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오다 단조노추 당주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 |||
<colbgcolor=#ffd700><colcolor=#000> 출생 | 1511년 | ||
사망 | 1552년 3월 27일 (향년 42세) | ||
오와리국 아이치군 스에모리촌 스에모리성 (현 아이치현 나고야시 지쿠사구 시로야마정) | |||
재임기간 | 제3대 오다 단조노추 당주 | ||
1527년 6월 ~ 1552년 3월 2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 친부 오다 노부사다 | |
배우자 | 도타고젠 | ||
자녀 | 차남 오다 노부나가 삼남 오다 노부유키 육남 오다 나가마스 장녀 오이치노카타 외 9남 1녀 | }}}}}}}}} |
1. 개요
일본 전국시대 오와리국의 다이묘이자 무장. 전국 3영걸 중 하나인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오와리 남서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쇼바타(勝幡) 성의 성주 오다 노부사다(織田信定)의 장남으로 에이쇼 8년(1511)년[1]에 출생했다. 노부히데는 기요스 삼봉행 중 단조노츄(弾正忠) 오다 가문으로서, 오다 가문에서는 다소 격이 낮은 분가 쪽이었으나 노부히데 대에 본인의 활약으로 다른 가문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단조노츄 분파의 가계는 오와리의 슈고(守護)인 시바씨(斯波氏)의 대리[2][3]이자 오다 야마토노카미(織田大和守) 분파인 기요스 오다 가문을 모시는 위치로, 엄연한 하위 가문이었다.
2. 생애
2.1. 오와리 제일의 실력가로
노부히데는 아버지 생전인 다이에이 7년(1527년) 가독을 물려받았다. 가독 상속 이후 얼마 되지 않은 덴분(天文) 원년(1532년) 경에 주가인 키요스오다가 당주 오다 미치카츠(織田達勝) 및 같은 기요스 삼봉행인 도자에몬 오다 가문(藤左衛門家)[4] 당주 오다 토오모토(織田寛故)와 싸웠으나 바로 화해했다. 그 직후 오와리 이마가와씨의 거점인 나고야성(那古野城)를 빼앗아 그곳에 기거하며 아이치 군에 세력을 확대했다. 이때 노부히데는 이마가와 우지토요가 자신의 주군이자 오와리 수호직인 시바 요시무네(斯波義統)의 매제임을 이용, 노래로 구워 삶아서(...)[5] 방심하게 만든 뒤, 급습해서 뺏아버렸다.[6]2.2. 오와리를 호령하는 호랑이
덴분 4년(1535년), 오와리국 인근 미카와(三河)국의 마츠다이라 가문 당주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淸康)[7]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노부히데는 이를 기회로 보아 미카와를 압박했다. 그 결과, 덴분 9년(1540 년)에는 안쇼 성(安祥城)을 차지했다. 그러나 마츠다이라 가문은 강적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되기에 이르렀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이것이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였다.[8] 이 전투에서 이긴 노부히데는 미카와국 서부를 완전히 차지했다.이 즈음 북부에서 사이토 도산이 미노(美農)의 국주인 토키 요리요시(土岐頼芸, 혹은 요리노리)를 축출하고, 본인이 미노를 차지했다. 노부히데는 토키 요리요시를 다시 슈고로 올린다는 명분하에 미노로 진격하여 오오가키성(大垣城)을 뺏는 등 선전했다.
덴분 8년(1539년) 후루와타리 성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즈음, 교토로 상경하여 조정[9]에 헌금을 해 종5위하에 임명되었고, 빈고노카미(備後守)의 작위를 얻게 되었다. 덴분 9년(1541년), 7월에는 조정에 이세신궁을 옮기는 제사를 위한 700관을 헌상하여 그해 9월, 미카와노카미(三河守)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노부히데는 실력으로서나 직위로서나 주가(기요스 오다 가문)의 주군인 시바 가문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부히데는 어떤 이유였는지 주가인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과 그 위의 시바 가문을 병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오와리국의 대표로서 북부의 사이토씨와 남부의 이마가와씨와 계속 대립하게 되었다.
2.3. 거듭되는 패배와 말년
순조롭게 미노를 압박해나가던 덴분 13년(1544년), 오다 노부히데는 사이토의 원군으로 에치젠(越前)에서 온 아사쿠라 소데키에게 패배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노부히데는 자기를 패배시킨 아사쿠라 가문과 바로 손을 잡고 도산을 치기로 결의했다. 덴분 16년(1547년), 아사쿠라군과 함께 도산의 거성인 이나바야마성(稲葉山城)을 공략하려 했으나(카노구치 전투, 加納口の戦) 결국 이 전투에서도 실패했다.거듭되는 패배로 오와리의 오다 가문은 다시 분열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카노구치 전투 이듬해인 덴분 17년, 노부히데의 조카인 오다 노부키요가 모반을 일으켰다. 이를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 직후 주가의 오다 노부토모[10]가 본거지인 후루와타리 성을 공격해온 것을 계기로 다시 주가와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 자체는 이듬해에 화친했으나 이미 노부히데의 세력은 굉장히 위축되어 있었다.
