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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6 16:48:06

몽골-서하 전쟁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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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차 서하 침공(1205)3. 2차 서하 침공(1207)4. 3차 서하 침공(1209~1210)5. 출병 거부와 4차 서하 침공(1217~1218)6. 5차 서하 침공(1224)과 6차 서하 침공(1225~1227)7. 멸망과 학살

1. 개요

몽골 제국과의 서하 간의 전쟁이다.

2. 1차 서하 침공(1205)

칭기즈 칸이 아직 테무진이던 시절, 자무카가 머물던 동나이만족을 추적하다가 겸사겸사 서하도 침공하게 된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침공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돌아갔지만 약탈품의 수준이 기존의 유목민들을 약탈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꿀단지 발견)

이때 테무진은 장예시를 약탈하는 동안, 한 성주의 아들을 납치하게 된다. 이 소년의 이름은 차간, 그는 몽골군에 입대해 많은 공을 쌓고 친위대까지 입성하며 칭기즈 칸은 그를 양자로 들인다.[1]

3. 2차 서하 침공(1207)

1206년 칭기즈 칸은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몽골 제국의 카간으로 등극한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을 건국한 이후 첫 번째 정책으로 금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는데 당시 금나라는 동아시아 최강국이었으며 또한 여러 요새로 방비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목 국가인 몽골 제국으로써는 금나라의 성곽과 요새를 무너뜨릴만한 군사력은 아직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칭기즈 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몽골 제국군의 공성 능력을 키우기 위해 금나라 서쪽에 있던 국가인 서하를 눈여겨 봤다. 또한 금나라와 서하는 동맹 관계였기 때문에 배후 안정을 위해서라도 서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칭기즈 칸은 서하 원정을 개시한다.

4. 3차 서하 침공(1209~1210)

1209년 봄, 칭기즈 칸은 이번엔 확실히 멸망시킬 각오로 군대를 이끌고 서하를 침공한다. 서하의 왕 양종(서하)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위소왕은 거절한다.

징기스칸은 우라하이 외곽에서 고량휘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한 후 도시를 점령하고 황하를 따라 진군하여 여러 도시를 함락시킨다. 허란 산맥을 넘어 수도 흥경(현 인촨)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지키는 기문 요새에 도달했다. 최대 7만명의 군대와 5만명의 지원군을 보유한 이 요새는 함락하기 너무 어려웠고, 2개월간의 대치 끝에 몽골군은 거짓후퇴를 통해 웨이밍 링공이 이끄는 수비대를 전장으로 유인해 몽골군의 장점이었던 평지에서 박살낸다.

1209년 5월, 칭기즈 칸서하의 수도 흥경에 도달한다. 흥경의 수비병력은 15만에 달했는데, 유목민족이었던 칭기즈 칸의 군대에게 이는 첫 번째 대규모 공성전이었다. 같은해 10월, 칭기즈 칸은 5개월이 넘도록 여름내내 흥경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이때 칭기즈 칸은 꾀를 써 폭우가 내리자 댐을 쌓아 황하를 이용해 흥경을 침수시키려고 했다.

1210년 1월, 실제로 흥경의 성벽이 거의 다 무너져 내렸으나 허술하게 지어진 댐이 터져 오히려 몽골군 진영이 침수당한다.(?) 칭기즈 칸은 서하의 평화협상 제안을 받아들인다.
"칭기즈 칸의 오른팔이 되겠다."
1210년, 양종(서하), 몽골-서하 조약에서
이 항복 조약에 따라 양종은 많은 양의 공물과 함께 황녀 차카를 몽골로 보냈다. 그리고 서하는 앞으로 있을 몽골의 전쟁에 병사들을 출병시키겠다는 제안도 받아들여야했다.

5. 출병 거부와 4차 서하 침공(1217~1218)

1210년 쯤, 이준욱은 당시 황제였던 숙부 양종이 금나라에 대해 강경한 외교정책을 펼치고, 몽골 제국에게는 패배하여 복속당한 뒤 황녀[2]와 공물을 넘긴 것에 대하여 큰 불만을 갖고, 황제에게 언성을 몇 차례 높였다.

