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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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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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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Sanguozhi Yanyi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파일:Peach_garden_ceremony.jpg
▲ 삼국지연의의 삽화(1591년)[1]
<colbgcolor=#980000><colcolor=#D4CD99> 다른 이름 삼국연의(三國演義)[2]
저자 [[명나라|
大明
]] 나관중(羅貫中)
공개 원말명초[3]
언어 중국어 (백화문)
종류 소설
장르 역사 소설(歷史小說)
배경
시간
CE 184년 ~ 280년
  (후한 영제 ~ 서진 무제)
공간
중국중원, 강남, 서촉 등지
등장인물
분량
회수
120회
권수
6~12권 (한국어 단행본)
출판사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RHK코리아[4], 창비[5], 글항아리[6], 현암사[7], 비봉출판사[8], 은행나무[9], 바른번역[10]
2차 창작 영화, 드라마 등 다수 작품 존재

1. 개요2. 외국어 표기3. 특징
3.1. 촉을 옹호했는가?3.2. 수많은 서적민담의 집대성3.3. 형성에 관하여
3.3.1. 판본의 흐름3.3.2. 가정본 ≠ 나관중본3.3.3. 모종강본
3.4. 한족 민족주의를 담은 서사인가?3.5. 비극적 성격
4. 줄거리
4.1. 회별 구성4.2. 주요 사건들
5. 작품과 관련된 말들6. 일관성이 없는 부분 및 역사적 오류7. 조선전래 및 유행8. 번역
8.1. 번역본8.2. 뒷심 부족
9. 관련 작품10. 관련 고사성어11. 여담12. 관련 문서13. 외부 링크1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4세기소설가 나관중의 저술로 시작된 적층적인[11] 역사소설.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고전 소설로 이른바 중국사대명저와 중국사대기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동아시아권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삼국지통속연의라고도 한다.

2. 외국어 표기

<colbgcolor=#ddd,#222> 언어별 명칭
한국어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영어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프랑스어 Les Trois Royaumes
스페인어 Romance de los Tres Reinos
러시아어 Троецарствие
중국어(간체자) 三国演义 (Sānguó Yǎnyì)
아랍어 رومانسية الممالك الثلاث
광동어 三國演義 (saam1 gwok3 jin2 ji6)
마인어 Kisah Tiga Negara
몽골어 Гурван улсын үлгэр
베트남어 Tam quốc diễn nghĩa
일본어 三国志演義 (さんごくしえんぎ)
중국어(번체자) 三國演義 (Sānguó Yǎnyì)
태국어 สามก๊ก
페르시아어 رمانسه سه پادشاهی
히브리어 רומן שלוש הממלכות
힌디어 तीन राज्यों का रोमांस
그리스어 Το ρομάντζο των Τριών Βασιλείων
네덜란드어 Roman van de Drie Koninkrijken
독일어 Die Geschichte der Drei Reiche
스웨덴어 Sagan om de tre kungarikena
이탈리아어 Il romanzo dei Tre Regni
튀르키예어 Üç Krallığın Hikâyesi
포르투갈어 Romance dos Três Reinos
폴란드어 Opowieści o Trzech Królestwach
라틴어 Historia Trium Regnorum
에스페란토 Tri regnoj

3. 특징

[ruby(話說, ruby=화설)][ruby(天下大勢, ruby=천하대세)] [ruby(分久必合, ruby=분구필합)] [ruby(合久必分, ruby=합구필분)].
대저 천하의 대세란 오랫동안 나뉘면 반드시 합하게 되고, 오랫동안 합해져 있다면 반드시 나뉘게 된다.
중국사에서 후한 말~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 중화권에서는 역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를 뚜렷하게 구분하나, 일본과 한국에서는 삼국지라는 이름이 문맥에 따라 역사서를 가리키기도 하고 소설을 가리키기도 하는 혼란상이 있다. 이쪽은 주객전도격으로 삼국지라는 이름이 삼국지연의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역사서는 구별하여 정사 삼국지라고 부른다.
晉平陽侯陳壽史傳, 後學羅貫中編次.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남긴 역사 전기를 후학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
삼국지연의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첫머리의 글. 삼국지연의는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책인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책이라는 사실을 극명히 알 수 있다. 연의(演義)라는 말 자체가 "사실에 내용을 보태서 재미나게 설명한 이나 창극"[12]이라는 뜻이다. 즉, 제목을 의역하자면 '역사 기반 소설 삼국지'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삼국지연의는 역사책이 아니다. 역사 연구자라면 정사 삼국지자치통감, 후한서, 진서 등 정사서를 일차적인 자료로 삼고, 연의는 참고 자료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삼국지연의는 후대 사람들이 후한 시대 역사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엿보는 문화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고 무엇보다 현대인이 보아도 재미있는 픽션이기에 역사에 대한 흥미 유발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공이 크다.[13]

삼국지연의만 읽으면 그 시대에 유독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기 쉬우나, 연의의 내용만 주목받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다. 중국이 난세가 되면 그 정도 숫자의 인재들은 항상 나타났다. 물론 청나라의 고증학자인 조익[14]의 의견처럼 50년 남짓되는 시간에 많은 숫자의 인재가 몰려서 '인재 밀도'는 다른 시대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15][16] 물론 역사학이라는 관점에서 삼국시대가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시대는 아니었고, 삼국시대만 특별히 더 대단한 인물들이 활동했던 건 아니므로 과도한 찬양은 분명 경계해야 하지만 무조건 별 볼 일 없는 시대, 별 볼 일 없는 인물들이란 시각도 지양해야 한다는 시각인 것이다. 또한 나관중은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1천 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나관중이 당시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의 전반적 분위기는 후한 말 당시의 느낌보다는 원나라 말기의 느낌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나 관우가 송대 이후에나 등장하는 청룡언월도를 들고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나라 말기쯤 되면 중국에서는 민중 봉기가 크게 일어나면 보통 규모가 수십만 명 정도였다. 그야말로 대륙의 스케일이다.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이와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로 동양 최고의 고전이자 필독 도서로 인정받는 소설이며[17][18], 그 때문에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이 많음에도 정사 삼국지와 연의를 헷갈리는 이가 많을 정도다. 나관중 이전에도 삼국지 이야기는 인기가 많았고, 그걸로 벌어먹고 살았던 인물도 많았다. 그 사람들의 대본을 묶은 것이 바로 삼국지평화.[19] 정사를 뼈대로 하되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담이나 설화등을 채용하여 재미의 추구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대략 7할의 사실과 3할의 허구라는 청나라 학자 장학성(章學誠)의 평이다. 관우 신앙의 기폭제가 되었고 촉한정통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현대 삼국지의 이미지를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소설.

다만 이 모든 것을 나관중 개인이 정립시킨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미지를 채용했을 뿐. 삼국지연의의 기반으로 평가받는 삼국지평화에서도 이미 이와 같은 방향성은 확립되어 있었다. 한때 촉을 옹호하고 위를 비방한 움직임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찬찬히 음미하면서 읽어보면 오히려 나관중의 시각이 현대의 어설픈 이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리어 나관중은 촉을 은근히 비판한 것이 아니냔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 번역본에서는 대부분 누락되지만 원본에서는 각 화가 끝날 때마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결정적인 부분에서 끝내면서 "그다음을 알고 싶다면 다음 편을 보시오!"라는 문구가 나온다.[20] 이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이전의 삼국지평화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는 증거로도 이해되는데, 강사들이 다음번에 또 들으러 오라고 절단 신공을 구사한 흔적이기 때문. 이후의 연의 판본들은 모두 이 방식을 빌리고 있으며, 심지어 쌀과 소금의 시대라는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서양 작가가 이 문구를 빌려오기도 했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에서도 이런 문구를 빌려 썼다. 다만 황석영 삼국지에는 이 문구가 없고, 독자의 편의를 위해 생략하였다고 서문에 간단히 언급했다. 황석영 삼국지의 개정판에서는 살짝 다듬어서 나온다.[21]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일단 유비다. 유비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쭉 유비로 주인공을 이어오다가 유비가 사망하는 시점에서 그때까지 조연으로 나오던 제갈량으로 주인공이 변경된다. 또한 그 상태에서 주인공인 제갈량은 사마의와 겨루게 되고 제갈량이 사망하면 주인공 자리를 강유에게로 넘기게 된다. 강유는 종회의 반란 직후까지 주인공으로 활약하다가 사망하며, 소설로서의 삼국지연의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사실상 끝이 난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이렇게 변경된다. 사실 100년 가까이 되는 기간이 삼국시대의 흐름인지라 한 명이 주인공을 차지하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기도 하다.[22] 그리고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전까지의 초반부의 경우, 군사적 업적에서는 활약에 대한 기록이 적다보니[23] 이 부분에서는 조조가 주인공 수준으로 포커싱을 받는다. 이야기의 전개 흐름이 작품 전체의 주인공인 유비와 동등한 수준의 비중을 가질 정도다. 그런데 대부분의 삼국지연의는 정비석 삼국지라든가 고우영 삼국지라든가 대부분 제갈량이 사망하면 완결된다. 연의의 시작이 184년 황건적의 난이고 제갈량이 죽은 건 234년으로 딱 50년이다. 제갈량 사후에 진이 삼국을 통일한 것이 280년이므로 실제로 제갈량의 죽음은 역사상에서 보면 중간 반환점 정도인 셈이다. 고우영 삼국지의 경우 제갈량이 사망한 후 사마염이 최대한 얌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유씨, 조씨, 손씨들을 비웃는 장면 하나가 끝이며 사마염이 중국 전토를 통일했다는 한마디만 나오고 완결된다. 본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이충호 삼국지는 그나마 제갈량 사후부터 서진 통일까지의 묘사가 건재한 편이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일본의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번역한 것이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문서를 참고.

또한 내용이 굉장히 방대하며 분량이 엄청나게 길어서 원문으로 약 80만 개의 단어로 쓰인 역사상 가장 긴 소설 중 하나이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삼국지연의는 역대 가장 쪽 수가 많은 소설 10위, 역대 가장 단어 갯수가 많은 소설 20위에 해당한다.출처 한국 번역본 기준으로는 대부분 기본 10권의 총합 페이지는 3,000쪽이 넘어간다.

3.1. 촉을 옹호했는가?

삼국지연의가 촉빠 소설이라는 설은 아무튼 송대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는 촉한정통론이 대세였고, 제갈량이나 관우는 유교적 충신의 모범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촉의 인물이 높게 평가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에 대해 일본의 동양사학자 가토 도루(加藤徹) 교수의 견해는 ‘남자’를 뜻하는 男(남), 漢(한), 士(사), 俠(협)의 예를 들며 男은 女의 상대로서 남자, 漢은 땀과 피를 흘리는 뜨거운 남자, 士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의 남자, 俠은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라면서, 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연의≫가 재미있는 것은 漢ㆍ士ㆍ俠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중 최고의 ‘협’으로 유비를, 이상적인 ‘사’로 제갈공명을 꼽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인은 역사에서 미학(美學)을 찾는데, 천하쟁탈전에서 이기더라도 왕조의 수명은 얼마가지 않으나 역사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의(義)의 미학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비와 공명은 죽을 때까지 완고하게 자신의 미학에 얽매인 인물이었다. 유비는 촉(蜀) 땅에 웅거한 뒤에도 협(俠)의 용병 정신을 유지했고, 공명은 사대부로서 사(士)의 미학을 관철했다. 유비와 공명은 최고의 협(俠)과 사(士)의 조합이었으며, 이는 후세만이 아니라 동시대 상대국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라는 대하드라마에서 이들이 주인공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24]

일단 실제 역사서와 비교해 봤을 때 촉한의 인물들에게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들의 행동을 미화하거나 업적을 부풀리는 대목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교의 기준을 정사에 맞춘다면 연의는 다분히 촉빠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이 사실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교의 대상을 원대 이전 시대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 단적으로 삼국지평화와 비교한다면 연의는 상당히 발전한 점이 많은 작품으로서 상대적으로 삼국시대의 세 세력을 균형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지연의는 단순히 유관장 중심의 통속적인 영웅물이던 삼국지평화 수준을 뛰어넘어, 군상극적인 특성을 가진 복합적이고 비극적 요소를 갖춘 '군웅물'로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거지만 삼국지연의란 작품은 본래 나관중이 그런 내용으로 써서 사람들이 그렇게 알게 된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에 나관중이 그런 내용으로 쓴 작품이다. 흔히 보이는 촉까들이나 '촉빠 나관중의 고의 왜곡' 같은 거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종종 잊고 있는(혹은 아예 모르는)것. 누가 왜곡을 해서가 아니라 애당초 그 작품이 태어난 땅에서는 민심 자체가 늘 촉한 쪽에 기울어 있었다는 이야기, 당장 삼국지평화의 묘사를 보면 연의는 그 시대 작품치고 다른 세력을 굉장히 우대한 작품이다.[25]

삼국지연의는 이전과는 달리 조조를 "단순하기 짝이 없는 평면적인 악당"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연의의 조조는 군사적인 재능과 뛰어난 지략을 갖춘 영웅으로서의 외관을 갖추고 있으되, 내면적으론 형식적인 충심을 지녔으나 그 밑으로 끝없는 야망을 품고 있고, 의외로 인정 많은 면을 지녔으되 자신을 위해 타인을 서슴없이 희생시키는 잔혹함을 동시에 갖춘 대단히 이중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조조는 이미 예전부터 악인으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정사 등에 표현된 그의 장점도 버리지 않고 표현했다. 조조가 죽는 장면을 보면 그의 과거의 악행의 응보를 받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조조 본인은 죽을 것 같자 신하들이 하늘에 제를 올려보자고 하자 "하늘이 정한 천명이니 제를 올려도 소용없다"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처첩들에게 스스로 살림을 해서 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조조가 죽고 난 뒤 삽입된 업중가에선 "지략도 뛰어나고 문장도 잘 짓고 부하들과도 사이가 좋고, 이만한 사람이 그냥 신하로만 있겠냐"고 얘기하고 무정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또 업중가의 마지막 구절은 죽은 사람 가지고 평하기 좋아하는 서생들을 "무덤 속에선 비웃는다"라고 얘기하며 끝난다. 즉, 단순 악역이라기엔 너무나도 당당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보통 외면의 재능이 있으면 내면으로도 좋은 품성을 가지고, 외면이 찌질하면 내면도 찌질하기 마련인 고대 소설에서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은 찾기 어렵다. 물론 당시에는 "겉과 속이 다른 간웅"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컸겠지만, 이런 묘사는 "유교적 도덕성"에 둔감해진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조조의 평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삼국지평화에서는 같은 장면이라도 조조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게 한두 장면이 아닌데, 일례로 관우가 유비를 찾아 떠나려고 하자 조조는 관우를 계략을 써서 잡으려고 하고, 헌제의 아들을 길가에서 참수시키는 등 완전한 악역으로 등장했다. 관우가 떠나자 진정한 충신이니 잡지 말라면서 공문을 보내고, 마지막에 비단옷까지 내려주는 연의의 조조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또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에서는, 조조를 제외한 위나라 인물은 지극히 비중이 적었다. 심지어 삼국지평화에서는 조조가 "나에게는 모사가 없다"라고 한탄하는 장면까지 있다. 사실상 창작물의 세계에서 위나라의 신하들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왠지 장료가 모사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연의에서는 순욱, 곽가 등의 위나라 측 인물에게도 어느 정도 존재감을 주고 있다. 의 경우도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에서는 단순히 손견이 잠시 출연하거나, 적벽대전에 이름을 올리거나, 관우의 죽음이나 이릉 전투에서 약간 등장하는 정도였지만, 연의에서는 오나라의 성립이나 멸망까지 잘 묘사하고 있다. 단, 손권 말년의 후계자를 둘러싼 삽질황실내부의 암투가 빠져버리고, 마지막 황제 손호의 막장 행각도 대충 넘어가 실제 역사보다 나아 보이게 되었다. 아마도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강남에서 일어나 천하를 차지한 명대에 쓰여진 소설이라 같은 강남 기반의 오를 까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삼국지는 군담소설이다보니 대놓고 쌈박질하거나 메인 플롯에 영향을 크게 주지 않는 만큼 굳이 다뤄야 할 필요를 못 느낀 나관중이 그냥 빼놓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삼국지연의를 보면 위나 오의 인물들이 명백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짤막하게나마 많다. 조조가 여포, 원소 등과 싸우는 부분이나, 손책이 강동을 정벌하는 부분이나, 혹은 합비공방전 등이 그러하다. 이런 부분에서 위나 오의 인물들은 각자 용기와 지혜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는 부분을 보여주고 있어 그전의 삼국지평화와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조가 원씨 집안을 꺾고 하북을 재패하는 과정은 뒤로 갈수록 유비 3형제가 거의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이후 삼국지연의를 각색한 많은 작품들이 짧게 줄이거나 통으로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삼국지연의는 이 싸움을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면서 조조와 그 모사들의 지략과 휘하 맹장들의 활약에 상당한 묘사를 할애하고 있다. 오나라가 멸망할 때 오의 승상 장제는 “지금 만약 임금과 신하들이 전부 항복하고 국난에 죽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면, 그 역시 욕된 일이 아니겠소?”라고 하며 비장한 모습을 보인다. 즉, 주인공은 촉이되 다른 세력도 최소한 자신들의 에피소드에서만큼은 주인공으로서 그리고 있다.

