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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남

서양 음악사의 주요 인물 ·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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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순남
Kim Sun-Nam[1] | 金順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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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순남
출생 1917년 5월 28일
경기도 경성부 낙원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사망 1983년 (향년 66세)
북한
직업 작곡가
장르 현대음악

우리는 사상과 음악을, 민족과 음악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음악은 생활의 현실을 진실하게 파악하는 데서 출발한다. 민족과 음악은 하나이다.
김순남이 평소에 하던 말 #
작곡가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다. 핀란드에서는 시벨리우스 한 명, 헝가리에서는 버르토크 한 명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김순남이 나오려다 말고 죽었다.
백남준

1. 개요2. 생애3. 주요 작품들
3.1. 노래3.2. 가곡3.3. 기악3.4. 기타
4. 창작 성향5. 사후의 재평가와 연구, 발굴 작업6. 논란7. 가족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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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본명은 김현명(金顯明).

2. 생애

1917년 5월 28일 경기도 경성부 낙원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비교적 괜찮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릴 적부터 수재로 유명했다고 한다. 교동보통학교를 마치고 15살 때인 1932년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는데, 베토벤 등 서양 명곡들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학교 취주악단을 지휘하는 등 음악가로서도 재능을 보였다.

졸업 후 몇 년간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일본으로 유학했고,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입학해 작곡을 전공했다. 이 시절의 대표적인 스승들로 시모후사 칸이치와 하라 타로(原太郎, 1904-1988)가 있었는데, 특히 하라의 경우 창작에서는 민족주의 노선을 취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김순남의 작곡 성향도 하라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재학 중 일본 현대작곡가 연맹의 창작 발표회에서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참가해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을 발표했는데, 조선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음악 어법을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1942년 귀국한 뒤에는 조선총독부의 관제 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했는데, 그러면서도 좌익계 비밀 음악 동아리인 '성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해방 직전까지는 주로 버르토크스트라빈스키 등 동시대 유럽 대가들의 음악 어법을 도입한 전위적인 곡들을 썼는데, 피아노 소나타 제2번과 피아노 3중주 제1번, 자신의 결혼식 때 반주음악으로 쓴 피아노 3중주 '결혼', 가곡 '철공소' 등이 대표곡으로 손꼽힌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망 후에는 '건국행진곡'이나 '해방의 노래', '농민가' 등 해방가요를 많이 작곡했고, 여러 계파의 음악인들이 결성한 '조선음악건설본부'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이 단체는 이내 좌익/우익과 친일계/민족계 인사들 간의 격심한 갈등으로 해산되었고, 김순남도 결국 탈퇴한 뒤 좌익계/민족계가 규합된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옮겼다.

각종 해방가요 외에도 2권의 가곡집과 교향곡 제1번, 피아노 협주곡 제1번, 합창 붙은 교향곡 '태양없는 땅' 같은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들도 작곡했다. 특히 교향곡과 협주곡의 경우 해당 장르에서 한반도 최초의 작품들로 기록되고 있다. 심지어 좌익 세력들과 대척점에 있던 미군정 당국에서도 예의 주시하는 인물이었고, 줄리어드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문화 담당 장교 일라이 헤이모위츠는 미국 줄리아드 스쿨에서의 유학까지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유학 계획은 김순남 자신의 거절과 미군정 당국의 강한 반공 성향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서 좌익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는데, 이를 피해 여러 인사들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피신했다. 김순남도 대구 10.1 사건을 노래한 인민항쟁가 작곡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아내와 외동딸을 남겨둔 채 월북했다. 그 뒤 평양에서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한반도 최초의 본격 오페라인 '인민유격대'와 오라토리오 '승리', 서곡 '영웅 김창걸[2]'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49년에는 소련10월 혁명 기념행사의 북한 대표단으로 2주 동안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도중 만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악보를 읽어보고는 "조선에도 이런 작곡가가 있었느냐"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3]

한국 전쟁 직후에는 본인의 월북 경력 때문에 이남에 남아있던 모친 이보경 여사가 총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에는 북한 정부의 후원으로 소련에 유학했고,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에게 배웠다.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는지, '조선 빨치산의 노래'를 편곡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 생활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종전과 동시에 끝났는데, 북한에서 소환 명령이 내려지자 급히 귀국해야 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김순남 외에도 김원균, 문경옥, 조길석 등 북한 작곡가들이 유학 중이었는데, 소환 명령을 받은 이는 김순남 뿐이었다. 어째 낌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 주변인들이 남아있어 보라고 권유했지만, 김순남은 별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귀국해버렸다.

