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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04:22:08

이한영 암살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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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요약3. 암살 이전과정
3.1. 사건의 발단: 모스크바 바빌로바 거리 국제전화 시도
3.1.1. 1차 통화3.1.2. 2차 통화3.1.3. 3차 통화3.1.4. 4차 통화
3.2. 마지막 통화
4. 암살 전개 과정
4.1. 1997년 2월
4.1.1. 의문의 전화4.1.2. 피격 열흘 전4.1.3. 피격 이틀 전4.1.4. 의문의 여인 (피격 하루 전)4.1.5. 피격 당일 (1997년 2월 15일 토요일)
4.1.5.1. 1차 시도: 기자 사칭 전화4.1.5.2. 2차 시도: 납치 및 회유 시도4.1.5.3. 3차 시도: 암살
5. 암살 이후 전개
5.1. 결과5.2. 의문의 편지5.3. 동거녀 박 모씨5.4. 증거물
6. 아내 김씨7. 소송 및 재판8. 둘러보기

1. 개요

파일:343434237.jpg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귀순이후 북한이 공언해온 보복위협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국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어젯밤 일어난 귀순자 이한영씨의 권총피격 사건이 북한 보복의 신호탄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의 대북 경각심이 새롭게 점검돼야 할 시점입니다.
사건 다음 날 김종진 KBS 뉴스 9 주말앵커의 오프닝 멘트 중에서.
1997년 2월 15일 밤 9시 52분경 북한 최고위층 귀순자 이한영이 북한이 보낸 요원들에게 권총으로 피격당해 같은 달 25일 밤 9시 3분경 사망한 사건이다.

2. 요약

이한영은 임시거처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시범현대아파트 418동 1402호에 들어서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앞 14층 복도에서 북한 사회문화부 공작원들에 의해 피습당했다. 무기는 대남 간첩들이 주로 사용하는 벨기에베이비 브라우닝 권총으로, 실탄 1발이 이마에 관통하였다.
파일:74545458.jpg
사건 현장에 남겨진 이한영의 혈흔
사건을 목격한 대학 선배의 부인은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무슨 일인가 싶어 비디오폰으로 확인한 결과 괴한 2명이 이한영에게 권총을 겨누고 이 중 한 명이 실탄을 발사한 뒤 도망쳤다고 증언했다.

쓰러진 이씨에게 "누가 그랬느냐"고 묻자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간첩, 간첩" 이라고 말한 뒤 의식을 잃었다. 성남 경희분당차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뇌사 상태에서 산소호흡기에 숨을 의지하다가 10일 후 사망하였다.#, #, #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972047-00_01142415.jpg
사건에 사용된 사람 손바닥 정도 길이의 벨기에제 베이비 브라우닝 25구경 권총이다.[1]
테러는 당시 대서특필된 황장엽 전 북한 노동장 비서의 망명으로 인한 보복 테러의 일환이기도 했다. 당시 수사당국은 전단지 100만장을 뿌려 가면서 범인을 추적했지만 검거에는 실패했다.[2]

이는 당연히 국가안전기획부가 핵심 요인 보호를 소홀히 한 탓이다. 비록 언론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등 위험천만한 행위를 하기는 했으나 보호 책임이 있었던 국가에서 제대로 보호를 하지 못한 탓에 사망한 것이다.[3]

3. 암살 이전과정

파일:이한영 96년 10월 8일.jpg
10월 8일 거처를 옮긴 당일 촬영된 이한영의 모습
1996년 10월 8일 당시 거처를 옮기고 같은 해 가을부터 언론과의 접촉을 잠정 중단한 그는 돈벌이를 찾아 오퍼상을 차려 재기를 노릴 만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파일:이한영 아내.jpg
이한영과 아내의 모습
사건에 앞서 이한영은 아내에게 혹시라도 자신이 총에 맞을때를 대비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몇몇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언제, 어디서든 뒤에서 총을 맞을지도 모른다" 며 항시 긴장을 풀지 말라고 당부했고 사건 발생 1년 전 신변이 노출된 이 매우 자주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이한영의 부탁에 의해 1997년 2월 말까지 약 2달간 자신의 집 방 한칸을 임시로 내준 대학 선배와 사건 발생 보름 전쯤인 1997년 1월 말쯤 하여 두 차례 술을 마시면서도 담담하게 "선생님. 저는 언제 총에 맞아죽을지도 몰라요."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신변을 걱정했다는 게 주위 인물들의 증언이다. KBS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 친구는 "한영이는 평소 매우 쾌활했지만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불안하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1996년 추석 때는 여행을 계획했다가 잠수함사건으로 취소하는 등 남북간에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매우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휴대전화만을 사용했으며 거처의 전화 사용을 삼갔다고 한다. 그를 찾는 전화가 오면 "연락만 할 수 있다, 전화가 오면 연락해주겠다"는 식으로 응대하고 직접 전화를 받는 일이 없을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한편 북한 최고의 귀족 자제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그는 남한에서 14년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본주의의 퇴폐문화에 빠지는가 하면 10여차례에 걸친 사업 실패와 이사, 한 차례 옥살이까지 경험하는 등 비운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양대학교 재학 중이었던 1987년 12월부터 KBS PD로 일하면서 휴학을 두 번씩이나 했고 1990년 2월 뒤늦게 대학을 졸업한 뒤 강남의 개나리아파트로 옮겼으며 이후 KBS 국제방송 PD로 근무할 때 주택조합에 관여하게 되자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1990년 4월 KBS를 그만두고 '인터커넥션' 이라는 주택 건설업체를 차렸다.

그러나 1993년 3월 수익금 횡령 혐의로 신고를 당해 1994년 1윌까지 수감생활을 하다가 석방된 후 1994년 여름 대학선배 김씨에게 연락하여 김씨의 주선으로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청구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이사했으며 이후에도 역삼동과 반포동 등으로 거처를 두 번 옮겼다.

이씨는 생활고와 테러 위협 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996년초 부산으로 내려와 2~3개월 동안 러시아인을 상대로 통역 일을 하였고 이후에는 2~3개월 동안 경기도 평촌의 한 백화점 점포에서 팝콘 매장일을 하는 등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편 이씨가 원한관계에 의해 피격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1993년 탤런트와 모델, 고위층 자녀들이 낀 도박단을 내사하는 과정에서 핵심인물로 떠올랐다고 한다.

1996년 5월 사업 실패로 전세로 살던 분당의 47평짜리 청구아파트를 날린 뒤 짐은 이삿짐 센터에 맡겨 놓고 부인과 딸을 강동구 상일동 처가집으로 보낸 뒤 자신은 친구 집과 안기부가 붙여준 안가(안전가옥)를 전전했는데 1년 가까이 보관(엄밀히 말하면 방치)된 자신의 짐을 찾는 일은 엄두도 못내고 보관비를 대는 일도 그렇거니와 집이 없으니 둘 곳조차 없는 탓이었다.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눈치가 보이면 간혹 처가에 들러 가족들과 만나는 식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96년 여름과 가을에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발간됐던 자서전은 그의 호주머니 사정을 다소 펴지게 했으며 어머니로부터 돈을 받아 빚도 모두 정리했지만 그 돈은 사업파산의 후유증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일목요연하게 사용하지 못해 다시 거의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96년 8월 17일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자신의 유일한 꿈은 '미국행'이라고 말했으며 "어딘가에 있을 어머님을 모시고 마누라·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나마 자신을 버티게 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수차례 안기부에 미국행을 희망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들어올 '자유'는 허용했지만 나갈 수 있는 '자유'를 당국은 허용하지 않았다. 사생활이 문란하고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도 토로했다.

약 3시간 동안의 인터뷰에서 그와 기자가 나눈 대화 소재는 대부분이 안기부와 언론에 관한 것들이었다. 13년간의 남한 생활 중 안기부는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초 미국행을 희망했던 그를 한국 사회로 인도한 것도 안기부였고 직장 알선, 성형수술 등 그의 삶 곳곳에 안기부의 잔영이 배어 있지만 시종 안기부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특히 동아일보에서 출간한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집필 과정에서 안기부와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것 같았다.

당시 안기부는 그가 집필한 내용 가운데 안가 위치, 수사 내용 등 10여군데 대목 삭제를 요구했는데 그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가 끝내 상당부분이 빠지거나 고쳐진 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로 그는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 주차장에서 안기부 요원으로부터 멱살을 잡히는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안가'에서 쫓겨났고 거처가 없던 그의 부인과 딸은 친정집에 들어갔다.

그가 언론에 보인 반응은 한마디로 냉소 그 자체였는데 "기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한마디만 들어도 그럴싸하게 기사로 만든다. 상황이 이처럼 꼬인 책임의 많은 부분이 언론에게 있다"며 언론의 작문 실력을 놀라워했으며 결정적으로 이모와 어머니의 망명이 매끄럽게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일부 언론의 보도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 가치에 비해 안기부와 언론이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그를 맨 처음 세상에 공개한 것이 언론이지만 언론은 그에 대해 일관되게 '상품'이라는 시각을 유지했으며 신변 위협이나 '처지'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성혜림 망명 사건이 터졌을 때는 자신과 상대했던 일부 기자들에 대해선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안기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언론이 '무관심'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파일:이한영 사무실.jpg
이한영이 사업을 할 당시 쓰던 사무실의 내부 모습
그는 모스크바 유학 시절 익힌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살려 1995년 부산항에서 러시아 상인을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역시 6개월만에 그만뒀다.

1996년에는 생활이 어렵자 소위 '인터걸' 거래를 하는 모스크바 상인과 어울려 지내기까지 했는데 그는 러시아를 상대로 한 무역업을 하면서 상당액의 빚을 졌으며 이 때문에 변제압력을 받아 왔다고 하며 이때 러시아 매춘 여성인 인터걸 소개업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러시아 마피아 단원들과 접촉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돈에 쪼들린 그는 1996년 2월 성혜림 사건이 터지면서 언론사를 상대로 '정보팔기' 에 나서 수천만원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망명이 허위로 밝혀지면서 신뢰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재벌을 염두에 둔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서울 양재동의 한 상가 지하에 J-KOREA라는 판촉물 대행회사를 차려 그런대로 순조로운 출발을 하던 참이었는데 사업 실패로 인한 의기소침에서도 벗어나 오퍼상을 차리고 재기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큰소리도 쳐 보는 단계에서 피격의 불운을 맞이했다.

그는 1996년 크리스마스 직후에 자신의 한양대 대학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사업때문에 살고 있던 전세 아파트마저 날아가 버려 갈 곳이 없어 2월말 원룸아파트가 마련될 때까지 신세를 지겠다"고 말해 대학 선배 딸의 공부방을 비워 줬는데 실제 집에 들어와서 잔 것은 며칠 안 됐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인 김종은과 딸 예인이를 처가에 맡기고 별거하면서 돈벌이를 찾고 있었는데 친구 사업장과 전광판 광고회사에 기웃거리면서 일거리를 찾다가 얼마전 부산을 다녀왔다며 한•러 무역의 한자락을 잡고 밥벌이 할 일이 있나 싶어서였다. "수산물쪽 수입 사업에 도울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내년(1997년) 1월이나 되어봐야 확실한 결과가 나올 것"이란 게 그의 말이었다.

그간 워낙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관계로 예전과 달리 장담을 삼가는 말투가 예사롭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전공으로 돌아가야 할 뿐 달리 대안이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첫 직장인 방송사에서도 러시아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제방송 일을 했고 사정이 어려워진 후에도 북한 관련 정보 분석이나 러시아어 학원강사 자리라도 없나 뒤집고 다녔을 정도다.

1997년 1월 10일부터 부인의 이름으로 갤러리아 잠실점과 압구정점, 뉴코아 본점, 논현동 나산백화점, 대치동그랜드백화점 등 5곳에서 부인, 동서와 함께 캔디와 초콜릿을 파는 임시매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사건 전날까지 밸런타인데이 특수로 바빴는데 "장사가 잘돼 곧 고정매장을 얻을 수 있겠다" 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씨는 사고가 있기 두 달 전부터 부인 김씨와 협의이혼 절차를 밟고 별거 중인 상황이었다. 당시 부인에게까지 사업 실패로 인해 생긴 채무의 짐을 지워 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혼절차를 밟고 있었고 피격 전날까지 두 사람은 같이 일하고 있었다.

이한영의 아내 김씨는 사건 발생 직후 "남편이 방송에 출연하고 책을 펴내 신분을 노출시키고 북한을 자극한 것을 후회했다"고 전했다. 이한영은 자주 "다시 성형수술을 하고 한국보다 비교적 안전한 미국으로 이주하여 서방으로 탈출한 가족들과 만나 함께 완전히 잠적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딸의 교육을 위해 여권까지도 준비해 놓을 정도였고 한다.

이한영의 불안감은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황장엽 망명 사건으로 더욱 증폭돼 "남편은 북한이 보복을 하면 첫 대상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아내 김씨는 전했다. 이로 인해 1996년 가을부터는 아예 거처와 휴대폰 번호, 무선호출기 번호까지 바꾸었고 사건 발생 직전까지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부대상의 공개강좌에 나설 것을 적극 검토하다가 신분노출을 우려해 계약단계에서 포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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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에 위협을 느껴 호텔을 전전하며 은둔생활을 할 때 KBS 취재진들이 촬영한 이한영의 모습.
이씨는 1996년 6월 수기를 낸 뒤 안기부 안가를 나왔으나 사업 부진으로 잠실 처가, 양재동 친구집, 분당 김씨 집 등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의 한 친구는 이한영이 "안기부 담당관을 찾아도 연락조차 안된다. 안기부는 나를 버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1982년 망명하여 서울에 오고 나서 8개월간의 안가 생활 이후 독립했던 그는 언론에 공개된 1996년 2월 중순 이후 다시 안가로 들어갔는데 수기가 발간된 후 쫓겨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범인들이 이씨의 임시거처인 김씨 집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상당 기간 동안 이씨의 뒤를 밟아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씨는 설을 앞둔 1997년 1월말 무렵 부인과 딸을 잠실 처가에 보냈다. 한편 이씨의 외삼촌이자 김정일의 처남인 성일기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살다가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서방 탈출 보도'로 주거지가 노출된 후 신변안전의 이유로 1996년 3월 성수동으로 옮겨 생활하고 있었는데 성씨 가족의 말에 따르면 1997년 초에 조카 이씨가 세배하러 집에 한차례 왔으며 그런 이씨에게 "앞으로 가능하면 외부에 얼굴을 드러내지 말고 직장일에만 충실해라"고 당부했는데 이같은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범인들이 현대아파트 14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이씨를 붙잡아 총격을 가했다는 것은 평소 이씨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당일 귀가시간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씨는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이 알려진 12일 이후 집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귀가하던 중이었다.

