佐久間信盛
(1528년? ~ 1582년 2월 18일)
오다 가문의 무장으로 후위 부대의 지휘를 전문으로 하여 물러나는 사쿠마라[1]고 불렸으며, 법명은 도무케이겐(洞無桂巌) 또는 소스케(宗佑).
오다 노부히데를 섬기면서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나자 후견인 역할을 맡았으며, 1551년에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유키가 반기를 들었을 때 노부나가를 지지하였다.
1560년에 오케하자마 전투에 참전하여 젠쇼지토리데의 수비를 맡아서 싸운 공으로 나루미 성의 성주에 임명되었다.
1568년에 노부나가가 상경할 때 종군하여 오미국의 롯카쿠 요시카타를 공격하는 미츠쿠리 성 전투에서 선봉으로 참전하였으며, 1570년에 아자이, 아사쿠라를 공격하는 아네가와 전투에서는 본진을 수비하는 역할로 참전하였다. 보다이지 성에서 패배한 요시카타를 감시했지만 놓쳤다.
1571년에는 영지로 오미 쿠리타 군을 받았으면서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싸우던 츠츠이 준케이를 귀순하는 교섭을 하여 히사히데와 쥰케이를 화목시켰으며, 제 1차로 이세나가시마 공격에 참전하였으나 고전했다.
1572년에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 타키가와 카즈마스, 히라테 히로히데, 미즈노 노부모토 등과 함께 3천의 병사를 이끌었지만 노부모리가 다케다 신겐의 군사를 보고 퇴각하는 바람에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했다.
1573년, 1574년 두 차례에 걸쳐서 이세 나가시마 공격에 참전하였는데, 1573년 8월에 노부나가가 에치젠의 아사쿠라 군을 공격했을 때 출병하라는 노부나가의 사전 공지를 들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보다 늦게 왔다가 질책하자 그렇게 모질게 말씀하셔도 우리 정도의 가신들을 쉽게 거느릴 수 없다고 하여 대답하여 노부나가의 분노를 샀는데, 이는 이후 노부나가에게 추방되는 원인 중에 하나가 된다.
1575년 6월 29일에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군을 꿰어내기 위해 좌익으로 참전하였으며, 1576년에 혼간지를 공격하는 지휘관을 맡았지만 고전하였다. 같은 해에 제 1차 키즈카와 전투에서 모리의 수군에게 패하였다.
1577년에는 키슈 정벌과 시기 산성 전투 등에 오다군의 부장으로 참전.
노부모리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에 노부나가가 나서 조정과의 알선으로 혼간지와의 싸움이 끝난 1580년 10월에 사실상의 해고통지에 해당하는 19개조의 셋칸장(折檻状)을 받았다.
一、父子五ヶ年在城の内に、善悪の働きこれなきの段、世間の不審余儀なく、我も思ひあたり、言葉にも述べがたき事。
一、此の心持の推量、大坂大敵と存じ、武篇にも構へず、調儀・調略の道にも立ち入らず、たゞ、居城の取出を丈夫にかまへ、幾年も送り候へば、彼の相手、長袖の事に候間、行くは、信長威光を以て、退くべく候条、さて、遠慮を加へ候か。但し、武者道の儀は、各別たるべし。か様の折節、勝ちまけを分別せしめ、一戦を遂ぐれば、信長のため、且つは父子のため、諸卒苦労をも遁れ、誠に本意たるべきに、一篇に存じ詰むる事、分別もなく、未練疑ひなき事。
一、丹波国、日向守働き、天下の面目をほどこし候。次に、羽柴藤吉郎、数ヶ国比類なし。然うして、池田勝三郎小身といひ、程なく花熊申し付け、是れ又、天下の覚えを取る。爰を以て我が心を発し、一廉の働きこれあるべき事。
一、柴田修理亮、右の働き聞き及び、一国を存知ながら、天下の取沙汰迷惑に付きて、此の春、賀州に至りて、一国平均に申し付くる事。
一、武篇道ふがひなきにおいては、属託を以て、調略をも仕り、相たらはぬ所をば、我等にきかせ、相済ますのところ、五ヶ年一度も申し越さざる儀、由断、曲事の事。
一、やす田の儀、先書注進、彼の一揆攻め崩すにおいては、残る小城ども大略退散致すべきの由、紙面に載せ、父子連判候。然るところ、一旦の届けこれなく、送り遣はす事、手前の迷惑これを遁るべしと、事を左右に寄せ、彼是、存分申すやの事。
