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시대 | ||||||
{{{#!wiki style="" | }}} | ||||||
{{{#!wiki style="" | |||||||
}}} | |||||||
{{{#!wiki style="" | }}} | ||||||
가마쿠라 시대 | {{{#!wiki style="" | }}} | |||||
무로마치 시대 | {{{#!wiki style="" | ||||||
}}} | |||||||
{{{#!wiki style="" | }}} | ||||||
}}}}}}}}} |
센고쿠 시대 [ruby(戦国時代, ruby=せんごくじだい)] | |||
1467년~1573년[1] | |||
분열 이전 | 이후 | ||
무로마치 시대 | 에도 시대 | ||
[clearfix]
1. 개요
전국시대 정세도 |
센고쿠 시대(戰國時代,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막부 후기부터 시작된 일본의 혼란기로, 잘게 쪼개진 수많은 각 세력들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은 시대였다.
천황의 권위가 이미 몇세기 전부터 땅끝으로 떨어져 있던 상태에서 오닌의 난으로 인해 쇼군이 수장인 막부의 권위까지 추락하자, 전국 각지에서 개나 소나 다이묘 되고 쇼군 되겠다며 들고 일어나고, 어제의 부하가 오늘의 적이 되는 배신과 하극상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지역의 지배자가 바뀌었으며 잘나가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기도 하고, 별 볼 일 없던 세력이 순식간에 강성한 세력으로 급부상하기도 했다.[2] 난세가 늘 그렇듯 기름장수 출신, 병졸 출신, 약재상 출신, 농민 출신 등 미천한 출신의 인물들이 급작스럽게 출세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극상으로 새로이 나타난 다이묘뿐 아니라 기존의 슈고 다이묘 중 살아남은 다이묘[3] 혹은 이런 다이묘들이 서로 싸우다가 몰락한 틈을 타 스스로 다이묘로 성장한 옛 소규모 호족 등 이 시대의 다이묘들은 막부나 조정의 권위는 빌릴지라도 이들의 대리 지배자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법령을 제정하는 등, 독립적인 특성이 더욱 강해졌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전국 다이묘라고 불러 이전의 슈고 다이묘 등과 구별한다.
이렇게 분열된 일본 열도의 통일을 시작한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고, 그의 사후 일본을 일시적으로 통일시킨 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이 두 사람의 시대는 특별히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 또는 쇼쿠호 시대(織豊時代)로 칭한다. 마지막으로 도요토미의 사후 재분열이 일어난 일본을 수습하고 통일을 완성한 자가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2. 명칭
다른 시대명이 지명 등의 고유 명사에서 유래한 것과는 달리 남북조시대와 센고쿠 시대는 일반 명사에서 뜻을 따온 명사이므로 표준어 대사전에도 전국시대로 실려 있으며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다.한편 중국의 남북조, 전국시대와 구분하는 의미, 또는 헤이안, 무로마치 등 일본어 발음으로 된 다른 시대 명칭과 형평성을 맞추는 의미에서 난보쿠초, 센고쿠로 쓰는 경우도 있다. 영어 명칭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명과 마찬가지로 번역한 Warring states period와 일본어를 음역한 Sengoku period를 같이 쓴다.3. 센고쿠 시대의 시작과 끝
시작과 끝에 여러 이설이 있다. 시작은 1467년의 오닌의 난부터라는 설과 1493년에 일어난 메이오의 정변부터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고, 여기에 호조 소운이 후호조 가문을 세운 1488년으로 잡는 사람도 있다.종결 시점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이 있는데 1573년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를 축출한 때까지라는 게 정설이긴 하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도 전국시대의 범주에 넣는 쪽도 있어서 오다와라 전투(1590년), 임진왜란 종료(1598년),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에도 막부 성립(1603년), 오사카 전투와 겐나엔부(1615년)[4]까지라는 설들이 있다. 이르게는 아예 노부나가가 상경한 1568년을 전국시대의 끝으로 보는 설도 있으며, 늦게 보는 시각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1638년 시마바라의 난 종결을 끝으로 잡는 것이다.
일반적인 일본 학계의 통설은 1573년을 전국시대의 끝으로 보는 편이다. 이 해는 다케다 신겐 사망, 무로마치 막부의 교토 축출, 아자이-아사쿠라가 멸망 및 오다 노부나가의 긴키 지역 패권이 확립된 해이기 때문에 일본 전국시대에서 상당히 중요한 해이다. 이후부터는 일본 열도의 패권을 놓고 오다-도요토미-도쿠가와로 이어지는 권력 다툼의 시대이기 때문에 난세라기 보다는 또다른 암투의 시기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치 중국 전국시대도 '진시황의 중국 통일'을 끝으로 보지만 그 뒤 안정기가 찾아오는게 아니라 이어 멀지 않아 초한전쟁이라는 또다른 난세가 닥쳐오는 것처럼 센고쿠 시대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한 1592년부터 펼쳐진 임진왜란도 해당 시점 이전을 센고쿠 시대의 종결로 보는 이유 중 하나다. 당시 전쟁은 관백의 지위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가용 병력을 거의 대부분 동원해서 조선을 침공하였다. 권력자 한명의 의지로 대외 침략 전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난세와는 거리가 멀다는게 주요 포인트다.
이에 따라 노부나가가 입경한 1568년부터 에도 막부가 성립하는 1603년까지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거하던 성의 이름을 따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라고 따로 부르며 다른 말로 오다(織田)-도요토미(豊臣) 시대라는 의미를 담은 쇼쿠호 시대(織豊時代)라고도 부른다.
