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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0:29:54

하후현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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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侯玄
209년 ~ 254년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조상 정권의 중축이 될 때까지2.2. 개혁을 주장하다2.3. 고평릉 사변과 최후
3. 야사4. 삼국지연의5. 평가6. 미디어 믹스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신으로 는 태초(太初/泰初).[1]

하후상의 아들[2], 어머니는 조진의 누이인 덕양향주 조씨, 여동생은 사마사와 혼인하는 하후휘. 따라서 하후현은 조진의 조카이자 조상의 사촌이 되며, 사마사의 처남이 된다. 예주 패국 초현 사람.

진태, 사마순과 함께 조위의 마지막 충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3]

2. 정사 삼국지

2.1. 조상 정권의 중축이 될 때까지

어려서부터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20살이 되자 산기황문시랑이 된다. 당시 유행하던 현학에 있어서도 명성을 떨쳤다. 하안은 사마사와 함께 하후현을 천하의 기재라며 칭송했다. 이걸 보면 하안은 사마사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로 여겼던 듯 한데 결과적으로 그 사마사에게 뒤통수를 맞고 죽었으니 그 기분이 어땠을지는...

조예를 알현할 때 황후의 동생인 모증과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하후현은 이를 어찌나 치욕스럽게 여겼는지 황제 앞에서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명도황후 모씨조비 밑에서 불우하던 시기의 조예가 만나 다른 명문가 여인을 제쳐놓고 연애결혼까지 이룬 사이라 집안은 상당히 한미했는데 이걸 참지 못한 것. 이를 본 조예는 하후현을 우림감으로 좌천시킨다. 자부심이 조예의 심기를 거스른 탓에 하안과 마찬가지로 관운이 트이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다 조방이 즉위하자 조상이 조방의 정치를 보좌했는데 하안과 마찬가지로 조상 정권에서 승진을 거듭해 산기상시 중호군에 이른다. 조상이 사마의와 대립하게 되면서 명망 있는 인물이자 개인적으로는 사촌이 되는 하후현을 끌어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는 중호군으로 있으며 많은 인재들을 발탁했는데 모두가 천하의 준걸로 지방관으로 나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출사 과정이 비슷했던 사마사가 일부러 공이 없는 인물들을 기용한 것과는 정반대의 정책인데 후술할 구품관인법 논쟁과 연관지어 호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품증정제에 반대하고 조조대의 유재시거를 이어가려 한 노력으로 보기도 한다. 진나라 시대의 곽반(郭頒)이 지은 《위진세어魏晉世語》(=세어世語)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하후현은 세상에 명성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중호군(中護軍)으로 있을 때 무관을 발탁하여 극(戟)을 들고 아문(牙門)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들 중 천하의 준걸이 아닌 자가 없었다. 또한 많은 관리들을 주군(州郡)으로 나아가게 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법도를 바로잡고 올바른 교육을 펼쳤기 때문에 작금에 이르러서도 그가 했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세어》

그나마 자기편을 주로 등용한다고 비판할 여지가 없지 않았던 하안의 선거와는 달리 하후현의 선거에는 흠 잡을 구석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수정사 삼국지에서 그를 평하여 말할 제 "일찍이 그가 조상의 잘못을 바로잡았다거나 훌륭한 인재를 불러들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비판했지만, 이는 위의 곽반의 기록과 비교하여 보면 상반되는 평가다.

2.2. 개혁을 주장하다

아무튼 하후현은 이 무렵 사마의와 이야기할 때 장문의 편지를 써서 구품관인법[4]의 폐단과 당시의 사치풍조를 비판하고 당시 위나라 정치의 폐단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를 시급히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그에 대한 보완책을 건의하였다.

특히 당시 위나라를 대표하는 인재 선발 제도인 구품관인법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뒷날에도 "상등 관품에 한미한 출신이 없고, 하등 관품에 권세가 출신이 없다(上品無寒門 下品無勢族)"며 비판을 받게 되는 이 제도의 치명적인 결함에 대한 본격적인 첫 공격이었다. 인재선발의 기준이 모호하고, 선발된 인재에 대해 선발관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파벌 양성의 부작용이 심하다는 것 또한 지적사항이었다. 후에 서진의 중신이 되는 위관이나 두예의 비판도 거의 같은데, 하후현이 일찍부터 이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도관고과법을 도입해 공과로 관리의 재능과 자질을 평가해 조조 시절의 유재시거의 기풍을 부활시키려 했다. 관장들에게 각자 소속 관리들의 능력 혹은 열등함을 정부에 보고하도록 하며, 정부에서는 관장이 보고한 것에 의거하고 마을에서의 덕행 순서를 참고하여, 각급 관원의 등급과 비교하여 치우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며 중정관은 그들의 행동 자취를 고찰하여 그것의 높고 낮음을 판별하고, 등급을 심사하고 결정하여 관직의 승진과 낮춤에 있어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조정에서 전면적으로 관여해 착오가 있다면 그 책임은 당연히 조정의 담당관리가 지어야 하고, 장관의 등급 배열과 중정의 순위는 응당 실제 수용의 순서에 알맞게 그들을 임용해야 되는데, 만일 그 인물이 부적격한 경우에는 책임은 조정 밖에서도 져야된다. 이와 같이 조정의 안과 밖이 서로 자료를 참조하여 인물의 장점과 단점의 판정 근거가 세워지고 쌍방이 항상 검사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하후현은 지방의 관료 및 통치 조직이 난잡하게 변질되었음을 지적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행정단위를 폐지하거나 통합하자고 주장했다. 중복되어 있는 군수를 감량한다면, 현의 일은 주에 빨리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정사에 틈이 생기지 않으며, 관원들도 머물러 적체되는 것이 없게 되어 행정의 간소화와 단일화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 지방관들의 업무가 중복되거나 연계되지 않는데도 굳이 수많은 태수와 자사직을 설치하면서 발생한 경제적 부담이나 비효율적인 행정 절차를 줄이고자 한 의도였다. 이때 하후현은 행정단위를 통폐합하여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첫째로 업무가 중복되는 관리들을 줄여 재정에 도움을 주고, 둘째로 행정 절차를 간결하게 하여 효율적으로 만들며, 셋째로 지방관이 어느 한두 고을만을 편애하는 현상을 막아 혼란을 줄일 수 있고, 넷째로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낮은 직위에 있던 관리를 새로 임용하여 중임을 맡길 계기를 만들며, 다섯째로 관리들의 유능함과 무능함을 평가하는 일관된 제도를 병행하여 보다 청렴하고 올바른 정치 체제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등의 근거를 제시했다.