一、信長家中にては、進退各別に候か。三川にも与力、尾張にも与力、近江にも与力、大和にも与力、河内にも与力、和泉にも与力、根来寺衆申し付け候へば、紀州にも与力、少分の者どもに候へども、七ヶ国の与力、其の上、自分の人数相加へ、働くにおいては、何たる一戦を遂げ候とも、さのみ越度を取るべからざるの事。
一、小河かり屋跡職申し付け候ところ、先々より人数もこれあるべしと、思ひ候ところ、其の廉もなく、剰へ、先方の者どもをば、多分に追ひ出だし、然りといへども、其の跡目を求め置き候へば、各同前の事候に、一人も拘へず候時は、蔵納とりこみ、金銀になし候事、言語道断の題目の事。
一、山崎申し付け候に、信長詞をもかけ候者ども、程なく追失せ候儀、是れも最前の如く、小河かりやの取り扱い紛れなき事。
一、先々より自分に拘へ置き候者どもに加増も仕り、似相に与力をも相付け、新季に侍をも拘ふるにおいては、是れ程越度はあるまじく候に、しはきたくはへばかりを本とするによつて、今度、一天下の面目失い候儀、唐土・高麗・南蛮までも、其の隠れあるまじきの事。
一、先年、朝倉破軍の刻、見合せ、曲事と申すところ、迷惑と存ぜず、結句、身ふいちやうを申し、剰へ、座敷を立ち破る事、時にあたつて、信長面目を失ふ。その口程もなく、永々此の面にこれあり、比興の働き、前代未聞の事。
一、甚九郎覚悟の条々、書き並べ候へば、筆にも墨にも述べがたき事。
一、大まはしに、つもり候へば、第一、欲ふかく、気むさく、よき人をも拘へず、其の上、油断の様に取沙汰候へば、畢竟する所は、父子とも武篇道たらはず候によつて、かくの如き事。
一、与力を専とし、余人の取次にも構ひ候時は、是れを以て、軍役を勤め、自分の侍相拘へず、領中を徒になし、比興を構へ候事。
一、右衛門与力・被官等に至るまで、斟酌候の事、たゞ別条にてこれなし。其の身、分別に自慢し、うつくしげなるふりをして、綿の中にしまはりをたてたる上を、さぐる様なるこはき扱ひに付いて、かくの如き事。
一、信長代になり、三十年奉公を遂ぐるの内に、佐久間右衛門、比類なき働きと申し鳴らし候儀、一度もこれあるまじき事。
一、一世の内、勝利を失はざるの処、先年、遠江へ人数遣し候刻、互に勝負ありつる習、紛れなく候。然りといふとも、家康使をもこれある条、をくれの上にも、兄弟を討死させ、又は、然るべき内の者打死させ候へば、その身、時の仕合に依て遁れ候かと、人も不審を立つべきに、一人も殺さず、剰へ、平手を捨て殺し、世にありげなる面をむけ候儀、爰を以て、条々無分別の通り、紛れあるべからずの事。
一、此の上は、いづかたの敵をたいらげ、会稽を雪ぎ、一度帰参致し、又は討死する物かの事。
一、父子かしらをこそげ、高野の栖を遂げ、連々を以て、赦免然るべきやの事。
右、数年の内、一廉の働きなき者、未練の子細、今度、保田において思ひ当り候。抑も天下を申しつくる信長に口答申す輩、前代に始り候条、爰を以て、当末二ヶ条を致すべし。請けなきにおいては、二度天下の赦免これあるまじきものなり。
(해석)사쿠마 부자는 5년 동안 텐노지 요새에서 이시야마 혼간지를 상대로 전투 지휘를 맡았는데도 결국 공훈다운 공훈은 아무것도 올리지 못했다. 다들 그걸 수상하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사쿠마 부자의 마음을 미루어 보건대, 이시야마 혼간지를 두려워해서 싸워서 해결하지도 않고 계략으로 해결하지도 않고 그들을 설득해서 해결하지도 않고, 그냥 몇 년 동안 지키고만 있으면 상대는 그냥 중대가리들이니까 몇 년 버티면 결국엔 나 노부나가의 위세에 쫄아서 알아서 혼간지파가 이시야마에서 나가줄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무사도란 그런 게 아니다. 니들이 싸우든, 계략을 걸든, 설득하든 해서 문제를 해결했으면 나 노부나가도, 너희 부자도,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도 쓸데없는 고생 하지 않아도 됐겠지. 그런데도 지구전에 집착한 너희들은 그냥 겁쟁이에 불과하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단바를 평정할 때의 활약은 천하의 귀감이었고,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공도 이에 견줄 만 하다. 이케다 츠네오키는 적은 병사로도 아라키 가의 하나쿠마 성을 함락시켜 천하에 그 이름을 떨쳤다. 너희들도 다른 사람들의 활약을 들으면 분발해서 임무에 힘썼어야 했다.