유비의 경우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는 조조에 버금가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며, 군략에도 뒤지지 않는 효웅으로 평가받는 데 반하여 연의에서는 전장에서의 활약은 전부 관우, 장비, 조운이 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전략적인 면은 죄다 제갈량의 뛰어난 지혜덕인 것으로 바꿔 놓아, 아무 활약이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는 제갈량이 기용되기 전의 승리조차 제갈량 기용 후로 슬그머니 옮겨 가며 공로를 빼앗겼다.[26] 게다가 툭하면 울거나 신세 한탄이나 늘어 놓아, 현대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찌질이로 보일 지경이다. 거기다가 정사에서는 유비군도 적벽대전에 참전했고(연합군 병력도 유비군 2만, 손권군 3만으로 별로 밀리지도 않는다) 주유의 남군 공략도 도와줬는데도 불구하고 연의에선 적벽대전은 강 건너 불구경하다 퇴각하는 조조군 뒷치기나 하고, 남군은 주유가 부상 입으면서 필사적으로 싸워 조인을 몰아내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성만 낼름 먹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손권이 계속 형주 돌려달라고 하는 게 정사보다 연의가 더 정당성있어 보일 지경이다.[27] 사실 유비는 적벽 전후로 서서, 제갈량이나 방통, 법정 등 양적, 질적으로 우수한 참모진들이 나타나 굳이 유비가 직접 전처럼 계략을 짜낼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참모진의 의견을 따르고 그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모범적인 군주상으로 탈바꿈한다. 결국엔 제갈량이란 캐릭터의 필요성과 카타르시스를 위해 변모한 바가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나관중유교수호전의 영향을 받아, 유비를 무보다는 문에 치중하는 유학의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잡은 데다가, '스스로 나서기 보다는 호걸들을 조정하는 역'인 수호전의 송강과 비슷한 인물상으로 그리려 하다보니 현대 독자들의 눈에는 찌질하게 보이게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28] 이렇게 인덕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비의 묘사는 팔이 길고, 귓볼이 두툼한 등 부처의 81상과 닮은 모습을 제법 보인다. 그러나 인덕이 강조되었다고 하지만, 근대 이후 유비는 중국인들에게조차 무능하지만 음흉한 인물로 여겨지니[29], 이렇듯 유비의 묘사는 소설을 위해서 많이 달라진 감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정리하면, 유불도 삼교의 조화를 중심으로 한 중국 정서에서 보자면 그들에게 가장 완벽한 군주는 , 임금이다. 즉 '무위의 치'[30] 군주는 자비로움과 포용의 태도로 모두를 감싸안을 뿐 마구잡이로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의 유비는 능력과 결단성도 뛰어난 편이나 이러한 면들이 연의에서는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전대의 한고제 유방과도 상당히 비슷한 경우, 유방 역시 정치적인 능력, 식견, 인용술, 야심, 군사적인 능력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초한지 등 창작물에서는 군림하지 않으며 한 발짝 뒤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부하들을 쓰는 모습만 강조되며 무능력하고 음흉해 보이는 것과 같은 경우다. 약간만 더 부연해 보자면 유비의 이런 캐릭터 정립은 시대가 지나면서 강고해진 촉한정통론이 유학 관점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유비 일당과 제갈량이 맨주먹으로 시작해 명분과 실리를 다 쟁취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줄타기하고 싸운 면모는 슬쩍 묻히고 유능한 선비 출신 신하(->제갈량)와 인덕 있는 군주 유비라는 이상적인 군신 관계 위주로 부각되어 가면서 생긴 일이기도 하다. 제갈량은 당대 이후로 최고의 재상이자 선비로서 치국의 근본을 안 인물이라며 사후에도 자국이나 적국에서나 칭송받은 인물이다. 당장 삼국을 통일한 서진의 초대 군주 사마염부터가 '야, 제갈량만 한 신하 어디 없냐?'라고 했을 정도에 제갈량이 남긴 팔진도를 장수들에게 학습시키는 면모를 보였고 서진 시기부터 시작해 많은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데다가 제갈량이 애당초 출사한 과정이라는 거 자체가 재야에 묻혀있던 '선비'가 '이상적인 군주'의 인정을 받아 등용되어 여차하면 니가 왕 하란 식으로 '전적인 신임'을 받고, 마음껏 원 없이 자신의 이상과 능력을 펼치며 후대에도 명성을 날린다는 이상적인 얘기고[31] 여기에 그렇잖아도 북벌을 하고 싶어 안달하던 송나라 이후 한족의 분위기까지(한국으로 따지면 병자호란 이후 사회 분위기) 영합하게 되면 선비들한텐 제갈량이야말로 꿈의 화신 같은 게 된다.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은 당대 관직 진출이 좌절된 선비들이 주로 쓰던 것이었고 때문에 더 나아가 제갈량은 선비의 사표 중의 사표가 되어야 하고 그를 등용한 군주의 캐릭터 해석도 유가적인 이상의 극치인 군주 중의 군주다운 뭔가가 필요해지는 것으로 유비의 캐릭터 정립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32] 여기에 관우 신앙까지 겹쳐져서 '그 관우'가 섬겼던 유비라는 군주 자체가 더욱 이상화되는 과정은 덤이다.

단, 나관중의 원작에 모종강 부자가 주석을 달면서 점차 친촉/반위적인 내용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나관중의 관심이 "영웅 쟁패"였다면, 모종강 부자의 그것은 "권선징악"에 가까웠다.[33] 또한 루쉰이 정리한 차이점에 따르면 나관중 본은 촉에 불리하거나 덜 멋진 부분이 많다. 오랜 떡밥이던 "안량이 유비에게 관우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말을 걸려다가 살해당한다"는 것은 가정본중 마이너한 버전에서만 나오며 모종강본은 삭제되어있다. 또한 손부인이 유비의 패배 소식을 듣고 자살하는 것은 모종강본에서 추가된 것이며 심지어 나관중본은 제갈첨이 등애에게 항복할까 망설이는 부분까지 있다. 한마디로 나관중은 촉의 인물들도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약한 모습 등을 묘사했지만 모종강본에 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촉이 되는 것이다. 모종강의 인지도가 나관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나관중이 자신과 관계없는 부분까지 욕먹는 것이다.[34]

제갈량의 북벌도 촉이 크게 패한 건 1차 북벌 한 번밖에 없고 나머지 북벌에서 일어난 전투는 거의 다 이기거나 큰 피해없이 후퇴했는데 연의에선 진창에서 학소가 제갈량을 완벽히 발라버리고 사마의도 위수에서 한번 제갈량의 작전을 간파해 큰 피해를 입히는 걸로 바뀌었다. 정작 정사에서 진창 전투는 좀 찔러보다가 안 되니까 그냥 물러난 것에 가깝고 사마의는 전투로는 제갈량을 한 번도 못 이겼다.[35] 실제 제갈량과 사마의는 군대를 신중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다지 드라마틱한 전투 장면이 연출되지 않아서, 연의에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양측의 전공을 서로 부풀려 준 것이다. 또 연의에서 제갈량을 굉장히 천재적인 전술가로 묘사해 왔음에도 실제 제갈량의 북벌 전과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36], 사마의나 학소 등 위나라의 방어 사령관들도 만만치 않았다고 띄워주는 묘사를 넣어서 독자들을 납득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 나관중 이전의 삼국지인 삼국지평화 같은 경우는 역사 왜곡을 하면서까지 결국엔 촉한의 후예가 승리한다고 억지 해피 엔딩을 만들었다.[37]

끝으로 정사를 참고하면서도 진나라 사관이었던 진수가 차마 건들 수 없었던 사마씨의 찬탈이나[38] 기전체 사료의 특성인 뒤죽박죽한 부분들(예컨데 합비전투)을 나름대로 매끄럽게 정리함으로써 정사보다도 서술이 낫다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도 없진 않다. 당대에 이런 민담 수준을 뛰어넘는 고퀄리티의 역사 소설을 남길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지경이다.

3.2. 수많은 서적민담의 집대성

삼국지연의는 나관중이 순수 창작한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삼국지에 관하여 그때까지 알려진 서적, 민담 모음을 나관중이 하나로 엮은 것에 가깝다. 민담과 잡극 만이 아니라 정사 삼국지는 물론 후한서, 진서 같은 정사와 한진춘추, 자치통감, 영웅기, 화양국지, 한진춘추, 조만전, 강표전 같은 역사서도 삼국시대에 관한 내용이 조금만 있으면 연의를 집필하는데 모두 동원되었다. 나관중이 삼국지에 관해 모은 사서와 민담은 시대를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고 방대하다. 정사 삼국지에 없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은 전부 나관중의 창작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삼국지연의는 물론 정사 삼국지를 기초로 하여 쓰여진 건 맞으나, 세세한 에피소드는 별의별 출전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양수에 관한 이야기나, 조조가 장수를 공격하러 갈 때 물이 부족하여 매실이 있다고 계책을 생각해 병사들이 군침돌게 한 이야기, 조식칠보시 등등은 세설신어가 원전이고, 제갈량이 박망파에서 하후돈을 격파한 내용[39]은 제갈량박망소둔(諸葛亮博望燒屯)이라는 잡극이 원전이다. 도원결의는 삼국지평화가 원전이며, 관우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항복할 때 세 가지 조건을 내걸어 항복한 이야기도 삼국지평화가 원전이다. 마초가 조조와 싸울 때 조조가 붉은 옷을 벗고, 수염을 잘랐다는 이야기 역시 삼국지평화와 조조야주진창로(曹操夜走陳倉路)라는 잡극에서 먼저 나온 이야기다.

반동탁 연합에 소속 되어 있던 유비, 관우, 장비여포를 맞아 싸우는 삼영전여포 대목은 당연히 정사에 없는 내용으로 원래 삼국지평화에 유비, 관우, 장비가 여포를 상대로 쫓아내는 내용이 있으며, 원나라 시절 정광조라는 잡극작가가 쓴 호뢰관삼전여포(虎牢關三戰呂布)이라는 잡극에도 이 대목이 들어있다. 특히 여포가 방열, 목순, 무안국, 공손찬을 상대로 이긴 것 역시 나관중의 창작이 아니라 호뢰관삼전여포에 이미 나와있는 내용이다. 이를 모르고 본다면 단순히 나관중이 유관장 삼형제를 띄워주기 위해 여포와 싸워 이기는 내용을 넣었다고 잘못 알기 쉽다.[40]

다른 예를 들어보면 초선연환계 역시 삼국지평화와 잡극 금운당미녀연환계(錦雲堂美女連環計)가 원전이고, 적벽대전화용도에서 관우가 조조를 놓아준 것 역시 나관중이 각색하기는 했지만 원래 삼국지평화에 있는 내용이다. 이릉대전 이후 육손이 어복포에서 제갈량이 설치해둔 팔진도에 걸려 고생하다 황승언의 도움으로 빠져나가는 장면도 역시 나관중의 창작이 아니라 삼국지평화에 있는 내용이다. 주창도 삼국지평화에 이미 등장한 캐릭터. 이외에도 다른 서적과 민담에서 가져온 에피소드가 수없이 많다. 이를테면 계륵 같은 에피소드는 구주춘추, 손책우길을 죽인 에피소드는 강표전이 원전이다.

이처럼 당시까지 알려진 삼국지 관련 이야기를 하나로 엮은 것이 삼국지연의이며, 나관중은 원전이 있는 부분은 가능한 한 이를 인용하고 직접 창작한 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비중도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이런 민담들 대부분 촉한 측에 우호적인 내용이 많기 때문에, 삼국지연의는 정사보다 촉한에 우호적인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 촉빠 나관중이 정사를 왜곡하여 촉한에 유리하게 썼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조조가 칠성보도로 동탁을 암살하려 한 부분은 원전이 없는 나관중의 창작이다. 이것도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건 아닌데, 후한서에 오부라는 사람이 갑옷 안에 칼을 갖고 동탁을 암살하려 했으나 동탁이 힘이 세서 실패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나관중은 이것을 조조의 시도로 돌려서 한때나마 한나라의 충의지사처럼 묘사했고, 이런 점들이 삼국지연의의 조조를 평면적인 삼류 악당이 아니라 입체적인 매력을 지닌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관중이 단순히 알려진 이야기를 짜집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해로, 삼국지연의는 많은 서적과 민담이 인용되었지만 원전 그대로 가져온 경우는 거의 없고, 집필 과정에서 하나하나 각색하고 창작이 덧붙여졌다. 이렇게 편집되는 과정에서 너무 정사와 동떨어진 민담은 배제되었다. 황충에게 노장과 명궁의 캐릭터성을 부여한 것이나 방통의 연환계, 칠종칠금[41]의 구체적 내용 등 나관중이 직접 창작한 부분에서 창작가로서의 재능도 엿볼 수 있다.

3.3. 형성에 관하여

연의가 "민담"을 많이 인용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삼국지연의를 그 이전 시대의 삼국지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의외로 민담의 비중은 적고, 많은 부분이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창작 과정을 거쳐서 구성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본이 되는 삼국지평화의 내용 자체가 삼국지 연의의 총량 중 10% 수준이다. 마개조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사실상 재창작이다.