하후현은 이 과정에서 군의 태수를 제거하고 대신 자사만을 임명하여 지방행정 권력을 자사에게 몰아주는 형태를 구상했는데 이는 어느 한 관직에 권력을 몰아주는 형태상 한 관직에 권력의 쏠림이라는 부작용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후현이 군의 태수를 폐지하자고 한 건 아니었다. 하후현은 지금의 군수가 관할하는 범위는 대체로 주와 같으며, 이 양자는 중복될 필요가 없기에 현재의 군수는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한 후, 군의 태수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군과 현을 병합하고, 현리로는 청렴하고 선량한 자를 많이 선발하여 임무에 임하게하며, 1만 호의 현을 다스리면 군수의 이름을 주고, 5천 호 이상을 다스리게 하면 도위의 이름을 주며, 5천 호 이하를 다스리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처럼 현의 영장으로 하고, 작은 현의 장관인 장 이상은 공적에 따라서 자리를 옮겨주고, 능력이 있으면 승진하고 다스리는 곳도 그에 따라서 확대시키라는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후현의 개혁 정책은 현 관료들의 사치스러운 풍조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황실의 법도를 옳지 못하다고 여겨 보다 검소한 예식을 도입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진다는 생각으로써 황실에서 먼저 검소함을 추구한다면 그 아래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허례허식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 권력의 지방 분산에 대해서 건의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는 하후현의 열정적인 정책 건의를 받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관리를 심사하여 적임자를 선발하자는 의견과 중복되는 관직을 생략하고 복식제도를 개혁하자는 의견은 모두가 썩 좋은 것이오. 예절에 있어 마을에서는 본인의 행적을 품평하고, 조정에서는 각급 관원의 일을 고찰하게 하는 것은 그 기본적인 취지가 그대가 나타낸 바와 같소.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중간의 시대에서 (제도를) 이어받아 실시한 이상, 다른 제도로 갑자기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오. 진(秦)나라 때는 자사(刺史)가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군수(郡守)와 장리(長吏)만이 있었소. 한(漢)나라 때 처음으로 자사를 두었지만, 군(郡)에 대하여 단지 여섯 개 항목에 대해 사찰하는 정도일 뿐이었소. 그래서 자사의 일을 전거(傳車)에 비유하였고, 그에 속한 관리가 종사(從事)로 불렸던 것이오. 자사에게는 일정한 부서나 관청이 없었으며, 거기에 속한 관리들 또한 정식 관원이라고 할 수 없었소. 이후 오랜 시간의 발전을 거쳐서 정식으로 관사가 되었을 뿐이오.

옛날 (전한 시대의 학자) 가의(賈誼) 역시 복식제도에 대해 걱정한 적이 있었고, 한나라의 문제는 친히 소박한 검은 옷을 입었지만 상하의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뜻대로 옷을 입게 할 수는 없었소. 여기서 당신이 말한 세 가지 일은 더욱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나타난 후에야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오.
그러니까 사마의의 대답은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하후현의 식견을 높이 사고는 있지만, 내용을 보면 '지금 시대에는 그런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과연 정말로 사마의에게 이런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혹은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일 테지만(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사마의는 하후현 개혁의 타겟인 호족 성향이 농후한데다가, 그 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했기에 정치력을 발휘하기 위해 결국 자신의 가문을 비롯한 호족집단과의 긴밀한 연계가 필요했으므로 어느쪽으로 생각하던 호족 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에 손대는 것을 받아들이기 꺼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나마 개혁을 시도했던 조상 정권의 불안정성을 이유로 고평릉 사변을 일으키며 등장한 사마의의 사마씨 정권 자체도 근본은 호족정권으로서 중앙군과 중앙권력을 장악한 뒤, 구품중정제의 주대중정 신설을 통한 호족 포섭을 통해 호족들을 회유하여 호족체제 내에서 조씨와 하후씨를 몰아내고 자기 가문이 권력을 잡는 수준에 그쳤다. 그리고 사마의 자신이 그런 정책을 실행할 사람이 없다고 실토했듯이 후한 말부터 쌓여온 이런 사회적 모순들은 사마씨를 중심으로 한 호족집단을 주체로 건국된 서진이 당장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호족을 직접 누를 수 없으니 차선책으로 황족에게 군사력과 행정권을 동시에 부여하는 준봉건제로 회귀해 호족을 억누르라고 했는데, 결국 그 황족들이 폭주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해 난리가 난 끝에 50여 년 만에 강남으로 쫒겨난다.