다만 이는 정치사적인 구분이고, 대중적으로는 일본의 '전국시대'라는 테두리 안에 세키가하라 전투나 오사카 성 전투 등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사건을 포함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후세의 기준에 맞춘 시대구분처럼 딱딱 완전히 대체되어 퇴장하는 것도 아니며 소설이든 만화든 게임이든 전국시대를 끝까지 다 다루겠다고 표명했다면 도요토미 가문의 멸문과 도쿠가와의 최종 승리를 안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4. 사건 연표
- 1467년 ~ 1477년 오닌의 난
- 1470 ~ 1505년 교고쿠 소란
- 1478년 제1차 모리 지로의 난
- 1489년 제2차 모리 지로의 난
- 1493년 메이오의 정변
- 1498년 메이오 대지진
- 1504년 타치카와노하라 전투
- 1507년 에이쇼의 난
- 1509년 가타카쿠하라 전투, 뇨이가타케 전투
- 1512 ~ 1514년 우츠노미야 착란
- 1514년 타케하야시 전투
- 1520년 도지인 전투
- 1523년 닝보의 난
- 1527년 가쓰라카와라 전투
- 1533 ~ 1534년 이나무라의 변
- 1535년 모리야마의 변
- 1536년 하나쿠라의 난, 덴분홋케의 난, 제1차 카토우의 난
- 1542년 텐분의 난, 1차 갓산토다 성 전투
- 1545년 제2차 카토우의 난
- 1546년 가와고에 성 전투
- 1549년 에구치 전투
- 1550년 니카이쿠즈레의 변
- 1551년 다이네이지의 변
- 1553년 카와나카지마 전투
- 1554년 호우케이 히키와케
-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
-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
- 1561년 미야노마에 사건
- 1562년 쿠메다 전투, 쿄코지 전투
- 1563년 유도코로구치 전투
- 1565년 에이로쿠의 변, 2차 갓산토다 성 전투
- 1567년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
- 1569년 엣소 동맹, 아시야 성 전투, 테이추 전투, 아제이 성 전투
- 1570년 아네가와 전투, 가네가사키 전투, 노다 성 전투, 후쿠시마 성 전투, 이시야마 전투 시작
- 1571년 겐키의 법란
-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키자키바라 전투
- 1573년 오타니 성 전투
- 1575년 나가시노 전투
- 1576년 미츠세의 변
- 1577년 데토리가와 전투, 시기야마 성 전투
- 1578년 오다테의 난, 미미카와 전투
- 1579년 1차 이가의 난
- 1580년 미키 성 전투, 이시야마 전투 종결
- 1581년 다카텐진 성 전투, 2차 이가의 난
- 1582년 고슈 정벌, 혼노지의 변, 야마자키 전투, 빗추 타카마츠 성 전투, 관백상론, 키요스 회의
-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 1584년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 1585년 덴쇼 지진, 시코쿠 정벌
- 1586년 이와야 성 전투
- 1587년 규슈 정벌, 파트레이(선교사) 추방령
- 1588년 정이대장군 제도 폐지[5]
- 1590년 오다와라 정벌(오다와라성 전투, 하치오지성 전투, 오시성 전투)
- 1590년~1591년 카사이·오사키 잇키, 와가·히에누키 잇키
- 1591년 쿠노헤의 난
- 1592년 분로쿠의 역(임진왜란), 타이코 켄지(태합검지)
- 1596년 게이초 이요 지진, 게이초 후시미 지진, 산 페리페 호 사건, 26성인 순교 사건
- 1597년 게이초의 역(정유재란)
- 1598년 조선에서 철군[6]
- 1600년 아이즈 정벌, 후시미 성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정이대장군 제도 부활[7], 이중 공의 체제 시작
- 1603년 에도 막부 성립
- 1604년 게이초 대지진
- 1609년 시마즈의 류큐 침공
- 1611년 게이초 산라쿠 지진
-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
- 1614 ~ 1615년 오사카 전투(오사카 겨울 전투, 오사카 여름 전투)
- 1615년 잇코쿠이치조레이(일국일성령), 부케쇼핫토(무가제법도), 겐나엔부
5. 특징
센고쿠 시대는 특히 농업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시기였다. 난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전국의 영주들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를 불리고자 저수지를 만들고 개간을 진행하여 농지가 오닌의 난 이전 대비 평균 1.8배로 늘어났다. 이렇게 실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난 이후 천하인에 등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태합의 이름으로 검지(檢地)[8] 실시, 즉 태합검지를 통하여 전국의 토지를 제대로 확인하면서 실제 농지 면적이 상당 부분 공식적인 경제력에 편입되었다. 원래 검지라는 게 다이묘의 권한이기는 하나 누락된 토지나 산출량을 정확하게 다시 장부에 적는다는 것은 결국 세금을 더 걷겠다는 뜻이 되므로 실질적으로 지역 호족 연합세력의 수장 이상의 권력을 가지지 못했던 전국시대 다이묘들로서는 섣불리 시행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이제 히데요시의 명령을 핑계로 자기 영지를 제대로 조사해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바치는 부분이야 어차피 내 수익에서 퍼센트로 내는 것이니 핑계가 되어준 보답으로 치면 되는 것이고...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로 전국시대가 끝난 후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 일본 전체의 석고는 1598년 태합검지 종료시 1,850만 석, 1604년~1610년 게이초 고초(慶長郷帳)에서는 2,200만 석까지 늘어나게 된다.[9]또한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승기를 잡기 위하여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개발하는 데에도 매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때마침 유럽의 신항로 개척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 문물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총과 같은 신무기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결과적으로 반복되는 전쟁이 군사력이든 농업생산력이든 높은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긴장 상황과 경쟁을 유발하고 지속시켰기 때문에 이전까지만 해도 더 큰 영토와 더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도 행정력 부실로 한반도와 큰 차이가 없었던 일본의 국력은 이 시기부터 한반도를 크게 능가한다. 이는 먼저 중앙집권을 다졌기에 앞으로 발전할 여지는 적었던 조선의 상황과 맞물려 임진왜란이라는 대(大) 전쟁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그리고 각 세력들은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사무라이들과 토호들을 가신단으로 편입시키고 대부분의 무사들은 쌀을 농민에게서 직접 거두는 것이 아니라 영주가 거둔 쌀을 녹봉으로 받게 하였다. 이와 함께 무사들을 빠른 소집과 감시를 겸하여 성하 마을인 조카마치에 모여살게 만들었다. 이제 무사들은 토지를 관리할 필요가 없어서 시간은 남고 녹봉을 쌀로 받아서 생필품을 거래할 필요가 커졌기 때문에 거대한 소비 집단이 되어 이들을 노린 직인, 상인들까지 마을에 모여 살게 된다. 이로써 영주들은 농민과 무사, 상공업자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할수 있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 전국 단위로 총동원 체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당연히 중간 단계가 생략된 연공의 일원화, 즉 조세의 일원화는 농민들에게 가중되는 부담이 줄어들게 했는데 이들 농민으로 하여금 공동의 운명체라고 느끼게 하는 게 중요했다고 여겼다. 만약 민심이 이반해버리면 다른 영주가 침공했을 경우 살아남기 힘들어지니까.[10] 어찌 보면 이후 에도 시대의 기반을 닦고 지역별 색채를 강화시킨 게 이 시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 일본 각 지역에서 지역의 상징으로 유명한 인물들 가운데는 이 시기 다이묘들이 많다.
