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미카타가하라 전역화상(徳川家康三方ヶ原戦役画像)[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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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三方ヶ原の戦い겐키[2] 3년(元亀, 1573년[3] 1월 25일(음력으로 1572년 12월 22일), 교토를 비롯한 일본 중심부로 진출하고자 했던 다케다 신겐의 2만 7천 병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1만이 도토미(遠江) 국[4]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전투. 이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대패하면서 도쿠가와는 멸망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갑작스러운 신겐의 급사로 인해 구사일생 했다.
2. 배경
2.1. 이마가와의 몰락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하고, 그 뒤를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이었다. 그러나 우지자네가 워낙 무능한 바람에 이마가와 가문은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카이(甲斐)[5]와 그 위의 시나노(信濃)[6]를 영지로 하던 다케다 신겐은 영지인 두 지역이 산골짜기라 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밀약을 맺고 이마가와 가문의 영지였던 스루가 국을 차지하였다. 도토미는 도쿠가와가 차지했다.당시 다케다·이마가와·호조 세 가문은 삼국동맹을 체결하고 있었는데 다케다의 이런 행동은 동맹 이마가와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주변 세력의 신의를 잃어 사가미(相模)의 호조 가문과 갈라지게 되나, 호조 가문의 침략을 막아내고 오히려 이를 격퇴하며 스루가를 안정시켰다.
2.2. 노부나가 포위망
겐키 원년(1571년), 무로마치 막부의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마침내 오다 노부나가 토벌령을 내린다. 이에 다케다 신겐은 이를 구실로 상경을 개시하면서 노부나가의 협력 세력인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 미카와(三河)와 도토미를 공격한다. 더군다나 이 해의 말에 호조 우지야스가 죽고, 다케다와 호조의 동맹이 새로 체결되면서[7] 도쿠가와 가문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2.3. 신겐의 상경
1572년, 신겐은 야마가타 마사카게,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 1529 ~ 1575)에게 각각 5천씩을 주어 각각 미카와와 오다 가문의 영지인 미노(美濃)를 침략하였다. 신겐 자신은 본대 2만 2천을 이끌고 진군하여, 바바 노부후사의 5천 별동대를 편성해 도토미 서쪽의 다다라이 성을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후타마타 성으로 향했다. 신겐이 약 3만이나 되는 대군을 파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관동의 호죠와는 동맹을 맺었고, 에치고(越後)의 숙적 우에스기 겐신은 엣추(越中)의 일향종 신도들이 막아 주겠다는 밀서를 전에 보내왔기 때문이었다.한편, 도쿠가와 가문의 총 군사 동원수는 1만 5천 정도였는데, 그것도 반 이상을 미카와로 침공하는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막느라 파견시켜 7천 정도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원병을 요청하지만, 노부나가 또한 포위망을 막아내느라 여유가 없던 상황이었다.
1572년 12월, 신겐은 후타마타 성을 낙성시켜 도토미 북부의 지배권을 차지하였다. 후타마타 성 낙성 직후 노부나가가 파견한 사쿠마 노부모리와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3천이[8] 도착하였으나 시나노 정벌 과정에서 단련된 다케다의 고후군을 상대하기엔 양과 질 모두 부족하였다.
이에야스는 도토미의 본성인 하마마쓰에서 농성을 하였고, 이에 신겐은 하마마쓰 성을 무시하고 호리에를 향해 서진, 이에 이에야스는 서진하는 신겐의 배후를 치고자 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미카타가하라로 출진하였다.
3. 전개
그러나 신겐은 미카타가하라 평원에 어린진(魚鱗陣)을 치고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도쿠가와·오다 연합군도 이에 맞서 학익진[9][10]을 선택하여 포위섬멸을 시도하였다.개형적인 포진도 그러나 어린진[11]을 치고 대기하던 신겐은 학익진의 측면에 약점이 있음을 파악하고[12] 다케다 노부토요(武田信豊)의 기병대를 별동대로 보내서 붕괴시킨 뒤[13] 그대로 밀어붙였다.이로 인해 가뜩이나 병력의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연합군의 진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유능한 가신들과 2천의 군사를 잃는다. 이에 반해 다케다 군 사상자는 겨우 2백 정도였다.
