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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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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내각 제1부수상 1959년 1월 20일 직함 신설
김일 1959년 임명, 1962년, 1967년 유임
<rowcolor=#003478,#C39335> 내각 제2부수상 1970년 7월 11일 직함 신설
박성철 1970년 임명
<rowcolor=#003478,#C39335> 내각 부수상
1기
1948-1957
박헌영·홍명희·김책(1948)
허가이(1951)
최창익·정일룡(1952)
최용건·박의완(1953)
박창옥·김일(1954)
정준택·정일룡재임명(1956)
2기
1957-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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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주연(1958)
리종옥·김광협(1960)
3기
1962-1967
김일·김광협·김창만·정일룡·리종옥·리주연·남일(1962)
최용진(1964)
고혁·김창봉·박성철(1966)
4기
1967-1972
김일·김광협·박성철·김창봉·리주연·남일·리종옥·최용진·정준택(1967)
김만금·홍원길(1970)
최재우(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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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초대 부수상 • 외무상
박헌영
朴憲永 | Pak Hon-yong
파일:박헌영1948.jpg
<colbgcolor=#d6b534><colcolor=#FFF> 출생 1900년 5월 28일[1]
충청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
(現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청신로 379)
사망
(추정)
1956년 7월 19일 (향년 56세)[2]
북한 평양시
직업 정치가, 사상가,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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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6b534><colcolor=#fff> 본관 영해 박씨 (寧海)[3][4]
덕영(德永)
이정(而丁)[5], 이춘(而春)
종교 무종교 (무신론)
학력 대흥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국제레닌학교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숙청 과정에서 제명)
신장 161cm
부모 아버지 박현주(朴鉉柱)[6]
생모 이학규(李學圭)
적모 탐진 최씨(耽津崔氏)
서모
배우자 주세죽(朱世竹)
정순년(鄭順年)
윤레나(Лена Юн 본명: 윤옥)
자녀 슬하 2남 2녀
딸 박비비안나(Вивиана Пак 본명 : 박영)
아들 박병삼(朴秉三, (법명: 원경(圓鏡))
딸 박나타샤(Наташа Пак)
아들 박세르게이(Сергей Пак)
}}}}}}}}} ||

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기2.2. 광복 이후2.3. 월북 이후2.4. 숙청
3. 가족 관계4. 미제 간첩설 반박
4.1. 반론
5. 기타6. 소속 정당7. 대중매체8. 관련 서적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2.1. 생애 초기

1900년 5월 28일 충청남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박현주(朴鉉柱, 1867. 7. 7~?)[7]와 어머니 신평 이씨(新平 李氏) 이학규(李學圭, 1867. 12. 10~1943)[8] 사이의 서자로 태어났다. 조선말에 양반이라는 신분이 계급화되기는 했지만, 3대를 넘는 동안 생원시급제자조차도 배출하지 못한다면 양반의 특권을 잃어버리는데, 박헌영의 집안은 과거에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지 오래되어 양반으로서의 특권을 잃어버렸고[9] 단지 지방에서는 어느정도 잘사는 소규모 지주집안이었던지라 농사를 지어서 미곡상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벼슬길을 포기했을 뿐이지, 경제적으로는 부족하지 않아서 굶주리지는 않았다. 후실부인이었던 박헌영의 생모도 역시 주막여관운영으로 남편의 집안과 별개로 성공해서 중산층으로서 잘 살았다.

아버지 박현주는 두 번 결혼했으나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과부였던 서산의 신평 이씨 이학규를 소실로 들여 아들 박헌영을 보았다. 본부인 탐진 최씨(1872~1907)[10]에게서는 이복형 박지영(朴芝永, 1891. 8. 3~?)과 이복누나 박신기가, 이름 미상의 다른 부인에게는 어려서 죽은 이복 여동생 박간난이 있었다. 영해박씨대동보 권3 358쪽에는 첫부인 탐진 최씨가 1912년 3월 21일에 별세했다고 등재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1907년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일대기는 족보 내용을 취해서 최씨가 1912년에 사망한 것으로 봤으나, 족보보다는 공문서인 호적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어린시절부터 한문과 국문을 배운 양반가의 지식인이었던 박헌영은 서자였던 자신의 처지 때문인지 홍길동전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박헌영은 서자로 태어났음에도 경제력을 가진 그의 어머니의 기대 덕분에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박헌영도 학창시절에는 학업이 매우 우수했는데, 대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YMCA 활동도 하였다.[11] YMCA에서 영어를 배우던 그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양반가의 자제였던지라 자본주의 열강이었던 미국에 유학을 가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으로 유학가는 비용은 매우 높았기도 했고, 박헌영 집안의 도움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시도는 좌절되었다.

1919년 3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직전에 3.1운동을 경험했다. 3월 1일 12시경, 박헌영은 계단과 교실 문 앞에 감시 학생을 세워놓고 19개 반마다 돌아다니며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조선 독립 선언식이 있으니 안내를 따르라고 말해 두었으며, 1,000명의 경성고보 학생들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탑공공원까지 달렸다. 박헌영은 3학년 때까지 단 하루밖에 결석하지 않았는데,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무더기로 결석을 하여 학교 측이 그의 출결 사항을 공백으로 남겨두게 됐다고 한다. 화요파에서 활동하면서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상하이로 가게 된다.

졸업반 무렵에 3.1 운동에서 선전 역으로 참여한 경력 때문에 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까지는 융통성이 있었기에 어찌저찌 노력해서 겨우 퇴학은 모면할 수 있었고 덕분에 졸업은 하긴 했다. 훗날 박헌영은 '3.1 운동은 현대 세계사의 초기에 일어난, 동방에서 가장 큰 봉기였다.'고 찬양했다. 이어서 '자신이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게 만든 계기가 바로 3.1 운동이었다.'고 회고한다. 여하간 3.1운동은 실패했고 이를 계기로 박헌영은 해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3.1운동 직후까지는 양반가 자제의 성품이 진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해외망명을 처음 결심했을 무렵에는 미국 유학을 희망했다. 본가의 지원은 받기 힘들었기 때문에 박헌영은 아르바이트중노동으로 비용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생활력이 부족했던 박헌영은 유학에서 쓸 생활비는 커녕 턱없이 비싼 배삯조차 지불할 수가 없었기에 미국 유학을 단념하고 말았다. 이후에는 일본 제국으로 향하는 밀항선에 몸을 실어서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공부를 할 생각이었겠지만 3.1운동에서 선전역을 했던 경력과 화요파활동경력 때문에 일본제국령 식민지 조선에서조차도 일본 제국 경찰에 감시를 당하던 처지고 밀항자였던 처지라서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에 힘들게 도착했지만 대입시험조차 치를 수 없었다. 결국 일본에 도착한지 2달만이었던 1920년 11월에 중화민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했고, 중화민국령의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그가 만난 사람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공산-사회주의자들인 김단야임원근을 만나서 교류했는데, 힘든 생활고 중 공산주의를 접했기 때문인지 공산주의에 쉽게 매료되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1921년에 상하이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연이 닿아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에 가입하여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다. 당시 고려공산당은 이동휘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여운형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가 있었는데, 이동휘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은 젊은사람들을 가입하는데 조건을 까다롭게 했었다. 반면,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는 그런거없이 다소 개방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에 박헌영과 김단야 일행들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에 가입을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1929%EB%85%84_%EB%B0%95%ED%97%8C%EC%98%81.jpg
1920년 모습.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앉아 있는 사람이 박헌영이다.

1922년에는 여운형과 함께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민족 대회에 참여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굳혔으며, 이 때, 코민테른의 조선계 하수인이 되었다. 코민테른에 매료된 박헌영은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실천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으나 이미 일본제국에서 주요 청년공산주의자로 찍힌 후였기 때문에 순사에 의해 체포되어 가혹한 옥살이를 한다.

1924년에 옥에서 풀려난 뒤 동아일보 기자를 하던 중 화요파를 중심으로 조선 공산당 결성에 참여하며,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었으며, 비밀리에 공산주의 활동하면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기자로 재직중 주세죽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1년 뒤 그의 사회주의 행보를 탐탁지 않게 봤던 일제에 의해 기자직에서 해직되었다.

조선을 떠나기 전, 학생 시기에는 YMCA에 입회하기도 했고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지만, 중국에 넘어가서 공산주의자가 된 뒤에는 무신론자가 되었고, 소련에 넘어가 코민테른의 하수인이 된 이후에는 서구 자본주의기독교에 강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1920년대에 조선 내부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 간에 논쟁이 치열했을 때 기독교를 비판하는 논설을 자주 싣고 반기독교 설문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그런 논설 중에 하나.
종교과학과 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중

1925년에 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이 터지자, 박헌영이 상하이여운형모스크바에 있던 조봉암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일제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른 간부들과 함께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었고 신의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 와중에 박헌영은 계속 자기 주장을 역설하고, 동료 박순병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들을 살려내라'고 격렬히 항의하여 재판정에 달려들었고, 그 결과 그를 제압하는 총독부 경찰들에게 매우 심하게 폭행당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공판이 있었는데 그는 공판에서 박순병을 데려오라며 자신이 쓴 안경을 집어던지고 소란을 피웠고, 결국 간수들이 그를 끌고 나가 재판이 10분만에 중단되기도 했다. 결국 5회 공판에서는 박헌영이 배제되었다. 세간에는 박헌영의 건강에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신청한 병보석이 기각되자 감방에서 자살소동을 벌여 막으려는 간수들과 몸싸움 끝에 온몸에 멍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가 싸놓은 똥을 벽에 바르거나 심지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인분에 원래 독이 있다 보니 몸이 엄청나게 부었고 입에서 냄새가 심했다고도 한다.[12]

결국 1927년 11월 22일에 정신병으로 병보석을 얻어 석방되었는데, 아내 주세죽을 못 알아 보기도 할 정도였다. 정신과 의사는 회복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 모습을 본 박헌영의 경성고보 동창인 영화인 겸 소설가 심훈은 박헌영을 박군이라고 지칭하며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이 정신병력이 낭설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박헌영이 광인행세하여 연극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소리로, 실제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정황이 많다. 어쨌건, 이 때문에 뒷날 소련으로 탈출에 성공했으니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기는 했다. 일설에는 일부러 아버지에게 쌍욕을 하기도 했다고.

훗날 북한 법정에서 '그가 일본 제국 경찰에 투항한 후 서로 짜고 미친 행세를 하여 석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 이를 두고 '박헌영이 일제와 비밀리에 타협했다'라는 낭설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된 이들은 많았고 일부는 병보석되었다. 고의로 박헌영을 석방시키려 했다면 굳이 미친 사람 행세를 시킬 필요도 없이, 와 관련된 병같은 내과적 질병에 걸렸다고 속이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 일본의 고문 방식은 정신이 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수준으로 잔혹했다.

출감 이후로도 정신병에 시달렸으나 아내 주세죽과 어머니 이학규의 보호 속에 어느정도 회복이 되어가게 된다. 그러던중 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한다고 1927년 겨울의 어느 야밤에 아내 주세죽의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으로 갔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더니, 이듬해인 1928년 아내와 함께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해 버렸다. 당시 주세죽은 만삭의 임산부었으며 이들의 탈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함흥경찰서장 이하 경찰관들은 감시를 게을리했다며 징계를 받았다.
파일:attachment/58_a1.jpg
192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한 주세죽과 박헌영의 모습.[13]

그리고 이듬해에는 아내를 데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떠나 버렸다. 그 때 아내가 만삭이었는데, 급하게 도망치다 보니 기차에서 딸인 박 비비안나를 낳았다. 그들의 극적인 탈출은 세간에 화제가 되었고, 아들 원경스님에 따르면 "눈물젖은 두만강"도 김용환이 이에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다고 한다.

