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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0D0D><colcolor=#CEC8B0> 펠릭스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 | |
본명 |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
출생 | 1809년 2월 3일 |
함부르크 제국도시[1] | |
사망 | 1847년 11월 4일 (향년 38세) |
작센 왕국 라이프치히[2] | |
직업 |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
사조 | 초기 낭만주의 |
종교 | 무종교[3] → 개신교(루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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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 초기 낭만파 시대의 음악가이다.2. 소개
창작성 면에선 신동이었고 요절 만 빼면 가장 완벽한 인생의 승리자. 음악으로 대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얻은 음악가는 많지만, 멘델스존만큼 환경이 완벽한 음악가는 없었다.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 유복한 집안환경, 우아한 용모와 세련된 사교성까지[4] 모든것을 다 갖춘 사기캐. 그의 이름 '펠릭스(Felix)'는 '행운아'라는 뜻이다.작곡 뿐만 아니라 연주와 지휘도 했다. 당시 유명한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 지휘자였다. 자신의 작품이나 다른 작곡자의 작품 모두 지휘했다. 그 밖에도 시나 그림도 꽤 재주가 있었고 영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라틴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했다.[5]
그리고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6], 마태수난곡을 복원하여 바흐의 음악을 다시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해주었다. 잊혔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악보를 거액으로 수집해[7] 마태수난곡을 복원하여 그의 음악을 재평가하면서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 부분은 2015년 5월 2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는데, 하필이면 신빙성 없는 푸줏간 이야기를 그대로 써먹었다. 어찌되었든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을 복원하고 연주한 사건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이로써 바흐는 음악계에서 완벽하게 부활하게 되었고 멘델스존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당대에 마태수난곡 같은 바흐의 명곡들은 음지에 묻혔지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그 자체는 묻힌 이름이 아니었다. 멘델스존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잊힌 여러 명곡을 발굴하기 전까지 출판된 많은 음악 서적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이름이 언급되는 게 그 증거. 그러나 당시 유럽에는 '과거의 음악'을 연주회에 올려 연주하는 관습이 없었고, 낭만주의 시대 이전에는 작곡가들에게조차 '후세에도 길이 연주될 만한 나의 곡'을 작곡한다는 관념이 거의 없었다. 과거의 음악을 연주회의 곡으로 선정하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야 생긴 것이다. 이는 바흐도 마찬가지였다. 바흐의 이름과 그의 작품은 즉 전문 학자나 음악가들 사이에서나 알려진 형태이지, 일반 대중들에겐 묻혀진게 맞다. 멘델스존은 이런 바흐의 인지도를 확 끌어올린 것이다.
로베르트 슈만의 교향곡 제1번은 1841년 3월 31일에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이 직접 지휘를 하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에서 연주하여 초연되었고, 당시 작센 왕국의 군주였던 프레데리크 아우구스투스 2세에게 헌정되었다. 반면 교향곡 제4번은 지휘할 예정이었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취소했다.
3. 생애
북부 독일 함부르크의 명망 있는 유대인 가문에서 4남매 중 2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할아버지는 독일 계몽시대 철학자이자 라이프니츠 볼프학파의 한 사람으로, 유대인 계몽주의 운동인 하스칼라의 선구자이기도 한 모제스 멘델스존이었으며,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부유한 은행장이었다.[8] 다만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는 소원했는데, 주류사회로의 동화를 추구한 하스칼라의 선구자이긴 했지만 유대인인 본인의 혈통 자체에는 자부심이 있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유대교와 유대인 혈통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 개신교로 개종하고 성까지 아내의 성인 바르톨디(Bartholdy)[9]로 갈아치울 정도로 열렬한 동화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의 각각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었다.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인이자 영문학/불문학/이탈리아 문학가이고 누이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는데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1805~1847)에게 특히 꽤 의지했다. 파니 역시 음악가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홀대받았다.[10]
여기에 아름다운 아내 세실 샤를로트 소피 장르노(Cécile Charlotte Sophie Jeanrenaud,1817~1853)와 결혼하여 자녀 다섯 명[11]을 낳고, 그들과 더불어 행복한 가정생활까지 향유했던 걸[12] 생각하면, 음악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던 행운아였다. 멘델스존 자신의 재능을 제쳐두고서라도 축복받은 인생. 당대 최고의 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어린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보고 칭찬했다는 사실만 봐도, 괴테를 만날 수 있을 만한 가문의 자제, 빛나는 천재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괴테가 멘델스존의 연주를 듣고 "저 아이의 실력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어린애가 빽빽거리며 소리지르는 수준일 뿐이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참고로 베토벤의 제자였으나 묻혀진 음악가 이그나츠 모셸레스(Ignaz Moscheles,1794~1870)도 유태인이었고 멘델스존을 어릴 적에 가르치는 스승 중 하나이다.