결국 1211년, 쿠데타를 일으켜 금나라와의 전쟁을 도모하고 있었던 양종을 폐위시키고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양종은 폐위된지 한 달 만에 죽었다.

1214년, 몽골은 몽골-금 전쟁을 위해 서하에게서 많은 병사들을 출병시킨다.

1216년, 중앙 아시아 원정에 앞서 몽골은 서하에게 또 병력 제공을 요구했으나 신종은 견디다 못해 출병을 거절한다. 신종은 몽골과 서하의 굴욕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했다.

그러자 몽골은 1217년 군사를 일으켜 서하를 공격했다(제4차 몽골의 서하 침공).

1218년 1월, 신종은 포위된 중흥부를 빠져나와 서량으로 도주했다. 이에 몽골군이 회군했다.

1218년, 서하는 몽골-호라즘 전쟁을 위한 병력 차출을 거부한다. 이것에 대해 서하가 몽골이 호라즘 제국의 싸움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 10년 동안의 병력 차출이 서하를 피폐하게 만들었거라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그러나 마땅한 대안이 없는 마당에서 이런 선택은 모 아니면 도에 가까웠다.
"힘이 없다면 칸이 될 자격도 없다."
1218년, 서하의 재상 야사 감푸, 출병하라는 칭기즈 칸의 제안을 거부하며
"우리한테 계속 도움을 요청하는 걸보니 힘이 없는 모양인데, 그러면 칸이 될 자격도 없는거 아니냐?" 라는 뜻으로 출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말이었다. 당연히 칭기즈 칸은 이를 모욕으로 여기고 격노했다. 칭기즈 칸'너 이따 보자'를 시전하고 일단 몽골-호라즘 전쟁을 치루기 위해 원정을 떠난다.

6. 5차 서하 침공(1224)과 6차 서하 침공(1225~1227)

1223년, 신종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물러나면서 제위를 둘째 아들 이덕왕(李德旺)에게 물려주었는데 그가 바로 헌종이었다.

서하는 전임 황제인 양종과 신종의 현명하지 못한 국정으로 인하여 멸망 일보 직전에 처했고, 새로운 황제인 헌종의 즉위로 서하가 망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헌종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칭기즈 칸이 서정(西征)한 틈을 노려서 몽골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사전에 정보가 몽골군에 새어나가, 1224년 몽골군에 의해 수도 중흥부[3]가 포위되자, 몽골에 투항하고 인질을 보내는 조건으로 멸망을 면했다(제5차 몽골의 서하 침공).

서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몽골-호라즘 전쟁을 치루기 위해 이란에 있던 칭기즈 칸에게까지 전달되었고, 칭기즈 칸은 서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급히 회군한다.

1225년, 서하는 이란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힘이 있는 칭기즈 칸에게 서정에 참여하지 않은 것과 칭기즈 칸을 모욕한 것을 자책하며 평화협상을 제안한다. 칭기즈 칸은 무시한다.

1226년 봄, 칭기즈 칸은 1년간의 휴식 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만명의 대군을 일으켜 친정에 나섰다. 칭기즈 칸 입장에서는 출병을 한 번 거부한 것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중요한 전쟁 전에 거부했고 동맹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에 본보기로 직접 처단해야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1226년 3월에 가장 먼저 함락된 도시는 카라 호토 였으며, 수비대와 주민들이 모두 죽었다. 카라 호토는 몽골어로 '검은 도시'라는 뜻인데, 흑하 옆의 성이라는 뜻에서 흑수성(黑水城)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은 서하의 대도시 중에 하나였는데 현대에도 고고학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카라 호토를 점령한 몽골군은 계속 남하했고 그로 부터 300km 정도 남쪽에서 군대를 나눠 수부타이가 이끄는 부대는 서쪽으로 진군하고 칭기즈 칸이 이끄는 본대는 중흥부가 있는 동쪽으로 진군한다.

