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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12대 군주 რუსუდანი | 루수단 | ||
제호 | 한국어 | 루수단 |
조지아어 | რუსუდანი | |
라틴어 | Rusudan | |
가족 | 다비트 소슬란(아버지) 타마르(어머니) 기오르기 4세(남자 형제) 기아스 앗 딘(남편) 다비트 나린(아들) 구르주 카툰(딸) | |
생몰 년도 | 미상 ~ 1245년 | |
재위 기간 | 1223년 1월 18일 ~ 12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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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 12대 여왕. 몽골 제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의 봉신이 되었다.2. 생애
알라니아의 왕자이자 바그라티온 왕조 방계인 다비트 소슬란과 조지아 왕국 10대 여왕 타마르의 딸이다. 남자 형제로 기오르기 4세가 있다. 1213년 1월 18일 타마르 여왕이 사망한 뒤 기오르기 4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223년 1월 18일 기오르기 4세가 몽골 제국군과의 사기미 전투에서 참패했을 때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기오르기 4세에게는 아들 다비트 7세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라 왕비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상 사생아 취급받아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뒤를 이어 여왕에 등극했다.당시 조지아의 상황은 다비트 4세가 개창한 뒤 타마르 여왕까지 이어지던 황금 시대에 비해 상당히 악화되었다. 관료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물가는 급등하여 서민들의 삶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특히 교회 주교들이 행상인 노릇을 할 정도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아니의 정교회 주교들은 예배를 주최하는 대가로 신자들에게 100트빌리시 드람(조지아 화폐 단위)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신자들이 돈을 내길 거부하거나 지불한 액수가 적다 싶으면 예배를 집행하지 않았다. 민중은 이에 신물이 나서 교회에 가려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조지아 총대주교는 아니 성직자들과 아르메니아 신자들간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했다. 총대주교는 아니 교회를 엄중히 질책하고 주교들의 봉급을 3분의 1로 삭감했다. 그러나 주교들은 여전히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사회 분위기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루수단은 갈수록 나빠지는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223년 룸 술탄국 에르주룸의 독립 통치자 투그릴 샤의 아들 기아스 앗 딘과 결혼했다.[1] 조지아 문헌에 따르면, 기아스 앗 딘은 루수단과 결혼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녀가 보낸 의복을 입고 십자가가 있는 깃발을 들어올렸다고 한다.
1225년, 호라즘 왕조 최후의 군주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몽골군을 피해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했다. 이란 북부의 타브리즈를 본거지로 삼고 호라즘 왕조의 잔여 병력을 규합한 그는 그녀에게 위협적인 편지를 보내 복종을 요구했다. 조지아 측이 단호히 거부하자, 그는 곧바로 출격하여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 드빈을 공격했다. 조지아군이 급히 출동하여 가르니스 고지에 자리잡자, 그는 그곳 평원에 진을 친 뒤 적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조지아 사령관 이바네 아크할치헬리는 전사했고 형제 사리바는 생포되었다. 그 후 잘랄 웃 딘은 드빈을 철저하게 약탈한 뒤 반란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던 아제르바이잔으로 귀환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1226년 3월, 잘랄 웃 딘은 조지아 동부 지역인 트빌리시를 공략해 철저하게 약탈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그녀는 서부 조지아로 도망쳐 쿠타이시에서 할거했지만, 남편 기아스 앗 딘은 잘랄 웃 딘에게 귀순하고 이슬람교를 다시 받아들였다. 루수단이 아직 트빌리시에서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시니 요새를 넘겨주고 공물을 바칠 테니 더 이상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얼마 후 이란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나자, 잘랄 웃 딘은 조지아를 떠나 이란으로 이동했다.
1226년 9월 잘랄 웃 딘은 반란을 진압한 후 조지아로 돌아와 전쟁을 재개했지만 카리와 아니스 함락에 실패했다. 이후 잘랄 웃 딘이 흐라트로 이동하고 트빌리시에 소규모 병력만 배치하자, 조지아군이 즉시 반격에 착수하여 트빌리시를 탈환했다. 그러나 1227년 잘랄 웃 딘이 트빌리시로 돌아오자, 조지아인들은 트빌리시 전역을 불태우고 다시 후퇴했다. 이후 잘랄 웃 딘의 과도한 공물 요구에 지친 우미, 샤하르멘 및 샴의 에미르들은 조지아와 연합하여 잘랄 웃 딘을 물리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잘랄 웃 딘은 1228년 조지아를 침공하여 볼니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격파하고 1229년 흐라트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1230년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피해 쿠르드족의 영역으로 후퇴했다가 바시안 산에서 쿠르드족에게 살해당했다.
