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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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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초대 임시 제2대 감국
조무왕 정습 조문왕 정극장
제3대
정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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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61B32><colcolor=#fff>
동녕국 초대 국왕
조무왕 | 潮武王
파일:external/g.udn.com.tw/f_4313315_1.jpg
출생 1624년 8월 27일
에도 막부 히젠국 히라도
(現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시)
사망 1662년 6월 23일 (향년 37세)
동녕국 승천부
(現 대만 타이난시)
능묘 정성공묘
재위 기간 동녕국 초대 국왕
1655년 ~ 1662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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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61B32><colcolor=#fff> 성씨 정(鄭) / 주(朱)
삼(參) → 성공(成功)[1]
명엄(明儼) / 대목(大木)
아명 복송(福松)
시호 조무왕(潮武王)
부모 부왕 정지룡(鄭芝龍) (1604~1661)
모후 타가와 마츠(田川松) (1601 ~ 1646)
배우자 정실 동씨
자녀 아들 정경
신장 약 180c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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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성장2.3. 반청복명 운동2.4. 타이완섬 정복2.5. 스페인 제국과의 충돌과 사망
3. 그 이후4. 평가5. 창작물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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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성공은 격동기였던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군인, 정치가, 해적이자 동녕국의 초대 국왕이었다. 자는 명엄(明儼)이었으며, 아명은 복송(福松)으로 일본 이름이었다. 일본식으로 읽으면 후쿠마츠(ふくまつ)이다.

평생을 반청복명(反清復明) 운동에 바쳤으며 국성야(國姓爺)라고도 불리고 있다. 서양에서는 민남어로 국성야의 발음인 "Kok-sèng-iâ"가 변한 콕싱아(Koxinga/Coxinga)로 알려졌다. 어머니는 일본인이었으며 고향도 일본이었다. 이렇게 일본과 관련이 깊은 탓인지 일본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은 편이다. 그가 태어난 나가사키히라도(平戶)에서는 그의 탄생 축제를 열기도 할 정도이다. 어찌 보면 한국인들이 당현종때의 명장인 고선지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중국 혈통이면서 중국 대륙에서 밀려난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대륙을 차지한 거대 정권에 대항했으며 일본과 관련이 깊다는 점 등이 장제스와 비슷하다.
중국의 아들, 대만의 아버지
- 조너선 클레멘츠(Jonathan Clements)

클레멘츠는 영국의 작가로, 그는 2004년에 《해적왕: 국성야(國姓爺)와 명(明) 왕조의 몰락》[3]이라는 제목의 정성공의 전기를 출판했다.[4]

2. 생애

2.1. 출생

아버지는 명나라 말기의 관리이자 해적이며 거상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었으며, 어머니는 히라도번[5]의 번사 가와 시치자에몬(田川七左衛門, 1626 ~ 1696)의 딸인 타가와 마츠(田川松, 1601 ~ 1646)였다. 정성공은 일본의 히라도에서 태어나 7세 때 명나라(복건성)로 건너 왔다. 이 때문에 대만일치시기에는 내대융합[6][7]의 일환으로 대만 섬을 처음으로 정복한 일본인으로 선전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인 타가와 마츠는 중견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다가와 가문은 현재도 일본에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시치자에몬이 정지룡을 포섭하기 위해 준비해둔 의 딸, 즉 기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정지룡이 연회때 타가와 마츠에게 접대를 받은 것이다. 다가와 가문라고 보기엔 제대로 가문에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으며, '타가와 마츠'란 다가와 가문의 마츠(マツ)라는 여자로 알려져 있다. 한편 중국에선 정성공의 일본인 혈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가와 가문이 사실 중국계 일본인 가문이거나 중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버지 정지룡1604년 복건성 천주에서 출생했다. 아명은 일관이었으며, 젊은 시절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세례를 받아 세례명이 니콜라스였다. 히라도번 제3대 번주인 마츠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 1603 ~ 1637)가 주최한 연회에서 우연히 다가와 마츠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동침하여 정성공을 낳게 되었는데 이는 장래가 창창한 정지룡과 인맥을 쌓고 싶었던 다가와 시치자에몬이 계획한 만남이었다. 당시 타가와 마츠는 20대 초반이었는데 당시 일본인의 평균 연령을 생각해 볼때 미망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으며, 실제로 17세기에 정성공의 탄생 비화를 그려낸 책자들에서는 정지룡이 일본인 과부와 결혼하여 정성공을 낳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번주 가문인 마츠우라(松浦)씨는 헤이안 시대부터 일본 열도에서 수군(해적)으로 활약했던 해상 세력인 마쓰우라토(松浦党)의 당주, 즉 해적 출신이었다. 고려 말 왜구의 거점으로 지목된 3도(三島) 가운데 한 곳이 마츠우라토의 마츠우라[8]였을 정도였다. 히라도에는 에도 막부 이전까지 네덜란드 상인들이 교역하는 상관(商館)이 있었고, 해적 출신의 마츠우라 가문이 이곳에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쌓았지만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선포하고 히라도에 있었던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데지마로 옮겨버리면서 히라도는 쇠퇴하여, 지금은 일본의 한적한 어촌 정도로 남아 있다.