여러 불교 종파들도 승병으로 군사력을 구축해 패권 다툼에 끼어 들었다. 정토진종의 혼간지(本願寺, 잇코잇키), 진언종의 네고로지(根来寺), 천태종의 엔랴쿠지(延暦寺) 등등. 보통 한국에서는 승병을 ‘나라를 위해 무기를 든 승려들’[11] 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전국시대의 승병은 한국의 후삼국시대 때처럼 지금으로 말하면 정치깡패에 비견되는 무장 조직과 다를 바 없다. 절을 거점으로 삼고 주변 마을, 적대 교파 약탈은 기본이고, 낭인들을 매수하여 머리만 깎아놓고 용병 조직처럼 움직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종교에 힘입어 잇키를 일으켜 영주를 내치고 영지를 차지해 거대한 교단 영지를 세워 대영주랑 맞짱뜨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원은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고 중세 서양 기독교의 대주교, 주교들처럼 사실상 독자적인 영지를 가진 세속적인 군사세력이었던 것이다. 전국시대 초기의 권세가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자신에게 적대하는 아사쿠라, 하타케야마 등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잇코잇키를 뒤에서 조장해서 아사쿠라, 하타케야마와 싸우게 하기도 했다.[12] 이로 인해 정토진종은 무로마치 막부와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괜히 불교를 깨부수고 다닌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그 지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한국인 시각에서는 '한 지방의 절대 군주' 같은 자리로 연상하기 쉬운데, 대부분의 전국 다이묘는 후한 말 삼국지의 군웅들같이 그 지역 호족이나 토호, 유력 무사 등으로 구성된 연합의 맹주와 비슷한 위치였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다이묘들은 양판소 영지물이나 전국시대를 다룬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자기 독단적으로만 통치를 할 수 있던 게 아니라 이런 지역 유력자들이나 가신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고, 이들과의 합의나 협조 없이는 영지를 운영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거나, 심지어는 하극상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하다못해 그 유명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이나 서국 제일의 다이묘라는 모리 모토나리도 결국 이 '지역 연합 맹주'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또한 전국시대에는 토도 다카토라처럼 가신이 주군을 배신하는 하극상이나, 가신이 다른 주군에게 옮겨가거나, 한 번에 두 가문을 섬기는 행동 등이 일상다반사였다. 이런 게 아니더라도 어떤 가문에서 공을 세우고 그 전공을 치하하는 표창장 겸 경력증명서 역할을 한 문서인 '간조(感狀)'를 받아서 다른 가문으로 옮겨가거나, 주군에게 개인적으로 불만이 많았다거나, 다른 가문으로부터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거나, 심지어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른 일할 곳을 찾겠다고 다이묘에게 말하면 다이묘가 오히려 다른 가문 다이묘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써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대를 이어 다이묘를 섬긴 가신들이 후대받는 것과 별개로 사무라이의 이적은 크게 흠잡힐 일이 아니었다. 난세에 유능한 인재랍시고 무제한으로 영입했다가는 기존의 가신단과 충돌할 우려도 있고, 영지는 한정되어 있어 봉록을 무한정 나누어 줄 수도 없으니 일정기간 써 먹고 적당한 타이밍에 이적시키는 것도 하나의 인사전략이라 할 수 있다. 현대 프로축구에서도 한 구단에 오래 머무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저니맨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규모 있는 다이묘 일수록 장수들에게 인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배신도 넘쳐나는 상황이다보니 다이묘들도 서로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배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나름 고쿠타카를 지닌 다이묘라 하더라도 사나다 마사유키와 같은 소규모 다이묘를 이용해놓고 팽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중 규모가 작은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규모있는 다이묘에게 보호 요청을 하며 이 다이묘의 비호 아래에서 지내다가도 그 다이묘가 상대방 다이묘에게 위험해지면 바로 상대편측 다이묘에 붙는 일도 있었다. 물론 이들은 신의가 없다며 손가락질은 받을지언정 지역 안정화에 최적화된 인물이라 기용하였다. 이렇게 다이묘들끼리도 배신이 넘치다보니 생각해낸 묘수가 바로 정략결혼. 하나가 공격을 받는데도 다른 한 쪽이 지원을 보내지 않는다면 자식까지 버리는 이미지가 붙는데다가 다이묘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혈육은 지키고 싶기 마련이기에 정략결혼은 사실상 동맹이나 다름없는 제스쳐였다.
또한 이렇게 배신이 넘쳐나는 상황으로 인해 언제 기습당할 지 알 수 없어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해서 기습에 대비해야만 했고 이 때문에 당시 일본 남성들은 잠을 잘때도 갑옷을 입고 자야 했으며 그로 인해 투구로 가리는 부분을 빡빡 깎는 헤어스타일이 생겨났다. 투구도 쓴 채로 자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을 자는 시간도 저녁 6시에 취침해서 새벽 2시에 기상하거나 잠을 자는 장소 역시 성(城) 하나에 방을 100개 이상 만들고 그 중 하나에 랜덤하게 잠을 자서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게 하기도 했다.