이씨는 1996년 11월 'J코리아'라는 판촉회사를 만들었고 1997년 1월 3일부터 지인에게 유통을 배워 가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했으며 그 사업의 하나로 1997년 2월 10일부터 2월 14일까지 발렌타인 데이 특수행사를 위해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 1층 매장에서 팔 초콜릿을 포장하느라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강남의 여관에서 잤다. 따라서 이날 범인들이 며칠만에 귀가하는 이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이씨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사건 발생 열흘 전쯤 전화국 직원이라고 밝힌 남자가 대학 선배 김씨 집으로 전화를 걸어 "이한영씨가 전화가설을 요청했는데 어디다 어떻게 설치해야 하느냐"고 물은 사실에 주목했다. 김씨나 이씨 모두 전화가설을 신청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사회문화부 특수공작 3인조인 <순호조> 공작원들인 조장 최순호와 윤동철, 미상 1명이 사건 발생 한 달 전쯤 하여 위조여권으로 중국을 통해 신분세탁 후 공항으로 입국했으며 입국 후 고정 간첩들과 접선하여 강원도 번호판 현대 쏘나타 대포차량[4]을 제공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한영이 피격된 15일 이전에 이씨와 같은 성남시 분당구에 살던 '이한영' 이라는 이름의 12명에게 전화국 직원이나 기자를 사칭한 전화가 걸려 왔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중에는 고정간첩이 틀림없는 여자 목소리의 전화도 포함돼 있었다.

경찰은 범인들이 범행 직전에 집중적으로 이씨의 행적을 추적했던 점으로 미뤄 이씨에게 테러를 가하기 위해 범행 얼마 전에 남파된 간첩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3.1. 사건의 발단: 모스크바 바빌로바 거리 국제전화 시도

1993년 9월이었다. 김일성 연구 전문가인 성균관대 이명영 교수로부터 들은 "김정일의 본처 성혜림이 신병치료차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는 한 마디가 단서였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우종창은 이를 추적해 1994년 1월 20일자 주간조선에 "김정일 처남 서울에 살고 있다"는 기사를 썼고 이 기사가 인연이 되어 미공개 상태로 서울에 살던 성혜랑의 외아들 이한영을 만나게 되었다.

이한영은 돈이 궁해 KBS 재직 시절 같이 근무한 동기의 소개로 1995년 9월 말경 동아일보로 찾아가 출판국 간부를 만나 "수기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내보였으나 그곳에서는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며칠 후 힘들다는 연락이 왔다"고 밝혔다. 신동아는 당시 이한영이 자신과 김정일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밝히지 않은 데다 신원조회결과 이씨가 사기 전과자[5]로 밝혀지자 이씨의 주장에 의문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1977년 윤정희 납치 사건에 김정일이 개입돼 있다는 정보를 흘렸으나 자신의 신분에 대해선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동아일보 측에서 이씨에 대해 안기부에 문의하자 안기부 측에서는 "지금은 그 사람의 신분을 공개할 시점이 아니다"며 이씨를 기사화할 동아일보의 보도를 만류한 것이 신동아가 이씨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어찌됐든 이한영은 이후 월간조선을 찾았고 우종창은 이한영의 외삼촌인 성일기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생포되어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기사를 썼으며 이한영은 당시 사업 실패 후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던지라 자신의 외삼촌의 기사를 썼던 기자에게 도움을 얻으려고 자신이 성일기의 조카라는 것을 우종창에게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사촌 여동생(외삼촌 딸)을 데리고 아내와 6살 난 딸과 함께 당시 우종창 기자가 있던 조선일보 출판국장실을 방문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커피를 마시면서 그의 귀순 과정과 귀순 후 서울 생활을 이야기했는데 기자는 중요한 정보 하나를 듣게 되었다. 기자가 그토록 찾았던 김정일의 본처 성혜림의 모스크바 주소와 전화번호를 그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개인적인 속사정을 조심스레 이야기하면서 당시 처형의 카드로 수천만원의 빚을 낸 상태였고 가계수표를 발행했는데 일주일 내에 갚지 못하면 구속될 것이라며 경제적으로 500만원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월간조선측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이씨와 작성한 계약서는 모두 2통이다. 1995년 10월 20일 우종창 기자와 이씨가 5백만원의 계약금에 이씨 증언 및 인터뷰 주선과 관련 1차 계약을 했고 1995년 12월 30일 수기 출판, 영화 제작에 대한 독점 계약을 5백만원에 체결했는데 이 가운데 1차 계약금으로 지불된 5백만원은 12월 28일 안기부가 갚았다.

경향은 취재기자와 이씨의 친분으로 이씨와 두 차례에 걸쳐 단독 인터뷰를 갖고 '김일성 아들(김현) 또 있다' 등을 단독 보도했다. 여타 언론사들은 이씨와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수백만원대의 사례비를 지불하면서 성혜랑과 이씨의 미공개 전화 통화 내용이 담긴 테이프, 독점 인터뷰등을 성사시켰다.
이날 결론적으로 우종창은 이한영의 딱한 사정을 듣고 "돈을 갚지 않아도 좋다. 다만 모스크바를 떠날 당시 이모(성혜림)집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가라" 고 요구했으며 더 나아가 "이왕 온 김에 우리 여기서 전화 한번 해보자" 고 선뜻 제안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이씨의 어머니였고 13년이란 세월로 인해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하였으나 3번의 전화시도 끝에 서로의 신분 확인에 성공했고 약 40분간의 통화가 이어졌다.

모스크바측의 망명의사를 물었더니 호의적이었으며 어머니 성혜랑은 제3국 거주를 희망했지만 김정일의 본처 성혜림이 "서울에서 오빠와 같이 살겠다"고 강력히 희망해 이들의 서울행은 기정사실로 보였다.

김정일은 성혜림을 위해 15호 관저(김정일 공관)의 요리사, 하녀, 운전사 등을 파견해 수발을 들게 하고 여행을 위해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2백만 달러짜리 별장도 사 주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요양하던 쇠약한 성혜림을 보살피던 이한영이 1982년 망명한 후 1983년부터는 그 대신 그의 어머니 성혜랑이 성혜림을 보살폈다.
어머니는 이미 내 소식을 듣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사는 교포중에 A씨가 있다. A씨는 어머니에게 내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10월 20일 나와 통화하기전에 내가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통화에서 "A씨 통해서 네 소식 들었다. 네가 서울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씀하셨다. A씨도 남한출신인데, 월북 후 6.25를 전후해 평양에서 할머니에게 자주 놀러왔었다고 한다. 남한에서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A씨는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다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소련으로 망명했는데, 이모가 모스크바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한번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가 1990년대 초 모스크바의 호텔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당시 A씨는 이모와 김정일과의 관계는 모르고 있었다. 이모가 A씨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해서 적어주었는데, 그 후 가끔 이모가 연락해서 통화를 했다는 것이다.

A씨는 서울에 여러번 왔었다. 처음 왔을 때는 내가 KBS에 있을 때인데, 내가 통역을 했기 때문에 그는 나를 몰랐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있었다. 한국말을 잘해 A씨만 있을 때면 통역이 필요 없었는데, 한국말을 못하는 교포학자들 때문에 내가 통역으로 나갔다. A씨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서울에 왔는데, A씨가 이모를 안다는 것을 알고 안기부에서 내 소식을 전해준 것 같다. A씨는 1992년 서울의 외삼촌도 만났다. A씨는 외삼촌에게 "혜림이는 잘 있다. 내가 다 만나봤다. 이것저것 괴로우면 고향으로 가라고 얘기해줬다. 그랬더니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고 그러더라"는 얘기를 전했다고 한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 행복과 감옥사이에서 (340-341P)

3.1.1. 1차 통화

서울: 여보시오.
모스크바: 네.
서울: 사모님 좀 부탁드려요.
모스크바: 여보세요. 누구 찾아요?
서울: 사모님 계십니까?
사모님은 아파트 안에서 수행원들이 성혜림을 부르는 말이며 해외에서 활동하는 북한인들은 대부분 본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므로 수행원들도 성혜림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사모님' 또는 가명인 '원여사' 로 불러 왔다.
모스크바: 누구십니까?
서울: 전화받는분은 누구십니까?
모스크바: 동무, 누구에요?
이때 상대가 갑자기 북한 용어를 사용했다.
서울: 여기는 김영철[A]인데요.
모스크바: 네, 네. 참사 동무예요?
서울: 네. 맞습니다.
이때 이한영은 엉겁결에 시인은 했지만 대화가 길어지면 신분이 탄로날 우려가 높아 상대의 신분을 빨리 알아야 했다.
모스크바: 나, 요전에 비행장에서 만났던...
서울: 누구시죠?
모스크바: 아니, 가만 계셔보세요. 동무는 누구세요?
이쪽 신분을 정확히 밝히지 않자 상대는 긴장했다. 여러 차례 "동무, 누구에요?" 라고 물어 왔고 상대방의 신분을 알 수 없어 1차 통화 시도는 여기서 그만둬야 했다.

3.1.2. 2차 통화

이번에는 '최준덕 아저씨' 를 알고 있다며 바꿔 달라고 하기로 했다. '최준덕' 은 이한영이 모스크바 아파트에 살 때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있으면서 이씨를 아들처럼 귀여워해 준 인물이다. 그 사람이라면 비밀을 지키고 이모나 엄마를 바꿔 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신호음이 여러 차례 울리고 난 후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은 1차 통화때의 그 여자. 웬일인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울: 여보세요. 전화가 끊어져서 죄송합니다. 저, 준덕이 아저씨 있어요?
모스크바: 미안하지만 누구세요?
서울: 최준덕 아저씨 계세요?
모스크바: 동무는 누구에요? 동무를 대라요.
양쪽이 서로 상대방의 신원을 먼저 알아내려는 신경전이 한동안 계속됐다. 서울의 이한영은 상대방이 어머니 성혜랑이나 이모 성혜림이 아니라면 자기 신분을 밝힐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때 모스크바에서 전화를 받던 여자는 바로 이씨의 어머니 성혜랑이었다. 13년은 서로가 전화 목소리만으로는 상대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이었다.
성혜랑: 난, 동무가 신분을 밝히기 전에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한영: 아니, 지금 전화받으시는 분의 목소리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래요.
성혜랑: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스위스 어디에요? 동무, 평양서 왔어요?
이한영: 네. 최동무를 바꿔주면 알게 됩니다. 최동무 지금 없습니까? 언제 오십니까?
성혜랑: 동무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동무가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상. 평양사람이오? 양해하시오. 누군지 모르니.
이한영: 제가 그쪽에 계시는 분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데 전화 받으시는분은 전혀 기억에 없는 목소리입니다.
양측의 대화는 이후에도 한참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했다. 이씨는 상대가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최동무' 와 '사모님' 을 찾았고 모스크바의 성혜랑은 완강했다.
성혜랑: 아이 참. 이상한 사람이구만. 어째서 동무의 소속을 대지 않고, 이름을 대지 않고 이렇게 실례를 합니까?
이한영: 제가 최동무와 통화를 하면 되니까... 왜냐하면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의 목소리가 정확히 기억도 안나고, 누군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말씀을 못 드리는데요... 지금 전화받으시는 분이...
성혜랑: 내 목소리를 기억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동무같은 목소리야말로 참 기억을 못하는 사람인데요.
이한영: 거기서 얼마나 사셨는데요? 오래 되셨습니까?
성혜랑: 평양소속 어디에요?
이한영: 최동무를 찾고 있습니다.
성혜랑: 만날 수 없습니다. 대사관에 있습니다.
이한영: 사모님 안계십니까?
성혜랑: 무슨 사모님?
이한영: 혼자 사세요?
성혜랑: 소속은 어디고 어디서 왔어요?
이한영: 제네바 이수헌 동무 알죠? 안다 이거죠?
성혜랑: 제네바 대사라는 것은 알아요. 이상한 사람이구만... 이게 무슨 실례입니까?
이한영: 누군지 몰라서 말씀 못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사셨는데요?
성씨는 이미 지난 13년 동안 서울사람이 다 되어 버린 아들 이씨의 서울말투를 듣고 남측에서 장난전화를 한 것이라고 생각해 '괴뢰'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성혜랑: 아 이거... 동무 도대체 누구요? 동무 괴뢰구만! 동무 괴뢰야! 괴뢰!
이한영: 여보세요? 여보세요!
성혜랑: 네.
이한영: 전화받으시는 분 누구십니까?
성혜랑: 동무가 누군질 알아야 내가 누구라는 걸 대지요. 소속이 어디에요?
이한영: 정남이... 저 이모 조카... 저 사모님 조카에요.
성혜랑: 동무, 괴뢰 아니요?
이한영: 괴뢰가 뭡니까?
성혜랑: 오! 괴뢰라는 말도 모르구만. 알았어.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서울의 이한영은 상대가 어머니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꼬박꼬박 존댓말로 응대하는등 비교적 교양 있는 자세를 보여줬기 때문에 수행원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성혜림', '성혜랑' 이란 이름을 직접 거론해 보기로 했다.