또 하후현의 개혁은 결국 '호족체제에 의한 통치'라는 근본적인 문제에는 칼을 대기 힘들다는 한계도 존재했다. 구품관인법에 대한 책임 의식을 촉구한 것과 지방 행정 조직에 칼을 들이댄 것은 곧 기득권층의 등용문과 지방 이권에 대한 도전과도 같았지만 일단 하후현의 관리 선발기준이라는게 결국 기존의 효행, 덕행 같은 추상적인 기준을 강화하자 수준에 불과했고 여기에 관장에게 관리선발 맡기자고 하는데 애당초 중앙정계에 맞는 관리만을 선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기준, 일을 관장에게 맡긴다고 이런 기준이 잘 지켜지리라 보기도 어려웠다. 또 관리를 뽑은 이후에 그들을 잘 걸러내자는 얘기는 근본적으로 호족 인재풀에서 선발되는 관리 임용제도를 온전히 개혁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구품관인법의 문제 자체는 하후현 이후로도 수백년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거쳐서 조금씩 개선되어 나갔고 결국엔 선거제와 과거제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하후현이 시도했던 개혁은 분명 당시 위나라에서 시행되던 초기 구품관인법의 혼란스러운 운영방식을 지적하고 개선하려는 시도로서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한계는 분명 있었다 할 수 있겠다.

또 지방행정 체제를 간략화 하는 과정에서 특정 관직에 권력쏠림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 역시 하후현이 내세운 개혁안의 약점이 될 수 있었다. 물론 하후현의 군수철폐안은 기존의 군수와 자사가 사실상 권한과 범위가 겹쳐있으니 군수의 권한을 낮추어 중복행정을 피해야 한다에 가깝긴 하지만 이는 자칫 후한 말 영제가 목(牧) 제도를 부활시킨 것과 같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한나라 대 자사 자체의 성립도 이런 태수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에 있었는데 영제 때 다시 설치된 목은 주의 관원들을 감독하는 감찰관일 뿐 아니라 주 전체를 다스리는 수장으로, 목이 되면 한 주의 군사력과 인력, 재력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어 후한의 지방 자치화, 다르게 말하면 후한의 사분 오열을 가속화시켰었다. 군수를 폐하거나 그 권한을 줄이고 자사에게 권한을 몰아주게 되면 자칫 후한 말의 분열 마냥 정부권력의 지방 분산으로 인해 분열과 반란의 가능성을 부추길 수 있었다. 사마의는 후한 말 목에 권력이 집중됨으로서 생긴 문제를 직접 경험한 세대인 입장인 만큼 이 제도의 문제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면에서 보면 사마의가 완곡하게 이런 정책을 거절한것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셈이다. 루쉰은 강연에서 이를 지적하여 대권을 쥔 사마의는 지방의 친위 군벌을 토벌하고 중앙에서 자신들의 권력 강화에 매진하였으니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보았다.

어쨌거나 그렇다면 하후현은 왜 굳이 같은 파벌의 수장인 조상이나 하안이 아닌 다른 파벌의 수장인 사마의에게 이런 개혁안을 건의를 했을까? 어떻게 보면 이는 그만큼 같은 파벌일 망정 걍 친목질 잘하는 금수저 도련님에 불과한 조상과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나 관료로서의 실무적 역량은 별로 검증되지 않은 하안의 정치력을 낮게 봤다는 의미겠지만, 그렇다고 정적이자 개혁에 의해 피해를 입게될 기득권층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사마의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다소 모순적인 일이다. 그러나 사마의의 정중한 거절 편지를 받아든 후 다시 답장한 하후현의 편지를 보면, 그는 사마의에게 제법 기대하는 바가 컸으며 그만큼 크게 실망했던 심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만일 당신이 조당에서 새로운 법령을 제정한다면 매우 빠른 속도로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개혁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눈앞에 두고, 은근히 하려는 마음을 보류하고 그것을 명령 내리는 날이면, 아래에 있는 자들의 호응 또한 소리나는 곳을 찾아 울려오는 것 같을 것입니다.'라는 답장의 대목에서는 자신의 일파인 하안이나 조상이 아니라 오로지 사마의만이 자신이 생각한 위나라의 개혁을 진행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게 느껴져서 안타까울 정도다. 애시당초 사마의는 하후현 입장에선 죽은 누이의 시아버지이기도 했다. 후세의 우리야 사마의와 하후현을 다른 파벌이라고 확실히 구분지을 수 있다지만 당대의 하후현 입장에선 옛 사돈 어른께 부탁하는 정도로 봤을 수 있다.