물론 토리이 모토타다,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킨 충신들도 많지만, 이렇듯 흔히 퍼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무라이'라는 이미지는 전국시대 무사의 실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고 오히려 주는 만큼은 확실히 일하고 도리를 다한다는 '용병'이나 오늘날 직장생활을 하는 직장인처럼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 대부분이다.[13][14]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군에게 도리를 다하는 것을 경시한 것도 절대 아니었으며[15] 무사도의 덕목으로써 한 가문에 오래도록 충성을 바치는 무사도 없던 것은 아니라서 이렇게 한 가문에서 오래 일한 무사는 '후다이(譜代)'라고 해서 가문의 측근 중신으로 중용되었다.
또한 전국시대에는 같은 일본인들을 외국에 노예로 갖다 팔아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는데 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이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 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 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16]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를 팔아넘겼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고수하는 원인이 되었다. 비록 선교사들이 노예 무역에 부정적이었으며, 실제로 1598년에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 노예 무역을 파문으로 위협하여[17] 제재할 정도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과 서양인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선교사의 포지션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선교사를 의심할 동기를 준 것이다.[18] 이 노예 수출이 역사에 남긴 흔적 중 하나가 네덜란드에 전승되어 오는 불쌍한 일본 도깨비 설화이다.[19]
이 센고쿠 시기 천황과 공가는 말 그대로 허수아비로 무시 당했다.[20][21] 그나마 학문에 능하고 예절을 익힌 공가들은 다이묘들 옆에서 선생이나 행정관으로 먹고 살았지, 명색이 왕인 천황은 다이묘들에게 구걸하거나[22] 젓가락을 만드는 등 품앗이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23] 그렇게 무시당하던 천황은 혼란기가 종식된 에도 막부 시기가 돼서야 왕으로 대접받게 된다.
6. 인기
중국사에서 실제 비중에 비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삼국시대는 조조 · 유비 · 손권이 활약하는 초기의 비중이 크고 이들이 다 죽은 후의 중후기의 관심도가 영 떨어진다면 이 전국시대는 반대로 초중기의 관심도가 떨어지고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활약하는 후반기의 관심도가 높다. 삼국시대의 끝은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더 혼란한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로 이어졌지만[24] 일본 전국시대의 끝은 에도 시대라는 안정기로 결실을 맺었던 게 아마 그 이유로 보인다.6.1. 일본
겐페이 전쟁, 막말 등과 함께 일본 역사시대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향유하는 시대 중 하나이다. 일본판 삼국지와 같은 느낌을 주는데다가 각 지역을 다스리던 다이묘들이 남긴 성 덕분에 지역관광이나 여러 창작물에서도 아주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는 소재기도 하다.[25][26]단, 일반 일본인들까지 전국시대를 잘 알고 일상적 대화 주제로 통하는 정도는 아니고 진짜 역덕이나 전국시대 컨텐츠를 접해 라이트 팬층들을 빼면 이야기가 통하지 않고 아무것도 일반인들에게 이야기 해봤자 흥미도 이끌어내기 힘들다. 일본에서 이 시대 인물 중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졌으며 3살 아이부터 80살 먹은 노인까지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전국시대 말엽의 소위 '3대 천하인'이라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셋뿐이다.[27] 거기에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28]이나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 그리고 막대한 은혜를 베풀어줬던 주인을 배신한 사이토 도산[29] 정도가 유명한 편이고 만화나 게임 같은 전국시대 매체에서 그렇게 띄워주는 무장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기껏해야 자기 지역 출신 무장이나 자기 지역 영주를 지냈던 무장들을 "아, 그런 사람도 있었지"라는 식으로 아는 정도. 일본에서도 이 시대 관련 역사는 관심 있는 사람이나 파는 분야라고 한다.
대개의 개괄서에서도 이 3대 천하인이 주요 인물로 나온다.[30] 일부 전국 팬들이 이걸 가지고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이란 식으로 물고 넘어지기도 했는데, 사실 개관적인 역사만 파악하려 한다면 이 시대는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이들의 업적만 알아도 충분하다. 시대 전체적으로 따진다고 해도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등 3대 천하인 외 유명인은 대개 3대 천하인과 같은 시대 사람이라 밀릴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는 차라리 앞서 말한 호소카와 가쓰모토 · 야마나 소젠이나, 전국시대 중기에 중앙 정부를 좌지우지한 호소카와 정권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더 중요한 편.
한국의 전국시대 팬 중 일부는 모든 일본인이 이 시대 무장들을 잘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정작 일본인들은 한국의 전국 팬들의 생각보다 전국 무장들에 빠삭한
실제로 2020년 일본 지상파 방송국인 TBS 테레비의 유명한 예능방송인 수요일의 다운타운(水曜日のダウンタウン)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인 TOP 100을 설문조사한 적 있는데[32] 순위 안에 든 전국시대 인물은 위에 언급된 3명 뿐이었다.(지명도 10위 오다 노부나가 92.4%, 63위 도쿠가와 이에야스 75.7%, 67위 도요토미 히데요시 74.9%)
6.2. 한국
한국사로 치면 대략 조선왕조 초기~중기와 겹친다. 조선 시대의 국왕 시기로 치면 조선 세조 치세 말년부터 선조 치세 중엽까지가 해당된다. 한국사와 전국시대의 접점이 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왜구(정확히는 후기 왜구).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양국 통교가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니 접점이 많진 않지만. 한편 중앙 정부가 사실상 붕괴하고 각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들고 일어난 사회적 분위기의 유사함을 따지면 우리나라는 남북국시대 말부터 후삼국시대가, 중국으로 치면 오대십국시대가 가장 유사하다.저 시대 조선인들은 일본에 대한 인식이 이후에 비해서도[33] 굉장히 안 좋았다. 왜구가 가장 심각한 요인이기도 했고, 그 다음으로 수시로 신하가 주군을 상대로 반역을 하거나 심하면 시역도 하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를 상대로도 비슷하게 찬탈하는 등 도덕적인 측면에서 인식이 영 막장인 난세였기 때문이다.[34]
한국인들에게 본인이 알고 있는 전국시대 인물을 꼽으라 하면 대부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등 모두 임진왜란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그 외 세계사나 일본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케다 신겐, 사나다 노부시게, 우에스기 겐신, 다테 마사무네, 나오에 가네츠구 등 저명한 인지도를 가진 인물들을 꼽는다. 그나마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지도가 조금 높은 편. 전자가 도요토미의 주군이였고, 후자는 에도 막부를 건국해 조선과 공식적인 국교를 맺여 다른 전국무장에 비해 인지도는 높은 편이며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산 매체에도 줄곧 등장하곤 한다.