1928년 박 비비안나를 안고 소련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 1928년 11월 그 곳에서 유학 중이던 공산주의자 김단야의 추천으로 국제레닌대학을 다녔다.

1929년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9년 초 국제레닌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여기서 박헌영은 '농민들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싶다.'는 의미로 농촌에서 밭을 메꾸는 고무래를 뜻하는 이정(而丁)이라는 호를 쓰게 된다.

국제레닌대학을 졸업 후 노동과 고학으로 동방근로자대학 2년 과정을 거치며, 1931년 말 졸업하여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을 정교하게 심화시켰다. 그리고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의 공산당을 지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4살이 된 딸 박 비비안나를 모스크바 근처 이바노바시에 있는 당시 소련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각국 혁명가들의 자식들을 양육하던 시설인 스타소바 육아원[14]에 맡기고 1932년 1월 아내 주세죽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부모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던 박 비비안나는 자신이 고아인 줄 알고 자랐다고 한다. 이후 박 비비안나의 수기에 따르면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반가움은 전혀 느낄 수 없고 거북한 감정만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와의 면회에 친구를 데리고 나가거나 될 수 있으면 빨리 자리를 끝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성장한 후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그런 모습에 굉장히 가슴아파한 것 같다고 기술하였다. 당시 주세죽도 이 부분을 가슴아프게 여겨서 보육 교사에게 하소연했고 보육 교사도 친모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하라고 비비안나를 타일렀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1931년 상해로 돌아가 "코뮤니티"라는 잡지를 국내로 반입시켰다. 당시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진 사건 당시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 당시 박헌영이나 조봉암 등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닌 이승만 같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측들들도 이 의거를 맹렬히 비난했었다.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 의거에 대해 '이런 짓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기관에만 도움을 줄 뿐이다.'라면서 비난했었다.

1932년 7월에 박헌영은 '상해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그는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민중의 각성 없는 일회성 의거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개인적인 테러와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라고 보았던 것이다.[15] 박헌영은 임시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신랄한 조소 및 이와 같은 투쟁을 남일로 방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꼼무니스트(코뮤니스트)) 6호에 개제했다.
조선의 양반들이 제 할아비의 뼈다귀를 대대로 물려 먹듯이, 중국에로 방황하는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안중근의 명성을 두고두고 팔아먹는단다. 그렇거든 하물며 오늘날 국민당의 요구에 응하여 윤봉길의 생명을 재단에 바친 김구 일당이 각 방면의 중국지사로부터 윤봉길의 값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고 그래도 또 좀 더 얻어먹으려고 각 신문에다가 윤봉길을 시켜 폭탄을 던진 어른은 누구냐?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는 곧 나다. 나는 누구냐? 나는 곧 김구다라고 커다란 광고를 냈다는 것이 결코 기괴할 것이 없는 것이니 이런 것이 상해의 한국임시정부 및 그 수렁들이 하는 조선독립운동인 것이다. (중략) 그렇다고 해서 윤봉길 사건을 너희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우리는 모른다고 손을 씻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개인적 테러 행동이 결코 혁명적 투쟁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군중의 조직적 투쟁을 방해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저 부르주아들이 무엇 때문에 개인 테러를 환영하는가를 광범한 노동자와 농민 대중에게 폭로하는 동시에 우리의 투쟁 방법을 널리 선전하여 대중화시켜야 한다.

여튼,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로 상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높아지자, 박헌영은 한국명 '이두수', 중국명 '왕양목'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상해 부두에서 시장에 나갔다가 따라붙은 일본 제국 경찰의 미행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됐다.

6년형을 언도받았으나 5년 만인 1939년 9월에 가석방으로 출소한다.

1939년 박헌영은 이현상, 이관술, 김삼룡 등과 경성콤그룹을 만든다. 경성콤그룹에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지하 비밀리에 공산주의, 노동운동 활동을 하게 된다. 이관술은 박헌영을 일단 청주의 비밀아지트로 보냈다. 이순금과 정태식이 이 일을 맡았다. 이관술은 다시 인천에 아지트를 마련해 박헌영을 보낸다.

1941년에 경성콤그룹이 발각되어 검거가 일어났는데 박헌영은 간신히 전라남도 광주로 도피했고, 전남지역 공산주의자들과 연락을 하였다.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일본 제국 경찰의 눈을 피해 별의별 직종을 전전하면서 위장직업으로 지낸다. 이무렵 박헌영은 '김성삼'이라는 가명을 짓고, 변소청소부, 벽돌 인부 공장 노동자 등등 일하면서 숨어있었다고 한다. 경성 주재 소련 영사관의 샤브리와 비밀교신을 주고받았다고도 한다. 원경스님의 주장에 따르면 이순금이 박헌영의 연락책이었다고 한다.

이 기간 중 정순년과 연락을 취하였으나 연락이 두절된다. 정순년은 정태식의 5촌 조카딸로 그의 소개로 박헌영을 만났고, 아들인 원경을 낳았다. 그러나 정순년의 부모는 딸의 임신사실을 안 뒤 외손자를 내다버리고 딸을 재혼시켰다. 그러나 하필이면 정순년이 재가한 남편 역시 겉보기엔 목수였지만 실은 공산당의 평당원이었다. 남편이 6.25전쟁에서 죽자 그는 술집을 운영하다가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서 아이를 낳고 살던 중 아들인 승려 원경을 다시 재회하게 된다. #

8월 15일 광복 소식을 접하자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떠난다는 편지를 남기고 서울로 상경한다. 벽돌공장 사장과 인부들은 1970년대 중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보통의 노동자가 아니며, 특이한 인물인 줄 알면서도 모른체 했다고 회고했다.

2.2.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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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모습.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박헌영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김삼룡 출소를 마중나가서 8월 19일 김삼룡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의 목탄트럭을 타고 경성으로 올라간다. 이어 이관술, 이현상, 이주상 등 경성콤그룹 출신을 만난 박헌영은 이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

재건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노선의 8월 테제를 발표하며 이론적으로도 앞서려 했다.
사회주의혁명의 과업과 성질을 운운하는 것과 같은 극좌적 경향과 싸워야 한다. (중략) 우리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중요 과업(완전 독립과 토지 혁명)을 완전 해결은커녕 이제 시초의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후략)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8월 테제
해방 후 조선공산당 중앙이 공식 채택한 8월 테제는 무엇보다 사회주의 세력의 전통적 혁명론을 수정하여 평화혁명론, 곧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전략을 구체화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 세력의 일반적인 혁명노선은 무장봉기 노선이나 폭력혁명론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세력의 전략전술에서 평화혁명론의 가능성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부정되어 왔지만,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혁명이행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평화혁명론은 기존의 전통적인 무장봉기전략을 철회하고, 평화적인 방식의 국가건설 전망을 도출하는 근거가 되었다.
(중략)
평화혁명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선거주의 이행노선에 가까웠다. 실제로 사회주의 세력은 정부수립의 방식으로 선거를 고려하고 있었다. 곧 인공수립이나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의 마지막 절차도 총선거였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2005, p55~57

박헌영은 바로 당 중앙을 조직하는 대신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결성했다. 전국의 좌파 세력을 결집하여 견고한 당 조직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 박헌영은 경성 콤그룹 뿐 아니라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의 지시로 조직한 공산주의 그룹까지 포섭했다.

경성 콤그룹 중심의 재건파보다 먼저 8월 16일 서울파인 이영, 정백과 화요파인 조동호, 리승엽 및 ML파인 이정윤, 최익한과 이현상 등은 서울 장안빌딩에서 또 다른 조선공산당, 즉 장안파 공산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장안파 구성원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 활동을 포기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통성 면에서 우세한 재건위가 출범하자 장안파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9월 8일 좌익의 각 계파가 모인 열성자대회에서 참석자들은 박헌영 지지와 조산공산당 재건 위임을 천명했다. 이영, 정백, 최익한 등은 박헌영에 반대하며 한동안 장안파를 유지했다. 이에 힘입어 박헌영은 9월 11일 재건위를 해소하고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박헌영은 총비서로 선출됐다.

장안파가 와해되며 일단 대부분 재건파로 흡수되었다.

박헌영은 건준에 참여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소련이 진주할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건준은 사회주의 계열을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고 노력했다. 여운형은 박헌영을 건준에 참여시키기 위해 애썼다.[16]
건준의 결성 초기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여운형•건국동맹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 친화성, 그리고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자들의 친분관계도 바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서울 진주 소식이 크게 작용했다. 여운홍에 따르면 여운형은 8월 15일 아침에 엔도를 만난 뒤 정백과 함께 돌아와 단독으로 담소를 나누었으여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태가 달라졌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중략) 이에 여운형과 건준 참여세력들은 사회주의 계열을 적극 참여시켜 소련군의 남한 진주에 대응하는 국가건설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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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과 박헌영

9월 6일 여운형과 박헌영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인공의 수립이 조공의 일방적인 독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도 인공 수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의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개회사와 격려사에서 비상한 시기에 연합국의 진주에 대비하여 "연합국과 절충할 인민총의 집결체"로서 인공이 수립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여운형은 또한 "혁명가는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인민이 승인만 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운형은 북한에서의 "소군정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국의 공동방침으로 해석"하여 남한에서 "미군 역시 조선인민에게 맡길 줄로 예상"하는 낙관적 정세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운형은 일제시기부터 혁명단체와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권구상은 인공과 다르지 않았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5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건준 내부의 반발에 부딪치자 조각발표를 보류하려고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인공 대표대회에서 인사도 했고 인공 부주석의 지위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

여운형은 아무것도 몰랐고 박헌영만이 주도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여운형이 요양 중이었던 것은 맞으나 각료 명단은 여운형과 합의하였으며, 발표만이 박헌영의 독단이었다.[17] 발표도 여운형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인공 수립 당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도 관공서와 일본인 공사 재산을 압수하고 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모든 것을 조선인민에게 맡길 뿐 그 목적이 없는 듯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소군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군의 공동한 최고방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미군도 38도 이남에 진주하여 오면 역시 조선인민에게 모든 것을 맡으라 할 줄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맡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인민대표회의를 열어 국호를 결정하고 정부조직법을 결정하며 인민위원을 선거하였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9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함에 있어 구태여 빛깔을 문제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모두가 합력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 조선인민공화국이라면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학년과 같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여운형#

건준이 인공으로 개편되며 좌경화는 더욱 심해졌다. 이승만은 자기 뜻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좌익세력에 휘둘리는 정권의 대통령이 되기 싫다며 거절했다. 다른 우익인사들도 인공이 정부를 참칭했다며 비판했다. 반면 좌익 중에도 이승만, 김구, 김성수 등이 포함된 인공 구성안을 보고 우편향 정부라며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다.

며칠 뒤 들어온 미군정이 조선인의 자치활동을 불허하며 인공의 해체 혹은 정당화를 요구했다. 박헌영은 대안으로 인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좌우 합작을 모색하나 임정의 미온적 태도로 무산됐다. 임정은 임정의 법통과 기존 조직, 직책을 유지하는 대신 2~3개의 신설 부서를 좌익이 맡을 것을 제안했다.

결국 박헌영은 허울뿐인 인공을 사실상 포기하고 좌파 정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 좌익 성향 대중단체에 주력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했다. 귀국 초창기에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 연설하면서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대중연설한 적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은 이승만에 대해 호의적으로 접근했었고, 실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국민회에 가입했을 정도.

