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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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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7위8위9위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버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17위18위19위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22위23위24위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27위28위29위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32위33위34위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37위38위39위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42위43위44위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47위48위49위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헤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52위53위54위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67위68위69위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72위73위74위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77위78위79위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82위83위84위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87위88위89위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92위93위94위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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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파일:1280px-Goethe_(Stieler_1828).jpg
출생 1749년 8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프랑크푸르트
사망 1832년 3월 22일 (향년 82세)
독일 연방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바이마르
국적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1749~1806
파일:external/vignette3.wikia.nocookie.net/Flag_of_the_Confederation_of_the_Rhine.png 라인 동맹1806~1813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독일 연방(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1813~1832
직업 작가, 연극감독, 철학자, 도서관장, 정치인[1]
모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신장 169cm[2]
배우자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1806년~1816년, 사별)
자녀 아들 아우구스트 폰 괴테(1789년~1830년)[3]
종교 개신교(루터회) → 무종교(범신론)
서명 파일: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문학으로의 입문2.3. 괴테의 여인들2.4. 다재다능2.5. 말년2.6. 괴테와 격동의 시대
3. 명언4. 여담5. 작품
5.1. 소설5.2. 희곡5.3. 시5.4. 여행기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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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문학가이자 연극감독, 도서관장, 철학자이다. 한때는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었다. 근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인이자, 같은 문인들에게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미겔 데 세르반테스에 버금가는 문학의 신화로 여겨진다. 살아있을 당시는 물론 현대에까지 독문학을 넘어 서양 문학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유년기

아버지 요한 카스파어 괴테(Johann Caspar Goethe) (1710년 ~ 1781년)는 평민 출신이지만 꽤 규모가 큰 세탁업 공장을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을 받아서 왕실고문관(추밀고문관)까지 올라 평민층으로서는 엄청난 출세를 거둔 사람이었다. 어머니인 카타리 엘리자베트 텍스토어(Catharina Elisabeth Textor) (1731년 ~ 1808년)도 평민층이지만 고향 프랑크푸르트시장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Johann Wolfgang Textor) (1693년 ~ 1771년)의 딸이라서 어린 괴테도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고 덕분에 고등 교육도 마음껏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 때 나이가 18살이었고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21살이었다.

괴테는 출산 당시 난산이었고 산파가 조치를 제때 하지 못해 무호흡 상태에까지 빠졌었다가 인공호흡을 통해 살아났다고 전해진다. 괴테가 태어난 이후 출생한 두 남동생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어버렸고 그 두 사건이 어린 괴테를 한때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는 무사히 잘 자라서 어린 괴테가 무척 귀여워해 줬고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여섯 형제자매 중 성인으로 자란 것은 괴테와 여동생 코르넬리아 뿐이었다. 하지만, 코르넬리아조차 1777년 둘째 아이를 낳고 후유증으로 고작 스물여섯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4]

괴테는 늘그막에 회고하길 "아버진 존경하지만 너무나도 엄격하고 까다로운 면이 많아 어린 나에겐 언제나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그래도 아버진 책임감이 강하고 약속을 꼭 지키던 분이라 정말 멋진 분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적으로 너무나도 훌륭하시고 나에게 자상함을 일깨워주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5]

그리고 아버지는 문학에 대하여 무척 흥미를 가져서 아들인 요한이 글을 잘 썼으면 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어릴적에 요한은 무척 글쓰기에 흥미를 보여 작문 학교에서 교사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고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며 그때마다 용돈을 푸짐하게 주며 칭찬해줬다.

2.2. 문학으로의 입문

이런 풍족함 속에서 아버지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부족함 없는 교육을 받게해줬다. 괴테는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교육받았으며 뿐만 아니라 성서히브리어, 이디시어 등도 교육받았다. 아버지가 구비해주신 수많은 장서와 언어 교육 그리고 괴테의 호기심은 그가 문인으로 성장하는 촉발제가 되었다. 괴테의 문학적 정신과 문인으로서의 사상은 7년 전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괴테의 외할아버지는 구(舊)세계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에 의한 질서를 옹호했지만 아버지는 프로이센에 의한 신흥 질서를 지지했다. 이런 대립은 어린 괴테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7년 전쟁 와중에 프랑스군이 독일 북부에 진군했을 때, 괴테의 집에 프랑스군 점령군 사령관인 토랑 백작이 머문 적이 있다. 아버지는 무척 그를 싫어했지만, 10살 무렵의 괴테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고 어머니와 같이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프랑스군 사령관인 백작을 극진히 대접해 친하게 지냈고 백작은 이런 대접에 고마워하며 어린 괴테에게 독일어를 잘하는 프랑스군 부하장교를 시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해줬다. 토랑 백작은 미술과 연극 애호가이기도 해서 프랑크푸르트 시에서는 프랑스 미술과 연극 등 프랑스의 문화를 눈으로 볼 기회가 매일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토랑 백작은 프랑스에 유학 온 괴테를 반갑게 맞이하여 머물 숙소를 알선해주었고 괴테가 유럽에서 이름을 떨칠 때도 서로 편지도 보내고 친근한 사이로 지내게 된다.