이는 그만큼 하후현이 사마의라는 거물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마의 쯤 되는 인물이라면 '태생적으로 가진 자기 주변 카르텔에 때문에 전체적인 국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좌초시키는 전형적 정치인'이 아니라 '자신의 개혁이 국가의 대계에 무조건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 사마의는 그런 자신의 개혁 정책을 진정으로 밀어줄만한 우국충정의 인물'이라고 믿었음을 의미한다. 어찌보면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시궁창인 어느 한 개혁가의 순수한 믿음이었다라고도 볼 수 있고, 자신이 진행하려는 개혁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에 그로 인해 생길수 있는 문제점을 경시했으며, 스스로 개혁을 진행하고 실천에 옮기는 동력이 부족했던 하후현이라는 한 개혁가에 대한 한계로도 볼 수 있겠다.

또, 하후현은 자신과 함께 중호군을 지내는 등 동료로 인식하고 있던 사마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마의가 실권이 적은 태부로 물러난 것에 반해 그의 아들 사마사는 중호군의 자리에 올라 하안, 하후현 등과 함께 선거를 관장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이 쌓은 친분도 제법 깊었다. 일례로 하안은 당대의 성인 두 사람을 들어 하후현과 사마사를 지목했으며, 사마사도 의식적으로 두 사람과 교분을 맺어 일부러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후현의 누이동생 하후휘는 사마사의 아내였다. 비록 이 시점에서 하후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처남이고 매부 사이였다.

하후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장제가 호군으로 있을 때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1천 필(匹)을 바쳐야 하며, 백인독이 되고 싶으면 5백 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사마의는 장제와 가까워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1전(錢)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으며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가 사마사가 호군이 된 후 이런 폐단을 없었다. 즉, 당시 위나라는 '필(匹)'과 '전(錢)' 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예 대 사마지 등의 건의로 화폐를 재건하기 위해 오수전이 발행되었음에도 포백(布帛)의 화폐 기능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어쨌거나 이는 시대의 폐단을 실제로 개혁하는데 있어 하후현이 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한 예가 될 수 있다.

2.3. 고평릉 사변과 최후

이후 정서장군, 가절도독옹양주제군사가 되어 서방의 군사권을 쥐었다. 그리고 사마의를 비롯한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상과 함께 낙곡으로 가 과 싸우는 것에 찬성한 후 종군했다가 결국 흥세 전투에서 왕평비의한테 패하여 웃음거리가 된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사공 조엄이 죽었을 때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때 하후현이 나중에 도착하자 수백 명의 조문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고, 이 일로 사마씨 형제는 하후현을 미워하게 되었다. 하후현이 얼마나 당대의 명망가였는지 보여주는 일화이다. 다만 배송지는 "당시에 하후현은 10년 동안이나 관중의 도독으로 있었습니다. 하후상은 조상이 죽자마자 낙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소제기少帝紀>에 따르면 사공 조엄은 정시 6년에 죽었으므로 하후현이 조엄의 장례식에 갔을 리가 없습니다. 하후현이 당시에 조정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은 기(紀)나 전(傳)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부정했다.

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사마의에 의해 제거된 후 정서장군에서 해임되어 군권을 잃고 수도로 소환되어 대홍려, 태상에 임명되었다. 관직은 올랐지만 실권을 박탈하고 삼엄한 감시하에 놓여져 사마씨가 마음만 먹으면 제거될 상황이었다. 정촉호군 하후패는 하후현이 소환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촉한으로 망명을 택했으며 하후현에게 함께 귀순하자고 권했지만 하후현은 잠자코 명령에 따랐다. 남아있는 기록이 부실해 정치적 스탠스를 확실히 알 수 없는 하후패와 달리 사마의와 정책적으로 부딪친 바 있고,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확실한 조상의 사람이었던 하후현은 중앙으로 갔다간 당장은 아니더라도 제거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럼에도 소환에 응한 것이나 뒷날의 행적을 보면 적어도 조씨 사직에 대한 충심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나마 사마의는 그의 아버지인 하후상과 사적으로 교분이 있기도 했고, 사마의 본인의 권위가 그 제갈량을 상대하는 등 수많은 군사적 업적으로 인해 신하들 중에서는 제일이었던 만큼 실권을 빼앗아 제압한 사람을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사마의만한 교분도 없고 군사적 업적도 없으며 사회적 명망은 오히려 하후현보다 못한 사마사나 사마소가 직위에 오르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5]

254년 황제 조방, 폐후 장씨, 황제의 장인 장집, 소삭, 악돈, 유보현, 이풍이 사마씨 제거를 모의하고 하후현을 끌어들인다. 하후현은 이 거사 계획을 전달받고 치밀하지 못하다고 지적했고 아니나 다를까 모의가 발각된다. 그나마 남아있던 위 황실 친위세력은 소멸한다. 하후현은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받고 나머지 친족은 낙랑군으로 쫓겨나게 된다.[6] 이후 황제 조방마저 폐위되고, 중앙과 연고가 없던 연소한 고귀향공 조모가 즉위하면서 사마씨의 권력이 더욱 굳어지게 된다.

