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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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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구분
기원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제4천년기 이후
1. 개요2. 어원3. 특징
3.1. 역사의 발전?3.2. 역사에 만약은 없다?3.3. 권력/정권의 정당성 부여 수단3.4. 왜곡의 방법?
4. 학문
4.1. 관련 개념
5. 역사학자6. 분류7. 명언8. 기타9. 관련 정보10. 역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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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 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역사에는 4가지 개념이 있다.
  1. 시간
    과거에 있었던 사건사고 그 자체, 즉 사실(事實)을 말한다.
  2. 기록물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등 (1)을 문자로 기록한 물건을 말한다.
  3. 학문
    연구자가 전문적으로 연구·서술하는 것, 즉 사학을 의미한다.
  4. 철학적·추상적 개념
    (3)과 달리, 과거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긍·부정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1」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 ≒사, 춘추.
「2」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
「3」 자연 현상이 변하여 온 자취.
「4」 역사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 =역사학.
「5」 『책명』 기원전 425년 무렵에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책.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기술하였다. 9권.
「6」 『책명』 기원전 400년 무렵에 그리스의 투키디데스가 쓴 역사책.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기록으로, 실용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정치사와 군사사에 한정하여 서술하였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특정 시간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에, 현재를 포함해 미래까지 이어지는 변화의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가장 쉽다. 단순히 과거의 일을 공부하는 것은 고고학이나 인류학도 있으며, 가장 기본적인 역사의 정의는 시간에 따른 인간생활의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선택과 재구성(고고학)은 '기록으로서의 역사', 뒤의 인간과 변화(인류학)는 '사실로서의 역사'를 의미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생활 변천을 나타내며, 이를 증거할 만한 문헌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는 선사시대라고 구분하여 그 이후(역사시대)와 별칭한다. 일반적으로 문자의 사용 시작은 청동기 시대 이후로 보지만 국가나 지역에 따라 그 연대가 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자체 기록이 없더라도 인접국의 기록이 있다면 어떻게든 유추가 가능하며, 유목민족 같은 경우에는 그 시초와 소멸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을 역사학 또는 사학이라고 하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개개인마다 현상을 보는 것이 다르므로 매우 다양하며 개인이나 일개 집단이 일률적으로 현상을 정의 내릴 수 없다. 역사를 연구하거나 바라볼 때에는 비판적인 시각을 기준으로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연도를 입력하면 당시 세계 지도를 보여주는 웹사이트)[1]

2. 어원

3. 특징

흔히 역사에 대해 말할 때 "과거의 사실들 중에서 전달자(주로 역사가)가 선택 및 재구성한 결과"라고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역사는 모두 조작이다!"라고 오해 내지 곡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과거의 사실에 '시간적 객관성'이 부여되어 있더라도,[8] 과거의 사실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든 선택 및 재구성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후대 사람들은 당시 시대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 시절의 도덕이나 문화 등을 이해할 수 없으며,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입장이나 가치관에 따라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해당 사실에 대한 자료의 수집이나 내용의 정리도 자신만의 기준을 따라가기 마련이다.[9] 그러므로 객관적인 역사란 없다.

과거 인류가 거친 노하우나 과오를 기록한 것이 역사이다보니 아래와 같은 사건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10] 과거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는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 하여 역사서에 (거울 감)으로 끝내는 제목의 역사서가 많을 정도다. (자치통감동국통감 등)

학계에서 역사의 정의는 항상 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고민거리이다. 특히, 러브조이, 미셸 푸코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과 엘튼 같은 랑케식 역사관의 소유자들은 역사의 정의에 대해 마찰을 일으키고는 한다. 위의 에드워드 카의 역사에 대한 격언 또한 많은 역사의 정의들 중 하나일 뿐이며, 이를 마치 신앙처럼 되새길 필요까진 없다. 특히 한국에서는 에드워드 카의 저서가 부림사건에 엮인 것 때문에 카의 인지도도 덩달아 올라감으로써 마치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주는 끝판왕 같은 인식이 따르곤 한다. 당연히 판단은 독자의 몫이며,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서적들과 주장들이 나와있다. 직접 공부해보고 스스로 결정하기를 권한다.

“미국·소련 탓” “한국전 때문” 분단 원인 말다툼 끝 살인극
'천안함 사고원인' 놓고 시비 벌이다 살인으로 비화

3.1. 역사의 발전?

