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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무장지대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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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1. 개요

한반도 비무장지대 분쟁은 1966년 10월 5일부터 1969년 12월 3일까지 한미 연합군과 북한군 특수부대 간 임진강 일대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분쟁이다. 흔히 2차 한국전쟁, 혹은 조용한 전쟁(The Quiet War)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966년 50건에 달하던 정전협정 위반사례가 1967년 566건, 1968년 761건으로 급증하며 치열하게 교전이 벌어졌고, 1969년 99건으로 다시 사그라드는 모습을 보였다.[1]

2. 배경

1960년대 북한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한다. 1956년 김일성의 8월 종파 사건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내정간섭을 민족의 자주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며, 자주 노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곧이어 1960년대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주의 정책 및 서방과의 평화공존 추구에 따라 중소 간의 이념 갈등이 심화되며 양국간의 균형 외교를 취하지만, 소련의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필요로 하면서도 이념적 기조에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중소 양국과 차례로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방의 자주를 추구하며 북한이 제시한 것이 국방-경제 병진노선과 4대 군사노선으로, 1962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국방비 증가와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졌다.[2]

비슷한 시기, 대한민국의 국력과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는 계속해서 강화되고 있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대한민국은 이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여러 경제적/기술적 원조를 받으며 경제 성장에 집중하였다. 1966년에는 박정희의 주도 하에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이사회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을 국가승인국으로 인정한 국가가 두 배로 증가하였다. 또한, 베트남 전쟁으로의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한미행정협정을 이끌어 내며 주한미군의 주둔을 공고히 하였으며 여러 대한 원조를 약속 받으며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였다.[3]

그러나, 김일성은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을 기회로 보았다. 비록 베트남에서의 전투 경험과 미국과의 협정은 북한에 있어 큰 위협임을 사실이나, 당장 일부 한국군이 파병으로 인해 한반도를 떠나 있으며 미국의 시선이 베트남에 쏠려 방위력이 약해진 현재를 대남 혁명의 적기로 판단한 것이다. 또한 김일성은 호치민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북베트남을 도울 수단으로 유엔군의 전선을 확대할 수 있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를 이끌어내기로 결정하였다.

위의 상황과 맞물려, 김일성은 1970년도를 적화통일의 목표 시기로 잡은 채 1967년을 남한의 지하당 조직과 유격활동에 대한 가능성을 시험하는 해로 삼았다. 그는 남한 민족해방 과정을 3단계로 나누었고, 결과적으로 반미 민족 해방 투쟁에 의한 한국 통일을 희망하였다.[4][5] 1966년 10월 5일 제2차 노동당 대표자회의 강연에서 김일성은 남한에서의 폭력투쟁에 대해 강조하며 정규 전투 외의 비정규적 무력도발의 필요성을 시사하였고,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자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찰스 H. 본스틸 3세 대장은 이를 2차 한국전쟁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3. 전개

1966년 10월을 전후로 남한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불규칙적인 총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해당 기간 동안 28명의 한국군이 전사하였으며, 미군의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1966년 11월 2일, 북한군의 매복 급습으로 인해 미군 6명과 한국군 KATUSA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도발 날짜는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서울에 머물던 시기였으며, 소식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본스틸 사령관은 김일성의 최근 연설 기록을 모아 탐독하며 북한군의 행동강령이 이전과 달라졌으며, 보다 적극적인 전투명령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다. 미 육군의 통상적인 군사 교리가 부합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본스틸 사령관은 1967년 1월 '대침투게릴라 개념요구계획'을 발표하며 북한군의 비무장지대 침투 도발을 저지하기 위한 '4단계 방어선' 도입을 촉구한다.[6]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무장지대의 안정화가 필수적이었던 만큼, 미국이 직접 자금을 투자하여 방어선 구축을 시작하였다. 건설 초기, 미 정부로부터 장벽이 통과하기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종 센서 오작동에 민감하다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본스틸은 '침입자의 포착과 빠른 대처 가능성"에 의의를 두며 비판을 묵살하였다. 특히 국군 제21보병사단의 경우, 장벽을 따라 하얀색의 메밀 농사를 짓기도 했는데 이는 침입자의 포착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고, 기동타격대로 하여금 빠르게 침입자를 섬멸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시 미군은 적극적인 공격을 최대한 배제하며,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입하는 북한군 병사에 한해 공격을 가했다. 특히 화포를 이용한 공격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군사분계선과 멀지 않은 곳에 민간인이 거주하며, 이들 또한 북한군 게릴라의 영향권 하에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동시대 베트남에서 이루어지던 미군의 전투 양상과는 확실하게 반대되는 모습이었다.[7] 반면, 대한민국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초기 전략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을 넘어서, 선제공격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상대가 다시는 도발할 생각을 하지 않게끔 미리 응징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는 되려 비무장지대 인근의 분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8][9]

비무장지대를 통한 침투 이외의 해상 침투 또한 북한이 주로 사용하던 도발 루트 중 하나였다.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한 선단이 좌우로 연장된 한반도의 해안선을 촘촘히 경계하기에는 그 수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지위 부서 간의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재빠른 대처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미 해군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원에 집중하느라 한반도의 해상 경비는 다소 낮은 우선도를 지니고 있었고, 이로 인해 북한군의 잦은 침입과 상륙을 허용하게 되었다.[10]