아들의 생일 선물로 아버지가 아들이 단장인 악단까지 만들어 주었는데 당시 음악가들에선 흔치 않은 예라서 많이 질투받기도 했다. 질투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역시 리하르트 바그너.
위에 언급한 바그너의 예 말고도 멘델스존은 생전에 열폭 비스무리한 까임당한 적이 많았다. 일례로 '음악이 지나치게 분위기가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다', '평범한 음악가들의 생계 문제에 신경 쓰지도 않는 거만한 도련님' 등등.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열폭 수준이고[13] 두 번째도 멘델스존 본인은 가난한 연주자들의 복지 문제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고, 이것을 개선하려고 꽤 노력했으므로 그의 입장에선 억울한 주장인데 이런 까임은 유복한 환경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다만 성격 면에서는 어릴 때부터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린 시절 펠릭스가 화를 내면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고 그나마 어머니도 손을 잡고 재우는 방법만이 유일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라이프치히 음악학교 교수 재임 시절에 멘델스존이 제자를 인격에 토대해 모욕하고 그것을 낙서해 동료 교수들과 낄낄거렸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매우 한정된 사람하고만 쉽게 잘 사귀는 인재였던 듯하다. 즉, 동시대 음악가들한테 부러움의 시샘이 아닌 진짜 미움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멘델스존의 천재성은 음악 작곡보다는 독일의 음악상 위상을 제고하는 곳에 더 많이 쓰였다고 간주해야 타당할는지도 모른다. 라이프치히 음악학교의 이름이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예술대학이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수였고 슈만과 함께 경제상으로 어려운 음악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등 수 많은 일했고 독일의 음악상 위상은 실제로 아주 높아졌다. 당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이던 쇼팽에게도 높은 금액의 공연료를 주면서 연주할 기회를 주기도 했듯이 많은 업적을 남긴 음악가였지만, 아깝게도 38세에 요절하고 만다. 죽기 전에는 악화한 건강으로 고생했는데 과로[14]가 건강을 더욱 악화하게 한 듯하다. 그 와중에 누나 파니[15]의 급작스러운 사망이 멘델스존에게 지울 수 없는 큰 비통에 빠지게 했고 그후 그 애통한 충격을 말미암아 6개월이 채 안 되어 멘델스존도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9번 교향곡까지도 못 만들었다.
후손들은 음악과 무관했다. 큰아들인 칼 볼프강은 역사학자가 되어 대학교수까지 되며 역사학자로 이름을 날렸다가 1897년 59세로 세상을 떠났고 둘째 파울은 화학자가 되어 아그파 필름을 세웠으나 39세로 요절했다. 막내아들 펠릭스는 7살에 홍역에 걸려 죽었으며 두 딸은 그냥 주부로 평범하게 살다가 갔다. 다만 먼 친척 가운데 역시 작곡가가 된 아르놀트 멘델스존(1855~1933)이라는 인물이 있기는 하다.
유태인이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고 부유층으로 기득권에 들어갔기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독일에서 위대한 음악가로 기려졌고 본인도 독일인으로 자부했기에(아버지부터도 독일인이라고 자부하고 살던만큼, 자녀들에게 조국은 독일이라고 인식해가며 키웠다.) 현대 이스라엘에서 자국 음악가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카프카나 말러같이 국적에 대하여 모호하게 대한 유태인들을 이스라엘이 자국 자랑이라고 홍보하는 행위와 대조적이다.