그러나 친일파 처리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다가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독촉을 탈퇴했다. 45년 10월 29일 박헌영은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은 석상에서 친일파 즉각 숙청에 반대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을 거부했는데, 애초에 이승만과 상의도 없이 선포한 자리였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이름만 있고 실권은 없는 직위를 굳이 수락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은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반박하고 인민공화국 해산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광복 이후 처음에 박헌영은 임시정부에 우호적인 입장이었고, 앞서 보듯이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 명단 작성에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를 넣기도 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들은 인공 내각 참여를 거부했고, 1945년 11월 23일에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이 귀국했을 때 김구는 박헌영과 합작을 추진하려 했으나 박헌영이 12월 12일자로 발표된 '망명정부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임시정부를 '망국정부'라 지칭하고 임시정부요인들을 '망국인사'라 칭하며 사실상 상해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김구의 합작시도는 실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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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그해 12월 말,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발생하여 좌우 모두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이관술이 하지와 대담하여 반탁 입장을 밝혔고 좌파세력들이 우파세력들보다 훨씬 더 강경하게 신탁통치 반대성명등 규탄시위, 집회를 했었다. 박헌영 역시 비슷했다. 그러나 얼마 후 서울 소련영사관 부영사 샤브신은 박헌영에게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라"는 지시를 전달한다. 샤브신의 부인 샤브시나의 회고에 따르면 "박헌영은 못마땅한 눈치였다"고 한다. 박헌영은 소련의 정확한 의중을 알기 위해 몰래 38선을 넘어 평양에 가서 소련의 지령을 받아온 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 때부터 대부분의 좌익세력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며 신탁통치를 찬성하게 된다.

갓 식민지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것은 또다른 외세에 의한 지배로 받아들여졌고 대중의 지지도 좌익을 떠나갔다. 신탁통치 사건 이전만 해도 우익세력이 지지가 그렇게 압도적이지는 않았는데, 모스크바 3상회의 때 신탁통치 사건으로 정국은 한순간에 우경화된다. 게다가 박헌영이 3상회의 지지 결정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에서 미군정과 밀월관계에 있던 뉴욕타임즈 기자 존스턴이 "박헌영이 '조선이 소련연방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는 오보를 내보냈고, 동아일보가 이를 다시 인용하며 박헌영은 치명상을 입는다. 박헌영은 존스턴에게는 사과를, 미군정에는 존스턴 추방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헌영은 정국을 전환하기 위해 좌익 정당과 대중 단체를 결속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한다. 조선공산당과 전평, 전농뿐 아니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조선신민당,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김원봉과 김성숙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이 민전에 참여했다. 민전은 조선의 과도정부, 임시의회를 자처하며 이승만, 김구 세력이 중심이 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과 대립했다. 민전 결성을 통해 박헌영은 좌익을 결집하는 데 성공한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우익에서는 그가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뒤집으며 좌우 대립을 촉발시켰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박헌영이 지지한 것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언급한 '조선의 민주적 독립정부 건립’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상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강하게 추진했던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보였다고 해도 3상 회의의 결과를 신탁통치로 알고 있었던 당시 한국의 상황을 박헌영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에 대한 반대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에 대한 오해를 제대로 풀기 전에 갑작스레 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이는 본인의 자충수였을 뿐 아니라 극렬한 좌우대립으로 이어진 것이 사실이다.

신탁통치 찬성을 무작정 비판할 수도 없다. 실제로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한국민주당, 조선인민당, 한국국민당 등과 "4당 코뮈니케"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수 등 한민당 보수파의 반발로 4당 코뮈니케는 하루만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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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된다. 국제노선을 통한 건국을 지향했던 박헌영은 미소공위 개최를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박헌영과 소련군정은 아래로는 대중을 포섭하고 위로는 우익-반탁 세력을 배제하여 조선공산당 중심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이 반탁 단체 배제를 반대하며 1차 미소공위는 결렬된다.

미군정은 처음엔 공산당을 허용했으나 미군정이 조봉암의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는 서한을 수정해서 언론에 공개한 조봉암 편지 사건이 발생한다.

1946년 5월 미군정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좌익 탄압을 본격화한다. 공산당이 탄압받자 박헌영은 1946년 7월 '신전술'이라는 강경 노선을 채택하여 대중적인 투쟁에 돌입한다.
조선공산당은 7월 22일 하지에게 장문의 서한을 보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공산당에 대한 가장 악질적인 파괴공작이라고 비판하고, 8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자위적 수단을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헌영도 24일 반동테러에 적극적으로 항쟁하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략)
이 자리[18]에서는 미소공위 휴회 이후의 남한정국, 특히 정판사사건, 이승만의 정읍발언, 좌우합작 문제 등이 전반적으로 토론되었다. (중략) 이는 1946년 중반 남한정세에서 신전술 채택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정판사 사건 문제나 좌우합작문제가 토론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박헌영은 이미 신전술을 구상하여 이를 내부적으로 잠정 결정하고 북한지도부와의 조율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51~p156

미소공위 결렬 이후 한반도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조선인민당 당수이자 중도좌파의 대표 격이었던 여운형과 김규식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박헌영 역시 좌우합작 논의에 참여한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운동을 미소공위 재개를 촉구하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1주기 추모식 때 참여하기도 했었고, 여운형 환갑잔치에 참여해서 조선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라고 극찬까지 하기까지 했다. 아울러 좌우합작의 원칙으로 3상회의 원칙 지지, 친일파-파쇼 배제, 테러 중단 등을 제안한다. 그러나 7월 22일 평양 방문 이후 박헌영은 민전 의장단을 소집해 좌우합작운동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한다. 여운형, 김원봉 등이 반대하자 박헌영은 토지 몰수, 군정 종식 등 5원칙을 좌우합작의 조건으로 내건다. 조선공산당 세력은 우익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들 조건을 민전의 공식 입장으로 발표한다. 이 훼방으로 좌우합작은 어려움에 몰린다.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축소 내지 고립화되어야 함
공산당은 1/16~2/16의 역할을 갖게 하거나 고립화
미국의 전후조선처리방안 <과도입법기구안>#
좌우합작은 비록 공산당의 고립화 전략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이승만•김구로 대표되는 이른바 극우세력을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략) 중간파가 주도한 합작운동은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극좌극우를 대체하는 대안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주의 입장에서는 실현가능성이 낮았다. 무엇보다 좌우합작운동을 대리하고 있는 김규식•여운형의 힘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극우극좌세력에 지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중략)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사회주의세력이 배제된 중간파 집단의 대표성을 소련이 수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85~186

동시에 박헌영은 7월 22일 우익세력에 맞서 힘을 결집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3당 합당을 제안한다. 정판사 사건으로 약화된 조선공산당을 대중정당으로 통합해 회생시키려는 의도였기도 하고, 이 당시 박헌영과 여운형의 동기를 알기 위해서는 시티코프 일기 같은 소련군정 문서를 봐야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공산당의 대중적 기반 확대를 위해 7월 초 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 당시 좌익 정당 통합 지지를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건준 때부터 박헌영에게 감정이 상해버린 여운형은 그에게 맞서기 위해 인민당 당수를 사임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게 친했던 사이였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서로 고성 높이며 싸웠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여운형이 박헌영에게 "닥쳐"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로마넨코가 시티코프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여운형은 본래 3당 합당에 반대했으나, 김일성에게 설득당해 3당합당을 수락한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귀하와 박헌영, 백남운 및 기타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하에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김일성의 이 발언은 여운형의 아픈 곳을 건드렸습니다. 여운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며 한참 만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합당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로동당으로 합당할 것이다. 남조선으로 돌아가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완수해 낼 것이다. 나는 로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우리 당은 남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당이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나를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9월 총파업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한 결과를 보고 있다.”
로마넨코가 시티코프에게 보낸 편지 중#

그러나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강진 등 조선공산당 간부 일부가 신전술 도입과 3당 합당 등 박헌영과 옛 경성 콤그룹 세력의 독단적인 당 운영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박헌영파는 이들을 제명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지만 성명서를 계기로 결집한 반(反)박헌영파는 당 대회를 소집해 합당 문제를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인민당과 신민당에서도 순차적 합당에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인민당 내 프락치에게 3당 합당의 지령을 내렸고, 프락치는 8월 3일 인민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격론 끝에 여운형과 상의 없이 여운형 명의의 합당 제의 서한을 공산당과 신민당에 발송해버렸다. 김오성이 이를 주도했다. 이렇게 탄생한 남조선로동당 지도부는 대부분 공산당 출신으로 충원됐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박헌영에게 정치적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하였고 1946년 8월 미군정에게 '박헌영이 인민당에 프락치를 심어 자신의 세력들을 빼내오는 등 정치적 강간을 벌이고 있다. 박헌영을 제거해달라.'고 했다. 여운형 측에 따르면 박헌영이 인민당에 프락치를 심어 여운형 세력들을 빼내오는 정치공작을 벌였다. 김형선과 김오성 두 인물을 통해서.

그리하여 3당이 합당되어 남로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여운형은 초대 위원장, 박헌영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로도 여운형과 박헌영은 좌우합당문제와 당 주도권 문제를 가지고 열나게 싸웠고, 결국 여운형은 얼마 못가 초대 위원장을 사퇴하게 된다.

그러나 박헌영 역시 미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1946년 9월 7일 미군정은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 간부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조선인민보' 등 좌익 신문을 폐간한다. 위기에 몰린 박헌영은 총파업을 통해 미군정에 타격을 주려 했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조에서 시작된 '9월 총파업'은 한국사 최대 파업으로 번졌다. 총파업은 경찰과 우익단체의 대대적인 진압으로 1주일 만에 소강 사태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박헌영은 비밀리에 영구차를 타고 본격적으로 월북, 이북지역의 황해도에서 주로 생활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한 명이 숨지면서 대구 10.1 사건이 발생한다. 대구에서 시작된 유혈 충돌은 순식간에 남한 전역으로 확대됐다. 조선공산당이 통제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편 여운형은 46년 12월 정계은퇴 선언과 남로당 탈퇴, 미군정의 과도입법의원 불참 등을 했다. 그 내막은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여운형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좌우합작 하나만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 평양과의 의사교환도 중요했다.
여운형이 김일성•김두봉에게 보낸 편지(1946.11.30)
내가 11월 16일에 보내 편지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하는 그 보고사항의 연속입니다.(중략) 나는 좌익진영의 통일이 중요한 문제이며 당내 파쟁을 중지시킬 최선의 방법은 사회노동당을 해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의 지도분자인 몇몇 은퇴한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당으로 복귀할 것입니다. (중략) 강진과 백남운은 합동에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끝까지 싸울 테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15

여운형과 김일성의 의도와 달리 사로당 관계자들이 남로당과 갈등하자, 김일성과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근로인민당 창당으로 대응하였다.
김일성은 백남운에게 사로당에서 탈당한 뒤 남로당으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재집결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이미 했었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백남운과 공산당 대회파 출신의 이영, 나아가 장건상같은 중도세력까지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로당 지도부는 여운형에게 사회노동당을 완전히 해체한 바탕 위에서 몽양이 나서서 보다 대중적인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북로당은 여운형에게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 가운데 종파분자들을 새 당의 중앙간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당 강령에 대해서는 이전의 인민당•신민당 강령의 수준이면 될 것 같다는 의견교환도 있었다. 북로당 지도부는 특히 몽양에게 사로당의 공식 해체과정을 밟는데 힘써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몽양도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약속을 하였다.
여운형은 사로당 출신들 가운데 남로당에 입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2월 26일에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인민당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을 당에 끌어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북로당이 개입하게 됐던 것이다.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26~236

즉 사로당의 공산당 대회파와 조선인민당 출신들이 남로당과 계속 갈등하여 좌익 통합이 안 되니까 여운형을 중심으로 뭉치는 근로인민당을 만들어 좌익 통합을 하라고 김일성이 여운형을 설득한 것이다. 시티코프 일기나 박병엽 증언록을 보면 박헌영 뿐 아니라 여운형의 의사결정에도 평양과의 의사교환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로인민당은 북로당이 개입해서 만든 정당이다.