이 일의 처리는 당연히 관청으로 옮겨졌다. 세어에 따르면 하후현은 정위의 관서로 인도되었으나 결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위 종육(鍾毓)이 직접 나서서 하후현을 심문하자, 하후현이 정색하며 말하길 "나에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오? 이제는 영사가 되어 사람을 다그치려 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내 대신 진술서를 작성하시오"라고 했다. 종육은 하후현이 명사로서 그 높은 절조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옥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끝내야 했으므로, 밤에 사실과 서로 부합하도록 진술서를 작성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후현에게 보여주었더니, 하후현이 그것을 보고 끄덕일 뿐이었다. 종육의 동생 종회(鍾會)는 하후현보다 어렸기 때문에 그와 교제할 기회가 없었다. 그날 종육은 종회를 만나보라고 했으나 하후현은 거절했다.

잡어에 따르면 이때 당시 종회는 옥에 갇힌 하후현을 희롱했다고 한다. 원래 하후현과 아무 교분도 없고 16세나 연하였던 종회가, 이제 사형을 눈 앞에 둔 그를 상대로 갑자기 오랜 친구마냥 껄적댔다는 이야기. 이에 하후현은 "종군 어찌하여 이러는가?"라고 거절했다는데 이때 형이자 진짜 하후현과 친분이 있던 종육은 눈물 범벅으로 조서 쓰고 있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하후패는 하후현에게 같이 촉한으로 도주하자고 했으나 하후현은 구차하게 적의 빈객이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하후패가 촉한으로 도주했을때 받은 대우를 생각하면 하후현도 도주했다면 후한 대접을 받았겠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하후패만 해도 유선에게 '하후씨는 우리의 외척'[7]이라는 식으로 대우를 받았고 거기장군 직위에까지 올랐으며 사후 바로 촉한에서 몇 명에게 주어지지도 않았던 시호를 받은 걸 생각하면 천하에 명망이 널리 퍼져 있던 하후현은 그보다 더한 환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촉한으로 도망쳐서라도 살아남으려 한 하후패와 달리 하후현은 조상이 실각한 후 만사를 체념하여 생존에 대한 욕구까지 내려놓았고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후현은 저자에서 참형을 당하면서도 안색을 바꾸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아무 일도 없던 듯이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여섯이었다.

저작으로 시사의(時事議), 악의론(樂毅論)[8], 황윤부(皇胤賦) 등을 남겼다.

3. 야사

하후현은 당대의 명사이자 인품과 학식, 외모[9]가 뛰어난 인물이었던 만큼 그와 같은 편이 아닌 정적들 가운데서도 그를 흠모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많은 일화나 그에 대한 야사가 전하고 있다.

이원에는 하후현의 죽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후현이 사마사에게 죽은 후 친척들이 제사를 지내주었다. 제사 도중 하후현이 나타나 제사상 머리에 앉아 잘려진 머리를 옆에 놓고 목구멍으로 음식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방금 옥황상제에게 청하여 사마사에게 후손이 없게 했다고 말했는데 그 후 정말로 사마사의 후손이 없었다고 한다. 원혼지[10]에 따르면 여기에 추가로 얘기가 더 붙는데 영가의 난 때 어느 무당이 사마의를 보았는데 사마의가 울면서 말하길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조상, 하후현이 원한을 하소연해 한풀이를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어림에 의하면 하후현이 위나라 황제를 따라 어릉에 참배하러 가 소나무와 측백나무 아래 배열해 서 있을 때, 폭우가 쏟아져 나무가 벼락에 맞는 바람에 관이 그을려 망가졌다. 좌우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놀라 엎드렸지만 하후현은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어람에는 명제 조예가 하후현과 자신의 처남 모증을 함께 앉게 했더니 사람들이 갈대(모증)에 옥수(하후현)가 기대었다고 하였다.

속담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사마사가 하후현을 주살하려고 할 때 뜻을 정하지 못해 숙부 사마부에게 하후현에 대해서 "나의 재주로 족히 (하후현을) 제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마부가 조엄이 자식의 장례를 치를 때를 언급하며 "네가 거기에 왔을 때 좌중의 절반만 일어섰지만 하후현이 왔을 때는 전부 일어섰다, 너는 하후현보다 못한 거 같다"라고 했다. 사마사가 이를 듣고 하후현을 주살했다.

4. 삼국지연의

정사와 마찬가지로 사마사조방을 우습게 보니 조방이 서러워서 장집, 이풍, 하후현에게 혈서를 준다. 여기서 하후현은 신의 하후패가 사마 형제의 횡포로 촉으로 도망갔다며 그들을 죽이면 형도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11][12] 궁궐을 나가자마자 사마사에게 들켜 하후현은 주먹으로 저항하다 체포된다. 후에 저잣거리에 처형하기 위해서 끌려나갈 동안 계속 사마사의 욕을 하니 얻어터져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빨이 다 나간 뒤라고 하며 그 뒤 장면이 폐후 장씨를 죽이는 장면이라 조조복황후를 죽일 때의 장면과 오버랩시키는 시가 나온다.