그리고 시바타 카츠이에는 이미 에치젠 일국의 태수이면서도 '공을 세우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라고 분발해서 카가를 정벌했다.
싸울 자신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보거나 그래도 잘 안되면 나랑 상의라도 하던가. 5년 동안 한번도 나한테 상의하러 온 적이 없는 건 태만이다.
너의 요리키[2] 야스다 토모무네의 서한에는 ‘혼간지에 틀어박힌 중대가리들을 쓰러뜨리면 다른 작은 성의 잇키들도 아마 해산할 것이다’ 라고 했고, 너희 부자도 이에 연서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보고가 없었는데 이런 서한을 보내온다는 것은 자신의 괴로운 입장을 피하기 위해 이것저것 변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가신단 안에서 너는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지? 미카와, 오와리, 오우미, 야마토, 카와치, 이즈미에서 요리키를 지원받고, 네고로슈를 더하면 키이를 포함해 7개 국에서 요리키를 보내주었다. 거기에 너희들 직속 부하를 더하면 어떻게 싸운다한들 이같은 추태는 없었을 것이다.
미즈노 노부모토 사후 카리야를 주어 가신이 늘어났는가 보니 그렇지도 않고 오히려 미즈노의 옛 신하들을 추방했다. 그러면 받은 땅으로 새 가신들을 고용이라도 하면 되는데 그것도 안 했지? 결국 추방한 미즈노의 옛 신하들의 땅을 자기 직할로 삼아서 자기 배나 불렸지?
오와리 야마자키의 땅도 줬는데, 내가 기대했던 자들도 즉시 추방했다. 이것도 앞의 카리야 건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전부터 가신에게 봉토를 주거나, 요리키를 배속하거나, 새로 가신을 고용하거나 했다면 이 정도의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을 돈 많이 모으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에 천하에 체면을 잃은 것이다. 중국 대륙[3], 조선[4], 유럽에서도 소문날 정도의 한심한 일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아사쿠라와 싸울 때 가신들의 판단이 둔해서 추격이 늦어질 뻔한 적이 있어서 혼내준 적이 있었지? 그때 너는 건방지게 말대꾸나 하고 마음대로 자리 박차고 나갔다. 그것 때문에 나(노부나가)는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 너는 큰소리 쳤는데 결국은 그때 내(노부나가)가 혼냈던 걸 또 반복한다.
아들 사쿠마 노부히데(佐久間信英)가 저지른 일은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까놓고 말하면 첫째로 욕심 많고, 괴팍하며 좋은 사람을 끌어안으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매사를 적당히 처리하려 하니, 즉 (사쿠마) 부자가 무사의 길을 알지 못하니까 이런 일이 된 것이다.
둘째로, 요리키만 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공격을 대비하면서 요리키에게 군역을 맡기고 자신의 가신을 고용하지 않는다. 영지를 허비하고 비겁한 짓을 하고 있다.
노부모리의 요리키나 가신들까지 노부히데를 꺼리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자랑하며 온화한 체 하며 솜 안에 바늘을 숨겨넣는 듯한 취급을 하니 이렇게 되었다.
노부나가의 대에 와서 30년간 봉공해온 사이, "노부모리의 활약은 유래없다"라고 불릴만한 활약은 하나도 없었다.
노부나가의 생애 가운데 승리하지 못한 것은 예년 미카타가하라에 원군을 보냈을 때로, 승패는 병가지상사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일도 있고 뒤쳐졌다 해도 형제, 인척 및 충실한 후다이가 전사라도 했다면 노부모리가 운 좋게 전사를 면했더라도 사람들이 전혀 불온하게 생각하지 않을텐데도 단 한명도 전사자를 내지 않았다. 거기에 또 다른 원군 장수 히라테 히로히데를 버리고서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사례없는 일도 없다.
