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치 미츠히데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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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치 미츠히데 明智光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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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afe7><colcolor=#fff> 출생 | 1516년 또는 1528년 |
사망 | 1582년 7월 2일[1] (향년 54세 / 66세) |
통칭 | 주베에(十兵衛) |
1. 개요
"敵は本能寺にあり"
적은 혼노지에 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佛の噓は方便と云ふ 侍の噓は武略と云ふ 士民百姓はかわゆきことなり"
부처의 거짓말은 방편[2]이라 하고, 사무라이의 거짓말은 지략이라 하는데, 사민 백성(사농공상)들이 가련할 따름이니라.[3]
[다른해석]
부처의 거짓말은 방편이라 하고, 사무라이의 거짓말은 지략이라 하는 마당에, 사민 백성들이 공납 등을 속이는 것쯤이야 귀여운 일 아니겠느냐.
부처의 거짓말은 방편[2]이라 하고, 사무라이의 거짓말은 지략이라 하는데, 사민 백성(사농공상)들이 가련할 따름이니라.[3]
[다른해석]
부처의 거짓말은 방편이라 하고, 사무라이의 거짓말은 지략이라 하는 마당에, 사민 백성들이 공납 등을 속이는 것쯤이야 귀여운 일 아니겠느냐.
일본 전국시대 무장으로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여 죽게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국시대를 잘 모르거나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꽤 지명도가 높은 전국무장이다. 어쨌든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모반자이며, 일본 현지에서는 유다, 브루투스, 베네딕트 아놀드처럼 "배신자"의 대명사이다.
통칭은 주베에(十兵衛). 후일 규슈의 명가인 고레토(惟任: これとう)씨를 칭하기도 했지만 훗날 세간에는 아케치 주베에 미츠히데라는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관직명인 휴가노카미(日向守)로도 알려져 있다.[5][6]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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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평가
미츠히데의 성실한 성격, 준수한 외모, 교양인, 철포의 달인 등과 같은 이미지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라 훔친 이야기(国取り物語)>에서 쌓인 이미지이기는 하나 실제로 와카(和歌, 일본의 전통시)와 다도를 즐기는 문화인이었고 학문과 군사적 지략까지 갖춘 지성인이었으며 철포의 달인이기도 했다. 단, 성실한 무사였는지는 의문이 있는데 몇 번인가 주군을 바꿨고 당시의 기술에 미츠히데가 인격자라는 식으로 나온게 없기 때문. 다만, 전국시대의 무사들은 대부분 특정 가문을 목숨걸고 섬기지 않고 '특정 가문 휘하에서 특정 전투에서 용맹히 싸웠다.'는 증서인 '간죠(感状)'라는 문서를 받아서 여기저기 가문을 옮겼다.[7] 물론 특정 가문을 여러 대에 걸쳐 섬긴 고정 가신은 후다이라고 하여 특별히 원로로 우대받았다. 그래서 미츠히데처럼 1번에 주군을 2명 이상 섬기는 행동은 전국시대 당시의 상식으로는 의리없는 행동이 아니었다.[8]그는 배신과 비밀스러운 모임을 즐겨하고 형벌을 내리는 데 잔혹하며, 독재적이기도 하였다. 자신을 위장하는 데 빈틈이 없고 전쟁에서는 모략을 주특기로 하였으며 인내심이 강하고 계략과 책모의 달인이었다. 또한 축성에 조예가 깊어 뛰어난 건축 수완을 보였으며 전투에 선발되면 숙련된 병사들을 잘 활용하였다. ...(중략)...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동정하는 노부나가의 앞에서 울기도 하고, 열심히 봉사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을 보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위장하기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진실된 눈물로 보였다. 또한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사람을 속이는 일흔두 가지 방법을 깊이 체득하고 학습하였다고 떠들어 대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이러한 술책과 거짓으로 그다지 모략에 정통하지 못한 노부나가를 완전히 기만하고 미혹시켰다.[9]
루이스 프로이스는 위에서처럼 가톨릭 선교사이기에 이교도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히 부정적인 서술이다. 프로이스가 묘사한 미츠히데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간웅.