역사의 진보성을 지지하는 역사학자마다 역사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예를 들어 헤겔의 경우에는 역사란 '세계정신' 혹은 '시대정신'(Weltgeist)이 자신을 전개해가며 인간의 자유를 발달시켜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최초의 근대사학자로 흔히 일컬어지는 랑케의 경우,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시대가 발전할수록 역사가 무조건 발전한다는 사고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발달에 따라 역사가 진보해간다고 보았다.(사적유물론) 베버 또한 이런 사고관의 소유자였으며, 가장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기독교 정신>을 보면 중국을 이러한 생각에 근거해 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이러한 역사인식을 '휘그사관'(whig history)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역사가 발전한다는 견해, 이른바 진보사관은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진보'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예컨대 아도르노는 '역사는 야만에서 인간성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투석기에서 핵폭탄으로 발전할 뿐'(<부정변증법> 中)이라 말했고,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자들도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을 부정할 정도다.

사실, 역사가 '발전한다.'라고 보는 시각은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다. 볼테르가 '역사의 진보'라는 아이디어를 가진 학자들 가운데 가장 이른 사람인데, 그마저도 18세기 사람이다. 그전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가 순환한다고 보거나 때가 되면 최후의 심판이 임하는 정도로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진보사관은 그중 일방적 방향성을 지닌 후자로부터 파생해나온 관념이라 여겨지고는 한다.

3.2. 역사에 만약은 없다?

역사에 대한 경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역사에 만약은 없다."이다. 누가 이 말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 대한 관념과 객관적 실증주의에 가까이 있던 레오폴트 폰 랑케의 주장을 왜곡시킨 말로 알려져있다. 숱한 오해와 의도적인 왜곡이 있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역사는 정해져 있는 것이며 뭘 해도 바꿀 수 없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문장의 의미는 역사는 오직 "사실"만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가정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와 같은 문장이 순기능으로 인용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1. 역사에서 사실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점이다.
  2. 단편적인 가정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뻗어나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역사적인 사건과 흐름이 한두가지 원인으로 인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얽히고설킨 요인들 하나하나를 정확히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가정하고 예측하는데 있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했다면?' 이라는 가정으로 논의를 시작하면 단 한 번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이후에는 어떤 선택을 했을 지 단순히 시간만 늦췄을 뿐 결국 언젠간 일어날 일은 아닌지 전부 다 가정의 가정을 계속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밑도 끝도 없다. 역사는 경제학처럼 "다른 모든 변수들이 동일하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조건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11]

이러한 사학 차원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그러한 근거가 없는 픽션도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가치가 있으며, 대체역사물이라는 장르를 구축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며 이런 장르들을 깎아내리기도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이러한 픽션은 그냥 재미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가치를 지닌다.[16] 이러한 진지하지 않은 상상은 단지 역사학적 가치가 없을 뿐 문학적으로는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논지에서, "가정은 하되 뇌피셜을 경계하자!"라는 전제 하에서 발언을 하자면, 별 근거가 없고 협소한 의미인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이라는 말보다는 "조심스럽게 가정을 하자면…"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3.3. 권력/정권의 정당성 부여 수단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He 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H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
1984》, 조지 오웰
한 사회가 어떤 역사를 쓰느냐, 어떤 역사를 쓰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 더 그 사회의 성격을 뜻깊게 암시하는 것은 없다.[17]
역사학자 E.H.카
역사와 정치가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중립적일 것 같은 학문에 주관성이 들어가고, 역사왜곡이 발생하는 이유다. 사람들이 자신은 살아본 적도 없는 오래전의 역사를 왜 상기하는지, 역사에서 관점과 학파 같은 것이 왜 생기는지, 그것을 통해 누가 이득을 보고 손해를 보는지, '족보도 없는 새끼'라는 욕설이 어떻게 존재하고 작용할 수 있는지 합리적으로 잘 생각해보자. 역사책을 건드려 놓으면 국민/백성/시민/민중/민초/인민(이하 국민), 제3자, 제3집단, 제3권력 등이 반대급부 없이 해당 권력의 뜻대로 움직여줄 수 있다.[18] 심지어 권력입장에서는 특정 주체에게 돈이나 땅 등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거나 전쟁 같은 폭력을 행사하거나 행정력을 투입하지 않고도 그들이 권력을 위해 서비스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권력입장에서 책 좀 읽고 글 좀 쓰고 머리 좀 굴릴 줄 안다는 먹물집단인 석학들에게 자신들이 지구의 일부분과 일정 자원, 일정 인구를 제어할 수 있다는 학문적 근거와 자격을 받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모두 통하며, 보통 이를 바탕으로 법전도 집필할 수 있다. 인간이 지구 위에 자기들이 긋고 행정력 발휘하는 데 역사는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권력의 정당성 부여 수단'이라는 기능의 성격에서 보았을 때 가장 비슷하게 기능할 수 있는 것으로 종교가 있다.