이렇게 되었다면 어딘가의 적을 쳐부숴서 예전의 굴욕을 씻은 다음[5] 돌아오던가, 어디선가 전사할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면 머리를 굽히고 고야산에 은둔해 계속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상처럼 너희들이 몇 년 사이 공적도 없이 단지 재산 불리기에 탐닉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은 이번 야스다의 서한의 건으로 짚이는 바다. 원래 천하를 지배하고 있던 노부나가에게 대든 사람은 노부모리로부터 시작했으니 그 보상으로 마지막 2개조를 실행시키고야 말겠다. 응낙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一、此の心持の推量、大坂大敵と存じ、武篇にも構へず、調儀・調略の道にも立ち入らず、たゞ、居城の取出を丈夫にかまへ、幾年も送り候へば、彼の相手、長袖の事に候間、行くは、信長威光を以て、退くべく候条、さて、遠慮を加へ候か。但し、武者道の儀は、各別たるべし。か様の折節、勝ちまけを分別せしめ、一戦を遂ぐれば、信長のため、且つは父子のため、諸卒苦労をも遁れ、誠に本意たるべきに、一篇に存じ詰むる事、分別もなく、未練疑ひなき事。
一、丹波国、日向守働き、天下の面目をほどこし候。次に、羽柴藤吉郎、数ヶ国比類なし。然うして、池田勝三郎小身といひ、程なく花熊申し付け、是れ又、天下の覚えを取る。爰を以て我が心を発し、一廉の働きこれあるべき事。
一、柴田修理亮、右の働き聞き及び、一国を存知ながら、天下の取沙汰迷惑に付きて、此の春、賀州に至りて、一国平均に申し付くる事。
一、武篇道ふがひなきにおいては、属託を以て、調略をも仕り、相たらはぬ所をば、我等にきかせ、相済ますのところ、五ヶ年一度も申し越さざる儀、由断、曲事の事。
一、やす田の儀、先書注進、彼の一揆攻め崩すにおいては、残る小城ども大略退散致すべきの由、紙面に載せ、父子連判候。然るところ、一旦の届けこれなく、送り遣はす事、手前の迷惑これを遁るべしと、事を左右に寄せ、彼是、存分申すやの事。
一、信長家中にては、進退各別に候か。三川にも与力、尾張にも与力、近江にも与力、大和にも与力、河内にも与力、和泉にも与力、根来寺衆申し付け候へば、紀州にも与力、少分の者どもに候へども、七ヶ国の与力、其の上、自分の人数相加へ、働くにおいては、何たる一戦を遂げ候とも、さのみ越度を取るべからざるの事。
一、小河かり屋跡職申し付け候ところ、先々より人数もこれあるべしと、思ひ候ところ、其の廉もなく、剰へ、先方の者どもをば、多分に追ひ出だし、然りといへども、其の跡目を求め置き候へば、各同前の事候に、一人も拘へず候時は、蔵納とりこみ、金銀になし候事、言語道断の題目の事。
一、山崎申し付け候に、信長詞をもかけ候者ども、程なく追失せ候儀、是れも最前の如く、小河かりやの取り扱い紛れなき事。
一、先々より自分に拘へ置き候者どもに加増も仕り、似相に与力をも相付け、新季に侍をも拘ふるにおいては、是れ程越度はあるまじく候に、しはきたくはへばかりを本とするによつて、今度、一天下の面目失い候儀、唐土・高麗・南蛮までも、其の隠れあるまじきの事。
一、先年、朝倉破軍の刻、見合せ、曲事と申すところ、迷惑と存ぜず、結句、身ふいちやうを申し、剰へ、座敷を立ち破る事、時にあたつて、信長面目を失ふ。その口程もなく、永々此の面にこれあり、比興の働き、前代未聞の事。
一、甚九郎覚悟の条々、書き並べ候へば、筆にも墨にも述べがたき事。
一、大まはしに、つもり候へば、第一、欲ふかく、気むさく、よき人をも拘へず、其の上、油断の様に取沙汰候へば、畢竟する所は、父子とも武篇道たらはず候によつて、かくの如き事。
一、与力を専とし、余人の取次にも構ひ候時は、是れを以て、軍役を勤め、自分の侍相拘へず、領中を徒になし、比興を構へ候事。
一、右衛門与力・被官等に至るまで、斟酌候の事、たゞ別条にてこれなし。其の身、分別に自慢し、うつくしげなるふりをして、綿の中にしまはりをたてたる上を、さぐる様なるこはき扱ひに付いて、かくの如き事。
一、信長代になり、三十年奉公を遂ぐるの内に、佐久間右衛門、比類なき働きと申し鳴らし候儀、一度もこれあるまじき事。
一、一世の内、勝利を失はざるの処、先年、遠江へ人数遣し候刻、互に勝負ありつる習、紛れなく候。然りといふとも、家康使をもこれある条、をくれの上にも、兄弟を討死させ、又は、然るべき内の者打死させ候へば、その身、時の仕合に依て遁れ候かと、人も不審を立つべきに、一人も殺さず、剰へ、平手を捨て殺し、世にありげなる面をむけ候儀、爰を以て、条々無分別の通り、紛れあるべからずの事。
一、此の上は、いづかたの敵をたいらげ、会稽を雪ぎ、一度帰参致し、又は討死する物かの事。
一、父子かしらをこそげ、高野の栖を遂げ、連々を以て、赦免然るべきやの事。
右、数年の内、一廉の働きなき者、未練の子細、今度、保田において思ひ当り候。抑も天下を申しつくる信長に口答申す輩、前代に始り候条、爰を以て、当末二ヶ条を致すべし。請けなきにおいては、二度天下の赦免これあるまじきものなり。