정지룡이 다가와 마츠와 동침하여 정성공을 낳을 때, 정지룡은 거상인 이단의 상단에 속해 있었다. 이단은 정지룡에게 자신의 부하인 안사제의 딸인 안씨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정지룡은 정성공을 임신한 타가와 마츠를 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안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타가와 마츠는 홀몸으로 아들 정성공을 키우게 되었다.
파일:external/www.hirado-net.com/boshi01-b.jpg 파일:external/b.blog.xuite.net/20.jpg
일본 나가사키의 정성공 모자(母子)상 대만 타이난의 정성공 모자(母子)상.
모친 타가와 마츠의 모습에 대한 묘사부터 확연히 차이가 드러난다.

1624년 8월 정성공이 출생했다. 그가 태어나기 전날에 대만에서는 거대한 태풍이 몰아쳤고, 그 태풍 속에서 한 마리의 고래가 춤을 추었다고 하며, 다음날 정성공의 어머니 마츠가 바닷가에 나오자 폭풍우가 잠잠해졌는데, 마츠는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다 산통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길에서 정성공을 낳았다고 한다. 마츠가 정성공을 잉태할 때의 태몽이 바다에서 나타난 거대한 고래가 그녀의 품으로 뛰어드는 꿈이었기도 해서 정성공은 평생 고래를 자신의 수호 동물로 생각했고, 그가 죽기 전에는 대만 바닷가에 죽은 고래 시체가 떠내려왔다고 한다.(출처: 조너선 클레멘스 《해적왕 정성공》)

정성공은 '행운의 소나무'란 뜻의 '복송'(福松), 일본어로 '후쿠마츠'라는 아명을 얻는다.

특히, 마츠(松)가 일본어로는 '기다리다'라는 뜻도 있는데 홀몸이 된 타가와 마츠가 기다린다는 의미로 붙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후 정성공은 어머니와 함께 히라도번에 살았는데 타가와는 정지룡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1629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정성공의 이부동생인 시치자에몬을 낳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순간에 이단의 사망 이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복건성 앞 안해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어 '왕'으로까지 불리던 정지룡이 그제서야 자신의 동생 정지연을 히라도번에 파견하여 정성공과 타가와 마츠를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타가와 마츠는 새 남편과 두 번째 아이 때문에 중국행을 거절했다. 이에 정지룡은 다른 동생인 정지아를 보내 다가와를 설득하는 한편, 정 안되겠으면 정성공이라도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타가와는 7살 된 정성공을 아버지 정지룡에게 보내게 되었다.

2.2. 성장

당시 동아시아 지역은 이민이 빈번하여 일본의 히라도, 필리핀의 마닐라, 베트남 등지에 모두 중국계 화교 이민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인 이민도 활성화되어 남양군도인도차이나 반도에 두루 퍼져있었다. 이러한 초국가적인 이민 활동은 공식적인 조공 무역과 함께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가장 중요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유럽 국가들도 사치품 무역 네트워크에 가담하여 동아시아 해역은 여러 세력이 각축하는 혼돈의 해역이 되었다.

히라도의 거리에서 성장하던 정성공은 난데없이 정지룡의 궁궐과도 같은 집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 하지만 불과 7살이던 정성공은 그럼에도 향수병과 어머니 타가와 마츠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씨다른 동생과도 어려서 친했던 사이였기에 편지로 계속 교류했다고《대만외지》를 비롯한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정지룡은 자신의 장남이었던 후쿠마츠에게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이름은 타가와 마츠가 정성공을 임신했을 때 정지룡 자신이 지어주었던 이름이었지만 정지룡이 중국에 건너가면서 쓰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또한 큰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대목이라는 자도 내려주었다. 정지룡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언어를 배우며 자기 세력을 키운 데 반해 안정적인 삶을 유지한 편이었다. 정성공은 유가적인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아 14세 때 수재에 합격하기도 했다.