주변인들의 예측대로, 귀국 후 김순남은 전쟁의 책임이 억지로 떠넘겨진 남로당 일파로 간주되어 심한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순남은 남로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박헌영과 친분이 두터웠고, '박헌영에게 드리는 노래'라는 곡까지 써줬다. 월북 후에도 어느 공연에서 박헌영을 위해 피아노로 즉흥 연주를 해준 기록이 있을 정도. 결국 1958년에 모든 창작 권리를 빼앗기고 함경남도 신포의 조선소 주물공으로 숙청 당했다.

다만 공적 지위를 박탈당했을 뿐 사법적인 처분을 받은 것은 아니기에 1960년대 초반에 복권되어 다시 창작 권리를 되찾았다. 복권 후 몇 년 동안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칸타타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와 바이올린 독주곡 '이른 봄'과 함경남도 일대의 민요를 채보한 기록물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몇 년뒤 결핵에 걸리면서 다시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평양과 함경남도 일대의 요양소를 전전하며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1970년대 이후에는 복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출판물에서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게 되었다. 1983년경 신포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주요 작품들

김순남은 월북하면서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왔다.[4] 때문에 남한에서는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곡이 악보가 행방불명되거나 소실되어 더이상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악보가 행방불명되거나 소실된 경우는 ☆로 표시, 괄호 안은 작곡 혹은 발행 연도.

3.1. 노래

3.2. 가곡

3.3. 기악

3.4. 기타

4. 창작 성향

작품 목록을 봐도 작곡된 곡들의 악보가 대부분 행방불명 상태라 아직 전모가 파악되지는 못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곡들은 절대 다수가 성악곡들이다. 특히 2권의 가곡집은 남한에서 출판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의 '철공소' 같은 거의 무조에 가까운 곡부터 '산유화' 같이 최대한 단순화된 민요풍 노래까지 다양한 곡들이 들어 있다. 특히 '산유화'의 경우 조수미 같은 유명 성악가들도 음반으로 냈으며, 지금도 김순남의 노래들 중 가장 대중적인 축에 속한다.

정치적인 메시지 때문에 평가절하될 때도 있지만 해방가요도 꽤 개성적인 작품들인데, 가장 유명한 '인민항쟁가'의 경우 김원균 작곡의 '애국가'가 국가로 채택되기 전까지 북한의 비공식 국가로 쓰이기도 했다. 이들 노래는 대중들도 부르기 쉽도록 어렵지 않은 선율선을 취하되, 전통음악의 장단이나 가락을 적극 도입해 거의 민요처럼 불렸다고 한다.

성악곡의 가사는 김소월 등의 시인 외에도 오장환이나 임화, 설정식 등 좌익계 문인들의 시에서 취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남로당계였던 탓에 곡을 붙였다는 사실만으로 가루가 되게 까이게 충분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인이었던 조령출의 시에 곡을 붙이기도 하는 등, 특별히 정치적 성향에 따라 작사가를 골라잡지는 않은 모양.[14] 김순남 본인도 어느 정도 문학에 조예가 깊었는지, 가곡 몇 편은 본인이 직접 작사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월북 후에 작곡한 4번째 자장가가 있다.[15]

기악곡의 경우 성악곡보다 남겨진 자료가 훨씬 적은데, 기껏해야 북한에서 발표된 '이른 봄'과 피아노 협주곡의 1악장~2악장 초반부 자필 악보가 전부다.[16] 게다가 협주곡의 경우 관현악 파트는 제2피아노로 대체되어 있는데, 생애 항목에서 언급한 하이모비츠가 남한에서 김순남의 음악이 해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자필보를 공개하면서 소재가 확인되었다. (아마 쓰던 내내 당 지도위원의 간섭을 받았을) '이른 봄'보다는 피아노 협주곡 쪽이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서양식 3화음 체계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민요 선율에서 따온 2도나 4도씩 쌓은 화음과 무조 어법을 혼용하고 있다.