(해석)사쿠마 부자는 5년 동안 텐노지 요새에서 이시야마 혼간지를 상대로 전투 지휘를 맡았는데도 결국 공훈다운 공훈은 아무것도 올리지 못했다. 다들 그걸 수상하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사쿠마 부자의 마음을 미루어 보건대, 이시야마 혼간지를 두려워해서 싸워서 해결하지도 않고 계략으로 해결하지도 않고 그들을 설득해서 해결하지도 않고, 그냥 몇 년 동안 지키고만 있으면 상대는 그냥 중대가리들이니까 몇 년 버티면 결국엔 나 노부나가의 위세에 쫄아서 알아서 혼간지파가 이시야마에서 나가줄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무사도란 그런 게 아니다. 니들이 싸우든, 계략을 걸든, 설득하든 해서 문제를 해결했으면 나 노부나가도, 너희 부자도,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도 쓸데없는 고생 하지 않아도 됐겠지. 그런데도 지구전에 집착한 너희들은 그냥 겁쟁이에 불과하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단바를 평정할 때의 활약은 천하의 귀감이었고,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공도 이에 견줄 만 하다. 이케다 츠네오키는 적은 병사로도 아라키 가의 하나쿠마 성을 함락시켜 천하에 그 이름을 떨쳤다. 너희들도 다른 사람들의 활약을 들으면 분발해서 임무에 힘썼어야 했다.
그리고 시바타 카츠이에는 이미 에치젠 일국의 태수이면서도 '공을 세우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라고 분발해서 카가를 정벌했다.
싸울 자신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보거나 그래도 잘 안되면 나랑 상의라도 하던가. 5년 동안 한번도 나한테 상의하러 온 적이 없는 건 태만이다.
너의 요리키[2] 야스다 토모무네의 서한에는 ‘혼간지에 틀어박힌 중대가리들을 쓰러뜨리면 다른 작은 성의 잇키들도 아마 해산할 것이다’ 라고 했고, 너희 부자도 이에 연서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보고가 없었는데 이런 서한을 보내온다는 것은 자신의 괴로운 입장을 피하기 위해 이것저것 변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가신단 안에서 너는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지? 미카와, 오와리, 오우미, 야마토, 카와치, 이즈미에서 요리키를 지원받고, 네고로슈를 더하면 키이를 포함해 7개 국에서 요리키를 보내주었다. 거기에 너희들 직속 부하를 더하면 어떻게 싸운다한들 이같은 추태는 없었을 것이다.
미즈노 노부모토 사후 카리야를 주어 가신이 늘어났는가 보니 그렇지도 않고 오히려 미즈노의 옛 신하들을 추방했다. 그러면 받은 땅으로 새 가신들을 고용이라도 하면 되는데 그것도 안 했지? 결국 추방한 미즈노의 옛 신하들의 땅을 자기 직할로 삼아서 자기 배나 불렸지?
오와리 야마자키의 땅도 줬는데, 내가 기대했던 자들도 즉시 추방했다. 이것도 앞의 카리야 건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전부터 가신에게 봉토를 주거나, 요리키를 배속하거나, 새로 가신을 고용하거나 했다면 이 정도의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을 돈 많이 모으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에 천하에 체면을 잃은 것이다. 중국 대륙[3], 조선[4], 유럽에서도 소문날 정도의 한심한 일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아사쿠라와 싸울 때 가신들의 판단이 둔해서 추격이 늦어질 뻔한 적이 있어서 혼내준 적이 있었지? 그때 너는 건방지게 말대꾸나 하고 마음대로 자리 박차고 나갔다. 그것 때문에 나(노부나가)는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 너는 큰소리 쳤는데 결국은 그때 내(노부나가)가 혼냈던 걸 또 반복한다.