가신 나쓰메 요시노부[14]가 이에야스를 설득하여 퇴각시켰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요시노부가 기병 25기를 이끌고 다케다 군에 돌격하여 전사했다. 이에야스는 목숨만 겨우 보존하여 겨우 하마마쓰 성에 도착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신겐의 추격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패주하면서 말 위에서 똥을 지렸다고 한다. 입성 후 패주를 잊지 않기 위해 화공을 불러 그렸다는 것이 상단의 시카미 그림.[15]
여담으로 이에야스는 하마마쓰까지 추격해온 추격군에 야습을 걸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기록의 신뢰성이 떨어지며 이는 후대에 이에야스를 미화하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학익진으로 어린진을 뭉개려면 어린진의 돌격에 맞서지 말고 뒤로 후퇴하면서 양날개로 강력한 원거리 공격을 펼쳐 적의 김을 빼버리게 한다.[16]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은 육상전에 쉽게 적용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양 날개에서 강력한 원거리 공격을 퍼부어서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 과도한 밀집 상태에 빠트려 돌진을 저지시킨 전투가 없지는 않다(푸아티에 전투). 그러나 푸아티에 전투는 영국군이 고지대를 선점한 상태였고, 울타리와 가시덤불 때문에 영국군에게 접근할 수 있는 진로가 한정되었다. 덕분에 영국이 자랑하는 장궁병들은 프랑스군의 측면에서 화력을 퍼부어 쉽게 압박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 상황에서 프랑스군의 병력은 축차투입 되다가 차례로 격퇴되었다. 양익의 원거리 병과를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압박할 수 있는 평지라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파타이 전투).
또한 학익진은 진형 특성상 통상적인 진형보다 종심이 얇고 접전면이 넓을 수 밖에 없다.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된 중앙이 뒤로 물러난다면 자연스럽게 전열에 틈이 생기거나 종심이 더욱 얇아지게 되므로 적에게 약점을 노출하기 쉽다. 더구나 상대방이 중앙돌파를 노린다면 중앙쪽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아군 전력은 파생공세로 밀고 들어올 숫적으로 더 많은 적부대들의 강력한 공세를 진영을 유지하며 버텨내야 한다.[17][18] 돌파를 노리는 상대방의 충격력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면서 뒤로 물러날 수 있는 군대는 그 자체로 상당한 정예병이어야 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적절한 시기에 물러나면서 후퇴가 패주로 바뀌지 않게 전열을 유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휘관은 적절한 시기에 상대방의 공세를 둔화시킬 카드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양과 질에서 앞서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적을 상대로 이걸 다 할 수 있는 지휘관은 명장일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평지의 육상전에서 이걸 다 해내 전투에 승리한 장군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으며 후대 사람들은 그 전투를 교본으로 삼아 가르칠 정도다[심지어]
4. 결과
신겐은 도쿠가와를 도토미 남부에 묶어놓은 채 미카와를 침공하였다. 미카와를 넘으면 바로 오다의 본진인 오와리이니만큼 오다·도쿠가와 가문의 심각한 위기였으나 신겐이 진중에서 병사하면서 결국 다케다 군은 철수하였다.[20] 신겐의 죽음을 틈타,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추방하며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고, 아사쿠라와 아자이를 차례로 멸문시키면서 세력을 안정시키기에 이른다.한편, 다케다 가문은 다케다 카츠요리가 가독을 승계하여 이에야스가 나가시노를 탈환하는 등 일부 회복을 하였음에도 도토미 북부를 장악한 구도는 유지되던 중 나가시노 전투로 이어진다.