여름엔 대도시였던 수저우가 함락되어 인구가 모두 학살되고, 단지 106가구만이 살아남았다. 몽골군은 수저우에서 서하의 중심지인 간저우로 이동했고, 간저우 역시 빨리 함락된다. 이례적으로 저항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살아남았는데 수비대의 지휘관은 주예 첼루이였고, 그 아들은 21년전에 포로로 잡혀 몽골군에 입대했던 차간이었다. 이제 차간은 칭기스 칸의 양자였으며, 대칸의 친두령이었다. 그래서 도시를 점령한 후, 차간은 일반 주민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칭기스 칸은 도시 방어를 지휘했던 사람 36명만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1226년 여름의 가뭄으로 인구가 몰살되었고, 헌종의 죽음으로 국가 통치에 혼란이 초래되었으며, 도시와 군들은 몽골족에게 차례차례 함락되었다. 양저우시는 사령관 와자저에게 전투 한 번 없이 항복했다.

1226년 11월, 몽골군이 황하 기슭의 링우시를 포위했는데, 이곳에서 웨이밍 링궁이 지휘하는 서하 군대가 포위를 풀기 위해 몽골군을 요격했다. 이때 마침 수부타이는 서하의 서쪽 지방을 박살내고 칭기즈 칸 본대에 합류했다.

11월 23일, 위명 링궁이 지휘하던 서하군은 30만 이상이었음에도 패배, 궤멸당했다. 이제 몽골군은 수도 중흥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226년 12월, 몽골군은 중흥을 포위한다. 이 포위전은 1년간 지속된다.

당시 서하의 황제는 말제 이현이었고, 재상은 야사감푸였다. 서하군은 나름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식량이 떨어지고, 피해가 커지자 1227년 6월, 말제 이현이 항복을 청했고, 1개월 간의 유예를 달라고 말했다.

이때 야사감푸는 칭기즈 칸의 앞에 끌려오자 목숨을 구걸했으나 칭기즈 칸에 대해 모욕을 한 적이 있어 용서받지 못했다. 결국 야사감푸는 처형되었다. 이때 야사감푸는 죽는 순간까지 칭기즈 칸에게 소인배라고 욕했으나 칭기즈 칸은 웃으면서 무시했다. 죽음이 임박했던 칭기즈 칸은 계략을 부려 서하의 투항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서하 황제가 출성하면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7. 멸망과 학살

이후 서하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진행되었다. 다만 임시 대칸에 오른 툴루이는 서하인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즉위한 오고타이는 칭기즈 칸의 유언을 착실히 따랐고, 인류 최초의 인종 청소가 감행되었다. 몽골이 서하를 침략하기 전 인구는 약 300만명이었지만, 침략 후에 인구는 약 20만명이었다고 한다.

중국 국영 CCTV 보도에 의하면, 몽골군은 서하 사람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 유전자를 가진 서하인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4]

서하인이 대량 학살당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적지 않은 서하인들이 몽골 제국에 흡수되었다. 서하의 요새들 중 하나가 카라호토(ᠬᠠᠷᠠ ᠬᠣᠲᠠ)였는데 몽골어 이름이었으며, 탕구트어로는 '검은 강'을 뜻하는 zjɨ̱r²-nja̱¹였고, 한자로는 흑성(黑城) 혹은 흑수성(黑水城)이었다. 이 요새는 몽골이 교역상의 이유로 보존한 덕분에 서하인들은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서하 출신 장수 차간(察罕, ?~1255)은 몽골군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하기도 했다.

살아남은 서하인의 후손들 중 일부는 중국 동부의 안후이 성 근처에서 살다가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 한족에 흡수되어 소멸했다. 명나라 중기인 16세기 초까지 서하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가던 서하인들은 1372년 명태조 주원장의 지시로 카라호토를 침공한 풍승(馮勝)의 명군에 의해 멸망했다.


[1] Man, John (2004). 징기스칸: 삶, 죽음, 그리고 부활 . 뉴욕: St. Martin's Press . ISBN 9780312366247[2] 몽골로 끌려간 양종의 딸인 황녀는 신종과는 사촌남매 지간이었다.[3] 은천(銀川)[4] 中国人种迁徙解密:DNA检测下已无纯种汉族人 --중국중앙방송, 2007年02月14日 http://discovery.cctv.com/20070214/100813.shtml Archived:https://web.archive.org/web/20080305015430/http://discovery.cctv.com/20070214/100813.shtml 2008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