실제로 가정본(1522년의 판본) 삼국지통속연의의 서문을 써준 장대기는 나관중이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연의를 편차하였다고 적었다. 다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정사 삼국지를 직접 참조하였다기보다는 자치통감의 축약본을 직접적인 자료로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사 삼국지는 기전체라서 구조가 복잡하여 자료로 쓰기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편년체 형식인 자치통감이 이야기를 만드는 자료로서는 더 나았을 것이다. 물론 정사 자료를 참고를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정사 혹은 정사에서 인용된 사서에만 나오고, 자치통감에는 언급이 없는 일화들도 많을 뿐 아니라, 정사의 본문을 잘못 읽거나 혹은 필사본의 제작이 잘못되었을 때만 있을 수 있는 오류가 발견되기 때문이다.[42]
지난 원나라 시대에는 민간에 전해지는 역사를 바탕으로 평화를 만들어 이야기꾼에게 구연하게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오류가 많고 너무나 저속하여 교양있는 사군자들이 대부분 싫어했다. 그래서 동원 땅 출신의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신중하게 취사선택하여 편찬하고 삼국지통속연의라 이름했다. 그 문장은 심오하지 않고, 말투는 그다지 속되지 않으며, 사실을 기록하여 역사 본연의 모습에 접근했다. 독자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서문 / 부산대 삼국지문화기행 교재에서 인용.

오히려 삼국지연의 이후 시대에 발생하는 민담이나 파생 작품들은 대부분 삼국지연의에 기초하여 연의를 일부 변형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3.3.1. 판본의 흐름

이하 동국대학교 김동협 교수의 동양고전의 이해 (2015) kocw 강의자료#의 9,10차 과정에서 발췌.

진수삼국지, 배송지의 삼국지주를 역사적인 원문으로 보고 있다. 추가적으로 송의 여조겸(呂祖謙)이 엮은 십칠사상절(十七史詳節) 등의 영향을 받았음도 보인다.

문학적인 원류로는 당대의 변문, 송대의 설화인 평화(平話) 를 꼽고, 설삼분(說三分, 別題 三國志故事)이 인기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초한지보다는 복잡하고, 춘추전국시대만큼 복잡하지는 않다는 점을 꼽고 있다. 이렇게 원대에 원지치본전상평화오종(元至治本全相平話五種) 의 하나로 전상평화삼국지(全相平話三國志) 가 작성되었다. 위의 1/3은 그림, 아래로 2/3은 본문인 구성이며, 오종(五種)은 무왕(武王伐紂), 악의도제(樂毅圖齊), 진병육국(秦倂六國), 여후한신(呂后斬韓信), 삼국지의 다섯 가지이다. 여기에서도 이미 촉한정통론이 적용되어있음이 보인다.

그 뒤로 시간이 흘러 원말명초가 되면서 우리가 아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현존하는 판본은 가정본(嘉靖本) (한때 홍치본이라고 불렀음) 인데, 홍치갑인弘治甲寅(1494) 용우자(庸愚子)의 서(序)와 가정임오嘉靖壬午(1522) 수염자(修髥子)의 서(序)가 붙어있는 판본이다. 이 연의계열은 24권 240화나 12권 240화 구성이 많다. 강남 지역에서 주로 발행되었다.

명 만력제 10년~15년 (1582~1587년)에 주왈교본(周曰校)이 나왔으며#, 한국에 이 판본이 전래된것으로 보인다. #
비슷한 시기에 하진우본(夏振宇本) 이 있었으며, 하진우본과 주왈교본이 영향을 주어 아래의 오관명본(吳觀明本) 이탁오선생비평삼국지로 이어진다. 이탁오선생 비평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이 있으며, 여기에서 120화 구성으로 정돈되었으나, 이탁오 작품이라는 것은 위탁이다. 그와 별개로 모종강본으로 이어지는 120화 구성 자체가 중요하므로 삼국지연의의 분석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위의 연의와 달리 복건성 출신의 지전본(志傳本) 계통이 있다. 지전본 계통은 연의보다 시기적으로 늦게 나왔지만 오히려 고본형태를 더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가지고 있다. 지전본은 20권 240화가 대다수이며, 10권 240화 구성의 판본도 있다.
그 외에 지금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으나, 복건성과 강남 일대에서 수많은 삼국지 판본이 나왔으며, 이 중 복건성 판본이 영남대 도서관에 보존중이다. # 이 판본은 정작 현재 중국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꽤 드문 판본이다.

우리가 아는 명말청초의 모종강본, 모종강비평본 제일재자서 수상삼국지연의(毛宗崗批評本 第一才子書 繡像三國志演義) 가 있다. 이것은 모륜이 개편하고, 아들 모종강의 명의로 간행한것으로 보며, 강희18년(1679)년 완성된것으로 본다. 위의 역사에서는 이탁오 삼국지에서 이어진것으로 본다.

모종강본(毛宗崗本) 에는 순치(順治) 원년(1644)의 김성탄(金聖嘆)의 서문과 권두에는 〈성탄외서(聖嘆外書)〉라고 하여 김성탄의 비평문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는 위작(僞作)으로 보고 있다.

또한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 이나 #경매사이트 삼국지 판본을 보면 사대기서제일종 (四大奇書第一種) 으로 일종의 합본집으로 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명칭이 제일재자서(第一才子書)→관화당제일재자서(貫華堂第一才子書)→수상금비제일재자서(繡像金批第一才子書)→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삼국연의(三國演義)로 변화하게 된다.

가정본, 지전본, 모종강본은 판식(版式), 자구(字句)와 내용, 주(註), 삽입시가의 차이, 작품에 관우(關羽)의 셋째 아들인 관색(關索)이 등장하는가의 여부로 나뉜다. 참고로 관색은 연의계열의 가장 이른 판본인 嘉靖本(1522)과 지전계열의 가장 이른 판본인 葉逢春本 (1548)은 관색고사가 없다가 후대에 연의계열과 지전계열 모두에서 다시 등장한다. 관색 항목에 자세하게 기술되어있으므로 참고.

판식은 위에 기재되어있듯 24권 240화나 12권 240화 의 가정본/연의본/강남계열과, 20권 240화, 10권 240화의 지전본/복건계열이 있으며, 목차의 각 제목도 강남본은 7글자로 정돈되어있으나 지전본은 5~8자가 혼재되어 나온다. 복건계열의 이탁오가 120회를 도입하고, 모종강이 이를 이어받아 120회로 정돈되었다.

명대 판본이 30종, 청대 판본이 70개로 추정되나 1679년 이후에는 모종강본으로 통일되어 판본의 분류는 무의미하다고 봐도 된다. 모종강본이 나온 이후 복건계는 몰락했으며, 여기에 건양에 화재가 나서 진짜로 대타격을 입고 사라졌다.

3.3.2. 가정본 ≠ 나관중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삼국지연의 판본은 명나라 가정제 원년(1522년)에 간행된 《삼국지통속연의》(이른바 '가정본')이며, 오랫동안 나관중의 원본으로 알려져 왔기에 이를 '나관중본'이라고도 불러 왔다.

그런데 근래 연구에 의하면 가정본은 나관중의 원본이 아니며, 오히려 가정본보다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 《삼국지전(三國志傳)》 계열의 판본이 나관중의 원본에 가깝다.
14세기 원(元)나라 때에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중국의 첫 장편 역사소설 《삼국지》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필사본으로 유행되다가 16세기 명(明)나라 때에 인쇄본이 출간되자 수십 년 사이에 수십 종의 판본이 경쟁을 벌이면서 일약 슈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명나라 판본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정(嘉靖) 원년, 즉 1522년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관중 편(編)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 계열과 흔히 교열인과 출판인의 이름만 적힌 《삼국지전(三國志傳)》 계열이다.
《삼국지통속연의》가 글의 수준과 인쇄 상태가 비교적 우수해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것이 소설의 원조이고, 다른 판본들은 이 책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근래에 연구가 깊어지면서 결론이 바뀌었다. 필사본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있는 《삼국지전》 계열의 판본들이 원작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본삼국지》(리동혁 역) 구판 1권. '책을 내면서'
《삼국지 판본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앤드류 웨스트(Andreu West)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 만약 나관중 원본을 찾는다면, 그 모습은 ‘형편없이 얇고 볼품없는 책’일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정원기
지은이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 명나라 《삼국지전》 계열의 책들은 문학적 가치가 좀 떨어지지만 《삼국지》의 원시적인 형태가 많이 남아 있으므로......
-《본삼국지》(리동혁 역) 구판 1권. '일러두기'

가정본은 나관중본이 아니며, 추정컨대 진짜 나관중본은 형편없이 얇고 볼품없는 책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관습적으로는 가정본을 나관중본이라 부르고 가정본의 글을 나관중의 글이라 일컫지만,[43] '가정본'과 '나관중본'을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3.3. 모종강본

滾滾長江東逝水
굼실굼실 동으로 흘러가는 도도한 장강 물결
浪花淘盡英雄
하얀 물보라 일으켜 옛 영웅호걸 모두 쓸어 갔네
是非成敗轉頭空
시비도 성패도 고개 한번 돌리니 헛것이러니
靑山依舊在
푸른 산은 예처럼 그 자리에 있는데
幾度夕陽紅
저녁놀은 몇 번이나 또 붉었다 사라졌던고?

白髮魚樵江渚上
강가에 사는 백발성성한 어부와 나무꾼
慣看秋月春風
가을 달뜨면 봄바람 불어도 예사로이 바라볼 뿐
一壺濁酒喜相逢
막걸리 한 병이면 희희낙락 찾아서 만나노니
古今多少事
고금의 크고 작은 세상일일랑
都付笑談中
웃으며 나누는 이야기에 모두 붙여 보냈다네.
― 모종강본 서사(序詞)[44]

삼국지연의에 대해 논할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판본이 바로 모종강본이다. 청나라 강희 연간에 모종강 부자가 엮은 판본으로, 현재 한중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판본이 바로 이것이다.

구전을 필사한 티가 많이 나는 가정본에 비해 모종강본은 소설로서의 완성도가 높고 덕분에 읽는 재미가 배가되었다. 예를 들어 가정본에서 관우의 최후 장면은 싸우다 말고 승천하는 것으로 처리되는 등[45] 구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었지만, 모종강본에서는 이를 소설에 맞게 각색했다. 흔히 알려진 관우의 최후는 바로 모종강본의 모습이다. 배송지주에서 현실성이 없다고 까인 부분을 용감하게 취하여 소설로서 완성도는 높게 가져가게 되었다. 특히 소설로서의 재미는 모종강본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 리동혁도 인정했다.
모종강본이 나온 다음 소설로서의 질이 훨씬 올라갔으니 말인데, 나관중본은 사실 소설로서는 어수선한 데가 많았다. 품격으로 보아 나관중본은 아직 구전 이야기의 냄새가 짙다면 모종강본은 글을 아는 사람들도 볼 만했다.
리동혁, 《삼국지가 울고있네

무려 20여 가지나 난립하던 삼국지연의의 판본들이 나중에는 모종강본 기준으로 교통정리가 된 것만 보더라도 이 판본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청대 이후 한자문화권에서 사랑받은 삼국지연의란 대체로 모종강본이었다. 가정본이 실전된 것도 아니고 염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모종강본의 우수성을 세월이 입증한 것이다. 더군다나 근래의 연구에서 나관중의 원본은 볼품없는 글일 것으로 추정되고 가정본은 나관중의 원본이 아니라 '과도기의 형태'로 결론났기에, 삼국지연의의 최종적인 완성인 모종강본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있다.

다만 소설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가정본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싫어하는 판본이기도 하다. 모종강의 임의적 판단에 의해 여러 내용을 삭제/추가/개편하면서 나관중이 의도한 주제 의식과 메시지를 멋대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정본은 '통속연의'라는 말 그대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통속적인 이야기에 가까웠다. 즉 인물 개개인의 '멋짐'이라는 통속적인 면을 보여주던 소설이였다. 그런데 모종강은 여기서 강한 유교적 주제 의식을 넣기 위해 촉한에는 버프를, 위에는 너프를 가한 것이다. 때문에 가정본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구시대적이고 케케묵은 가치관이 책에 배어버렸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테면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리동혁 역시 모종강본을 비판한다.[46] 물론 모종강본을 좋아하는 쪽에서는 오히려 이런 강력한 주제 의식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황실과 같은 유씨라는 이유로 한의 적통을 자처하는 유비가 어딜봐서 선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전근대 동아시아에 공화주의가 보급된 것도 아니기에 너무 가혹한 잣대일 수 있다. 그리고 위선적이라고 비판도 많이 받지만 작중에서 그래도 주인공이라 현대 가치관으로도 충분히 긍정적인 인덕을 내세우는 군주는 유비 정도고, 조조가 딱히 민중을 위하는 혁명가도 아니다.[47] 또 위에서도 나온 얘기인데 이러니 저러느니 해도 한때 엄청 격하된 조조에 대한 재평가의 시작은 이 삼국지연의이고, 모종강본이라고 이걸 아예 죽여놓지는 않았다. 당장 조조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유명한 여백사 에피소드가 나오는 4화에서 모종강의 서시평을 보자.
조조가 백사 일가 사람들을 죽인 것은 실수였으므로 양해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백사까지 죽이는 데 이르러서는 그 악독함은 극에 달했다. 그래놓고서는 다시 "차라리 내가 남을 배반할지언정, 남이 나를 배반하지는 못하도록 하겠다"고까지 말하는데, 독자들은 이에 이르러서는 그를 나무라고 욕하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야말로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시험 삼아 천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감히 입을 열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도덕과 학문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일단 이 말을 뒤집어서 "차라리 남이 나를 배반하게 할지언정, 내가 남을 배반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듣는 이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대로 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조조의 이 두 마디 말을 몰래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조조는 말과 마음이 일치한 소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무리들은 입은 옳아도 마음이 글러서, 그 말과 행동이 직설적이고 통쾌한 조조보다 도리어 못하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이것이 오히려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다."
― 삼국지연의 4회, 모종강의 서시평-

모종강본의 특징 중 하나는 각 화마다 실린 서시평들과, 본문 중간중간에 적혀있는 협평들이다. 서시평은 각 화에 대한 모종강의 감상이고, 협평은 적절한 해설과 농담이 섞인 문장들이다. 1화의 몇몇 협평들 예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협평은 괄호 안에 굵게 표시)
건녕 2년 4월 보름날, 황제가 온덕전에 나와 옥좌에 앉으려고 할 때 전각 모퉁이로부터 광풍이 일더니 푸른 구렁이 한 마리가 대들보 위에서 스르르 내려와서 옥좌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백사(白蛇)를 베어 죽인 후 한나라가 일어났는데[48], 청사(靑蛇)가 나타나자 한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청사와 백사가 멀찍이서 서로 대(對)를 이루고 있다.)
광화 원년에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일이 있었다.(이 징조는 더욱 환관들에게 들어맞는 것이다. 남자가 거세를 당하는 것은 곧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환관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은 곧 암컷이 또 수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황제는 일개 환관에 지나지 않는 장양을 높여서 아버지라 부르기까지 했다.(이러한 장씨 아비가 있으므로, 자연히 장각 등 장씨 형제 세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당주(황건적)는 곧장 궁중으로 가서 거사 계획을 고해 바쳤다.(환관은 반대로 첩자가 되고, 첩자는 반대로 자수를 하는데, 이를 통해 내부의 도적이 바깥의 도적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덕 曰: 나는 본래 한 황실의 종친으로 성은 유, 이름은 비라고 하오. 지금 들으니 황건적이 난을 일으키고 있다는데, 도적들을 깨뜨려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뜻은 있으나 다만 내게 힘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서 길게 탄식을 했던 것이오."
장비 曰: "나에게 어느 정도 재산이 있으니 고을 안의 용사들을 불러 모아 공과 함께 큰일을 도모해 보는 게 어떻겠소?"(결국 재산이 있는 사람은 큰일을 하기가 쉽다.)
황제는 대장군 하진을 불러서 군사를 동원하여 마원의를 잡아다가 목을 베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봉서 등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하옥시키도록 했다.(왜 즉시 죽여 버리지 않는가?)

