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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11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4세 | ||
제호 | 한국어 | 기오르기 4세 |
조지아어 | გიორგი | |
라틴어 | George IV | |
본명 | 라사 기오르기(ლაშა გიორგი) | |
가족 | 다비트 소슬란(아버지) 타마르(어머니) 루수단(누이) 다비트 7세(아들) | |
생몰 년도 | 1194년 ~ 1223년 1월 18일 | |
재위 기간 | 1213년 1월 18일 ~ 1223년 1월 18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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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 11대 군주. 조지아의 황금시대를 이어가는 듯했으나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2. 생애
알라니아의 왕자이자 바그라티온 왕조 방계인 다비트 소슬란과 조지아 왕국 10대 여왕 타마르의 아들이다. 누이로 루수단이 있었다. 이름인 라사(ლაშა)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란 뜻이다. 그는 1207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13세의 나이에 어머니에 의해 공동 통치자로 선임되었다. 1213년 1월 18일 어머니가 사망한 뒤 단독 군주로 등극했다.1214년 간자의 에미르가 조공을 바치길 거부하자, 즉시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고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1220년 호노리오 3세로부터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중동의 이슬람 세력을 후방에서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해달라는 서신을 받았다. 그는 이에 열광적으로 호응하여 군대를 준비했다.
그런데 얼마 후 몽골 제국의 전위부대가 조지아 왕국의 국경지대에 나타났다. 이들의 첫번째 공격은 조지아 국경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몽골군이 재차 쳐들어오자, 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들에 맞서 싸웠다. 1223년 1월 사기미 전투에서 조지아군이 참패했고, 그는 전투 중에 중상을 입었다. 이후 수도로 후송된 그는 누이 루수단과 가신인 시르반샤의 결혼을 협상했지만, 얼마 안가 사망했다. 사후 젤라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평민 출신의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그녀로부터 다비트 7세를 낳았다. 그러나 귀족들과 교회는 평민을 왕비로 들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결사 반대했다. 결국 그는 그녀와 이혼했지만 죽을 때까지 다른 여인을 왕비로 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비트 7세는 사생아로 낙인찍혀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고, 누이 루수단이 새 여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다비트 7세는 훗날 루수단의 아들 다비트 6세가 사망했다고 믿은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