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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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 Западный поход монголов | ||
주황색 화살표가 몽골군의 동선이다. | ||
기간 | ||
1236년~1242년 3월~4월 (6년) | ||
장소 | ||
동유럽 일대 | ||
원인 | ||
몽골 제국의 유럽 정복 야욕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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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
30만~50만[1](중세 러시아 기록) 120,000~140,000명(현대 추정1)[2] 60,000[3]→40,000명[4] (현대 추정2)[5] - 25,000~30,000명의 기병 | 키예프 루스군 5만~10만명[6] 폴란드 공국 연합군 2,000~8,000명 이상 헝가리-크로아티아-오스트리아 연합군 25,000명~80,000명 이상 | |
결과 | ||
볼가-불가리아 칸국의 멸망(1236) 무롬 공국의 멸망(1238) 알라니아 왕국의 멸망(1239) 조지아 왕국의 항복(1239) 키예프 루스의 붕괴와 항복(1240) 쿠만-킵차크 연맹의 멸망(1241) 푸르가스 공국의 멸망(1240년경) 불가리아 제2제국의 항복(1242년) | ||
영향 | ||
몽골 제국의 동유럽-서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 루스 공국들의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작 바투 칸의 킵차크 칸국 건국 유럽에 화약 전파 | ||
피해규모 | ||
몽골군 14,000명 이상 사상 | 키예프 루스 국민 50만명 이상 사망 헝가리 왕국 전국민의 20% 이상 사망, 포로, 국토의 절반 이상 황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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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제국의 오고타이 칸이 바투를 통해 단행한 군사 원정.2. 배경
몽골 제국은 몽골-호라즘 전쟁을 겪으면서 더 서쪽으로 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상상은 정찰로 시작됐던 제베와 수부타이의 서부 원정으로 구체화되게 된다.몽골 제국은 아시아 지역을 대부분 정복한 뒤, 이제 본격적으로 한 번 발 담갔다 뺀적있는 서쪽의 유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칭기즈 칸 사후 후계 구도가 정리되는 상황에서 발생한 얼마 간의 지배력 공백으로 인해서, 칭기즈 칸 시기에 멸망했던 나라들 중 일부가 다시금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이에 몽골 제국의 제2대 군주였던 오고타이 칸은 1235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유럽쪽으로의 서방 원정을 결의했다. 장남 주치 가문의 당주인 바투가 서방 원정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부장은 칭기즈 칸의 노장이자 이미 칼가강 전투 등 유럽군과의 교전 경험이 있었던 수부타이가 맡았다. 오고타이 칸은 직접 원정에 참가하고 싶어했으나, 몽케의 만류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3. 전초전
이 서방 원정군은 몽골 기병대, 튀르크계 보병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출정한 몽골군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럽·러시아까지 완전하게 정복하고 헝가리 왕국으로 서진했다.대원정을 떠나기전에 몽골군은 바시키르인을 정벌했고, 바시키르인은 많은 분견대를 서방 원정에 할당하게 된다.
볼가-불가리아 칸국은 몽골 제국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루스 공국들 약탈을 즉시 그만두고 평화 협상을 체결한다. 그리고 루시 공국들도 같은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볼가 불가리아의 전쟁 준비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볼가 불가리아는 수비군을 늘리고, 도시들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번개처럼 빠르게 1236년에 볼가 강을 넘었고, 그대로 볼가-불가리아 칸국을 멸망시킨다.
1236년, 몽골군은 쿠만-킵차크 연맹을 침공한다. 쿠만족들은 패배했고 많은 쿠만족들은 복속되어 징집당하지만 그 중 일부는 헝가리로 도망간다. 이때, 바투는 헝가리 왕 벨러 4세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동시에 쿠만족을 내놓으라는 편지를 보낸다.
1237년 여름, 바투 칸은 정복한 서아시아의 유목민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편성한다.
4. 키예프 루스 침공
"우리의 죄악 때문에 알 수 없는 민족들이 도착했다. 그들의 기원이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는 그들이 어떤 종교를 믿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아시며, 아마도 책에 통달한 현자들만이 알 것이다."
키예프 루스의 한 역사가
키예프 루스의 한 역사가
분열되어 있는 키예프 루스 |
몽골 침공 직전에 주요한 인물로는 4명이 있는데, 갈리치아-볼히니아와 스몰렌스크 공국, 플로츠크 공국의 연합을 형성한 다닐로, 체르니고프 공작인 미하일, 동부의 블라디미르-수즈달을 중심으로 랴잔 공국을 비롯한 여러 공국들을 거느린 유리 2세 대공, 그리고 유리 2세의 형이었던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브세볼로도비치 였다.
다닐로와 미하일이 번갈아가면서 키이우 대공에 오르면서 전쟁중일때, 1236년 노브고로드 공작이었던 야로슬라프가 자신의 아들 알렉산드르 넵스키를 노브고로드 공작으로 임명하고 남방 원정을 감행, 키예프 대공에 오르며 내전을 종식시킨다. 그러나 다닐로와 미하일은 아직도 갈리치아 지방의 계승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는데, 이는 심지어 이 내전은 몽골 침략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 당시 키예프 루스에서 서방의 유명 도시들과 견줄 만한 곳으로는 키예프와 블라디미르 두 곳이 있었는데, 군사적으로 성공한 군주였던 '큰 둥지' 프세볼로드 유리예비치(1154~1212)가 많은 전쟁을 통해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을 키예프 루스의 중심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침공 당시 실질적인 루스의 지도자는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 유리 2세였다.
그리고 외부의 침략도 끊이질 않았다. 리투아니아, 튜튼 기사단 같은 북방 십자군들과 원주민까지 약해진 키예프 루스를 집적거렸고 남쪽에서 볼가-불가르와 쿠만족들이 키예프 루스를 약탈했다. 그리고 이 약탈은 몽골군의 침공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5. 1차 키예프 루스 침공
5.1. 랴잔 공국 침공
1237년 가을, 바투 칸은 정찰을 한 다음, 키예프 루스의 최동단인 라쟌 공국의 공작이었던 유리 잉그바레비치에게 대사를 파견해 사람, 공자(공작의 아들), 말을 비롯한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유리 잉그바레비치는 거부한 뒤, 즉시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 유리 2세와 체르니고프 대공 미하일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유리 2세는 지원군을 파견했으나 체르니고프 공 미하일은 도움을 거부한다."우리가 없어지면, 모두가 너희 것이 되리라."
"Коли нас не будет, то всё ваше будет"
랴잔 공작 유리 잉그바레비치가 항복을 요구하는 몽골 대사에게.
일설에 따르면 유리 잉그바레비치는 자신의 아들 표도르를 선물과 함께 몽골의 대사로 보냈는데, 바투 칸은 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라쟌 공국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바투 칸은 취했는지 표도르의 아내와 동침을 요구했고 표도르가 거부하자 표도르를 비롯한 대사들을 죽여버렸다고 한다."Коли нас не будет, то всё ваше будет"
랴잔 공작 유리 잉그바레비치가 항복을 요구하는 몽골 대사에게.
1237년 말, 볼가-불가리아 칸국의 난민들이 유리 2세에 의해 키예프 루스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몽골군은 랴잔 공국에 도착한다.