근거와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잘 표현해준다. 또 독도 관련된 내용이 한일 양국의 역사책에 등장하고, 일본은 끊임없이 역사왜곡을 하여 한국은 이를 질타한다. 중국의 동북공정 역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책과 북한의 역사책은 같은 민족이라고 자타공인하는데도 대한민국과 북한이 다른 만큼 다르다. 물론 대한민국도 예외없이 역사왜곡을 한다. 우리나라만 봐도 각 정권이 그렇게 공교육 역사책에 집착하기도 한다. 이는 역사학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권력의 정당성 부여를 위한 정치행위이라고 보는 게 옳을 수 있다. 어쩌면 역사학자 입장에서는 정치권력의 입맛에 맞는 논문이나 서술을 학계에 발표하는 것이 최고의 아부일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이게 한반도에서 크게 표면화 된 것일제강점기다. 하지만 모든 시대와 공간을 통틀어 계속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게 위력이 상당한 것이 한반도 역사상 최고 폐인이라 짐작되는 연산군이 두려워한 유일한 것이 역사라고 한 것에서 느낄 수 있다.

국가적 단위가 아닌 온라인 세상에서는 어떨까? 무슨 이슈가 발생하면 네티즌들은 좌표를 기록해두고 스크린샷을 남겨놓는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댓글 전쟁을 시작한다. 마침내 심화되면 고소장 교환하고, 경찰서 정모나 법원 정모를 통해 현시창판사님의 지엄하신 능력을 체험한다. 어쩌면 나무위키 전체가 온라인의 역사책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3.4. 왜곡의 방법?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말이 나온 이유는 첫 번째로 승리한 쪽의 입장에서 역사를 정리하기 때문에 사료 자체가 승자의 것이 많으며, 두 번째로 정치상의 목적을 위해 왜곡되거나 단편적인 진실을 기록한 역사 기록을 남기기도 하기 때문이다.[19]

다만 근래에 와서는 이런 드립이 남발되는 경향이 있는데, 특정 지식과 연구도 없으면서 '승리자가 쓴 역사(혹은 승리자에게 유리한 내용)니까 무조건 거짓말이야, 진실은 반대편에 있어!' 라는 식의 재평가에 주화입마한 역덕들이 많아져서 문제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횡포를 부리다가 말년에 비참하게 죽었다고 하는 악인을 사극에서 나름 멋지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묘사한 것 등을 보고서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니 실제로는 저랬을 거다"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세상의 수많은 역사 중엔 승자가 아닌 패배자의 역사도 많다. 이에 대해 진화론의 자연선택('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것')의 개념을 빌려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기록을 남긴 자가 역사의 승자'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칭기즈 칸에 대한 기록의 대다수는 그에게 패배한 아랍인들이 쓴 기록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대해 우리는 (단기적으로) 승자인 일본 측의 기록이나 자료만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던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통사나 한국독립지혈사도 참고할 수 있는 것이다. 패배한 자들도 충분히 역사를 남기며, 무엇보다 승자의 역사라고 다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한 기록만 맹신하는 게 아니라 여러 기록을 교차 검증하기 때문. 또한 나중에 고고학적 발굴로 뒤집어지거나 논란이 될 수도 있으므로, 혹 누군가가 요상한 주장을 내세우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승자의 기록에 사로잡힌 xxx들' 하는 식으로 기존의 학설을 깐다면 일단 의심부터 해 봐야 한다.

또한 승자/패자가 아닌, 제3자도 충분히 역사의 기록자가 될 수 있다. 후세의 다른 정권이거나, 외국인의 기록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해관계에서 벗어난다는 보장은 없으며 정보의 원시적인 출처 역시 당사자들의 기록일 수도 있으므로 맹신은 금지다. 결국 사서의 신뢰도에 있어서 중요한 건 고고학적 검증, 서로 다른 자료들 사이의 교차검증, 그리고 논리적 검증이라고 하겠다.