또한 탐관오리 독오가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하다가 트러블이 일어나고는 장비에게 매질을 당하는 유명한 에피소드에서는 이런 식으로 적기도 했다.
독오가 큰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했다: "네가 황제의 종친을 사칭하면서 공적을 거짓으로 보고하는가? 이번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린 것도 바로 너 같은 엉터리 관리들을 가려내서 퇴출시키려는 것이다."
(중략)
독오가 사정했다: "현덕공, 제발 날 좀 살려주십시오!"(내가 어찌 감히! 나는 본래 황제를 사칭하고 공적을 거짓 보고했던 사람인데 어찌 감히 공을 구해줄 수 있겠는가?)
현덕은 본디 마음이 인자한 사람인지라 급히 장비를 꾸짖어 매질하는 손을 멈추도록 했다.

즉 협평의 용도는 나무위키의 주석 드립취소선 드립과 비슷하다. 권선징악적 주제라는 평 때문에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협평의 문체는 매우 유쾌하고 농담이 많은 편이다.

황석영 삼국지도 1, 2권까지는 모종강본 계열로 추정되는 현토 삼국지[49]를 참조했다고 머릿말에서 밝혔고,[50], 3권 이후부터는 인민문학출판사본(이하 인문본)을 참조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사례로 3권에서 조조가 오환 정벌을 할 때, 그 우두머리가 묵돌이 아닌 답돈이라고 수정된 것과, 4권에서 인문본 이전에 회계의 능통이라고 한 것을 낙통이라고 고친 부분과, 오찬(吾粲)의 이름이 吳粲에서 吾粲으로 바르게 수정된 것 등이 있다.

3.4. 한족 민족주의를 담은 서사인가?

김운회는 2003년에 장정일, 서동훈과 공저한 삼국지 해제에서 연의가 한족 민족주의 서사를 담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51] 하지만 연의가 의도된 정치적 프로파간다, 반외세적인 성격을 띤 민족주의적 서사라고 볼 근거는 없다.[52] 우선 연의에 영향을 준 삼국지평화는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 때 유행했다. 황실과 주군에 대한 충성과 권신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고대부터 중국의 전통적 관념이었고,이를 굳이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구도에 끼워맞출 필요나 재료가 없다. 왕조 사회서 찬탈자가 이야기의 악역 되는건 반외세 민족주의와 상관없는 이야기다. 조조가 이민족인 것도 아니고, 찬탈자 악역 세팅이 딱히 원명 교체기라 그런 것도 아니다. 찬탈자가 악역이 되는 세계관이 유학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걸 반외세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이유는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 왕=국가는 맞지만 그게 민족하고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다. 나관중이 연의에서 그걸 의도한 정황도 없고 유교의 국가 개념은 현대 민족 관념처럼 특정 혈통이나 역사, 언어, 문화에 기반한 민족국가 개념과 다르다. 그래서 조조가 악역이어도 굳이 외래민족으로 세팅될 필요가 없고 한 외부 피가 섞인 왕조인 이나 (한나라 이전)도 정통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민족이 국가를 구성한다는 개념은 근대의 창작품(논의의 여지는 있지만)에 가깝고 삼국지연의는 전근대인 원명 교체기 때 나온 소설이라서 근현대에 부각된 한족 민족주의와 거리가 멀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화는 혈통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오랑캐여도 예 받아들이면 중화가 되는 개념이고 삼국시대 이전인 이위공문대나 진, 당의 정통 왕조 인정에서 보인다. 즉 연의의 서사가 왕조의 정통성 개념에 영향을 받은 건 맞지만, 근현대 민족주의와는 다른 개념인 것이다. 서양에서 중화와 가장 흡사한 관념은 로마 제국 계승 관념인데, 두 관념의 특징은 그 계승이 문화적 이념적 개념이지 역사적 혈통적 개념이 아니며, 민족과 달리 외부 혈통 집단에 열려 있는 개념이었다. 촉한정통론동진연간부터 나타났는데, 이는 북방민족의 침공 보다는 연달아 터지는 선양을 빙자한 찬탈 행각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다. 삼국연의도 북방 민족의 비중이 극도로 약하다 보니 한족 민족주의 경향이 있다고 볼 만한 요소가 없고 중심되는 사상은 찬탈자에 대한 대항일 뿐이다. 모종강 평본(評本)은 정통, 천하, 대의명분 등의 해석을 두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시기에 따라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다.

청대 삼국연의는 동치제시절 강소순무였던 정일창이 잠시 금서로 지정했으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금서가 아니었으며, 청나라 시기를 통틀어 널리 읽혀졌다. 애당초 누르하치부터가 삼덕이었으며, 그 아들인 도르곤, 손자인 순치제는 아예 만주어로 삼국지를 번역하고, 친히 그 서문을 쓸 정도였다. 그리고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군신으로 추앙받았던 악비보다도 만주족에 덜 위험했던 관우를 군신으로 높이기 위해서라도 삼국지는 청나라 내내 읽혀졌다. 동치제시절 강소성에서 삼국연의를 금서로 지정한 이유는, 이 당시 청나라 정세가 완전히 후한말과 유사했고, 황제 또한 소제나 헌제를 연상할 정도로 어렸기 때문이었다.

3.5. 비극적 성격

삼국지연의는 한 마디로 비극이다.
謀事在人, 成事在天. (모사재인 성사재천)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제갈량이 연의 103회에서 호로곡에 갇힌 사마의가 살아남자 탄식하며 한 말.

사마염서진천하통일을 이룬 역사는 결국 수많은 영웅호걸의 노력이 허사로 끝났음을 보여주며, 이는 맨 앞의 '합해지면 나뉘고 나뉘면 합해지기 마련'이라는 말과 수미상관을 이루기도 한다. 삼국지연의는 모든 줄거리를 되돌아보는 "고풍(古風)"이라는 장편 시로 마무리되는데, 마지막 수인 뒷사람들 탄식하며 공연히 가슴 설레네!(後人憑弔空牢騷)는 상당히 허무주의적으로 느껴진다. 처음 읽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듯. 허무하게 사라지고 실패하는 영웅들의 최후를 보면 인생무상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데,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비극 작품 및 공연들도 그렇고, 옛사람들은 비극에 카타르시스를 좋아한 것 같다.[53] 실제로 촉한후한의 정신적인 계승자라는 나름의 정통성과 명분을 가졌음에도 힘이 없어 망해버리고, 조위는 힘은 가장 강했지만 어디까지나 찬탈로 세운 나라였기에 마찬가지로 신하였던 사마의에게 나라를 빼앗겨 무너지고 만다. 작중 묘사를 보면 망국의 군주들이던 조방조모, 그리고 조환의 최후가 후한의 헌제가 사직을 빼앗기는 모습과 비슷하게 묘사되는데, 아예 사마소사마염 부자가 도 후한에게서 찬탈했잖느냐면서 빈정대니 가히 역사는 반복된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손견, 손책, 그리고 손권 부자의 손오도 이들 세 부자가 모두 죽은 뒤에는 결국엔 세력이 밀려서 무너진다.

중국 현대 정치사상사 전공 학자인 피터 R. 무디 주니어는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and Popular Chinese political thought"라는 글에서 이 엔딩과 전체 구성을 보고 시니컬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건 삼국지연의라는 문학 작품에 드러난 심성에 대한 평가다. 이는 동양의 군담과 서양의 기사 이야기들은 그 테마가 좀 다른 데서 기인하는 평가로, 삼국지에 대해 서양식 기사 이야기를 일컫는 단어인 Romance를 붙여 번역하긴 하지만[54] 서양식 기사 이야기가 강적, 특히 이교도와 맞서 싸우며 기사도를 지켜내는 절대선에 가까운 용사를 칭송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동양식 군담은 대개 권력 다툼과 영웅들의 활약이 긴 역사 안에서 갖는 본질적인 허망함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선악 대립에 익숙한 서양인들이 선악의 구별이 희미하고 선도 악도 세월 속에서 스러져 버리는 동양식 세계관을 염세주의적이라고 느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인생무상을 아주 잘 나타냈다고 평가받는 명문으로 시작하는 헤이케모노가타리[55]나 뒷사람들이 영웅들을 추억하는 쓸쓸한 이야기라 강조하며 시작하고 끝나는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서양의 기사로맨스는 '선악 구분이 확실하고 절대선을 칭송', '동양식 군담은 허무주의'라는 이분법적 분류는 지나친 감이 있다. 동양 군담 소설만 해도 결말이 정해진 역사 군담 소설이 아니라, 창작 군담 소설(유충렬전 같은)들은 서양식 기사 이야기와 비슷하게 볼 수 있는 면도 꽤 많다. 거기다 역사 군담 소설도 정사가 해피엔딩이면 당연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정사 삼국지에서도 서진의 승리로 끝나고 심지어 그 서진조차 자기들의 병크소빙하기의 발생으로 인한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 시대의 서막으로 순식간에 망해서 자동으로 비극이 된 것이다.[56] 당장 삼국지와 더불어 대표적인 연의소설인 초한지유방의 드라마틱한 승리로 끝난다.[57] 마찬가지로, 서양의 기사전설도 새드 엔딩과 허무한 성격을 띄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중세 유럽 기사 로맨스의 대표격인 아서 왕 전설만 해도 아서 왕이 자식인 모드레드의 반역으로 목숨을 잃는 새드 엔딩으로 끝나며, 그 외에도 기사들의 이루지 못한 꿈이나 사랑등을 노래하는 전설이나 문학은 꽤 많다. 역시 대표적인 기사 문학인 니벨룽의 노래도 선악 구분따위는 없으며, 마지막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의 보편적 정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

4.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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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회별 구성

바이두 정보 및 김구용 역 삼국지연의(솔출판사. 2001)의 회차 목록 참조. 당연히 모종강본 기준이다.