1237년 11월, 바투 칸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대공이었던 유리 2세의 궁정에도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한다. 유리 2세는 선물은 바쳤지만 항복을 거부했다. 유리 2세는 라쟌 공국을 지원하기 위해 장남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에게 지원군을 주고 파견한다.
1237년 11~12월, 표도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리 잉그바레비치는 분노해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의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옆에 있던 무롬 공국의 공작 유리 다비도비치의 군대와 같이 보로네시 강에서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과 맞부딪힌다.(보로네시 강 전투)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랴잔-무롬 연합군은 패배하고 무롬 공작 유리 다비도비치는 전사한다.
일설에서는 이를 두고 의도적으로 유리 잉그바레비치를 도발했다고 보기도 한다. 아들을 모욕한 뒤 죽임으로써 잉그바레비치가 흥분을 유도했고 실제로도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237년 12월 16~21일, 몽골군은 발리스타를 동원한 5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키예프 루스의 일원이었던 라쟌을 함락시킨다.(랴잔 공성전) 랴잔은 불태워졌고 주민들은 학살되었으며, 랴잔 공작 유리 잉그바레비치와 그 가족원들은 모두 처형된다.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자조차 없었다"
몽골군의 랴잔 파괴에 대해 전해지는 말
1238년 1월, 랴잔 공국의 콜롬나에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한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는 랴잔 공작 유리 잉그바레비치의 형제인 콜롬나 공작 로만 잉그바레지치와 노보고르드 공국에서 온 약간의 지원병[10]과 함께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최대 7만명으로 추산되는 몽골군과 맞붙는다. (콜롬나 전투) 이 전투에서 블라디미르-수즈달-랴잔-노브고르드 공국의 병력은 15,000명에서 20,000여명[11]에 달했는데, 이를 칼가강 전투 이후로 몽골군이 처음으로 루스의 주력 연합군과 맞붙은 전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치열한 전투에서 몽골군에 약 10,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결국 승리한다. 콜롬나공 로만 잉그바레비치는 전사했고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는 패배하여 도망친다. 아들의 패전 소식을 들은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 유리 2세는 공작들과 보야르 회의를 소집하고 군대를 모으기 위해 출발한다.몽골군의 랴잔 파괴에 대해 전해지는 말
이 전투에선 랴잔 공작 유리 잉그바레비치의 형제였던 붉은 올레그 잉그바레비치가 포로로 잡혔다. 바투 칸은 올레그에게 신앙을 바꾸도록 요구했지만 올레그는 끝까지 거절했다고 한다. 몽골군은 그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죽이지 않다가 전쟁이 끝나자 풀어줬다. 14년의 포로 생활 후 1252년에 랴잔 공작으로 6년간 통치하다가 죽었고, 죽은 후에는 혹독한 포로 생활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이유로 지역 교구 성인으로 시성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몽골군의 랴잔 공국에 대한 파괴는 15세기에 "바투의 랴잔 파괴 이야기"라는 문학작품으로 쓰여지는데, 이는 현재 '이고르 원정기' 다음으로 러시아 문학 중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프파티 콜로브라트'는 용맹한대다 엄청난 무력을 가지고 있어서 소수의 군대만으로 많은 몽골군을 죽였지만 몽골군은 투석기를 동원해서 결국 성을 함락시켰고 에프파티를 끔찍하게 죽였다고 한다. 이는 2017년 퓨리어스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5.2.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 침공
1238년 1월 15일, 몽골군은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도시 모스크바를 포위한다.1238년 1월 20일, 몽골군은 5일간의 공성전 끝에 모스크바를 함락시킨다. 유리 2세의 막내 아들이자 유리 2세가 직접 모스크바 공작으로 임명했던 블라디미르 유리예비치는 포로로 잡힌다.
1238년 2월 3일, 몽골군에 의해 키예프 루스의 일원이었던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수도였던 블라디미르가 포위된다.
공성전 과정에서 몽골군은 포로로 잡혔던 유리 2세의 막내 아들 블라디미르 유리예비치를 살려주는 대가로 항복하라고 요구했고, 요구를 거부하자 블라디미르 유리예비치를 어머니와 형제들 앞인 블라디미르의 명소 황금문에서 처형한다.
공성전이 진행되던 와중, 콜롬나 전투에서 패배해 블라디미르로 도망왔던 프세볼로트가 포위를 풀기 위해 선물을 가지고 바투에게 찾아갔지만, 바투는 가차없이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를 죽여버린다.
1238년 2월 7일, 4일만에 수도 블라디미르가 함락된다. 본가였던 블라디미르는 불태워졌고 가뜩이나 사람이 많이 죽은 유리 2세의 공작가는 멀리 시집갔던 딸 하나를 제외하고 몰살당한다. 이때 유리 2세의 차남 므스티슬라프도 사망한다. 유리 2세는 북쪽으로 도망쳐 군대를 모은다.
1238년 2월 중순, 블라디미르를 함락시킨 이후,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북쪽으로 진군해 페레야슬라블-잘레스키 공국을 침공해 북쪽으로 진군하며 페레야슬라블을 5일만에 함락시키고 잘레스키, 트베리를 함락시킨다. 페레야슬라블-잘레스키 공작을 겸직하던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는 이들을 지원하지 않는다.
1238년 2월 20일,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더 북쪽으로 진군해 노브고르드 공국를 침공해 도시 토르조크를 포위한다. (토르조크 공성전)
1238년 2월 22일~3월 5일, 바투의 몽골군은 토르조크를 함락시킨다. 바투가 이 성을 점령하는데 2주가 소요되었는데 수부타이가 오자 3일만에 함락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전투에서 야로슬로프의 이름 미상의 아들이 전사한다.
1238년 3월 4일, 시트 강에서 유리 2세가 새로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부속 공국들(로스토프 공국, 야로슬라블 공국, 유글리츠키 공국, 유리에프 공국)을 모아 소집한 군대가 보롤다이가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전멸하고 유리 2세도 전사한다.(시트 강 전투) 보롤다이가 엄청난 속도로 군대를 진격시켜서 유리 2세는 미쳐 대비할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군대가 절단당하고 포위섬멸되는 와중 도망가다 기마병에게 살해된 유리 2세는 목이 잘려 바투에게 선물로 보내진다. 그렇게 모든 아들과 딸 하나를 잃고 복수를 계획했던 아버지는 허무하게 사망한다. 몽골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키예프 루스의 마지막 주력군이 붕괴되었고 승세는 확실히 몽골군에게 기울게 된다.
이 전투 직전에, 유리 2세는 자신의 형인 키예프 대공이자 페레야슬라블 공작이었던 야로슬라프에게 이 전투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고 기다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 이 전투 이후 보롤다이의 군대에는 전염병이 돌아 매우 약화되게 된다. 또 봄이 되며 북부 러시아는 라스푸티차가 시작됐고 말이 기동성이 느려지게 된다. 여러가지 요인이 겹치며 노브고르드 공국에 대한 공세 능력이 상당수 상실돼 몽골군이 노브고르드 공국을 더 침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일설에서는 노브고로드 공국이 먼저 항복을 했기 때문에 침공하지 않은 거라는 설이 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 함락되자 바투 칸은 자신의 군대를 더 작은 부대로 나누어 블라디미르-수즈달의 14개 도시를 약탈했다. 약탈당한 도시는 블라디미르 공국의 수도였던 로스토프, 우글리치, 야로슬라블, 코스트로마, 카신, 크스냐틴, 고로데츠, 갈리치, 페레슬라블-잘레스키, 유리예프-폴스키, 드미트로프, 볼로콜람스크, 트베리, 그리고 토르조크였다.