아들 사쿠마 노부히데(佐久間信英)가 저지른 일은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까놓고 말하면 첫째로 욕심 많고, 괴팍하며 좋은 사람을 끌어안으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매사를 적당히 처리하려 하니, 즉 (사쿠마) 부자가 무사의 길을 알지 못하니까 이런 일이 된 것이다.
둘째로, 요리키만 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공격을 대비하면서 요리키에게 군역을 맡기고 자신의 가신을 고용하지 않는다. 영지를 허비하고 비겁한 짓을 하고 있다.
노부모리의 요리키나 가신들까지 노부히데를 꺼리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자랑하며 온화한 체 하며 솜 안에 바늘을 숨겨넣는 듯한 취급을 하니 이렇게 되었다.
노부나가의 대에 와서 30년간 봉공해온 사이, "노부모리의 활약은 유래없다"라고 불릴만한 활약은 하나도 없었다.
노부나가의 생애 가운데 승리하지 못한 것은 예년 미카타가하라에 원군을 보냈을 때로, 승패는 병가지상사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일도 있고 뒤쳐졌다 해도 형제, 인척 및 충실한 후다이가 전사라도 했다면 노부모리가 운 좋게 전사를 면했더라도 사람들이 전혀 불온하게 생각하지 않을텐데도 단 한명도 전사자를 내지 않았다. 거기에 또 다른 원군 장수 히라테 히로히데를 버리고서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사례없는 일도 없다.
이렇게 되었다면 어딘가의 적을 쳐부숴서 예전의 굴욕을 씻은 다음[5] 돌아오던가, 어디선가 전사할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면 머리를 굽히고 고야산에 은둔해 계속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상처럼 너희들이 몇 년 사이 공적도 없이 단지 재산 불리기에 탐닉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은 이번 야스다의 서한의 건으로 짚이는 바다. 원래 천하를 지배하고 있던 노부나가에게 대든 사람은 노부모리로부터 시작했으니 그 보상으로 마지막 2개조를 실행시키고야 말겠다. 응낙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 셋칸장에서 '싸워서 공적을 세울 것' or '고야산으로 갈 것' 중 양자택일하라고 압박했고, 이에 노부모리는 장남인 사쿠마 노부히데와 함께 고야산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추방당한 노부모리는 1582년 1월 16일에 고야산에서 사망했다.
사쿠마 노부히데는 노부모리 사후에 사면받아 다시 오다 가문의 가신이 되었고 이 후 히데요시, 이에야스를 섬기게 되었고 후손들은 하타모토로 명맥을 이어갔다.
추방 직전까지 오다 노부나가 휘하 군단 중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사쿠마 노부모리 추방 이후 그의 세력을 아케치 미츠히데가 이어받게 되는데 이 병력을 가지고 2년 후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으니 오다 노부나가 입장에서는 괜한 부스럼을 만든 셈.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신장의 야망 초창기 시리즈에서는 능력치가 낮았으나, 노부히데 - 노부나가 2대를 섬긴 점, 여러 전장터에서 공을 세웠던 점 등이 반영되어 이후 서서히 능력치가 올라가 신생에선 통솔과 지략 70대, 무력 60대를 마크하며 보통 무장이 되었다. 그러나 게임에서는 오다 가문과 궁합치가 맞지 않고 의리 수치도 낮은 편이라 오다로 플레이하면 쉽게 배반하는 무장이기도 하다.
[1] 이를 전국시대 때 신가리(殿軍)라고 하는데 어떤 전투에서 아군 전체가 위험에 빠져 철수를 해야만 하는 상황 일때 아군의 본대가 무사히 철수할수 있도록 소수의 군을 이끌고 후방에 머물며 적의 추격을 저지하거나 본대의 후퇴를 엄호하는 위험한 임무였다.[2] 현대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파견 사원[3] 명나라 실록이나 당시에 만들어진 사서에서도 없다.[4] 원문은 "고려"이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이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야사집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5] 원문은 회계의 치욕을 씻으라는 뜻으로, 십팔사략의 고사성어 회계지치(會稽之恥)와 같은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