한국의 전국시대 팬들은 소설 대망을 통해 입문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와 귀무자 시리즈를 접하면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으며, 진삼국무쌍 시리즈를 접하고 나서 전국무쌍 시리즈로 와서 전국시대를 파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35] 그래서인지 전국시대 인물들을 삼국지에 대입하려는 움직임이 자주 보이는 편이고 그나마 소설 대망도 '일본판 삼국지' 정도로 알고 읽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전국시대에 입문하는 한국인들은 삼국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 하지만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국시대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있는 편이고,[36] 더더욱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에서는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학술 연구와 출판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전국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주제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며, 이를 바탕으로 한 논문과 서적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된 연구는 전국시대의 군사적 전략과 전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러한 학술적 접근은 한국 내에서 전국시대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돕고 있으며, 역사 교육 현장에서도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상호작용을 다각적으로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6.3. 서양
서양에서는 동양사의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가 낮지만 거의 유일하게 서양에서 어느정도 인기가 있는 시대가 센고쿠 시대다. 서양의 동양사 학계에서는 중국사의 비중이 일본사보다 더 높지만 대중적, 혹은 아마추어 역사광들 사이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일본사, 특히 일본 전국시대다. 일본인들도 잘모르는 센고쿠 시대 가문, 무장들을 줄줄 외울 정도로 깊게 심취한 서양인들도 있다. 때문에 쇼군: 토탈 워 등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양 컨텐츠들이 여럿 나오기도 했다.센고쿠 시대를 좋아하는 서양인들은 전국시대를 유럽 중세 시대 기사도와 오리엔탈리즘이 결합된 무언가로 보는 경우가 대다수고 서양에서 인기가 많은 일본 갑옷과 일본도를 통해 센고쿠 시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향도 있다. 부시도를 동양의 기사도로 치켜세우기도 하는데 사실 서양에 알려진 그 부시도는 20세기 초 니토베 이나조가 집필한 저서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주로 센고쿠 시대 종식의 시발점인 오다 노부나가의 인기가 가장 많은 편이고 일각에서는 오다 노부나가를 일본의 카이사르라고 치켜 세우기도 한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의 생애 자체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지만 "만약에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에서 죽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라는 대체역사적 담론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대체역사 담론은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킨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이 대륙 정복을 한다는 대체역사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다 노부나가가 죽지 않았으면 조선과 명나라를 무찌르고 대륙정복에 성공했을거라고 주장하며 무능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비전을 망쳤다고 비난하는 와패니즈도 있다.[37]
7. 역사서
삼국지 팬덤 같은 경우는 정사에 대한 토론도 많이 이루어지고 오히려 연의의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그건 창작물의 내용이고 실제로는 이러이러했다"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진 데 반해 한국의 일본 전국시대 팬덤은 주로 요시카와 에이지, 야마오카 소하치, 시바 료타로, 이자와 모토히코 등 한국에 소개된 전국시대 관련 소설을 가지고 그대로 이 시대의 역사를 논하는 경우가 많은 경향이 있다. 특히 이 작가들의 소설도 나온 지 오래 된 작품들이 많아서 이후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 반영되지 않고 이미 근거가 빈약한 설로 밝혀진 이야기들이 그대로 나도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장에 이 나무위키에서도 상당히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사실 한국어로 번역된 전국시대를 역사적으로 깊이 다룬 서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일본사 개설서에나 나오는 정도라서 일본어나 한자를 잘 모르면 깊이 파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은 일본어 위키피디아 등지에서 자료를 검색해서 번역하여 이 시대를 파악하기도 하고, 내공이 깊은 사람들은 이 시대 관련 원서들을 구매해서 읽기도 한다.사실 이건 일본 쪽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센고쿠 시대는 일본서기 같이 정사로 인정될 만한 역사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대일본사 같은 통사에서 다루는식인데, 이 때문에 지방기록물을 참고해야된다. 중국,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정사 편찬에 관심도 여력도 거의 없었기 때문. 일본서기나 고사기 같은 것들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의 정사는 율령제가 잘 돌아가고 그래도 천황이 이 시대에 비해서 권력있던 시절에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율령제도 붕괴하고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가 된 천황과 중앙정부가 역사사 편찬할 재정과 인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 천황은 매우 곤궁한 편이었는데 돈이 없어 즉위식과 장례식을 며칠이고 미루는 일은 예사고 길가에 나갔다가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고 끼니를 굶거나 기운 옷을 입고 궁녀들은 매춘[38]을 하는 소문이 돌 정도로 최소한의 품위 유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러다보니 역사서 편찬은 커녕 조정을 간신히 유지하던 상황이었다.[39] 그렇다보니 이 시대의 참고할 만한 서적이라는 게 대부분 각 장수들의 가문에 내려오는 일기나 기록물인데, 이런 일기나 기록물들은 행장처럼 자신이나 가문을 띄워주기 위한 용도로 작성된 것들이 많기 때문에 무용을 과장하는 식으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아[40] 교차검증없이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본의 중세사~근세사 연구는 주로 지방 기록물들을 살펴보면서 교차검증을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정사서 위주로 살펴보는 한국사와 중국사, 베트남사와는 방향이 다르다.