5. 기타
전국 시대의 전투 중에 드물게 양쪽의 진법이 상세히 기록되고 그 충돌로 결과가 나온 전투라 주목할 만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양측 다 비상식적인 점이 많아 의문을 남긴 전투이기도 하다.어찌되었건 배후를 잡힌 다케다 군이 수비 진형을 취하지 않고 순식간에 반전해서 가장 공세적인 어린진[21]을 친 것도 의문이지만, 배후를 잡은 도쿠가와 군이 적은 병력에 기동력을 살릴 수 있는 진법 대신 포위 섬멸을 목적으로 하는 학익진으로 공세를 취한 것도 의문을 남기고 있다. 굳이 전쟁사나 전략·전술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관점에서 봐도 상식적으로 양측이 취한 진법은 서로 정반대가 되었어야 타당하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존재하는데 현재까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무가사회의 특성상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하는데, 몇 가지 원인이 지적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겐이 하마마츠 성의 도쿠가와를 쿨하게 무시하고 그 앞을 마치 보란 듯이 지나갔기 때문인데, 여기에 대해 명예를 중시하는 사무라이인 도쿠가와가 감정적 분노를 참지 못했다고도 하고, 지나가게 내버려두면 부하 무장들에게 겁쟁이로 무시당해 이탈자가 나올 것을 두려워해 마지 못해 출전했다고도 한다. 어느 것이 됐든 전술적인 계산 없이 무턱대고 출진한데다, 평지인 미카타가하라에서 본래는 우월한 병력으로 적을 포위하는 데나 적합한 학익진을 적은 병력으로 하필 돌격력이 뛰어난 다케다의 종심 깊은 어린진 앞에 펼치는 엉터리 전술을 펼친 것은 분명한 실책이다.
아무튼 일각에서는 이러한 다케다 군의 공세 지향적인 전술을 통한 승리 덕에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철포대와 방책이 있는 오다-도쿠가와 군의 진지에 달려들었다 몰살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도 있는 듯.
444년 뒤인 2017년에 포위섬멸진이라는 무리수가 등장해서 웃음거리가 됐는데, 어찌 보면 이게 그 원형인 셈.
6. 대중매체
고대왕자 공룡킹 TVA 63~66화(2기 14~17화)의 배경. 스사노오가 야마타노오로치를 죽일 때 오로치의 꼬리에서 쿠사나기의 검과 함께 나온 코스모스톤[22]을 손에 넣으면 천하를 쥘 수 있다는 전설을 들은 이에야스가 주인공들과 함께 스톤을 찾던 도중 전투가 벌어진다. 이에야스는 스톤을 찾다가 주인공들과 함께 길을 잃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에 이에야스와 붕어빵처럼 닮았던 타츠노 마루무의 아버지[23]가 카게무샤를 맡는다. 그러나 카게무샤였던 그가 죽음이 두려울 뿐만 아니라 화장실이 급해서 대신들의 눈을 피해 달아다나가 다케다 군의 화살이 어깨갑옷에 꽂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참고 있던 변을 결국 지려버리고(…) 다케다 신겐은 핫토리 한조에게서 빼앗은 코스모스톤을 들떠서 무심코 맨손으로 만졌다가 스톤의 에너지를 감당 못해 즉사하고 만다.센고쿠에서는 해당 전투가 다케다 군의 소수 병력의 유인으로 인해 좁은 길로 접어든 도쿠가와 군이 함정에 빠져 말이 학익진이지 실제로는 중앙돌파를 시도하던 도쿠가와 군을 찔러서 겁먹은 각 부대가 빠저나와 각개격파된 게 학익진 같았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의 닌자에서는 도쿠가와 군이 학익진을 치면 다케다 군이 더 큰 학익진으로 포위를 하려 진형을 바꿀 것이고, 그때를 노려 소수인 도쿠가와 군이 먼저 어린진으로 진법을 바꿔 돌파하려는 의도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나…현실은 그냥 다케다 군 닥돌로 참패.
어쌔신 크리드 메모리즈에서는 이 전투 중 신겐이 한조와 타다카츠에게 죽었고, 신겐이 갖고 있던 에덴의 조각 '검'을 가져가 노부나가가 입수했다고 한다.
전국무쌍 4에서는 도쿠가와의 장 마지막 스테이지로 등장하며 오다 가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공격을 한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퇴각 도중 타케다 신겐의 함정에 걸려들고 가신들을 잃어가며[24]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간다. 이후 이에야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가신들의 투구를 쌓아가며 통곡한다.
전국무쌍 사나다마루에서 도쿠가와 가문의 패전을 제대로 보여줬는데 도쿠가와 가신들을 우수수 죽어가는데다가 이에야스 자신도 비참하게 뛰어서 다케다 군에게 도망치다가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잡혀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며 혼다 타다카츠와 핫토리 한조 덕분에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간다.
