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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
1992년 5월 22일 11시 30분 ~ | |
장소 |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북방 비무장지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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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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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미상 |
피해규모 | |
3명 부상 | 3명 사망 |
결과 | |
대한민국 국군의 완승 | |
영향 | |
적의 지상침투 의욕을 꺾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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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 5월 22일 11시 30분쯤 강원도 철원 북방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전투. 은하계곡 대침투작전이라고도 한다. 이전에는 "3사단 침투공비 사살사건"등으로 불렸다.
백골부대가 완벽한 작전을 펼쳐 무장공비 전원을 사살한 것을 높이 사 전투가 발생한 일시와 함께 (오둘둘) 완전작전이라 불리며 가장 훌륭한 대간첩침투작전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2. 징후 및 포착
당시는 정원식 국무총리가 평양에서 평화회담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1992년 5월 21일 20시 44분에 제6보병사단 열상감시장비 TOD로 적 GP에서 미상 인원 11명이 은하천을 따라 다수 남하하는 것을 최초 포착하고 20시 45분에 적 9명이 적GP를 출발하는 것을 이어 포착했다. 제3보병사단은 적 침투 징후를 전달받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할 것이라 판단해 즉시 긴급 상황 체제로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경계를 강화하고 조명 사격을 준비했다. 10여 명 중 일부는 다시 되돌아갔고 세 명의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에 접근하는 것을 23시 34분에 포착되었다. 17분 뒤, 23시 51분에 해당 3명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3. 작전 구상
GP 경계와 DMZ 수색, 매복작전을 전담하는 부대인 전초대대(수색대대의 전신)에서 적 탐색 및 격멸 작전에 돌입했다.전체적인 작전의 윤곽으로 적의 도주를 차단하는 '차단작전'이 먼저 이루어지게 되었고, 주간작전으로 전환했을 때 적 은거 예상지역에 대한 '수색작전'을 전개하는 것으로 작전이 구상되었다.
5월 22일 2시 50분부터 3시 30분까지 최전방 감시초소 차단조 차단지점을 점령했다. 4시 45분 경 국군 DMZ 매복조에서 적군을 관측했다. 극심한 안개로 시야 방해로 인해 지형적인 영향으로 지속적인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했다. 또한, 피아식별도 제대로 되지 않는 기상환경이었기에 무리한 작전수행은 아군 오인사격의 위험이 컸다. 또한 무릎 높이의 잡목지대의 수풀만이 있어 몸을 숨길 수 있는 지형지물들이 전혀 없는 실정이었다. 완전히 노출된 가운데 작전을 전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초 중대(13중대)는 22일 5시경까지 차단선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다 8시 30분경 조금씩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고 9시경에 적 은거 예상시간에 수색작전은 실시하게 되었다. 작전지역이 비무장지대인지라 산재된 미확인 지뢰지대가 있어 위험요소가 많았고, 작전에 참가하는 인원들의 중압감이 컸다고 한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김승겸의 경우, 작전을 직접 참가하는 중대장의 입장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딸아이가 고작 생후 7개월인 29살의 신혼인 군인인지라 만약 자신이 전사하면 함께 있던 중대원에게 자신의 야전상의를 아내에게 유품으로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4. 작전 편제
- 수색1조 (중대장 대위 김승겸외 1/14명)
- 수색2조 (중위 박경용외 /11명)
- 수색3조 (중사 최홍철외 /10명)
- 수색4조 (상사 김형로외 /11명)
5. 교전
5월 22일. 10시 20분 육군 백골부대 작전부대의 수색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수색 1,2조가 미끼로 적에게 곧바로 접근하면 도주를 위해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이때 신호에 맞춰 수색3조, 4조가 돌아 들어가 퇴로를 막으며 함께 사격하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11시 10분 경 철원 군사분계선 남쪽 약 1km 지점에서 국군 전초대(현 수색대의 전신)가 수색 작전 중 적과 40~50m의 거리에서 적의 인기척을 군견이 먼저 확인했다. 이에 우리 부대가 전방을 살폈고 40~50m 거리의 수풀에서 머리만 내놓고 있는 북한의 무장 침투조 3명과 눈이 마주쳤다. 상병 또는 병장 정도의 계급장이 식별될 정도의 거리였다고 한다.
당시 북괴군은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여 M16소총으로 무장하였고 계급장은 물론 양치만, 신종호 등이 새겨진 육군 명찰까지 준비했다.
중대장은 적은 수적으로 완전히 열세이기 때문에 자기 위치가 완전히 노출됐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적은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병력은 밀집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작전을 시작하면 피해규모가 커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적을 발견한 사실을 중대장 인근 대원들 소수만 인지하였기 때문에 화력집중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중대원들에게 못 본 척하고 산개하라는 명령을 지시했다.
중대장이 사격 개시에 앞서 상황보고를 위해 발밑을 내려다보며 어떤 사격 자세를 취할까 고민하는 순간에 기습적인 적의 선제 공격과 도주가 시작되었다.[4] 적의 사격으로 해당 지점에서 회피한 후 대응사격을 하면서 중대원들의 일제 사격 및 수류탄 투척이 개시되었다. 당시 중대원들 중 몸을 숨기거나 도주하는 인원 없이 화력을 집중시키며 전세를 완전히 가져왔다.
교전 끝에 2명이 사살되었고 도주하던 나머지 1명 또한 16시경 서쪽 1km 부근에서 당시 16중대 행정보급관 하경호 상사가 발견 후 목 부위를 쏴 사살하며 16시간 10분 동안의 상황이 모두 끝나게 되었다.
6. 결과 및 의의
"당시 적의 사격으로 인해서 적의 총탄이 발 아래까지 떨어지는 그런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만 저희 중대원들 어느 누구 하나도 자기 자리에 이탈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응사함으로써 적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중대장 대위 김승겸의 인터뷰 中
사살된 북괴군 시신은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에 인계했다. 노획품으로는 총번이 없는 M16 3정, 스위스제 권총. 배낭 3개 및 카메라와 다량의 필름, 캠코더와 다수의 테이프, 비상식량 등 88종 200여 점의 휴대품이었다. 우리 측 경계 태세를 시험하는 한편 비무장지대 훨씬 남쪽으로 내려와 우리 측 군부대 배치 상황 등의 정보를 수집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당시 중대장 대위 김승겸의 인터뷰 中
5월 29일 11시 판문점에서 열자고 제의한 제460차 군사정전위원회 회의가 북한과 중국 측의 불참으로 무산되었다. 결국, 빈 테이블을 향해 해당 사건과 관련된 성명서를 읽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13중대장 김승겸 대위[5]를 포함한 40명에게는 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16중대 하경호 상사[6]를 포함한 9명에게는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다.
5.22 완적작전 이후로는 북한은 대한민국에 감시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파악했고 이후로 쉽사리 지상침투를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제3보병사단, 백골부대의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하는 대침투작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