사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로써 옹호되는 세력은 패자일지는 모르지만 약자는 아닌 경우에 대부분 해당된다. 지배계급 내에서의 싸움에서는 진 패자일지라도 계급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일원인 인물, 가문, 국가 등이 거론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전근대 사회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피지배계급인 경우는 드문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왜곡되거나 잘못된 역사지식/사상을 심을 수 있는 역사 수업/공부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든가, 역사공부를 하기 전에 위와 같은 역사 개론 수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소수 존재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대학교 사학과 과정에는 대부분 역사 개론 강의가 반드시 들어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전 과정에서 서론 부분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

또한 역사서에 기록된 문장을 보면 거짓말은 하지 않으면서 사실을 살짝 다르게 쓰거나, 과장되게 기입하는 경우도 많다.
Q. 당태종주필산 전투를 앞두고 상책이다, 중책이다, 하책이다라고 말한 것이 맞나요?
A. 옛날 사람들은 역사를 쓸 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써요. 근데 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승자라고 있던 기록을 무조건 없던 이야기를 쓰진 않아요. 쓰는 데 방법이 있어요. 윤지연 아나운서가 방송 시작하기 전에 저에게 감기 걸렸다는 말을 한 거예요. 근데 나만 알아요. 그리고 방송 시작할 때 "오늘 몸이 안 좋은 거 같네." 이렇게 말을 하는 거에요. 보통 사람은 "와, 저 사람이 신기가 들렸나?!"라고 할 거 아니에요? (승자가) 역사를 쓸 때, 윤지연 아나운서가 나에게 말했다는 걸 빼고 쓴단 말이에요. 당태종 일화도 마찬가지에요. 상책, 중책, 하책이 있지, 왜?를 안 썼잖아요.
임용한_토크멘터리 전쟁史 44부 고구려-당나라 전쟁편

4.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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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관련 개념

5.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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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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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로는 크게 인류사, 정치사, 전쟁사,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 과학사, 종교사, 예술사, 철학사, 수학사, 사상사 등으로 나뉘는데, 기록이 가장 방대한 정치사와 사회사, 문화사가 주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단, 국가 교육과정 상에서는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로 구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특히 초등교육일수록 인물사 중심으로 다뤄진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모든 학문과 기술은 모두 역사를 가졌다고도 볼 수 있다. 컴퓨터를 공부할 때는 파스칼 계산기부터 시작하는 계산기의 역사부터 가르치고, 무역학을 공부할때는 아담 스미스의 절대우위론부터 시작하는 무역이론의 역사부터 가르치는 것처럼 사학이 아닌 다른 학문도 모두 각각의 학문별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심지어 커뮤니케이션학교육시에도 수사학의 역사로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이런건 각각의 학문별 미시사로 취급하며, 사학에서는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사학에서는 "과거의 진실"과 "인류의 시간적 변화상"을 탐구하는데, 근대사학이 탄생할 때는 정치외교사 하나를 다루느라 바빴고 현대사학에 접어들어서야 경제사나 사회사, 문화사 등으로 저변을 크게 확대한 현실로서는 이 모든 것을 다 해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어느 한 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루거나 반대로 각 분야의 미시적인 역사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맡겨둔 채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탐구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

7. 명언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시대를 통하여 거울이 된다(資治通鑑).
송(宋) 신종(神宗) 조욱(趙頊)사마광역사서를 보고 내린 제목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2월 8일 기묘 4번째기사[20]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21][22]
人君所畏者, 史而已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8월 14일 辛酉 5번째기사
六年 秋七月 伊飡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飡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
6년(서기 545)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아뢰어 말하였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임금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널리 모아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 제3 진흥왕(卷4 新羅本記 第3 眞興王)
역사가 되풀이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조지 버나드 쇼
이것이 바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이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일라우 전투의 사상자 수치를 조작하라고 지시하며,
매일 당신의 역사를 만드세요. 지나는 길마다 당신은 유산을 남기는 것이랍니다.
마이클 잭슨,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의 수록곡 'History' 중
역사는 실로 그 대부분이 인류의 범죄, 우행(愚行), 재난의 등기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드워드 기번
세계 역사는 단지 위인들의 전기에 불과하다.
조지 고든 바이런
인류사는 기호(記號)의 역사, 다시 말해서 종교의 역사이다.
알랭(프랑스의 철학자)
역사를 읽는 일은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마음을 끌고 흥미 있는 것은 역사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일이다.
자와할랄 네루
나를 처벌하라.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
모든 인간의 생활에 역사가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사는 되풀이된다.
투키디데스
역사가는 회고하는 예언자이다.
A.W. 슐레겔(독일의 역사가)
우리는 역사의 관찰자이기 전에 우선 역사적 존재이다.
빌헬름 딜타이
나는 역사를 바꿀수 없다.
나는 역사를 바꾸고 싶지도 않다.
나는 오직 미래를 바꿀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노력중이다.
보리스 베커
암살자는 세계의 역사를 바꾸지 못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세계 역사는 자유 의식의 진보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누구나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위대한 자만이 역사를 쓸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
역사는 인간 자신이 그 대상이다. 역사에 내재하는 조건의 하나는 역사가 인간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알리도록 애쓰는 일이다.
레오폴트 폰 랑케
역사가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실과 불확실, 의문과 부인을 분명히 구별하는 일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역사는 행복이 자라는 땅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행복의 시기들은 공백으로 남아 있다. 세계 역사에서 만족스러운 시기도 있었지만 이 만족은 행복에는 미치지 못한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역사는 모든 과학의 기초이며 인간 정신의 최초 산물이다.
토머스 칼라일
과거의 역사, 기원과 문화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민족은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마커스 가비