미군 측에서 유의한 또 다른 점은 북한군 게릴라에 의한 주민 포섭이었다. 특히 1966년 진주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같은 일련의 공비 침투 사건들은 김일성이 단순히 군사분계선 인근의 무력 도발을 넘어 남한 내부에서의 게릴라 투쟁과 혁명을 시도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스틸 사령관은 몇 가지 이유를 근거로 박정희에게 '내부의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위임하였다. 첫째, 비무장지대와 해안 지역의 경비는 UN군의 책임이 맞으나, 주권국으로서 대한민국 내부의 치안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점; 둘째, 추후 대한민국이 스스로 안보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방위력을 갖춰야 한다는 점; 셋째, UN군의 과한 간섭으로 인해 박정희 정부가 미국의 괴뢰 정부처럼 인식되거나, 김일성이 한반도 내 유일한 민족 지도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으로부터 많은 장비와 인력을 원조받았으며, 박정희 또한 결과적으로 내부 경계에 대한 중요성을 인정하여 대통령 지시 18호를 통해 방위력 증강에 집중하였다.[11]

한미동맹군의 거듭된 저지로 인해 UN군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하였으나, 김일성은 여전히 민족해방 3단계에 대한 야욕을 관철시켰고 계속하여 도발을 진행했다. 김일성은 대남 특수공작을 펼칠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1968년 1.21 사태를 벌인 124부대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벌어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은 본스틸 장군으로 하여금 핵타격 최후통첩을 날리며 협상에 돌입하게 할 정도로 남북간의 위기가 깊어져갔다. 이때 미국은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과 며칠 뒤 베트남에서 발생한 구정 공세의 연관성을 찾으며 공산 진영이 미국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교란을 펼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한편, 대한민국은 1.21 사태의 충격에 상대적으로 집중하며 북한을 향한 보복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전선을 더 이상 확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미국은 당시 미 국방부 차관이었던 사이러스 밴스를 보내 박정희와 협상하였고, 보복 공격을 철회하는 결론을 내린다.[12]

잇따른 북한의 침입에 따라, 미국은 대한민국을 향한 군비 증가 및 주한미군 강화를 진행하는 한편, 1965년 창설된 임진스카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비무장지대의 경비를 보강하였다. 임진스카웃은 미국이 최초로 해외에서 운영한 전투훈련학교인 미2사단 고급전투훈련교육대(Advanced Combat Training Academy, ACTA)의 훈련을 받은 한국형 특공대로 비무장지대 일대의 방어선을 구축하는 역할을 맡았다. 추가적으로 미2사단 소속 KATUSA로 전원 구성된 대간첩중대(Counter Agent Company, CAC)를 창설하여 비무장지대를 뚫고 침투한 무장 간첩을 토벌하도록 하였다.[13] 더욱 삼엄해진 경비로 인해 육로를 통한 침투가 어려워지자, 북한은 해상을 통한 침투에 집중하는데 이때 발생한 사건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다.

2년간의 기간 동안 별 다른 진전이 없자, 김일성은 비무장지대 분쟁에 관여한 에게 책임을 물으며 숙청을 진행한다. 남한의 인민들을 성공적으로 "교화"시키지 못한 점과 당의 예산 낭비를 이유로 들어 허봉학, 김창봉을 처형하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군 책임자들이 투옥되었다. 124부대와 같은 특수 공작부대 또한 해체된 뒤, 정규전을 위한 자원으로 재배치 되었으며, 남한을 향한 도발 빈도 역시 점점 감소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EC-121 격추 사건이 발생하며, 북미 간에 다시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으나 새롭게 취임한 닉슨 행정부는 갈수록 불리해지는 베트남 전쟁을 더 급한 사안으로 판단하여 추가적인 분쟁을 발생시키지 않았다.[14]

시간이 흐르며 북한의 도발로 인한 피해보다 신참 병사들의 실수나, 약물 등에 의한 군 내 기강 해이로 인한 피해가 더 커져 갔다. 동시에 1969년 7월 발표된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군의 개입 또한 줄어들었다. 1969년 10월 1일에는 본스틸 UN군 사령관의 자리를 존 H. 마이켈리스 대장이 이어 받았으며, 12월 3일 북한에 오착륙한 미 공군 병사들의 복귀 협상 타결을 끝으로 분쟁이 종결되었다.[15]

[1] 문관현, 『임진스카웃: Imjin Scouts 1965-1991』 정음서원, 27-28[2] 김보미, "북한 4대 군사노선의 완성에 중소분쟁이 미친 영향(1962-1966)", 국제정치논총 Vol. 54, 2014, 216-224[3] Daniel P. Bogler, "Scenes from an Unfinished War: Low-Intensity Conflict in Korea, 1966-1969", Leavenworth Papers No.19, p.3-5[4] 1단계: 통일 전선에 압력에 의한 주한미군 철수; 2단계: 남한 내 '애국적 민주 세력'의 남한 권력 장악; 3단계: 남한의 '애국적 민주 세력'과 북한의 애국적 사회주의 세력 간의 교섭을 통한 평화 통일[5] 윤덕민, "북한 행동의 본질에 관한 평가: 60년대 말 남조선 혁명 노선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통일경제, 1997.3, 48-49[6] Michael Anderson, "Shadows of War: Violence Along the Korean Demilitarized Zone", Military Review, 2019.10, p.91-94[7] Daniel P. Bogler, "Scenes from an Unfinished War: Low-Intensity Conflict in Korea, 1966-1969", Leavenworth Papers No.19, p.39-54[8] 미 사령부의 조사 결과, 린든 B. 존슨 대통령 방한 기간 중 발생한 급습 또한 며칠 전 한국군의 북한 부대 공격에 대한 보복 공격인 것으로 드러났다.[9] 박태균, "베트남 전쟁", 한겨레출판, 29-37[10] Bogler, p.55-57[11] Bogler, p. 57-59[12] Bogler, p.62-75[13] 문관현, 217-313[14] Bogler, p.99-107[15] Bogler, p.107-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