프랑스군이 물러간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거행된 요제프 2세의 대관식은 귀족 사회에 대한 괴테의 시각을 확장시켰다. 괴테는 아버지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입학하여 법률학을 배웠다. 라이프치히 생활 동안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와 다르게 보다 선진적이고 인구도 많았던 그 도시에서 계몽주의적 사상을 피부로 느낀다. 괴테는 22살 때,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도 2년 동안 머물면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이 인연으로 지금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는 괴테의 길이라는 길과 괴테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법학보단 글 쓰길 좋아하던 괴테는 24살 때, 희곡《괴츠 폰 베를리힝엔》을 쓰며 문학에 발을 내민다.

그리고 1년 후인 1774년 25살 때,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다. 발표 직후 괴테는 유럽에 유명세를 떨치는데 심지어는 나중에 "나를 언제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로만 기억한다."고 불만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그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필생의 대작이자 세계 문학 사상 최대 걸작 중 하나인《파우스트[6]도《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기만은 못 따라갈 정도였다. 30대 후반에 방문한 이탈리아에서도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작가로 유명했으며 실제로 본인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괴테에게 열변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그 커다란 유명세와는 반대로 괴테는 작품 자체로는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출판 계약 당시 출판사는 별볼일 없는 신인 작가일 뿐인 괴테에게 인세를 조금 내줬고 유럽 곳곳에서는 무단으로 출판되는 사본이 마구잡이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의 계기가 된 것은 맞고 이 소설을 보고 감탄한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가 그를 초청해 공무원으로 고용했다.[7] 공무원으로 3년동안 지내면서 바이마르 궁정 내의 공무원 중 최고 수준으로 돈을 두둑히 받았지만, 공무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와 권태 그리고 문인으로서 정체된 상황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괴테는 과거부터 이탈리아에 품어 왔던 동경과 문인으로서의 침체 상태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어울려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결정했다.[8]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작은 물론 주변 친우들에게까지 이탈리아 여행을 숨긴 채, 저작 활동을 위한 유급 휴가를 미리 신청해놓았다가 공작과 친우들과 함께 간 칼스바트[9] 휴가 도중 몰래 새벽녘에 여행을 떠난다. 공작은 괴테가 신청한 기일이 없는 유급 휴가와 그의 저작 완성이 수개월 내에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공무 업무에 싫증을 느낀 것과 문학에 대한 집념을 이해한 공작은 이탈리아에서의 여행과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를 후원했다. 이때 괴테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여행이 시작하고 얼마 후에는 바이마르의 친우들과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고 출판을 위한 원고도 발송하며 활발한 저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아우구스트 공작은 괴테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전처럼 친구로 여겨 늘그막까지 매우 친하게 지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문학적 성장을 이루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이는 문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괴테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괴테가 문학 외의 철학과 식물학, 미술 등등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도 공작의 재정적 지원이 있어 그가 생활적으로 여유를 가진 덕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널리 이름을 알린 작가였는데 그쯤에는 유명세가 이탈리아에도 파다하게 퍼져 정체를 숨기고 가명까지 사용한 여행에서도 그의 방문이 소문나 여러 예술가와 위정자의 관심을 끌었다.

독일 본국에 있을 때에도 그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며 만남을 청하는 예비 작가들의 산더미 같은 편지를 받았고 실제로도 많은 문인과 만났다.《빌헬름 텔》,《군도》로 유명한 극작가 프리드리히 폰 실러도 그에게 작품을 보이면서 주목을 받아 괴테의 도움으로 극작가로 대박난 경우이다.[10] 이외에도 슐레겔, 노발리스 등이 그의 집을 찾았다.

2.3. 괴테의 여인들

이렇게 곱게 펼쳐진 인생에서 괴테는 무수한 여자와 사귀면서 사랑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오죽하면 괴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괴테와 사귀었던 여자들도 같이 연구해야지 괴테를 알 수 있다고 할 정도이다. 괴테는 연애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생명력과 감성을 습득했으며 이는 죽는 그 날까지 마르지 않는 위대한 시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괴테가 만난 수많은 여인들은 종종 괴테가 새로운 분야의 눈을 뜨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괴테는 자신의 연인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대표자가 파우스트의 그레트헨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샤를롯테 부프 (1753년 ~ 1828년)이다. 그레트헨은 괴테가 십대 때 첫 눈에 반한 첫사랑의 대상이었고[11], 샤를롯테는 괴테의 친구의 아내였다.[12]