4. 작품 세계 및 주요 작품
행복한 환경 때문인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과 사이 좋게 잘 어울리는 그의 성격 덕인지 멘델스존은 밝고 아름다운 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멘델스존의 음악은 분야별로 성격이 많이 달라지지만 유명한 곡이 대부분 밝고 표제스럽다. 멘델스존의 작품은 선율. 리듬. 화성에서는 고전파 양식을 따랐으나 내용 면에서는 표제스럽고 있는 그대로 모습을 그림 그린 듯이 자세히 보여 주는 낭만파의 특징을 띠면서 낭만주의 작곡가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위치를 점한다. 슈베르트의 독창성이나 쇼팽, 리스트의 화려한 기교와는 달리 말 그대로 고전적인 기법으로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끌어낸 작곡가다.멘델스존은 가곡, 교향곡, 협주곡, 관현악곡, 피아노곡, 오라토리오, 실내악, 합창곡, 찬송가, 성악곡 등을 다양하게 작곡하였는데 유명한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다.
4.1. 관현악
Op. 26 | 한 여름밤의 꿈 주요 10곡(Overture,Wedding March 등) |
-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서곡 D장조 (Meeresstille und glückliche Fahrt) Op.27
1828년에 작곡된 곡.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에서 이 선율을 클라리넷을 통해 인용했다. - 핑갈의 동굴 서곡 B단조 (Die Fingalshöhle, 정식 명칭 '헤브리디스 서곡, Die Hebriden') Op. 26
멘델스존이 유럽을 여행하던 중 들른 스코틀랜드 헤브라이즈 군도의 핑갈의 동굴에서 깊은 인상받고서 1830년에 작곡한 연주회용 서곡이다. 표제 음악의 특징을 보여주겠다라는 식으로, 음악의 풍경화이다. 브람스는 '이런 작품을 쓸 수만 있다면 내 모든 작품을 던져버려도 좋다'고 말했다. - 아름다운 멜루진 서곡 F장조 Op.32
- 한여름 밤의 꿈 (Ein Sommernachtstraum) Op. 61
동명의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위한 부수 음악(incidental music). 1823년에 서곡(Op. 21)만 썼다가 17년 후인 1843년에 완성된다. 축혼 행진곡이 이 중 한 곡이다. 결혼식 때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 나오는 그 음악이다. 아이러니한게 신부 입장 시 나오는 음악은 멘델스존이 죽은 뒤에도 유대인인 그를 비난했던 바그너의 로엔그린중에 나오는 곡이라는 것이다. - 루이 블라스 서곡 C단조 Op.95
4.2. 교향곡
교향곡 3번 | 교향곡 4번 |
- 교향곡 1번 C단조 Op.11 - 1824년 그의 나이 무려 15살 때(!) 작곡된 교향곡이다.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의 19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된 곡으로 소년기에 작곡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완성도와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16] 멘델스존은 이 곡이 마음에 들었는지 후에 4손을 위한 피아노/바이올린/첼로라는 특이한 편성의 자작 편곡을 남겼다.
- 교향곡 2번 Bb장조 Op.52 - 일명 '찬미가(Lobgesang)'. 구텐베르크 인쇄술 40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작곡된 작품으로서, 1840년 6월 25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교회에서 멘델스존 자신에 의한 지휘로 초연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교향곡이라기보다는 종교음악(교회칸타타)에 가까우며 베토벤의 장엄미사처럼 교향악적인 색채가 두드러지는 작품도 아니기 때문에 교향곡이라는 타이들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많다.[17][18]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하라' 로 시작하는 시편 150편을 중심 텍스트로 썼다.[19] 여담으로, 곡 중간부분에는 루터교 코랄 중 하나인 "Nun Danket alle Gott"[20]이 삽입되어 있는데, 영국 초연 때는 관객들이 이 부분이 연주될때 하나둘씩 일어섰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 교향곡 3번 A단조 "스코틀랜드" Op. 56