몽골군은 중국의 공성 무기를 사용해 많은 도시의 성벽을 파괴했다. 가장 점령하기 어려웠던 곳은 체르니고프 공국의 작은 공국 코젤스크였는데, 이곳의 소년 공작 바실리(칼가강 전투에서 전사했던 므스티슬라비치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와 주민들은 몽골군에 맞서 7주간 저항하며 몽골군 4,000명을 죽였다. 이 저항기간은 몽골군의 1차 침공중 가장 길게 공성전을 버틴 기간이다. (코젤스크 공성전)
이때 바투는 혼자서 코젤스크 공국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바투가 혼자서 7주나 함락시키지 못했던 도시를 귀위크,부리,카다안은 3일만에 함락 시켜버렸다. 이 이후로 사령관이었던 바투의 위상은 많이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 전투를 바투의 실책이 아닌 바실리 공작의 공에다 초점을 맞추면서 결사항전의 좋은 예로써 소개되고 있다고 한다.
코젤스크를 함락한 후 몽골군은 코젤스크를 '사악한 도시'라고 불렀고, 점령 후에 바실리를 처형하고 유아를 포함한 모든 주민을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몽골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키테즈라는 마을 전체가 주민들과 함께 호수에 잠겼고, 전설 속에서 그 모습이 오늘날까지도 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몽골의 침공으로부터 파괴를 면하거나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주요 공국과 도시 중심지로는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스몰렌스크, 폴로츠크, 비텝스크, 그리고 아마도 로스토프와 우글리치가 포함된다. 몽골군은 노브고로드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공국이 선제적으로 항복을 선택하면서 형제 도시들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을 철저히 약탈하는 것으로 제1차 키예프 침공은 일단락된다. 블라디미르-수즈달이 작살이 나는 동안 키예프 대공이었던 야로슬라프는 동생이었던 유리 2세를 지원하지 않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야로슬라프는 몽골군이 잠시 회군하자 키예프 대공직은 체르니고프 공작 미하일에게 남겨두고 블라디미르 공국을 상속받아 블라디미르 대공에 오른다. 그리고 수즈달 공국은 그 형제인 스비아토슬라프 브세볼로도비치에게 상속된다.
참고로 유리 2세의 형제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유리 2세의 아버지 였던 '큰 둥지' 프세볼로드 3세 유리예비치의 자손이 무려 8남 4녀와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 2명의 자손까지 합쳐 14명의 자손을 두었기 때문이다. 괜히 큰 둥지라는 별명이 있는게 아니다. 재밌는건 프세볼로드 3세 자신도 그 아버지의 열 번째 혹은 열 한 번째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 '긴 팔' 유리 돌고루키는 적어도 15명의 아이를 두었다.
6. 중앙아시아 토벌
한편, 1238년 초, 몽골군은 남하해서 쿠만족들을 침공한다.토벌되지 않았던 쿠만족 지도자인 바흐만도 이 시기에 진압됐다. 이는 몽케가 수장으로 수부타이가
1238년, 3월 한편 키예프 루스에선 스몰렌스크 공작이 키예프 루스의 1차 침공 도중 전사했는데, 리투아니아가 이 틈새를 놓지지 않고 쳐들어와서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유리예비치가 쑥대밭이 된 동루스의 피난민들을 이끌고 방어해야 했다.
1238년 중반, 바투 칸은 크림 반도를 약탈하고 모르도비아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몽골군은 무롬 공국을 완전히 초토화 시켜서 그로부터 113년이 지나 1351년에 재건하게 전까지 무롬 공국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1238년, 트루아-퐁텐의 역사가에 따르면 바투는 신성로마제국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역사서에서는 그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1239년, 몽골군 중 일부는 조지아를 침공하고 있었다. 조지아의 여왕 루수단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몽골군의 만행을 설명하며 구원을 요청했으며, 그러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일에 찬성한다고 추가로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은 교회를 재결합시키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을 뿐 별다른 도움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 무렵 몽골 군대는 아니와 카르스 등 왕국의 남부인 아르메니아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루수단은 결국 항복을 결심하고 재상 아센을 바투 칸에게 보내 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지아의 귀족들에게 몽골 귀족들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한다.
2. 조지아는 (시르반샤와 같은) 이슬람 봉신국들을 상실하지만, (아르메니아와 같은) 기독교 봉신국들은 그대로 유지한다.
3. 조지아 왕국은 매년 50,000개의 금화(금 약 250kg)를 지불하고 추가로 다양한 공물을 바친다.
4. 조지아 군대는 몽골의 호위군(케식)에 편입된다.
5. 루수단의 아들을 조지아의 왕으로 인정한다.
–1239년 조지아-몽골 조약–
2. 조지아는 (시르반샤와 같은) 이슬람 봉신국들을 상실하지만, (아르메니아와 같은) 기독교 봉신국들은 그대로 유지한다.
3. 조지아 왕국은 매년 50,000개의 금화(금 약 250kg)를 지불하고 추가로 다양한 공물을 바친다.
4. 조지아 군대는 몽골의 호위군(케식)에 편입된다.
5. 루수단의 아들을 조지아의 왕으로 인정한다.
–1239년 조지아-몽골 조약–
1239년, 몽골군은 분견대를 보내 다시 한번 쿠만족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1239년 11~12월, 몽골군은 조지아를 침공하면서 그 옆의 알라니아 왕국도 같이 침공했고, 귀위크, 몽케, 카단, 부리가 이끄는 몽골군은 15일간 수도를 공격해 알라니아 왕국을 멸망시킨다.
7. 2차 키예프 루스 침공
1239년 가을, 정비를 마친 바투 칸은 페레야슬라프 공국을 점령해 함락시킨다.1239년 10월초, 바투는 체르니고프 공국에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거부당한다. 이를 보고 바투 칸은
성을 보고 그의 아름다움과 위엄에 감탄하여, 사절을 미하일과 시민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유혹하고자 하였다.
라고 말했다. 그 당시 체르니고프 성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요새 중 하나였다.1239년 10월 18일, 몽골군은 투석기를 사용해 성벽을 부수고 체르니고프 공국을 함락시킨다. 체르니고프 공성전에서 사용된 투석기는 키예프 루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키예프 루스측의 기록에서는 '그 끔찍한 기계에서 발사된 돌은 사람 4명이 함께 들 수 없었고, 일반 화살 사거리의 1.5배 이상 날아갔다.'고 말하고 있다. 또 그 투석기들은 중국의 기술이었으며 중국인 기술자들이 관리했다고 한다.