3.1.3. 3차 통화

성혜랑: 알료(Алё).
한참 신호가 간 뒤 모스크바 쪽에서 똑같은 여자가 받았다. 그녀는 "여보세요." 라는 한국어 대신 "알료."[7]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한영: 여보세요. 아까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성혜랑: 네.
이한영: 혹시 그러면 정남이 이모세요?
성혜랑: (훨씬 진지해진 목소리로) 누구지?...
'정남'이는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가리킨다. 상대가 신분 밝히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핵심을 찔렀다. 허를 찔린 듯 상대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아니, 이 사람... 동무는 도대체 누구십니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이한영: 나 조카에요.
성혜랑: ...
이한영: 여보세요? 제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으면...
모스크바의 상대가 뭔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속사포처럼 해 댔다. 당황해하는 기색이 목소리를 통해 감지됐다.
성혜랑: 누구고 평양 어디에서 왔어요?
이한영: 지금 전화받으시는 분이 정남이 이모 아니세요?
성혜랑: 우린 그런거 모르는데요?...
이한영: 그래요?
성혜랑: 네.
이한영: 대사관 최준덕 아저씨랑 통화할 수 있겠네요?
성혜랑: 동무 성함이 누구에요?
이한영: 김영철이에요...
김영철은 외교관 여권에 기록된 이한영의 가명이다. 이한영의 외교관 여권엔 가명 '김영철'로, 공무여권엔 본명 '리일남'으로 기록됐다. 이한영이란 이름은 한국 귀순 후 우리 정보기관에서 지어 준 것이다. '김영철'이란 이름을 밝히자 상대는 또 다시 침묵했다.
성혜랑: 어디예요 거기가? 말씀하세요. 필요한 곳을...
이한영: 사모님이나 최동무 통해 말하겠어요. 여보세요!
성혜랑: (침묵후) 안돼요.
이한영: 왜 안되죠?
성혜랑: 누군지 몰라서 안돼요. 이해하시죠?
이한영: 못하겠어요. 우리 엄마인가?
성혜랑: 목소리가 (일남이가) 아닌데...
이한영: 조카 목소리 알아요?
성혜랑: 대충 알죠.
이한영: 조카가 누군데요? 나 조카예요. 사모님 조카 목소리 알아요?
성혜랑: 대충 알죠. 생년월일이 얼맙니까?
이한영: 60년 4월 2일.
성혜랑: 무슨 용무에요?
이한영: 조카가 자기 이모하고 통화하려는데 무슨 용무가 있겠어요. 지금 전화받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럼?
성혜랑: 말해도 돼요. 내가 전달해 드리지요.
이한영: 우리 엄만가? 우리 엄마하고도 목소리가 같은데... 비슷한데...
성혜랑: 그럼 짐작하는 이름을 대보세요.
이한영: 사모님 언니 아니세요? 성혜랑.
이씨가 드디어 어머니의 이름을 밝혔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한참만에 이쪽 신분을 확인하는 질문이 날아왔다.
성혜랑: 여권 이름은?
이한영: 무슨 이름이요? 여권 이름?
성혜랑: 응.
아들이란 감을 잡은 듯 존댓말을 쓰던 상대방이 말을 하대했다. 이한영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엄마야?!"라고 불렀다.
성혜랑: 응. 응.
이한영: 원종숙! 여권 이름! 엄마야?[A]
성혜랑: 응.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기 어디야?
이한영: 엄마, 나 일남이야.
성혜랑: (속삭이듯이) 잘들어.
이한영: 엄마, 아빠 이름 뭐야?
성혜랑: 성이 이씨.
이한영: (울먹이며) 엄마, 나 일남이야. 엄마 맞구나. 엄마 맞구나.
성혜랑: 응.
이한영: 엄마, 나 엄마하고 통화하게 될줄 몰랐어... 그냥...
성혜랑: 응, 나야 나.
이한영: (울먹이며) 근데 엄마 목소리가 왜 그래요? 엄마 내 목소리 모르겠어?
성혜랑: 모르겠어.
어머니 성혜랑은 침착했다.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며 말도 자제했다. 13년만에 아들과 처음 통화하는 극적인 순간에도 조심했다. 어머니 성씨는 이한영의 어릴 적 별명 '당삼이' 를 물어 확인했으며 아들 이씨도 외삼촌 성일기의 이름과 자신이 다니던 학교 이름을 물어 어머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혜랑: 맞아. 당삼이(이씨의 어릴 적 별명) 알아.
이한영: 엄마 오빠이름 뭐야?
성혜랑: 성일기...
이한영: 엄마, 외할머니 이름 가르쳐줘. 외할머니 이름 대봐.
성혜랑: 원주.
'원주'는 성혜랑의 어머니이자 이한영의 외할머니 김원주다.
이한영: 아, 엄마. 엄마 맞구나. 나 일남이야. 새끼 손가락 꼬부라진 것 알지? 엄마 닮아서... 삼촌 여기 살아있어. 엄마. 전화받기 괜찮아? 내가 이모나 엄마하고 통화하려면 이 번호로 하면 항상 엄마가 받아?
성혜랑: 그럼. 아무도 없어. 절대 남이 안받아. 어떻게 하든 조금 기다려.
이한영: 왜 이렇게 변했어... 목소리가...
성혜랑: 알았어.
이한영: (계속 울먹이며) 나도 변했지?
성혜랑: 글쎄.
이한영: 엄마, 나 소식... 나 여기 살아있는거 알아?
성혜랑: 알았다.
이한영: 엄마, 나 절대 엄마 배신한거 아냐.
성혜랑: 전화번호 하나 더 줄게. 거기로 걸어. 그거 내 방 전화야.
이한영: 끊고 다시 거기로 할까? 그런데 엄마 목소리가 아닌데? 엄마, 엄마 맞어?
성혜랑: 맞어. 맞어.
이한영: 전화번호 알려줘.
수행원들의 도청을 피해 본인 개인 방의 전화번호를 아들 이씨에게 알려준 성씨. 하지만 실수로 전화번호를 잘못 알려줘 이씨에게 다시 전화가 오자 성씨는 혹시라도 모를 관리원들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이씨에게 경어로 응대하며 다시 올바른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다.

3.1.4. 4차 통화

파일:attachment/김정일/성혜림.jpg
이씨의 이모 성혜림(1974년경 무렵 추정)
성혜랑: 웬일이냐?
이한영: 엄마 살아 있었구나? 몽이삼촌(성일기) 얘기하는거보니까 엄마맞구... (울먹임) 말투가 이상해서... 다른 사람이 받으면 피해 받을까봐... 엄마, 삼촌은 꼭 (외)할아버지야. 걷는것도 (외)할아버지고. 그 집 아이들도 다 나처럼 새끼 손가락이 휘었어. 삼촌이 내 손가락 휘어진 것 보고 금방 알아 보시더라.
성혜랑: 응, 그래. 흑흑흑(울먹이며). (삼촌) 살아있니?
이한영: 그래, 어떻게 알아?
성헤랑: 다 알아. 너 어딨니?
이한영: 엄마, 엄마 맞아?
성혜랑: 당삼위 이름 엄마 말고 누가 알겠어?
이한영: 어디 살아? 난 그냥 엄마 모스크바에 왔다갔다한다는 그런 정보만 알았지...
성혜랑: 나 여기 상주하고 산다. 평양 안 나가... 할머니 돌아가셨어.
이한영: 여기서도 제사 지내고 삼촌이 할머니 얘기하며 울었어. 성대경(이씨의 외할아버지의 친척) 할아버지 얘기했잖아.
성혜랑: (대경이 아저씨)살아있니?
이한영: 응. (아나운서)임국희 남편이라고 알아?
성혜랑: 알아. 너 여기 올 수 있니? 올 수 있으면 오려무나.
이한영: 같은 데 가서 만날 수 있나? 그리고 엄마, 내 그것만 물어볼게. 이철 대사 수용이 아저씨(리수용)는 엄마 쪽이야?
성혜랑: 그 사람 아리송하다. 그 방치코 있지? 너 방치코 알지?
방치코는 김정은의 어머니이자 김정일의 세번째 부인 고용희를 말한다. 고용희가 김정일의 총애를 입으면서 본처 성혜림 쪽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방치는 북한말[9]로 방망이를 뜻한다. 예하면, 빨래방망이 - 빨래방치, 도깨비 방망이-도깨비 방치 등등... 고용희의 코가 방망이처럼 생겼다고 방치코라는 별명을 사용해서 이씨의 어머니와 그쪽 가문에서 고용희의 외모를 경멸하는 표현으로 사용한 것 같다.
이한영: 몰라.
성혜랑: 방치코. 방치코. 그 왜... 그 여자 때문에 네 이모 병 나지 않았니?
이한영: 오, 방치코! 알지. 알지... 그래, 방치코!
성혜랑: 응. (김정일이) 지금 방치코하고 산단 말이야.
이한영: 어... 저기가?... 빠빠(김정일)가?
성혜랑: 응. 아이 가득 낳고.
이한영: 아들 스위스에서 공부한다는데?
성혜랑: 맞어.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철 대사), 이쪽(성혜림)에도 치우치고 그쪽(고용희)에도 치우치고 해.
이한영: 내 옆에 딸 있어. 바꿔줄까?
성혜랑: 응.
이예인: 할머니 안녕하세요.
성혜랑: 몇살이야?
이한영: 지금 여섯살.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죽지 않고. 세상이 많이 변했어. 여기 정말 많이 변했어.
성혜랑: 내가 전화번호 알면 안되겠니?
이한영: 몇가지 더 듣고... 나 무슨 국민학교 다녔어?
성혜랑: 대동국민학교.
이한영: 엄마가 물어봐! 나 반장이었지?
성혜랑: 그래.
이한영: 삼촌 이태일 알아?
성혜랑: 그래.
이한영: 상혁 아저씨는?
성혜랑: 알아.
이한영: 집 전화번호 알려 줄께. 엄마는 전화 어디서 해?
성혜랑: 스위스 갈 경우에 공중전화에 가서 해.
이한영: 어떻게 여행갔어? 여행 누가 시켜줘?
성혜랑: 빠빠(김정일)가 시켜주지.
이한영: 그래?
성혜랑: 그럼. 갔다 온지 4일 됐어.
이한영: 엄마 대장(김정남 어릴 적 별명) 많이 컸지?
성혜랑: 그럼, 스물여섯인데.
이한영: 엄마, 우리 살던데 바빌로바 3층 아직 거기 그대로 사는거야?
성혜랑: 그럼. 2층은 다 쓰고, 네 방 앞방에 내가 있어.
이한영: 이모는 지금 없지?
성혜랑: 산보 나갔어.
이한영: 전화 몇시에 해?
성혜랑: 밤시간에 해. 모스크바 시간으로 아홉시 이후에...
이한영: 지금 몇신데?
성혜랑: 5시 20분이다.
이한영: 빠빠(김정일)가 나 죽은줄 아셔? 그냥 행방불명 돼서 죽은걸로?
성혜랑: 응. 죽은 걸로 알고 있어. 너 살기 힘드니?
이한영: 엄마, 나 어떻게하면 볼 수 있어? 난 얼마든지 갈 수 있어. 세상이 달라졌어...
성혜랑: 그래.
이한영: 내가 지금 여기 있으면 좋아진 것 아냐...
성혜랑: 그렇다.
이한영: 엄마하고 통화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이모는... 혹시 이모하고 통화되면 이모는 많이 아프잖아...
성혜랑: 충격이 커서 안돼. 무능해져서 능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전화받고 처리못해. 대답도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해야돼.
이한영: 엄마 정말 맞아? 엄마 하나 더 물을께. 나하고 남옥이 사이에 죽은 동생이 누구야?
성혜랑: 복남이.
이한영: 맞구나.
성혜랑: 제네바에서 그때 어떻게 갔어? 나 너 한참 찾았다.
이한영: 엄마, 옆에 내 처가 있거든. 잠깐 바꿔줄께.
성혜랑: 그래.
김종은: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성혜랑: 오! 너냐?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니? 넌 이름이 뭐냐?
김종은: 김종은이에요.
성혜랑: 그래, 살기가 일없니?
김종은: 괜찮아요. 건강하세요?
성혜랑: 그래요. 괜찮아요. 애기 아빠 잘 돌봐주고 잘 해달라우. 아이구, 난 그 애가 불쌍해서 20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죽었는 줄 알았어. 행복하게 살아라. 행복하게...
다시 이한영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이때 성씨는 아들에게 망명을 뜻하는 듯한 발언을 수차례 했다.
이한영: 엄마, 빠빠가 내가 여기 살아있는줄 알면 엄마도 위험해질것아냐. 그럼 혹시라도 그쪽(평양)에서 이상하게 소환하고 그러면 절대로 들어가면 안될것 같은데...
성혜랑: 응. 안 들어가. 그래서 안 들어가.
이한영: 그런 일(평양에서 소환하는 일)이 있으면?
성혜랑: 그런 일이 있으면 나, 갈 데 있어.
이한영: 갈 데 있어? 그러면 내가 엄마한테 연락할 길도 없잖아.
성혜랑: 글쎄, 그러니까 내가 너 전화번호 알고 싶은 거야.
이한영: 엄마 나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어? 모스크바 가서 내가 어떻게 엄마한테 전화하면 엄마가 나올수 있어?
성혜랑: 그럼. 볼 수 있어. 우리 곧 볼 수 있어. 근데 여기는 택시가 참 위험하대더라. 좀 기달려. 내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데... (속삭이며)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이한영: 안 오면 내가 어떻게 엄마를 봐?
성혜랑: (속삭이며) 내가 일러줄께. 나 계획있는데.
이한영: 어? 계획있다고?
성혜랑: (낮은소리) 계획 있어.
이한영: 계획있어? 어... 그렇구나... 아니야. 엄마가 어떻게 하겠어. 내가 내 딸이랑 데리고 가서 엄마가 잠깐 나와서 보면 몰라도.
성혜랑: 그래두...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는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모스크바 자기 방에서 소리를 죽여 가면서 흐느끼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전화선을 타고 서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체제가 다른 남과 북에 흩어져 살아도 피는 속일 수 없다는 진리 때문에 그토록 감정을 자제하던 성혜랑도 무너진 것이다.

아들의 전화번호를 받은 성씨는 자신의 '앞으로 계획'에 대해 은유적으로 아들에게 귀띔했다. 중요한 부분은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고 날짜나 장소를 지정할 때는 가족들만 기억하는 누구의 제사나 생일 따위를 예시했다.