사귀던 여자들과의 나이 차도 폭 넓어서 19살에는 어머니의 친구이자 26살이나 연상인 주잔네 폰 클레텐베르크 (1723년 ~ 1774년)란 여자와 사귀었고 그보다 훨씬 뒤인 74살에는 55살 연하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 (1804년 ~ 1899년)에게 청혼하기까지 한다.[13] 첫 결혼은 16살 연하인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 (1765년 ~ 1816년)와 했으며 그녀에게서 아들인 아우구스트 폰 괴테 (1789년 ~ 1830년)를 얻었다. 그런데 괴테는 크리스티아네와 동거한 지 18년이나 지난 1806년에서야 혼인했고 결혼 9년만에 크리스티아네는 병사했다. 크리스티아네는 평민이어서 주변에서는 괴테의 사실혼을 말렸으며 괴테와 크리스티아네의 관계를 곱게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크리스티아네는 사교적으로 활발한 인물도 아니었고 식자층의 교양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친하게 지내던 샤를로테 슈타인[14]과의 관계는 이 일로 인해 잠시 껄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아네는 괴테가 가진 작가로서의 자유분방함과 감수성을 이해했고 그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해 여러 시문학을 남기게 했다.

아내 사후에도 여러 여자와 사귀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울리케 폰 레베초프라는 여성이었다. 울리케는 괴테를 만날 당시 17세였다. 사랑을 처음 느꼈을 때 괴테는 이젠 늙은이가 된 스스로를 타이르며 나무랐지만 내내 사랑을 앓다가 2년 뒤인 1823년에는 울리케에게 청혼을 하고 만다. 이런 청혼에 친구이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은 배를 다 잡고 웃으면서 "일흔 넷에 19살 여자를 사랑하다니 이건 심하다고!"라면서 놀려댔다. 하지만 괴테의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괴테는 의사까지 찾아가[15] 이 나이에 혼인을 할 수 있냐는 진단까지 받았고 의사는 매우 건강하니 걱정할 것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괴테를 놀리던 공작 아우구스트도 괴테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괴테의 부탁을 승낙하여 레베초프 부인을 찾아가 괴테를 소개하고 괴테가 부인의 딸을 좋아한다고 뜻을 전한다. 그러자 울리케의 어머니인 레베초프 부인는 "괴테 씨야 너무나도 유명하고 그런 분이 우리 집안과 한 집안이 되는 건 나쁘진 않지만 아무래도..."라는 식으로 곤란하단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울리케가 괴테에게 보낸 시선은 연인에 대한 성애라기보다는 이름 높고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 섞인 애정에 가까웠고[16] 괴테의 아들인 아우구스트 또한 결혼을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혼인은 이뤄지지 못했다.[17] 그래도 괴테는 이 사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 나는 사랑을 하고 그리하여 사랑받으면서 행복했노라."
"Hier war ich glücklich, liebend und geliebt."

2.4. 다재다능

문학가로서도 명성이 높지만 이 외에 여행기도 쓰고 연극 감독으로서 궁정 무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특히, 연극 무대 경영·연출·배우 교육에도 재능이 상당해서 자신의 희극들을 유감 없이 연극으로 잘 묘사하여 연극으로도 상당한 대박을 거둬들였다. 오죽하면 그의 연극 연출, 경영, 교육을 두고 다른 연극인들이 "이 분야로도 한 우물을 파도 될텐데..."라는 말까지 했다.

거기에 식물학에도 관심이 깊어서 전문가급의 연구를 했으며 과학자들을 후원하고 식물학에 대한 책도 집필했다. 이 책에서 밝힌 대표적인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은 잎이 변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저서는 식물학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식물학자인 베르너 라이히트아젠이란 사람이 괴테에게 "식물학자로 연구하셔도 되겠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괴테씨의 열정과 지식을 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라는 편지까지 썼다. 실제로 괴테의 과학적 업적은 당대 생물학자 중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의외로 치의학해부학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괴테는 치아가 잇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치아의 뿌리가 되는 뼈대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 끝에 간악골(앞니뼈)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어권 학계에서는 이 뼈 부위를 지칭할 때 종종 Goethe's bone이라고도 부른다. 괴테의 발견 전까지는 간악골이 동물에게만 있고 인간에게서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창조론의 과학적 근거로 쓰이기도 했었다. 인간의 간악골은 유아기의 성장 과정에서 턱뼈와 합쳐지기 때문에 발견이 어려웠던 것이다. 괴테는 인간이 척추동물이고 앞니가 있는데 간악골은 없을 리가 없다고 자부했고 태아의 두개골을 연구하다 마침내 간악골을 발견했다. 괴테의 간악골 발견은 당대 유럽 학계에 피어나던 진화론의 사상적 근거에도 영향을 끼친 셈이다.