보수주의적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 및 한국 사회주의운동사를 연구하는 펜실베니아 대학교 출신 역사학자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여운형은 '남로당은 미군정과 투쟁하는 정당이라면, 우리 근로인민당은 미군정과 협력하는 정당입니다'라고 연설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입법기관 참여에 대해 반대하자 여운형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여운형)는 "미국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 그들을 치는 화전양면 전술을 당의 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며 북로당이 반대하면 입법기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당신이 좌익들로 하여금 입법의원에 참가하지 않도록 충고한다면 나는 거기에 들어가지 않겠다. 서울로 돌아가서 남로당 창당을 위해 일하겠다. 만일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남로당을 창립할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의 당명 아래서 그것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근로인민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전당대회에서 당의 이름을 정하면 될 것이다." 이후 두 사람(여운형과 김일성)은 소련의 세계정책과 조선문제 해결과정에서의 역할 등에 논의했다. 두 사람은 "조선은 소련의 원조 하에서만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합의했다.
<로마넨코의 보고서> (인용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197의 번역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

이후 여운형은 정계은퇴 선언을 했음에도 끝까지 좌우합작운동을 고수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으로 통해 미소공위가 합의되면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끝까지 고수했다.

박헌영은 김일성 등 북한 측 주요인사들에게 여운형을 욕하며 여운형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라는 식의 서신을 보냈다. 이 때문에 여운형을 추종하는 이들은 박헌영을 당연히 적대적으로 깐다. 여기에는 여운형의 일가가 북한에서 제법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정치적 이유도 포함된다.

여운형은 1947년 7월에 암살당했다. 박헌영의 소행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종파분자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증언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파분자는 박헌영 계열을 지칭한다. 그러나 여운형 암살이 박헌영 범행이라는 것은 누명이다. 미국 비밀문서는 여운형 암살이 백의사의 범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백의사의 핵심인물 염응택도 그동안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으나 '실리 문건' 은 그에 대해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맹인장군' 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백의사를 통해 여운형의 암살에도 관여한 것으로 언급돼 있다.

중앙일보 정창현 기자

2.3. 월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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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평양 모란봉극장 앞에서 김일성과 박헌영.[19][20]
박헌영은 미군정으로부터 수배를 받자 이 실린 영구차를 타고 월북한 후, 수시로 남북을 비밀리에 오가다가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이후 내려오지 않고 북한에 머물렀다. 1차 남북협상 이후 48년 여름 남한에서 가까운 해주에서 머무르며 해주의 인민대표자 회의를 주관하고 남로당을 지휘했으며 2차 남북협상에 참여한다.

파일:15_health21c.jpg
남북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박헌영.

1948년 9월, 북한 초대 내각이 출범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출되었으며 남북노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형성되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정치위원회 부위원장, 조직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때만 해도 박헌영의 영향력은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월북했을 당시에는 그를 따라 월북하거나 전쟁 발발 후 월북한 남로당계 인물들이 수천에서 만까지 이르게 있었으며 카프계 작가들도 거의 다 이쪽에 속했다.

이들에게는 박헌영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월북 남로당계는 박헌영을 그야말로 우상숭배하듯 받드는 인물들이 많았으며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박헌영 헌시나 박헌영 선집이 자발적으로 발간되는 등 인기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박헌영은 최초엔 남조선로동당 당수로, 합당 후에는 조선로동당의 부위원장으로 이들을 정치기반으로 삼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으며 남로당원들 또한 박헌영 없이는 말 그대로 살 수 없었다.

그러나 박헌영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38도선 이남이었고 머릿수가 아무리 많다한들 북한에서 세력을 떨칠 수 있는 기반은 전무했다. 게다가 박헌영이 북조선에서 '부수상' 겸 '외무상' 자리에 있는 것도 '이름뿐인' 권력이었다. 게다가 주요 공산주의 정파인 남로당계, 연안파, 소련파, 만주빨치산계들의 연합 정권으로 내각 수상에 올랐던 김일성에게는 남로당계의 거두 박헌영이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박헌영과 김일성은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했고 오월동주나 다름없었다. 결국 남로당계는 점점 주도권을 잃어갔으며 박헌영 본인도 1940년대 말부터는 김일성을 수령이라고 칭하면서 김일성의 영도권에 표면적으로라도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파일:attachment/박헌영/박헌영삐라.jpg

6.25 전쟁 당시의 대북삐라로 월북 정치인들을 저격했다. 지금은 요직을 누리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탈린의 손에 숙청당할 거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8월 종파사건으로 현실이 되었다. 허성택 숙청도 예언한 삐라였다. 실제로 허성택은 1958년, 1차 당대표자회 때 오기섭, 류축운 등 살아남은 국내파들과 함께 숙청된다. 단, 홍명희는 숙청되지 않고 김일성의 신임을 받고 장수했다. 그리고 뒤쪽에서 스탈린에게 귀속말하는 아첨꾼처럼 묘사된 인물은 당시 북한 상황을 볼 때 숙청의 실무책임자였던 내무상 방학세로 보이며 '박'학세는 제작자가 '방'학세의 성을 박씨로 잘못 알고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옆에서 박헌영을 가리키는 인물은 허가이이다.[21]

1950년, 박헌영은 일생일대 패착이자 악수를 두고야 만다. 6.25 전쟁 직전 김일성에게 "조선인민군을 남한으로 내려보내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이에 호응할 것"이라는 엄청난 주장을 한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박헌영이 그토록 생존 위협을 느꼈다면 박비비안나에게도 북한에서 같이 살자[22]고 하고 부인 윤레나를 소련으로 보내지도 않은 것이 설명이 안 된다.

또한 박헌영의 발언은 '공산화 야욕'보다도 권력욕에 초점을 맞춰야 더 잘 설명된다. 박헌영은 20만 명 발언을 하기 전에는 남로당계 빨치산이 혁명에서 주된 역할을 할 테니 북로계는 보조역을 하라고 허세를 부렸다. 그러다 빨치산이 공적을 못 내니 그제야 김일성의 전면 남침을 지지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후방 교란할 20만 명 정도는 있다고 허세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전세가 불리해지니 김일성과 박헌영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서로 책임을 떠넘긴다. 권력욕에 초점을 맞춰 보면 남로당 세력을 강조해야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으니까 발언 의도가 쉽게 설명된다.

그러나 박헌영이 김일성의 전면 남침에 동의하기 전부터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려고 안달난 상태였다. 즉, 전쟁이 순수하게 박헌영 때문이란 것은 김일성의 책임 떠넘기기이며, 가장 큰 책임은 김일성 때문이다. 박헌영이 권력욕으로 시야 좁은 충격적인 발언들을 한 것은 맞지만 김일성의 판단에 그다지 큰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없다. 빨치산이 패배만 거듭했기 때문에 이미 김일성은 박헌영의 허세를 매우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박병엽의 증언을 모은 책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23]을 비판적으로 보면 보이는데,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박헌영이 비호감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나 비판적으로 보면 이미 김일성이 박헌영의 허세와 충격적 발언을 매우 의심하는 상황이었으며 따라서 전쟁 책임은 결국 김일성에게 있음이 보인다. 쉽게 말해 박헌영의 동조가 있든 없든 김일성은 전면 남침을 계획하고 있었고, 박헌영은 '순수한' 공산화 야욕을 위해서 남침에 동의했다기 보단, 남침을 북한 정권 내 남로당의 지분 확대 및 자기 권력기반을 다질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보고 무리수까지 써가며 가담했다는 게 좀 더 이치에 맞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실제로 굳게 믿었다는 주장도 있다. 1917년 러시아 대혁명의 성공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세계 피압박민족 해방'을 외치자 제국주의에 시달리던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전역에서 일대 사회주의 붐이 일어났고 당대 식민지 지역 지식인 중 많은 수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더구나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카를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역사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면서 전세계적으로 "깨어있는 지식인이면 당연히 좌익이지, 우익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모르는 고지식한 부르주아 놈들 뿐"이란 분위기가 팽배했다.[24] 광복 직후 한반도에서도 최대의 단일 정치세력은 단연 조선공산당이었다. 정예 당원 10만, 방계 조직 100만을 외치던 조선공산당이었으므로 박헌영은, 비록 조직이 파괴되어 모두 흩어진 채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인민군이 진군하면 기존 좌익계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들이 열렬히 봉기할 거라고 실제로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이 약속했던 남로당원의 봉기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광복 직후 이후 박헌영이 이끄는 조직은 규모만으로도 손꼽힐 만해서 주목을 끌었지만, 그들이 주도하고 연루된 굵직굵직한 사건들 때문에 남한 당국에 완전히 찍힌 지 오래였다. 공산주의자 탄압이 과해서 죄 없는 양민들까지 학살당하는 판국에 조금이라도 공산주의와 연관된 조직은 궤멸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농민들은 농지개혁법이 실시된 후에 6.25 전쟁이 벌어졌고, 북한식 무상몰수 무상분배식 농지개혁이 어떤 후폭풍을 가져왔는지[25]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 살해당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박헌영을 위해서 봉기 따위를 일으킬 필요조차 전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주장은 후에 박헌영이 북한과 남한 양쪽에서 철저히 매장당하는 계기를 마련한 원인이 되었다.

북한에 가장 도움이 될 군 조직만 들어도 남한에서는 이미 여수·순천 10.19 사건 이후 남한 군 내부 남로당원들이 숙군 작업으로 뿌리뽑힌 상황이어서 호응할 군대가 없었다. 개전 직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3일이라는 귀중한 시간 동안 진격을 멈춘 것도 이러한 남로당원의 봉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26]
어느 나라에서든 인민은 그들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서 유혈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주저해서는 안 되고 지금부터라도 장기전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
- 6.25 전쟁 중 한 연설
인민군은 여러분 남조선 인민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한을 풀어주고 역도들이 일으킨 내전을 끝내기 위해 진격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러한 엄숙한 시기에 모든 남반부 인민들은 왜 총궐기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 같이 일어서서 이 전 인민적, 구국적 정의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의 후방에 있어서는 첫째도 폭동, 둘째도 폭동, 셋째도 폭동입니다. 전력을 다해서 대중적, 정치적 폭동을 일으키시오.
하기와라 료(萩原燎) 지음·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주)한국논단, 1995, 266~267쪽]

6.25 전쟁 개전 초기 2~4만 정도로 추정되는 남한의 빨치산(파르티잔) 병력이 호응하여 지리산내장산 등에서 활동, 박헌영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빨치산의 대표격인 인물이 박헌영계의 최측근 이현상이었고, 또 남한 빨치산이 훗날 조선인민군의 패잔병을 흡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전쟁은 북한의 패전으로 귀결되었고 빨치산은 2년 사이에 급격히 쇠락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리승엽은 계속 빨치산 보충 부대를 조직하여 다수 남파하나 대부분 합류하기 전에 전멸하거나 국군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재월북하여 수포로 돌아가며 빨치산은 이후 군경의 토벌로 몰락하였고 이로인해 박헌영은 정치 기반을 완전히 잃게 된다. 어쨌거나 전쟁 초반까지는 박헌영-김일성 합작은 유지되었는데, 낙동강에서 고착 상태가 되자 김일성은 8월 25일 슈티코프 소련대사를 방문하여 미군이 오면 이제 끝장이라고 비관적인 반응을 보이며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다. 이때 김일성은 김책을 비롯한 부수상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나 박헌영에 대해서는 믿을만하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업무를 할 줄 몰라서 부하들에게 다 떠넘긴다고 혹평했고 무조건 자신의 말에만 동의한다고 불평했다. 슈티코프가 소련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또한 남에는 당조직도 없고 변절자도 많으며 빨치산 전쟁을 외치면서 실제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있다고 박헌영을 비난했다. 슈티코프도 김일성의 이러한 평에 대해 동의하였다.