비슷한 혼란기를 보낸 중국이나 한국은 통일한 서진과 고려가 이 시기를 다룬 정사를 편찬했지만, 일본은 이처럼 천황의 권력이 없다시피했고, 에도 막부는 다른 일본의 막부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 전국시대만을 다룬 정사서는 출판하지 않았다.[41]
8. 센고쿠 시대의 인물
자세한 내용은 센고쿠 시대/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분류:센고쿠 시대/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9. 관련 병칭(竝稱)
자세한 내용은 분류:센고쿠 시대/병칭 문서 참고하십시오.여기에 나온 인물 묶음, 특히 사천왕이니 24장이니 하는 것들은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대에 창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구는 사천왕에 들어가지 못하니 듣보잡', '누구는 왜 사천왕에 못 들어가?' 란 식으로 크게 얽메이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특히 전국 과대사천왕이란 단어는 2ch의 전국시대 게시판에서 나온 말이다.
- 가토 16장
- 다케다 4명신
- 다케다 24장
- 다테 삼걸
- 도쿠가와 사천왕
- 류조지 사천왕
- 리큐 7철
- 우에스기 사천왕
- 오다 사천왕
- 사나다 10용사
- 호조 오색비
-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 오사카 오인중
- 아마고 10용사
- 전국 3효웅
- 모리 가 3형제
- 미노 3인중
- 미요시 3인중
- 시마즈 4형제
- 와카에 3인중
- 이노야 3인중
- 도야마 3인중
- 후추 3인중
- 츠츠이 3가로
- 전국 과대사천왕
- 일본 3대 기습
- 천하 3명창
- 천하오검
- 사세구/일본(일본 전국시대 인물 중심)
- 울지 않는 두견새
- 일본 전국시대 무장의 이명
10. 용어
11. 대중 문화에서
일본사에 있어 헤이안 시대(겐페이 전쟁), 에도 시대(막부 말기)와 함께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사극이나 만화, 게임의 소재로 가장 많이 쓰인다. 특히 카드가 주로 등장하는 소셜 게임 장르에선 중국에 삼국지가 있다면 일본에는 전국시대가 있다고 할 정도로 단골 메뉴이며, 일본 사극을 보면 대부분 이 시대를 다룰 정도다.11.1. 센고쿠 시대를 다룬 작품
자세한 내용은 분류:센고쿠 시대/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1.2. NHK 대하드라마
NHK 대하드라마에서 헤이안 시대, 에도 시대 말기와 같이 사골처럼 우려먹히는 시대이다. NHK는 대하 드라마를 1963년부터 제작하였다. NHK가 매년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대하 드라마를 제작하지는 않지만 꽤 자주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제작하는 편이다. 80년대처럼 시청률이 미친듯이 높게 나오지는 않지만 최근에도 15~20% 정도는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굵직굵직한 다이묘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2000년대 들어와서는 그런 다이묘들의 가신이나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이유는 전국시대 배경의 드라마가 다른 시대보다 시청률이 보장되어 있으며 전국시대 같은 경우 가장 혼란스럽고 치열한 외교전과 난세의 영웅급 활약을 펼친 유명한 장수들이 나왔기에 흥행요소가 전부 있다. 그야말로 일본 사극을 먹여살리는 최고 화수분.
- 태합기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룬 1965 대하 드라마
- 하늘과 땅과 - 우에스기 겐신을 다룬 1969 대하 드라마[42]
- 나라 훔친 이야기 - 동명의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다룬 1973 대하 드라마
- 황금의 나날 - 전국시대 사카이의 상인이었던 루손 스케자에몬을 다룬 1978 대하 드라마
- 여자 태합기 -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코다이인)을 다룬 1981 대하 드라마[43]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다룬 1983 대하 드라마
- 독안룡 마사무네 - 다테 마사무네를 다룬 1987 대하 드라마. 역대 대하 드라마 중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 다케다 신겐 - 다케다 신겐을 다룬 1988 대하 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에 이어 역대 대하 드라마 시청률 2위를 기록.
- 노부나가 - 오다 노부나가를 다룬 1992 대하 드라마
-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룬 1996 대하 드라마
- 모리 모토나리 - 모리 모토나리를 다룬 1997 대하 드라마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츠 에도 막부 세 쇼군의 이야기를 다룬 2000 대하드라마. 다만 첫회가 세키가하라 전투 때라서 엄밀히 따지면 '전국시대를 다룬 사극'이라 하기는 무리가 있다. 공교롭게도 이 사극에서 히데타다 역을 맡았던 배우는 공명의 갈림길에서 이에야스로 출연한다.
- 토시이에와 마츠 -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마에다 토시이에와 그의 아내 마츠를 다룬 2002 대하 드라마. 2000년대 전국시대 배경 대하 드라마중에서 시청률이 가장 좋았다.
- 공명의 갈림길 - 동명의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야마우치 카즈토요와 그의 아내 치요를 다룬 2006 대하 드라마
- 풍림화산 - 다케다 신겐 휘하의 야마모토 간스케를 다룬 2007 대하 드라마
- 천지인 - 우에스기 겐신 휘하의 나오에 카네츠구를 다룬 2009 대하 드라마
- 고우 ~공주들의 전국~ - 스겐인의 생애를 다룬 2011 대하 드라마
- 군사 칸베에 - 구로다 간베에의 생애를 다룬 2014 대하 드라마. 일본의 대하 드라마로서는 독특하게도 임진왜란을 다룬다.