정성공은 15세가 될 때까지 안해의 정씨 가문 저택에서 성장했는데 이 시기에 정지룡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라서 아버지를 자주 보진 못했고, 중국인 유모계모, 그리고 정지룡의 삼촌들의 손에서 자랐다. 정지룡은 당시 명나라의 관리이긴 했지만 이는 밀수와 해적질로 쌓은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명나라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정성공은 그저 아버지를 명나라의 충신이자 수군 제독으로만 알고 자랐다. 아마 아버지를 높여주려는 주변 인물들의 아부였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정성공의 훗날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명 정권은 군권을 장악한 정씨 집단에 의지하여 정씨에게 국성인 주씨를 사성하고, 정지룡의 아들에게 성공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정성공의 이름과 '국성야'라는 칭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정지룡은 아들 정성공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돈과 군사력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 즉 가문의 명예를 정성공에게서 얻고자 했다. 정지룡 본인은 자신의 무역 왕국에 대한 관심이 그 어떤 정권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이었다. 그랬기에 동향의 권유로 정지룡은 청나라에 투항했다. 정성공이 이를 만류했으나 거부당하자 정성공 자신은 이탈했다. 정지룡은 청나라 조정이 남방 3성을 관할하게 해줄거라 기대했지만 청군은 약속을 어기고 정지룡을 베이징으로 압송했다. 정지룡은 정성공에게 어렸을 때부터 유교 경전들을 가르쳤고, 무술도 가르쳤는데 결과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정지룡의 교육으로 정성공이 충의를 다해 반청복명 운동에 투신하여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정지룡이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2.3. 반청복명 운동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xinga_territory.jpg
정성공의 세력 범위
빨강색: 정성공의 직할령. 주황색: 정성공의 영향권.
1644년 농민 반란인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과 함께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남명의 제2대 황제인 융무제(隆武帝)로 옹립하여 청나라의 남정군에 대항했다. 비록 1647년(청 순치 4년, 남명 영력 원년)에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정지룡은 아들인 정성공에 대한 회유 공작에 실패하여 참수당했다. 이후 정성공은 아버지의 군사력을 이어받아 하문 인근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리고는 무역을 통하여 군비를 충당하는 한편 해징공의 작위와 절강, 복건, 광동 3성의 도독을 하사하겠다는 청나라의 회유를 거부하고 맹공을 퍼부어 1659년(청 순치 15년, 남명 영력 13년)에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진강을 비롯한 강남의 여러 거점을 점령한 다음에 명나라의 고도인 남경(南京)까지 진격하여 포위하는 기염을 토했다. 애초에 아버지 정지룡이 회유에 이끌려 투항한 후 압송되었기 때문에 정성공에게 있어 청나라에 대한 항복은 선택지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정성공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제해권을 활용해 상업 루트를 관리하며 자신의 왕국을 건립했다. 그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 네트워크에서 거액의 이윤을 거둬들여 부흥군을 부양하고 무기를 구매했다.

이듬해(1660. 청 순치 16년, 남명 영력 14년)에는 샤먼 전투를 지휘해 청나라의 수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자 청나라는 산둥에서 광둥에 이르는 동쪽 연해의 주민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켜 정씨의 명나라 부흥군이 연해 주민들과 보급 또는 통상을 할 수 없도록 청야작전을 실시했다.(천계령) 정성공이 육상기지를 상실하자 그의 무역 네트워크는 곧 기반을 잃게 되었다.

또한 정성공은 기회주의적인 명나라 출신 항장들의 계략에 넘어갔고, 부흥군 병사들의 군기를 어설프게 잡았다. 즉,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닥치고 사형급으로 엄하게 군기를 잡았는데, 잘 나갈 때야 이렇게 군기를 잡아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점점 전황이 악화되면서 이런 군기잡기로 인한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다. 정성공은 반청복명을 위해서 본토의 민심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계속 군기를 엄하게 잡으려고 했지만, 그 부하들 몇몇이 당면한 휘하 병사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약탈을 허용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상황은 개판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에 군중의 불만을 사게 되어 반란 사태가 일어나는 통에 곧 청군에 패배하게 되었고, 진강을 비롯한 주요 점령지를 모두 버린채 복건성 해안가의 근거지인 금문도로 밀려나게 되었다.