그런가 하면 개인적 사생활은 지극히 결벽했고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순애보에 애처가였다. 정실 히로코와 결혼하기 직전에 히로코가 천연두에 걸리는 바람에 곰보 자국이 얼굴에 남고 말았다. 그래서 히로코의 집안에서는 꼭 닮은 여동생을 언니 대신 미츠히데에게 보냈으나, 미츠히데는 이를 알아채고 "나는 히로코님이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소이다."라고 잘라 말하며 돌려보낸 뒤 그대로 히로코와 혼인했다.[10] 히로코는 미츠히데가 낭인 시절 여러 가문을 전전할 때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가면서 남편을 도왔다고 하며 미츠히데도 그런 아내를 매우 아껴 죽을 때까지 단 1명의 측실도 들이지 않았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부인인 가라샤가 바로 둘 사이의 딸. 이 때문에 <효우게모노>나 NHK 드라마 <히데요시> 같은 픽션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가정으로 묘사되는데 남편을 내조하는 현모양처, 가정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직장에서 분투하는 가장 같은 느낌으로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구성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4. 기타
- 기후현에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죽지 않고 도망쳐와 아라후쿠(荒深)로 성을 바꿔 숨어살았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미츠히데의 가신이 미츠히데로 위장하고 있다가 살해된 후, 미츠히데 본인은 그의 고향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는 것. 현재 기후현의 아라후쿠 가문에서도 스스로를 미츠히데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 신뢰도는 낮지만 야담 중에는 각지를 유랑하다가 모리 모토나리의 모리가에 사관을 요청한 적도 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미츠히데의 임관을 거절했는데 그 이유가 "그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관상이 늑대와 닮았다. 겉과 속이 다른 자이니 안심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 혼노지의 변 이전에 렌가[11] 모임을 열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시를 지었다.時は今(때는 바로 지금)/雨が下知る(비가 아래를 적시는)/五月哉(오월이로다)
위 문장을 한국어 발음으로 옮기면 '時は今토키와이마 雨が下知る아메가시타시루 五月哉사츠키카나'가 되는데 여기서 토키(時)라는 단어가 아케치의 출신 씨족인 토키씨(土岐)[12]와 연결되고 아메가시타(雨が下)는 천하(天が下、天下)와 연결된다. 또 시루(知る)의 知자가 다스릴 치와 똑같이 ち로 읽을 수 있음을 이용해, '토키씨가 천하를 다스리는 오월이구나'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월이구나는 깊은 뜻이 없고 그냥 감탄사다.
- 혼노지의 변 이전에 신사에 참배해서 운을 점치기 위해 제비를 3번 정도 뽑았다고 한다. 보통은 거사를 앞두고 불안한 마음에 제비뽑기를 여러 번 하면서 고민해 보았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실제로는 제비뽑기를 여러 번 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 미츠히데에 대해서는 배신자의 대명사이자 간웅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지만[13] 대개는 성실하거나 상식이 풍부한 인물로 그려지는 등 동정적인 평가가 많다. 노부나가 잔혹설이 여러 설화나 군담을 통해 유포되면서 자연스레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평가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지만 혼노지의 변이 지모가 뛰어나다는 미츠히데의 소행치고는 너무나 뒷공작이 허술했기 때문. 물론 현실적으로는 쿠데타라는 것이 완벽한 준비를 거쳐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상관이 꼼꼼한 노부나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현재는 많은 대중과 창작물들이 미츠히데가 자신이 천하를 노려볼 수 있을 최후의 기회를 노려 모반을 결행했다는 이른바 '야망설'보다는 노부나가의 성격과 평소 소행, 미츠히데 본인에 대한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결행했다는 '원한설'에 더 가까운 결론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미츠히데의 묘사 역시 프로이스가 묘사한 것과 같은 간웅, 배신자라기보다는 성실한 인물이지만 노부나가와 성격 차이가 매우 심해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식으로 흘렀다.