5. 평가

일찍이 수재로 이름났고 학자로서 학식이 뛰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정파의 하안처럼 현실과 유리된 유약한 책상물림 서생이 아니라 현실 개혁 정치가로서도 충분히 능력을 갖췄다. 중호군 시절 그가 천거한 인사들이 모두 준걸로 인정받아 상당수가 고위직에 올랐다는 기록이 남은 걸 보면 정치가로서의 자질 또한 검증됐다. 또한 정국에 주어진 문제점을 정확히 집어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식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안이 완벽한 대안이라고 보기엔 어려웠고 오히려 폐단을 부를 수도 있었으며 또한 그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추진력 혹은 권력 정치적인 면모(정쟁이든 군사적 역량이든)가 모자랐다. 구상력에 있어서 그는 자신의 식견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개혁정치를 하려고 애썼으나 이런 면모는 하후현의 뼈 아픈 단점이었다. 이는 그의 매부이자 한때의 동지, 그리고 최후에는 적이 되어버린 사마사와는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만약 그와 함께 했던 조상 일파 가운데 하후현의 이런 단점을 보완해줄 인물, 하안과 하후현이 입안한 개혁안의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며 같이 고쳐나가고 이를 관철할 역량이 있는 중량감을 갖춘 거물이 있었다면 하후현도 자신의 뜻을 널리 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금수저 도련님들 혹은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학자 성향의 인물들만 포진된 조상 일파엔 그런 인물이 없었다. 정말이지 하후현의 파트너가 조상이 아니라 조상의 아버지인 조진이었다면 조위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준급의 군재와 두터운 인망, 충성심, 정치력을 겸비한 조진이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면 최소 하후현이 입안한 여러 개혁정책들을 시도라도 해봤을 공산이 크다.

사실 조상이나 하안 역시 자신들의 그런 한계를 절감하고 카리스마와 추진력을 갖춘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를 자신의 일파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하후현 역시 사마의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개혁안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사마의라는 조위 최고의 거물이 우국충정의 마음을 갖고 당파를 초월해 조상 일파와 협력해 조위의 폐단이 어느 정도 수정됐다면, 후일 서진의 비참한 말로와 오호십육국시대 도래로 인해 중화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질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러나 당시 정세로 보면 군웅할거로부터 위촉오 3국이 세력 확장과 오랜 전쟁,살상으로 중국 자체가 피폐해진데다가 이미 후한 말 당고의 금 사건 때부터 중앙정부는 있으나 마나 한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로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간 통에 중앙 권력의 통치력이 급감한, 위촉오 중앙 권력보다 거대 호족사회가 장악한 인구가 몇 배나 많았고[13], 호족의 우두머리 격인 사마의조차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당대의 현실을 일부 중앙 개혁 세력의 분발 정도로 극복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6. 미디어 믹스

6.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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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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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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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4

다른 능력들은 죄다 그저 그런데 정치력 하나만은 독보적으로 뛰어나다. 양습, 두기, 유복보다 훨씬 높은 정치력 90대 초중반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 서촉사상 중에서도 제갈량만 하후현보다 확실히 뛰어날 뿐 장완, 비의와는 엎치락뒤치락하고 동윤은 확실히 하후현보다 뒤떨어진다. 후기 장수들 평가가 박한 코에이임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능력치. 하후상을 등용하는 이유는 하후현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이 나올 정도. 문앙이 후반 시나리오의 무력 본좌라 한다면 하후현은 후반부의 정치력 본좌라 할 수 있겠다.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3에서는 범용얼굴을 달고 나오는 주제에 단 둘뿐인 90대 능력치 보유자다.(다른 하나는 육항.) 육지 31, 수지 15, 무력 43, 지력 79, 정치 92, 매력 72에 야망 3, 운 6, 냉정 11, 용맹 8을 달고 등장하며 253년에 하후상의 아들로 출생한다. 하후상이 별볼일 없는 잡장이어도 하후현을 얻기 위해서 갖고 있으면 좋다. 근데 하후현은 209생인데 이 게임에서는 출생년도가 226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9/무력 44/지력 80/정치력 94. 제사, 조영, 고무를 가지고 있다. 정치 떼고 봐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나쁘지 않은 모사다. 모략계 병법이 없는 게 문제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3/무력 39/지력 77/정치력 94/매력 64인데 특기는 농업, 기술 꼴랑 2개다. 그나마 정치는 처음 등장하는 출사표 시나리오에서도 고옹, 비의와 함께 공동 7위이므로 후방에서 내정요원으로 굴리다가 5품관이상이면 태수로 임명하는 것이 좋다.[14]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4/무력 39/지력 75/정치력 92/매력 66로 비의와 함께 정치 공동 9위다. 특기는 명성으로, 다른 명성 보유자들이 최소 매력 85를 찍는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낮은 매력치라 할 수 있다. 기본 능력으로는 특기를 잘 살릴 수 없으므로 PK라면 능력연구로 매력을 좀 올려주도록 하자.

삼국지 12의 능력치는 지력이 1 상승하고 매력이 없어진 것 이외에는 전작과 동일하다. 여전히 비의와 함께 정치 공동 9위다. 전장에 내보낼 일이 없던 전작과 달리 전법이 총맹사(궁군병격)로 바뀌어서 일단 전장에 나갈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러스트는 사마사에게 들키자 주먹으로 저항하기 위해 준비하는 포즈. 사실 풍모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은 만큼 12보단 11의 일러스트가 더 사실에 부합할텐데 일러스트에서 스토리텔링을 부여한 때문에 괜히 바꿨다는 인상을 지우긴 어렵다.