다만 여러 재능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로서의 감각은 영 아니었다. 왜냐하면 괴테 본인이 물리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물리학은 아이작 뉴턴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반면, 괴테는 독일의 낭만주의자로서 뉴턴과 대척점에 서있었다. 괴테는 자연을 나누어 수량화하는 뉴턴 역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자연은 연속적인 것이라는 유기적 우주관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극과 극 간의 조화로 설명하는 자신만의 자연철학까지 시도했었다.[18] 심지어 괴테는 광학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 뿐이라는 허풍까지 늘어놓았다. 당연히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승자는 뉴턴이다. 그런데 괴테가 뉴턴의 학설을 논파하려는 과정에서 빛, 그림자, 색을 탐구하며 집필한 색채론은 훗날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술사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술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괴테는 회화 속에서의 색 표현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러한 점이 색채론의 토대에 반영이 된 것이다.[19] 이 색채론은 훗날 하이젠베르크의 논문《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괴테와 뉴턴의 색채론》[20]에 의해서 재조명되기도 한다.[21]

더불어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재상으로 재직할 당시 정치인으로서 재능이 상당함을 보여줬다. 바이마르 시의 토목 공사를 계획하고 직접 지휘하기도 했으며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물자 비축 및 비상 체제로 들어가 자신이 재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했다. 발미 전투[22]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이자 프로이센 왕국군의 원수였던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1735년 ~ 1806년)의 참모로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다만 전쟁의 결과에서 나타나듯이 괴테에게 군인이나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없었다. 심지어 주위에서 "참모라고 쓰고 기록 서기관이라고 읽는다."라는 조롱까지 했다.

그러나 괴테는 글을 잘 쓰는 재능으로 당시 참전 기록에 대하여 세세한 묘사를 했다. 사실 공작부터가 군인으로 유능한 데다 그의 곁에는 이미 화려한 참모진이 있었기에 굳이 괴테가 참모로서 책임을 다 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발미 전투 당시 프랑스와 프로이센 모두 전투 결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괴테는 "오늘 이곳, 이 날부터 세계 역사의 새 시대가 열린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자신이 그 탄생의 순간이 있었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이 발미 전투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중요한 분수령 중 하나가 되었다.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관장을 맡은 적이 있다.

또 그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평생 동안 그림 작품이 1000점이 넘을 정도로 예술에 있어서도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2.5. 말년

괴테는 만 82세까지 장수했지만 아들과 아내 모두를 먼저 여의었기에 이를 늘 서글퍼했다.[23] 10살 밑이던 후배 실러와도 친구처럼 지냈는데 1805년 실러도 만 45살 한창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실러는 귀족이 된지 3년이 채 안되어 이제 좀 잘살게되면서 글도 본격적으로 더 쓰고자 하는 한창때에 갑자기 가버린 셈인데, 이 때의 일화로 1805년 새해 연하장을 실러에게 쓰던 괴테는 실수로 새로운 해를 마지막 해라고 잘못 써서 기겁하고 다시 연하장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괴테는 뭔가 느낌이 안 좋다며 실러를 걱정했고 예상대로 실러는 그 해에 사망했다. 괴테는 실러가 죽었단 소식을 듣고 '그래?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았어'라고 말하곤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 하루종일 작게 울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겨울을 싫어했던 괴테는 봄이 채 오기 전에 바깥 나들이를 떠난다. 그러나 날은 아직 추웠고 노쇠할대로 노쇠한 괴테의 몸은 차가운 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괴테는 독한 감기에 걸렸다. 담당 의사는 괴테의 사인을 폐렴과 심부전이라고 기록했다. 괴테의 임종 당시 그의 곁을 지킨 식구는 과부가 된 며느리 옷틸리에 폰 괴테 (1796년 ~ 1872년), 손자인 베르터 폰 괴테 (1818년 ~ 1885년)와 프라이헤르 폰 괴테 (1820년 ~ 1883년), 손녀인 알마 폰 괴테 (1827년 ~ 1844년) 이렇게 4명이었다. 괴테는 며느리에게 잘 대해주었으며 당연히 재산을 그녀에게 모두 물려주었다. 살아있을 때에 이미 부와 명예, 모든 것을 누렸기에 괴테의 80살 생일 때는 고향 마을에서 그날을 경축일로 기리며 잔치를 열었을 정도였다. 괴테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를 만나러 온 여러 유명인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며느리의 손을 잡으면서 이제 마음껏 살라는 말을 한 다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좀 더 빛을… 조금 더 빛을…"[24]

또는 하인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전해다오… 빛이 더 들어오게…."라고 번역한 것도 있다. 사실은 "오줌이 마려우니. 요강 좀 가져와라."는 게 유언이란 주장도 있다. 괴테의 임종을 지켰던 하인 하프리드리히 크라우제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괴테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요강을 끌어안고 죽었다고 한다.