1230년 쿠타이시에 여전히 머물고 있던 루수단은 수도 트빌리시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몽골군이 조지아로 쳐들어왔다. 잘랄 웃 딘의 연이은 공세로 파탄 지경에 처해있던 조지아군은 몽골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235년 몽골군은 간자를 점령하고 잔혹하게 학살한 뒤 샴코르로 진군해 역시 함락시키고 철저하게 약탈했다. 루수단은 다시 쿠타이시로 달아나면서 트빌리시를 불태우게 했다. 몽골군은 로르, 아니, 뒤마니스, 삼슈빌데를 점령한 후 조지아 영내로 깊숙히 쳐들어가 각지의 요새를 파괴했다. 그 결과 동부 조지아 일대가 몽골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다만 몽골군은 서부 조지아 일대를 공격하려고 리크 산맥을 넘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1239년,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몽골군의 만행을 설명하며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일에 찬성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은 교회를 재결합시키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을 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몽골 제국과 협상하기로 했다. 1242년, 그녀는 신하 아센을 바투 칸에게 보내 협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조지아 동부만 주둔하고 조지아 서부는 그녀가 통치하도록 내버려뒀다. 그 대신, 그녀는 매년 50,000골드의 공물을 바치고 조지아군을 몽골의 보조병으로 보내야 했다.
한편, 그녀는 기오르기 4세의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 7세가 왕위를 갈망할 것을 두려워해 사위인 술탄 케이휘스레브 2세의 궁정에 그를 보내 억류하게 하고, 자신의 아들 다비트 나린을 몽골 궁정으로 보내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게 했다. 그러나 아들이 돌아오지 않던 1245년 사망했고, 귀족들은 다비트 나린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죽은 게 틀림없다고 여기고 다비트 7세를 조지아로 불러들여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녀는 기아스 앗 딘과의 사이에서 아들 다비트 나린과 딸 구르주 카툰을 낳았다. 아들 다비트 나린은 몽골 군영에서 돌아온 뒤 다비트 7세와 공동 왕이 되었다가 몽골 제국과 항쟁을 벌였다. 그리고 구르주 카툰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룸 술탄국 술탄 케이휘스레브 2세와 결혼했다가 케이휘스레브 2세 사후에 아나톨리아의 대귀족 무인 알딘 술레이만 파르와나와 재혼했다.
3. 기타
-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연대를 맞추면 루수단 재위기간에 맞춰 플레이할 수 있다. Holy Fury DLC가 있다면 기야스 앗딘과 모계결혼한 상태라 루수단의 자녀들은 바그라티오니+셀주크 혈통을 갖고 있다. 양대 몽골 세력인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의 초기 병력이 수만 명이라서, 그 병력들이 소진되기 전까지는 몸 사리면서 플레이해야 한다.
-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타마르 캠페인이 루수단 시점에서 과거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1] 룸 술탄의 아들은 아니고 술탄 친척의 아들이다. 실제 유럽 기록에서도 기아스 앗 딘을 셀주크의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기아스 앗딘의 아버지인 투그릴 샤가 룸 술탄국의 12대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아들이라 기아스 앗 딘도 룸 술탄국의 왕족이긴 하지만 투그릴 샤는 룸 술탄국의 술탄에 오른 적은 없다. 아마도 클르츠 아르슬란 2세 사후 그의 아들이 분할 통치도 하고 있고, 이 시기 투그릴 샤가 통치하는 소왕국에 가까운 에르주룸이 룸 술탄국으로 분류되다 보니 룸 술탄국 에르주룸의 샤(왕)인 그의 아들 기아스 앗 딘도 룸 술탄국의 술탄 아들로 오해되었거나 혹은 과장 선전을 위해 왕자로 알린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