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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연평해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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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연평해전 | |
발생 일시 | |
1999년 6월 15일 | |
발생 위치 | |
대한민국 북방한계선 부근 | |
교전국/세력 | |
대한민국 | 북한 |
지휘관 | |
해군작전사령관 중장 서영길 2함대사령관 소장 박정성 2전투전단장 준장 송영무 고속정 편대장 소령 정순용 참수리 325 정장 대위 안지영 참수리 327 정장 대위 남영우 참수리 357 정장 대위 연제영 | 불명 |
전력 | |
포항급 초계함 참수리급 고속정 | 청진급 경비정 신흥급 어뢰정 상하이-2급 경비정 등산곶 경비정 대청급 경비정 |
피해 규모 | |
7명 부상 참수리급 고속정 2척 선체 일부 손상 | 20명~30명 사망(추정) 30명~70명 부상(추정) 신흥급 어뢰정 1척 침몰 경비정 1척 침몰 5척 파손 |
결과 | |
대한민국 해군의 대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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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해군이 북한 해군을 거의 압살한 해전.
1999년 6월 15일 오전 9시경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 해군의 도발로 벌어진 남북 함정간의 해전으로 당시 대한민국 해군은 7명이 부상을 입고 고속정이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 북한 해군은 어뢰정 1척과 경비정 1척이 침몰하고 다른 경비정 3척도 심각한 타격을 입고 퇴각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2. 제1연평해전의 설명
꽃게철[2]에 북한 어선이 대규모로 NLL 근처에서 조업을 하자 북한군이 이를 감시하러 내려왔고 그 결과 한국군과 대치하는 일이 일어났다. 한편 이러한 일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일어나고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군은 서해를 안보 취약지대로 설정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북한은 1999년 6월 6일부터 15일까지 NLL 근처를 들락거리거나 NLL을 넘어오면서 몇 시간씩 한국 영해에 머물면서 한국군을 도발하고 있었는데 이는 실질적인 남북 해상경계로 인식되어 왔던 NLL을 무시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6월 15일 오전 북한 경비정 4척이 어선 20척과 함께 북방한계선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왔다. 이에 한국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을 동원하여 선체를 직접 충돌시키는 밀어내기로 북한 함정을 NLL밖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고속정이 북한 고속정에 올라타는 일이 벌어졌고 자칫 잘못했으면 큰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참수리 325정도 북한 고속정을 함수로 들이박았는데 함교에서 북한군의 시체와 생존자들이 총을 겨누는 모습이 가까이에서 보였다고 한다.
오전 9시 28분 충돌공격을 받은 북한 청진급 경비정 1척이 갑자기 25㎜ 기관포로 공격을 시작하자 다른 함선도 이어서 공격에 가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 정장 안지영 대위를 비롯하여 당시 325호에 탑승한 장병들 중 일부가 부상을 당했다.[3] 하지만 325호는 곧바로 40mm 기관포와 20mm 시벌컨으로 응사를 가했다. 이때 북한 경비정은 오픈탑 형식이었고 대부분의 북한 수병들이 근접전을 위해 함상으로 나와 있었던지라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4]
이어서 포항급 초계함 영주함이 76㎜ 함포로 집중포화를 가했고 그 결과 북한의 신흥급 어뢰정 1척과[5] 청진급 중형 경비정 1척 등 2척이 침몰하였으며 다른 경비정 3척도 크게 파손된 채 퇴각하였다.[6]
제1연평해전에서에서 쓰인 "충돌" 전략이 큰 효과를 거두면서 오히려 역효과가 생겼는데 잘못된 교전 수칙이 제1연평해전의 승전으로 별다른 문제를 지적받지 못한 채 방치된 것이다. 결국 북한은 이를 역이용해 제2연평해전에서 대한민국 국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수뇌부는 제1연평해전의 성공적인 결과로 당시까지 해군 수칙에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자세한 건 제2연평해전 문서 참고.
3. 제1연평해전 그 이후
해전 직후 1시간이 채 안 되어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 사령부와 북한군 사이의 장성급 회담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이 회담에서 북한 측은 한국 측이 먼저 도발을 해왔다는 억지 주장을 펴는가 하면 더 나아가 NLL이 국제법상 북한에서 12해리 이내이기 때문에 함정이 출동한 지역은 북한 영해라고 선언하였지만 먼저 기습적으로 포를 쏘기 시작하고도 교전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한 북한의 주장은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회담은 양측의 입장 차이만 드러낸 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연평해전 소식은 사람들에게 깜짝 놀랄 뉴스이긴 했지만 큰 이슈는 되지 못했는데 당시 남북관계가 화해 분위기로 접어들던 국면이기도 했고 대한민국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가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적게 끄는 요인이 되었다.