2.4. 타이완섬 정복

파일:명나라 국새 인영.svg 명나라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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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투 교전국
<colbgcolor=#F0C420> 명-호 전쟁
,1406 ~ 1407,
대우(호 왕조)
영락제의 몽골 원정
,1410 ~ 1424,
북원
람썬 봉기
,1418 ~ 1428,
대월(후 레 왕조)
토목의 변
,1449,
오이라트
경술의 변
,1550,
몽골 튀메드부
임진왜란
,1592 ~ 1598,
명청 전쟁
,1618 ~ 1644,
사르후 전투
,1619,
영원성 전투
,1626,
송산 전투
,1641 ~ 1642,
명-네덜란드 분쟁
이자성의 난
,1627 ~ 1644,
대순 }}}}}}}}}
파일:external/www.fjsen.com/002564aac91611a6b7c505.jpg
대만의 네덜란드 요새를 공격하는 정성공 군대
정성공은 평생을 명나라 부흥운동에 바쳤고, 명나라의 옛 도읍이었던 난징을 거의 되찾을 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7세기 중반, 대륙에서 명나라가 멸망하고 새로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자 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로 인한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결국 명나라 부흥을 위한 장기적인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그 거점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었던 타이완섬을 노렸다.

1661년 4월 29일에 정성공은 타이완섬(지금의 타이난)을 공격했다. 그는 네덜란드령 대만의 반네덜란드파 대만 원주민한족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봉기하여 네덜란드 제국 세력을 공격해 질란디아 요새를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인프라를 통째로 빼앗았다. 이후 네덜란드군이 질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질란디아 요새 성벽이 네덜란드 공격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 제4대 성조 강희제는 정성공의 대만 정복에 맞서 동쪽 연안 5개 성의 백성들을 해안에서 20km 떨어진 내륙으로 옮기고 그 이상 넘어서 바닷가 가까이로 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한다는 천계령(遷界令)을 내려 대응했다. 이 천계령을 제의한 것이 정성공의 부하로 청나라에 투항한 황오(黃梧)라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대만 섬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남겨놓고 간 사탕수수 농장도 있었고, 유능한 막료들도 있었기 때문에 정성공은 어떻게든 망하지 않고 잘 버텨낼 수 있었다.

남명의 제2대 황제였던 융무제는 정성공을 듬직하게 여겨 자신의 부마로 삼고 싶다고 했지만 황녀가 없어서 대신 국성(國姓)인 주(朱)씨를 하사했다. 그리하여 정성공은 '국성야'(國姓爺)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서양에서는 국성야라는 별명의 남중국 방언 발음인 '콕싱아'(Koxinga)로 알려졌다. 영문판을 비롯해 서양권 위키백과 일부는 아예 '정성공'이라는 본명 대신 '콕싱아'로 항목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이다. 난터우 현에 궈싱이란 지명이 있는데 여기서 따온 것이다.

한족들과 이들과 공생하던 원주민들은 정씨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동녕 왕국은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들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썼다. 다두 왕국을 통해 대만 원주민들과 교역을 했고 이들에게 농사, 중국어, 사냥, 덫이나 옷 등의 물건 제작을 가르쳐 주는 등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어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다.

하지만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그로 인해 정씨 세력과 남부의 평포족 간에 갈등이 생겨났다. 이때 다두 왕국의 전사였던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파포라족 아 텍 카우종(阿德狗讓 / 1592~1661)이 정성공의 원정으로 파견된 두 장군의 매복전술에 살해당했다. 정성공은 원주민들을 좀더 세력권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반항하는 원주민들을 탄압해 학살하거나 세력권 안에 있는 원주민들을 착취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정성공 사후 정씨 세력과 원주민들 간의 갈등 끝에 사록사 전투가 일어났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또한 정성공은 동녕국(명정시기)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의 역사는 중화권 그리고 동북아시아사로 편입되었다.

한편 반청복명 운동을 위해 일본 에도 막부에 원병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2.5. 스페인 제국과의 충돌과 사망

스페인필리핀 총독 돈 사비냐노 만리케 데 라라(Don Sabiniano Manrique de Lara, 1609~1679)에게 너네 '소왕국'을 정복할 수 있지만 불쌍해서 봐준다면서 순순히 조공을 바치라는 서신를 보냈다. 이에 만리케 데 라라가 보낸 서신은 정성공을 "중국 해안의 지배자이자 통치자인 정성공 귀하"라고 불렀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런저런 조롱을 담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쳐들어 올 수 있으면 와보십시오. 저희가 소왕국이건 대왕국이건 당신들이 쳐들어올 힘이 있기나 한지요? 듣자니 당신들은 만주족은 물론 네덜란드까지 죄다 원수를 졌지 않으셨습니까? 귀하 쪽에서 무례를 저질렀으니 앞으로 귀하와의 무역을 중단하겠습니다. 만약 무역을 다시 하고 싶으시면 사과하던가 하시지요."