삼국지 13에서는 항상 90대를 찍던 정치가 86으로 하향되었다. 전체적으로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54/39/76/86이다. 그러나 여전히 높은 편이고, 문화 7이 있어서 내정에서는 정치력을 충분히 살릴 수 있으며, 설파 5, 교섭 3, 언변 6이 있어 군락포섭에도 쓸 수 있다. 전수특기는 문화이며 전법은 아군의 방어와 사기를 올려주는 수비지휘로 나름 괜찮은 전법이나 하후현의 전투 능력치가 낮고, 특기마저 하나도 없기에 전장에 나갈 일이 없다. 하지만 약소세력이라면 필수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삼국지 14에서는 일러스트가 오른손을 올리면서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으로 변경되었으며 정사에서 언급된 미남이라는 설정답게 외모가 다시 환골탈태했다. 통무지정매 순으로 54/39/75/92/65로 정치력이 6 상승해 다시 90대로 복귀했지만 지력이 1 떨어졌다. 개성은 명성, 교화, 능리, 인맥, 학자,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진흥 Lv 5, 진형은 학익, 전법은 혼란, 고무, 친애무장은 관구검, 이승, 이풍, 장집, 제갈탄, 조상, 하안, 혐오무장은 없다.

여담이지만 삼국지 시리즈로 하후현의 존재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뭐야? 왜 이렇게 정치가 높아? 하면서 위키를 찾아보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한다. 물론 당대의 이름값으로는 충분히 받을 만한 능력치이지만, 연의에서는 제갈량 사후 흥세전투 등은 물론, 특히 위나라와 오나라의 정세 같은 건 생략될 때가 많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15] 하후현의 장절한 죽음은 연의에서도 묘사되긴 하지만 그 때쯤엔 독자들도 이미 건성건성 보고 있을 시점이라...

6.2. 삼국전투기

마블 코믹스불스아이로 패러디 되었다. 낙곡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백발백중의 능력자인 듯 보였으나 사실 핀트가 조금씩 계속 어긋나는 스타일이라고 서술됐다.

삼국전투기의 하후현은 코에이 테크모의 삼국지 시리즈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응이 어려운 캐릭터인데 삼국지 시리즈의 하후현이 정치력만 독보적으로 높은 것에 비해 여기의 하후현은 전투 장면만 나오기 때문이다.

전투외편 2편에서 처음 등장. 제갈탄과 같이 과거 면직됐던 인물이지만 친구 조상이 출세하여 대장군이 되면서 다시 관직 생활을 하게 됐다고 언급된다. 다만 첫 등장인 전투외편 2편에서는 대사가 한 마디도 없었다.

낙곡 전투 편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등양의 제안으로 한중 공략군의 사령관이 되었으며, 사마소를 공략군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고 한중 공략에 나섰다. 이후 기산, 당낙도(낙곡), 자오도의 세 방향에서[16] 촉을 압박하기로 정한 뒤 하후현 본인은 조상과 함께 당낙도를 통해 이동했다.

고생고생하며 이동하여 흥세산에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거기서 하후현과 조상 일파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진작에 흥세를 점거한 유민이 곳곳에 세워 놓은 촉의 깃발들이었다. 하후현을 이를 보는 순간 속으로 "엿됐다..."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험악한 산맥 위에서 막고 있는 촉군을 뚫을 방법이 없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국 하루하루 시간만 흘러갔다. 그렇게 하후현이 스턴 상태에 빠진 동안 촉군에 간간히 기습당하고, 중신들이 서로의 탓을 하는 진흙탕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하후현은 마음을 정하지를 못했다.

보다못한 사마소는 그냥 퇴각할 것을 제안하지만 하후현은 분명 방법이 있을 거라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때마침 사마의가 보낸 서신이 도착하자[17] 그제서야 퇴각을 준비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촉군에게 포위당하고 엄청난 손실을 입으며 대패하게 된다. 작가는 이를 막다른 길에서 주저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결과라고 서술하며, 조조 등과는 다른 하후현의 그릇이 위군을 몰살로 몰고 갔다고 언급했다.

결국 전투외편 3편에서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천하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다고 언급된다.

국산 전투 편에서는 관직상으로는 낙곡에서의 대패 이후에도 변함없이 정서장군으로 대촉방면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으나 고평릉 사변을 계기로 그가 중앙으로 불려가면서 하후패가 촉으로 야반도주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적도 전투 편에서는 낙곡에서의 실패 때문에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고평릉 사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조상과의 관계 때문에 여러모로 제약을 받았기에 불만을 가졌다고 언급되었다. 이풍 일당은 그 점을 캐치하여 하후현을 자신들의 반란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하후현은 모략과 연이 없던 그들의 단순무식한 계획을 보고 너무 단순하여 뭐라고 대답할 방법이 없다고 답신을 보냈다. 이후 이풍의 난이 발각되며 하후현도 연루되어 잡혀들어왔고, 죄를 인정하라는 종육의 말에 본디 심문을 담당하는 영사가 따라 있는데도 정위가 직접 나섰다는 건 이미 죄를 부여할 생각이기에 그런 것 아니냐며 담담히 죽음을 선택했다. 작가는 이에 그 최후는 절개와 지조가 넘치는 선비의 모양이지만 결국 실속은 끝까지 없었다고 평했다.

6.3.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6에서 '사마사 습격'에 등장. 스테이지명 그대로 사마사를 습격하나 사마소한테 털려 사마사 암살에 실패한다.