1842년 3월 3일에 초연한 곡으로, 멘델스존이 스코틀랜드를 여행했을 때 받았던 영감을 토대로 작곡했다. 멘델스존 스스로 그의 교향곡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작품이며 실제로도 그의 교향곡 중 가장 작품성이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에도 그의 교향곡 중 가장 자주 연주된다. -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 Op. 90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때 느낌을 그린 작품으로, 1833년에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된 작품이다. 스코틀랜드 교향곡과 더불어 그의 교향곡 중에 꽤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 교향곡 5번 "종교개혁" Op. 107 - 멘델스존이 21살때 작곡한 곡으로 비교적 초기작품이지만 나중에 출판되면서 그의 마지막 교향곡으로 기록되었다. 원래 1530년 신성 로마 제국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 제출된 루터파 신앙고백[21] 300주년을 기념 축전을 위해 작곡된 작품으로, 4악장이 유명한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다만 이 행사가 가톨릭의 극심한 반대로 무산되는 바람에 축전에서는 연주되지 못하고 2년 후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4.3.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 op.64 | 피아노 협주곡 2번 d minor Op.40 |
-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 64
1844년에 완성된 멘델스존의 마지막 대규모 관현악곡으로 지금까지도 공연장에서 단골 레퍼토리로 간주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이 협주곡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정열적인 감성이 곡 전반에 흐르면서도 형식미가 조화된 명작이다. 연주 시간도 30분 이내로 길지 않고 멜로디도 낭만적이어서 1악장 전반부만 들어도 금세 친숙해질 수 있다.[22][23] - 1악장: Allegro molto appassionato(빠르고 매우 열정있게), e단조
- 2악장: Andante(느리게), C장조
- 3악장: Allegretto non troppo(지나치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 빠르게) – Allegro molto vivace(빠르고 매우 생기 있게), E단조
-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 피아노 협주곡 1번 G단조 Op.25
- 화려한 카프리치오 b단조 Op.22[24]
- 피아노 협주곡 2번 D단조 Op.40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A플랫 장조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E장조
4.4. 피아노
전주곡과 푸가 Op.35 No.1 | 엄격 변주곡 Op.54 |
론도 카프리치오소 Op.14 | 무언가 Op.62 No.6 |
무언가 Op.67 No.2 | 스케르초 Op.16 No.2 |
- 무언가 (無言歌, Lieder ohne Worte
something) Op. 19b, 30, 38, 53, 62, 67, 85, 102, WoO 7
1825년부터 1845년까지 49곡의 무언가(無言歌)를 작곡해 6곡짜리 8권으로 이루어진 48곡과 작품 번호 없는 1곡이 출판되었다. '말이 없는 노래'란 뜻처럼 사물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노래 같은 피아노 곡이고 3분을 넘지 않는 짧은 소품이다. 5권(Op. 62) 6번째 곡 "봄 노래(Frühlingslied)"가 가장 유명하다.[25] [26] - 카프리치오 F샤프 단조 Op.5
- 피아노 소나타 E장조 Op.6
- 7개의 특정적 소품 Op.7
- 론도 카프리치오소 E장-단조 Op.14
- <한떨기 장미>에 의한 환상곡 Op.15
- 3개의 환상곡 Op.16
- 환상곡 F샤프 단조 Op.28
- 3개의 카프리치오 Op.33
- 6개의 전주곡과 푸가 Op.35
- 엄격 변주곡 Op.54
- 어린이들의 소품 Op.72
- 안단테와 변주곡 E플랫 장조 Op.82
- 안단테와 변주곡 B플랫 장조 Op.83
- 알레그로 브릴란트 A장조 Op.92
- 3개의 연습곡 Op.104b(104a가 있고 104b가 있다.104a는 3개의 전주곡)
- 피아노 소나타 G단조 Op.105
- 피아노 소나타 B플랫 장조 Op.106
- 음악 노트 E단조 Op.117
- 카프리치오 E장조 Op.118
- 무궁동 C장조 Op.119
- 스케르초 B단조 WoO 2
- 스케르초와 카프리치오 F샤프 단조 WoO 3
- 안단테와 프레스토 아지타토 B장-단조 WoO 6
- 프렐류드와 푸가 E단조 WoO 13
- 뱃노래 A장조
4.5. 실내악
현악 8중주 E플랫 장조 Op.20 | 현악 5중주 2번 B플랫 장조 Op.87 |
첼로 소나타 2번 D장조 Op.58 | 현악 4중주 2번 Op.13 |
- 현악 4중주 0번 E플랫 장조: 사후에 발견된 곡.