필리핀 도독령은 대만과 인접했고, 스페인인들이 소수였으며 스페인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대만 정복 당시 네덜란드군은 요새에서 수비를 하는 입장이었고 정성공 군대는 공성전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정성공 측이 훨씬 더 막심했다. 정성공은 25,000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질란디아 요새를 공격했는데 동원 병력 중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12,500여 명이 전사 혹은 질병사했다. 비교하자면 당시 네덜란드측 사망자는 전사자와 병사자, 포로로 잡혀 참수된 사람 포함 1,600여 명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필리핀 도독령은 만약 스페인 본토에서만 병력을 조달받는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당시 라틴아메리카 북부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와 갈레온 무역으로 연결되어 입지가 나름 탄탄한 상황이었고, 때문에 정성공에 대해서 이런 도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 도독의 편지는 정성공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한편 정성공은 정지룡의 빈소를 지키다가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필리핀에서 중국인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헛소문까지 듣자 분기탱천하여 만주족과 연합하여 필리핀을 치겠다는 맛간 소리까지 늘어놓았다. 병상에서 고열에 시달리며 온갖 헛소리를 늘어놓는 정성공에게 부하들이
"온 세계가 당신께 숨죽이고 있습니다. 스페인도 그렇습니다."
라며 진정시켰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정성공은 병 때문에 골골대는 상황이었다. 정성공이 하루는 바닷가에 나갔다가 겁에 질린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리키면서
"저 쌓여 있는 참수된 시신들을 어서 치워라! 오, 저 시신들이 자신들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를 나에게 묻기 위해 왔다!"
라고 말하며 벌벌 떨었다고 한다.(출처: 조너선 클레멘스 《해적왕 정성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정성공은 1662년에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의 처형 소식을 듣게 되었고 정성공 역시 사망하게 되었다. 이때 영력제를 죽인 것은 정성공과 같은 한족 출신으로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였다. 오삼계는 나중에 청나라에 맞서 삼번의 난을 일으키면서 영력제의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만, 그게 진심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삼계에게 호응하는 옛 명나라의 유신이나 사대부는 한 명도 없었다.

훙서(薨逝)[9] 직전에 정성공은
"내 소임을 다 하지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하늘에서 황제 폐하를 볼 수 있겠느냐! 어찌 뵐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만 원주민들은 슬퍼하면서 그의 사당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3. 그 이후

끝내 정성공이 사망함과 동시에 반청복명의 기치는 장식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영력제 처형 이후의 새로운 명나라 황제도 옹립되지 않게 되었다. 정성공의 후계자인 정경이 새 명나라 황제 후보자를 왕으로 봉해 대접하긴 했다. 오히려 정성공 사후엔 동녕 왕국이 청나라에 대해 조공국으로 받아달라고 애걸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정성공의 아들이며 제2대 왕인 정경삼번의 난 때 청나라에 반기를 든 오삼계 세력에 호응했고, 본토 수복을 위해 군대를 보내 일시적으로나마 복건성을 다시 차지하기도 했으며, 천자로 모시는 명나라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씨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지는 않고 제후를 계속 자처했으니 반청복명의 기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경이 확보한 복건성 영토는 경정충과 청나라군에게 잃었고, 이에 실의에 빠진 정경이 1681년에 승하하자 동녕 왕국은 정경이 지명한 후계자인 정극장과 정극장의 동생인 정극상 간의 내분(동녕의 변)으로 인해 조금씩 몰락하게 되었다. 정성공의 손자인 정극상 대에 가서 세력이 완전히 분열된 뒤, 1683년 강희제가 정성공 휘하의 장수였던 시랑에게 지휘를 맡겨 해군을 편성해 대규모 남정을 실시하자 중과부적으로 펑후해전에서 패배해 정극상이 항복함으로써 동녕 왕국은 멸망했다.

이후 1732년 옹정제의 통치 때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한족의 군사작전인 대갑서사항청사건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다두 왕국도 멸망했다. 그래도 청나라는 정성공과 그 후예의 명예를 인정했고, 항복 이후 정씨 왕족들은 청나라 본토에서 그럭저럭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정성공은 일본에서 무역 전담항인 인공섬 데지마가 만들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정성공이 설탕 등의 무역 품목들을 독점하고, 폭리를 취해 동중국해의 무역을 주름잡자 포르투갈네덜란드의 상인들이 반발하게 되었고, 이것이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쳐 포르투갈은 아예 일본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4. 평가

"1,000년이 지나도, 세상은 이 일을 이야기하리라"
- 장황언(張煌言. 1620∼1664)
대만 역사에 처음으로 이름을 떨친 대만인이다. 대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맨 처음에 언급되는 인물은 대부분 이 사람이다. 대만 원주민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하고, 정성공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만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만한 일도 없다시피 했다.