예컨대 별명이 '몽이'인 오빠 성일기를 가리킬 때는 몽이의 '몽'을 꿈 몽자에 비유해 '꿈에 대한 것'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성혜랑은 '금년 할머니 생일의 달' 에 '여행'이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 생일의 달'은 12월이므로 12월에 어디로 움직이겠다는 뜻을 전하려고 했는데 아들이 즉각 감지하지 못하자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오는 12월에 ~로 여행을 갈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성씨의 '탈출 계획'은 이런 식으로 서울에 전달됐다.

3.2. 마지막 통화

성혜랑: 여보세요.
이한영: 알로(러시아 인사말), 엄마.
성혜랑: 별일 없지? 지난번에 통화할때 너 망했다는 거, 그거 얼마나 무서운 거냐?
이한영: 사업하다 망한 거요?
성혜랑: 그거 얼마나 무서운 거냐. 살아날 수 있어?
이한영: 그럼요. 죽고 살고 문제는 아니고,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사업을 크게 벌렸다가 그렇게된거에요. 그냥 평범하게 직장생활하고 그랬으면 됐는데.
성혜랑: 얘 자신없으면... 내가 그 사회를 좀 알잖니. 생존경쟁이 얼마나... 그러지 말고 직장 안전한데 들어가서 조용하게 살렴.
이한영: 그러려고 해요. 정리할 것도 좀 정리하고 러시아어를 하니까. 여기선 러시아하고 무역을 많이 하거든. 그래서 러시아하고 무역하는 회사에 취직하려고 그래요. 외할머니 어디에 묻히셨어요?
성혜랑: 할아버지 옆에.
이한영: 할아버지가, 거기가 어디였지? 평양근교였던것 같은데.
성혜랑: 평양시 용성구역 말암리야. 그때 가봤지? 할아버지 옆에 크게 잘했어.
이한영: 파파(김정일)가 장례식은 잘 해주셨어요?
성혜랑: 화장했으니까 그렇게 해줬다고 보겠나?
이한영: 잘해준게 아니구나. 살아계실때도 서운하게 해주셨는데. 통일되면 가볼수 있을텐데.
성혜랑: 묘주에는 몽이(성씨의 오빠 성일기의 옛 이름)라고 썼다. 할아버지 묘지에는 몽이, 혜랑이라고 썼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렇게 썼어.
이한영: 할머니 나 여기 있는줄 알고 돌아가셨어요?
성혜랑: 내가 말안했어. 놀라실까봐. 삼촌 살아계신줄은 알고.
이한영: 엄마나 이모가 많이 괄시 받고 있나?
성혜랑: 그런셈이야. 누가 감시가 붙었다고.
이한영: 감시가 아니고 괄시, 괄시. 왜냐하면 방치코(김정일의 세 번째 부인 고용희)도 있고, 그 아들이 제네바국제학교에 다니고, 그렇게 떵떵거리고 살면 상대적으로 이모나 엄마가 천시받고 사는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성혜랑: 그건 당연하지. 다만, 그대로 아예 살게 내버려두고 여행을 하겠다고 그러면 아무말도 하지 않고 눈감아 주고 그정도지 뭐.
이한영: 돈 같은 건 제대로 보내줘요?
성혜랑: 보내줄 돈이 어디 있니?
이한영: 돈안주면 어떻게 거기서 생활을 하고 살아가?
성혜랑: 원래 있던 거.
이한영: 아, 이모가 옛날에 조금씩 꼬불쳐놨던 것... 그거 다 까먹으면 어떡해?...
성혜랑: 죽으라고 하겠니, 설마?
이한영: 그런 상태예요? 나는 그래도 대장(김정남)이 있으니까... 대장이 장손이고 장남이고 그러니까 대장 봐서라도 이모한테는 함부로 안할줄 알았거든.
성혜랑: 더 가혹하게 하려면 할 수도 있는 처지지. 그 여자(김정은의 어머니 고용희)가 세도가 대단하니까. 그래서 무관심하고 모른척 한다.
이한영: 그러면 대장이 장손인데 후계자로 생각 안하나요?
성혜랑: 아직 자기 자신(김정일)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그런 문제 논의 하겠니?
이한영: 여기서는 초대소에 갇혀있는 걸로 그렇게 났더라?
성혜랑: 맞지 뭐. 몰래 그러고 나와 다니지. 갇혀있고...
이한영: 대장은 그럼 자기 엄마니까 이모한테는 가끔 왔다갔다해요?
성혜랑: 얼마전까지는 했댔어. 한 3~4년 전까지는. 3년전부터는 전혀나오지 못하는구나.
이한영: 도망갈까봐 그러는건가?
성혜랑: 모르지.
이한영: 어렸을때는 참 그렇게 귀여워하고 장차 후계자로 여기시고 그러는 것 같더니...
성혜랑: 그렇게 변하더라.
이한영: 내가 많이 망설였었어 사실... 그런데 내가 지금 통화를 안하면 엄마나 이모하고 영원히 통화가 안될수도 있고 또 전화번호가 혹시라도 바뀌면, 그러면 연락이 전혀 끊기면 정말 언제 볼수 있을지, 통화라도 할 수 있을지 사실 막연하잖아요.
성혜랑: (울먹이며)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내가 10년을, 10년을 너는 한번도 안걸었댔니? 그저 어쩌다가 그게 혹시 네건가 하고... 10년을 어떻게하다 그렇게 기다렸다. 그런데 한번도 안했니?
이한영: 내가 옛날 전화번호가 그대로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엄마, 할머니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어?
성혜랑: 할머니, 건강하시고 백세까지 사신다고 그랬는데 너무 속이 상해서 뇌혈전으로 돌아가셨어.
이한영: 속상했다는 건 정남이 문제, 뭐 그런 건가?
성혜랑: (울먹임) 그럼. 아니면 더 계속 사셨을텐데. 용기를 잃지 말아. 아직 젊잖니. 용기를 잃지 말아.
이한영: 엄마 걱정마세요. 나는 어려도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
성혜랑: 나는 네가 참 잘됐다고 생각해.
이한영: 평양에 있었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성혜랑: 글쎄말이야... 글쎄말이야... 두 아이가 다 거기에 갇혀있잖니?
이한영: 두 아이라니?
성혜랑: 남옥이.
이한영: 남옥이도 못나오나?
성혜랑: 울타리 때문에 나오지도 못해. 울타리안에서 어떻게 사니?...
이한영: 그럼 정말 둘이 갇혀있나?
성혜랑: 남옥이는 옛날 우리집 호두나무집에 있어.
이한영: 그럼 대장 옆집 거기 있고?
성혜랑: 응. 아이들이 갑갑해서 죽지 뭐.
이한영: 어렵고 고생되더라도 여기가 좋아요.
성혜랑: 그렇지, 그래.
이한영: 여기와서 느낀 거지만 거기 정말 잘못하고 있어. 엄마도 느낄거야.
성혜랑: 아휴, 말할 수 있니... 도대체 기가 막히고 목이 메어서... 그런데 10년전도 옛날이다. 지금은 더해. 제사때나 명절이라며 들어오라고하면 병원에 들어갈 작정이다. 피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잖니?
이한영: 남옥이는 그럼 거기서 어떻게 하나?
성혜랑: 거기 있는한 어떻게 결정적인 대책을 강구하겠니? 어떡하든 나오도록 수를 쓰는데 그게 잘 안된다.
이한영: 어떻게든 남옥이를 밖으로 끌어내요.
성혜랑: 내가 기회를 노리는 것도 그거야.
이한영: 여기서 사진 보니까 파파도 많이 늙으셨던데... 건강은 해요? 어디 아파보이던데요?
성혜랑: 좀 그렇기도 한 것 같아. 하도 비밀, 비밀이라서...
이한영: 그것도 비밀이에요?
성혜랑: 우리가 아니? 몽땅 비밀이야.
이한영: 옛날처럼 대사관도 편의 봐주고 그래요?
성혜랑: 고작해야 비행기표나 사주는 거지, 뭐.
이한영: 대사관이나,옛날처럼 하부기관에서 달러 아부(뇌물) 안하나?
성혜랑: 달러가 얼마나 귀한줄이나 아냐? 알잖니, 우리나라 사정이 어떻다는 걸. 여유가 누구에게도 없어.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 이모가 저축한 것 가지고 너끈히 살수 있어.
이한영: 얼마나 저축했어요? 몇백만달러 정도 저축했어요?
성혜랑: 평양에서 먹는 것과 옷같은 것 대주니까 그걸로 살지.
이한영: 저번에 통화한 손주 알지? 비디오로 담아놨으니까 보내줄게요.
성혜랑: 그걸 어떻게 여기서 보니? 관료들 다 있는데. 그 전화 괜찮니?
이한영: 그쪽에서만 괜찮으면 괜찮아요. 그게 제일 걱정이야.
성혜랑: 여기는 까치들이 다 도청을 하잖니?
이한영: 까치가 뭐야?
성혜랑: 네가 이름붙인 거잖아. KGB말이야. 까치들이 다 듣고 있는데 24시간 다 들어. 그런데 러시아하고 우리(북한)가 사이가 안좋아.[10] 어떻게든지 우리 모여서 살 궁리를 하자.
이한영: 내가 부도가 나서 감옥에 갈뻔했었는데 국가에서 다 관대하게 해결해 줬어요.
성혜랑: 아, 고맙구나.
이한영: 집도 사줬었어요. 내가 어떻게 사요...
성혜랑: 그래, 일자리 있니?
이한영: 있죠. 당국에서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줬는데 방송국 프로듀서라고 기자 같은 거예요.
성혜랑: 너 원래 글쓰는 재간 있잖니? 아, 수입이 좋은 그런 곳에 알선도 다 해주는구나.
이한영: 여기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외삼촌이 해외를 왔다갔다 할수 있을 정도인데요.
성혜랑: 내가 글을 쓰지 않니? 내가 꼭 쓰려고 하는 주제가 있잖니?
이한영: 엄마가 글을 쓰려고?
성혜랑: 이미 썼는데 여기서는 발표하기 곤란해.
이한영: 엄마가 쓴 글을 그쪽에선 발표하기 곤란하다고?
성혜랑: 그래. 난 그래서 그런거 건강이 허락하는한 죽기전에 완성하려고 한다.
이한영: 그럼 엄마가 들어가지 않고 그런 글을 여기서 받으면 돈벌이가 되는데.
성혜랑: 얼마든지 그거야 알지. 그러나 내가 저쪽과 인연을 끊지 않으면 곤란하지. 희망을 가지고 안전한 직장에 가서 조용히 살아라. 엄마 살아있단다. 엄마 그렇게 무능하지 않단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라. 엄마는 글을 써서 먹고 살려고 작정하고 있어.
이한영: 응, 그래?
성혜랑: 엄마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알아. 내가 쓰면 세상에서 희귀한 글이 될 거야.
이한영: 제3세계에서 엄마가 문필활동을 하면 아마 돈 많이 벌거야. 엄마만의 고유한 것들이 있잖아. 그동안 많이 느꼈던 것.
성혜랑: 그래 내가 쓰는 것은 소설이 아니고 실제 일이야.
이한영: 그럼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 수 있겠네.
성혜랑: 글쎄 말이야, 글쎄 말이야. 너 희망가져라. 나는 제3세계에 가서 책을 낼거야.
이한영: 그러면 남옥이를 빨리 불러내야죠.
성혜랑: 그럼, 빨리 불러내야지. 정남이야 제 아들인데 죽이기야 하겠니?[11] 전화비 많이 나오겠다. 백달러는 되겠다.
이한영: 백달러? 엄마가 그렇게 어려워?
성혜랑: 너희들은 백달러가 안 크니?
이한영: 여기서는 백달러 우습게 알아요. 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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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2월 중순 처음 신상이 공개된 이한영의 모습.
서로를 보지 못한 기간이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연락이 닿은 모자는 서로 숨죽이며 10월 20일부터 12월 20일까지 두달간 약 30여차례의 통화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에 연락을 끊은 이유는 망명 후에는 연락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성혜랑은 1995년 12월 초 평양을 다녀온 뒤 서울의 아들 이한영과 가진 국제전화에서 "방치코[12]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 방치코는 우리 자매를 잡아먹으려고 난리다. 꼬투리가 잡히면 아오지 탄광에 보내겠다며 해외공관원들을 들볶고 있다. 이 때문에 이모(성혜림)의 증세가 더욱 악화돼 동행키로 마음을 돌렸다"고 이한영에게 전했다.

평양 음악무용종합대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1972년 만수대예술단 단원이 된 고용희는 김정일이 주말에 여는 측근자 파티에 기쁨조로 나왔다가 김정일의 눈에 들었으며 1979년에는 창광산 관저의 안주인이 됐다. 창광산 관저는 본래 성혜림이 15호 관저(김정일 공관)와 함께 소유하다가 고용희에게 빼앗겼다.

한편 1974년에 셋째 아내가 된 김영숙은 넷째 고용희 등장후 창광산 관저보다 못한 서장동 관저에 살고 있다고 한다.[13] 고용희가 김정일을 독차지해 김정일이 서장동 관저를 찾는 것은 김정일과 김영숙 사이에서 태어난 딸 김설송을 만나러 가는 때뿐이라고 한다.

평양 김정일공관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30상자씩 보내 주던 쌀, 고추장, 된장생수, 과일, 건어물, 인삼 등 부식물도 수행원의 조그만 잘못을 빌미로 공급이 중단됐다.