- 현악 4중주 1번 E플랫 장조 Op.12
- 현악 4중주 2번 A단조 Op.13
- 현악 4중주 3번 D장조 Op.44 No.1
- 현악 4중주 4번 E단조 Op.44 No.2
- 현악 4중주 5번 E플랫 장조 Op.44 No.3
- 현악 4중주 6번 F단조 Op.80
- 현악 4중주를 위한 4개의 소품 Op.81
- 현악 5중주 1번 A장조 Op.18[27]
- 현악 5중주 2번 B플랫 장조 Op.87
- 바이올린 소나타 F단조 Op.4[28]
- 첼로 소나타 1번 B플랫 장조 Op.45
- 첼로 소나타 2번 D장조 Op.58
- 비올라 소나타 C단조
- 클라리넷 소나타 E플랫 장조
- 현악 8중주 E플랫 장조 Op.20
- 피아노 3중주 1번 D단조 Op.49
- 피아노 삼중주 2번 C단조 Op.66[29][30]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무언가 D장조 Op.109
- 피아노 6중주 D장조 Op.110[31]
- 클라리넷, 바셋 호른, 피아노를 위한 연주회 소품 1번 F단조
- 클라리넷, 바셋 호른, 피아노를 위한 연주회 소품 2번 D단조
4.6. 합창&가곡
- 오라토리오 성 바울 (Paulus) Op.36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을 기반으로 하여 사도 바울의 일생을 내용으로 한 멘델스존의 첫 오라토리오.[32] - 오라토리오 엘리야 (Elias) Op.70
- 주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리라(He, watching over Israel) - 대위법적인 가락이 드러나며, 유튜브에 해당 제목을 검색하면 쉽게 들을 수 있다.
덤으로 수많은 셋잇단음표가 나오기도 한다 - 시편 42편 Op.42
- 노래의 날개 위에 (Auf Flügeln des Gesanges, Op.34-2
1834년에 작곡된 곡. 가곡 중 잘 알려진 노래 중 하나이다. 가사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 찬양과 위엄을 주님께(Above all praise) - 교회합창 명성가 8권 460-463p[출처]에 수록된 곡으로, 대위법적 가락이 드러난다. 가사는 요한계시록의 어느 구절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4.7. 오르간
오르간 소나타 제3번 A장조 Op.65-3[34] |
파이프오르간이 원체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는 악기다 보니 멘델스존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대중에게 덜 유명한 편이지만, 상당한 음악성을 갖춘 수작이며, 멘델스존의 오르가니스트로서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 6개의 오르간 소나타 Op.65
이름과 달리 일반적인 주제-발전-재현으로 구성된 소나타 양식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모음곡에 가까운 구성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소나타로서 작곡된 것이 아니라 영국의 출판사로부터 볼런터리(Voluntary)[35]곡집을 의뢰받아 작곡한 것이기 때문인데, 볼런터리라는 장르가 영국 밖에서는 생소한 장르다 보니 독일 등 타 지역에서도 출판하기 위해 몇몇 곡씩 묶어서 소나타라는 이름을 붙였다.
멘델스존의 오르간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며, 그 중 3번과 6번 소나타는 루터교 찬송가 선율을 주제로 진행된다. 낭만주의적인 아름다운 멜로디와 감정표현을 겸비하면서도 멘델스존 본인이 바흐의 음악을 연구함으로써 얻어낸 치밀한 대위법이 돋보이며, 동시에 신앙적 경건함도 느낄 수 있다. - 3개의 전주곡과 푸가 Op.37
- 베를린-크라쿠프 사본 (Berlin-Krakau-Manuskript) - 1985년경 베를린과 크라쿠프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멘델스존의 자필보이며,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수십곡의 오르간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 알레그로, 코랄과 푸가 MWV W 33
5. 여담
멘델스존이 13~14살 때 작곡한 실내 교향곡 제8번 D장조[36] |
- 2009년 클래식 음악 평론가들이 꼽은 음악 신동 순위 1위에 올랐다. 만 18세까지 보여준 성취를 기준으로 선정한 것이다.[37]
- 티모시 샬라메와 닮았다는 말이 있다... 링크
- 유대인이라 나치 독일 때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에 서있던 동상이 헐리는 등의 수난을 당했다. 나치 독일이 하루밤 사이에 기습적으로 철거해 버렸는데, 순회공연차 라이프치히에 와 있던 지휘자 토머스 비첨 경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항의의 의미로 다음날 공연에서 전원 사복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라이프치히 시에서 2005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새로운 동상을 세웠다.