대체로 모든 작품들이 일제강점기 때 강압적으로 금지되었던 한반도 전통음악의 요소를 살림과 동시에 서양의 근대음악 기법을 가미해 새로운 형태의 민족음악을 발전시킨다는 '전통과 현대를 절충한 새로운 길의 모색'이라는 사고관을 보여주고 있어서, '한국 근대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5. 사후의 재평가와 연구, 발굴 작업

월북 후 김순남은 그야말로 좌파 그 자체로 여겨져 남한에서 아예 언급조차 안되는 듣보잡 신세를 오랫동안 면치 못했다. 북한에서도 중간에 숙청당했고 복권 이후에도 숙청 이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했다.

그나마 남한에서 6월 항쟁 이후 사회의 반공주의적 인식이 점차 옅어지면서 월북 예술인/문인에 대한 해금 조치가 단행되었고 김순남도 이 때 해금되었다. 음악학자 노동은이 김순남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9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 때 방북 예술단에 동행해 김순남의 북한 시절 활동상과 생활상에 대한 정보를 비공식적으로 얻어오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동시에 김순남의 유일한 혈육인 방송인 김세원도 아버지에 대한 명예회복에 발벗고 나섰고, 백남준도 1992년에 월간지 '객석'에 기고한 에세이를 통해 해방 시절 자신에게 강한 영향을 준 인물로 꼽았다. 백남준은 원래 김순남에게 작곡을 배우려고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김순남의 동료 작곡가였던 이건우에게 대신 배웠다. 이건우 역시 월북 음악인이었고 김순남과 같이 1988년에 작품이 해금되었다.

한국의 뮤지컬과 국악관현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작곡가 김희조도 자신이 김순남에게 작곡을 배웠음을 털어놓았고, 의외로 많은 이들이 김순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북한에서도 김순남의 제자들이 유명 작곡가가 된 경우가 종종 있는데, 피아노 독주곡 '조선무곡' 등을 작곡한 한시형 등을 꼽을 수 있다.

민족음악연구회 등 제3세대 음악인 모임에서도 1987년을 전후해 악보 수집이나 음반 제작 등의 작업을 시작했는데, 2권의 가곡집은 1권으로 묶여 재출판되었고 여러 중견 성악가들이 참가한 음반으로도 발매됐다.[17] 미국에서 발견된 피아노 협주곡도 녹음되어 KBSCD 시리즈 '한국의 작곡가' 제2집에 수록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연구는 다소 답보 상태다. 분단 이후 김순남이 생애를 보낸 북한에서 아직까지 별다른 재조명 움직임이 없고[18] 틈만 나면 경색을 겪는 남북관계 때문에 답보 상태는 계속되고 있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에 러시아에서 해방가요들의 피아노 반주 파트가 붙은 자필보들이 여럿 발굴된 것이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6. 논란

한편 친일 청산 움직임이나 좌파 음악인의 재평가에 대해 회의적인 소위 '우파' 계열 음악인들은 은근히 김순남을 깎아내리고 있는데, 특히 '조선음악협회' 회원이었다는 점이 만년 떡밥이다. 친일 음악인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해당 협회가 관제 단체였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결국 김순남도 친일 행위를 한거 아니냐'는 주장인데,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병림픽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노동은도 이것은 인정하고 있고, 직접 조사해 정리한 조선음악협회 회원 목록에도 김순남을 올려놓고 있다. 물론 그런 우파 음악인들이 친일 행적이 노골적인 이른바 우파적인 음악인들을 옹호하던 터라 지들도 이념에 따라 친일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심지어, 이런 짓이 친북적이라고 하면서 친일 행적 우파 음악인들을 옹호하더니만 지들이 스스로 친북적인 발언을 하는 논리가 되는 셈.

다만 다른 협회원들과 달리 친일가요를 작곡하는 등 창작 행위에 있어서 적극적인 친일을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나, 동시에 반일 활동에도 참가했던 모습을 들어 상대적인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2009년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서도 '적극적 친일 행위자'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는지 등재시키지 않고 있다. 월북 후 작곡된 전시가요들 중 혹부리 찬양가가 있다는 것도 가끔 까이는 문제.