북한은 제1연평해전에서 당한 참패를 계기로 군수뇌부를 대거 교체하고 한국 해군의 전술교리를 연구하는 등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하였다. 김정일은 제1연평해전 당시 참전하여 684호의 정장을 포함한 상당수의 승조원이 사망한 상황에서 배를 귀항시킨 갑판장 김영식 상위를 대위 계급으로 진급시킨 후 함장으로 임명하였고 제1연평해전 당시 출항하여 평소 장착 중이던 함수의 85mm 전차포와 함교 뒷편 포좌에 장착된 4연장 고사총과 후갑판 및 주갑판에 있는 V-11-M 쌍열기관포마저 심각하게 대파되어 전포(全砲)가 사용불능이 된 채 퇴각한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를 개조하라는 지시를 내려 우선 함수의 포대를 견고히 개조하여 T-34-85 전차의 포탑에서 ZiS-S-53 85mm 전차포를 적출해내 해군 함상용 주포 포곽 안에 부착하여 선수에 재(再)탑재했으며 조선인민군 해군 서해함대 제29해상저격여단 소속 78식 저격보총 담당 저격수와 88식 보총 담당 보총수, 73식 대대기관총 사수 및 부사수와 31식 60mm 박격포 사수와 탄약수들을 증원해 태우고 충돌전을 대비에 선수에 레일을 용접시키고 순항속도 타협과 동시에 방호력 증가를 위해 경도가 약한 철갑으로 주요부위를 보강하여 그 준비가 끝난 후에야 배를 출항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 제1연평해전에서 대한민국 국군 PCC들의 76mm 함포가 발군의 전과를 낸 점에 주목해 제2연평해전에서는 실크웜 대함미사일과 해안포대를 가동하여 PCC가 전투해역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당시 2함대 사령관 박정성 제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6개월간 대기 발령을 받았다. 한나라당 의원의 문제제기로 군수참모부장으로 보직 발령 받고 정보작전 참모부장을 거쳐 해군 군수사령관을 끝으로 2004년 소장으로 전역한다. 이에 박정성 제독은 데일리안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햇볕정책을 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껄끄러운 존재였고 북한이 남측 전투 책임자를 좌천시키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본인이 좌천당했다고 주장하였지만 정작 당시 승리의 주역이기도한 제2전투전단장 송영무 제독은 당시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이후 1함대사령관, 조함단장,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쳐서 참여정부 시절 해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한 뒤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는 단순히 북한의 요구로 좌천되었다는 박정성 제독의 주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송 제독은 후에 민주통합당으로 입당하기도 했다.#[7]
제1연평해전에서 참수리정 325호에서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투혼을 발휘하여 일약 해군의 영웅이 되었던 안지영 대위[8]는 이후 제2연평해전을 교훈삼아 만들어진 신형 고속함 윤영하함의 초대 함장이 되었으며 참수리 357호 정장이었던 연제영 대위[9]는 대청해전에도 고속정 편대장으로 출격하였다. 연평해전에 대한 해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4. 무공 훈장, 표창 수상[10]
1999년 7월 7월 오전 10시 해군2함대 사령부에서 유공부대 및 장병 포상식이 거행됐다. 유공장병 7명을 1계급 특진시켰는데 이는 6.25 전쟁, 베트남 전쟁 이후 두 번째 사례로 기록됐다.[11] 참수리 325호 정장 안지영 대위(해사 47기)[12] 등 장병 564명에게도 무공훈장과 국방부장관 및 합참의장, 해군참모총장 표창 등이 수여됐다.같은 해 11월 11일 해군은 연평도 당섬에 제1연평해전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아래의 계급은 당시 계급이다.
- 1계급 특진자 7명
- 소령 → 중령: 최용규[13]
- 하사 → 중사: 조준행, 서득원, 이경민, 이춘근
- 일병 → 상병: 이상혁, 이명근
- 무공훈장
- 을지무공훈장 7명, 충무무공훈장 11명, 화랑무공훈장 13명, 인헌무공훈장 19명
- 부대표창
- 대통령 부대표창: 해군작전사령부, 해군 제2함대
- 국방부장관 부대표창: 해군 제2전단, 국방부 9215부대
- 합참의장 부대표창: 해군 제2함대 군수지원단, 해군 연평부대
5. 기타
교전 당일 워치콘2가 발령되면서 군장결속, 손발톱 채집, 유서 작성 등이 벌어졌다.수주간 전 병력은 단독군장 영내대기 상태였으며 식당에서 밥먹을 때조차 단독군장(방탄모, 소총, 방독면)은 기본사항이었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발생했다.