- 그의 차남 화학자 파울 멘델스존(1841~1880)이 1867년 설립한 아그파 필름은 2005년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파울도 아버지랑 비슷한 나이인 39세로 심장마비로 요절하고 조카 프란츠 오펜하임(1852~1929)이 뒤를 이어 회사를 운영했다. 공교롭게도 아그파는 1900년대 들어서 이게파르벤으로 합쳐지고 독가스 치클론 B를 만들어 많은 유태인과 포로들을 학살하게 했다.
- 멘델스존 조부 모세 멘델스존은 곱사등이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에 얽힌 제법 감동적인 야사가 있다.젊은 시절 함부르크 어느 상인 집에 들렀던 모세 멘델스존은 그 집의 아름다운 딸 프룸체에게 반했지만 프룸체는 곱사등이인 모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결국 모세가 함부르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고, 마지막 날 모세는 용기를 내어 프룸체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미래의 배우자를 정해주신다는 말을 믿나요?" 그러자 프룸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반문했다. "네. 당신도 그 말을 믿나요?" "물론이지요. 내가 태어날 때도 하느님은 내게 미래의 신부를 정해주셨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덧붙이시더군요. '하지만 너의 아내는 곱사등이일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외쳤죠. '안 됩니다, 하느님! 차라리 저를 곱사등이로 만드시고 제 신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곱사등이로 태어났답니다." 그 말을 들은 프룸체는 처음으로 모세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이후 그녀는 모세 멘델스존의 헌신적 아내가 되었다.
해당 얘기는 선물이란 책에 소개된 내용.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멘델스존 가문은 부유한 은행가 집안이던 만큼, 엄밀히 따지면 '가난하고 장애도 있는 청년이 진심 하나만으로 부잣집 아가씨의 사랑을 얻은' 그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프룸체가 모세의 재산에 눈이 먼 속물이었다고 볼 것도 아니고[38], '프룸체를 사랑한 모세의 마음이 결국 그녀에게도 닿았다' 정도의 의미는 있을 듯. - 부친 아브라함이 경영했던 멘델스존 은행은 20세기 초까지 독일 대형 은행으로 성장했고, 독일의 패전과 대공황도 경영 위기를 잘 넘겼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 후 반유대정책을 펼치면서 위축되었고, 1938년 도이체방크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었다.
- 히틀러 암살 작전에 참여한 카를 괴르델러(Carl Friedrich Goerdeler)[39]가 반나치로 돌아선 결정적인 이유가 멘델스존 동상 보전이다. 괴르델러는 라이프치히 시장이며 우파 민족주의 성향이라 초반에는 나치를 지지했으나 나치에서 유대인 멘델스존의 기념상을 폭파시켜버리려 하자 개신교로 개종한 점을 들어 강력하게 반발했으나 결국 제거되고 반나치 성향으로 돌아 선다.
- 베토벤의 대 푸가가 워낙에 복잡난해한 작품이다 보니 '아, 그거 대선배님의 걸작이죠'라는 요식 행위성 찬사만 보냈을 뿐이고 곡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건 멘델스존 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도 마찬가지여서 대 푸가가 제대로 분석되어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20세기에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 등이 연구를 하면서부터 가능했다.
- 리틀 버스터즈!의 등장인물 나츠메 린이 키우는 고양이 이름의 모티브가 되었다.