- 사나다마루 - 사나다 노부시게가 주인공인 2016 대하 드라마
- 여자 성주 나오토라 - 센고쿠 시대 여성 영주 이이 나오토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2017 대하 드라마
- 기린이 온다 - 아케치 미츠히데의 생애를 다룬 2020 대하 드라마
- 어쩌지 이에야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애를 다룬 2023 대하 드라마
- 도요토미 형제! -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생애를 다룬 2026 대하 드라마
[1]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센고쿠 시대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센고쿠 시대의 시작과 끝 문단 참조.[2] 당연하겠지만 급부상하다 처참히 몰락하는 경우, 몰락하다 재기하는 경우도 태반이였다.[3] 호소카와 가문, 이마가와 가문 등[4] 《도해 전국무장》(圖解戰國武將)의 저자인 이케가미 료타는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5] 폐지 당시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6] 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7] 부활 당시 초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8] 토지 측량과 산출량 확인[9] 두 번의 검지 시기는 얼마 차이나지 않는걸 감안하면 이 기간동안 그렇게나 많은 성장을 했다기 보다는 태합검지때에 비해서 중앙의 통제력이 강해졌기 때문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10] 더구나 이것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한 수단이었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하고도 예민한 문제였다. 다만 그럼에도 세율은 50~70%로 다케다 신겐이 전쟁이 잦은 자신의 영지의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오공오민, 즉 50%로 세율을 낮췄는데 동시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봐도 여전히 무지막지하게 높은 세율이였다. 때문에 마비키 등의 악습이 발생하기도 했다.[11] 사실 한국사에서도 나말여초의 승병, 무신정권 시대에 이의방, 최충헌, 최우 등 무신 권력자들이 기존 왕실과 문벌귀족들이 후원하던 교종을 억압하고 선종을 키우는 과정에서 교종 사찰들의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킨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고려시대까지는 사원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일종의 호족과 같은 성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12] https://blog.naver.com/jo9796/222482950421[13] 실제로 일본에서 전국시대를 해설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나 서적, 사극 등에서는 전국시대 사무라이 사회를 직장생활에 비유해서 해설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유교의 기본적인 사상들이 장려되기 시작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며, 그 전까지의 유교는 상류 계층의 학문 겸 제왕학의 일종이었을 뿐이다.[14] 이런 전국시대 무사들의 가치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예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항왜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의 시각에서야 이들은 매국노 취급을 받을 수 있지만, 당시 일본은 오랜 분열기로 인해 '우리는 일본인'이라는 국가관이나 정체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항왜들의 상식으로는 조선에 투항하는 것을 단순히 원래 자신이 섬기던 주군에서 선조라는 또다른 주군에게 옮겨가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이야기다.[15] 주군에게 도리와 충정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배신이 난무한 전국시대에서 영주들 개개인에게도 당연한 것이었다. 때문에 대세가 기울어 다케다 카츠요리를 배신하여 죽게 만든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하기도 했으며, 주군에 대한 도리를 지키고 전사한 유명한 무사를 배출한 무사 가문은 나름 대접을 받으며 이후 구직 활동에서 선조의 이름 덕을 보기도 했다.[16] 심지어 흑인 노예의 경우처럼 구매자는 똑같이 서양인들이었다.[17] 역사스페셜 2012년 3월 8일 방영분. 31분 20초-33분 45초[18]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S.I., 1539~1606)) 입장에서는 관백의 정치적인 태도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1587년의 첫 추방령은 더 큰 광풍에 대한 경고로 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들의 행동도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지인 마카오와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무기 등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싣고 갔다가 은, 수공예품과 향신료를 싣고 왔는데 거기에는 일본인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백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승리의 카드’인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신부들이 일본에 있어야 했다. 일본인들은 신부들이 없으면 포르투갈 상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혜경.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19] 네덜란드 앤트워프에 무역선에 딸려들어온 일본 도깨비가 갖은 핍박과 고초를 겪다가(이 설화에서는 도깨비가 별 힘도 못 쓰는 잡몹으로 그려져서 배가 고파서 가정집 부엌에 뒤지러 들어갔다가 하녀한테 빗자루로 두들겨 맞아 쫓겨날 정도이다.) 결국 낙심 끝에 굶어 죽고 말았는데 어떤 사람이 그 얼굴을 본떠 "하나님의 기도로 잡은 악마의 형상입니다"라고 기와를 구워 팔아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다. 브런치 기사[20] 허수아비일 뿐 아니라 오닌의 난 때 교토가 아작나는 바람에 기반도 다 날아간 상태였다. 오닌의 난 전만 해도 어느정도 힘이 없지는 않았던 조정이 이 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식물인간 신세가 된다.[21] 하필 무로마치 막부가 교토에 자리잡은 것도 이러한 현상에 한 몫했다. 남북조시대가 북조의 완전한 승리로 귀결되어 북조가 정통성을 틀어쥐게 된 터라 교토 이외의 지역에서 덴노를 옹립하기 어려워졌기 때문. 또한 유력 다이묘들의 입장에서도 덴노를 옹립하면서 다른 다이묘들의 어그로를 끌 바엔 교토에 자리잡은 무로마치 막부를 허수아비로 만든 터에 덴노 역시 마찬가지의 신세로 취급하는 것이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22] 예를 들어 장례식, 즉위식 같이 큰 돈 드는 행사를 치를 경우 생계를 유지할 돈도 없는 마당에 행사 치를 돈이라고 있을리 없어서 몇년씩 미루다가 주위 다이묘들이 성금을 보내주면 겨우겨우 치르는 식으로 했다. 그러면 그 대가로 천황은 관직 하나씩 주곤 했는데 이 때쯤 되면 조정 관직은 장식이 되어 버렸지만 명예용 가치는 있는지라 보답으론 충분했다.[23] 이와 관련해 가장 비참한 사례가 고나라 덴노. 천황이면서 아이들이 던지는 돌에 맞을 정도로 비참했다.[24] 뭐 일단 천하삼분지계만 해도 일본 전국시대의 말미에 가까운 내용이긴 하고, 이후 진으로의 통일이라는 결과는 나왔다. 이후의 더 혼란한 시대는 어디까지나 사마염의 1만 궁녀로 대표되는 막장 통치가 그 단초가 되었고, 사마충 같은 지적장애인이 집권하면서 일이 더욱 커졌다.