교전 당일 한 대학생 유저가 나우누리 정치동호회 '찬우물' 게시판에 "서해안 총격전, 어설프다 김대중!"이라는 제목으로 서해교전이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내용의 게시글을 올렸다가 나우누리 운영자에 의해 적발되어 6일 뒤 정보통신부 장관 명령으로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불온통신)에 의거해 게시글 삭제+1개월 계정 박탈을 먹은 어두운 과거가 있었는데 해당 대학생은 표현의 자유 침해라며 김기중 변호사를 통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하여 2002년 6월 27일부로 위헌 판정을 받았다. 참고.
차영구 국방부 대변인이 "부부도 싸운 뒤에 더 화목해지듯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고 발언하면서 북한의 도발로 인한 교전을 부부 싸움에 비유한 것이 물의를 일으켜 전격 경질되었다.
북한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원쑤들이 우리 조국의 신성한 하늘과 땅, 바다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가차없이 짓뭉개버릴것이라는 우리 혁명무력의 선언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다시한번 세상에 시위한 장거"라고 우기고 있다. 자기들이 먼저 도발해 놓고 전투도 남한에 완패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소도 나오지 않는다.
6. 관련 문서
[1] 제1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안지영 대위가 조성태 당시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받고 있다.[2] 여기서 잡은 꽃게는 일본에 전량 수출해 외화를 번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시기였기에 북한 입장에서는 중요한 돈줄인 곳이다.[3] 당시 한국 고속정 함교를 저격수가 노렸다고 한다. 안지영 정장은 저격을 당했지만 방탄복 덕분에 경미한 부상만 입었다.[4] 증언에 의하면 함 위에 있던 북한 수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한다.[5] 16명의 승조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 대청급 경비정 1척은 참수리급 고속정의 충돌로 크게 대파되었고 상하이급 경비정 1척은 선체가 반쯤 물에 잠길 정도로 파손된게 관측되었다. 청진급 경비정 2척도 충돌 및 엄청난 포격으로 둘 다 대파(또는 1척은 침몰 추정)되었다.[7] 보수 진영에서는 '잡음이 나온다'는 표현을 쓰면서 송영무 제독의 영입을 비난했지만 이 '잡음'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도 뭣한 것이, 예비역 장성들 사이에서는 한때 전역한 후 정계에 입문할 때 새누리당이 아닌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쪽을 지지하거나 입당하면 내부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래 전부터 군사 정권 등의 역사적 영향도 있고 군 장성들의 성향상 보수 친화적이기도 했으며 더불어 재향군인회나 성우회 등에서도 오래 전부터 보수 진영 친화적 활동을 해 온 탓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방 및 보훈정책의 개선과 발전, 투명성 제고 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가 민주화, 문민화 이후부터였고 민주당 쪽에서도 집권당이었던 시절부터 이를 꾸준히 주도했으며 총선 및 대선에서 지속적인 정책을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슨 소리인가 싶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안보', '보수'의 아젠다를 선점해 군사정부 시절의 후신으로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보수정당들의 역사가 있으니... 때문에 호남 지역을 연고로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예비역 장성 출신 정당인이나 정책 자문인의 수도 아무래도 보수 측에 비하면 진보 측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준이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는 물론 새누리당이 힘이 빠지고 1987년 이후 민주당이 여러 번 집권하면서 사회적으로 보수 세력이 많이 쪼그라들기도 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교단이나 장성들의 세대교체도 자연스럽게 일어난 터라 장성들 커뮤니티에서도 과거와 같은 보수 일색 분위기는 많이 사라진 추세다. 게다가 해/공군 출신은 민주당계 정권에서 해/공군에 대해 좀 더 많이 신경써 준 부분도 있고 보수 정권에서 육방부화를 밀어붙인 탓에 진절머리가 나서 민주당계나 진보정당으로 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정의당에 입당한 장성 출신 전역자도 해군 출신이다.[8] 2016년 기준으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현 118 조기경보안전대장 역임[9] 그도 중령이다. 제1연평해전 발발 10년 후 대청해전에서 고속정 편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안지영 대위가 지휘했던 참수리 325호를 이끌었다.[10] 수상자는 보훈처 및 언론에서 발표하였기에 군사기밀에 저촉되지 않는다.[11] 첫 번째 사례는 1992년 5월 22일 발생한 육군 제3보병사단의 은하계곡 대침투작전(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한 무장공비 4명 전원 사살)으로 9명이 1계급 특진했다.[12] 2021년 기준으로 대령이다.[13] 해사 36기, 중령 진급에 계속 실패하여 군문을 떠나야 할 상황이었으나 제1연평해전의 지휘 성공으로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