허나 정성공은 대만을 복명반청의 기지로 생각했을 뿐 자기 자신은 철저히 중화인으로 생각한 중국인이었다. 이런 점은 나중에 대만을 통치하지만 평생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던 장제스와 비슷하다. 타국의 사례에 비교하자면 영국인으로서 싱가포르의 개척자인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와 비슷하다.

정성공 본인의 행적을 보면 절망적인 정세하에서 삼번의 왕들처럼 청나라에 충성했더라면 보장되었을 부귀영화를 준엄하게 거부했다. 그런데 아버지 정지룡이 순순히 항복했다가 받은 대우나 삼번의 난을 보면 정말 부귀영화가 따라왔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민족인 청나라와 계속해서 투쟁을 벌이고, 명나라의 영토를 회복하며 황제를 다시 옹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 때문에 마지막까지 명나라와 주씨 황제를 위해 충성을 바친 충신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정성공은 남송 시대의 비운의 명장 악비와 더불어 '명나라의 악비'로 평가되고 있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원숭환처럼 절망적인 정세하에서도 끝까지 명나라 황제에게 충성한 점 때문인지, 청나라에서도 정씨 가문의 충심을 높이 사 보복을 하지 않았고 현재 중국에서도 관우, 악비, 원숭환과 같이 꽤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반면 부정적인 평가도 상당하다. 끝까지 청나라에 항전하려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의외로 충신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면이 많다. 명나라 황실에 대하여 존대하긴 했지만 실제 권력은 정씨가 잡은, 이른바 후한말의 조조와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다른 반청 저항군 통솔자인 이정국에게도 제대로 협력하지 않았다.

이때 이정국은 100,0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광동을 공격했고, 그 맹렬한 공세에 순치제도 버티지 못해 장강 이남은 포기하자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때 이정국은 정성공에게 협공 좀 해달라고 편지를 9통이나 보냈지만, 정성공은 이걸 무시했다. 청나라라는 외적을 물리치면 본인이 할거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지원을 받지 못한 이정국의 공세 작전은 실패했고, 반청복명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

다만 정성공은 융무제를 받들었고, 이정국은 영력제를 받들었으며, 이정국도 정성공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정성공의 힘을 소진시켜 자신의 위치를 강화시키려던 것도 있었다. 어차피 장헌충을 따라다니던 도적 출신의 이정국이나, 해적 출신의 정성공이나, 다 도긴개긴이니 누굴 잘했다, 잘못했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겉으로라도 반청복명이라는 대의를 내걸고 공통된 적을 상대하고 있었던 능력있는 이들 두 사람이 서로 한 발씩 물러나 협력했더라면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또한 자기 잇속을 채우기에 우선인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다. 특히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으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랑이었다. 정성공은 유능한 장수와 반목하여 그를 청나라에 귀순하게 하여 스스로 패배 플래그를 세웠다.

오늘날 정성공 본인은 중국에서나 대만에서나 모두 동기나 인성, 그리고 행적은 무시한 채 어쨌든 네덜란드 손에서 대만을 탈환했다고 여기며 그 사실 하나만 보고 대만 탈환을 달성한 중화민족의 영웅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따지고 보면 대만 정복도 반청복명이라는 민족적 대의보다는 근거지 확보같은 현실적인 원인 때문이었다.

아무튼 대체로 대만에서는 높게 평가받고 있으며, 타이난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학도 세워졌다. 학교명은 국립성공대학. 대만의 명문대 중 하나이다. 그리고 신병훈련소성공령도 정성공의 이름을 땄다.

중국 본토에서는 그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대만은 우리땅 → 우리 땅을 먹은 나쁜 네덜란드 놈들 → 나쁜 놈들을 조진 정성공은 영웅'이라는 논리이다. 정성공이 네덜란드를 물리치는 내용을 다룬 영화가 나왔을 정도. 현재까지 대만 독립 문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 중국과 대만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반청복명을 외치던 조선에서도 정성공을 굉장히 좋아했으며, 인조에게 실망한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청나라에 항복하여 명나라를 배신한 인조를 정성공이 징벌하러 올 것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고, 숙종 때도 장길산의 역모 사건때
"바다에 사는 정씨가 장길산을 도우러 올 것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것이 훗날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의 원형으로 추정된다는 말이 있다.