남부에서는 사이토 도산을 한참 압박하여 승승장구하던 덴분 13년(1544년)에 마츠다이라 가문의 가신이었던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11] 가 마츠다이라씨 및 이마가와씨와 절연하고 오다 가문에 붙었다.[12] 이에 위기를 느낀 마츠다이라 당주 히로타다는 아들인 다케치요를 이마가와씨에 인질로 보내 이마가와씨와의 연계를 더욱 두텁게 하려고 했으나 다케치요의 호송을 담당했던 토다 야스미츠(戸田康光)가 배신하여 마츠다이라씨의 적인 오다 가문에 다케치요를 보내고 말았다. 오다 노부히데는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의 아들을 볼모로 이마가와씨를 버릴 것을 종용했으나 히로타다는 이를 거절했다. 회유가 실패하자 노부히데는 마츠다이라씨의 본거지인 오카자키성(岡崎城)을 뺏으려고 진군을 개시했다.
그러나 노부히데는 마츠다이라씨를 지원하러 온 이마가와 군을 만나 참패(제2차 아즈키사카 전투)했고, 노부히데는 안쇼 성까지 퇴각했다. 이때 뜬금없이 마츠다이라 히로타다가 가신에게 암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나 오카자키 성의 지배권이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 성을 노린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셋사이가 제3차 안쇼 성 전투[13] 를 통해 성을 빼앗으며 오다 노부히데의 서자인 오다 노부히로를 붙잡는데 성공했다. 노부히데는 어쩔 수 없이 마츠다이라 다케치요와 오다 노부히로의 신병을 바꿀 수밖에 없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어린 다케치요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마츠다이라씨의 구 영토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덴분 17년(1548년)에는 스에모리 성을 쌓고 그곳에서 말년까지 보냈다.
결국 북부에 이어 동부에서도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 노부히데는 북으로는 살모사, 동으로는 도카이도 제일의 무사를 적으로 두게 되었고, 안으로는 아직 통합을 이루지 못한 오다 가문 내부의 도전까지 받게 되었다. 무려 삼면의 적에게 둘러싸인 형국이라 이상황을 타파하고자 고심하던 노부히데는, 결국 아들 오다 노부나가와 도산의 딸 사이토 노히메를 정략결혼시켜 북부의 안정을 찾았지만, 근심하던 덴분 20년(1551년), 오다 노부나가에게 가독을 승계하고[14] 유행병으로 사망했다. 일설에는 말년에 음주와 여색을 가까이 해 몸을 망쳤다는 설도 있다.
3. 가계
자녀 | 이름 | 생년월일 | 사망일 | 나이 |
장남[15] | 오다 노부히로 | 불명 | 1574년 | 불명 |
차남 | 오다 노부나가 | 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 | 향년 48세 |
3남 | 오다 노부유키 | 1536년 | 1557년 12월 11일 | 향년 21세 |
4남 | 오다 노부하루 | 1544년 | 1570년 10월 19일 | 향년 26세 |
5남 | 오다 노부테루 | 1546년 | 1610년 12월 3일 | 향년 64세 |
6남 | 오다 나가마스 | 1547년 | 1622년 1월 24일 | 향년 75세 |
7남 | 오다 노부카네 | 1548년[16] | 1614년 8월 22일 | 향년 66세 혹은 향년 71세 |
아들 | 오다 노부토키 | 불명 | 1556년 | 불명 |
아들 | 오다 노부오키 | 불명 | 1570년 12월 28일 | 불명 |
아들 | 오다 노부타카 | 불명 | 1555년 7월 24일 | 불명 |
아들 | 오다 히데나리 | 불명 | 1574년 10월 23일 | 불명 |
아들 | 오다 나가토시 | 불명 | 1582년 6월 21일 | 불명 |
4. 여담
말년엔 열세에 몰렸지만 본래의 역량은 매우 뛰어난 무장이었다. 호랑이로 칭해졌을 정도였으며, 단지 아사쿠라 소테키, 사이토 도산, 이마가와 요시모토 등 싸워야 했던 주변 상대들이 노부히데 이상으로 뛰어난 다이묘였다는 점이 불운으로 작용했다. 전투에도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먼저 한 것처럼 알려져있는 상업의 장려를 본격적으로 꾀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쇼바타 성과 가까운 남쪽의 항구도시인 츠시마와 아츠다를 지배해 해운업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등 경제 유통의 거점을 마련하여 상업을 활성화했다. 이 덕분에 오와리국은 영토의 크기 자체는 작으면서도 고쿠다카(石高)는 거대한 대국이 되었고[17], 이를 바탕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포무를 행할 수 있었다.[18]5. 대중매체에서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대부분의 창작물에서는 시대를 앞서간 아들을 이해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실제로도 노부히데는 가신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와리의 멍청이'라고 희화화되던 아들을 끝까지 오다 가의 계승자로 밀었고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아들이 워낙 걸출한 인물이라 묻히는 감도 있는 듯. 어떤 의미에서는 초한전쟁을 다룬 창작물의 항량과 비슷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탄생이나 원복같은 초창기 시나리오나 군웅집결에서 등장. 전통적으로 '오와리의 호랑이'라는 별명답게 맹장으로 나오나 창조에서는 능력치 중 정치가 가장 높은 문관 이미지로 등장한다.