1239년 가을, 샤이반과 부체크가 이끄는 분견대는 크림 반도에 도착해 남부 해안선을 따라 도시들을 약탈한다.
1239년 겨울, 몽골군은 점령한 체르니고프와 페레야슬라블을 약탈했다. 이때 대칸이던 오고타이 칸이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원정길에 있던 많은 왕자들 사이가 안좋아지기 시작한다.(...)
1239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날, 몽골군이 크림반도 쪽으로 파견한 샤이반과 부체크가 이끄는 분견대는 룸 술탄국의 점령하에 있던 수다크를 점령한다. 이 수다크는 룸 술탄국이 트레페준타 제국에게 뺏은지 얼마 안되었던 곳이었다.
1240년 봄, 몽케는 키예프에 있는 키예프의 대공이자 체르니고프 공작이었던 미하일에게 사절을 보낸다. 그러나 미하일은 사절을 살해한다.
1240년 가을, 복속당한 많은 유목민들과 나라들에게(대표적으로 쿠만-킵차크 연맹) 새로 징집병을 받아 몽골군은 군을 새롭게 구성한다.
1240년 11월,몽골군을 튀르크인들과의 전쟁을 했고 그들을 쉽게 진압한다.
한편, 자신의 영지였던 체르니고프가 박살나는걸 두 눈으로 본 미하일은 이건 아니라고 느낀건지 아니면 자신의 사절을 살해한 것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던건지 키예프 대공직을 버리고 아들과 함께 헝가리로 도망친다. 그걸 본 블라디미르 대공 야로슬라프는 미하일이 쓸모없다고 여겨서 미쳐 챙기지 못한 그의 아내, 하인, 재산 등의 것들을 싹쓸이한다. 그리고 키예프 대공 자리는 슬쩍 스몰렌스크 공작이 점령해봤지만 즉시 서루스의 실권자였던 볼히니아 공작 다닐로에게 빼앗긴다. 그러나 키예프에 몽골이 당도하기도 전에 다닐로는 왜 미하일이 떠난건지 정확히 이해하고 납득한 뒤,
1240년 9월 5일, 몽골군은 키예프 루스의 수도 였던 키예프에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키예프 공성전)
키예프의 성벽은 그 당시 키예프 루스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전한 요새였다. 첫 번째 줄("야로슬라프 성벽")은 높이가 12미터, 너비가 20미터에 달했으며, 그 위력 면에서 러시아 요새 역사상 비교할 만한 곳이 없었다. 성벽의 나무 벽은 돌문 탑으로 보강되었다. 그 다음에는 두 번째 성벽과 벽이 있었고, 그 안에는 세 번째 방어선인 야로슬라프 궁정의 요새가 있었다.
1240년 12월, 몽골군은 공성추와 투석기를 동원한 공성전 끝에 키예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다. 어느 교황 특사에 따르면 도시 주변에 200채의 집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세기가 되어서야 키예프는 몽골 침공 이전의 인구를 회복할 수 있었다. 키예프 함락 이후에, 귀위크와 몽케는 왕자들간의 갈등이 심해져 오고타이 칸에 부름을 받고 회군한다. 이 얘기는 아래 문단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한편, 갈리시아-볼히니아 공국의 공작 다닐로는 몽골군이 오기도 전에 이미 도망가 있었다. 그리고 몽골군이 갈리시아-볼히니아 공국도 다른 공국들과 같이 공격했지만 이를 두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몽골군과 다닐로가 특수한 협정을 맺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몽골군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군대를 모아 핵심 도시를 타격하는 방식을 썼는데, 갈리시아-볼히니아를 공격할때는 공격이 아니라 군대를 분산시키는 약탈에 가까운 방법을 썼고 대도시들이 공격받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시각으로는 더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던 바투와 세력을 보전하고 싶었던 다닐로 사이에 모종의 협약이 있었던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한 역사학자는 바투가 다닐로가 국경을 넘은 것을 확인하고 공격을 시작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몽골군은 항복엔 관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위크와 몽케가 회군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사렸던 걸 수도 있다.
1240년, 몽골군은 분열되어있던 키예프 공국들의 공국들을 하나하나 깨부수며 결국 키예프 루스를 붕괴시킨다.
1241년 1월, 브레스트 근처에서 남은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가 바투 칸의 분견대에 저항했지만 패배한다. 주민들이 모두 도망가서 시체는 오랫동안 수습되지 않았는데, 다시 주민들이 돌아왔을때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노보고르드 연대기에 따르면, 1240년 여름, 몽골군이 침입하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노브고로드 공국에게 다른 루스 공국들이 다 개발살 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수한 교황이 북방 십자군을 선포했고 스웨덴 군대가 쳐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장인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네바 강 전투에서 무찔러 방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넵스키라는 이름도 얻었다. 이어진 북방 십자군 일파 리보니아 검 기사단의 침공속에서도 소수의 군대로 그들을 무찔렀다고 한다. 기록은 불확실하지만 현재 그는 러시아의 국민 영웅이다. 아무튼 넵스키는 노브고로드 공국을 보전하는데 성공했고, 바투 칸의 비위를 잘 맞춰 정복이후 루스 전역을 통치할 수 있는 지위를 제공받는다. 현재도 러시아인들은 만약 넵스키가 몽골군과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하고 있다고 한다.
8. 몽골군 내부의 갈등과 귀위크의 회군
한편 몽골군에서는 러시아를 침공하던 도중 주치의 혈통 문제(메르키트 콤플렉스)가 뇌관으로 작용하면서 총사령관이던 바투가 칭기즈 칸의 다른 손자들[12]과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13] 귀위크는 바투 형제들의 실책을 보고 그들의 지휘 능력, 특히 바투의 역량을 불신했다. 귀위크는 바투에게, 바투는 화살통을 들고 다니는 늙은 여자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결국 사촌들[14]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격노해서 숙부인 오고타이 칸에게 그대로 고했다. 바투의 보고를 받은 오고타이 칸도 격노해서 귀위크 등을 소환한 뒤 씨족 간에 분쟁을 일으킨 죄를 물어 갈궜다.우구데이는 귀위크와 몽케에게 있던 우익군의 지위를 카단과 부첵에게 맡기고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바투는 이들을 위해 티서강(티사강)과 도나우강 강변에서 이별연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귀위크는 전쟁에서의 바투의 소극적 태도를 비난했다. 몽골비사에 의하면 우구데이는 다시 서신을 보내 '...(이하 중략)... 너는 너의 주인(바투를 말한다.)이 러시아인과 킵차크를 정복하는 동안 그는 러시아인이나 킵차크인을 한 명도 제대로 붙잡지 못했고 염소 발굽도 얻지 못하지 않았느냐'며 속히 돌아오라고 책망하였다. 귀위크는 1240년 가을부터 서서히 회군을 준비한다.
1240년 겨울, 키예프를 점령한 직후 승전 축하연에서 총사령관 바투가 건배를 제의하고 술을 마시자, 귀위크는 자신이 칸의 아들이라며 자신이 먼저 건배 제의를 해야 한다, 혹은 자신이 먼저 잔을 들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는 곧 언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오고타이 칸에게 보고되었다. 오고타이는 그가 대칸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의 주군, 형을 능멸했다며 분개했다. 귀위크는 이에 오고타이 칸이 바투를 지지하자 불만을 품고, 전쟁 도중 자신의 병력을 슬그머니 뒤로 빼거나 지원을 주저하였다. 이는 그대로 오고타이 칸에게 보고되었다.
