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해전 Battle of Daecheong | |
발생 일시 | |
2009년 11월 10일 | |
발생 위치 | |
대한민국 북방한계선 부근 | |
교전국 | |
대한민국 | 북한 |
지휘관 | |
233 편대장 소령 연제영[2] 236 편대장 소령 고승범[3] 참수리 325[4] 정장 대위 김상훈 참수리 328 정장 대위 김성완 참수리 336 정장 대위 강동완[5] 참수리 338 정장 대위 김상욱 | 불명 |
전력 | |
포항급 초계함 울산급 호위함 참수리급 고속정 4척 | 상하이-I급 경비정 1척 |
피해 규모 | |
인명피해 없음 고속정 외부격벽 15발 피탄 | 8명 전사(추정) 3명 부상(추정) 경비정 반파 |
결과 | |
대한민국 해군의 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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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9년 11월 10일 한반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대청도 인근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과 북한 해군 고속정 간에 벌어진 3번째 서해교전.과거에는 일부 언론을 통해 제3연평해전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대한민국 국군 합동참모본부에 의해 대청해전으로 명명되었다. 대청해전은 연평도 인근에서 일어난 교전이 아니기 때문에 제3연평해전이라는 표현은 부적합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2. 교전 내용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것을 대한민국 해군이 수차례 경고통신을 보냈으나 이를 무시하고 경고 사격을 하겠다는 경고마저 수차례 무시하자 교전수칙에 따라 경고 사격을 한 아군 고속정을 향해 오전 10시 27분에 조준 사격을 가하며 들어와 교전이 벌어졌다.다행히 대한민국 해군 측 사상자는 없으며 북한 측 경비정에서는 8명 사망 3명 부상의 피해가 있다는 정보가 국방부에 들어왔다고 한다. 북한 측 경비정은 반파된 채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날 북한 해군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2010년 10월 16일자 로동신문이 대청해전에서 전사한 해병[6] 김주혁의 출신 중학교인 평양 축전중학교를 10월 15일자로 김주혁중학교로 개칭했다고 보도함에 따라 공인되었다.
3. 교전 이후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약 7년 만에 벌어진 교전으로서 북한이 이러한 도발을 또다시 자행한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난무할 뿐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힘을 얻은 추측은 북미 대화를 앞두고 북한이 기선제압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우발성 충돌이라는 설도 있으나 5회에 걸친 경고방송에도 불구하고 넘어온 것으로 보아 가능성은 거의 없다.북한은 남조선 선공임을 주장하면서 음모론을 전개했지만 대남 도발사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사실이 아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에 바뀐 교전수칙에 따라서 제2연평해전 때와는 달리 대응이 빨라져 대한민국 측의 경고 사격이 먼저 있었고 이후에 북한의 조준사격으로 교전이 벌어졌다.
한국군 측의 선제 경고사격에 대한 대체적인 여론은 이번에 한국 측의 사상자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분위기였으나 한겨레에서는 선제 경고사격을 북측에선 조준사격으로 오인할 수 있는 것이라며 우리의 과잉 대응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7]를 올려 비난받았다.
북한 함선이 85mm 함포 50발을 쏴서 15발을 맞혔다는 오보가 있었는데 사실은 14.5mm 중기관총이다. 85mm 50발을 쏘려면 한참 걸리고 15발이나 맞았으면 고속정이 멀쩡할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도 수동 사격의 명중률을 고려하면 기관총으로 한 수천 발 쏴야 15발 맞힐까 말까지, 85mm 함포로는 택도 없다. 그나마 북한 해군이 훈련을 제대로 했을지조차 의문이다. 1년에 1인당 자동소총 탄약 소모량이 평균 2발인 둔전병(...)[8] 들이 대포는 쏴 봤을 거 같은가? 사통장치에 연동된 자동 화기도 해상에선 명중률이 그리 높지 않은데 수동 사격이야 뭐... 그리고 맞힌 것도 배에 피해를 그리 주지 못했으니 의미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에 대해서도 언론이 비슷하게 깠다. 4천 발 쏴서 겨우 그거냐고. 대소 구경 다 합쳐서 그 정도였던 모양인데, 20mm 이하 구경은 아무리 많이 쏴도 격침은 힘들다.