[25] 사실 우리나라 사극도 여말선초, 임진왜란 등에 편중되어 있으며 최대한 봐줘도 영정조시기가 주류다. 그마저도 요즘엔 잘 안 나오지만[26]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이 완역, 디지털화되고 또, 이전 시대의 역사 연수도 점점 더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전에는 관심이 적었던 시절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그런 것. 사실 여말선초도 따지고보면 이런 역사연구의 혜택을 톡톡히 본 케이스에 속한다. 물론 이외에도 사극 자체의 인기가 떨어지게 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사실 대하사극은 고증 문제 및 제작비 문제 등이 걸려 있어서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없다기보다는 제작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편이다. 퓨전 사극들이 최근 나오는 사극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이런 고증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27] 비슷한 사례로 후삼국시대에서도 견훤, 궁예, 왕건만, 삼국지도 유비, 조조, 손권만 널리 알려졌듯이. 삼국지의 경우 포지션이 명확하다는 특징이 있다. 주인공(유비), 메인 빌런(조조), 최후의 생존자(손권).[28] '적에게 소금을 보내다( 敵に塩を送る)'는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속담의 유래가 되는 사람들이라 이들이 실제로 어떤 인물들인지는 잘 몰라도 이름 정도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29] 3대 효웅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효웅이라고 하면 도산부터 떠올릴 정도.[30]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역사 편에서 이원복 교수도 마찬가지로 이 셋에다 오닌의 난의 원인인 아시카가 요시마사 일가와 양편의 실권자 호소카와 가쓰모토 · 야마나 소젠만 언급하고 3대 천하인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그림 중에 다케다 가의 문장 '마름모'와 같이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묘사를 보면 다케다 신겐 같지만 이름이 안 나온다.[31] 사실 한국도 후삼국시대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궁예, 견훤, 왕건 이렇게 3명 정도 아는 수준이고,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이순신, 선조, 원균 정도나 알고 조금 더 아는 사람들도 류성룡, 권율, 김시민이나 곽재우, 유정, 휴정 정도로 유명한 의병들이나 신립, 김명원 정도를 아는 수준이니 일본인들이 3대 천하인 빼고 잘 모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여하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32] 동서고금 일본인 지명도 랭킹 TOP100 (古今東西日本人知名度ランキングTOP100)[33] 여전히 오랑캐라고 까기도 했지만, 그나마 좀 아는 부류들은 일본에서 서적을 수입해 보거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등 최소한 이전에 비해서는 나았다.[34] 당시 유교가 국가 통치의 이념이었던 조선에서, 특히 삼강오륜을 절대적으로 삼던 조선 사회에서 당시 일본의 이러한 행태는 '천한 것들'이나 일삼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괜히 '군신유의'를 운운했던 게 아니다. 훗날 에도 막부와 일본 제국이 통치에 있어서 유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도 앞서 말한 전국시대의 무질서한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 아랫사람들이 각각 막부와 황실에 반기를 드는 걸 막으려는 목적이 강했다.[35] 특히 이 게임 시리즈 제작사인 코에이는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일단 고증은 철저하게 하는 회사로 유명하고 또 게임에서 등장하는 문장들 역시 실제 그 모습과 성격 그대로 구현하는 편이라 많은 참조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전국 바사라와 같은 허구투성이인 작품에서도 실제 모습을 바탕으로 이를 뒤틀려 해석하는 식이 대부분이다(단 그런 만큼 왜곡은 심하다.).[36] 전국시대의 대표 인물 중 하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이하의 계파들이 그렇고,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임진왜란의 왜장들도 전부 전국시대 인물들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몇 세기 전의 일이 지금까지 민감하게 여기는 이유는 비교적 최근 일인 일제강점기까지 겹쳐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시기를 따져보면 더 뒤의 일인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가지고 중국이 까이는 빈도는 적은 것(더욱이 당시 중국의 주류 지배층은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이었던것도 일조한다. 현대 만주족은 별볼일 없는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하였기에 원망의 대상 취급도 못받는다.)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비슷하게 중국도 왜구를 토벌한 명나라의 장군들이 진짜 영웅 대접을 받은 건 중일전쟁 이후의 일이다.[37]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히데요시는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해서 타인의 말로만 이웃국가에 대해 접했기에 주변 국가에 대해 무지했다. 반면 조선과 무역을 하던 시마즈 요시히로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에 회의감을 가졌다. 이런판에 말년에 과대망상증까지 걸려서 다들 속으로 싫어하는 전쟁에 힘을 낭비했다가 신용마저 잃어버린 게 히데요시다. 반면 귀족 출신에 자체 기반이 있던 노부나가는 현실적으로 명과의 무역을 재개하고 기껏해야 책봉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간신히 전국 통일을 이룩해놓고 누가 뒤에서 등을 칠 지도 모르면서 외국에 원정을 갈까. 그렇다고 히데요시처럼 자기는 일본에 남고 부하들만 보낸다면? 결국은 임진왜란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38] 천황을 모시는 궁녀들의 대부분은 공가의 귀족 출신이었다. 즉 명문귀족의 부인 규수들과 따님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는 의미다.[39] 고쿠다카 문서에도 나와있다시피 그래도 명색이 천황이란 게, 종교적으로 숭상받으며 자기들마저도 그의 권위에 기대야 하는 천황이란 게 사는 꼴이 하도 지지리 궁상맞다 보니 품위 유지비로써 오다 노부나가부터 시작해서 도쿠가와 막부를 비롯한 다이묘들이 옛다 하고 준 것이 천황을 비롯한 일본 조정이 가지게 된 15만 석 규모의 농지였다.[40] 물론 자신의 흑역사까지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쓴 경우도 없지 않기는 하다. 임진왜란 당시 자신이 처했던 비참한 상황까지도 잊지 않고 그대로 써내렸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대표적인 예이며, 덕분에 현대인들이 임진왜란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좋은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41] 대신 1대 쇼군인 이에야스부터 10대 쇼군인 이에하루까지의 언행과 치적을 편년체 형식으로 편찬한 도쿠가와 실기가 있긴 하다.[42] 1990년에 같은 원작을 기반으로 영화화도 된다.[43] 2009년에 토쿄 TV 계열에서 나카마 유키에를 주연으로 리메이크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