더불어 괴테는 침대에 누워 죽었다고 알려졌는데,[25]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괴테는 침대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유언을 남겼고, 침대로 모시려는 가족들에게 그 자리에서 잠들게 해달라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

괴테의 행적을 증명하는 수많은 물건들이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다.[26] 평생을 쓰던 많은 펜이니 책상이니 무수한 흔적은 200년이 되어간 지금도 엄청 많이 남아있으며 심지어 어릴적 편지에서 어릴적 작문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라든지 일기장 등 무수한 유품들이 넘쳐나서 지금까지도 괴테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할 정도로 많은 유품들이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덕분에 온라인에서 확인되는 이야기 상당수는 잘못 와전된 것이 아니라면, 사실로 증명된 이야기들이다.

이렇듯 일생을 위대한 인물로 살아왔고 개인 소장품까지 유물처럼 남긴 괴테였지만 그의 핏줄만큼은 이어지지 않았다. 괴테의 아들 아우구스트는 로마 여행 도중 40대의 나이로 사망했다.[27] 아우구스트는 아내 옷틸리에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괴테는 어려움을 겪었다. 옷틸리에는 괴테 사후에 바이마르를 떠나 빈으로 갔다가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왔지만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고 전해지는데 괴테의 손녀인 알마는 17세의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고, 두 손자는 할아버지 괴테와는 다르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해 자식이 없는 독신으로 살다 60대에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직계는 끊겨졌지만 방계로 하나뿐인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네 후손인 니콜로비우스(Nicolovius) 집안은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코르넬리아의 큰 딸인 마리아 앤 루이즈도 36살 나이로 요절했지만 상술한 각주대로 니콜로비우스랑 결혼하여 5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2명과 딸 1명은 어린 나이로 일찍 죽었으나 나머진 천수를 누리고 후손들을 여럿 낳았다.

2.6. 괴테와 격동의 시대

괴테가 살았던 18세기 중반과 19세기 초반은 그야말로 세계가 격동하는 시대였다. 그가 17살일 무렵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범세계적 전쟁인 7년 전쟁이 벌어졌고 그 여파가 미국 독립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프랑스 혁명나폴레옹의 흥망성쇠를 목격했고 후에 이어지는 빈 회의로 인한 유럽의 격변까지 몸소 모두 겪었다. 또한 그의 일생 동안 산업 혁명의 전조가 유럽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대륙 간의 연결과 식민지 사업이 완전히 정착한 상태였다. 과학의 발전, 합리주의와 관념론 등등 여러 철학 사조와 개념의 대두, 불가침의 권위가 사라진 종교와 교회 등 괴테는 '절대적 개념'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태어나 새로운 시각이 점차 열리게 되는 시대를 살았다. 바로 그러한 배경이 슈투름 운트 드랑이라는 문학 운동의 사상적인 토대가 된다. 문학에서의 '질풍노도'라는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괴테의 대표작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28] 괴테의 저작 일생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관념론계몽주의적 사상의 연결은 구 시대와 새 시대의 다리에 있던 그의 시대가 문학적으로 드러난 결과일 것이다.

이처럼 괴테의 시대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가 전복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기존의 정서라는 것은 금이 가고 대체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괴테는 사회 제도적인 역할로서의 결혼에 대해서도 회의가 있었다. 괴테는 신분, 재산, 나이 등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결혼의 범위'에 전혀 구애를 받지도 않았다. 괴테의 연애 감정은 괴테 본인이 느끼는 사랑과 여성의 아름다움[29]에 의한 것이지 사회적 통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전 연인 관계는 숱하게 많았던 괴테가 한 번의 혼인만 치른 것도 그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괴테와 연인 크리스티아네의 결혼 또한 순전히 당사자들만의 의지는 아니었다. 괴테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괴테가 신부를 찾아 결혼하길 종용했고[30]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괴테는 연인 크리스티아네와 아들 아우구스트의 신변에 두려움을 느꼈다. 괴테는 가족이 법적으로도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있길 바랐고 그 책임감이 결혼에 대한 회의도 무르게 하여 크리스티아네와 결혼을 한다는 결심을 하게끔 만들었다.

3. 명언

선한 영혼을 가진 분들이시여, 베르테르와 똑같은 충동을 느낀다면 그의 슬픔에서 위안을 얻으십시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서문 중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울먹이며 다음날을 기약하면서 캄캄한 절망의 시간을 지내보지 않은 사람은, 그대 어두운 힘을 모르리.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증오는 편파적이지만, 사랑은 더욱더 편파적이다.
『친화력』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줄도 체험 그대로 쓰지 않았다.
외국어를 모르는 자는 모국어에 대해서도 모른다.[31][32]
나는 인류의 모범을 찾기 위해 역사를 살펴보았고 결국 무함마드에게서 그 모범을 찾았다.[33]
우리들의 성실한 노력은 모두 무의식의 순간에만 결실한다. 태양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면 장미가 어찌 꽃을 피우겠는가.
질투가 폭발하려 하거든 그것이 허기지도록 놔두어라.
길은 시작되었다. 여행을 마저 하라. 근심 걱정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너를 영원히 내동댕이쳐 균형을 잃게 할 뿐.
시대는 상상 이상으로 나빠져 간다.
예술은 삶과 같아서 깊이 들어가면 달어갈수록 점점 더 광범위해져서 어렵게 느껴진다.
인간이란 일찍이 알면서도 늦게야 실행하는 피조물이다.
자기 주변이 온통 바다에 둘러싸인 광경을 보지 못한 사람은 세계라는 개념도, 자신과 세상의 관계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 밖에 한국괴테학회의 자료 참고.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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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작품

5.1. 소설

5.2. 희곡

5.3.

