그 위태로움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위기의 의견을 태조에게 보고했다. 태조는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종요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종요의 의견에 따랐다. (종요의) 군사가 처음 진격하니 관서에서 크게 반란을 일으켰고 태조가 친히 정벌한 뒤에야 겨우 이를 평정할 수 있었고 전사자도 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태조가 위기의 의견에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고 이로 말미암아 위기를 더욱 중용했다.

위나라가 건국되자 시중이 되어 왕찬과 함께 예의제도를 관장했으며,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상서(尚書)로 전임되었다. 오래지 않아 한조로 돌아가 시랑(侍郎)이 되었으며, 한 헌제에게 문제에게 선양하도록 권하고, 선양할 조서의 초고를 만들었다.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위기는 상서(尚書)가 되었으며 양길정후(陽吉亭侯)로 봉해졌다.

조예가 즉위하자 승진하여 문향후(閺鄉侯)로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다. 위기는 상주하여 말했다.
아홉 가지 법률이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와 형벌을 판단했는데, 그 내용이 미묘합니다. 백 리 사방의 관리들은 모두 법률을 알아야만 합니다. 형법이란 국가에 대해서는 매우 귀중한 것이지만, 사사로이 의론하는 자에 대해서는 매우 가볍고 천한 것입니다. 옥리는 백성들의 생명을 손에 쥐고 있지만, 옥리를 선발하여 사용하는 자들에게 천시를 받습니다. 국가 정치의 병폐가 반드시 이로부터 야기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법률박사를 두어 서로 법률을 가르치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명제는 그의 건의를 시행했다. 당시 백성들은 빈곤하였지만 노역은 끊임없이 증가했으므로 위기가 상소를 올렸다.
성정을 바꾸어 본성을 연마하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신하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고, 다른 사람의 군주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게다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부귀영화이고, 싫어하는 것은 빈천하고 죽는 것이지만, 이 네 가지는 모두 군주로부터 결정됩니다. 군주가 그것을 좋아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고, 군주가 그것을 싫어하면 빈천하고 죽을 것입니다. 군주의 의향에 따르는 것은 애정이 생기는 까닭이고, 군주의 의향을 위배하는 것은 증오가 생기는 까닭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의 신하들은 모두 주군의 뜻에 순종하려고 다투고 뜻을 거스르는 것을 피합니다. 집을 파괴하여 국가를 위하고, 몸을 죽여 군주를 성공으로 이끄는 자가 아니면, 누가 군주의 안색을 범하고 거리끼는 것에 저촉하면서까지 계책을 세우고 진언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이 점에 유의하여 살피시면 신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국사를 논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하기 좋아하여, 정치를 말하면 폐하를 요순(堯舜)에 비교하고, 정벌을 말하면 오와 촉 두 적을 너구리나 쥐에 비유하는데, 신의 생각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옛날 한 문제(漢文) 때, 제후국의 세력은 강대하였으므로, 가의(賈誼)는 국가가 위험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길게 탄식했습니다. 하물며 국가 내부는 셋으로 나뉘었으며 선비들은 힘을 다하여 각각 자기들의 군주를 위하고 있습니다. 투항해 오는 사람은 사악함을 버리고 정의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없고, 모두 곤란함과 위급함에서 도망쳐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섯 나라로 분할하여 통치했을 때와 다르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 천 리에는 밥하는 연기가 보이지 않고 유민들은 가난과 고통을 안고 있는데, 폐하께서 이런 일에 대해 충분히 유의하지 않는다면 쇠망하고 피폐하여 다시는 소생할 수 없습니다.

예법에는 천자가 사용하는 기물에는 반드시 금이나 옥의 꾸밈이 있어야 하고, 음식과 안주에는 반드시 여덟 가지 진미가 있어야 하며, 흉년이 되면 음식을 줄이고 복장을 소박하게 해야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하므로 사치와 절약의 조절은 반드시 세상의 풍요로움과 빈궁함에 의거해야만 됩니다. 무황제(武皇帝) 때, 후궁의 식사에는 고기반찬이 한 가지뿐이었고, 의복은 비단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자리는 수식을 하지 못했고, 기물에는 붉은 칠을 하지 않았는데, 이로써 천하를 평정하고 자손에게 복을 만들어 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폐하께서 직접 보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임무는 군신(君臣)과 상하(上下)가 함께 주의하여 방책을 생각하고, 국고의 재산을 계산하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는 것입니다.

구천(句踐)은 인구를 늘릴 방법을 깊이 생각하였어도 미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상방(尚方)의 금은 제품은 점점 더욱 증가하고, 공사와 부역은 끊이지 않으며, 사치스러운 기풍은 나날이 성행하고, 국고는 나날이 텅 비어 가고 있습니다. 옛날 한무제(漢武)는 신선의 도를 믿고 구하여 구름 끝 이슬과 옥가루를 함께 먹으면 장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선장(仙掌,높이 세운 손 모양의 그릇)을 세워 구름 이슬을 얻으려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박식하고 현명하셔서 항상 그를 조소했습니다. 한 무제는 이슬을 구하려다 오히려 비난을 당했고, 폐하께서는 이슬을 구하지 않으면서 헛되이 선장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기호에는 이익이 될 것이 없는데 인력과 비용을 낭비하고 있으니, 진실로 성스러운 생각으로 마땅히 명확하게 제정해야만 합니다.

위기가 한(漢)과 위(魏)의 시대를 통하여 때때로 충언을 바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조서를 받아 저작을 담당하고, 또 위관의(魏官儀)를 지었으며, 모두 수십 편을 짓고 엮었다.

건안 말기에는 상서우승 하남의 반욱, 황초 때에는 산기상시, 하내의 왕상이 또한 위기와 함께 문장으로 빛났다. 고문, 전서, 예서, 초서를 좋아해 모두 뛰어났으며, 초서는 파리했지만 필적이 정밀하고 뛰어났다고 한다. 일찍이 한단순에게 고문상서를 그대로 적어 한단순에게 보였는데, 한단순이 이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위기의 고문, 소전, 예소, 장초는 모두 능품에 들었다고 한다. 위기가 죽자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했으며, 아들 위관이 작위를 계승했다.


[1]진서』 「위관전」에 의하면, 위관은 10살 때 아버지 위기의 상을 당했다.[2] 식염 전매관을 말한다. 옛날 하동 안읍의 염지(鹽池)에 염관을 두었다. 하동군관우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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