[1] 現 독일 함부르크[2] 現 독일 작센주 라이프치히[3] 유대인 집안 출신이지만, 멘델스존 출생 시점에 부모는 이미 유대교를 버리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7세 때 세례 받기 이전까지 사실상 종교 없이 길러졌다.[4] 여러 왕후들이 그를 앞다투어 초대했고, 교우관계도 매우 원만했다고 한다. 참고로 모차르트는 다 갖췄는데 사교성이 폐급이었고(...), 슈베르트는 사교성은 좋았으나, 집이 흙수저에 외모도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베토벤은 의외로 사교성이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실청한 후로는 성격이 외골수로 괴팍해지면서 유명한 초상화들처럼 인상도 꽤나 험상궂어졌다.[5] 닐 웰본이 쓴 <멘델스존, 그 삶과 음악>에 따르면 11살 때 휴식으로 생각했던 일이 남동생 파울을 주인공으로 삼은 강약약격(dactylic, 영시(英詩)에서 하나의 강(強) 음절에 두 개의 약(弱) 음절이 이어지는 음보)의 육각운(hexemeter, 운(韻)이 6개인 형식)로 된 450단어짜리 풍자적 서사시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강약약격의 육각운으로 써졌다.[6] 무려 생전부터 그렇게나 유명하던 베토벤이 사망하고 2년 후다![7] 하인과 고기를 사러 푸줏간에 들렀다가 고기 포장지로 사용되던 마태 수난곡의 중요부분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 해당 의견은 대체로 설득력이 없다. 마태수난곡의 규모를 볼 때 푸줏간에서 총보를 온전히 보관할 리도 없고, 마태수난곡 악보 사본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19세기 음악사를 다루는 책들에서는 대체로 멘델스존의 할머니가 생일선물로 줬다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인다. 해당 이야기는 바흐 악보 이야기 나올 때 마다 등장하는 시덥지 않은 농담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8] 독일 유수의 은행인 멘델스존 은행(Bankhaus Mendelssohn & Co.)으로 1938년 나치가 은행 자산을 몰수한 후 강제로 폐쇄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9] 아내 레아의 남동생, 즉 펠릭스 멘델스존 입장에서는 외삼촌인 외교관 야코프 잘로몬 바르톨디가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자기 소유의 부동산 이름에서 따와 창성한 성씨이며, 멘델스존 가족의 성씨도 바꾸도록 처음 권유한 것도 이 사람이다.[10] 파니도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동생에게 보낸 작품은 많이 까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펠릭스가 자신이 싫어하는 스타일을 많이 지닌 쇼팽을 포용하고 높이 평가하는 등 남의 재능을 인정하는 성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파니의 수준이 평범했을 거라고 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19세기의 성차별과 출판사와의 계약으로 인한 강도 높은 노동 때문에 펠릭스가 누이에게 프로 음악가의 삶을 권유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해당 기사에서도 파나에 대해서 다루었으며 파니의 천재성과 프로 음악가로의 좌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음악세계에서 출간한 펠릭스 멘델스존: 전통과 진보의 경계에서 잘 다루었다.[11] 1838년 2월 7일에 칼 볼프강 파울이, 1839년 10월 2일에 마리가, 1841년 1월 18일에는 파울이, 그 이후에는 릴리와 펠릭스 아우구스트가 태어난다. 그 중 펠릭스는 1851년에 홍역에 걸려 죽는다.[12] 그런데 멘델스존이 죽자 부인은 그와 주고 받았던 편지를 다 태웠다. 금슬이 좋았다면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겠지만, 배우자 사후 유품을 다 처분하는 건 대개는 죽은 사람이 지긋지긋해서 그 흔적을 남기는 것조차 싫거나 그 사람과의 사이가 너무 좋았기에 정확히는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자기도 죽고 마리라는 생존 본능에서 나오는 행동 둘 중 하나라고 한다. 참고로 전자는 재혼을 꺼리고 후자는 의외로 금방 재혼하는 예가 잦다. 참고로 아내 세실은 남편인 멘델스존이 죽고 6년 뒤에 남편과 비슷한 나이인 36세로 요절했다. 더불어 화학자이자 아그파 필름을 세운 둘째 아들 파울도 아버지인 멘델스존과 비슷한 39세 나이로 요절.[13] 이는 평가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14] 이때 걸작 오라토리오인 엘리야가 탄생했다.[15] 동생 펠릭스처럼 음악가로서 활동했었다. 동생 못지 않은 재능이 있었고 실제로 훌륭한 곡도 많이 작곡했으나 여성 음악가를 대상으로 한 편견이 강할 때라서 큰 유명세를 타진 못해서 작곡한 곡 중 일부는 동생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책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에서는 남편 사후 본격으로 음악 활동을 하려 했는데 이에 멘델스존이 편지로 반대 의견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이 일화에는 오류가 있는데, 애초에 파니의 남편인 빌헬름 헨젤은 아내인 파니보다 14년을 더 살았다. 