성혜랑-성혜림 자매는 아버지 성유경이 1982년에 사망하고 정신적 기둥으로 삼았던 어머니 김원주마저 1994년 11월초 사망하자 북한 생활에 미련을 버린 것으로 보인다. 성혜랑은 아들과의 전화에서 모친 김원주의 사망 원인을 "고용희 일가의 세력확장에 있어서 이에 미래에 잇따를 손자 김정남 후계구도 문제로 속이 상해 돌아가셨다"고 말하면서 "어머니(김원주) 생각이 날까봐 평양에는 의식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혜랑은 첫 국제전화에서 아들이 "어떻게 하면 엄마를 볼수있어?"라며 엄마를 보고 싶다고 하자 "볼 수 있어. 우리 볼 수 있다. 볼 수 있게 지금 하려고 그래"라고 말했고 아들 이씨는 "엄마를 만나러 모스크바에 가겠다"고 하자 "기다려라. 지금 내가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국 후 생활에 대해서는 "내가 체험했던 북한생활을 작품으로 발표하면 먹고 사는데는 불편이 없다"며 작가생활을 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1995년 11월 중순 모스크바 코스모스 호텔에서 서울에 살던 친오빠 성일기를 만난 성혜랑은 한국에 갈 경우의 처우 문제와 신변안전에 대해 물어보고 "평양의 남옥이(자신의 딸)를 데려와야 하므로 시간이 걸린다. 평양에서 설(신정)을 쇠라는 김정일의 요청에 따라 12월말쯤 평양에 들어가 설을 쇠고 1996년 1월 20일쯤 남옥이를 데리고 모스크바로 나가 1월말쯤 제3국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서울에 거주하던 성혜림의 오빠는 가족이 북으로 떠난 이듬해 자진 월북 해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6.25 전쟁 하루 전에 미리 남파돼 경남-북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1953년 체포돼 전향했다.

한편 성혜림의 아들 김정남은 1996년 1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중국 방문에 나서는 등 대외 활동을 시작하면서 고용희와 갈등이 일어났는데, 성혜랑은 "정남이가 아직 힘이 약해 우리를 돌봐줄 수 없다"고 전했다.

성씨는 1996년 1월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아버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중국 시찰에 나서 공식적인 대외활동에 착수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1994년 2월경 김정일이 「김정일 처남 서울에 살고있다」는 기사가 실린 1994년 1월 20일자 주간조선을 식사자리에 들고와 관저 암호명 「15호」가 어떻게 노출됐는지 추궁했다는 사실 등을 아들 이한영과의 모스크바-서울간 국제 통화에서 밝히는 등 김정일에 관한 고급정보를 많이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한국의 매체를 꾸준히 접하던 김정일이 이씨가 귀순한 후 안기부에 건네준 자료를 접한 뒤 "어지간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가 어떻게 새어나갔을까" 여간 궁금했던 모양이다.

4. 암살 전개 과정

40대로 추정되는 한 남자가 가명으로 이씨의 이전 주민등록지인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사무소에서 이씨의 주민등록등초본 2통을 발급받은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 남성은 "이한영이 밀린 카드값을 갚지 않아서 채권 확보에 필요하다"면서 주민등록등본을 뗐다고 밝혔으나 경찰 확인 결과 이 남자가 근무한다는 서울 종로의 사무실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과 다르게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주민등록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북한에서는 간첩들의 활동을 통해 남한 사람의 신원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위조하여 불법적으로 여권을 발급해 입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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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영의 대학 선배 김씨는 이씨의 주소지를 분당의 본인 집으로 옮겨 주었다. 이씨는 1996년 여름 수기를 출간하자마자 안기부의 안가에서 나온 뒤 자신의 과거 주소지에서 실제 살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주민등록이 말소되자 김씨의 동의를 얻어 주소지를 옮겼다.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기 때문에 제 아무리 뛰어난 간첩이라도 이한영의 정확한 정보를 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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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씨를 쓰는 한 남성이 이한영이 자서전에 흘린 정보를 그대로 이용했는데 서울 북창동 D심부름센터에 전화하여 위조된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면서 "만나야 할 사람이다. 이름은 이한영이고, 1962년생 전후인데 주소지를 알수있나? 회사가 부도가 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있고, 수인번호는 1421번이다. 이한영씨의 주소를 찾아달라. 교도소를 갔다온 적이 있고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다."라고 말한 뒤 각각 오전 10시 55분경, 그리고 오후 3시경 두 차례에 걸쳐 하나은행 서울 흑석동 지점에서 40만원, 서울 제일은행 광화문지점에서 5만원을 송금했다. #

심부름센터측이 이씨의 주소를 가르쳐 주자 이씨의 전화번호까지 알아봐 달라고 했으나 심부름센터측과 의뢰비가 맞지 않아 공중전화로 여덟 차례나 협상을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오전 10시 30분∼오후 4시까지 심부름센터로 걸려온 핸드폰 전화 011(1통), 017(2통)이 각각 다른 번호인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것으로 볼 때 용역에 대한 의뢰 과정에서도 전화, 송금 등을 조직적으로 나누어 행동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한영의 주민등록증이 갱신된 후 열흘만에 간첩들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피격 최소 4개월 전부터 꾸준히 이한영을 암살하기 위해 간첩들이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4.1. 1997년 2월

뒤에서 후술할 내용들은 이씨가 사망한 달에 있었던 사건들이다.

4.1.1. 의문의 전화

사건 발생을 전후해 우종창 기자에게도 이상한 조짐이 있었는데 사건 발생 며칠 전부터 누군가가 기자의 집에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몇 분 간 수화기를 들고 있는 일이 계속됐다. 괴전화는 반드시 오후 7시 정각에 걸려왔다. 우기자의 아내로부터 이상한 전화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기자는 오후 7시에 문제의 괴전화를 직접 받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를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상대방의 숨쉬는 소리만 전화기 속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이런 상태가 5분 이상 계속되었다. 상대방은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계속 전화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사건이 발생했다. 안기부에 괴전화 사실을 알렸더니 "경찰관을 보내줄 수는 있지만 상대가 북한 공작원일 경우 신변안전이 어렵다. 당분간 온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조심한 적도 있다고 한다.

대학 선배의 집에도 같은 형식의 전화가 수차례 왔다. 무언가 정보를 캐내기 위한 것인지 2월 1일부터 15일까지 총 15통의 전화가 오후 7시 정각에 임시거처로 매일 왔으며 누구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5분간 수화기를 들고 숨을 쉬고 있었고 당시 전화를 받은 대학 선배의 부인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열흘 전쯤에는 임시거처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를 이용하여 대학선배의 집에 한국통신 직원을 사칭해 세대주와 인원 등을 묻고 30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고정간첩까지 동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4.1.2. 피격 열흘 전

한 남성이 6일 전, 즉 1월 31일에 사용했던 방법과 같이 이한영에 대한 정보를 더 자세히 찾아내기 위해 피격 열흘 전인 2월 5일 오전 9시 45분경 서울의 심부름센터직원 김씨(당시 51세)에게 서울에서 쓰는 표준어로 얘기하며 이씨의 전화번호 등을 알아내 달라고 부탁한 뒤 이들은 차량을 타고 서울, 마산, 대구에 소재한 하나은행, 경남은행, 국민은행을 이용해 서울에 위치한 모 심부름센터로 돈을 입금하면서 심부름센터에 과거 이한영의 구치소 수형번호를 건네줬다.

자신을 "부도가 나서 도망다니는 사업가"라고 소개하고 "처의 불륜관계를 조사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먼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처가 방을 세놓았는데 세입자의 전화번호와 그의 부인 이름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힘들지만 알아보겠으니 당신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의뢰인은 "지금 도망다니는 처지라 전화연락이 안된다"면서 자신의 주소와 세입자 '이한영'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세대주는 김상현, 바로 나다"고 말했다. 의뢰인은 이씨가 살던 집의 주인이자 이씨의 선배인 '김장현'을 '김상현'으로 잘못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당신이 집주인이면 직접 전화를 걸면 될 것 아니냐"고 물었으나 이 남자는 "그럴 일이 있다. 염려말라"고 말했다. 20만원을 받기로 한 김씨는 성남전화국 안내에 '이한영'과 '김상현'의 전화번호를 문의했으나 전화번호부에는 올라와 있지 않았다. 김씨는 이한영의 임시거처인 분당구 시범현대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세무서직원을 사칭하여 1402호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이렇게 해서 불법 심부름센터의 김씨는 평소 닿아 있던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과 경찰관과 법무부교정본부 교정직 공무원에게 전산조회를 요청해 이한영의 정보를 간첩들에게 건네주고 간첩들은 서울의 동사무소에도 들려 빚쟁이로 위장해 주민등록등본도 발급받아 갔다.

수사당국은 "2월 5일 심부름센터로 걸려온 통화기록중에는 마산과 대구에서 건 전화가 없다"고 밝히고 "입금자와 심부름센터 의뢰인은 다른 인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남성은 심부름센터 직원 김씨가 용역비 20만원의 착수금을 입금할 것을 요구하자 오전 9시 53분 마산경남은행, 동마산지점에서 15만원을 입금했으며 낮 12시 20분 대구국민은행 동대구지점에서 5만원을 입금했다. 금융실명제 이후 송금액이 30만원 이하인 소액에 대해서는 창구직원이 실명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정간첩을 통해 듣고 신분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입금자가 입금표에 적은 김상현과 최성철은 가명이었고 주민등록번호도 위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수사당국은 심부름센터로 전화를 건 남자와 용역비 입금자 , 실제 범행자 2명 등 범인들은 최소 4명이상일 것으로 봤다. 수사당국은 이씨를 습격한 2명은 남파간첩, 심부름센터에 전화를 건 30대 목소리의 남자와 용역비 입금자는 고정간첩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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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약 8개월전 코미디언 이주일이 MC로 진행하는 쇼에 출연하여 북한의 실상을 폭로했던 이한영
이한영의 임시거처가 된 대학선배 부부 자택을 파악한 간첩들은 암살 전날까지 단지를 차량으로 배회하고 아파트 구조를 답사하고 다녔으며 이 모습은 경비원들과 주민들에게 목격되었다.

4.1.3. 피격 이틀 전

1997년 2월 12일 수요일에 이한영은 임시거처에서 잠시 나와 강남의 압구정동 프린세스 호텔에서 아르바이트생들과 함께 묵고 있었다. 13일에는 서울 G백화점 초콜릿 매장에서 중앙일보 기자와 인터뷰가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최고니까 초콜릿부터 팔고 인터뷰합시다."라며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 1층 초콜릿 매장에서 농담을 하는 등 한결 여유가 있어 보였다.

백화점 지하 1층에서 1월 10일부터 2월 14일까지 초콜릿 매장을 운영한 이씨는 발렌타인데이 특수기대에 어울리게 인파가 모여들자 어린이처럼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순간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이씨는 지인에게 "언론에 너무 얼굴이 알려져있는 처지에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나서도 되는건지 모르겠으며, 이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고 말했으며 신분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해 수시로 전화. 무선호출기 번호를 바꾸면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데 안간힘을 써 왔다.

1996년 9월부터 이씨와 친분을 쌓아 온 지인 1명은 "이씨가 처음 알려준 집 전화번호가 한달뒤에는 달랐고 다시 한달뒤에는 이마저 통화되지 않았다. 무선호출기도 두번이나 번호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황장엽 북한 노동당비서의 망명 후에는 증세가 악화돼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등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특히 이때부터는 자신이 묵던 집주인 김장현에게 수시로 "언제 간첩에게 당할지 모르겠다"며 불안해했으며 여러 개의 안경을 번갈아 사용하는가 하면 안경테도 자주 바꾸었고 북한 억양을 없애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를 배우기까지 했다.

반면 이한영은 관계기관의 보호에도 극도의 불신감을 내보여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96년 말에는 안기부 간부가 "(신변이 노출됐으니) 언제 누구한테 테러당할지 모른다. 안가에 들어와 살아"라고 충고하자 "안기부가 나를 감시하려고 한다. 죽어도 안가에서는 살지 않는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4.1.4. 의문의 여인 (피격 하루 전)

이한영은 1996년 말 분당신도시에 친구와 판촉회사인 'J코리아'를 차리고 사건 발생 하루 전인 14일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 1층 매장에서 발렌타인데이 행사를 벌였다.

외적으로 매장일에 정신이 없었던 이씨는 이날 사촌 여동생으로부터 만나자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오늘은 바쁘니 내일 매장일이 끝나면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약속을 잡았다.

한편 매장 행사가 끝난 후 14일 밤 이씨가 한 20대 여자와 함께 서울의 모 나이트클럽에서 만나 술을 마시고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J호텔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 여자가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 이 여자를 찾는데 수사력을 모았고 수사당국은 "이씨로부터 사건 당일인 15일의 이씨 일정을 미리 알아내 이 사실을 범인들에게 알려줬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수사당국이 문제의 여자에 주목한 것은 저격당한 이씨의 귀가시간 등을 범인들이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던 점으로 미뤄 이씨를 아는 사람 중에 협조자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국은 이씨의 주변인물들은 모두 조사했으나 이 여자의 소재만을 파악할 수 없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씨는 14일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앞 P호텔에서 밤 늦게까지 초콜릿 포장 작업을 한 뒤 호텔을 나와 문제의 J호텔에서 이 여자와 밤을 지낸 것으로 드러났다. 망원인 이 여자가 "15일 이씨가 분당 김장현씨 집에 들어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범인들에게 알려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경찰의 분석이다.

4.1.5. 피격 당일 (1997년 2월 15일 토요일)

피격 당일 이씨는 불안감 속에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공중전화를 이용하여 <우먼센스> 기자를 사칭하는 등 대학선배 부인 남모씨에게 이한영의 대략적인 퇴근시 간까지 물어본 것으로 드러났으며 대학 선배 부인 남씨의 증언에 의하면 사건 당일 오전에는 아무말도없는 전화가 추가로 몇차례 더 있었다고 한다.
발렌타이 데이를 앞두고 초콜릿 포장 작업을 하느라 강남의 여관에서 3일간 지낸 이한영은 오후 3시경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3일만에 임시거처에 한 차례 들른 것으로 밝혀졌는데 검은색 항공점퍼, 검은색 청바지, 검은색 장화식 단화를 신고 다시 외출했다.
이한영은 행사 뒤처리 문제로 서울 강남구 논현동 노보텔앰베서더 호텔 로비에서 손윗동서 오모씨(당시 33세)를 만나 호텔 내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냈다. 커피를 마신 후 오씨가 양식을 먹자고 하자 이씨는 "고향 음식인 평양냉면을 먹고 싶다"고 하여 서울 논현동 안세병원 뒤 평양면옥 음식점으로 가서 평양냉면과 이북식 만두로 저녁식사를 했다. 그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만찬이었다.