8. 기타

일본영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역사소재를 가볍게 활용하는 사례가 많다. 이에 쉽게 역사를 접한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있는 반면, 자칫 요상하게 비틀어진 역사가 박힌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역사에 있는 사실 그대로 활용하는 작품들을 좋아하며, 실제 역사를 무시하고 작가 마음대로 역사 관련 작품을 만들다가 생기는 문제인 고증오류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또한 국사 교과서에서 지나치게 민족을 내세워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미래로 갈수록 공부해야 할 역사의 양도 많아지지 않을까'라는 의문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중요한 맥락이나 흐름에 관련된 내용 위주로 놔두고 나머지는 점점 축소 및 삭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오래된 역사일수록 간략하게 적는 경우가 많다.[24] 이는 문화유산이나 고서 등의 각종 사료가 유실되어 연구가 힘든 탓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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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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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역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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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이 나오지 않고, 잉카 제국 최전성기의 영토에서 남쪽 일부가 빠져있으며, 남북조 시기에 북위의 제나라 회수 이남 점령이 반영되어있지 않고 1897년 이전 한반도가 korea로 표기되어 있는 등 조금씩 오류가 있다.[2] 이렇게 업무를 기록을 하고 기록하는 사람을 부리는 과정에서, 본뜻 및 그 직접적 확장인 '기록'과 '역사'는 계속 "史"로 쓰고, 다른 파생은 ""(업무, 사건)나 "史官"(기록관, 사관, 역사가), "使"(부리다.), """(벼슬아치) 같은 말들로 파생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각 문서 및 노자 문서 참고.[3] 다만, 삼국유사의 '사'는 ''인데, 이 역시 근원은 '史'의 파생이다.[4] 예컨대 조선의 성변측후단자에 적힌 핼리 혜성 기록 같은 것은 기록의 연대 특정에 도움이 된다.[5] 랑케와 같은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토스보다 한 세대 이후 역사가인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역사학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역사 및 역사학을 인간의 변화를 다루는 것으로 보기에 신화전설, 종교, 신학 등에서 역사를 분리해내는 작업을 현대적 역사 개념의 기원이라 본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페르시아에게 승리한 원인을 의 의지로 봤으므로 엄밀히 말해 역사적인 관점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6] 라틴어에서 파생된 각종 언어들에서는 루마니아어를 제외하면 h가 묵음이며, 이탈리아어의 경우 묵음 h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예 적지 않도록 철자법을 바꾸었다.[7] Angus Calder and Lizbeth Goodman, "Gender and Poetry", in Literature and Gender, ed. by Lizbeth Goodman (Routledge: 1996). ISBN 0-415-13573-7.[8] 예를 들어 "19○○년 ○○월 ○○일 어떠한 사건이 있었다." 같은 진술.[9] 예를 들어 삼국사기의 경우 왕과 귀족 중심으로 쓰여서, 왕이 무슨 옷을 입었고 어느 귀족이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간혹 기록에 나와도 당시 평민들이 뭘 먹고 뭘 입고 어떻게 살았는지 등에 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 반대로 조선 후기 민간 생활사를 연구하는 경우, 왕이 뭘 먹었다거나 어디로 행차했다거나 하는 사료는 거의 참고하지 않을 것이다.[10] 다만 이 경우도 반론이 있기는 하다. 