저 일화의 전말은 사실 이렇게 되는데, 생전에 딸의 전문 음악가로서의 길을 반대했었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사후 몇년이 지난 후 용기를 얻은 파니가, 궁정 화가로 일하던 남편의 응원 아래,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대외적으로 하려던 시점에서, 동생인 펠릭스가 편지로 반대 의견을 내보인 것이었다고. 어쨌든 그 무렵으로부터 1년 후 파니는 죽었고 펠릭스는 자신의 마지막 현악사중주에 <파니를 위한 레퀴엠(진혼곡) (Requiem For Fanny)>라는 제목을 붙였다.[16] 다만 초연은 1827년에 이루어졌으며 출판시에는 곡을 많이 수정했다.[17] 멘델스존 자신도 이 작품에 분명하게 교향곡이라고 명명한 적은 없었으며, Symphonie-Kantate, 즉 교향적 칸타타라는 제목을 붙인 바 있다. 그러니 교향곡이라는 분류는 애초부터 작곡가의 의중과도 거리가 있는 분류이기도 하나, 멘델스존 사후 출판 정리 과정에서 교향곡 2번이라고 분류된 것이 그대로 굳어지게 되어 교향곡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에 가깝다.[18]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2009년, 멘델스존에 대한 근대적인 작품 분류법으로는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작품 분류 체계라고 하는 "멘델스존 작품 번호(Mendelssohn-Werkverzeichnis, 약칭: MWV)"링크 참조(독어)에서의 이 작품의 분류는, 교향곡이 분류되어 있는 Category N이 아니라, 큰 규모의 종교음악이 분류되어 있는 Category A에 분류되어 있기도 하다.[19] 멘델스존의 후배 브루크너도 시편 150(브루크너)에서 중심 텍스트로 쓴 바 있다.[20] 국내 개신교 찬송가에도 66장에 "다 감사드리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 그 코랄이다.[21] 마르틴 루터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이 작성했고 공인된 것은 1555년[22] 파로디우스다! 스테이지 8에서 요제프 바그너의 쌍두 독수리 깃발 아래서와 함께 배경음으로 썼다.[23] 또한 이 곡의 1악장은 짱구는 못말려의 노라조가 부른 국내 주제가에서도 연상할 수 있다.[24] Capriccio Brillant.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씌여진 이후 1832년 작곡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곡이다.[25] 아마 통화 연결음으로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컬러링 서비스를 가입하고 아무 노래도 설정해두지 않은 KT 이용자에게 전화를 걸면 들을 수 있다.[26] 시드 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 비밀 프로젝트에서 Op. 19b 1곡을 배경음악으로 썼다. 문명 4의 오라클 동영상에도 쓰였다.[27] 바이올린2, 비올라2, 첼로[28] 멘델스존이 작품번호를 붙인 유일한 바이올린 소나타이고 미발표곡을 후에 예후디 메뉴인이 1953년에 출판한 F장조 소나타가 있다.[29] 피아노 3중주 1번에 비해선 대중적인 인기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작품이나, 이 작품도 충분히 대형 실내악 작품에 속하는 곡이다.[30] 마지막 악장의 절정 부분에서 나오는 선율이 제네바 시편가로부터 연원된 코랄인 Old 100th(구 100편)이 인용된 것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31] 그의 나이 15세때 1824년 작품으로 피아노,바이올린,2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 구성이다.[32] 현 시대에는 그 후에 작곡한 자신의 두번째 오라토리오인 엘리야에 묻혀버린 감이 있으나, 이 작품은 작곡 당시 하이든의 천지창조 이후로 약 40년간 이렇다할 오라토리오들이 작곡되지 않았던 긴 오라토리오 기근에 시달리던 끝에 나온 작품으로서, 멘델스존 생전엔 큰 인기를 구가하던 작품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던 자신의 신분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멘델스존 자신도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를 두던 작품 중 하나였었다고.[출처] #[34] 2악장 구성으로, 장엄한 1악장과 짧고 감동적인 코랄풍의 2악장으로 구성된다.[35] 성공회와 함께 탄생했으며 바로크 시대 영국에서 주로 작곡된 교회음악의 한 장르이다. 본래 특징적인 대위법과 느림-빠름 2개 악장으로 구성된 형식으로 많이 작곡되었으나, 멘델스존 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양식을 상실하고 그냥 "교회 예배에서 사용되는 짧은 오르간 기악곡"의 뜻만 남아버렸다.[36] 현악 오케스트라만을 위한 곡이며, 1965년에야 출판되었다.[37] 2위는 프란츠 슈베르트, 3위는 에리히 코른골트다. 그 유명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여기 끼지도 못했다.[38] 유복한 멘델스존 가와 교류한 것을 보면 프룸체의 집도 그저 그런 상인 집안은 아니었을 것이다.[39] 암살 성공시 수상(총리)로 내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