- 미츠히데가 농민들에게 죽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설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으나, 전국시대의 농민들은 평화롭게 땅이나 일구며 살던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잘못된 속설이다. 당시 일본의 농민들은 다이묘의 소집령이 떨어지면 제각기 집에 있는 갑주와 무기를 들고 이에 응하였으며 전투가 끝나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실전 경험이 있는 사실상의 예비군, 하급 병사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전투원이었다. 이들이 패잔병의 소지품을 노리고[14] 무리를 지어 몰려가서 노략질을 하거나[15], 목을 베어 상대 다이묘에게 갖다 바치는 경우가 잦았다. 이를 낙오무사 사냥(落武者狩り; 오치무샤가리)이라고 한다.[16] 패잔병 처리를 쉽게 할 수 있으니 다이묘들도 현상금까지 걸면서 이를 열심히 응원(?)했다. 농민들 입장에선 운 좋게 지휘관이 낚이면 현상금도 쏠쏠하고[17], 낙오무사의 소지품을 부수입으로 챙길 수 있으니 눈에 불을 켜고 낙오무사를 추적하다보니 패잔병들은 종전 후라도 무사귀환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일본의 속담 중 하나인 '낙오무사는 참억새 꽃에도 겁을 먹는다(落ち武者は薄の穂にも怖ずという)'[18]은 이런 이유로 나온 것이다.
우수한 군사력으로 한때 다케다 신겐과 함께 일본을 통일할 만한 인물로 여겨지던 우에스기 켄신도 농민 봉기에 애를 먹었고, 후에 히데요시도 대규모 농민 봉기를 우려하고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무기를 녹여다 농기구와 불상을 만드니 다들 덕도 쌓고 평화도 누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명목으로 칼사냥(刀狩り)정책을 벌이기도 했다. 즉, 당시에 무장한 농민과 병사의 차이는 전투를 다이묘의 명령으로 하느냐, 아니면 자발적으로 하느냐의 차이 정도 밖에 없었으니 농민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맨 위의 어록에 나와있듯 백성들이 고초를 겪는게 안타깝다는 말을 평소에 하고 다니던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이러니한 셈이다.
- 노부나가나 시마 사콘처럼 생존설도 존재하는데 미츠히데의 시체가 묻힌 사이쿄지 등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미츠히데의 목으로 추정되는 목은 3개가 있었으나 모두 부패가 심하여 확인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며 야사에서는 미츠히데가 자결하고 곁에 있던 부하가 그의 수급을 거두어 어딘가에 숨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후세의 창작이나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한 생존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난코보 텐카이와 동일인물이라는 설.
- 카메야마성 축성 당시 히토바시라를 하는 대신 인명을 귀히 여겨 돌로 만든 불상을 묻었다는 일화가 있다.
- 테레비 도쿄 창업주[19]인 츠노다 토모시게가 그의 후손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정확한 근거는 불분명하다.[20]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이라고 명확하게 밝혀진 인물로는 역사학자인 아케치 켄자부로(明智憲三郎)가 있다.[21]
- 아케치 미츠히데가 탄바(현재의 교토부 중부, 효고현 북동부, 오사카부 북부) 지역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던 탄바 카메야마성(丹波亀山城)이 오늘날 교토부 가메오카시(亀岡市)에 남아 있는데 1919년 신흥 종교 오모토의 성사(聖師)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郞)가 교단의 이름으로 구입한 뒤 '천은향(天恩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오모토의 성지로 삼았다. 오니사부로는 가메오카 출신인데 어릴 때부터 아케치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성을 구입한 뒤 그 안에 불상을 세우는 등 작업을 했다. 오늘날에도 아케치의 성은 오모토 교단 소유로 남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곳이 역사적 유적지라는 이유로 더이상 종교 시설을 설치하지 못하게 막았다.