발렌타인데이 특수 행사가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고정매장도 얻을 수 있을것 이란 기대에 부푼 이한영은 초콜릿 가게가 장사가 잘 되자 "빨리 돈을 벌어 아내와 딸과 함께 다시 살고싶다. 화이트 데이에는 더 잘해야겠다"며 매우 즐거워했다.

동서가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을 언급하며 "아는 사람이냐?"고 묻자 이한영은 그저 "잘 알고있는 사람이다"라며 황장엽에 대해서는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가족들의 망명 소식에 대해서도 얘기하며 흡족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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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술자리를 가지고 있는 이한영(오른쪽). 그는 생전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야만 했고 그로 인해 술을 좋아했다.
4.1.5.1. 1차 시도: 기자 사칭 전화
이한영은 오씨의 "소주 한잔 더하자"는 권유에 "피곤하니 다음에 하자"고 했다.

오씨는 "평상시 (이씨와) 만날때마다 내가 차로 양재동(전철역)까지 데려다 줬는데 그날(피격 당일)따라 (이씨가) 혼자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고 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이렇게 술자리를 마무리짓고 서로 헤어졌으며 이씨는 임시거처인 선배 집으로 곧장 향했다.

같은시각 이한영의 한양대 시절 선배의 집인 임시거처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예전에 이씨와 함께 근무했던 여성월간지 우먼센스 잡지사기자인데 이한영씨와 인터뷰를 하고싶다"며 이씨의 대략적인 퇴근시간, 핸드폰, 그리고 무선호출기 번호까지 물어 이에 전화를 받은 대학 선배의 부인 남씨는 기자라는 말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가르쳐 줬다고 한다.

이한영은 콩코드 택시를 타고 카폰을 이용해 "지금 집으로 출발해 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대학 선배 부인에게 전화를 하였고 이에 대학 선배 부인인 남씨는 조금전에 이한영에게 "우먼센스라는 잡지사 기자가 오늘 여러번 전화를 걸어왔다. 인터뷰하고 싶다고 그러더라."라는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으나 이한영은 "우먼센스 기자요? 우먼센스 기자가 어떻게 나를 알죠? 아무한테도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는데... 우먼센스에는 아는 기자도 없고..."라며 놀라워했고 "여성지 기자 중 아는 사람이 없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먼센스 편집장 이형옥은 기자들을 상대로 일일이 확인해 본 결과 이씨 집으로 전화를 걸었던 기자는 없는 것으로 밝혔으며 그 전화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한영에 대한 어떠한 취재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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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술하겠으나 11cm의 작은 총이라면 일반인이 보기에는 장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씨는 범행에 사용된 벨기에제 권총을 북한에 있을 때 자주 봤다.

사건현장에서 덤으로 소음기까지 장착되어 있는 눈에 익은 총을 본 순간 이한영은 사태의 심각성을 곧바로 인지하고 눈앞의 괴한들이 북한 간첩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피격을 당한 후에도 본능적으로 지인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범인들이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간첩..." 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씨는 1996년 2월 14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김정일의 또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은 이미 잘 알려졌듯이 영화감상이다. 그는 사격광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명사수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85호」에 있는 야외사격장에서 병을 놓고 사격을 하거나 토끼 등 동물을 풀어놓고 권총이나 AK 소총으로 쏜다. 평양 근교엔 김정일 전용사격장도 있다.

김정일은 아들 정남이에게도 어렸을 적부터 사격을 가르쳤다. 잠을 잘땐 베개 밑에 항상 벨기에제 권총을 놓아두는 습관이 있다. 하루는 관리요원이 온도를 재러 김정일 침실에 무심코 들어갔다가 어린 정남이가 권총을 들이대는 바람에 혼비백산을 했던 적도 있다. 김일성은 이미 1976년부터 상징적 존재가 돼 모든 보고와 결재는 조직비서를 하던 김정일을 통해 이뤄졌다.
<기사내용 일부 발췌>
4.1.5.2. 2차 시도: 납치 및 회유 시도
암살조는 이한영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량을 대기시킨 후 조장 최순호와 윤동철이 미리 14층에 올라가 대기하였고 때가 되어 시범현대아파트 418동 1402호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술병과 딸에게 줄 초콜릿 바구니를 들고 퇴근하던 이한영이 내리는 순간 (사건 발생 시간상으로 보아) 간첩들은 이씨와 타협하여 뭔가를 최종 협상하려는 것인지 길을 가로막으며 이한영에게 "가서 이야기나 잠시 하자, 함께 이북으로 가자" 등 피차 대화를 어느 정도 시도함으로써 납치를 기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간첩들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한영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감췄을 개연성이 상당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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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4.1.5.3. 3차 시도: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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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를 가져 비록 술에 취해 있었으나 1만명당 1명 꼴로 있다는 아이큐가 150이 넘는 천재였던 이한영은 이때 무언가를 감지하고 순간적으로 북에서 내려온 간첩임을 눈치채고 신변에 위협을 느꼈으나 당황한 기색 때문에 상황판단을 미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간첩들에게 저항했다. 이때 맞은편 1401호에 살고 있던 박씨는 현관 밖에서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부부싸움하는 소리인 줄 알고 참견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남자들끼리 다투는 소리가 들려 이상하게 여기고 현관문에 붙어 있는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이 있으면 열감지 장치에 의해 자동으로 켜지는 등이 있어 밖은 환한 편이었다. 박씨의 눈에 권총을 든 한 남자의 뒷모습이 들어왔는데 이 남자는 1401호 현관문과 마주보고 서 있는 이씨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역시 바바리코트를 입은 다른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박씨쪽을 보고 있는 이한영의 표정은 얼어붙어 있었다. 박씨는 즉시 전화로 112와 119에 신고하고 돌아와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신고가 접수된 시각이 바로 밤 9시 52분이었다. 곧바로 총을 들고 있던 남자가 권총에 소음기를 장착하는 것이 보였다. 이때 이씨가 계단쪽으로 황급히 도망치려고 했다.

피격 후 병원에서 이한영의 왼쪽 옆구리에는 찰과성이 있는것으로 확인되었고 아마 이때 다른 한 명은 이한영을 엘리베이터 왼쪽 벽쪽으로 거세게 밀어붙이며 머리 등을 내리쳤을것이다. 이씨는 '여기서 당하면 끝장' 이라는 생각에 격렬히 저항했지만 살상무기를 갖춘 고도로 훈련된 범인들의 상대가 못 됐다. 단지 몇 초간 실랑이했을 뿐 이한영은 곧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져져 그 몸부림으로 인해 당시 대학 선배의 부인 남씨가 안에 있던 임시거처 1402호에 문이 두들겨지는 소리가 났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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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철이 이한영을 뒤에서 잡고 최순호는 바바리코트안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10cm가 약간 넘는 크기의 .25 ACP 체코제 실탄이 장전된[15](정확한 총기 스펙은 .25구경; 6.35 X 16mm, 길이 10.3㎝, 무게 275g, 탄창 용량 6발, 유효사거리 10~15m[16]) 소형 벨기에제 베이비 브라우닝 권총에 현장에서 즉시 소음기를 장착하여 이한영을 향해 총 2발을 쏘았다. 이때 불행하게도 1발이 왼쪽 이마를 명중시켰다.

참고로 소형권총에 덤으로 소음기까지 장착하여 발포했을 때 그저 맥주병 따는 소리 수준에 불과하다. 이씨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이씨가 쓰러지자 괴한 두 명은 계단을 통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슴 부분에도 발포되었으나 범행 당시 두꺼운 공군 이중 파일럿점퍼를 입고 있었던 이한영의 가슴에 가로 방향으로 난 4cm 정도 길이의 타박흔으로 미루어 볼 때 탄환이 비스듬한 방향에서 발사된 뒤 점퍼 속으로 들어가 솜에 엉키면서 회전반경을 넓혀 전진위력이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저 찰과상에 불과했다.

브라우닝 권총의 특징이라면 비교적 사정거리는 짧지만 휴대가 간편하고 안전장치가 좌측 총몸의 방아쇠 바로 옆에 붙어있는 전형적인 호신용 권총이다. 격발 뒤 총알이 오른쪽으로 네 번 회전한 뒤 총구를 빠져나가는 '강선 4조 우선'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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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한영의 대학 선배의 부인 남모씨는 한창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 간첩들에게 저항하는 이한영의 마지막 발악의 소리인 "왜 이래???!!!, 악!!!!!" 등의 소음에 비디오폰을 켜니 간첩들과 이한영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과 최순호가 총을 뽑아 쏘는 장면을 목격했으며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두렵게 떨고 있던 대학 선배의 부인은 인터폰을 통해 화장실에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경비원에게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부재중이었고 2~3분 후 다시 연락이 닿자 "누군가 싸우고 있다"고 알렸다.

박씨는 "당시 속옷만 입고 있어 나가지 못했다"며 "괴한들은 등을 돌리고 있어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같은 동에 살던 한 50대 남자는 이씨가 피격된 직후 현장에 도착했는데 이날 부인과 함께 평소 친분이 있어 1401호에 왔다가 이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우연히 봤다. 이들 부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 내리자 문앞에 이씨가 쓰러져 있었다. 이씨의 귓바퀴에는 피가 흥건했으며 바닥과 벽에도 군데군데 핏자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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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파트는 엘리베이터 양쪽에 두 집이 마주보는 구조였는데 계단으로 통하는 곳에 문이 설치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었고 복도의 전등은 센서가 설치돼 사람이 들어서면 켜지고 사람이 없으면 꺼지게 되어있었다.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가면 옥상으로 올라 가는 사다리가 놓 여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 보자 불도 없이 깜깜한 곳에 보일러용 관이 들어 있었다. 사람 몇 명은 너끈히 숨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수사기관에서는 이 공간에 대해 조사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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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이상을 겁박해 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이한영을 암살보다는 북한으로 납치하려다가 기회가 여의치 않자 총으로 사살하려고 소음기를 다는 듯 두 손으로 총을 잡았다. 소음기도 미리 예비한 것으로 보아 말을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암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암살이 주 목적이었다면 간첩들의 목표물인 이한영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즉시 얼굴을 바로 확인한 후 곧바로 가지고 있는 총의 방아쇠만 당긴다고 하더라도 3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17]

암살이 주 목적이었다면 피격 직후 도주에 용이하지 않은 14층까지 굳이 올라와서 리스크를 두고 임무를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발포 직후 북한 공작원이 주로 사용하는 탄피에 대해서도 증거 인멸을 한 것이 아니라 그럴 겨를도 없이 재빠르게 도주한 것으로 보아 계획한 것과는 달리 이한영이 아파트 주민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반항하자 우발적으로 즉각 사살하고 도망쳤다.

즉, 소음기를 현장에서 장착하는 것을 보아 그래도 이한영이 김정일의 처조카이기 때문에 암살까지는 아니더라도 원래는 북한으로 납치하려다가 1차 계획이 틀어지니 2차 살해로 변경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실 남파공작원 출신의 말을 빌리자면 북한 공작원들은 최후의 선택으로 총을 사용하며 신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웬만해서는 총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5. 암살 이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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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박씨는 비상계단을 통해 달아나는 범인들의 뒷모습을 본 후 남씨의 집에 문을 두드려 바깥으로 나오도록 했다. 호출을 받은 경비원도 14층으로 올라왔다.

이씨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등과 머리를 벽에 기댄 채 앉은 자세로 신음하던 중이었다. 남씨가 문앞에 쓰러진 이한영을 발견하고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이마 부분이 퉁퉁 부은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의식을 잃어 가는 이한영이 대학 선배 부인의 "왜이래??!! 정신차려!!! 누가 그랬어??!!"라는 물음에 간첩 두 명을 의미하는 중지와 검지를 필사적으로 펴들고 희미한 목소리로 대학 선배 부인과 경비원에게 "간...첩 간...첩"이라고 말한 뒤 어렵사리 손짓으로 옆에 있는 대학선배 부인 남씨에게 마치 "내가 지금 총에 맞았으니 이 상황을 알리기 위해 어딘가 연락을 해" 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앞집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119, 129, 112 등의 단어를 말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남씨는 이한영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면서 휴지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을 계속 닦았고 이한영은 곧 그 자리에서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 의식을 잃었다.

사실 모든 총이 그렇겠지만 브라우닝 권총도 몸에 바싹 붙여 발포하기보다는 가까운 거리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실탄의 회전력을 이용해서 쏘는 것이 위력이 더 커진다.

이한영이 맞은 25구경 총알은 탄구 크기가 모나미 볼펜 앞부분의 6분의 1수준이지만 .22구경보다 더 약한 탄약이다. 총을 밀착당하여 맞았을 가능성이 굉장히크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중추가 완전히 마비되지 않아 총을 맞은 직후에도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즉사하지 않았다.

총알이 머리에 들어가 두개골을 완전히 관통하지 못하고 뇌안에서 멈췄다. 이 말인즉슨, 탄두가 두개골로 들어갔다가 반대편으로 나가려다가 못 뚫고 안쪽으로 튕겨나와 2차 뇌손상을 일으켰다. 당시 이한영은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두개골을 뚫은 실탄이 뇌 속으로 5cm 가량 박혀버려 호흡이 가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 다고 한다.