이제 박헌영에게 남은 건 예정된 숙청뿐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뒤에 김일성은 1963년 조선인민군 창건 15주년 행사에서 박헌영에게 비난을 쏟았다.
그러나 남반부혁명은 역시 남반부인민들의 투쟁이 없이는 안됩니다. 우리는 제1차 남진 때에 이것을 절실히 체험하였습니다. 미국놈의 고용간첩인 박헌영은 남조선에 당원이 20만 명이나 되고 서울에만도 6만명이 있다고 떠벌였는데 사실은 그놈이 미국놈과 함께 남조선에서 우리 당을 다 파괴해버렸습니다. 우리가 락동강계선까지 나갔으나 남조선에서는 폭동 하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구에서 부산까지는 지척인데 만일 부산에서 로동자들이 몇천 명 일어나서 시위만 하였더라도 문제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남반부 인민들이 좀 들고일어났더라면 우리는 반드시 부산까지 다 해방하였을 것이고 미국놈들은 상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김일성 전집 30권, 295페이지.
파일:박헌영-4.jpg

전쟁 중 박헌영은 1950년 10월부터 문화훈련국을 개편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의 초대 총정치국장을 맡으며 미군의 공격으로 와해된 조선인민군 내부 당조직을 개편하고 조선인민군을 당 통제 하에 놓는 작업을 수행했다.

2.4.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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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항일무장투쟁 타도제국주의동맹 (1926) · 카륜회의 (1930) · 명월구회의 (1931) · 조선인민혁명군 (1932) · 민생단 사건 (1932~1936) · 남호두회의 (1936) · 미혼진회의 (1936) · 동강회의 (1936) · 조국광복회 (1936)
6.25 전쟁 전쟁 발발 책임 · 승패 인식
백두혈통
우상화
김응우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김형직 · 강반석 · 김정숙 · 김정일 출생지 왜곡
관련 서적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세기와 더불어 · 조선력사
*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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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과 공산 진영 간의 정전 협정이 임박하자 남로당 출신 박헌영은 북한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고, 결국 그는 정전 협정을 맺기 이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당한다.

당시 그가 체포당한 사유는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에 내통한 간첩 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리승엽은 6.25 전쟁 당시 서울의 인공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민군 간부는 줄행랑만 쳤고 휴전 직후 리승엽은 미제의 스파이, 반당 종파 분자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조선로동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위에서 해임당한 뒤 최후를 맞이했다.

평안북도 대유동의 지하갱도로 달아났던 김일성은 1950년 11월 7일[27] 만포진의 소련대사관에서 열린 볼셰비키 혁명 기념식에 참석하여 주변에서 주는 술을 마구 받아마셔서 만취하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이 실패한 것을 스탈린에게 누가 보고할지를 두고 박헌영에게 시비를 걸어대기 시작했는데,[28] 박헌영은 부(副)수상인 내가 왜 보고하냐면서 수상인 당신이 보고하라고 책임을 떠넘겼다.

이에 열 받은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당신이 말한 빨치산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백성들이 다 일어난다고 그랬는데 어디로 갔나? 작년 4월 우리가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 대원수를 만났을 때 당신 입으로 뭐라고 했는가? 우리 인민군이 산보(散步)하는 기분으로 서울까지만 밀고 내려가면 남로당 지하당원 수백만 명이 폭동을 일으켜 남한을 삼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보고하지 않았는가?"라고 마구 호통을 쳤는데 박헌영은 "아니, 김일성 동지? 어찌해서 낙동강으로 군대를 다 보냈는가? 서울이나 후방에 병력을 왜 하나도 안 두었는가? 그러니 후퇴할 때 다 독 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전부 다 내 책임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야, 이 새끼야! 그게 무슨 말인가?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만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너 무슨 정세 판단을 그렇게 했는가? 난 남조선 정세는 모른다."라고 화를 내면서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까지 집어던졌다고 한다. 다만 김일성은 전쟁 개전 당일 내각비상회의에서의 연설에서는 "리승만 도당은 《북벌》을 단행하기에 앞서 후방의 《안전》을 위하여 남조선에서 활동하고있는 애국적 민주주의력량과 유격대를 소멸하라는 미제의 지시에 따라 ... 여러 차례에 걸쳐 남조선 유격대들에 대한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읍니다."라고 하여 이미 빨치산이 전쟁에서 북한을 도울 역량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듯한 발언도 하였다. 적화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이를 박헌영의 공(功)으로 돌리는 시각을 없게 하려는 계산일 수도 있다. 김일성 본인이 이걸 기억하고 있다면 박헌영이 스스로 무덤을 파도록 내버려두고선, 책임를 전가하기 위해 굉장히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김일성 저작집, 전집 등은 나중에 북한 공식 역사관에 맞게 온갖 편집과 조작을 다 거친 자료들이라서 김일성에게 박헌영의 허풍을 미리 간파한 현인의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 지어서 넣은 대목이라고 한다면 또 할말이 없다.[29] 어쨌든. 김일성은 "남로당이 거기 있고 거기에서 공작하고 보내는 것에 대해 어째서 보고를 그렇게 했는가?" 라고 외치면서 대리석 잉크병까지 집어던졌다.# 박헌영이 잽싸게 피해서 잉크병을 맞지는 않았지만 성깔 있던 그가 지지않고 맞서 싸우면서 두 사람은 짐승처럼 싸워댔는데, 이를 본 소련 대사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가 기가 차서 집주인의 잔치상을 손님이 깽판치는 경우가 어딨냐고 호통을 쳤지만, 이성을 상실한 이들은 들은 척도 안했고 결국 라주바예프는 둘의 부관들을 불러내어 이 개싸움을 당장 멈추라고 지시했다. 부관들이 뜯어말린 후에야 싸움은 그쳤으나 소련 대사관의 파티는 파토가 났고, 내무성 부상을 지난 소련계 강상호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정국 분위기도 급속히 냉각됐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6.25 전쟁 시기 북한의 전략은 일단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 이북에서 국군 주력을 포위섬멸한 뒤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서 국군 예비대까지 박살내고, 그 이남부터는 남한 내에서 빨치산의 봉기에 호응해 남하하면서 국군 잔당을 소탕하고 부산까지 곧장 진격한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6사단의 강력한 저항과 한강 방어선의 구축으로 며칠이나마 한강 이북에서 국군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이 사이 미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충청도에 진입하기도 전에 미 육군의 선발대가 파병되어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빨치산의 봉기가 대규모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기에 중공에서 전투를 해온 정예병력(국공내전이 끝나고, 중국 공산당 군대 내에 있었던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북한으로 유입)을 중심으로 부산까지 나아가고자 하였다.

조선인민군은 초반의 기세를 바탕으로 낙동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이미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자리를 잡은 미군과 한국군의 방어선을 뚫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고 2~3일 후에 미군은 해군과 공군으로 북한 지역에 포격과 폭격을 퍼부었으며, 북측의 전선이 뒤로 밀리면서부터는 강을 경계로 폭격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포격과 폭격으로 평양에서조차 지하로 대피할 지경이었기에 전선에는 물자지원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으로서는 승전하지 못한 책임을 박헌영에게 지워야 했고, 일면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박헌영만 믿고 있던 남아있는 남로당계 인사들은 빗자루로 쓸려나가듯이 쓸려 버렸다. 1953년 7월 27일 휴전된 후 북한에서 8월 한 달 동안 검거된 남로당원이 무려 2,000명에 달한다. 그 중에는 시인 임화도 있었는데, 임화는 휴전 협정이 있고 나서 몇 주 후에 처형당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부수상 최용건이 재판장을 맡았고 최고재판소장 조성모, 국가검열상 김익선, 당 검열위원장 림해, 내무상 방학세가 재판부를 구성했다. 검사는 검사총장 리송운이 맡았다. 재판명은 '피소자 박헌영의 공화국 정권 전복음모,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북한 최고 재판소에서는 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제의 간첩'이라고 몰아붙힌다.

사실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박헌영의 미제 스파이' 설(說)의 근거랍시고 내세우는 것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억지스러운 주장이었다. 박헌영이 접촉한 미국 측 인물로 등장하는 이들은 미 육군 중장 존 하지, 미 대사관 일등 서기관 노블,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미 육군 대령 로빈슨, 항공 정보관 대령 니콜스, 미 육군 헌병 대위 존슨, 중위 버치 등 이미 잘 알려진 최고위급 인사 혹은 별다른 정보, 권한도 없는 하급 장교 뿐이었다. 참고로, 위와 같이 박헌영과 만났던 미국인은 박헌영 뿐만 아니라 북한의 다른 정치인들과도 접촉하여 만나느라 바빴다. 물론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자리였다.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이를 근거로 삼아 박헌영이 미제의 고위 인사를 수 차례 만나 접선했으니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다.

재판 중에 박헌영은 안경을 벗어서 시멘트 바닥으로 내집어던지면서 '그래, 네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라며 강하게 반발했는데 이 때 안경알이 박살났다. 이 재판에서 박헌영은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형문 과정에서 그는 '그렇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그렇겠지' 스럽게 대답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내가 스파이라고 쳐도 남로당 당원들만은 살려달라'라고 발언하는데, (*출처 소련파 출신 망명가가 회고한 박헌영 재판기)
북한에서는 이 발언을 왜곡하여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임을 시인했다. 끝으로 제가 과거에 감행하여 온 추악한 반국가적, 반당적, 반인민적, 매국역적 죄악이 오늘 공판에서 낱낱이 폭로된 바이지만 여기 오신 방청인들뿐만 아니라 더 널리 인민들 속에 알리여 매국 역적의 말로를 경고하여 주십시오."라고 선동하며 써먹는다. 이는 재판문서나 로동신문 등에 기록되어 있다. (1955년 박헌영에 대한 판결문,[30] 판결 직후 김일성계를 비롯한 일부 갑산파 간부들만 판결에 만족했지 나머지 간부들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침묵으로 일관한 채 퇴장했다고 한다.

재판 직후 증인으로 나와있던 리강국 등 주요 남로당계 간부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김일성의 다른 정적들을 때려잡기 위한 증언을 뽑아내기 위해 잠시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남로당 숙청 직후, 김일성과 회담하던 마오쩌둥은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라는 주장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도 박헌영은 일개 문인이니 가급적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어떠한 경우에서도 죽여선 안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소련대사 이바노프도 박헌영의 사형은 집행하지 말라는 소련 당국의 뜻을 전달했지만 김일성은 박헌영이 모든 것을 자백했으므로 절대 살려둘 수 없다고 거절했다.

1956년 2월, 니키타 흐루쇼프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비판보고인 <개인숭배와 그 결과물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박헌영은 엉뚱하게도 정치적 피해자가 된다. 흐루쇼프는 20차 당대회에 참석한 북한 대표단 최용건에게 스탈린 비판 문건을 전달했고 1956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긴급소집, 조선로동당도 개인숭배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결의했다. 이어 4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3차 당대회는 박헌영과 그 일당이 조선로동당 내부에서 개인숭배 행각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면서 김일성을 집단지도의 지도자로 대비키심으로 이미 숙청된 박헌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성을 추켜올렸다.

한편 김일성의 계속된 토사구팽 및 숙청에 환멸을 느낀 최창익, 윤공흠, 리필규, 서휘, 고봉기, 리상조 등의 연안계 간부들은 고려인 박창옥, 김승화 등과 연합하여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원흉으로 지목하고 김일성이 집단 지도체제를 실시하고 박금철, 박정애 등을 중용하지 않는다는 목표를 가지고 8월 그룹을 형성한다. 김일성은 이들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시켜주는 등 유화책을 제시했으나 8월 그룹이 개인숭배 비판을 중지하지 않자, 소련, 동유럽, 몽골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게 된다.[31] 자신을 대리하여 내부를 관리하고 있던 최용건에게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1956년 7월 19일,[32] 8월 그룹이나 소련이 박헌영을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소련 정보 기관 출신의 충성분자이며 재판 당시에도 배심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재판장의 말을 가로채면서까지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붙인 내무상 방학세에게 처형을 지시한다. 내무성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박헌영은 밤중에 야산으로 끌려나왔다. 죽기 전에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권총 두 방을 후두부에 맞고 생을 마감한다. 시신은 그 자리에 묻혔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 북한의 비인도적,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해 셰퍼드가 있는 우리에 박헌영을 던져 넣어 처참하게 찢겨 사망했다는 설이 유포되었지만 이는 사실은 아니다. 소련파인 강상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간첩증거를 고문과정에서 밝히지 않아 셰퍼드 두마리를 그가 취조받던 오두막에 풀어놓았다는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사실 가능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소문을 들은 소련 대사관이 강상호에게 사실 여부를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소문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2013년 장성택처형당했을 때 개에게 물어뜯겨 처형했다는 소문으로 발전하기도 했다.[33]

그러나 김일성은 박헌영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지 않았고, 그의 처 윤레나와 두 아이는 모두 지금까지 생사불명이다.