5.4. 여행기

6. 관련 문서



[1] 후술하겠지만 바이마르 공국 재상을 역임한 적 있다.[2] https://www.aresearchguide.com/johann-wolfgang-von-goethe.html[3] 5명을 낳았지만 4명이 유년기에 세상을 떠났다.[4] 코르넬리아는 괴테의 친구인 요한 게오르크 슐로서(Johann Georg Schlosser, 1739년 12월 7일 ~ 1799년 10월 17일)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으며 슐로서는 괴테랑 친구이기도 하던 요한나 팔머(1744~1821)와 재혼했다. 코르넬리아가 낳은 큰 딸 마리아 앤 루이즈(1774~1811)는 쾨니히스베르크 (현재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 출신 프로이센 왕국 관리인 게오르크 하인리히 니콜로비우스(1767~1839)와 결혼해 5남 3녀를 낳았는데 어머니처럼 막내 플로라를 낳은 뒤로 만 36세로 요절했다. 둘째 딸인 줄리에테는 1793년에 16살로 요절하고 말았다.[5] 하지만 일화를 보면 부친이 괴테에게 공부에 대하여 압박을 많이 준 편인듯 하다. 괴테가 등하교하는 걸 맨날 자기 서재 창문으로 감시해서 괴테가 여동생이랑 그쪽에서 안 보이는 길로 귀가했다고 썼다. 사실 아버지도 법대를 나와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신분상 승진 제한이 있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6] 거의 60년을 매달리면서 무수한 수정과 편집을 번갈아가며 썼다.[7] 이 고용은 공국 내각의 반발을 일으켰는데, 아우구스트는 반대를 무릅쓰고 괴테를 등용했다. 당시 괴테는 27살의 정치 경력이 전무한 인기 작가였다. 그럼에도 괴테는 맡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외교와 행정 등 주요 업무는 물론 농업 사업과 도로 정비에도 관심을 기울이지만 바이마르의 태생적인 한계와 곧 닥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뜻을 완전히 이룩하지는 못한다.[8]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 도중 남긴 기록과 본국에 보낸 편지등을 보면 단순히 공무에 질려 휴가차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이어진 위대한 예술과 그 명맥을 체험하여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발전시키고 함양하기 위함이었다. 언뜻 도피처럼 보이는 이 여행은 어느 정도의 계획 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괴테는 고대 로마의 유산에 몰두하며 이를 배웠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회화와 조각 등의 미술을 탐구했고 광물학과 식물학에도 몰두하였다.[9] 현재 체코의 카를로비바리[10] 실러와 괴테가 처음부터 절친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한때 정치관과 생활에서의 성향 사이로 냉담한 사이였지만 우연히 만난 강연회에서 대화를 나눈 뒤부터 가까워져 독일 문학 사상 유래가 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괴테와 실러는 11년간 10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11] 그레트헨 본인은 괴테를 돌봐주는 동생 정도로 생각했고 그레트헨이 귀항하고서 이것을 알게 된 괴테가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에 끝은 별로 좋지 않았다.[12] 롯데그룹은 이 샤를롯테에서 따 온 이름이다. 롯데시네마의 프리미엄 상영관명도 샤롯데다.[13] 여담으로 괴테의 어머니는 괴테가 만나는 여성의 나이나 신분 등을 이유로 간섭하지를 않았다. 훗날 괴테의 부인이 되는 크리스티아네와 괴테가 동거를 할 때에도 괴테의 주변인과 사람들은 여자의 신분이 괴테에 비해 너무 낮고 교양이 없다는 이유로 수군거렸지만 괴테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응원했다.[1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델이 된 샤를로테 부프가 아니다. 이쪽은 괴테가 거의 서른이 된 뒤에 친해진 여성 문인이자 고위 귀족이었다.[15] 노인의 약한 심장이 사랑의 두근거림을 못 견디고 질환을 얻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16] 처음에는 아예 괴테가 얼마나 유명한 인물인지도 알지 못해 그를 천진난만하게만 대했다.[17] 울리케는 괴테의 아들인 아우구스트보다 15살이나 어렸다.[18] 에른스트 페더 피셔,《또 다른 교양》, 김재영 역, 이레, 2006[19] 색채론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는 그 스스로가 커다란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 윌리엄 터너가 있다.[20] Die Goethesche und die Newtonsche Farbenlehre im Lichte der modernen Physik[21] 하이젠베르크는 괴테의 시를 즐겨 읽는 괴테 애독자이기도 했지만 색채론 속의 담긴 과학적 사상에 대해서도 감흥했다. 특히 "눈을 통해 색을 인식한다."는 개념에 대한 색채론 속 방법론에 영향을 받았다.[22] 1792년 9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거느리는 7만 8천에 이르는 프로이센군이 프랑스 파리로 쳐들어간 전투였는데 의용군이 대부분이던 5만여 명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의 침략을 막아낸 전투이다. 