【1회에서 120회까지 전체 회별 구성 목록 ▼ 】
* 1회: 황건적의 난, 도원결의
  • 2회: 장비의 독우 폭행, 영제 붕어와 십상시의 난
  • 3회: 동탁의 조정 장악, 여포가 정원을 죽임
  • 4회: 소제 폐위와 헌제 즉위, 조조의 동탁 암살 미수 사건
  • 5회: 반동탁 연합
  • 6회: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다. 손견이 낙양에서 옥새를 발견하다.
  • 7회: 계교 전투, 손견과 유표의 싸움
  • 8회: 왕윤의 연환계
  • 9회: 동탁의 죽음, 이각과 곽사가 장안을 점령
  • 10회: 마등이 이각과 곽사를 공격함, 조숭이 죽자 서주를 공격한 조조
  • 11회: 공융을 도와 북해를 공격하던 황건적을 토벌하고 도겸을 돕는 유비, 여포의 연주 공격
  • 12회: 도겸에게 서주를 물려받은 유비, 조조와 여포의 싸움
  • 13회: 이각과 곽사의 내분, 양봉과 동승이 헌제를 구출함
  • 14회: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다. 여포가 원술과 싸우는 유비의 배후를 치다.
  • 15회: 손책이 옥새를 원술에게 주고 군사를 받아 양주를 치다.
  • 16회: 여포가 원문에서 유비와 원술의 싸움을 중재하다. 조조가 장수에게 패하다.
  • 17회: 원술 칭제
  • 18회: 조조가 가후의 책략으로 장수에게 패하다. 하후돈이 조성의 화살 때문에 애꾸눈이 되다.
  • 19회: 여포가 하비성에서 죽다.
  • 20회: 동승이 헌제에게 의대조를 받다.
  • 21회: 조조와 유비가 허도에서 영웅을 논하다. 공손찬이 원소와의 싸움에서 패사하다. 관우가 차주를 죽이다.
  • 22회: 조조와 원소가 대치를 시작하다. 관우와 장비가 유대, 왕충을 사로잡다.
  • 23회: 예형이 조조를 꾸짖고 길평이 조조를 죽이려다가 발각되다.
  • 24회: 조조가 동승 일족을 모두 죽인 뒤 유비를 공격하다.
  • 25회: 관우가 장료에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 뒤 조조에게 항복하다.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하다.
  • 26회: 관우가 안량, 문추의 목을 베고 조조를 떠나다.
  • 27회: 관우가 천리행을 떠나다.
  • 28회: 장비가 관우에 대한 오해를 풀고 삼형제가 다시 모이다.
  • 29회: 손책이 죽고 손권이 세력을 물려받다.
  • 30회: 원소가 관도에서 패하다.
  • 31회: 창정에서 다시 패한 원소가 분사하고,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여남에서 신야로 옮기다.
  • 33회: 원상과 원담의 내분, 조조가 허유의 책략을 받아들여 수공으로 업성을 함락하다.
  • 34회: 조비가 원희의 부인인 진씨(견씨)를 아내로 맞고, 조조는 곽가의 조언대로 요동으로 원씨 잔당을 추격하다.
  • 35회: 채씨 일족이 유비 암살 계획을 꾸미지만 유비는 적로를 타고 단계를 건너 피신하다.
  • 36회: 유비가 사마휘를 만난 뒤 서서를 등용하나, 서서는 조조의 모략 때문에 유비를 떠나면서 제갈량을 추천한다.
  • 37회: 삼고초려
  • 38회: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말하다. 손권이 강하를 공격해 황조를 죽이고 감녕을 등용하다.
  • 39회: 유기가 제갈량에게 앞날을 대비할 계책[66]을 받고, 조조가 남정을 준비할 동안 유비는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박망에서 조인의 군세를 무찌르다.
  • 40회: 유표가 죽자 유종과 채부인이 조조에게 투항하다. 유비군이 강하로 피난하자 백성들도 따라오다.
  • 41회: 조운이 장판에서 아두를 구하다.
  • 42회: 장비가 장판에서 홀로 조조군의 진격을 막고, 관우와 유기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유비군은 무사히 강하로 피신하다.
  • 43회: 제갈량이 손권 측 논객들과의 설전에서 승리하다.
  • 44회: 제갈량이 주유를 설득한 뒤, 손권은 조조와의 싸움을 공표하다.
  • 45회: 장간이 주유의 계략에 걸리다.
  • 46회: 제갈량이 화살을 구하고 황개가 고육계를 쓰다.
  • 47회: 감택이 거짓 항서를 조조에게 바치고, 방통이 연환계를 짜다.
  • 48회: 조조가 장강에서 시를 읖다가 유복을 죽이고, 방통의 연환계를 채택하다.
  • 49회: 제갈량이 칠성대에서 동남풍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뒤, 주유가 화공으로 조조군 선단을 불태우다.
  • 50회: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보내주다.
  • 51회: 주유가 남군에 주둔한 조인을 격파하나 부상당하다.
  • 52회: 유비가 형남사군을 공략하다.
  • 53회: 장사에서 황충위연이 유비군에 합류하고, 손권과 장료가 회남에서 크게 싸우다.
  • 54회: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과 재혼하다.
  • 55회: 유비와 손부인이 형주의 유비군 본거지로 돌아가다.
  • 56회: 조조가 동작대를 짓고 주유가 다시 제갈량의 계책에 당하다.
  • 57회: 주유가 죽자 제갈량이 조문을 오고, 조문 자리에서 만난 방통이 유비군에 가담하다.
  • 58회: 마등이 조조에게 모살당하자 마초가 군사를 일으키다.
  • 59회: 마초와 허저가 크게 싸운 뒤 조조가 한수를 통해 이간계를 써서 마초를 물리친다.
  • 60회: 장송이 유비에게 익주의 유장을 몰아낼 것을 권하고 방통의 말에 따라 유비가 익주로 향하다.
  • 61회: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다가 조운과 장비에게 막혀 아두를 돌려주다. 손권이 조조에게 서신을 보내고 조조는 자식을 가진다면 손권 같은 자식이 낳다고 평하다.
  • 62회: 유비가 부관에서 양회와 고패를 죽이고 익주 공략을 시작하다.
  • 63회: 방통이 낙봉파에서 전사하고 장비가 엄안의 항복을 받다.
  • 64회: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유비군이 장임을 죽여 방통의 원수를 갚고, 량주로 도주했던 마초가 다시 조조를 공격하나 양부에게 패하고 장로에게 의탁하다.
  • 65회: 마초가 유장의 요청으로 유비와 싸우지만 유비군에 가담하고, 유장이 항복하며 유비가 익주를 제패하다.
  • 66회: 관우와 노숙이 형주에서 회담을 갖고, 복황후가 조조 암살 미수 혐의로 처형당하다.
  • 67회: 조조가 한중을 공략해 장노의 항복을 받고 방덕이 조조군에 가담하다. 장료가 합비 소요진에서 손권을 무찌르다.
  • 68회: 감녕이 기병 100여기로 위군을 습격하고, 좌자가 조조를 농락하다.
  • 69회: 관로가 주역으로 점괘를 해석하고, 허도에서 다섯 신하가 조조 토벌군을 일으키나 하후돈에게 죽다.
  • 70회: 장비와 엄안이 한중 공략전에 참가해서 장합과 하후덕을 격파하다. 장합은 살아남으나 하후덕은 전사하다.
  • 71회: 황충이 하후연을 죽여 정군산에서 대승을 거두고, 조운도 한수에서 조조군을 격파하다.
  • 72회: 조조가 직접 출전하나 유비군에게 패하다.
  • 73회: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다. 관우가 양양 공략을 시작하다.
  • 74회: 방덕이 관우와 맞서다. 관우가 수공으로 칠군을 무너뜨리자 우금은 항복하나 방덕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처형당하다,
  • 75회: 화타가 관우가 어깨에 입은 화살 상처를 치료하다. 여몽이 관우의 배후를 노려 유비의 형주 영토를 점령하다.
  • 76회: 서황의 지원군과 오군이 가세하자 관우가 맥성으로 후퇴하다.
  • 77회: 관우가 맥성에서 위오 연합군에게 붙잡혀 죽고, 여몽이 급사하며 조조도 앓아눕다.
  • 78회: 화타가 조조의 명으로 옥에 갇혀 죽고, 조조도 조비에게 후사를 맡기고 숨을 거둔다.
  • 79회: 조비가 조식에게 칠보시를 짓도록 명하고, 유봉이 유비의 명으로 처형되다.
  • 80회: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아 위나라를 세우자, 유비도 익주에서 한나라의 부흥을 선언하며 칭제하다.
  • 81회: 장비가 부하였던 장달, 범강에게 죽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명분으로 오를 공격하다. 관흥과 장포가 임관하다.
  • 82회: 손권이 위나라에 칭신하고 유비가 계속 손권을 공격하다.
  • 83회: 유비가 효정에서 오군과 싸우고 미방, 부사인을 처형하다. 마충, 반장관흥에게 죽다. 육손이 오군을 지휘하여 촉군과 맞서다.
  • 84회: 육손이 화공으로 700리에 걸친 촉군 영채를 불태우자 유비가 백제성으로 퇴각하다. 육손이 어복포에서 팔진도에 갇혔다가 빠져나오다.
  • 85회: 유비가 조운과 제갈량에게 유선(아두)를 잘 보필할 것을 당부하고 숨을 거둔다. 제갈량이 오로 침공을 막다.
  • 86회: 조비가 칭신을 파기한 손권을 공격하나 패하다.
  • 87회: 맹획이 처음으로 제갈량에게 잡히다.
  • 88회: 맹획이 두 번째, 세 번째로 잡히다.
  • 89회: 맹획타사대왕의 지원을 받아 독룡동에 웅거하자 촉군은 독천과 병 때문에 고생하지만, 맹절의 도움으로 극복한 뒤 맹획을 네 번째, 다섯 번째로 잡다.
  • 90회: 맹획이 축융부인대래동주, 목록대왕과 함께 다시 촉군과 맞서나 패배하고 목록대왕과 타사대왕이 패사하다. 맹획도 여섯 번째로 잡히다.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한 올돌골과 등갑군도 패하자 완전히 항복한다.
  • 91회: 제갈량이 노수에서 남만 병사들의 넋을 달래다.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하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다.
  • 92회: 조운이 한덕과 그의 다섯 아들을 참하다.
  • 93회: 강유가 촉군에 등용되며 왕랑은 제갈량과 설전을 벌이나 분사하다.
  • 94회: 제갈량이 월길아단의 철기군을 무찌르다. 사마의가 맹달을 참하다.
  • 95회: 마속이 가정에서 패하다. 제갈량이 공성지계로 위군의 추격을 막다.
  • 96회: 제갈량이 마속의 목을 베고, 주방이 머리카락을 잘라 조휴를 속이다.
  • 97회: 조운이 노환으로 숨을 거두다. 제갈량이 2차 북벌을 시작하다.
  • 98회: 촉군을 쫓던 왕쌍이 위연에게 죽다.
  • 99회: 촉군이 위군의 역습을 막다.
  • 100회: 조진이 제갈량의 편지를 읽고 분사하다. 제갈량이 사마의와 진법 대결을 벌이다.
  • 101회: 장합이 제갈량의 계책에 당해 목문도에서 전사하다.
  • 102회: 제갈량이 목우유마를 만들고 5차 북벌을 시작하다.
  • 103회: 사마의가 상방곡에서 촉군의 화공에 죽을 고비를 넘기다. 제갈량이 북두칠성에 기도해서 수명을 12년 늘리려 하나 위연이 본의 아니게 방해해서 실패하다.
  • 104회: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고, 사마의가 제갈량 목상을 보고 퇴각하다.
  • 105회: 위연이 마대에게 죽다. 제갈량 사후 나태해진 조예가 승로반을 짓고 사치에 빠지다.
  • 106회: 공손연이 위나라에 반기를 드나 사마의에게 처형당하다. 조예 사후 위나라는 조상과 사마의가 조방을 보필하나, 실권에서 밀려난 사마의는 칭병하여 조상을 속인 뒤 정변을 일으켜 조상을 주살하다.
  • 107회: 사마의 사후 사마사, 사마소가 위나라의 실권을 장악하다. 손권도 이 무렵 노환으로 숨을 거두며 강유가 다시 북벌을 시작하다 우두산에서 패하다.
  • 108회: 정봉이 위군을 격파하고, 손준제갈각을 주살하다.
  • 109회: 조방이 사마사에게 폐위당하고 조모가 즉위하다.
  • 110회: 관구검문흠이 사마사에게 반기를 들다. 문앙이 사마사의 군대를 격파하나 관구검이 패사하자 부자가 오로 망명하다 강유가 다시 북벌을 시작하다. 사마사가 지병으로 죽다.
  • 111회: 등애가 강유를 격파하다. 제갈탄이 수춘에서 사마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오나라의 지원도 받다.
  • 112회: 오군을 이끌고 온 문흠이 제갈탄에게 죽자 문앙이 위군에 항복하고, 우전은 제갈탄이 패사하자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강유와 등충이 군세를 이끌고 맞서다.
  • 113회: 정봉손침의 전횡을 끝내다. 강유와 등애가 다시 싸우다.
  • 114회: 조모가 사마소를 몰아내려다가 성제에게 죽고, 강유가 다시 위군과 싸우다.
  • 115회: 강유가 황호의 참소를 피해 답중에 주둔하다.
  • 116회: 등애와 종회, 제갈서의 위군이 촉 공략을 시작하다. 부첨이 전사하고 장서가 항복하며 한중이 함락되다.
  • 117회: 등애가 음평을 거쳐 마막의 항복을 받고 면죽으로 향하다. 제갈첨이 면죽에서 등애와 싸우다가 전사하다.
  • 118회: 유선이 항복하면서 촉한이 멸망하며, 유선의 아들인 유심이 항복을 거부하며 자살하다.
  • 119회: 강유는 촉한 부흥을 노리고 종회의 야심을 이용하려 하나 위관에게 죽고, 등애도 모함을 받고 압송되다가 그에게 불만을 가졌던 전속에게 죽다. 사마염조환에서 선양받아 진나라를 세우며 손휴 사후에 손호도 오나라 황제로 즉위하다.
  • 120회: 양호육항의 대결과 우정, 양호가 후임으로 두예를 추천하다. 진군이 세 방향에서 오를 공격하며, 왕준이 장강을 따라 내려와 석두성에서 오나라의 항복을 받으며 천하는 사마씨의 진나라에 의해 통일된다.

4.2. 주요 사건들

5. 작품과 관련된 말들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무릇 천하의 대세란 나뉜 지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되면 틀림없이 다시 나뉘는 법이다.
삼국지연의의 첫 문장(송도진 역).[67]
삼국지연의는 절호의 통속[68] 역사로, 수천 년의 통속 교육사에서 이 책의 마력에 견줄 만한 책이 없다. 오백 년 동안 수많은 미취학 국민들은 이 책에서 무수한 상식지혜를 얻었으며, 이 책에서는 편지를 읽고 글을 짓는 기술을 배웠으며, 이 책에서 인간됨과 세상을 따르는 재주를 배울 수 있었다. 뛰어난 견해나 문학적 기량도 구하지 않고, 한 가지 재미만 좇아 놓아주지 않는 교과서를 읽는다. 사서오경은 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이십사사'와 '통감'과 '강감역지록'도 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고, '고문관지'와 '고문사류찬'도 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이를 적절하게 공급한다. 우리 모두는 이 책에게서 마력을, 우리 모두 이 책에게서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
후스, 삼국지연의가 중국에 끼친 영향력을 설명.[69]#

삼국지연의는 중국 문학의 4대 고전 소설 중 하나로 호평을 받고 있으며, 총 80만개의 단어와 거의 1,000명에 가까운 극적인 캐릭터들(대부분의 역사 인물)을 120회에 담고 있다. 이 소설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학 작품들 중 하나이며, 이 지역에서 문학적인 영향력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영문학에 대한 그것과 비교되어 왔다. 이 소설은 아마도 후기 제국과 현대 중국에서 가장 널리 읽혀진 역사 소설일 것이다. 허버트 자일스[70]는 중국인들 스스로 삼국지연의가 그들의 모든 소설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영어 위키백과#

『삼국지』는 중국 문학의 초석이 되는 네 편의 작품 중 하나이다. 한나라 말기부터 약 100년간(184-280)을 배경으로 중국 전통 이야기꾼이 들려주던 역사와 전설이 뒤섞인 대서사시이다. 서로 다른 기원과 줄거리를 가진 이 이야기들을 14세기 학자였던 나관중이 한데 모아 한 편의 서사시로 재탄생시켰다. 이야기는 스스로를 도사라 칭하는 장각이 이끄는 반도들이 한나라 영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하여, 한 왕조의 멸망(220)과 진나라의 건립으로 끝난다. 대부분의 주요 사건들은 위, 촉, 오나라 삼국의 괴물과 도인, 막강한 군벌, 전설적인 불사의 영웅들이 중국의 패권을 놓고 겨루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읽는 이를 사로잡는 구성, 고전적인 영웅과 악당들, 얽히고 설킨 음모, 스펙터클한 전쟁 장면들은 가히 중국판 『일리아드』라 불릴 만한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냈다. 『삼국지』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 러시아어를 비롯한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그 속에 담겨있는 전통적 지혜, 동화적 환상, 역사적 디테일, 그리고 병법(兵法)에 대한 통찰 덕분에 아직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책 중의 하나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삼국지를 읽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

냉정히 말해 단기천리의 충의(忠義)와 호풍환우의 신책(神策)이라는 유장한 문학적 수사를 모두 걷어낸 뒤에 남는 것은, 고작 한족(漢族)의 통일 제국북방 민족에 의해 무너지기 직전 50여 년 동안 벌어졌던 역사의 막간극일 뿐이다. 그걸 ‘위대한 군웅들의 천하경륜’으로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또 다른 중화주의의 오만함일지도 모르겠다.
유석재 조선일보 기자.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에 대한 서평 중에서.#

6. 일관성이 없는 부분 및 역사적 오류

삼국지연의는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삼국지연의를 집필할 때 예전부터 구전되어 오던 화소들을 상당부분 채택한 결과이다. 개개의 구전 화소들을 부분부분 붙이다 보면 역사적 사실이라든지 다른 화소들과 비교할 때 일관성이 없을 수밖에 없다.[71] 그래서 삼국지연의를 다루는 현대의 매체들은 이 부분들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갈량의 동남풍 사건은 사실 천문을 유심히 관찰해서 타이밍에 맞춘 연출이었다든가.

7. 조선전래 및 유행

한반도에 삼국지가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로 보인다. 신라김춘추가 당나라에서 이제 막 편찬된 따끈따끈한 진서를 선물받았고 사마의 등의 활동상이 널리 읽혔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통일신라 말엽이 되면 삼국지의 일화들이 전국 지방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는지 왕건견훤이 신라왕 경애왕을 살해한 것을 한나라 천자를 죽인 역적 동탁에 비유해 비난하기도 했다.

고려말에는 삼국지를 각색한, 연의의 전신 삼국지평화도 유행했는데, 중국어 학습교재인 노걸대#에서 삼국지평화를 사오는 내용이 예시문으로 존재한다. #

대략적으로 연의가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16세기 초중엽쯤으로 추정되는데 2000년대에 16세기 중엽 판본으로 추정되는 삼국지연의의 금속활자본이 발견된 적이 있다.해당기사. 발견 당시에는 가정본으로 판단했으나, 12권 구성으로 주왈교본 (가정본 이후 판본)이 아닌가, 혹은 이 둘을 기반으로 한 독자의 판본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다. # 이후에도 적벽가 등에서 보듯이 어느 정도 조선만의 독자적인 삼국지 관이 형성되었던 듯하다. 대략 임진왜란 전후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한국의 중문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로 보인다.

위 문단에서 언급되었듯, 조선이 워낙 오래 지속된 관계로, 영조.정조대쯤은 되어야 우리가 아는 모종강본 삼국지가 나올 수 있다. 임진왜란 전후의 에피소드, 즉 선조나 이순신이 관계된 에피소드는 나관중에서 200년 정도 미래, 모종강에서는 100년 정도 과거 쯤의 중간 시대임을 인지하고 아래를 읽을것.