전통적인 대만 독립 세력에게도 정성공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대만 독립 세력도 절대수가 한족이고, 대만에 한족이 대량 이주하게 된 계기가 된 정성공에 대한 평가가 나쁠 수 없다. 이들은 정성공을 중국과는 다른 대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고 있다. 긍정적인 평가이기는 하지만, "대만을 중국 땅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중화민족주의적 평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만 독립 세력은 반드시 정성공에 대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타이완 섬이 중국 대륙의 한족과 본격적인 관련을 맺게 된 계기가 이 사람이고, 정성공의 대만 정복은 다른 의미로 보면 대만 원주민에 대한 탄압의 시작이었기 때문. 오늘날 민주진보당 등의 대만 독립 세력은 "중국과 대만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원주민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띄워주고 있기 때문에 정성공을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예를 조금 들어보면 대만에서는 정성공이 처음 상륙한 4월 29일에 매년 타이난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서 기념 행사를 거행하고 있는데, 독립 성향 인사들의 비판적인 시각 때문에 이 행사의 위상도 다소 묘해지고 있다. 차이잉원 정부의 집권 2년째인 2017년 행사에는 그동안 중앙정부의 내정부장(한국의 행정자치부 장관격)이 참석, 주관했던 것이 타이난 시장 주관으로 격하되었다.

대만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나뉜다. 우선 한족 식민주의와 대만 원주민 탄압의 시작으로 보아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정성공은 해적으로서 대만 원주민이나 친청파 중국인, 그리고 유럽인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기도 했다. 반면 정성공이 대만을 정복하면서 네덜란드의 지배를 당하고 있었던 원주민들을 해방시켜주고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명나라 유민 세력인 중국인들과 대만 원주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고,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기에 꽤 호의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원주민들이 산골짜기로 쫓겨나게 된 건 동녕 왕국과 다두 왕국의 멸망 이후 청나라가 타이완 섬을 다스리면서 한족 불법 이민이 본격화한 이후였다.

이런 이유로 2016년에는 차이잉원이 원주민 탄압에 대해 대만 정부를 대표해 사과하면서 탄압 중 하나로 정성공의 원주민 학살을 들기도 했다. 또한 근래에는 동상이 먹물테러를 당하고 '정성공의 영혼이 꿈에서 원주민 학살에 대하여 사과했다'는 황당한 내용의 뉴스까지 뜰 정도이다. 그러나 대만 원주민은 이미 소수민족이 되었기에, 대만에서 위인 대접을 받는 정성공에 대한 평가 자체가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본인과 중국인의 혼혈인이었던 정성공이 정복한 대만은 이후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일제식민지되는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속에서 정성공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에 의해 각자의 관점으로 평가받아 왔다.

오늘날 중국 민족주의에서는 본토나 대만 할 것 없이 정성공이 타이완 섬에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냈다며 고평가를 하기는 하지만, 대항해시대 당시 네덜란드는 이웃한 포르투갈이 선점한 아시아 식민지들을 뺏어와야 하는 입장이라서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식민지 현지인 특히 중국인들에게 비교적 잘 해주는 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 잘해준 것이었고 착취나 학살 등 이런저런 나쁜 짓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대만 원주민들은 사탕수수를 기르는 법은 알아도 사탕수수를 정제해서 설탕으로 만드는 법을 몰라서 대만의 네덜란드인들 입장에서는 중국인들을 데려와야만 수월한 설탕 생산이 가능한 이유로 중국인들에게는 그렇게 함부로 모질게 굴지 못하던 편이었다. 나중에는 네덜란드령 대만의 중국인들이 벼농사가 불가능한 언덕배기에 차밭까지 만들었다.

정성공의 대만 정복 이전 네덜란드령 대만은 네덜란드인들과 중국인, 현지 원주민들이 서로 견제하며 갈등하던 사회였다. 이는 중국인들이 네덜란드령 대만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원주민들이 앞장서서 중국인 반군을 토벌한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정성공의 대만 정복은 대만 내에서 한족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대만의 중국화를 촉진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중화민국 해군의 호위함(frigate) 중에 뻥궁 '청궁급'(成功級)[10]이 존재한다. 중국 해군은 이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포함하여 앞으로 취역할 항공모함시랑을 함명으로 붙이기로 했으나 결국 취소되었고 실제 항공모함 이름은 랴오닝급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 해군에도 해사생도 훈련함으로 정성공함이 존재한다. 즉 양측 해군에서 모두 함명으로 붙여 기릴 만큼 존경받는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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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台南)에 있는 정성공을 모시는 사원

중국에서도 정성공 탄생 380주년인 2004년에, 정성공의 동상을 세웠다. 38m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기마 동상'이었으나 2010년 40m 짜리 칭기스 칸 동상몽골에 세워지면서 기록이 깨졌다. 사실 38m라는 높이는 자유의 여신상만 해도 48m, 세계 최대 동상인 중국 허난성의 황금 부처상 128m에 비교하면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파일:1701826167000.jpg

한편, 네덜란드와 맞서 싸웠다는 점 때문에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팬들은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정성공의 초상화를 들고 응원하기도 한다.