한편 이 숙청은 간접적으론 주세죽의 사망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주세죽은 카자흐스탄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박헌영이 숙청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딸인 비비안나마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어 숙청당할 것을 우려해서 비비안나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하지만 이미 건강이 나빴던 주세죽은 무리하게 모스크바로 오다가 건강이 더 나빠져서 결국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사망했다. 당시 비비안나는 주세죽이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서 다른 지역에 공연하러 가는 바람에 주세죽을 만나지 못했다. 정작 소련 당국에서는 박헌영이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비비안나를 북한에 송환할 생각이 없었다.

3. 가족 관계

그가 상해 부두에서 붙잡혀 취조를 받던 중, 그의 처 주세죽은 남편이 죽은 줄 알고 남편 친구였던 김단야와 재혼하였다. 그 때 김단야 역시 아내 고명자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단야가 박헌영이 살아남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을 주세죽에게 숨겼다는 설도 있다. 그 뒤 1929년 경 주세죽과 김단야가 눈이 맞았고 이를 안 박헌영이 주세죽과 결별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박헌영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국외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주세죽과 김단야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박헌영은 신경쓸거 없고 그냥 묻어두라고 함구했다.

이하 아내들과 자식들.

박헌영의 가족관계에 대한 내용은 이철의 저작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제 10화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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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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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그의 비서 윤레나(본명 윤옥)와 딸 박나타샤. 박헌영은 1949년 8월에 윤레나와 재혼했다.

박비비안나와 윤레나는 생전에 직접 만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의외로 사이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윤레나와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소련을 방문해서 비비안나를 만났을 당시 그녀는 윤레나에게 북한으로 돌아가지 말고 같이 소련에서 살자고 권했다. 당시 벌써 북한의 내부 정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레나는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북한으로 귀국했고, 결국 박헌영이 숙청되면서 이들도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외에 다른 이복 형제인 원경(박병삼)이 러시아를 방문해서 비비안나와 만난 적이 있다.

현대에 생존한 박헌영의 후손은 모두 비비안나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윤레나의 자녀들은 생사불명이고, 원경(박병삼)은 승려로 출가했기 때문.

4. 미제 간첩설 반박

"박헌영은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공산청년동맹의 일부 조직이 파괴되었을 때 이 전조직에 관해 일본 관헌에 고발하고 이 공로로 일찍 석방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혁명적 양심을 상실했고 1939년 10월 CIC(CIA 전신)로부터 미국을 위해 복무하라는 권유를 받고 승낙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박헌영은 무장폭동 지휘부를 결성하고 자기 세력을 확대하다 미군이 평양 방면으로 진공해오면 무장부대들을 평양 주변에 결집시켜 동원할 계획을 갖고 준비하다 내란 모의가 발각됐다. '박헌영이 정말 간첩이었느냐'라는 질문에 나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다시 한 번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질문보다 '박헌영이 왜 간첩이 되었는가'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함과 관심을 모아달라는 것이다. 혁명운동은 지식과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의리로 하는 것이다. 박헌영은 높은 지식과 재능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혁명적 신념과 의리가 없었다."
NL 현대사 p.21~22 내용을 발췌
1985년 한국 운동권에 주체사상을 전파한 인물이자 <강철서신>[37]의 저자인 김영환이 썼던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내용이다. 이들의 당시 주장에 따르면 '1925년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해서 활동했던 시기부터 6.25전쟁 시기까지 미제 간첩으로서 활동했다고 한다.'라고 하며 현재 북한은 박헌영을 미제 간첩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헌영 미제 스파이설'은 김일성의 정적 숙청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하기 위해 끼워 맞추기식으로 만들어낸 사실 왜곡이다. 1925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을 당시 박헌영이 사회주의 계열 조직에 관해 일본 관헌에 고발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38] 1939년 10월 CIA로부터 미국을 위해 복무하라는 권유를 받고 승낙했다는 얘기도 증거가 없으며 1951년 박헌영이 무장폭동 지휘부를 결성했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

1925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박헌영은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의 똥까지 먹어가며 버티다 1928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었고 1939년 박헌영은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한 뒤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의 심해지자 벽돌 공장에서 숨어지내야 했다. 북한이나 NL 계열이 주장하는 1951년 무장폭동 지휘부를 결성하여 내란을 준비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데 당시 박헌영은 1951년 2월 10일 외무상 명의로 UN 총회 의장과 안보리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이승만 정권과 미군의 야만적인 전쟁 범죄가 진행되고 있음을 규탄했고 1952년에는 미군의 세균 무기 사용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 중에는 "1941년 광주의 벽돌공으로 숨기전 미제간첩질을 하다 자기 혼자 살기위해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은 뒤 도망쳤다."는 허무맹랑한 자료도 있는데 사실 관계가 맞지 않는다. 1941년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하고 전쟁을 시작하게 되는 시기인데다가 박헌영이 미제간첩이기 때문에 적국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는다는 설정 자체가 오류고 일제에게 팔아먹었는데 보호받기는커녕 일제를 피해 광주의 벽돌공으로 위장하여 도망쳤다는 얘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래는 안재성 작가의 저서 <박헌영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훗날 북한 정권은 박헌영이 경성콤그룹 명단을 일제에 제공해 모두 체포하게 만든 대가로 자기만 살아남아 광주로 달아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성콤그룹이 붕괴한 것은 1년에 걸친 끊임없는 체포의 결과였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일제하 국내의 공산주의 조직들이 끝내는 모두 대규모 체포로 와해되고 마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밀고가 아니라 일경의 집요한 추적 때문이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의 최고 책임을 지고 들어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한 박헌영이 일제의 간첩으로 돌변해 산하 조직원 명단을 몽땅 넘겨주었다는 비방은 지나치게 악의적이다.


더구나 밀고의 대가라는 것이 광주에 내려가 3년 가까이 방직공장에서 인분을 져 나르고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찍는 일이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당시 전향자들은 반공 강연이나 학도병 모집 강연을 다니고 있었고, 그 대가로 편안히 살 수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공산주의자의 한명인 박헌영이 전향했다면 다른 운동가들을 좌절시킬 수 있는 최고의 선전물로 이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또 다른 주장대로라면 이 시기 박헌영은 이미 선교사 언더우드를 통해 미국의 간첩이 되어 있을 때였다. 아무런 금전적 대가도 명예도 없이 순수한 숭미 사상으로 미국을 위해 봉사했다는 그가 어느 순간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의 간첩으로 돌변해 동료들을 몽땅 갖다 바쳤다는 주장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억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박헌영 평전 p.218~219
앞의 인용문처럼, 박헌영이 전라도 광주에서 했던 일은 위생인부였다. 위생인부란 재래식 변소를 청소하고 똥지게를 메는 작업이다. 똥지게를 지고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징집영장이 뜨자 백운동 215번에 있던 광주연와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기면서 벽돌공장에서 일했다. 벽돌 나르기 노동을 하며 일당 2원 70전을 받으며 간간이 태평양 전쟁기를 버텼는데, 아무리 보더라도 일제 첩자를 한 대가가 이러한 삶이라는 것은 무리가 많다. 앞의 인용문에서 언급했듯이 대다수 일제 밀정들은 반공 강연이나 학도병 모집 강연을 다녔기 때문이다. 박헌영이 그랬다는 증거는 더더욱 없기에 북한에서 주장하는 일제첩자설은 억지 주장에 가까운 것이다.

미제간첩론이 사실이라 하자면 도대체 박헌영은 어떻게 해서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서 유학하고 1948년 북한의 부수상 자리에 오르고 북한에서 숙청되고 난 뒤 왜 남한에서는 미제를 위해 간첩질을 한 박헌영이 어떻게 칭찬받지 않고 빨갱이라 욕을 먹는 것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박헌영 미제간첩설'은 박헌영에 대해 공부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박헌영의 월북은 미군정이 '맥아더 포고령 2호' 위반을 들어 박헌영에게 체포령을 내리자 김일성이 권유한 것이었다. 아래 박병엽의 증언록인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에 나오는 인용문을 보자.
조선공산당이 9월 총파업을 주도하자 미군정은 좌익 탄압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고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된다. 이북 지도자들은 이남에서 합당사업이 성공적으로 진전되기보다는 3당 간에 갈등만 표출된 상황에서 총파업이 일어나 합당사업 자체가 위협받게 된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그가 이남에 있다가 미군정에 체포되기라도 하면 좌익세력의 기둥이 날아가는 판이라고 우려하였다.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연락원을 이남으로 급파해 박헌영을 이북으로 불러들이고 그가 이북에 머물면서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p.84~85

북한의 주장대로 20년이나 일제의 첩자 노릇을 했다면, 돈 한 푼 없이 3차례에 걸쳐 10년의 감옥생활을 한 것은 너무 야박한 보수를 받은 셈이지 않은가? 보통의 전향자나 밀정들은 당연히 돈과 직위를 받아 챙기거나 미곡조합·은행·탄광 같은 곳의 사무직 자리를 보장받았다. 최소한 술집을 경영하게 하거나 양조장을 불하해주었으며, 만일,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최고 지도자 박헌영이 전향했다면 일제는 이보다 더 좋은 선전거리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박헌영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일제 마지막 날까지 벽돌을 나르고, 해방 후에도 월북할 때까지 자기 방 한 칸조차 없이 떠돌아 다닌다녔다. 도합 10년에 이르는 감옥살이를 바탕으로 일제와 타협한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의 주장은 합리적인 부분에서 의구심이 들기조차 한다.

미국 간첩설은 더 어처구니가 없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미국의 간첩이라는 근거는 더욱 우스꽝스러웠다. 박헌영이나 이강국과 접촉한 미국 측 인물로 등장하는 이들은 미군 사령관 하지, 미국대사관 일등서기관 노블, 선교사인 언더우드, 육군대령 로빈슨과 항공정보관 니콜스 대령, 헌병대위 존슨과 버취 중위 등 너무 잘 알려지거나 혹은 정보업무와 관련이 없는 하급 장교들이었다. 접촉하는 게 임무였다. 그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씩 조선의 정치가들을 만나느라 바빴다. 고도의 기밀 유지를 생명으로 하는 간첩 행위를 위해 만난 인물들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대들이었다.
박헌영 평전 p.573~574
박태균의 경우 박헌영의 미제 간첩설에 대해, "북한의 재판 자료에 따라서 박헌영이 이미 1945년 이전부터 미국의 요원들과 접촉하고 있었다는데, 그럼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남한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활동은 모두 미국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인가?"라며 의구심을 드러냈고, 납득할 수 없는 의문이 많기 때문에 남한의 학계에선 이 사건을 정치적 숙청으로 해석한다고 <한국전쟁>이라는 책에서 주장했다.[39]

4.1. 반론

이하의 주장은 당시 재판을 직접 방청한 김종중의 증언에 바탕한다. # 북한의 최고검찰소 검사였던 그는 1960년 남파되었지만, 별 성과 없이 비무장지대에서 체포되었고, 1961년 (마침 5.16 군사 쿠데타 직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15년형으로 감형되어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2000년, 비전향 장기수 송환 때 북한으로 돌아갔고, 2009년에 별세하였다고 한다.