한번은 원정 도중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가 바투를 공격했고, 귀위크는 이를 관망했다. 또 한번은 술좌석에서 귀위크가 바투를 비웃다가 시비가 붙기 직전까지 갔다. 원조비사와 집사(集史)에 따르면, 원정 중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가 주치계열 왕자들과 말다툼을 벌인다. 이때 귀위크도 부리에 동조했다 한다. 원조비사에 의하면 전투 중의 상황을 보고받은 오고타이 칸은 분노했고, 귀위크를 해임, 본국에 소환을 명령했다. 오고타이 칸은 사자를 통해 서신을 보내 귀위크를 질책, 바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과, 바투는 총사령관으로서 귀위크의 상급자라는 점을 명시하고, 서방 원정대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며 추궁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귀위크가 귀환하면서 몽케도 같이 몽골로 돌아갔다 한다. 귀위크는 회군하면서 약 2만명의 군대를 데리고 돌아갔기 때문에 더 적은 군사로 바투 칸은 동유럽 원정을 진행하게 된다.
9. 동유럽 침공
헝가리에는 제베와 수부타이의 서부 원정을 겪고 1229년부터 러시아에서 넘어온 보야르들에 의해 몽골의 위협이 전해졌다.[15]1236년부터 바투는 벨러 4세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을 제안했지만 서른 번째 사절을 보냈지만 답변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1239년 바투의 원정 때문에 쑥대밭이 된 쿠만-킵차크 연맹에서 40,000호에 달하는 쿠만-킵차크인들이 탈출해 헝가리 왕국의 동쪽 국경에 접근해 자신들을 받아들여준다면 헝가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벨러 4세는 이들과 손잡고 몽골 제국군의 예상되는 침략에 맞서기로 하고, 쿠만족 지도자 코티얀에게 추종자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피난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코티얀은 흔쾌히 수락하고 티서강변의 평원 지대에 정착했다. 쿠만인들은 그곳의 현지 주민들과 종종 마찰을 벌였고, 때때로 강도, 강간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벨러 4세는 몽골군의 임박한 침략을 막으려면 쿠만인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여겼기에 눈감아줬고, 헝가리인들은 자연히 쿠만인들을 감싸돌고 자신들의 고충을 알아주지 않는 왕을 원망했다.
서방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는 이들을 당장 돌려놓으라고 헝가리 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나는 칸, 하늘의 왕이 보낸 자로서, 이 땅에서 복종하는 자들은 그들의 처지에 맞게 다스리고, 반항하는 자들은 짓밟을 권한을 받았다. 그런데, 헝가리 왕이여, 나는 이미 서른 번이나 사신을 보냈는데, 너는 왜 단 한 명도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냐? 너는 나에게 사신도, 편지도 보내지 않았다.
나는 네가 부유하고 강한 왕이며,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큰 왕국을 홀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네가 스스로 나에게 복종하기를 어려워한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네게도 더 낫고 현명한 선택은 내게 자진해서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내 부하들인 쿠만족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그러니 그들을 더 이상 네가 품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쿠만족은 집이 없어 천막을 치고 떠돌아다니니 어쩌면 나를 피할 수도 있겠지만, 너는 집에 살고, 성과 도시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 손에서 어떻게 벗어날 셈이냐?"
바투 칸, 1237년
이는 쿠만족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네가 부유하고 강한 왕이며,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큰 왕국을 홀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네가 스스로 나에게 복종하기를 어려워한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네게도 더 낫고 현명한 선택은 내게 자진해서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내 부하들인 쿠만족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그러니 그들을 더 이상 네가 품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쿠만족은 집이 없어 천막을 치고 떠돌아다니니 어쩌면 나를 피할 수도 있겠지만, 너는 집에 살고, 성과 도시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 손에서 어떻게 벗어날 셈이냐?"
바투 칸, 1237년
계속되는 항복의 거부와 쿠만족들을 내놓으라는 요구 둘을 모두 거부했기 때문에 몽골군은 무력으로 의견을 관철시키기고자 했다.
수부타이는 헝가리를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전에,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측면에서 헝가리에 원병을 보내 올 수 있었던 폴란드 왕국을 미리 쳐부수기로 했다. 바투의 형 오르다(Orda)와 차가타이의 아들 바이다르(Baidar), 오고타이 칸의 차남 카단(Kadan)이 이끄는 북로군은 곧장 피아스트 왕가 계통의 공작들이 통치하고 있었던 폴란드의 제공국들을 습격하여 레그니차 전투를 치렀고, 바투와 명장 수부타이가 이끄는 본대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베레츠키 고개를 넘었다. 한편 남동부로 향한 남로군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약탈한 뒤, 다뉴브 강을 따라 헝가리 평원까지 진출하여 모히 전투에 참전했다.[16]
1240년 말, 바투 칸과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 동쪽 국경에 도달했다. 벨러 4세는 전국에 소집령을 내리고, 독일 기사들을 대거 고용했다. 그런데 쿠만족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헝가리 귀족들과 독일 기사들이 쾨텐을 습격해 살해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쿠만족은 헝가리 남부로 이동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멘탈이 붕괴된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9.1. 폴란드 침공
1241년 1월, 원정에 동행했던 바이다르[17], 오르다[18], 카단[19]은 2개 튜멘(12,000~20,000명)을 이끌고 루블린고 자위호스트를 함락시키며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들의 목표는 기동력을 이용해 폴란드 각 소공국들의 군대가 연합하지 못하도록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1241년 2월 13일, 투르스코 전투(Battle of Tursko)에서 크라쿠프 태수(Voivode) 브워드지미에시(Włodzimierz)가 이끄는 약 1,500명의 병력이 카단과 바이다르가 이끄는 천 명 가량의 몽골군에게 격파당했다.
1241년 3월, 바이다르와 오르다가 이끄는 몽골군은 군대를 둘로 나눈다. 1만 5천명은 본대인 바이다르와 오르다가 지휘하고, 1만명은 카단의 지휘 아래 쿠야비아로 진군했다.
1241년 3월 18일, 크라쿠프 근방 흐몔니크 전투(Battle of Chmielnik)에서 아직 규합되지 못한 폴란드군이 차가타이의 차남 바이다르가 이끄는 몽골군의 거짓 후퇴 전술에 말려들어 크게 패배했다. 크라쿠프 공작 볼레슬라프 5세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전장에서 철수했는데 이는 상당한 사기 저하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소폴란드 귀족의 상당수가 사망했고 폴란드 대공의 도시 크라쿠프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1241년 3월 22일, 무방비였던 크라쿠프로 진입한 몽골군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불태운 다음 바톰을 점령했다. 크라쿠프 공작 볼레슬라프 5세는 어머니와 헝가리로 도피했다.
1241년 4월 1일, 바이다르의 정찰대가 오드라 강을 도하하던중 폴란드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다.