비슷한 시기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삼국지연의' 가 완전한 단어로는 단 한번 언급되는데, 선조 2년(1569년)에 기대승이 선조 앞에서 '삼국지연의라는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84] 라고 이런 책이 인출(印出, 인쇄)되기까지 했다며 개탄하고 연의와 함께 초한지, 전등신화와 태평광기까지 싸그리 모아서 깐다. 이 말 이전에 선조가 '장비의 고함에 만군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연의에는 있다고 들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어쨌거나 임금인 선조도 연의가 유행한 것을 주위에서 들었을 정도로 금세 알려진 책이든지, 아니면 선조도 실제로 봤는데 대놓고 봤다고 하면 좀 그러니까 그렇게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해당 실록 기사 어쨌거나 유학자의 입장에서, 실제의 역사가 아닌 창작물이 그럴싸하게 회자되는 세태가 우려되었던 듯하다. 그런데 솔직히 그만큼 재미있어서 온갖가지 오락물이 넘쳐나는 현대에도 수많은 삼국지덕후가 양산될 정도인데, 조선시대 사람에게 이게 얼마나 흥미진진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자료를 접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삼국지 문화는 현대에 별로 전달되지 못했다. 후일 문체반정을 일으켰을 정도로 문체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정조는 삼국지를 잡스러운 책이라며 자신은 삼국지(연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정조가 이순신을 칭찬하면서 '제갈공명과 싸워도 누가 이길지 모른다'고도 했다지만, 애시당초 조선이 성리학 국가였고 그 때문에 촉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 경우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진짜 역사서만 보고 연의는 안 봤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85] 실제로 홍재전서를 보면 어떤 신하가 연의의 오로 침공전 에피소드와 제갈량 거문고 공성계를 얘기했는데도 태클 없이 그냥 넘어갔다. 이런 걸 보면 진짜로 안 봐서 지적을 못 한 걸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나머지 삼국지 언급은 대부분 진수의 삼국지(정사) 이야기로, 삼국지 위지 등의 역사서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유구국 사람들이 표류해왔는데 배 안에 통속삼국지# 가 있더라는 기사도 있다.

근데 재밌는 부분은 삼국지연의는 정작 정조가 칭찬한 충무공 이순신이 애독했던 책이기도 하다.[86][87] 실제 난중일기에도 가정본 삼국연의를 인용한 구절이 존재한다고 한다.# 청성잡기에 따르면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한 절친한 벗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인정하여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상의하곤 하였다. 왜적이 침입하자 충무공은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국사(國事)를 함께 도모하자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었기에 다만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충무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잘 읽으면 국사를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충무공이 이 책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대략 임진왜란 7년 전쟁 막바지였던 무술년에 명나라 수군도독인 진린이 조선수군 수영에 온뒤 이순신의 인품에 감화된 일화 중 하나가 전해진다. 어느 날 진린이 천문을 보니 장군성이 흔들렸기에, 이를 이순신 장군의 별이 흔들리는것으로 봐 다가올 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크게 다치거나 전사할 위험에 대한 조짐이라며 이순신에게 제갈무후의 고사를 들어[88] 이순신에게도 기도를 올릴 것을 건의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본인의 능력과 업적은 무후만도 못할진데 어찌 감히 무후처럼 기도를 올리겠냐며 정중히 사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를 보면 알듯이 적어도 당시 충무공 또한 삼국지연의를 읽었고 삼국지 속 인물들이나 일화들을 알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진린 또한 충무공이 삼국지의 고사를 알 것이라 생각해서 제갈무후를 인용했다고 볼 수 있으니 명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삼국지연의가 꽤나 대중적으로 퍼져 있었다고 유추하는 것도 가능하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집집마다 이 책이 있었고, 그 내용이 과거 시험 문제로 출제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기사

일제시대에는 일본을 통해서도 삼국지가 들어왔고, 부산시민도서관에는 한글로 필사된 삼국지도 보존되어 있다. #

8. 번역

8.1.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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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들어서도 한국에선 월탄 박종화, 김구용 등 많은 작가들이 삼국지 번역을 시도했으며, 근래에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등이 현대어로 번역하면서 문학적 가치를 높였다 하여 유명해졌다. 하지만 의미를 올바르게 번역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본삼국지, 정원기 교수의 정역 삼국지, 그리고 박기봉의 완역 삼국연의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2019년에는 정사 삼국지, 후한서, 자치통감, 진서 등 각종 사서에서 인용한 주석 및 해설을 담고 철저히 직역하여 원전 삼국지연의에 가장 가까운 송도진 삼국지가 나오기도 했다.

이 중 정원기 교수와 송도진의 번역 정도를 제외하면, 한문학/중문학 전공자가 번역한 것은 거의 없고 박종화, 이문열, 황석영, 장정일, 정비석 같은 한문학에 조예가 있는[89] 비전공자인 경우가 많다는 문제가 있다. 비록 삼국지연의의 문장이 딱히 난해한 건 아니라 한들, 비전공자의 번역은 한계가 명백하다.[90] 가령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했다 자부하는 황석영의 경우, 서술자의 말을 대화문으로 바꿔놓고 대화를 창작하는 등 원문 존중이 엉망이며 오류가 난무한다. 다행히 이문열이나 정비석 등의 번안 삼국지는 황석영처럼 '원문을 충실히 번역했다'는 이상한 소리는 하지 않고 번안임을 분명히 하지만, 역시 비전공자의 번안이라는 본질적 한계는 있다.[91]

그 외, 고우영 삼국지 등 만화로 번안되는 경우도 많다. 대상 연령층을 낮게 잡은 것이 많으며[92]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재미없을 것 같거나 만화로 표현하기 적당치 않은 부분을 뭉텅 잘라먹는 경우가 많다. 심할 경우 왜곡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입문서로는 쓰되 맹신하지 말자. 또한 대부분 모본이 요시카와 삼국지가 많다보니 제갈량 사후부터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경우, 삼국지 통속연의라는 제목으로 에도 시대에 널리 퍼졌다. 근대에는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번역한 판본(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이 널리 읽혀졌으며, 이것이 한국에도 수입되어 한국 삼국지 번역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8.2. 뒷심 부족

삼국지연의를 평역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평역 과정에서 뒷심 부족 현상을 일으킨다. 작가들은 초반부에는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적극적으로 섞으며 맛깔나게 창작한다. 이때는 자신이 나관중을 능가할 수 있다는 패기가 느껴진다. 이 패기는 대개 적벽대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적벽대전이 끝나고 나면 모든 작가들은 이 마귀 같은 대하소설에 손 댔다는 것을 후회하며 때려치우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 듯. 그도 그럴 것이 적벽대전을 지나도 삼국정립까지는 한참 멀었다. 원판 연의(이하 회수는 모종강본 기준)에선 삼고초려가 37회에 펼쳐지고 화용도가 50회인데, 추풍오장원이 104회다. 즉, 적벽대전은 절반에 조금 못 미친다.[93] 추풍오장원까지만 쓰더라도 지금까지 쓴 만큼 더 써야 한다. 서천 정벌 이후 관우, 장비, 유비차례대로 죽고, 메인 악역인 조조마저도 죽어버리는 84회의 이릉대전, 85회의 유비 사망에 이르면 처참한 비극에 작가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의욕을 상실한다. 거기다 이릉대전에서 승리한 오는 이후부터 활약 없이 겉돌게 되는 탓에 대활약할 계기조차 없으니 이에 따라 비중도 급감한다. 그 뒤로는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본래 연의의 내용에 따라 적당히 진행하게 된다. 다행히도 2부의 주인공 포지션이라 볼 수 있는 제갈량이 있어서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작품들은 이 시점부터 제갈량 원톱 구도로 쓰여진다. 사실 연의에서 제갈량이 유독 띄워진 건[94] 후반의 재미를 책임져야 할 원톱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남만 정벌은 개그 캐릭터 맹획타사대왕, 올돌골 같은 정겨운 이민족들의 도움으로 근성 있게 버텨나간다. 사실 이미 판타지 소설이 되었으나 작가들은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다. 바로 전의 이릉대전이 줄초상인 걸 감안해 남만 정벌은 특별히 죽는 네임드 없이 가볍게 진행된다. 그리고 제갈량의 북벌. 이때부터 2부의 최종 보스 포지션인 사마의가 등장한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자 작가들은 가까스로 남만의 독기에서 빠져나와 그나마 제정신인 내용을 쓰기 시작한다. 상대가 조조의 뒤를 책임질 "지장 스타일의 적"인 사마의라서 제갈량과 계략을 주고 받으며 싸운다. 조조와 유관장 시절만큼의 간지폭풍 전개는 아니더라도 군담 다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전의 이야기들이 호쾌한 활약으로 앞날이 기대되는 희망찬 전개[95]였다면, 북벌은 그 제갈량이 나섰는데도 온갖 사건 사고로 발목 잡히고 조운도 세상 뜨고 제갈량의 뒤를 이어야 할 2세대 중에서도 제갈량보다 먼저 가는 인물[96]이 나오는 등,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속 터지는 전개. 게다가 3차~5차 북벌은 계속 이기다가 이런저런 문제가 생겨서 퇴각한다는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특별히 유명한 일화도 없어서 신선한 재미도 부족하다.

결국 제갈량가을 바람 타고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여기에서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한계를 느껴 붓을 꺾고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사마의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어도 후반부에 툭 튀어나온 감이 있고, 상대하는 인물이 기껏해야 조상 정도인데(다만 하후돈-조인-조진 + 조휴-조상 등으로 이어지는 범 조씨 일족과 사마씨 일족 사이의 병권 다툼은 정치적인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계략들이 나와서 충분히 많은 내용을 쓸 수 있다. 연의에서도 일단 고평릉 사변의 내막은 다루어주긴 했다). 이미 최강자인 제갈량과 맞수로 싸웠기에 독자들에게 관심을 끌만한 새로운 상대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97]

나관중도 제갈량 사후는 지루했는지 1권으로 압축했다. 제갈량이 죽는 부분이 연의 104회인데, 나머지 10여 회가 그 후 46년을 다룬다. 시대 전체로 보면, 제갈량이 사망한 시점은 삼국지에서 다루는 시기의 중간쯤이다. 연의가 총 96년의 역사를 다루는데, 제갈량이 사망한 시점이 50년이 흘렀을 때다. 역사적으로 분량을 제대로 맞추려면 제갈량이 죽었는데 지금까지 쓴 만큼 더 써야 한다는 것. 게다가 그 1권의 비중도 편차가 심하다. 대부분이 제갈량이 사망한 뒤 촉이 멸망하는 30년 정도만 크게 다루고 위의 멸망부터 진이 오를 정벌하여 천하통일하는 부분은 119회 마지막 몇 장 정도와 120회로 압축되었으며[98] 1권의 20분의 1 분량에 불과하다.

물론 후반부도 정사와 연의를 모두 잘 뒤져보면 강유등애, 종회, 진태, 곽회, 사마사-사마소 형제, 두예, 문앙, 제갈탄, 제갈각, 손준, 손침, 육항, 주적, 마륭, 양호 등 흥미를 끌 수 있는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으나, 이전 세대의 인물들이 워낙 사기급 포스를 가지고 있어서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다. 무엇보다도 제갈량 사후의 삼국은 흥세 전투촉한멸망전, 오멸망전 같은 굵직한 전투들을 제외하면 전쟁을 일으키는 횟수가 많지 않았다. 촉은 다시 내정에 힘 썼고 위와 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국이 개국 초기의 혼란기를 지나, 서로 간의 전쟁을 멈추고 안정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즉 제갈량 사후 파트는 군벌, 제후들 간의 피말리는 총력전이 아니라 서로 흡수통일을 포기한 채 내정에 힘쓰는 전간기다. 이러니 후반부 파트를 쓰려고 해도 쓸 이야기가 없고, 삼국 내정이나 정치 암투를 다뤄봤자 작품의 성질도 달라져 버리고 재미도 크게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전 만큼의 재미난 장면이 많이 나올 수도 없다. 애초에 강유나 등애[99] 또는 다른 인물들이 자신의 포스를 발휘할 무대 자체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아예 재미나게 쓰기가 힘든 부분이다. 그래도 나관중은 조방의 폐위와 사마소의 조모 시해, 제갈탄의 난, 제갈각-손준의 분쟁 등 위나라와 오나라의 중요 정치적 사건들도 한 둘씩 다루며 어떻게든 결말을 맺었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여기에서 근성이 다 떨어지며 제갈량 사후를 도저히 다룰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삼국지 관련 창작물들이 제갈량의 죽음을 사실상 삼국지연의의 종료로 취급하고 있다. 책에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영웅 삼국지가 그런 식이고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역시 전 60권 분량 중 제갈량 사후 내용은 마지막 60권, 딱 한 권뿐이다. 그나마도 촉이 멸망하는 시점[100]까지만 다루며 이 60권의 내용은 사마의의 공손연 정벌, 고평릉 사변, 강유의 1차 북벌, 촉한멸망전 4개가 전부다. 중국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인데, 2010년판 드라마 신삼국은 95부작인데 94화에 제갈량이 죽고 다음 화에서 사마의가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사망하며 끝난다. 즉, 사마의가 죽고 난 이후부터 통일까지의 시간을 나래이션 몇줄로 퉁쳤다.

대한민국의 판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요시카와 에이지본을 원작으로 한 고우영 삼국지, 장정일 삼국지 등은 원작대로 제갈량의 사망과 함께 작품이 끝나고,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제갈량 사후 부분이 나오기는 하지만 원본에 비해 4분의 1 정도의 분량으로 축약되어 있고, 작가가 직접 축약하겠단 뜻을 밝히는 구절이 있다. 즉 1/4권만 할애하고 바로 사마염의 통일. 참고로 제갈량 사후의 비중은 자치통감에선 1/4, 모종강 본 삼국연의에선 1/8 정도라 알려져 있다. 일부 작품은 아예 유비가 한중왕이 된 시점에서 열린 결말로 끝내기도 한다. 한국의 삼국지 번역 가운데 그나마 뒷심 부족이 없는 건 비교적 원본에 충실한 박종화 삼국지(여섯 권 중 마지막 권 전체가 제갈량 사후 이야기다.), 본삼국지, 정원기 정역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정도. 황석영 삼국지나 본삼국지와 정원기 삼국지야 괜히 창작 같은 거 안 넣고 연의를 그대로 번역했으니 당연한 이치고. 그중 상당수는 강유에게 할애되어 있는데, 위와 오를 다룰 만하면 다시 촉으로 넘어가고 강유가 나타나는데 연의도 비슷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1세기 들어, '삼국지연의' 창작물을 하도 우려먹나보니 한국과 중국 양쪽 모두 제갈량 사후 부분을 다룬 창작물도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 제갈량 사후 파트는 나관중도 다뤘다고는 하나 1권으로 압축했기 때문에 연의 자체의 내용도 적고 그만큼 재창작의 여지도 있는 편이다. 이 부분을 다루면서 삼국지 정사와 연의를 섞어가며 후반부를 풀어나간 창작물로는 삼국전투기, 대군사 사마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사마의'는 이전에도 나름 인지도가 있었던 인물이며, 일대기를 다루면서 기존의 인기 캐릭터인 조조, 제갈량 등과 엮기도 쉽기 때문에 군담이 아닌 정극으로 스타일을 바꿔 다루기도 한다.[101] 덕분에 고평릉 사변이나 조상 같은 인물의 위나라 후반부 주요 인물들의 인지도도 조금씩 늘어난 것은 덤.