이씨의 대학 선배는 전날 친구들과 강원도 홍천 스키장에 갔다가 밤 10시가 막 넘어 돌아왔는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씨가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주민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씨의 주변에는 초콜릿과 꽃바구니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발렌타인데이 선물로 이씨가 사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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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격 당시 이씨의 옷차림.
이한영은 주민들에 의해 119 구급차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차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곧바로 X선 촬영을 한 뒤 약 1시간 동안 응급치료를 받았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씨는 119구급대가 피격 현장에 도착해 있었을 때 이미 거친 호흡과 함께 동공이 풀린 동시에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총을 맞은 왼쪽 이마에서는 선혈이 계속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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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층(CT)촬영 결과 총알이 뇌 중심 부분 안쪽 5㎝ 깊이에 박혀있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의료진은 수술에 들어갔으며 수술실에 들어갈 때 이씨는 응급실로 실려올 때와는 달리 강한 자극에도 꼼짝을 하지 않고 자기호흡마저 사라져 산소마스크에 의지하면서 겨우 숨을 유지했다. 수술이 진행되면서 혈압이 50~60까지 뚝 떨어져 혈압상승제를 맞기 시작했다. 총알이 회전하면서 이한영의 뇌를 휘저어 놓은 것을 확인해 총알을 제거하는 것마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손상된 부위에 대한 치료를 했다. 뇌손상이 우려되어 뇌막 속에 뭉친 피를 제거하는 수술 정도에 그쳐야 했다.
이씨는 수술을 마치고 3층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병원 본관 3층 수술실에 다녀온 이씨의 부인 김모씨가 밖에서 기다리던 이씨의 장모에게 "목사님을 불러주세요"라고 말해 이씨의 상태가 매우 위독한 것으로 추정됐다.
혈압이 상승하기 시작하고 가슴에 전기충격을 가하면서 이한영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등 반응을 보여 지켜보던 경찰과 가족들이 "회생하는 것이 아니냐"며 흥분하기도 했다.
뇌기능이 완전히 사라져 뇌사 상태에 들어갔고 혈압상승제와 산소마스크가 없으면 그나마 생명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이로써 의료진은 "2~3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지만 평소 심장과 폐기능이 좋았던 이씨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목숨을 유지해 지켜보는 이들에게 실낱같은 기대감을 안겨줬다.[18]
다가올 생일을 맞아 이씨의 딸 예인이가 도화지에 아빠 얼굴을 그렸으며 바깥 여백을 이용해 편지를 썼다. "빨리 일어나서 옛날처럼 놀아주세요, 아빠." 예인이가 아빠 머리맡에서 이 편지를 읽어내려갔는데 울먹이면서 "옛날처럼 놀아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목석처럼 누워 있던 이씨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편 어떤 기자는 세탁실에서 들고 온 의사 가운을 입고 의사를 가장해 이씨의 병실로 들어가려다가 저지당하기도 했으며 청와대나 외 국언론을 팔아 환자의 상태를 묻는 경우도 있었다. 기자들은 취재경쟁으로 법석이었고 정보가 새는 것을 막으려는 경찰도 필사적이었다.
소화기능과 맥박, 체온이 정상치에 가까워 생존기간이 앞으로 3주 이상 연장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병원측이 20일부터 위장으로 연결된 튜브를 통해 미음을 투여한 것도 이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게 의료관계자들의 추정이었다.
혈압과 맥박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 이한영은 심정지가 두차 례나 일어나 두 차례의 인공호흡과 혈압상승제 투여 등 응급처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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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3분 심장박동이 멎었다. 사건 발생 열흘 후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총알 관통상에 의한 두개골 골절과 중증 뇌좌상으로써 사인은 심폐기능을 조절하는 뇌관 기능의 마비였다. 병원측에서는 이씨의 장기가 극도로 손상된 상태라 장기기증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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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CCTV에 찍힌 간첩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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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피격 현장[19]

5.1. 결과

암살 목표를 달성한 북한 간첩들은 이씨가 거주한 아파트의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주차장으로 다시 내려가 대기시킨 차량을 타고 도주했으며[20] 즉시 고속도로로 남해안 지역으로 주파했고 공작잠수함과 접선하여 귀환에 성공해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참고로 이한영이 살해됐던 성남시 분당시범단지 현대아파트 418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가장 외곽에 위치했고 아파트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한 판교IC가 인접해 있어 살해하고 현장을 빠져나가기 아주 용이했다. 살해 현장은 15층에 옥상이 딸려 있는 14층짜리 아파트의 맨 꼭대기 층으로서 거주하는 사람 외에는 출입자가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1997년 2월 27일에 있었던 그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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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차병원 이사장이 이씨의 치료비 1천 4백여만원 전액을 면제해 주었으며 이씨가 숨지기 직전 10여분 동안 중환자실에서 이씨의 부인, 장모 등 가족들이 참석해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배를 올렸는데 예배 중 이씨가 숨지자 부인 김씨는 이씨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오열하다가 실신했고 병원측은 이날 오전 이씨의 사망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자 유족들에게 통보한 뒤 원무과를 통해 영안실에 빈소를 마련할 것을 요청해 비어있던 7호실을 이씨의 빈소로 준비하였다.
보도가 터지자 나는 개인의 안전도 생각해야 했다. 모든 매스컴이 보도한 것처럼 어머니 일행의 망명은 북한의 최고권력층 주변까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고, 이는 김정일에게 어마어마한 추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성미로 보아 망명한 어머니 일행의 추적하는 것은 물론 망명의 한 원인을 제공한 나에 대한 분노도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서울에 온 뒤 얼마 지나 남한 언론에 평양의 관저 얘기가 나간 적이 있다. 15호니, 85호니 하는 숫자로 얘기하는 관저 명칭은 극소수밖에 모르는 사항이다. 어머니는 김정일이 관저 명칭이 나온 신문을 들고 와서 "어떻게 남조선 아이들이 이렇게 알 수 있을까?" 하며, 혹시 내가 서울에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15호 관저라는 숫자는 식구들밖에 모르고, 없어진 식구는 나밖에 없으니 그런 추측은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남한에 있다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크게 발표했을 텐데, 나의 망명사실이 발표 안됐으니 남한에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정도로 내가 밝힌 정보는 김정일을 중심으로 하는 극소수 최고 권력자와 그 주변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김정일이 내 위치를 확인한 이상, 거기다 어머니 일행의 망명으로 북한의 위신이 추락한 상황에서 나를 가만둘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 "어머니,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362-363P)

5.2. 의문의 편지

그러던 어느 날 이씨가 죽은 지 이틀 후인 1997년 2월 27일에는 이씨의 임시거처 앞으로 이상한 편지 하나가 도착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국을 배신하고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를 배반한 죄로 일찍이 죽여야 했건만 조금 늦었을 뿐이다. 수사본부에 협조한 남상화 당신은 물론이고 남편 한양대 교직원 김장현도 기회가 나는 대로 제거하겠다.

현대아파트 418동에도 기회가 나는 대로 무인폭파세트를 설치해 백배천배로 보복하겠다. 우리가 바보인가. 엉성한 수사에 걸려들게. 황비서를 서울로 데려오면 전국이 소란할 것이다.

흔적을 남겨두어 부끄럽다. 동구삼이(東九三二)
<편지내용 전문>[링크:]
문제의 이 협박 편지는 24일 광화문 우체국에서 보낸 것으로 확인됐는데 우표를 붙이지 않아 미납처리된 채였고 편지는 검은 줄이 쳐진 일반편지지였으나 범인은 수사당국의 추적을 피하려는 듯 맨 밑에 표기된 용지번호를 잘라냈다. 글씨체는 왼손으로 쓴듯 큼직큼직한 필체였고 필기구는 검은색 사인펜으로 추정된다고 수사관계자가 밝혔다.

용의자는 같은 해 12월 29일 검찰에 붙잡혔는디 이씨 피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 같다고 경찰은 결론지었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지난 26일 병원에 들어가 강도짓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힌 서울 노원구 월계동 45살 장덕수였다. 경기 부천 남부경찰서는 장씨를 수사하던 중 이씨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지 12일 후 이씨의 임시 거처에 배달된 폭파 위협 편지에서 채취된 지문과 장 씨의 지문이 같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장씨에게서 협박 편지를 보냈다는 진술도 받아냈지만 장씨는 경찰에서 자신이 편지를 보낸 것은 수사기관을 조롱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자신이 범죄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안기부와 합동으로 장 씨를 심문했지만 이씨 피살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은 것으로 결론내렸다고 밝혔다.

5.3. 동거녀 박 모씨

당시 경찰은 이씨의 행적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이씨의 동거녀로 알려진 박 모씨에 대한 조사를 지속했는데 실제 동거녀였는지, 이씨의 사업 파트너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매우 가까운 관계로 추정된다. 혹은 신분을 속이고 이씨에게 접근한 고정간첩일 가능성도 있다.

이씨는 1996년 12월 부인 김 모씨와 협의 이혼 절차를 밟고 별거하던 상황이었다.

박 모씨가 피격 전날 서울의 모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20대 여성과 동일인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과천시 주안동에 살던 동거녀 박 모씨는 뚜렷한 직업 없이 사건 당시를 전후하여 50여 차례 이상 일본과 미국 등을 오갔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당시 경찰도 행적을 감춘 이 여인에 대한 정보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

5.4. 증거물

처음 공안당국은 북한 간첩의 소행으로 추정할 뿐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 범인들이 간첩일 것이라는 경찰의 판단에는 조직적이지만 서투른 범인들의 행동도 근거로 제시되었다. 범인들은 은행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30만원 이상이면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 하는 점을 모르고 40만원을 한꺼번에 입금하고 가짜 주민등록증을 제시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입금표 작성시 굵은 선 내부만 기재하지 않고 빽빽이 모든 공란을 채우는가 하면 번호표를 빼고 기다려야 하는 것을 모르는 등 일상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점을 많이 드러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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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97년 10월 27일 오전 11시 30분 울산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체포된 사회문화부 공작원 최정남과 강연정에 의해 조장 최순호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이를 토대로 안기부는 1997년 11월 19일 이씨가 북한 대남공작부 소속 테러 전문요원에 의해 사살됐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은행 CCTV를 토대로 만든 경찰청 수배전단에 대비해 성형수술을 받고 재침투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여기에 추가로 서울 신림동에 위치한 야산 장군봉에서 이들이 묻은 공작장비 보관함 드보크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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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사건이 발생하기 1개월여 전에 남파돼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한 뒤 이한영을 살해했으며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 영웅칭호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향후 재남파에 대비해 얼굴 성형수술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안기부는 최성남을 신문한 결과 이들 부부간첩단이 남파 직전 공작지도부로부터 "특수조가 이미 심부름센터를 이용해 탄로가 났으므로 포섭대상자 접촉시 심부름센터를 이용하지 말라", "비상시에는 특수공작조가 귀환전 서울 신림동에 매몰해 둔 공작장비를 발굴해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안기부가 최성남의 진술을 토대로 서울 신림동의 드보크를 발굴한 결과 경기도 분당 소재 한솔외국어학원 명의의 편지봉투 속에 들어있는 독침 10개와 사건 발생 26일 전인 1997년 1월 20일 발간된 생활정보지 교차로 등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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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사건을 수사하던 경기도 분당경찰서는 그동안 사건을 비디오폰으로 목격한 진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한영이 2인조의 남자에 의해 피살됐다는 점, 이씨가 피격 직후 "간첩, 간첩"이라고 외쳤던 점,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가 북한 간첩들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점 등을 들어 북한의 소행일 것이라는 중간결과를 발표했으나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결국 이씨의 주소를 유출한 서울경찰청 소속 경관 3명만을 구속한 채 미궁속에 빠질 뻔한 이 사건은 9개월만에 남파된 부부간첩단이 검거됨으로써 북한의 소행임이 밝혀진 채 매듭됐다.


더 자세한 정보는 부여 무장공비 침투사건[22] 당시 체포된 김동식[23]이 CCTV 몽타주를 확인해 "최순호는 가명, 본명은 홍씨 성을 가졌으며 자신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 1년 선배이며[24](18기 선배) 그 때는 왕문성이라는 1차 가명을 사용했다. 이후 사회문화부 공작원일 때 성씨만 바꿔 2차 가명 이순호를 사용했으며 북한 공작원의 초대소에서 서로 여러번 많이 만났다."고 진술했다.

결국 이 사건에 투입됐던 고정간첩들은 경찰청, 안기부, 기무사가 파악한 지하당조직들을 점검해도 나오지 않아 체포에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직후 북한에서 남한으로 송출되는 무전교신량이 일시적으로 대폭 증가했는데 투입됐던 고정간첩들에게 흩어지라는 명령과 체포 시 대응 요령 등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순호는 2000년대 초반에 대외연락부 과장자리까지 진급했던 것으로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이 파악했지만 이후 거취는 확인되지 않았고 같은 조원이었던 윤동철은 2016년에 조선로동당 정무국 산하 통일전선부 문화교류국장에 취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으로부터 20년 후 김정남 피살 사건 당시 김정남 암살을 주도한 부서 책임자가 바로 최순호 정찰총국 19과장으로 알려졌다.[25] 이씨 피살사건 수사본부는 안기부 발표 직후 1997년 11월 28일 해체돼 사실상 수사종결로 인식되었다.

6. 아내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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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6일 오전 이씨 피격 12주기를 맞아 추모예배에 참석한 이한영의 아내 김종은
이씨의 아내 김씨는 "남편이 사망한 후 국정원은 500만원을 주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으며, 재판이나 언론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나가지 말아달라는 주문만 했을 뿐 어떤 사과나 보상도 한 적이 없다" 고 밝혔다.

훗날 김씨 왈 "아직도 남편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지울 수 없다. 남편은 피격 당하기 전 장총을 든 검은옷의 사람들이 자신을 쫓고 있는 꿈을 꾸며 불안해했다. 남편은 분당의 선배집에 주소지를 옮겨놓고 열흘에 한번씩 들르곤 했는데 어떻게 그날을 알고 저격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고 밝혔다.