폴란드군은 그 후에 도착한 바이다르의 본대와도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고, 브로츠와프로 후퇴했다.
동시에 오고타이의 아들 카단이 이끄는 병력은 도망치던 소폴란드(Małopolska) 지역의 남은 폴란드군을 타첵 전투(Battle of Tarczek)에서 격파했다.
1241년 4월 8일, 카단의 군대가 브로츠와프 근방에서 바이다르군과 합류했다.
한편, 폴란드 공국들을 다시 규합하며 연합군을 집결시키고 있었던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는 모라비아와 성전기사단 등의 지원까지 얻어 몽골군에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보헤미아 왕국의 왕 바츨라프 1세도 원병을 모아 한창 폴란드로 달려가고 있었다. 보헤미아 말고도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제후국들이 원병을 파견한다는 약속을 했으나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헨리크 2세는 빠르게 출정해 몽골군과 맞서려고 했다.
1241년 4월 9일, 대폴란드~소폴란드 지역을 초토화시키며 진군하던 몽골군은 실롱스크 공국의 레그니차에 모습을 드러냈고, 약 3,000 ~ 8,000명의 폴란드-독일 연합군은 레그니차 전투에서 격돌한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 연합군은 참패했고, 헨리크 2세는 전사한다. 보헤미아군은 하루 늦게 전투에 도착한다.
폴란드를 박살낸 다음 바이다르, 오르다, 카단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헝가리를 파괴하러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마이센 변경백국과 체코, 슬로바키아의의 외곽 도시들을 파괴한다.
9.2. 헝가리 침공
1241년 봄, 몽골 제국군은 헝가리를 본격적으로 침공했다. 벨러 4세는 가급적 많은 병력을 끌어모은 후 적과 교전하려 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왕의 허락 없이 몽골군과 독자적으로 싸웠고, 일부는 아예 영지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그는 이대로 지체하면 군대가 와해될 거라 여기고 모히 평원으로 진군해 마차를 이용하여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벨러 4세는 산맥의 빈틈인 페슈트로 몽골군이 침공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곳에 군대를 계속 모은다. 그러나 이때도 영주들과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1241년 3월 12일, 제때 지원받지 못한 디오니시우스 부왕이 바투의 몽골군과 만나 패배한다. 이 승리로 바투는 2주 일찍 판노니아 평원에 도착한다.
1241년 3월 15일, 샤이반이 지휘하는 몽골 선발대가 페슈트에 도착해 그곳에 집합해 있던 헝가리의 주력군을 확인하다. 이때 샤이반의 보고서에 따르면 헝가리군의 수는 몽골군의 두 배에 달했다.
그리고 이때쯤 헝가리도 몽골군의 수를 대강 짐작해보게 되었고 자기들보다 군대가 적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이 얼마전에 징집한 신뢰할 수 없는 러시아인 강제 징집병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20] 이런 근거를 들어 벨러 4세는 바투를 선제 빨리 공격하기로 마음먹는다.
바투는 전투에서 패배했고, 군대를 철수하고 퇴각한다. 헝가리는 후퇴하는 바투를 추격했지만 바투는 아주 먼 거리를 이동했고, 추격전은 길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퇴각 중에 수부타이의 주력군이 바투 군단에 합류했고 역습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1241년 4월 10~11일, 수부타이와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 35,000~10만 명과 헝가리군 25,000~80,000명은 모히 전투에서 격돌했다. 초기에는 바투 칸의 무리한 사요 강 도하로 인해 몽골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헝가리군이 승기를 잡는 듯했지만, 수부타이가 다른 길을 통해 강을 건넌 후 역습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이 왕의 통제에 불응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다가 각개격파당하는 바람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벨러 4세는 동생 칼만과 함께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주했지만, 뒤에 남겨진 헝가리군은 궤멸되었다.
몽골군은 정복한 헝가리 영토를 나누고 임시 행정부를 조직하고 그 관리들을 임명한다.
벨러 4세는 몇몇 추종자들을 데리고 포조니로 이동했다가 몽골 제국군이 추격해오자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그를 도와주긴 커녕 감옥에 가둔 뒤 오스트리아 국경 인근의 포조니, 쇼프론, 바스 주를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벨러 4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뒤 겨우 풀려난 후 가족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이후 교황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9.3. 신성 로마 제국
1238년, 트루아-퐁텐의 역사가에 따르면 바투는 신성로마제국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역사서에서는 그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1238년까지 제국 내에는 몽골군에 대한 소문이 퍼졌으며, 심지어 그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이며, 독일에서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많은 세관에서 유대인들이 살해당한다.
1239년 말에서 1240년 사이 몽골군이 조지아를 침공했고 루수단이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금 십자군은 스페인에서 레콩키스타를 하고 있었고 레반트에서의 십자군 전쟁으로 지쳤다고 거부했다.
이후 중유럽의 강국인 신성 로마 제국[21]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운다.
1241년 4월 9일 레그니차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보헤미아와 작센의 국경을 공격한다.
1241년 4월 25일, 지크프리트 대주교는 이전에 교황만의 고유한 권한이었던 십자군 선포 권한을 침해하고 몽골군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한다. 독일 전역의 평신도들은 무장하기 시작한다.
1241년 5월 19일, 지크프리트 대주교의 선포를 바탕으로 독일왕 콘라트 4세는 슬링겐에서 1241년 11월 11일까지 유효한 십자군 서약을 한다. 프리드리히는 1241년 말~1242년 초 겨울에 몽골군이 독일을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교들은 이 십자군을 위해 독일 전역에서 돈을 모은다.
1241년 5월 황제와 교황이 모여 몽골군에 대해서 협의를 가진다. 그러나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난다.
이탈리아에서 페라라 주교는 프리드리히가 몽골군과 결탁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돌렸고, 교황의 대리인들은 독일에서도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
1241년 5월~6월, 한편 프리드리히는 몽골군 침입 당시 내내 이탈리아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몽골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독일에 보냈는데, 특히 석궁의 사용을 강조하고 있었다.
1241년 6월 13일, 프리드리히는 나는 이미 몽골군과 교전중이라 십자군에 참여하진 않을것이라고 말한다.
1241년 6월 20일, 프리드리히는 6월 20일 파엔차에서 몽골군에 대한 회칙을 발표했는데, 각 기독교 국가가 기독교 세계를 방어하기 위해 병력과 무기를 바치라는 내용이었다. 이 회칙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웨일즈, 아일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슈바벤, 부르고뉴, 크레타, 키프로스에게 전해진다.
1241년 6월, 그레고리 교황은 독일의 여러 주교들에게 십자군을 전파하도록 장려했다.
1241년 7월 1일, 독일 왕국의 콘라트 4세의 지휘 아래 십자군이 몽골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를 위해 모인다.
1241년 7월 3일, 프리드리히는 처남인 영국의 헨리 3세에게 몽골의 위협을 알리는 편지를 보낸다.
1241년 7월 16일, 십자군은 바이덴까지 진군했지만 몽골군이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십자군은 해체되었다.
주교와 군주들은 십자군을 위해 모금한 돈을 나눠 갖는다.