진삼국무쌍 7에서는 고평릉 사변에서 미리 처리된 걸로 된다.

진삼국무쌍 8에서는 흥세전투에서 조상에게 후퇴하도록 전언하며 사마소의 호감을 사나 7편과 마찬가지로 고평릉 사변을 정리하며 죄가 없음에도 처형돼 하후패가 촉으로 망명할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클론 무장임에도 꽤나 개념있게 등장했기 때문에 하후패가 '사마사 하는 짓 보니까 나도 이러다가 죽겠네...'이러면서 촉으로 망명한데 지대한 원인을 끼친 셈. 작중 다른 진나라 인물들도 '사마사의 행보를 보니까 하후패가 망명한것도 이해는 간다.'며 말하는걸로 확인 사살.

6.4. 84부작 삼국지

조방의 밀서를 들켜서 이풍,장집과 함께 처형 당하는 것은 동일하나 본작의 사마사는 철저한 악인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사마사가 직접 하후현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모습으로 나온다. 대군사 사마의에서의 둘의 관계와 대비되는 부분

6.5. 대군사 사마의

조비 사후를 다루는 호소용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위나라에 충성하고 모반을 용서치 않는 충신 중의 충신으로 등장. 연출 때문인지 시간보정이 됐고 사마의가 살아있을 때 조방의 성지를 받고 습격 계획을 세웠으나 들키게 되고 처형당한다. 자세한 건 하후현(대군사 사마의) 항목으로.


[1] 《위씨춘추》에는 '泰初'다.[2]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연의 아들로 바뀌어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엄연히 하후상의 아들이다. 비슷하게 호적이 바뀐 케이스로 하후무가 있다.[3] 관구검, 문흠은 권력싸움이지 절대 충심이라 볼 수 없고 제갈탄은 상충되는 기록이 있어 명확하게 진의를 알기 어렵지만 관구검-문흠의 난 때까진 사마씨 정권에 상당히 기여했던 인물이며 를 끌어들였다는 점이 걸린다. 흔히 조위의 마지막 충신이라 일컬어지는 사마부는 조위를 위해 한 거라곤 조모가 죽자 운 거 밖에 없다. 실제로 하후현 사후에는 조씨나 하후씨 중 조위 황실에 충성하는 거물급 인사는 없어지게 된다.[4] 진군이 만든 그것으로 구품중정제라고도 한다.[5] 아이러니하게도 하후현을 마지막까지 구해주려 한 것은 다름아닌 사마소였다. 하지만 훗날에 조모가 시해됐을 때 사마부가 가식적으로 눈물을 흘린 것처럼 사마소도 형을 위해 특유 낯짝 두꺼운 사마씨 퍼포먼스를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6] 아이러니하게도 촉한으로 망명한 하후패의 친족들도 낙랑군으로 이주당한다. 하후 가문 낙랑군 정모[7] 유선의 황후의 어머니가 바로 하후연의 조카딸 하후씨이다.[8] 전국시대연나라 명장 악의에 대해 논한 글이다. 왕희지가 이 글을 옮겨 적었는데 그 서본은 서예사에 매우 중대하게 여겨지는 자료다.[9] 세설신어에서 하후현에 대해 '마치 해와 달을 품은 듯 낭랑하다(朗朗如日月之入懷)'라는 문구가 있는데 '日月入懷'가 자체발광 미남을 뜻한다.#[10] 원혼지라는 건 육조시대 안지추가 지은 책으로 이 책의 이야기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의 복수로 인한 권선징악'이라는 구조이다. 삼국시대에서는 하후현, 왕릉 외에도 제갈각 등의 이야기가 있다.[11] 정사에서 하후패는 하후현의 아버지 하후상과 같은 항렬이므로 하후현에게는 아저씨뻘이 된다. 족보 뿐만 아니라 나이로 봐도 하후패가 최소 22년이나 연장자이다.[12] 하후패의 진짜 동생들인 하후위·하후혜·하후화 등은 형이나 하후현과는 달리 끝까지 사마씨 정권에 충성하며 잘먹고 잘살았다.[13] 물론 촉한은 특유의 건국 정체성과 유비-제갈량으로 이어지는 정계 라인이 중앙 집권화의 완성을 이뤄냈기 때문에 위나 오에 비해서는 더 나은 상황이었다.[14] 삼국지 10에서 태수를 위임으로 놓았을 경우 정치력이 높을수록 태수가 부지런히 일을 하기 때문에 하후현은 적 침략이 없는 후방도시의 태수로 적격이다.[15] 강유의 북벌과 촉의 멸망까지는 자세히 다룬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제갈량 사후 유선이 암군 노릇을 하다가 촉이 위에 멸망하고, 사마염이 재위를 찬탈해 위를 멸하고 진을 세운 뒤 오를 멸했다는 내용으로 간략히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16] 원래 야곡도도 있었지만 위연이 잔도를 태워먹어서 사실상 사용할 수 없는 루트가 되었다. 덧붙여 당낙도는 출구(위군 입장에서는 입구)가 대 촉본부인 미성과 장안 사이라 위의 남벌 루트로는 그런대로 낫지만 촉의 북벌 루트로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언급된다.[17] 서신의 내용은 곧 적의 원군이 들이닥칠 것이고 퇴로가 막히면 몰살이니 어서 빠져나오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