노부나가의 셰프에선 공명심과 판단 착오로 유리한 농성전을 포기하고 덤벼들었다가 함정에 걸려 참패했다는 식[25]으로 나온다. 이 참패에 이에야스의 이성이 승천할 뻔하지만 주인공의 된장 만두로 이성을 되찾고 공성계[26]로 위기를 모면하는 것으로 나온다.
한산: 용의 출현에서 한국 매체에서는 처음으로 반영되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다케다 군 기마대의 어린진으로 도쿠가와의 학익진을 격파한 것을 언급하며, 자신도 그와 같이 이순신을 격파하겠다고 언급하는데, 이때 미카타가하라 전투 장면이 짧게 묘사된다. 전투 장면에서 다케다 노부토요의 별동대가 학익진의 측면을 급습하여 진형을 붕괴시키고 본대가 어린진을 유지한 채 돌격하는 장면을 제대로 묘사했는데, 미카타가하라 전투 시절과 작중 시점[27]을 겹치는 장면을 연출하다 보니 노부토요의 별동대가 도쿠가와의 동쪽이 아니라 서쪽을 치는 것으로 좌우가 반전되었다.
2022년 8월 8일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이 기자회견을 열면서 그동안의 경영 실책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상단에 있는 이에야스의 우거지상 초상화를 배경으로 등장시켜 화제가 되었다.#
NHK 대하드라마 어떡할래 이에야스 17화의 메인 스토리가 이 전투이다.
[1] 나고야시의 도쿠가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흔히 '이에야스의 우거지상(家康のしかみ像)'이라고 불린다. 미카타가하라 전투를 대표하는 그림인 이 괴이한 초상화의 경위는 아래에 서술되어 있다.[2] 오기마치 덴노 시절 연호으로 무로마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시절이었다.[3] 당시 동아시아는 선조(조선) 6년, 만력제 원년[4] 오늘날의 시즈오카 현 서쪽[5] 오늘날의 야마나시 현에 해당.[6] 현재의 나가노 현[7] 원래 다케다 신겐은 이마가와-다케다-호조 간 체결되었던 동맹 조약을 깨고 이마가와의 뒤통수를 쳤고 이에 호조 우지야스는 동맹을 폐기했다.[8] 비록 노부나가의 친정은 아니었으나 이들은 노부나가의 최측근에 있었으므로 노부나가가 성의없는 지원군을 보낸건 아니었다. 오히려 최근에는 이에야스의 가신 사카이 가문에 전해지는 문서에서 노부나가의 원군이 2만이라고 기록된 문서 외에도, 원군이 최소 1만 이상이었음을 시사하는 서류들이 많이 발견되어 원군 3천이 소수설이 되었다.[9] 진 모양이 학이 날개 편 것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상대방보다 자기 군대의 숫자가 많을 때 학이 날개로 감싸듯이 쌈싸먹기 하는 작전이다. 한국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쓴 진법으로 유명.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은 정확히는 그 변형이다.[10]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해전으로는 한산도 대첩이 유명한데, 이때도 조선 수군이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학익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민첩한 기동이 어려운 해전에서 상대보다 우월한 원거리 화력과 크고 튼튼한 선체를 바탕으로 사용한 것이다.(그리고 판옥선은 왜선들보다 속도는 뒤져도 선회력 면에서는 더 뛰어났다.) 근거리 육박전의 상황에서 학익진이라는 연합군의 선택은 만용으로 판단된다.[11] 어린진은 쐐기 진형의 일종으로 상대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진형을 넓은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거기다 최선봉에 정예 부대를 배치해서 뚫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학익진은 아군 병사를 넓게 펼치는 것이라 어린진으로 뚫기에는 딱 좋다.[12] 하필이면 노부나가가 보낸 그 지원군이었다. 도쿠가와의 동쪽 측면.[13] 다케다 군의 사상자가 매우 적은 이유 중 하나가 별동대의 활약으로 학익진을 매우 빨리 붕괴시킨 것이었다. 만약 별동대를 보내지 않았다면 이겼어도 사상자가 2백 보다는 더 많은 수가 나왔을 것이다.[14] 나쓰메 소세키의 조상. 