그리고 콘라트의 섭정이던 지크프리트가 교황당으로써 콘라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교황이 몽골군에 대한 십자군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그 당시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와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1239년 신성로마제국이 롬바르디아 동맹을 격파하고 교황청에 대한 위협이 현실화되자 교황 그레고리 9세는 프리드리히를 파문했고 폐위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4번이나 프리드리히를 적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 그러자 신롬 소속이던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1241년에 공의회에서 그레고리가 오히려 적그리스도이며, 다니엘서의 '작은 뿔'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교황이 이런 신롬을 몽골군이 공격해주기를 은근히 바란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1241년 8월 22일, 교황 그레고리 9세가 사망한다.
1241년 9월, 그레고리 9세가 생전 선포했던 몽골군에 대한 십자군은 콘라트 4세에 맞서 일어난 교황당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사용된다.
1241년 12월~1242년 1월, 몽골군은 오스트리아 동부와 모리비아를 약탈한다.
1241년 12월 11일, 몽골 제국의 대칸 오고타이 칸이 사망한다. 대부분의 몽골군은 새로운 칸을 뽑기 위해 본토에서 열리는 쿠릴타이에 참가하기 위해 회군하게 되었다.
1242년 1월, 몽골군은 벨러 4세의 숨통을 노리려고 몽골 추격대도 조직한다. 몽골 추격대가 접근해오자, 가족들을 클리스 요새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트로기르로 피신했다. 추격대 지휘관 카단 칸은 벨러 4세가 가족들과 함께 있을거라 판단해 클리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패배했고, 벨러 4세는 트로기르에 있는 것을 안 몽골군은 트로기르를 포위 공격했지만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격파되어 돌아간다.
1242년 3월, 격파된 바투의 군대는 보스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를 습격한다. 불가리아는 바투에게 항복해 조공을 바치는 것에 동의한다.
1242년 3월에서 4월, 바투의 군대마저 서서히 회군하는 것으로 마침내 6년에 걸친 서방 원정이 종료되었다.
10. 결과과 영향
10.1. 키예프 루스
- 루스인 50만명이 사망했다.
- 1500개의 도시와 요새가 있었지만 전쟁 후엔 300개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10.2. 헝가리와 폴란드
- 헝가리 침공 이전에 헝가리는 지방 공작들이 왕에게 반란을 일으킬까봐 석조 요새를 짓는 것을 금지했는데, 몽골의 침략 이후 뭔가 느낀게 있었는지 제한을 해제한다.
- 몽골군이 헝가리-크로아티아를 떠난 후, 벨러 4세는 갈리시아-볼하니아 공국을 침공한다. 갈리시아-볼하니아 공국은 1245년 8월 17일 야로슬라블 근처에서 맞붙었고 패배한다.
10.3. 몽골
- 이 원정에서 막대한 공을 세운 수부타이는 이후 유럽에 가는 일은 없었으며, 1246년 8월 제3대 대칸의 자리에 오른 구유크 칸은 수부타이를 중국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1248년 귀환 중 몽골의 톨 강에서 7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서방 원정 당시 이미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쇠약해져 말도 제대로 못 타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도 중세 몽골인치고는 꽤나 장수한 편이었다. 사후 그의 우량카이 일족은 몽골 제국 및 원나라의 4대 명문가 중의 하나로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나머지 세 가문은 무칼리의 잘라이르 가문, 보오르추의 아를라트 가문, 티라운의 술두스 가문이었다. 수부타이의 아들인 우량카다이와 손자인 아쥬도 몽골 제국의 명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11. 회군의 이유
쿠릴타이에 참여하기 위해 회군한 것이 정설이지만, 많은 설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사유에 대한 반론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12월에 오고타이 칸이 죽었고, 3월에 회군이 이루어지려면 원나라부터 중부 유럽까지 3개월 만에 메세지가 전달되어야 한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것이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신이 라틴 기독교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대칸의 죽음을 초래했다. -이탈리아 외교관, 신부, 탐험가,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
예를 들면, 신이 대칸을 죽였다는 탐험가이자 신부였던 카르피네 자신도 1246년에 몽골의 역참을 이용한 적이 있는데 키예프에서 몽골 본토까지 여행했을 때이다. 이 일행은 쿠릴타이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 엄청난 속도를 냈는데, 하루 종일, 밤새 말을 타고 사람당 여러마리의 말을 바꿔서 탔지만 5개월이 걸렸다는 것이다.[22]
심지어 집사의 저자였던 라시드 알딘도 오고타이 칸의 죽음 때문에 회군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 몽골군이 철수를 시작했을때, 몽골군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그들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 때문에 회군한 것이 아니다.) -일 칸국의 역사가 라시드 알딘.(집사의 저자)
그래서 현대에 들어와서는 많은 다른 설들이 제기되고 있다.
- 1. 말에게 줄 풀이 부족했다. 말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풀을 먹어치운다. 대초원이 아닌 더 서쪽으로 가면 말을 먹일 풀이 부족하다. 2. 습한 해안성 기후가 몽골군의 주무기였던 활을 약하기 만든다. -잭 웨더포드
그러나 이 주장으로는 몽골군이 중국과 인도에서 싸웠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둘다 많은 숲, 산 그리고 많은 강우량을 가진 지역이었다.
- 식량이 부족해 더 이상 원정을 진행할 수 없었고, 유럽인들은 더 큰 말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의 주전술이었던 기병전의 메리트가 없어졌다. -존 키건 경, 1987
- 장기간의 원정으로 많은 손실이 발생했고 지쳤다. 몽골군이 서방 원정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것이라는 추측.
- 생각보다 유럽이 너무 빡셌다.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아시아 지역과 다르게 고도로 발달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침공하기 겁이 났다는 추측.
- 나이테를 분석해보니 1242년에 여름이 유독 따듯했다. 이런 기후는 습지대를 형성해 몽골군이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헬렌 톰슨, 2016
12. 그 이후의 동유럽 침공 야욕
원정 중에 바투와 수부타이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왕좌를 내놓으라고 한 적은 있지만 도달하지는 못하였다.12.1. 귀위크 칸이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
원정이 끝나고 귀위크는 몽골 제국의 대칸이 된다.영원한 하늘의 힘에 기대어 (지상의) 모든 위대한 울루스(를 지배하는) 사해의 군주의 칙령.
이것은 대(大)파파(Papa-i kalan; 교황)에게 보내는 명령이다. 알고 깨달을지어다.
짐은 협의한 연후에 캐랠(Karal; 왕)들의 지방에 복속의 요청을 보냈노라. 만약 짐의 말이 도달하거든 교황인 그대는 왕들과 함께, 그대 스스로 짐의 어전에 와야 할 것이다. 그때에 야사(yasa; 법령)의 모든 명을 그대에게 들려줄 것이다.
또 한 가지.
그대는 내가 세례를 받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너희들 자신을 알리고 요청을 보냈다. 이러한 그대의 요청을 짐은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또 한 가지.