과거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동일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역사를 기준으로 삼아 선택을 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문서의 반론 항목 참고.[11] 예를 들어 2021–22년 연재된 리첼렌의 대체역사 웹소설 《한국 독립 전쟁》은 "만약 1949년 암살된 김구가 1931년으로 회귀해 이봉창의 의거가 성공하여 히로히토가 사망한다면?"이라는 사소한 변화를 전제로 하는데 독자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정신이 나간 듯한 나비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12] 이는 빅 히스토리가 사학계 내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저 인간 이전의 과학적 사건들을 나열한 다음 역사와 이어붙였을 뿐이기 때문이다.[13] 극단적인 견해지만, 칼 포퍼는 그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이 논리를 확장하여 "역사의 의미란 것도 없다. 역사 자체가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주장하였다.[14] 물론, 처칠 개인을 연구하거나 정치외교사가 아닌 다른 분과를 다루는 사람들은 이런 세세한 기록들까지 충분히 연구할 수 있다. 이 또한 역사가 인간의 손을 거쳐가는 과정에 있다는 근거다. 오히려 현대에는 정치·외교사/국가·국민사/거시사에만 편중되었던 근대 역사학에 대한 반성으로, 사회·경제사나 문화사, 심성사, 지성사, 지구사, 미시사와 같은 다양한 연구방법론을 개발하여 적용하고 있다.[15] 단, 그러한 관점이나 가정을 강요하려 든다면 비판받을 만한 문제가 된다.[16] 인간을 유희적 동물이라고 말하기도 하듯이 인간에게 있어서 '재미'는 아주 중대한 가치다.[17] 역사는 아니지만 언어학쪽에서는 역사 대신 자존심과 우리(나)의 표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도 그 사회의 성격을 알수 있다라는 말도 존재한다.[18] 정당성을 뛰어넘는 이해관계가 얽혀들어가면 불가능하다.[19] 까놓고 진실을 쓰자는 생각이 별로 없었던 고대에는 대부분 문명에서 날조가 엄청났다. 대표적으로 로마는 피드나 전투에서 교환비 1 : 250이라는 막장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이유없이 체제상 강력한 군대로 보호받고 있던 중요 도시들까지 싸그리 밀린 경우에는 패배를 엄청나게 삭제했다는 의혹도 상당하다. 물론 현재는 최소한 교환비 1 : 250 같은 것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당연히 거짓말로 여긴다. 참고로 리즈 시절 스파르타에 대해서도 비슷한 과장이 있다고 여겨지는 편인데 그래도 로마보다는 상당히 적다.[20] 태종이 사냥 도중에 낙마하였는데 쪽팔렸는지 사관에게 이를 기록하지 말라고 지시했으나 사관은 태종이 낙마한 것은 물론 기록하지 말라는 것까지 그대로 기록했다.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 사관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자 무려 왕의 명령에도 왕에게 불리한 기록을 숨기지 않음으로서 그만큼 역사적 가치를 상징하는 대목, 후대인 예종 시기에 '민수의 옥'에서 이와 반대되게 사관이 조정 대신들에 대한 불리한 기록을 감추려다가 뽀록이 나 패가망신하는 사건이 벌어지지만 이 사건 덕에 사관들이 감추려던 주제(대신들의 치부)가 드러나 내용은 감춰졌더라도 적어도 대상자(대신)들의 문제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게 되어버렸다.[21] 생전 왕의 신분으로 못할 게 없던 연산군마저 후대의 평가는 피하지 못함을 보여준다.[22] 심지어 전근대에 게으르고 잔인한 폭군으로만 여겨지고 간간이 약간의 이의만이 제기되었던 은나라 주왕조차도 당대의 갑골문 기로에서는 폭군은 커녕 성실하고 유능한 군주였다고 나와 그에 대한 기록은 상주혁명을 이룬 주나라 측의 왜곡이 있었을 것이란 추정이 나오고 있다.[23] 흔히 신채호가 한 말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 않다. 문서 참고.[24]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것이 조선시대때도 고려시대, 그리고 더 이전에도 역사를 중요시하면서 늘 배웠고, 후대로 갈수록 배우는 내용이 이전의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서술하고, 최근의 역사가 새로 추가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도 논란은 매우 많지만 근현대사 부분(조선 고종~현재)이 배우는 내용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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