미카와 잇코잇키에 가담하였으나 이에야스의 용서를 받았다.[15]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저 그림이 '실제 미카타가하라 패전 직후'의 모습을 그렸을 확률은 많이 낮다고 한다.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도 일단 저 초상을 모델로 한 석상까지 존재한다.[16] 한산도 대첩의 학익진을 생각하면 된다.[17] 버티는 군대의 한쪽 진영이 무너질 시 어떻게 되느냐? 그 말은 바로 이웃한 아군부대들의 측면이나 후방이 바로 적부대의 공격에 노출됨을 의미하며, 그렇게 노출된 방향으로 공격을 가하면 공격을 당하는 방향의 병사들은 지휘부의 대응이 없으면 순식간에 전면 이외의 다른 방향으로부터 들어오는 칼날을 막느라 허둥지둥 할테고, 그렇게 조직화된 일원으로서 움직임이 아닌 개인으로서 살기위해 제식화된 부대의 움직임이 무너지게 되면, 이러한 위협과 이상현상이 곧 안쪽에 위치한 다른 병사들에게 인지될 것이고, 이는 개인으로서 생존의 걱정과 동시에 아군의 패전상황이 임박한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오래 지속되면, 조직의 결속력이 붕괴되는 모랄빵 현상이 가속화되고, 그렇게 무질서한 패주와 조직적이지 않은 개인단위의 항전이 시작되면서 해당 부대는 더 이상 전장에서 영향력을 가질수 없는 오합지졸로 변하게 된다.[18] 쉽게 말해 개인이란 모래들을 뭉쳐 부대로서 조직적으로 기능하는 단단한 벽돌을 만들수 있는 접착제가 조직력이라고 봤을때, 그 벽돌을 유지시킬 조직력이 없다면 더 이상 모래들은 벽돌과 같은 단단함을 유지할 방법이 없으며, 외부의 충격이나 하중을 견딜수 없기에 집을 짓는 재료가 될수 없음을 생각하면 된다.[심지어] 그 칸나이 전투의 양상은 결과적으로 학익진이 되었을 뿐이지, 최초 포진은 오히려 중앙을 앞으로 돌출시켜 후퇴할 공간을 남겨두었다. 최초 포진부터 중앙이 뒤로 후퇴해 있는 학익진이라면 병력운용의 난이도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20] 노부나가는 당시 잠도 며칠동안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심각한 궁지에 몰려 있었으나 신겐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안심하고 3일 밤낮을 내리 잤다고 한다.[21] 중국에서 손빈이 말한 추행진(錐行陣)이나 중국 진법 체계의 기본이 되는 손무자팔진의 모진(牡陣)과 같은 중앙이 예리한 삼각형 형태의 돌격에 특화된 진법이다.[22] 공룡킹 어드벤처에 나오는 아이템. 우주 하나만큼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농축되어 있는 미지의 구슬로, 사람이 맨손으로 만지면 그 에너지를 감당 못해 즉사한다.[23] 대하드라마 덕후. 핫토리 한조를 처음 보자마자 흥분해서 그를 사방을 돌아가면서 관찰하고 직접 만져보거나, 센고쿠 시대 역사를 빗댄 떡 이야기를 언급한다든가, 가급적이면 마지막에 떡을 주워먹기만 한 이에야스보단 오다 장군이 되고 싶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든가…물론 주변인물들은 전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24] 이 중 2명은 이에야스를 자칭해가며 시간을 끈다.[25] 이에야스 본인도 머리로는 농성을 유지하는 게 옳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문제는 도쿠가와가 오다의 뒤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다케다가 "그래 그렇게 계속 농성이나 해라. 난 그냥 오다 뒤꽁무니나 치련다." 식으로 도쿠가와 군을 무시하고 다른 길로 지나가기 시작해 당황한 상황에서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게 위장한)는다는 척후의 보고가 있었기에 야전으로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 착오를 저지른 것이다. 사실상 심리전으로 신겐에게 놀아난 셈.[26] 성을 공격하는 계책이 아니라 비어있는 성에 함정을 준비해놓은 것처럼 꾸며 적을 쫓아내는 계책.[27] 와타나베 시치에몬이 함대에서 뒤처진 원균을 쫓아가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