사실 병력 수와 달리 전사자는 굉장히 적은 전투로 프로이센군은 겨우 184명이 전사하고, 2천 명 정도 부상자를 낳았으며 약 5만 명 가까이가 동원된 프랑스군은 3백 명 정도가 전사했다. 그렇지만 프랑스로선 프로이센의 파리 침공을 막아낸 사실상 승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이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탐색전 정도로 전투를 벌였기에 사상자가 동원 병력에 견주면 매우 적었다. 만일 프로이센군이 죽어라 전력을 다했더라면 양군이 몇 만은 넘는 사망자가 나올 전투였고 프랑스 역사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힘을 다하여 전투를 벌여봐야 오스트리아라든지 다른 나라만 득을 볼 게 뻔할 노릇이기에 그럴 수도 없던 거였다. 프로이센 언론도 그냥 탐색전 벌이다가 우리가 물러났다. 이기지 못 했지만 적어도 패배는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23] 괴테의 아내는 요독증을 앓다가 죽었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아내의 임종 직전부터는 괴테마저 앓아 누운 상태였다.[24] 이는 사운드 호라이즌의 천사의 조각상에서 차용되었다.[25] 위인전 만화나 위인전 삽화에서도 침대에 누운 채로 저 유언을 남겼다고 나온 적도 많다.[26] 가장 대표적인 괴테 문화 공간으로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하우스와 로마의 괴테 하우스를 꼽을 수 있다.[27] 아우구스트는 지금도 로마에 있는 세스티우스의 피라미드 근처 묘지에 묻혔다.[28] 고전주의, 이성주의, 합리주의, 낭만주의 등 유럽을 감돌던 여러 정신의 충돌과 기존 체재의 대한 반발 등이 귀족 사회 속을 헤매는 베르테르, 알베르토와 베르테르의 사상적 차이, 사회의 법률적 질서인 혼인 제도 안에 있는 로테를 통해 나타난다. 질서가 인간의 '이성'이라면 '감정'의 표출은 질서에 위반하는 것이며 괴테의 초기 저작에서는 그 두 관념 사이의 충돌이 유의미하게 나타난다.[29] 여기서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행동이나 일상 생활에서 나타나는 지혜로운 면모도 의미한다.[30] 그런 입김 속에서 괴테는 20대 중반이었을 무렵 연애했던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자제 릴리 쇠네만과 약혼하지만 두 집안의 불화로 곧 파혼하고 만다.[31] 원문출처 Wer fremde Sprachen nicht kennt, weiß nichts von seiner eigenen.[32] 이는 언어에 관한 뜻만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세계를 보는 시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어떤 문화나 사회를 바라볼 때 그 안에서만 바라본다면 명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괴테는 당시 독일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고심했고 나폴레옹의 등장에 반대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33] 이슬람을 믿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 내포보다는 외연을 살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괴테는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리스본 대지진(1755)과 7년 전쟁을 계기로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해, 1782년 괴테는 "난 반 기독교인이나 말뿐인 기독교인(un-christian)이 아니라 비 기독교인(non-christian)이다."라고 말하면서 교회에도 가지 않았다.[34] 전해지는 바로 베토벤은 괴테의 팔을 잡으며 저들이 우리에게 길을 양보해야 한다고 말했다.[35] 이 일화는 베토벤 연구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 로맹롤랑, 펠릭스 후프 등에 의해 진위가 조사되었고 두 사람이 지인에게 해당 일화를 언급한 편지까지 실존해 사실로 확인되었다.[36] 당대 최고의 예술가이자 이름 높았던 유명인의 아들이어 이목을 끌었다는 점 또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37] 괴테는 자신이 문학가임에도 음악을 모든 예술 중의 최고로 평했다.[38]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Karl Friedrich Zelter, 1758–1832). 펠릭스 멘델스존의 스승.[39] 그가 죽고 2년 뒤인 1830년에 그랬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추측들이 있는데 많은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수많은 편지를 받았던 괴테였는데 그 수많은 편지중에 하나였던 무명의 프란츠 슈베르트 편지를 그냥 넘겼을거라는 추측이 있다.[40] 참고로 이 벨라돈나는 엄연히 독초에 속하는 부류이다. 이러한 마비성 독초의 독을 적당량 사용하여 의약품의 원료로 쓰는 경우가 현재에도 적지 않은데 이 실험 역시도 이와 일맥상통한다.[41] 아트로핀. 알칼로이드 중 하나이다. 현대에도 안과에 가면 시력검사를 할 때 넣어줄 때가 있다.