작가 최훈제갈량 죽었으니 삼국지 끝이라는 독자 앞에서[102] "아직 삼국지 1/4이나 더 남았는데"라고 말하는 컷을 그렸으며, 실제로 1/4을 채우고 결국 에필로그로 황건적의 난을 그려 삼국지 100년을 모두 묘사하게 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제갈량 사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재평가의 바람도 불고 있다. 게다가 독발수기능의 난 등을 표현할 때는 오히려 정사 삼국지를 넘어서 진서 자료를 구해서까지 썼으며, 최소한 삼국전투기 만큼은 그의 작품 중 뒷심 부족이라 불리지 않을 입지를 쌓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해 연의와 정사를 혼합한 만화이니 삼국전투기를 100%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삼국전투기 문서에도 나오지만 삼국지 후반부의 조명을 잘했다는 점은 칭찬받을 만하지만, 작가 스스로도 미숙한 점을 후기에 인정했을 만큼 비판도 많이 받은 작품이다. 사실 삼국전투기도 시즌 2는 제갈량사마의의 대결로 구성한다고 해 놓고는, 정작 제갈량은 이도 저도 아닌 색기담당으로만 굴려지다 오장원 전투에서 허무하게 죽어 지각을 기다리며 매주 챙겨 본 독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도중에 쉬는 기간도 있었고 악명 높은 지각 연재에 결국 10여 년을 끌어 간신히 완결시켰으니... 삼국전투기 후기의 이 작품을 그리려고 참고한 서적들이나 애당초 "연의에 정사를 섞어서 쓰려고 했던 게 실책이었다"는 최훈의 토로만 봐도 창작물에서 삼국지 관련 매체를 다루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2017년 제작된 중국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 역시 제갈량 사후 조상 일파와 사마의 일파의 권력투쟁, 사마의의 꾀병행각, 고평릉 사변과 이후 사마의 일파의 권력장악 과정을 그려내면서 그나마 21세기 삼국지 관련 영상물 중 제갈량 사후부터 사마의 사망까지를 제대로 그려낸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103] 물론 흥세 전투를 왜곡시킨 한계가 있지만, 이는 드라마 특성상 어쩔 수 없는 한계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104]

코에이삼국무쌍 시리즈도 진삼국무쌍 5까지는 이런 면을 보였지만 6편부턴 이 점을 해결하고자 했는지 진나라를 신규 세력으로 추가했으며 사마사, 사마소 등 종반기의 인물도 등장시키고 있다.