5. 창작물

5.1. 대항해시대 시리즈

El Oriente 확장팩의 세 번째 챕터에서 대만의 유력자 NPC로 등장했다. 안평에서 남만무역을 할 경우 랜덤으로 승천부로 호출해서 하사품을 주며, 검술 및 총격의 특수 테크닉도 퀘스트를 통해 가르쳐준다. 또한 리마에서 시작되는 5연퀘를 통해 동녕 건국 이전까지의 행적도 다룬다. 70 레벨 제한 해제를 해주는 NPC 중 한 명이다.
명나라의 제독 중 한 명이며, 백병전 위주 스킬셋을 갖고 있다. 성우는 이재범(한국)/아자카미 요헤이(일본)

5.2. 삼국지 시리즈

파일:정성공14.jpg
삼국지 14
10편의 스폐셜 시디부터 11편까지 고대 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육손의 하위 호환이다. 물론 육손의 하위 호환이니 능력치도 좋지만, 이상하리만큼 높은 매력치[11]는 역사에서 반청복명을 끝까지 이끌었던 것을 고려한듯.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91/무력 68/지력 82/정치력 84/매력 94에 특기 16개 특히 일부를 제외한 고대무장 중에서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1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특기는 수신. 병종 적성은 수군 S,/창병, 극병, 기병은 A. 능력치는 통솔력 90/무력 72/지력 80/정치력 85/매력 93으로 그럭저럭 쓸 만하다.

삼국지 14에서 전기제패 모드 적벽대전 클리어 보상으로 해금된다. 능력치는 통솔 89/무력 76/지력 79/정치 83/매력 90. 개성은 단점개성 없이 장점개성만으로 용장, 소탕, 일심, 수전, 조타. 전법은 충용의열, 화시, 고무, 투석, 강습, 시람을 보유하고 있고, 진형은 어린, 안행, 학익, 투석을 가지고 있다.

주의는 왕도, 정책은 문사무비 Lv3에 친애무장으로 주유. 혐오무장은 없다. 상성은 손권군의 125로 설정되었다.

5.3. Fate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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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크루세이더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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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Europa Universalis 시리즈

영력제 다음으로 명나라의 역사적 군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Europa Universalis IV 기준정치 5, 외교 5, 군사 1이다. 군사 능력치가 바닥을 치는 것은 반청 저항군과 협력하지 않는 오판으로 남명이 장강 이남의 영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에 악영향을 주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EU4의 DLC인 천명을 구입하고 활성화된 상태라면, 이자성의 난과 삼번 이벤트로 명나라가 분열될 때 정성공이 동녕을 세우고 자립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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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어병음 표기는 Zhèng Chénggōng(정청궁).[2] 출처 정성공의 후손이 능에서 나온 정성공의 유골을 보고, 정성공의 키를 약 180cm 정도로 추정했다고 하여 전해져 내려온 키이다. 반면 키가 155cm에 불과하다는 설도 있다.[3] 《The Pirate King: Coxinga and the Fall of the Ming Dynasty》. 2008년에 삼우반 출판사에서 《해적왕 정성공》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을 출판했다.[4] 클레멘츠는 아니메 연구로 석사 논문을 쓴 적도 있고, 도고 헤이하치로에 대한 전기인 《도고 제독: 동방의 넬슨》(영문명: 《Admiral Togo: Nelson of the East》)을 쓰기도 했다. 영국의 일본 만화 매체인 《망가맥스》의 편집장을 지냈다.[5] 平戶藩, 지금의 나가사키현 히라도시.[6] 內台融合, 즉 일본인대만인이 하나로 융합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일본령 조선을 상대로 했던 내선일체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7] 순 거짓말과 오류투성이인데다 별 효과도 없었고 두고두고 까이는 내선일체와는 달리 내대융합본성인의 시조(?)인 정성공의 중일혼혈 혈통 덕에 잘 먹힌 편이었다.[8] 나머지 두 곳은 쓰시마이키 섬.[9] 제후의 죽음[10] 미 해군의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의 라이선스 생산형, 정성공 외에도 척계광, 악비와 같은 중국 여러 시대의 무인의 이름을 따와 함명을 붙였다.[11] 현대에서는 정치적 논리 때문에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당대에는 성격이 좋은 인물도 아니었고 인간관계도 여러모로 나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