[42] 프랑스어로 커피를 뜻하는 café에 접미사 -ine을 합쳤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카페인을 caféine이라고 표기한다.[43] 위기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고 자신의 정확한 신분까지도 숨겼다. 이미 유명할 데로 유명해졌기에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게 이목을 끌지 않은 채 여행하기 위함이었다. 로마의 도달해서도 괴테는 신분을 숨기지만 본국에서 퍼진 소문과 독일의 작가 괴테가 이탈리아에 도달했다는 소문 그리고 상류층임이 분명하지만 신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외부의 독일인이란 신분이 맞물려 결국 정체를 들키고 만다. 그러나 로마의 예술가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괴테를 모르는 척 형식을 지켜준다. 그렇지만 형식을 지킬뿐 괴테에게 자신의 저작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생각을 묻거나 낭독해 주길 바라는 작가들이 아주 많았다. 남부로 여행할 때가 되면 이미 괴테의 방문이 소문나 지방 귀족이나 군주가 그를 궁에 초대할 지경에 이른다.[44] 이런 일이 은근히 있긴 하다.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살아 생전, 자네 유명해졌다고 극찬하던 친구들에게 "아니..전혀."라고 시무룩하게 대꾸했는데...."얼마전에, 한 시골을 지나다가 시골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고 사람도 안 보이고 해서 성악연습하고 있었지. 그런데, 지나가다가 이걸 듣고 나를 격찬하던 농부가 있었기에 반갑게 이야기하다가 그가 내 이름을 묻더군. 난 이름을 말했더니 그 농부는 엄청 기뻐하더군. 날 알아보는 사람이 이런 시골에도 있다니! 난 기뻐했는데 ......그 사람이 당신이 그 유명한 여행자 로빈슨 카루소군요!"(로빈슨 크루소로 알았던 것.) 라고 말하는 통에 할 말을 잃었네.... 이런 실화도 있고 카루소가 미국 공연하다가 어느 여성이 시비를 걸어 이게 법적 분쟁이 벌어졌는데 미국 어느 언론은 엔리코 카루소를 여성 소프라노라고 오보 기사를 내서 카루소를 경악하게 하던 적도 있다.[45] 이것은 단지 괴테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 땅의 많은 정치인과 시민들은 유럽을 전란에 몰아넣는 나폴레옹을 원수로 여겼지만 베토벤이 한때 그러했고 헤겔이 그런 것처럼 나폴레옹과 그가 일으킨 변화는 유럽 대륙의 지식인 층에서 새 시대의 정신이자 개막을 알리는 상징처럼 여겨졌었다.[46]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작을 많이 남겼지만 전체 저작에 비하면 그 수가 많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 문서에도 그의 작품이 일부만 등재되어 있다.[47] 절판되었다.[48] 여담으로 괴테를 무척이나 존경했던 아인슈타인은 쇼펜하우어 또한 매우 존경하였다.[49] 그의 생전에도 이미 상당수의 지식인이 유럽 대륙을 구세계의 질서로 보며 아메리카 대륙을 신세계라 칭했다. 괴테가 사랑했던 와인 업계에서도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 와인을 구세계 와인이라 부르고 미국, 칠레, 호주 등의 신세계 와인이라고 부른다.[50] 정확하게는 실연의 아픔을 문학적 소양으로 삼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는 원동력으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아픔을 이겨낸 것이다.[51] 그러나 출판 계약의 문제와 불법 복제판의 기승으로 정작 그가 베르테르를 통해 번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의 평생 수익 중 대부분은 바이마르 재상으로서 거둬들인 수익, 즉 공무원으로서의 임금이다. 다만 그런 공무원 활동이 가능했던 것도 작가로서의 명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52] 총 수감 인원 약 280,000명, 사망자 약 56,000명.[53] 1900년 라이프치히 출생.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당대 나치 독일에서는 정치범으로 간주되던 독일 공산당원이었기에 수감되었다. 전후에는 동독에서 작가로서 살았다.[54]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후속편으로 전작으로부터 25년 뒤인 1821년에서야 출간되었다.[55] 서사시[56] 이하 출처는 문예출판사《괴테 시집》, 송영택 옮김.[57] 위의 시와 제목이 같다. 괴테가 마지막 생일날, 키켈한이라는 산장 벽에 젊은 시절 적어둔 이 시를 찾아가 읽으며 눈물지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58] 내용은 1연은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수많은 괴로운 밤을 잠자리에서 울면서 새운 적이 없는 사람은 너희들은, 하늘의 힘을 모른다. 2연은 너희들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고, 불쌍한 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그러고는 심한 가책을 느끼게 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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