- <토탈 워: 쇼군2>에서는 캠페인 시작 시점인 1545년에 오다 가문의 다이묘로 등장하는데 장군 특성에 '무례함'이 붙어 있어 다른 가문들과 외교할 때 외교 수치에 -20가 붙는다. 이 때문에 노부히데가 살아있으면 처음 만난 가문이라도 해당 가문과의 관계가 무관심보다 낮은 상태인 냉담함으로 시작할 확률이 높다. 외교 디버프가 너무나도 거슬린다면 몇 년 뒤 노부나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노부히데를 자폭시키는 방법도 있다.
[1] 이 부분은 명확하지 않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에이쇼 5년 (1508년) 설, 에이쇼 7년 (1510년) 설 등[2] '슈고다이'(守護代)라고 한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무로마치 막부의 대리인인 슈고의 권한이 쇠퇴하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이 슈고들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이 '슈고다이'였다. 신분이 높은 가문이고, 오와리의 본래 슈고였던 시바씨는 오다 가문, 정확히는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의 괴뢰가 되어 있었다.[3] '다이'는 대리라는 뜻을 가진다. 성주 대리인도 '죠다이'(城代)라고 한다.[4] 지금의 아이치현 기요스시에 위치한 오타이성(小田井城)을 거성으로 삼은 집안이다.[5] '렌카'(連歌)라고 불리는 시가로 와카의 일종이다. 서로 주고받으며 만드는 공동 제작의 형태라 당연히 자리를 같이 할 일이 많아지므로 교양인들 간의 친목 도모용으로 널리 사랑받았다.[6] 나고야성은 노부나가와도 인연이 깊은 성인데, 일단 노부나가가 여기서 탄생하기도 했고, 노부히데가 후루와타리 성으로 옮겨가면서 본인의 거성으로 삼아 1555년까지 사용했다. 이후 주가를 병합하고 기요스성으로 들어가면서 폐성되었다.[7]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이에야스의 '야스'(康)는 여기서 따왔다.[8] 아즈키자카 전투는 오다측이 이겼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 전투 자체의 실재 여부를 의문시하는 시선도 있다.[9] 당시의 쇼군은 아시카가 요시테루.[10] 상술된 오다 미치카츠의 양자.[11] 미즈노 가문의 거점 카리야성은 오와리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한터라 세력 동향에 한층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상황.[12]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어머니인 오다이가 이 미즈노 가문 출신으로, 노부모토와는 배다른 남매에 해당했다.[13] 미카와 서부에 위치한 안쇼성은 오와리와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까닭에 전략적 가치가 높았던 성이었다. 이 성을 둘러싸고 오다 VS 이마가와+마츠다이라의 전투가 빈번했으며 혼다 타다카츠의 아버지도 이 곳에서 전사했다.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오카자키성(岡崎城)으로 본거지를 옮기기 전까지 안쇼 마츠다이라 가문의 본거지 역할을 맡기도 했으니 마츠다이라 가문측에서는 반드시 탈환해야 하는 성으로 여겼으며, 오다 노부히데 역시 미카와 공략의 발판으로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성인지라 성주 대리에 자신의 서장자를 앉혔을 정도로 중시했다.[14] 장남은 오다 노부히로였지만 그는 서자였기 때문에 적자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가주를 승계했고, 후계자 분쟁도 적자였던 오다 노부유키와 이루어졌다.[15] 정확한 생년은 불명이나 오다 노부나가보다 형이므로 장남이 맞다.[16] 1543년 8월 17일생이라는 설도 있다.[17] 원래 땅 자체도 굉장히 비옥한 곳이었다. 지도만 보면 옆의 사이토씨의 미노나 이마가와씨의 도토미, 스루가, 미카와 등과 비교해 크기가 작은 데도 불구하고 팽팽하게 맞서 싸웠다.[18] 당시 오와리국의 재력을 살펴볼 수 있는 예시중 하나로, 텐분 12년(1543년) 노부히데가 조정에 4,000관(현재 시가 약 6억 엔)을 헌상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17년 뒤에 츄고쿠 전토를 수중에 넣은 모리 모토나리가 천황 즉위 기념으로 바친 금이 2,000관이었다는 서술이 있다. 또한 이런 헌금 덕에 나중에는 근왕주의자로 묘사되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