그는 출소 이후 1991년 월간 과 취재하면서 북한의 공식 공판기록에 나오지 않는 박헌영 재판의 내막을 진술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작은 '경기도 민주여성동맹(여맹) 위원장 사건'이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5차 전원회의 직후, 경기도 여맹위원장이 중앙당사로 급하게 와서 살려달라고 애원한 사건이 계기였다.
"당시 대남사업 관계는 개성에서 남로당이 취급했는데 그 내부에서 사건이 들통났던 것입니다. 해주에서 대남 연락부 인쇄소 사장으로 있던 림화가 자신들의 죄과를 거론하는 경기도 여맹위원장 김경애를 죽이려 하자 중앙당에 긴급히 피신해 구명을 호소했었어요. 그러자 중앙당에서 왜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했는지 임화를 불러서 조사하니 이승엽, 이강국, 배철, 임화 등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김경애가 알고 있었기 때문임이 발각됐어요."
여맹위원장이 알게 된 해주 대남사업담당 남로당 출신들의 간첩 행위는, 남파 유격대와 공작원의 통로, 접선지, 명단 등을 미국 정보기관에 넘겨준 것이라고 한다. 이 일로 조선로동당 지도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로동당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즉시 이승엽, 이강국, 임화, 배철, 조일명, 이원조 등 관련자들을 체포해 수사에 착수했다. 전쟁 중에 발생한 사건이라 성격상 1953년 3월 5일까지는 대외비로 처리됐고, 박헌영(당시 외무상이자 정치국원)에 대해서는 별도의 정밀 조사에 들어갔다.

사실 남로당의 수상함과 관련해서는 이 사건이 처음은 아니었다. 김종중은 한국전쟁 개전 이전부터 평양에서는 이미 남로당 지도부에 대하여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가지 미심쩍은 사건을 적발했지만, 미국의 간첩 활동이라는 것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극심한 종파주의의 폐해 정도로 알고 비판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군정기에 남로당이 불법화되면서 박헌영 등 지도부가 월북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해주에서 대남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남도부, 김달삼 부대 등 유격대를 남쪽으로 내려보내면 가다가 도중에서 속속들이 사살, 체포돼요. 그러자 평양에서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당시 제3군관학교 교장으로 있던 오진우를 부대장으로 한 유격대를 태백산까지 내려보냈다 돌아오게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또 한국전쟁 직후 서울시 인민위원회(현 서울시청) 지하실에서 밤에 비명소리가 들린다는 정보가 있어 내무성 제1국장 박정만이 변장해 조사를 나와 보았습니다. 당시 이곳에는 당비서 이승엽이 서울시 임시토지조사위원장으로 일을 보고 있었는데 별 하나짜리인 내무성 국장은 드러내놓고는 얼씬할 수 없었던 곳이지요. 박정만은 거기서 38명의 공산주의자가 죽어 나갔다는 사실만을 발각하고 돌아갔어요.


또 전쟁 전 경기도당 위원장이었던 안영달이 서울시당 책임자였던 김삼룡, 이주하 두 사람을 피신시켜 두고 있었는데 당시 이승엽 측에서는 직접 보호할 테니 두 사람의 은신처를 알려달라 했습니다. 안영달은 그러기에는 위험한 시기라 하여 계속 거절했으나 상부지시를 끝내 막아낼 수는 없었지요. 김삼룡, 이주하는 이승엽 측에 넘어가자마자 체포됩니다. 전쟁이 나고 이승엽은 안영달의 입을 막기 위해 백의종군시킨 후 낙동강전선 칠곡 부근 나루터에서 사살했습니다. 안영달에 대한 사살은 대남사업부에서 파견한 유격대 제6지대장 맹종호를 시켜 이뤄졌는데, 이 장면을 인민군이 사진으로 잡아 보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됐어요."

1952년에는 월북 만담가로 유명한 신불출이 임화와 조일명을 사회안전성에 고발한 일도 있었다. 임화가 술자리에서 자기에게 "당신은 만담가이지만 예술가 아닌가. 내 밑으로 들어와라. (중략) 우리는 남로당이니까 박헌영, 이승엽 동지에게 의지해야 한다. 정부를 엎어버려야 한다. 박헌영을 밀어(줘)야 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사회안전성이 임화와 조일명을 주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해 10월 말에는 연락부 책임지도원 조옥래가 연락부원 윤병삼과 술을 마시다 싸웠는데 윤병삼이 취해서 "이까짓 것 뒤집어 버려야지. 또 밀고 들어오면 가만 놔주지 않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조옥래가 "그럼, 미군 놈들이 밀고 오면 다시 쳐야지."라고 호응하자, 윤병삼이 "미국 놈이 아니라 딴 놈 치자는 소리야."라고 했다. 깜짝 놀란 조옥래가 "무슨 소리냐. 당신, 반혁명 반당 분자 아니냐."라고 나무라자 윤병삼이 "네가 당에 충실하면 얼마나 충실하냐"라며 조옥래를 때렸다고 한다. 이튿날 조옥래는 윤병삼의 발언 내용을 상급인 리송운에게 전하고, 리송운은 이를 다시 박정애와 사회안전상 방학세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사회안전성은 이 때부터 관련자들을 미행하고 그들 자택의 운전기사나 가정부를 비밀리에 정보원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뭔가 심상치 않다 싶어서 전쟁 발발 전후 적발한 미국 정보원 사건들을 재검토해보니 박헌영, 이승엽 등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게 김종중의 증언이다.

대표 사례로 현앨리스와 리사민 사건을 들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 시민권자인 두 사람은 1950년 중반 북한에서 체포되었는데, 해방 후 남한에서 2년 정도 머물면서 미군정의 정보 계통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 후 1949년 1월 미국을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북한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는데, 체코 정부도 북한 내무성도 이들의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며 수용 거부를 통보했다. 이들은 부모의 고향이 북한이라고 주장했지만, 확인 결과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박헌영 당시 외무상이 내무성의 판단을 무시하고 입국 비자를 내줬다고 한다. 또 두 사람이 들어오자 외무성에서는 환영 행사까지 열었다고 한다. 현앨리스는 조선중앙통신사 번역부장에서 1949년 11월에는 외무성 조사보도국으로 자리를 옮겼고, 리사민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사연구부 부부장을 맡았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파격 대우였다.

그런데 이들이 1949년 말부터 '이상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이 인적 드문 곳에서 비밀리에 만나는 게 내무성에 잡혔고, 유럽에 편지를 자주 띄웠지만, 답장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이 단파라디오를 듣는 사실도 포착되었다. (이 때문에) 1950년 들어서는 감시와 편지 검열을 강화했는데 이들은 그 해 3월 당국에 유럽 여행을 요청했다. 내무성은 불허했지만, 박헌영의 외무성 측이 4월에 출국 비자를 내줬다. 내무성 안전국은 이들을 계속 미행하다가 모스크바 공항에서 붙잡아서 수색을 해보니 군 관련 비밀을 포함해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강제 귀환되었고, 조사 결과 미국 정보기관의 임무를 받고 침투한 요원임이 드러났다. 적발 당시에는 박헌영과의 연관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박병엽(1983년 월남, 1998년 별세)에 따르면 현앨리스와 리사민의 정체가 빨리 밝혀진 배경에는 '조창영 부부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재일조선인연맹(조련, 조총련의 전신)에서 활동했다는 조창영이 1949년 11월, 부인과 함께 중국을 거쳐 입북했는데 박헌영과 이승엽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조창영은 박헌영과 이승엽을 만났고 대외문화연락위원회에 배치되었다가 조국보위후원회로 옮겨서 일했다. 그런데 부부가 북한에서 살면서 갈등을 겪은 건지 1950년 3월에 자신들이 미국 정보원임을 자수했다고 한다. 조사에서 조창영이 입북 후 현앨리스와 리사민을 2~3차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사람이 먼저 들어갔으니까 만나서 협력을 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조창영은 박헌영과도 여러 번 만났고 이승엽과는 수시로 접촉했음도 확인되었다.

김종중은 '말'과의 인터뷰에서 박헌영의 간첩 혐의와 관련한 결정적 증거는 그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시설이었다고 말했다.
"이승엽 등을 조사하니까 사건의 실마리가 쉽게 풀렸어요. 지금의 평양 대성산동물원에 있던 3층짜리 일제 건물 별장에 박헌영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지하실에 대남사업용 무전시설을 두고 있었지요. 바로 그 시설이 간첩행위에 이용된 것입니다. 무전시설에 의심을 품은 것은 정전회담 도중이었지요. 정전회담 안건 준비를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남일, 박정애 등 5명이 모여 했는데 수석대표인 남일이 UN군 측과의 회담장에 나가면 다섯 명이 한 얘기를 미군이 알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해요. 한 예로 포로교환 관련으로 새로운 제안을 내놓으면 미군 측은 즉석에서 부정적 반응을 보였는데, 항상 상대방의 안건에 대해서는 오랜 토론을 거쳐 답변을 주던 미군의 태도에 비춰봤을 때 '아하! 이거 샜구나'라는 느낌이 들어 남일이 돌아와 보고를 한 것이지요."
당시까지 북한에는 전파탐지시설이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긴급히 전파탐지기를 들여와서 박헌영 집 주변에 배치했다고 한다.
"전파탐지기를 설치하기 전에도 대남사업과 관련된 모든 무전은 내무성에 보고된 무전이 전부인 것으로만 알았는데 비밀리에 전파탐지기를 설치하고 나니 승인되지 않은 무전이 계속 나가고 있음을 잡아냈지요. 그게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당시 박헌영이 거주하던 대성산 가옥 무전수는 나중에 조사해보니 49년 서울에서 치안국 대공 중앙분실장을 지냈던 백형복이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백형복은 치안국 근무시절 김삼룡, 이주하를 체포, 수사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전쟁 직전 '의거 입북'으로 가장해 평양에서 활동했던 것이지요. 대남사업이 특수한 임무라 해서 아무도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탓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을 직접 참관한 김종중은 인터뷰에서 재판 기록에 없는 박헌영의 최후 진술 내용을 소개했다.
"내가 왜 일제 경찰의 앞잡이가 됐는가. 하도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서였다.[40] 해방이 되고는 그것으로 그칠 줄 알았는데 미국이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것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 지금에 와서 뼈저리게 후회된다."
김종중은 이 최후 진술을 소개하면서 생의 회환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박헌영이 일제 때부터 정보원 역할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1925년 두 번째 투옥됐던 신의주형무소에서 그는 7년을 선고받았지만 만 2년을 살고 정신병자 행세를 해서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의주형무소에서 같이 징역을 살았던 황태성 씨에게 제가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같은 일은 공산주의자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제 경찰과 짜고 벌인 연극이다'는 것이었어요. 게다가 세 번째 징역을 살았던 대전형무소에서는 불가사의하게도 박헌영만 풀려납니다. 당시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면 전향을 하더라도 거물급은 서대문형무소와 청주형무소로, 일반 활동가들은 각 도마다 설치된 대화숙으로 이감해 계속 구금시켰거든요. 그러나 박헌영은 이때 총독부 사법국과 밀약해 겉으로는 전향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정보원으로서 일경에 도장을 찍어준 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석방된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어 과거를 털어버리고 공산주의자의 길로 나아가려던 박헌영 앞에 가로놓인 장벽은 미국 CIA가 일본 총독부로부터 입수한 바로 그 비밀 일제 첩보선 명단이었지요. 공산당 당수직을 버리고 공개적인 자기 비판을 거쳐 백의종군하느냐, 미국과 타협하느냐 갈림길에서 그는 뒷길을 택했던 셈입니다."
결국 김종중의 증언에 의하면 박헌영은 해방 직후 미국 첩보기관에 발목이 붙잡혔고, 이승엽은 포고령 위반으로 1946년 12월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수감된 과정에서 역시 과거의 친일행적을 들어 협박하는 미국 CIA의 공작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후 남파되었으나 바로 체포된 김종중은 전술했듯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바로 거기에서 박헌영 간첩 사건의 새로운 물증을 찾아냈다고 한다. 바로 먼저 수감 중인 남파 공작원들의 증언이다.[41]
"50년부터 53년까지 대남사업으로 남파되었다가 붙잡혀 형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어요. 그들의 얘기가 기막힙디다. 이득윤 씨, 임흥순 씨, 안학섭 씨 등이었는데 그들이 당시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로 남쪽에 내려오니 접선장소에 특무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음! 아무개 왔구나. 도민증 XXX번이지?' 하면서 잡아가더라는 거예요. 다음에는 누구누구 나온다는 명단까지 제시했다고 그러더군요.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북의 남로당 지도부에서 간첩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지요. 그저 지하사업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미칠 지경이라고들만 털어놓더군요. 현재(1991년 당시) 그 증인들은 모두 생존해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1991년 5월자 월간 '말'지의 기사 내용에서 발췌한 것이다.