그대는 전갈을 내게 보내기를 "(당신은) 마자르(Majar)와 키리스탄(Kiristan)의 모든 땅을 정복하였는데,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 그들의 죄가 무엇이었는지 말해 달라."라고 했다. 이 또한 짐은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칭기스 칸과 카안(Qu'an; 우구데이 칸)은 두 지방에 온 세상이 복종해야 한다는 영원한 주의 부름(farman-i khuda; 신, 하느님)을 듣도록 전달하였다. (그러나) 부름을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들은 자만심을 품고 복종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전령과 일치(Ilchi; 사신)를 죽였다. (그래서) 영원한 주께서는 그 자신의 뜻으로 지방과 주민을 절멸시켰다. 주의 명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자신의 힘만으로 (적을) 죽이고 정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찬가지로 그대가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도(tarsa)이다. 주를 숭배하고 눈물을 흘린다."라고 한다면, 주께서 진실로 누구를 징계하고 누구에게 은총을 내리실지, 그대가 말하는 것을 (그 뜻대로 되리라고) 그대가 어찌 아느냐? 주의 힘이,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지는 곳까지 모든 지방들을 짐에게 복종케 하였노라. 짐이 생각건대 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누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제 그대는 진실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복속(il)하겠습니다.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그대 스스로 왕들을 인솔하여 함께 경의를 표하고 짐을 섬기러 어전으로 오도록 하라. 그대의 복속은 그때 짐이 알리라. 만약 주의 명을 듣지 않고 짐의 명령을 어긴다면, 짐은 너희를 반역자(yaghi; 원수)로 알 것이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너희들에게도 알려주리라.
만약 (너희들이 이 명령을) 어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이 어찌 알겠는가? 오직 주께서만 안다.
귀위크 칸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보낸 친서(원본 이미지 보기)
1246년 11월 사절 카르피니를 통해 전달되어 교황청 서고에 보관됨.
(김호동 교수 역# 일부 수정 후 인용)
이것은 대(大)파파(Papa-i kalan; 교황)에게 보내는 명령이다. 알고 깨달을지어다.
짐은 협의한 연후에 캐랠(Karal; 왕)들의 지방에 복속의 요청을 보냈노라. 만약 짐의 말이 도달하거든 교황인 그대는 왕들과 함께, 그대 스스로 짐의 어전에 와야 할 것이다. 그때에 야사(yasa; 법령)의 모든 명을 그대에게 들려줄 것이다.
또 한 가지.
그대는 내가 세례를 받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너희들 자신을 알리고 요청을 보냈다. 이러한 그대의 요청을 짐은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또 한 가지.
그대는 전갈을 내게 보내기를 "(당신은) 마자르(Majar)와 키리스탄(Kiristan)의 모든 땅을 정복하였는데,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 그들의 죄가 무엇이었는지 말해 달라."라고 했다. 이 또한 짐은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칭기스 칸과 카안(Qu'an; 우구데이 칸)은 두 지방에 온 세상이 복종해야 한다는 영원한 주의 부름(farman-i khuda; 신, 하느님)을 듣도록 전달하였다. (그러나) 부름을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들은 자만심을 품고 복종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전령과 일치(Ilchi; 사신)를 죽였다. (그래서) 영원한 주께서는 그 자신의 뜻으로 지방과 주민을 절멸시켰다. 주의 명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자신의 힘만으로 (적을) 죽이고 정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찬가지로 그대가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도(tarsa)이다. 주를 숭배하고 눈물을 흘린다."라고 한다면, 주께서 진실로 누구를 징계하고 누구에게 은총을 내리실지, 그대가 말하는 것을 (그 뜻대로 되리라고) 그대가 어찌 아느냐? 주의 힘이,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지는 곳까지 모든 지방들을 짐에게 복종케 하였노라. 짐이 생각건대 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누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제 그대는 진실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복속(il)하겠습니다.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그대 스스로 왕들을 인솔하여 함께 경의를 표하고 짐을 섬기러 어전으로 오도록 하라. 그대의 복속은 그때 짐이 알리라. 만약 주의 명을 듣지 않고 짐의 명령을 어긴다면, 짐은 너희를 반역자(yaghi; 원수)로 알 것이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너희들에게도 알려주리라.
만약 (너희들이 이 명령을) 어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이 어찌 알겠는가? 오직 주께서만 안다.
귀위크 칸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보낸 친서(원본 이미지 보기)
1246년 11월 사절 카르피니를 통해 전달되어 교황청 서고에 보관됨.
(김호동 교수 역# 일부 수정 후 인용)
교황은 이전에 서신을 보내 '침략행위를 그만두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과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23]을 침략한 이유를 설명할 것'을 요구했고, 귀위크는 이에 대한 답장에서 "네 요구를 둘 다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반박하며, "헝가리인은 칸에게 복종하라는 신의 명령을 믿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보낸 사신들을 죽였다. 신의 도움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우리에게 정복되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 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모든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는 요지의 내용을 펼쳤다. 이는 몽골에서 평화가 의미하는 것은 강자의 평정 아래에 분쟁을 유발할 적대자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상황으로 해석했기 때문.
[1] 몽골군 15만명 이민족 징집병 24만명 이상[2] 주력 몽골군 5만명, 튀르크계 징집병 10만명[3] 초기[4] 귀위크 귀환 후 동유럽 침공 당시[5] https://proza.ru/2011/08/02/826[6] 당시 키예프 루스의 인구수가 750~1,200만명임을 고려하면 동원가능한 군대 수가 10만이 넘을 수도 있지만 예비군 체제가 미흡했던 봉건제의 한계로 더 동원할 수 없었다.[7] 카자흐스탄 제티수 주 인근[8] 볼가 강 하류[9] 주치는 칭기즈 칸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이는 곧 주치의 아들 바투의 영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10] 이 부분에 대해선 약간의 논란이 있다.[11] 그러나 이중 민병대가 2/3이었다고 한다.[12] 귀위크로 대표되는 오고타이 가문 및 차가타이 가문[13] 단, 함께 왕따를 당하던 툴루이 가문과는 꽤 친했다.[14] 그 중에서도 특히 오고타이의 장남이었던 귀위크와 사이가 가장 나빴다. 일반적으로 사촌들이 혈통 문제를 걸고 넘어지며 바투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추측되나, 김호동 교수는 서방 원정 중에 바투가 보여준 무능함에 사촌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원정 이전부터 귀위크 등 오고타이계 및 차가타이계 사촌들과는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들의 분쟁에서 오고타이 칸이 바투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의 무능력을 옹호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15]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인 자카르파탸가 1918년 이전까지는 헝가리 영토였다. 그래서 헝가리 동부에는 슬라브계 귀족들이 제법 있었다. 헝가리와 슬라브 사이의 관계가 완전 낯설지만은 않았던 것이다.[16] 폴란드와 헝가리는 옛부터 지금까지 최우방으로, 동맹까지 맺는 친밀한 관계였다.[17] 차가타이 칸의 차남[18] 주치의 장남, 총사령관 바투의 형[19] 오고타이 칸의 아들[20] 이 부분에는 논란이 있다.[21]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유럽의 중심이자 로마의 정통 후계국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며 굉장한 상징성을 가진 국가였다.[22] Carpini, 몽골의 역사 , 60; Pow, 깊은 도랑과 잘 지어진 성벽, 19-21쪽[23] 헝가리 왕국은 라슬로 1세부터 크로아티아와 동군연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