이후에도 서해상에는 북한 군함들과 남한 군함들이 대치하며 15일에는 북한이 실크웜 기반의 대함 미사일 레이더를 가동시켜 아군 구축함이 긴급 회항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상당히 긴박하게 돌아갔다. 아무튼 손도 못 쓰고 진 게 분하긴 분했던 모양이다.
이 전투에서 파열탄이 일부 사용되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일종의 수류탄이나 유탄과 비슷한 무기로, 판옥선처럼 타고 있으면 북한의 고속정 갑판에 정렬한 해병들은 그저 밥이다. 그래서인지 이후 갑판의 화기 마운트에 장갑과 덮개를 붙이고 로켓과 중소형 보병용 대전차 미사일을 추가한 함정이 늘었다. 제1, 2연평해전 때도 구 소련제 중소형 고속정들의 특유의 수동조작식 함포로 인하여 함미 부근 주갑판에 해병들의 외부 정렬이 잦은 북한 해군에겐 우박 수준인 파열탄에 피해를 봤다 대청해전 때 3차적으로 더 피해를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본격적으로 해상저격여단 병력을 옮겨 태워가는 추세인 모양인 듯하다.
참고로 국제법에서 금지하는 비인도적 무기의 골자는 맞은 사람이 어떻게 인수 분해되는가가 아니라[9] 무기가 조준한 것 이외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가에 의해 정해진다. 대표적인 예로는 눈에 보이지 않아 많은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지뢰라든가, 오랫동안 잔류하거나 넓은 지역에 퍼지면서 제3자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화생방 무기, 그리고 수많은 자탄으로 인해 불발탄 문제가 심각한[10] 클러스터탄 등이 있다. 결론은 이 경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전 뒤 긴박한 분위기에도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대청해전까지 3번 있었던 서해 NLL 경비정 해상도발은 북한이 전부 패배해 버려 정면대결로는 더 이상 승산과 실익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11]
4. 여담
북한에서 확인한 전사자 김주혁(1991.11.27 ~ 2009.11.10)은 당시 입대 6개월이 된 18살의 어린 나이였으며 전사 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추서받았으며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안장되었다. 김주혁의 어머니 박류순은 이후 북한에서 선전강사로 일하고 있다.[1] 대청해전 유공자들이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포상을 받은 후 김태영 국방부 장관(뒤쪽 가운데) 등 군 간부들에게 경례하고 있다.[2] 학군 39기. 해군기초군사교육단 부단장을 마지막으로 대령 예편. 제1연평해전 때는 대위였고 참수리 357 정장이었다.[3] 현재 준장으로 인방사령관이다.[4] 1차 연평해전에서 북측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린 그 고속정이다. 북한 해군 입장에선 우리 해군이 자신들의 684를 바라보는 심정과 비슷한 함정이다.[5] 현재 중령.[6] 북한 해군은 수병을 이렇게 부른다.[7] 참고로 제1연평해전 때 이러면서 국민의 정부를 깠던 만화를 관련지 한겨레 21에서 그리기도 했다.[8] 다만 1인당 교탄 소모량이 2발에 불과하다는 말은 낭설에 가깝다.[9] 맞은 사람이 박살 난다고(...) 해서 비인도적 무기로 간주된다면 중기관총과 같은 대구경 총기나 각종 화포, 폭발물들은 모두 비인도적 무기가 된다. 쓸 수 있는 건 소총이나 기관단총 정도밖에 안될 것이다.[10] 한마디로 한 10년 지난 뒤에 민간인 거주지가 되면 굴러다니던 돌멩이가 폭발한다는 소리다.[11] 제1연평해전과 대청해전은 북한군이 완전히 대패했고 제2연평해전은 대한민국 국군이 비교적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이것도 북한 측이 더 큰 피해를 입은데다 결국 도발을 저지해냈으니 결국 북한 측이 패배한 셈이다.[12] 일각에서는 천안함 피격 사건이 대청해전에 대한 보복이라는 추정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