5. 기타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파일:고려공산당 한글 로고.png
1921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21 - 1925 정당 해산

[[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
]]
1925 - 1928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28 - 1929 정당 해산

[[소련 공산당|]]
1929 - 1934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34 - 1939 체포 후 일시 정계 은퇴

[[경성 콤그룹|
경성콤그룹
]]
1939 - 1941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1 - 1945 정당 해산


파일:조선공산당 글자.png
194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건준 참여를 위한 탈당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
1945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 1946 정당 해산

[[남조선로동당|
파일:남로당_노랑.png
]]
1946 - 1949 입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949 - 1953 합당[46]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53 - 1956 제명

7.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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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8. 관련 서적

사회주의사는 백과사전이든 대중서든 오류가 많으니 정확한 정보를 원하면 논문과 비교가 필요하다.
박헌영과 호찌민은 각별히 친밀했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민중을 어떤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가를 서술한 이 책은 베트남 혁명의 지도자가 되는 호찌민에게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
손석춘, 박헌영 트라우마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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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공화국 또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표방하는 국가
공산주의 정당이 여당으로 집권 중인 국가 (: 연립정부의 일원)
붕괴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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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00년 5월 1일[2] 1955년 12월 5일, 1956년, 1957년이라는 설도 있다. 사망일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음. 박헌영 평전의 저자 안재성 씨의 경우 7월 19일에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여운형이 사망한 날도 7월 19일이다.[3] 박제상(朴堤上, 363년 ~ 419년)의 55세손으로, 태사공파 예산문중 56세 ◯영(永) 항렬.(족보)[4] 오랫동안 밀양 박씨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이 1997년 인터뷰를 통해 바로잡았다.[5] 의미는 "인민의 고무래", 즉 하층 농민 계급을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인데 1929년 소련에서 유학 생활 중 썼던 호이자 필명이었다.[6] 태사공파 예산문중 55세 현(鉉)◯ 항렬.[7] 초명은 박현우(朴鉉禹).[8] 이태보(李泰甫)의 장녀이다.[9] 양반의 특권을 잃으면 군역을 져야해서 입대를 해야함은 물론이고 세금면책도 없다.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았으면 박헌영은 군대에 갔어야 했을 것이다.[10] 최철원(崔喆源)의 딸이다.[11] 이때 YMCA에 참여하여 영어도 배우고 선교사 언더우드 등과 교류한 것을 근거로 훗날에 북조선에서 그를 '미국의 간첩'이라고 재판정 문서에 적었고, 언더우드를 만난 것을 빌미로 그가 미국 간첩이라 주장하지만 이에 대해 입증할 증거는 없다.[12] 이 인분 사건을 두고 훗날 이승만은 박헌영을 가리켜 "나는 똥을 먹은 놈과는 만날 일이 없다."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13] 출처 #[14] 혁명가들의 자녀들을 양육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시설이나 인원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15] 원래 개인적인 테러리즘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다. 당장 카를 마르크스 자신부터 일부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행위는 자본주의 권력을 무너트리는 데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한다고 여러 차례 비판했다. 또 공산주의의 실현에 테러리즘이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 트로츠키의 경우도 각성되고 조직화 된 대중에 의한 테러를 주장한 것이지, 혁명가 개인의 파괴행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설령 테러로 일부 지도자를 살해한다 하더라도 체제는 그를 대신할만한 사람을 얼마든지 배출할 수 있으니 무의미하다는 것. 물론, 개인적인 테러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것이 '강력한 지배구조에 대하여 저항하는 개인의 유일한 실천'이며 '테러행위에는 지배체제에 경종을 울리는 기능과 함께 저항의 실천을 알림으로써 조직화의 동력을 제공하는 기능이 있고', 적발되기 쉽고, 내부적으로 경직화되는 부작용을 피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16] 출처: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17] 출처: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18] 박헌영도 참석한 북로당 조직위 지도부 협의회[19] 옆에는 잘렸으나 원래는 허헌이 박헌영의 옆에 서 있었다. # 이후 북한에선 박헌영의 모습을 기록말살하고 허헌의 모습만 남겨서 허헌이 김일성의 교시를 받는 사진으로 선전한다.[20] 김일성은 박헌영의 교조주의적인 면을 비꼬아서 박헌영을 주로 '리론가(이론가)'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도 6.25 전쟁 이전은 겉으로라도 친해서 박헌영이 비서 윤레나와 결혼할 때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는 사진도 있다.[21] 삐라 후면의 글에도 계속 박학세로 표기되어 있다.[22] 아버지가 같이 살자고 했는데 무용을 배우고 싶은 욕구 때문에 거절했다고 박비비안나가 말했다.[23] 남로당만 악역으로 묘사하고 김일성과 북로당을 선역으로 묘사하는 책이라 비판적으로 봐야 할 책.[24] 이런 분위기를 (사회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란 말에 빗대어 비꼰 말이 "사회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다.[25] 남한에서는 지주의 땅을 유상으로 강제 매입하고 유상으로 소작농들에게 팔았다. 이 유상으로 판다는 게 어떤 식이였냐면은, 일단 농경 사유지를 얻은 농민들은 5년간 소작농 시절처럼 거둔 수확량의 일부(30%)를 정부에 갚음으로서 그 땅값을 지불하고 그 이후엔 온전한 자기 사유의 농지를 갖는 것이었다. 비록 이후에 6.25 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태를 겪고 주춤되면서 최종적으로 매입/분배된 농지 자체는 별로 많지는 않았을지언정, 농민들이 유상으로 갚는 비용은 일제시대 소작료보다 현저히 낮았으며, 특히 북한에서는 어마무시한 현물세로 인민들의 통수를 후려치며 개혁 이전의 수취율만한 양을 뜯어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남한식 토지개혁이 훨씬 더 실속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26] 그러나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한 것은 한국군 6사단이 분투한 춘천-홍천 전투의 영향으로 동부전선의 진격이 늦어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군수품 보급이 늦어졌다는 설도 있다. 혹은 한국군이 너무 맥없이 무너지고 수도 서울을 쉽게 내주자 김일성이 오히려 당황해서 일단 세웠다는 설도 있다. 어쩌면 어느 한 설만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고, 각 설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수도 있다.[27] 내무성 부상 강상호는 이날을 1951년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는 건너서 들은 인물이고, 또 대화의 맥락을 봐서는 박길룡이 기억하는 1950년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28] 참고로 주소(駐蘇) 북한 대사를 지낸 리상조는 당시 김일성이 패전의 책임으로 굴라그에 끌려갈까봐 벌벌 떨고 있었다고 주장했다.[29] 왜곡이 훨씬 덜했던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이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공식문선도 해금된 원본과 비교해보면 정권의 공식 논조에 맞게 바꾼 내용들이 수두룩하다.[30] 이 판결문은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한 김남식의 저서 <남로당 연구>에서 볼 수 있다.[31] 허겁지겁 귀국했다는 서술도 있으나 김일성의 일정을 보면 보고를 받고도 몽골에 들러서 가축을 더 보내달라고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다만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몽골에서 단순히 협상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걸 박갑동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지만.[32] 박길룡의 증언.[33] 다만 이 소문은 홍콩에서 만들어졌다.[34] 출처 #[35] 관련기사[36] 출처 #[37] 강철서신에서 강철은 스탈린을 의미한다.[38]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김성보 교수 또한 박헌영이 미국이나 일본을 위해 첩자노릇을 했다는 걸 입증하는 일제 문헌이나 미국 문헌은 없다고 말했다.[39] 박태균,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책과함께, 2005, 331쪽.[40] 독립운동가이자 백의사의 리더로 알려져 있지만, 2021년 6월 9일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가 그는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유력한 증거를 발굴했다.[41] 휴전 이후 남파된(후술할 대전교도소의 장기수 셋은 전쟁 중에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기에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비전향 장기수 사이에서는 이미 한국전쟁 때부터 정보가 새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헌영이 언급한 좌표만 미군 폭격기가 폭격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재판을 방청하면서 '그러면 그렇지' 그랬다고.[42]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멸망하게 하려고 한 그의 극좌적인 행적은 미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다. 박헌영 역시 독립운동을 한 공은 공으로서 인정해야 마땅하나 해방 이후 북한정권에 참여하여 6.25 전쟁을 주도했던 그 죄가 공에 비해 너무나도 크다. 그가 대한민국에서 끝내 복권되지 못하게 만든 업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43] 이 때문에 여운형, 조봉암 등의 반대파나 이탈자가 속출했고, 심지어 일부는 이를 계기로 (아마 박헌영을 비롯한 교조주의자에게 회의감을 느낀 건지) 아예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노선에서 이탈하여 우익으로 전향하기도 했다.[44] 심지어 조선공산당원이었던 이일재(이후 민주노총 지도위원 역임)는 8월 테제 같은 안일한 정세 판단을 보면 이론가로서 훌륭하다고도 보기에 어렵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일어난 대구 10.1 항쟁(이일재는 대구 출신이다), 제주 4.3 항쟁, 여순 10.19 항쟁 등은 모두 뒤늦은, 그나마도 준비되지 않은 말단 당부의 즉자적 발악에 가까웠기에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 여담으로 이런 평가는 북한과도 비슷한데, 재미있는 건 정작 이일재는 대북관도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는 평생 좌파공산주의자임을 자처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건 그런 그를 지도위원으로 추천한 건 다른 곳도 아닌 범민련이었다고. 출처 : 이일재, 최후의 코뮤니스트[45] 김두봉, 최용건, 홍명희 등이 남침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남침유도설을 학계에서 추방시켰다. 6.25 전쟁사의 권위자 중 1명이다.[46] 북조선로동당과 신설 합당[47] 김원일 작가가 1982년 <문학사상>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48] 일각에서 <서울 1945>가 좌파 드라마라고 비판을 하지만 북한에서 미제 간첩으로 규정짓는 박헌영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자 광복미군정친일파에 맞서는 인물로 묘사했다.[49] 민감기의군(국민당 좌파)가 아닌 사회주의 국가가 한반도를 해방하면 한국의 지도자가 된다. 국민당 좌파-국민혁명정부-중화민국이 해방하면 김원봉이 지도자가 된다.[50] 전자는 36년도에 독립한 한국이 주인공이고 후자는 1차세계대전의 참전국들이 모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세계관으로 독립조선총독부로 시작하지만 이후 조선을 독립시켜 플레이할 수 있다.[51] 사실 홍범도가 죽인거라 실질적으론 암살이라 봐도 된다만 홍범도가 몰래 죽인 것도 아니고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와 죽인거라 독자들은 이걸 암살이라 안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