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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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연도별 사망설이 존재한다.[2] 방편은 십바라밀의 하나로 불교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쓰는 묘한 수단과 방법을 뜻함.[3] 불교세력, 무사 등 지배층의 거짓말은 온갖 미사여구로 정당화되고, 이에 휘둘리는 일반 백성이 불쌍할 따름이라는 뜻이다.[다른해석] [5] 이길진 번역 작품에서 히유가노카미라고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나름 역사소설 번역가로 유명한데 어째서인지 ゆ와ゅ를 구분하지 못한 것 같다.[6]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에도시대에 관직명으로 피하는 대표적인 이름 중 하나가 되었다.[7] 토도 타카토라는 "일곱 번 주군을 바꾸지 않은 자는 사무라이도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8] 중국의 전국시대나 오대십국시대같은 난세의 중국에서도 한 인물이 한 번에 여러 나라에 몸 담고 일했던 사례는 종종 있었다. 특히 재상급 인사는 '객경(客卿)'이라고 해서 타국의 인물에게 정치나 군사 자문 역을 맡기기도 했다. 소진이나 전단이 대표적인 예이며, 가장 압권인 사례는 풍도인데 본인 스스로 '다섯 왕조, 여덟 성씨, 열한 군주(五朝八姓十一君)를 섬겼다'고 회고했을 정도다.[9] 박수철 편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10] 곰보 자국이 난 아내를 맞은 이야기는 킷카와 모토하루의 일화로 전해지기도 하며 다른 전국 무장들도 유사한 일화가 전한다.(제갈량이 외모가 부족하지만 총명한 황씨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처럼 중세 동양에서는 박색한 아내를 얻는 것이 '여색을 멀리하는 군자의 모습'으로 통했다.)[11] 참여자들이 모여서 한 사람이 첫 구절인 발구를 읇으면 거기에 맞추어서 차례대로 바톤 터치를 해가며 시를 짓는 시짓기.[12] 겐지를 혼세로 하는 미노의 슈고 집안으로 사이토 도산이 이들에게서 미노를 빼앗았다는 '나라 훔친 이야기'가 유명하다.[13] 에도 시대에 무사의 관직명으로 기피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미츠히데의 관직명인 휴가노카미와 이시다 미츠나리의 관직명인 지부쇼유 등이 그렇다. 반란자나 모반자의 관직명이라 자연스레 재수없다고 생각한 것.[14] 무사 정도 되면 값비싼 소지품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전쟁 끝나면 평민들이 죽은 기사의 시체에서 갑옷을 벗겨가는 경우가 있었다.[15] 임진왜란 때도 이로 인하여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이 심했다.[16] 낙오무사란 단어의 유래는 겐페이 전쟁 직후에 생긴 헤이케의 낙인(平家の落人)에서 비롯되었다.(그래서 코에이의 게임 원평합전에서도 낙오무사 사냥 커맨드가 있다.) 무로마치 시대 때에도 존재했었는데, 이때의 낙오무사 사냥의 대상은 전국시대보다 더 커서 몰락하여 뒤를 봐주는 세력이 없어진 공가나 무가들도 거점이 있던 지역의 거주민들에게 약탈을 당하거나, 유형을 받고 유형지로 가던 죄인을 습격하기도 했을 정도.[17] 다이묘나 사령관 같은 거물급이 당첨되면 아예 몇년 치 세금을 마을째로 까기까지 했다고.[18] 한국 속담인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와 거의 비슷한 뜻이다.[19] 정확히는 전신인 도쿄12채널[20] 츠노다 토모시게는 태평양 전쟁 시절 일본군 육군소좌를 지낸 사람인데 도조 히데키와 내각을 증오해 쿠데타로 박살내려 한 용자이나 실패해 죽지는 않고 헌병대장인 히라바야시 모리토가 그와 형제 같은 친한 관계여서 면직 처분 정도로 끝났다.[21] 만화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의 원작을 쓴 사람. 증조부가 메이지 유신(1887년 메이지10년) 때 정부에 유물을 제출해서 후손임을 인정받고 복성했다고 한다. 선조는 측실에게서 태어난 서자라고 하는데 전국시대 연구가로는 탑티어로 인정받는 오와다 테츠오씨는 이 서자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며 실존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바가 있다. 또한 미츠히데가 평생 정실부인외엔 다른 여자를 들이지 않다는 기록과 상반되는 터라 여러모로 의문이 남는 상황이나 이미 백여년전에 메이지 정부로부터 미츠히데의 후손이 맞다고 복성을 인정받았다고 하나, 현재는 해당 자료들이 관동 대지진으로 전부 소실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현재는 미츠히데의 후손임을 증명할 증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