하지만 자신을 받아줄 줄 알았던 북한에서조차 숙청를 당했다는 점에서, 남과 북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7. 가족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 딸 김세원TBC 1기 성우친절한 금자씨, , 한끼줍쇼의 나레이션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1945년 생으로 태어난 지 몇 년 되지 않아 김순남이 월북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그 이후 초등학교 2학년 때에야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엿듣고 아버지에 대한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다른 이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어서 상당히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했는데 그 기록을 <나의 아버지 김순남>이라는 책으로 펴낸 바 있다.

8. 기타

김순남은 작곡가뿐만이 아니라 거장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특히 즉흥 연주로 유명했는데, 소련 영화에 나오는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기만 하고 피아노 파트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파트까지 혼자서 쳐냈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9]

김순남을 다룬 글. 스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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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곡집 '산유화'에서 사용한 로마자 표기. 이는 일관적이지 않았는데, 가곡집 '자장가'에서는 Kim Soon Nam이라는 표기를 사용하였다.[2] 6.25전쟁 당시의 인민군 군관으로, 본명은 장창궐이다. 1950년 12월 25일 602.6고지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사후 북한 정권에 의해 공화국영웅칭호를 추서받았다.[3] 노동은, 『김순남』, 제1판, 서울: 낭만출판사, 1992, 121쪽.[4] 북한에서도 다른 많은 예술가들처럼 숙청당했으나 본인으로서는 다행히 생전에 복권되어 몇 년이나마 다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5] 가사가 일본 메이데이가의 표절이다. 하지만 이건 작사가 임화의 책임이고, 김순남의 멜로디는 오리지널.[6] 대구 101 사건을 기리기 위한 노래이다.[7] 동요이다.[8] 이 노래들은 주로 전쟁 이전에는 좌익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을 위해, 전쟁 때는 조선인민군을 위해 작곡되었다.[9] 안정호가 작곡한 땅크병의 노래와는 별개의 곡이다. 현재 북한군에서는 김순남의 곡을 사용하지 않고 안정호의 곡을 사용한다.[10] 2014년 설태성이 작곡한 '근위부대 자랑가' 와는 별개의 곡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근위대에 관한 군가를 사용할 때 김순남의 곡을 사용하지 않고 설태성의 곡을 사용한다.[11] 1920년 플로리다잭슨빌 태생. 위에서 언급하였듯 제2차 세계 대전시기 군 복무의 일환으로 미군정청의 문화담당참사관으로 종사하였으며, 이후 줄리아드 스쿨을 졸업한 후 네바다 대학교 리노 캠퍼스에서 음악과 교수를 지냈다. 2010년 사망. 부고 기사[12] 0:05~0:47 부분은 1악장 중반부, 0:47-2:03 부분은 1악장 종결부, 그 이후는 마지막 악장의 종결부를 발췌한 것으로 추측된다.[13] 원문은 일본식 표기인 '바라아데'라고 되어 있다.[14] 오페라 '인민유격대'의 대본도 조령출이 썼다. 이후에도 북한 문예계의 실권자로 죽을 때까지 활약했는데, 북한에서도 친일 청산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유력한 증거.[15] 노동은, 『김순남』, 제1판, 서울: 낭만출판사, 1992, 105쪽.[16] 이를 들어 미완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김순남이 남한에서 발표한 여러 수필이나 기고문을 보면 완성된 작품으로 나와 있으며, 무엇보다도 1949년 조선국립교향악단실황 발췌 녹화본이 남아있다.[17] 다만 LP와 카세트 테이프로만 발매되었고, 그마저도 오랫동안 절판 상태다. 네이버 뮤직에서 유료로 다운로드가 가능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18] 분명히 말하지만 김순남은 1965년 즈음에 복권되었다. 복권되지 않았다면 다시 작품활동을 하거나 예술잡지에 글을 기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순남이 병환으로 인해 다시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이후 등장한 북한 공인 예술이론에 적당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북한 정부에서 다시 잊혀진 그를 구태여 재조명해주지 않으려는 것이다.[19] 노동은, 『김순남』, 제1판, 서울: 낭만출판사, 1992, 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