9.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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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도원결의 장면이다.[2] 오랫동안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나관중의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졌으나, 근래 연구에선 명나라의 『삼국지전』 계열 판본들(예: 『통속연의삼국지전(通俗演義三國志傳)』, 『전상삼국지전(全像三國志傳)』이 나관중의 원본에 가깝다고 본다. 나관중이 지은 진짜 제목은 알 길이 없다.[3] 판본에 따라서 기존 내용이 수정되거나 덧붙여지는 경우가 있어서 그 시기를 따지면 청나라까지 넘어간다.[4] 이문열 평역판인 《삼국지》의 출판사. 총 10권.[5] 황석영 번역판인 《삼국지》의 출판사. 총 6권.[6] 송도진 번역판인《삼국지》의 출판사. 총 6권.[7] 정원기 번역판인《삼국지》의 출판사. 총 10권[8] 박기봉 번역판인《삼국연의》의 출판사. 총 12권.[9] 정비석 번역판인 《삼국지》의 출판사. 총 6권.[10] 요시카와 에이지의 일본어 번역판인 《삼국지》의 한국어 중역판 출판사. 총 10권[11] 여러 시대의 저술이 층층이 쌓여있다.[12] 엄밀히 말해 재미나게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연극 대본에 가깝다.[13] 현대 작품 중에서 대표적으로 비슷한 사례를 하나 들자면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은 로마 역사의 큰 줄기를 따라가면서 읽는 일종의 수필이자 소설로 봐야지, 이 책의 내용을 진짜 로마 역사로 믿어버리면 많이 곤란하다.[14] 이십이사차기라는 서적을 지어 청대까지 남아있는 정사서 22종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와 비판을 남겼다.[15] 단, 인재가 많았다는 사실과 그 시대의 인재들이 후대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중국 삼국 시대의 인물 중 후대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들로 학문적으로는 훈고학, 경학의 시조로 꼽히는 정현, 논어의 주석을 남긴 하안, 노자의 주석을 남긴 왕필, 정사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 춘추좌전집해를 남긴 두예, 해서의 개조로 꼽히는 종요, 문학에서 유명했던 조조, 조비, 조식, 중경신부를 만든 순욱, 정치적으로는 위나라서진을 건국한 조비사마염, 둔전제를 건의한 한호구품관인법을 제정한 진군, 사회적으로는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 오두미도를 전파한 장로, 베트남과 관련해서 영향을 끼친 사섭 등이 손꼽힌다. 한편 일본의 전국시대나 한반도의 후삼국시대, 삼국시대 앞 시대 중 하나인 초한전쟁 시기를 살아간 사람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후대에까지 영향을 줬다고 볼 만한 인물은 많지 않다. 사실 문학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고 그 시대를 만든 삼국의 군주들인 유비, 손권이 조조보다 영향력이 못하다고 할 수도 없다. 제갈량 같은 인물은 저 중에 들어가지 못하는데도 지금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이다.[16] 달리 말하면 관우, 제갈량처럼 아예 신으로 섬겨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유관장 등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후대의 온갖 서적에서 이런저런 대조를 위해 회자되는 이러한 인물들이 후대에 사회/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장각 등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무후(제갈량)는 뻔질나게 나오고, 당장 현대에도 동아시아 3국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유비, 조조, 공명 정도는 알고 있는데다, 이 시기와 후의 각색으로 만들어진 사자성어도 상당 수가 흔히 쓰이는 정도이니.[17] 반대로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이와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삼국지에 워낙 온갖 교활한 술수와 책략들이 넘쳐 흐르다 보니 삼국지를 3번 이상 열독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사기꾼지략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18] 각자 특색이 강했던 동아시아 문화권이지만 삼국지에 등장하는 개개인의 인물상이나 명언, 사건 등을 공유하고 있고 생활에 적용하는 등, 동아시아 문화권을 하나로 잇는 대표적인 아이콘이기도 하다.[19] 다만, 삼국지평화는 삼국지연의와 비교시 꽤 많은 부분이 다르다. 애당초 삼국지평화는 대중에게 그때그때 어필할 만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으므로, '역사'에 방점을 놓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20] 정확히는 ~이(가)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될지 식으로 매회마다 바뀐다. 1회는 "동탁의 목숨이 어찌 되려는고", 119회는 "어떻게 오를 치려는고"이다.[21] "동탁의 목숨이 어찌 되려는고"가 "동탁의 목숨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이렇게 나온다.[22] 참고로 보통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부터 오가 멸망하는 280년까지를 연의의 배경으로 삼는데 이 기간 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사람은 사마부(180년 ~ 272년)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태어나서 서진 건국까지 보고 죽었다.[23] 물론 일국의 황제까지 지냈던 유비인 만큼 기록 자체는 결코 적진 않지만 초반부의 기록은 상당히 부실한 편이다. 황건적 토벌 이후 유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띄엄띄엄 있는데, 예를 들어 본전에는 '적에게 패해 공손찬에게 달아났다'고 되어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적이었는지는 서술되어있지 않아 배송지가 주석으로 붙힌 영웅기 기록에 따라 유비가 싸웠다는 동탁군이라는 추정이 있다.(동탁군 중 어떤 장수인지는 명시되어있지 않다) 이후 공손찬 휘하에서 평원상이 되었다가 원소군과 싸우기도 하고 이후 서주의 군벌이 되는 등 명망이 높아지는데 구체적으로 뭘 잘한 건지 얼마나 잘 싸운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원래 의병장 출신으로 현위직 하나 받았던 유비를 조조가 좌장군이란 높은 벼슬(오자양장 중 하나인 우금이 받은 가장 높은 직위이다)을 주면서 포섭할 정도로 거물이 된 것을 보면 뭔가 활약이 뛰어났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24]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국지연의 마지막 주인공이 강유인 점도 납득할 수 있다. 그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이자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였으니까 말이다.[25] 촉한정통론 문서에 보면 알겠지만 송대부터 청대까지 촉한정통론이 대세였으며,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원말 명초기는 관우가 황실에 의해 제왕으로 모셔지던 시기이다. 한마디로 현대에 와서 재해석론이 일기 전 청나라 시대까지는 중국 대다수가 촉빠 성향이었다. 당연히 중국인이 중국인들 보라고 쓴 소설 역시 이 성향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조위, 혹은 그 뒤를 이은 서진이 오래 갔다면 조위정통론이 자리잡았겠지만 서진이 금방 멸망하면서 그렇게 되지 못했기에 중국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 조조는 태조가 아니라 그냥 역적으로 캐릭터화된 것이다.[26] 연의에서 제갈량의 첫 활약이었던 박망파 전투는 사실 유비의 작품이다. 유비가 복병을 설치해, 하루아침에 자기 병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나니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게 격파당했다.[27] 다만 작품 초반에는 유비가 지혜로운 모습을 보이는 부분이 꽤 많다. 황건적과 싸울 적에는 유비가 작전을 짜는 부분도 있으며, 서주 시절 조조의 견제를 받아 이호경식이나 구호탄랑 등의 계략에 당할 때도 오히려 유비는 조조와 순욱의 꾀를 꿰뚫어본다. 결국 계략에 빠진것도 조조가 황명을 이용하자 어쩔 수 없이 원술과 싸웠다가 여포의 뒷치기에 당한 것이며, 논영회 때 조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겁쟁이인 척하는 임기응변도 있다. 그러나 원소에게 의탁하고 여남에서 박살나 제갈량을 얻으면서 상대적으로 전과 같은 머리 쓰는 장면이 적다.[28] 수호전의 작가 시내암은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29] 중국 속어 중에는 "유비가 아두를 땅에 던진 것은 인심을 매수하기 위해서"라거나 "유비는 울어서 강산을 차지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속담들은 연의의 유행 이후 등장한 것이다.[30] 물론 중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나 도교 단 하나만이 아닌 유불도 삼교를 모두 이해해야만 하며, 무위의 치 개념도 따라서 유교도교 양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도교적 해석의 무위의 치는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즉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를 말하고, 유교적 해석으로는 공자가 요순에 대해 평가했듯이 공손하게 자신의 몸을 낮추고,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어진이들을 불러 모으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요순 시대를 극찬하던 것도 공자이기도 하고 여기서의 무위의 치 개념은 도교라기보다는 유교적 개념에 가깝다. 다만 그렇다고 도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개념이라는 것도 물론 아니다. 노자와 공자의 대화… 혹은 대화했다는 전설이라든가 초기 유교와 도교 개념들은 상당히 겹치는 것들이 많다.[31] 후대에 갈수록 관중 악의보다 거의 전설상의 인물들인 이윤여상에 제갈량이 자꾸 비유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전설적인 군주 탕왕의 재상인 이윤이나 주문왕의 재상인 여상도 이런 식으로 재야에 머물다 덕망 있는 군주에게 등용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여기에 더해 선비로서 사심 없이 충심을 다해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는 점도 추가된다.[32] 이런 경향성은 현대 역사물에서도 자주 보인다. 왕조 시대의 인물이 뜬금없이 민주주의 정신의 설파자가 된다거나, 세종처럼 사대를 중히 여긴 조선 국왕들이 자주정신의 이름으로 중국에 한 방 먹이는 장면이라든지 등등. 민주주의니 자주민족 같은 현대 대중의 긍정적인 이데올로기를 주인공으로 밀어주는 긍정적인 인물에게 이식시킨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33] 본디 나관중본은 구전적 성격이 많이 남아있었고, 당연히 통속적인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위/촉/오의 구성이 비교적 평균적이라 어느 소속이든 슬기롭고 충성스러우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통속연의>이고, 아무튼 각 인물들이 멋있으면 그만이었다. 나관중본의 경우는 관우의 죽음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이를 적토마올가미에 걸려 넘어져 관우가 붙잡히고, 손권 앞에서 영웅적 최후를 맞는 것으로 소설적 성격이 강하게 각색한 것은 모종강본이다.[34] 한편으론 모종강이라고 100% 촉을 쉴드 치진 않았다. 일례로 관우가 손권의 딸을 개의 딸 운운하며 모욕하는 장면에선 협평으로 그럼 유비는 그 개의 딸과 결혼한 거냐며 비판한다. 여기에 노숙이 유비 측이 익주를 먹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는 문서를 가지고 오자 주유는 이런 종이 쪼가리를 어떻게 믿냐며 분노하는데, 여기서 “원래 문서란 믿을 게 못 된다. 형주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협평이 들어간다. 유비 측을 은근히 사기꾼처럼 볼 수도 있는 협평이다.[35] 다만 사마의의 전술적 패배가 그렇게 크진 않았고, 제갈량을 교전으로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해 요충지를 수비하는 전략을 취해 제갈량의 전략적 공세 목표(장안 공략)는 돈좌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 상방곡 전투에서 제갈량이 사마의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서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넣는 등, 대승을 거두는 장면들도 대부분 연의의 창작이다.[36] 물론 이건 다 망할 제자 놈 때문이긴 하다. 물론 그 제자를 기용한것도 사령관의 책임이니 제갈량이 책임을 피할수는 없다.[37] 유비의 친척으로 설정된 유연의 아들 유총이 진나라를 멸망시킨다.[38] 서진의 후신인 동진의 진명제가 그것과 관련된 진실을 듣고는 "그게 사실이면 그 진나라가 오래 못 간 건 당연하고 이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라고 한탄했을 정도로 사마씨의 찬탈은 탈법의 정수였다. 그러니 진수가 그걸 그대로 쓸 수 있을 리가 없다.[39] 유비가 하후돈을 격파한건 촉서 선주전에 나오므로 정사이지만 이는 제갈량을 만나기 전의 일이다.[40] 오히려 삼국지평화에서는 유관장 삼형제가 여포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쫒아버리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가 장비와 관우 상대까지는 대등하게 싸우다 유비가 가세하자 그제야 물러난 것으로 각색하여 여포의 무예는 높이고, 유관장 삼형제의 무예는 낮아졌다.[41] 촉한의 남만 정벌은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나오는 정사이고 칠종칠금은 배송지가 인용한 한진춘추와 화양국지에 나오므로 실제 기록이 있지만,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축융, 동도나, 아회남, 타사대왕, 올돌골 등 세부적인 내용은 나관중의 창작.[42] 단적인 예가 양대장이다.[43] 그 예시가 위에서 발췌한 리동혁이다. 가정본이 원본이 아니라는 걸 역자 스스로도 명시했으나, 본삼국지에서는 여전히 '가정본'을 '나관중본'이라 부르고 가정본의 글을 나관중의 글로 간주한다. 즉 리동혁이 '나관중본'이라 부르는 건 엄밀한 의미의 나관중본이 아니며 이건 역자 스스로도 의식하고 있다.[44] 본디 명나라 양신(楊愼)이 지은 <임강선(臨江仙)>의 일부를 모종강이 작품 첫머리에 인용한 것이다.(번역: 정원기. 《정역 삼국지》 1권 )[45] "운장은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옥황상제의 조칙이 있으니 범부와 승부를 겨루지 말라"라는 목소리를 하늘에서 듣고는, 싸우다 말고 승천한다.[46] 이에 리동혁의 「본삼국지」는 모종강본에서 삭제된 부분을 가정본 등 다른 11가지 판본에서 따와 되살렸는데, 이 점으로 지지자들에게는 '본좌 삼국지'라며 찬사를 받는 반면, 비판자들에게는 “리동혁은 모종강본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12가지 각종 판본을 모조리 뒤섞어 놓아서 내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쓸데없이 가정본을 문맥에 맞지 않게 끼워넣어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져 왔다. 「본삼국지」는 초판본 11권 부록(인명·관직사전)밖에 가치가 없다''는 극딜을 당하는 등 양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다.[47] 오히려 조조는 서주에서 20만에 달하는 민중을 학살한 인간이다. 이유도 달리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열받아서다. 애시당초 도겸이 조조의 아버지 조숭을 호위하라고 보낸 병력들이 조숭을 죽이고 보물을 뺏아 달아났는데 그걸 빌미로 도겸을 친 것은 그렇다쳐도 아무 잘못없는 서주의 백성들까지 마구 죽여댄 것이다.[48] 한고조가 백사를 벤 고사를 뜻한다.[49] 즉 한자 사이에 ~하다. 같은 류의 것이 들어간 것. 사자소학을 읽어본 사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父生我身하고, 하는 식.[50] 증거는 인문본에서는 허사와 왕해가 원술에게 명상이 아닌 명공이라 칭한 부분이 결정적인 증거.[51] 장정일도 이 떡밥을 물고 연의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할 겸 장정일 삼국지를 썼다.[52] 사실 명나라의 모습이 있어 후대에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진여록燼餘錄이 그러한 성향이 있다. 몽골인들이 악당으로 나온다.[53] 현대 그리스인들도 고대 그리스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비극 선호 정서를 이어받아서 지금도 희극보다 비극을 좋아한다.[54] 삼국지뿐만 아니아 동아시아권 고소설들은 대체로 로망스라는 단어를 써서 설명하는 편이다.[55] 주연 격인 타이라 가문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가 미나모토 가문에게 멸망당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56] 그나마 강남 지역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서진의 뒤를 이어받은 동진은 오래 간 편이었지만 이후 두 번 다시는 재통일의 기회를 보지 못했고, 이마저도 후한과 조위처럼 유유유송에게 사직을 빼앗긴다.[57] 물론 한신을 주인공을 설정한 2차 창작물들을 기준으로는 역시 허무주의가 적용되긴 한다.[58] 강소성+절강성 쪽이다.[59] 유벽, 공도도 연의에선 유비의 부하로 들어왔으나 얼마 후 조조와 싸우다가 전사했다.[60] 41회와 42회는 장판파 에피소드다.[61] 51회~57회는 제갈량과 주유가 형주를 놓고 지략 싸움을 벌이는 에피소드다.[62] 손책은 29회에서 죽었다.[63] 64회에서 마초는 유비의 수하가 되며, 한중에 남았던 방덕은 67회에서 조조의 수하가 된 뒤 74회에서 관우와의 싸움에서 패사한다.[64] 오로 침공은 시기상으로 유비 사후인 223년 4월 이후~옹개 토벌전인 225년 이전이 되어야 하는데, 마초는 실제로는 이미 유비가 죽기도 전인 222년에 병사하였다.연의에서는 마초의 사망 시기를 남만 정벌이 끝난 225년 이후로 늦췄다.[65] 손준은 손침보다 먼저 죽었다.[66] 황조 사후에 전력 공백이 생긴 강하를 지킬 병력 및 태수직을 받아서 채씨 일족을 피하는 계책.[67] 삼국지연의 1회에 실렸고, 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에도 수록되어 있다. 후한 말기부터 시작되는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 당나라, 오대십국시대,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의 흥망은 물론 청나라 멸망과 국공내전까지 중국사를 통째로 함축한 명문으로 꼽힌다. 다만, 삼국지 평역 작품들 중에 이 문장이 그대로 수록되는 경우는 드물다. 아무래도 서두에 해당되는지라 작가마다 개인의 감상을 적어 넣기 때문인 듯하다. 평역이 아닌 일반적인 번역의 삼국지는 이 문장이 있다. 와이파이 삼국지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영역 문장은 The empire, long divided, must unite; long united, must divide. Thus it has ever been.이다.[68] 전문적이 아니고, 일반 대중이 쉽게 알 수 있는 일.[69] 참고로 후스는 홍루몽을 더 좋아했고 삼국지연의에 비판적인 인물이었다.[70] 19세기 권위있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중국어 교수.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의 관련 인물이기도 하다.[71] 구비 문학으로 시작한 문학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를 나관중, 모종강 같은 이가 정리한다고 해도 개개의 화소들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지라 통일성을 해친다고 무작정 쳐내지는 못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들이 남게 되는 것이다.[72] 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의 삼국지 판본 대부분이 중국어와 중국사 관련 전문가가 아닌 소설가가 번역한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평역이 많았고, 작가의 견해를 덧붙혀 원래 삼국지를 제멋대로 수정한 경우가 많았으나, 그의 삼국지연의 번역은 원전에 충실한 판본이다.[73] "수재秀才: 한나라 때 시작된 효렴과孝廉科와 함께 실행되었던 과거의 과목."(by 송도진 번역 삼국지 1회 주석) 효렴은 연의에서 육적이나 왕랑이 나오는 장면에서 몇 번 언급된다.[74] 이에 대해서는 상고한어상 병주와 형주가 실제로 유사한 발음으로 들려서 헛갈리기 쉬웠다는 설명이 황석영 삼국지에 역자 주로 나온바 있다. 실제로 연의에서는 사마의조상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환자 행세를 할 때, 병문안을 핑계삼아 확인하러 온 조상의 부하가 형주로 간다는 얘기를 하자 병주로 잘못 듣는 시늉을 두 번이나 하는 장면이 있다.[75] 190년 동탁의 명으로 소제를 독살하나 동탁 사후 처형될 위기에 몰리자 이각이 이유를 변호했다.[76] 이 부분도 허구. 실제로는 복병을 만나기 전에 조조군이 무사히 퇴각하고 이후 뒤늦게 도착한 유비군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물론 정사에서 유비네가 공을 날로 먹은 건 아니고 강남을 장악한 손권이 겨우 3만 군사를 준비해올 때 한낱 객장 신분으로 2만 명이나 되는 군사(+휘하 명장들)를 동원해서 온다.[77] 이 부분은 조조가 최초에 형주/남군 중 어느 쪽으로 가는지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조조가 형주 길로 가던 중 조운의 복병을 만나 패주한 후 남군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가능성도 있다.[78] 38회에서 제갈량천하삼분지계를 논할 때 언급된다.[79] 주로 촉한의 인물들이 형주를 가지고 손오의 인물들과 실랑이를 벌일 때 나온다.[80] 곽가가 죽기 직전에 이곳에 머물렀는데, 당시에는 기주의 하간군 역현에 속한다.[81] 당시에는 익주의 한중군에 속한 포중현으로 짐작된다.[82] 그것을 간단히 알아보려면 주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주가 서서히 늘어나 결국은 주가 엄청난 수로 난립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을 재통일하는 데 성공한 수문제는 군을 폐지하고 전국을 9주로 나누었으며, 그 밑에 바로 현을 두어 정리하게 된다. 그러다가 수양제가 다시 그 사이에 군을 두는 것으로 정리하여 한나라 대로 잠시 돌아갔으나 당나라 때 도-주-현제를 확립했고 광역행정구역의 명칭이 도에서 로, 그리고 로에서 성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명, 청 때까지 그대로 쓰이게 된다.[83] 작중에 나오는 서주성도 팽성군을 일컫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문에 적지 않은 이유는 서주는 당시에는 팽성국과 하비국 낭야국 등이 속한 광역행정구역을 일컫는 용어로도 존재해서 역주와 포주 등의 사례와는 다르다.[84] 어쩌면 기대승 본인이 읽었는데 내용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한나라의 국왕까지 읽을 정도의 베스트셀러 인기소설을 남은 읽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내로남불 같아서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한 걸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 해줄게[85] 역사서만 봤다면 차라리 류성룡 같은 문관이라면 모를까 재상이었던 제갈량을 장수였던 이순신과 동급에 놓을 수 없다. 다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 게, 연의가 조선에 들어오기도 전인 문종 대에 문종과 수양대군이 병법을 논하며 문종이 "나는 제갈량에는 조금 못 미칠 듯 하다." 라며 자뻑을 했던 기록이 있다. 이미 연의가 나오기 전에도 군사적인 의미로 제갈량을 언급하는 게 아예 뜬금없는 일까진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긴 했을 테지만 애초에 연의도 당연히 저술할 때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어느 정도 반영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86] 그리고 또 하나, 정조 임금은 이순신을 제갈량보다 높게 봤지만 정작 이순신은 자신을 제갈량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물론 사회상 겸손의 의미일 수도 있긴 하지만 전술과 병기를 창안하고 군대를 조련하여 적과 맞서는 수준을 넘어 국가 전체의 운영을 혼자 도맡아 부국강병을 이뤄낸 제갈량이니만큼 그런 자리에까지 가보지도 못했던 이순신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87] 물론 이 부분은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를 과소평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임진왜란이 중후반에 접어들었을 때(명량해전 직전) 이미 이순신은 조선을 먹여 살리는 거나 다름없는 위치에 서 있었다. 이때 조선 수군은 육군에는 화약과 화포를 공급하고, 조정에는 종이와 소금을 공급하는 군수공장의 역할도 하였으며, 의병들도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했기에 포위당할 염려 없이 안정적으로 관군과 합류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운송을 뱃길로 하던 조선의 조세 운송로를 지켜내고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보급로를 새로 개척한 것도 조선 수군이었다. 이순신의 강대한 세력 아래 전라도는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박살나기 직전까지 일본군의 발 아래 밟히지 않을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순신이 남해와 서해 일대를 장악하면서 평안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간 고니시를 필두로 한 대부분의 일본군은 보급이 끊어지면서 퇴각해야만 했다. 시대도, 입장도 달랐던 만큼, 제갈공명과 이순신 간에 우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88] 짐작했을 듯이 연의 속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중 북두칠성에 수명을 연장케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목이다.[89] 실제로 박종화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며 이문열, 황석영도 한학에 소양이 있다. 박종화는 실록은 고사하고 연려실기술조차 국역이 안 되어 있던 1970년대 이전에 굵직한 역사물을 몇 개씩 써내던 사람이다.[90] 한자가 뜻글자라 한들, 시대와 문화, 맥락에 따라 같은 단어도 뜻이 바뀌며 연의에는 속어들도 튀어나온다.[91] 다만 원작에 연연하지 않겠다면 번안 삼국지도 꽤 괜찮은 선택이다. 특히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소설로서의 매력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92]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꽤 있다. 일단 고우영 삼국지부터가 그렇다. 90년대까지는 5권짜리 삼국지들이 많이 나왔다.[93] 아동용 삼국지 중 5권으로 편집된 판본들에선 대개 적벽대전이 4권쯤에 벌어진다. 엄청난 분량 삭제를 볼 수 있는 부분. 이런 삼국지들은 대개 촉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다시 말해 촉 하나만 중심으로 해도 5권이나 되고 위, 촉, 오 전부 다루려면 분량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난다. 또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의 경우 관도대전 같은 부분이 내레이션으로 넘어가고 제갈량 사후는 단 1권으로 촉한 멸망까지만 다뤘는데도 60권이나 되는 분량이다. 정말 연의에 있는 내용을 다 그려냈다면 60권으로도 모자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94] 다만 제갈량이 거의 신급으로 격상된 것은 연의의 창작이 맞지만 제갈량은 당대는 물론 연의가 나오기 전까지 전설 대접을 받은 인물이다.[95] 특히 삼고초려-적벽대전-한중 공방전으로 이어지는 유비군의 전성기.[96] 대표적으로 관흥장포. 물론 이 2명은 실제 역사에서도 일찍 죽으니 캐릭터에 각색을 했다지만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빨리 퇴장해야 할 필요는 있다.[97] 심지어 사마의가 주인공인 중국 드라마에서도 제갈량 사후는 억지 전개가 많아 재미없다는 평가가 꽤 있다.[98] 118~119회의 강유의 항복~종회의 난과 맞먹는다. 거기다 종회의 난에서 오멸망전 사이의 16년이라는 시간은 거의 휙 지나가는 건 덤.[99] 이들은 그나마 진태와 더불어 강유의 북벌 장면에서 활약하기라도 한다. 그 외에는 모조리 지못미.[100] 그것도 촉한의 마지막 불꽃이자 장렬함의 극치였던 종회의 난과 성도대학살은 생략했다. 그냥 강유가 항복 명령 받고 바위를 칼로 내리치는 장면 후 에필로그 식으로 유선이 사마소와의 연회에서 촉한을 그리워하지 않은 장면만 나오고 끝.[101] 대군사 사마의가 딱 이 포맷을 딴 드라마다. 1부는 조조와의 관계, 2부는 제갈량과의 관계가 극의 핵심이다.[102] 여담으로 이 소리를 하는 독자는 최훈이 야구친구와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그렸던 최민규 캐릭터와 똑같이 생겼다.[103] 2010년 제작된 신삼국은 제갈량 사후를 다룬 것이 고평릉 사변 단 하나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전후맥락을 잘라낸 바람에 부실하게 다루어졌으며, 사마의 죽음 이후 사마염이 황제에 오르고 사마씨의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나래이션 몇줄로 작품이 끝난다.[104] 흥세 전투를 제대로 그려내려면 반드시 사천성의 위험천만한 산악 지대에서 촬영해야 하는데, 그러면 시간과 돈이 엄청 많이 소요된다. 실제로 84부작 삼국지 드라마는 등애촉한 정복을 재현하고자 실제 등애와 휘하 군사들이 올랐던 산악 지대에서 촬영을 했다.[105] 출처: 1, 2, 3[106] 낙봉파라는 지명 자체가 허구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는 삼국지의 허구 지명들이 속속 다 생겨있다. 제갈량의 거처인 융중을 자처하는 곳도 여럿이고(이쪽은 실존했던 지명이지만). 이게 다 관광객들 대상으로 하는 돈벌이용.[107] 수호전이라는 말도 있다.[108] 태조 왕건에서 왕건, 신숭겸, 박술희가 대표적이며 각각 유비, 관우, 장비의 캐릭터가 입혀졌다. 대조영의 대조영, 걸사비우, 흑수돌도 마찬가지다.[109] 사실 이중잣대니 뭐니 해도, 당시에는 혈육(단 일반적으로 부모는 제외. 불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에 얽매이지 않는 걸 좋게 보는 풍조가 있었다. 전국시대에는 연소왕이 악의를 참소한 태자를 두들겨 팼던 이야기가 있고, 같은 삼국시대에 조조는 전위의 죽음을 조앙의 죽음보다 더 애통하게 여겼다. 더 넓게 보면 대의를 위해 혈육들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장려받던 게 전근대의 시대상이었다. 위나라를 위해 아들을 사지로 내몬 왕이가 여장부로 칭송받고, 민담에서 아들을 호랑이에게 던져주는 효부의 이야기도 있을 정도. 현대에도 가진 게 많은 사람이 혈육보다 타인을 챙기는 것을 좋게 보는 건 변하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110] 당시 위촉오의 병력으로 백만대군은 물론 수십만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삼국시대 가장 대규모 출병이였던 적벽대전도 최대 25만 정도로 추정되고, 나머지 전투는 더 적었을 것이다. 이 당시 중국의 인구가 수천만 정도였기는했으나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고 유량민도 발생했기때문에 실제 인구와 명부상 인구의 차이가 컸다. 그래서 실제 동원할 수 있던 인구수가 적을 수 밖에 없던 것.[111] 당연히 유럽 고전 서사시나 역사를 배우며 자란 서양인들은 이런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 판타지의 고전 반지의 제왕에서도 세계의 운명이 갈리는 최종결전에 겨우 몇 만 단위 병력이 나오는 수준이고 라스트 킹덤의 원작소설처럼 중세 초기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 유능한 기사가 이끄는 50여 명이면 국경을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 있고 잘 훈련된 창병 100명이면 전황을 뒤집을 대군이며 바이킹 천 명이면 왕국의 멸망을 부를 대군세다. 당장에 이교도 대군세라고 이름붙여진 바이킹의 대침공은 겨우 수천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나 당시 잉글랜드의 7왕국 중 머시아, 노섬브리아, 동앵글리아를 무너뜨린 강대한 침공이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이보다 300여 년 전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측 전사자만 3만 명 가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