그녀는 그동안 누구를 만나도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집안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고.
"누가 간첩인지 모르는 세상이잖아요."
"소식을 잘못 전해들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전부터 이한영씨가 저에게 했던 얘기들도 있었고 밤에 불을 못 끄고 잔다든가 불안해했던 일들을 제가 알고 있었는데 저는 현실적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죠. 일어났으니까 '이제 그랬구나' 라고 하지만 그럴줄 알았다면 더 조심하고 더 안전을 위해서 가족들이라도 그 사람을 지켜 줬어야 했는데, 또... 하나 하나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더라구요. 그때는 미쳐 생각이 안 들던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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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아내 김씨의 모습.
"88년도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릴때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KBS에서 진행하고 있는 어떤 행사에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이었고, 애 아빠는 그걸 진행하는 진행자였어요."
그는 남편에 대해 "통일된 조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고 회고했다.
'평범한 사람이었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나 도움 원하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는 마음이 훈훈하고 따뜻한 사람'
생전의 이한영씨에 대해 김씨는 "북한에서 로열패밀리로 호화스럽게 살았다고 해서 그런 것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고 했다.
"물론 그때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강렬하게 느껴지는게 뭐냐면 참 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아주 특별한 성격이나 특별한 어떤 개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한국에 있는 다른 집에 있는 그런 남자들... 아버지들 모습처럼 그런 모습이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친구들하고 포장마차 가서 소주한잔 기울이는 걸 너무나 좋아했고... 그 시절에... 친구들을 너무 좋아했고 사람들하고 집에 초대해서 집에서 많은 사람들 하고 있는 걸 좋아했고... 많이 베풀고... 혼자여서 외로웠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직장 동료나 주위 사람들이 친절하게 배려를 해주면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꼭 보답을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꼭 술값을 자기가 냈어요. 절대 돈이 많아서가 아니에요. 자기와 술을 같이 마셔주는 것 자체가 고마워서 보답을 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흔히 특권층 사람들은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에 비해 남편은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고 정이 많고 예의가 발랐어요. 제가 남편을 좋아한 것도 그런 점 때문이었죠."
김씨는 "그이를 처음 만났을 때 북한에서 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면서 "유머 있고, 마음씨 곱고, 여유가 있어 부잣집 귀공자인 줄 알았다" 고 말했으며 "결혼하기 한 달 전 그가 북한의 로열패밀리였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면서, "집안의 반대도 있었지만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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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26일 이씨 사망 10주기를 맞아 아내 김씨가 꽃을 선물하고 있다.

아내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북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김정일에 대해서는 가족이어서인지 나쁜 얘기는 별로 한 것이 없지만 정치범수용소라든가 굶주리는 사람들, "김정일이 해외로 망명해 빨리 조국이 통일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씨는 입국 후 사업 실패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재기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고 한다.
"초콜릿 사업으로 우리 부부는 정신없이 일했어요.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를 보내고 그 다음 날인 15일에 그이가 피격됐습니다. 21일 딸 예인과 약속한 생일파티에는 끝내 참석하지 못했죠."
이한영은 늘 외로웠는지 친구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그럴 때마다 술값은 으레 이씨의 몫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신혼여행 때 출국금지된 자신의 처지 때문에 아내에게 해외여행을 시켜주지 못한 것을 마음의 응어리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고 밝혔다.

김씨는 "남편이 남기고 간 딸 예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도록 억울하게 죽어간 이한영씨의 한을 풀어주는 게 남은 자의 몫이요, 제 생의 희망"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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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부재는 김씨뿐 아니라 아이도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다. 김씨는 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빠가 출장을 간 것으로 이야기했지만 더 이상 아빠가 없는 이유를 숨길 수 없어 처음으로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아이라고 왜 생각이 없겠어요. 주말에 친구집에 놀러가면 친구의 아빠가 있잖아요.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빠 이야기가 나올 테고, 학교에서 가족사진을 가지고 오라고 할 때도 있고요. 그래서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아빠랑 엄마가 이혼해서 따로 사는 것이어서 지금은 아빠를 보지 못하지만 나중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 말하더군요. 아빠가 죽은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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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았어요. 경제적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누구도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변호사 한분을 찾아가 상담한 적이 있는데 소송할 엄두를 못 내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하고 살았어요. 그러다 4년전(2000년)쯤, 남편의 책을 읽고 사상이 바뀌었다는 분을 만났어요. 그분의 도움으로 3년 넘게 준비한 끝에 작년(2003년)에 소송을 시작한 것이죠. 그분 말이 '책을 읽고 이 가족은 국가가 보호해야 하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하더군요."
소송의 핵심은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이씨의 죽음에 국가의 과실이 명백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씨가 자서전을 쓰고 언론과 인터뷰하는 바람에 신분이 노출돼 위험해졌다는 국정원측의 주장에 대해 김씨는 "괴한들이 그들의 집을 알아내는데 교도관, 경찰관이 개입한 사실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 에 승소를 확신했으며 소송이 마무리되는 대로 남편의 묘를 통일의 상징인 임진각 쪽으로 이장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한영씨 문제에 대해서 방관하고 있는 것 같은 정부에 대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요, 모든 것들이 발달이 되고 발전이 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정부에서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모습이 선진국으로 가는 모습인거 같아요. 그래서 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어요. 그래서 이 재판이 더더욱 중요한 재판이라고 생각하고 이 뒤에 또 일어날 일들, 또 탈북자들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한영씨 문제가 잘 해결돼야지만 잘 풀려나갈 수 있을거 같아서 열심히, 정말 열심히 재판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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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이씨는 얼굴이 알려진 후 죽음을 예감했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발 포기하지 말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 는 말을 김씨에게 여러 번 하면서 유언으로 부인의 뜻에 의해 2004년 재출간된 '김정일 로열패밀리'의 내용은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과 동일하다.

김씨는 예전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신앙심이 없었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었을 것" 이라고 했고 마지막으로 "국가가 국가의 역할을 다했으면 좋겠다" 는 바람을 피력했다.
"제 자식의 아빠를 죽게 한 나라지만 그래도 저는 국가를 사랑하기에 앞으로 고통 받고 힘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요. 정부도 국민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역할을 다해주었으면 좋겠어요."

7. 소송 및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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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아내 김씨가 모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2004-12-17 자유아시아 방송

재판부 판결에 만족한 이씨의 부인 김 모 씨는 재판에서 국가적 책임에 대한 일부 보상 판결이 나오자 재판부의 판결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7년 10개월이라는 시간이 너무 힘든 시간이었구요, 굽이굽이 너무 힘들게 지내왔어요. 가까운 분들의 도움으로 재판을 하게 됐고 저는 대한민국 재판부가 저희 손을 들어준데 대해서는 너무나 기쁩니다. 또, 소송내용에 대해서도 판결문이 나온데 대해서도 너무나 그 부분은 만족을 하고 있어요."
김 씨는 재판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남편의 대북관계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했다.
이 사회를 믿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불신하는 마음이 있었고 했지만 믿고 싶었구요. 제가 저의 심정과 살아왔던 얘기들을 판사님에게 보냈구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거든요."
김씨는 자신의 아이에게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재판에 최선을 다했다며 앞으로 대북관계에 있어 공로를 인정받아 남편이 완전한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를 비쳤다.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었구요, 인터넷 같은데 있는 이한영 씨의 자료들이 아이가 보기에는 부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저희 정부가 저희한테 얘기해 주신 부분이 없기 때문에 저희는 정말 죄인 아닌 죄인의 마음으로 살았어요. 숨어서 살고 이사도 여러 번 다니구요. 그 힘든 시간들을 이 하나를 위해 보내왔구요. 차후에 일들은 의논을 해서 여러 가지 또 진행해야 할 일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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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국정원은 "이한영씨가 대동강 로열패밀리를 저술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 이라고 책임을 이씨에게 돌렸다. 이에 이한영의 미망인 김씨는 "국가에 막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에게 실상을 알리려 한 고인의 뜻을 왜곡하는 것" 이라고 불복하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한편 2003년 4월 17일 김씨는 압수품가환부신청을 통해 사건 당시 총상 혈흔이 남아있는 이씨의 국방색 점퍼와 부츠, 휴대폰, 그리고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이씨의 지갑, 딸이 이씨 부부에게 보낸 편지, 은행 계좌번호가 적힌 메모 등 이씨 유품 20가지를 돌려받았으며 "이전까지 돌려받은 유품은 주민등록증 한장 뿐이었다"며 "옷가지, 수첩, 서적 등 많은 유품의 행방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고 말했다. 피랍탈북연대는 국가정보원 등을 상대로 나머지 유품 반환을 요구할 계획이었다.

사건 발생 11년 만인 2008년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았다. 2008년 8월 대법원은 이 씨가 피살된 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며 이 씨의 아내 김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9699만 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씨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언론 인터뷰와 TV 출연 등을 통해 노출한 책임이 있다" 며 국가 책임을 60%로 제한했다.
<사안의 개요> (대법원 2008. 8. 21. 선고 2006다2346 판결)
  • 이일남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처조카(이일남의 어머니인 성혜랑의 여동생인 성혜림이 김정일의 처였다)로서, 1982. 9. 28. 스위스 제네바에서 어학연수를 받던 중, 그 곳 주재 우리나라 공관을 통하여 귀순하였다.
  • 이일남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비공개 정착 추진 정책에 따라 이름을 ‘이한영’으로 개명하는 등 귀순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로 국내에 정착하였고,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1988. 12. 원고와 결혼하여 딸을 두고 생활하고 있었다.
  • 그런데 1996. 2. 13.경 조선일보를 통하여 성혜림, 성혜랑의 망명사건과 이한영에 관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되고, 1996. 2. 14. 동아일보 등을 통하여 이한영의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는 등 이한영이 귀순한 김정일의 처조카라는 사실이 언론 등을 통하여 공개되었다.
  • 이에 이한영의 결혼으로 구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에 준하는 정착지원을 종료하였던 안기부는 신변보호차원에서 1996. 2. 15.부터 같은 해 6. 15.까지는 3차례에 걸쳐 이한영과 그 가족을 안전가옥에 수용하는 조치를 취하였으나, 그 후로는 별다른 신변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경찰에 이한영의 신병을 인계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경찰에서는 이한영이 귀순자임을 알지 못하였다.
  • 위와 같은 와중에도 이한영은 지상파 TV에 출연하고, 북한 체제와 김정일의 호화생활 등을 비판하는 내용의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라는 수기를 출판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 1997. 2. 12.경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망명을 요청한 이후 북한이 관영 중앙통신 등을 통해 ‘보복’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한국 측을 비방해 오던 중, 이한영은 같은 달 15. 집 앞에서 괴한으로부터 머리와 가슴을 피격당하는 사고를 당하였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같은 해 2. 25. 사망하였다.
  • 그 뒤 수사기관의 수사결과 1997. 2. 말경 ① ‘○○금융 심부름센터’의 소장이 1997. 1. 31.경 성명불상자로부터‘1993년도에 서울구치소에 수인번호 1421번으로 수감되었던 이한영’이라는 사람의 주소를 알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서울구치소 명적과를 통하여 이한영의 주민등록 앞번호와 수감 당시 주소를 알아낸 후, 이를 바탕으로 당시 서울경찰청 정보과 경사였던 조○○으로부터 현 주소지의 집 주소를 알아내어, 위 의뢰자에게 그 주소를 알려준 사실, ② 성명불상자가 1997. 2. 5.경 ‘○○용역 심부름센터’를 통하여 이한영의 주민등록번호와 집주소를 대고 집 전화번호 등을 알아낸 사실 등이 밝혀졌고, 당시 신문 등을 통하여 위와 같은 사실이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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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이 사회의 작은 '주연' 을 꿈꾸며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북한을 탈출했을 때, 관계당국의 한 인사는 "그들이 쇼를 하는 것 같지는 않은가?" 하면서 내 의견을 물었다. 별장까지 제공하고 최고급 벤츠를 주는 등 국빈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었는데, 북한을 탈출할 이유가 뭐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탈출은 진실된 행동이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한다." 드라이브할 데도 없는 울타리 안에서 벤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군가를 불러 밥이라도 한끼 먹거나 터놓고 얘기할 사람도 없는데, 호화 별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화려한 수영복을 입고 울타리가 쳐 있는,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 혼자 누워 잇으면 행복할까? 누군가 쳐다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과시할 데가 있어야 작은 흐뭇함이라도 느낄 수 잇지 않을까? 최은희·신상옥의 경우 김정일이 크게 착각했다. 최고급 자동차와 호화 별장에 달러면 주면 자기 곁을 떠나지 않을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 돈도 쓸 데가 있어야 돈이다. 쓰고 싶은 환경도 필요하다. 백화점에서 비싼 옷과 물건을 사는 이유는 무인도에 혼자 입고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리에서 또는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멋부린 내 모습을 남이 보아주었으면 하는 심리 때문이다.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아야 할 경우라면 남대문시장이나 동평화시장에 가서 질기고 튼튼한 옷을 고를 것이다. 더구나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반세기 동안을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주연배우로서 산 시간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8년 세월은 김정일이라는 주연을 위한 조연의 생활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탈출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나도 평양에서 조연이었다.
주연인 김정일 김정남이 언제나 부러웠다.
주연배우가 되는 꿈을 꾸곤 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내가 자주 주연이었다.
대사관 직원들 앞에서, 그리고 내 외국인 친구들 앞에서는 항상 주연이었다.
그러나 평양에서 호출하는 순간부터 나는 조연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주연이고 싶은 내 욕망이 실현될 것 같았다.
여기서는 다소의 수입만 있으면 얼마든지 주연일 수 있다.
여기서는 수많은 주연들이 살아가고 있다.
북한은 다르다.
김정일 김정남 주연에 몇몇 당간부들은 조연이고, 인민들은 단역이다.

지난 번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지금은 부도 나서 힘들지만 거기(북한)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절대로 없어요."

여기(남한)에서의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다.

적당히 여유로운 삶 속에서 나는 작은 주연으로 살아갈 수 있다.

무수한 주연들이 살아가는 사회, 이것이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북한은 하나의 거대한 우상(주연)을 위한 단역들의 집단이다.

나는 여기 와서 사업도 크게 해보았고, 돈도 많이 벌어보았다. 김정일 부럽지 않은 주연의 삶도 누렸다. 그러나 나는 주연의 자리를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주연으로서의 자기관리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자유를 방종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자유란 어느 정도의 절제와 질서 안에서 지켜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14년이란 긴 터널을 빠져나온 지금에야 비로소 이 땅에서 주연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깨달은 것 같다. 사업 실패와 감옥, 이런것들이 내가 이 사회의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수능시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나는 지금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고 있다. 평양에서 꿈꾸어왔던 허황된 주연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작은 주연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시작하고 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맨먼저 공정한 판결로 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안겨주신 당시 재판장 이범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부장판사(현재 서울고등법원 민사7부 부장판사)께 이 지면을 빌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이 부장판사님의 판결이 없었다면, 나의 새 출발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로써 나에게 빛과 희망을 주신 한생명교회의 김준모 목사님과 남상화 집사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께 이 기회를 통하여 감사를 드린다. 또한 내가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신 (주)동산의 홍길봉 사장님과 김장현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귀순 때부터 나를 돌보아주신 관계당국의 여러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도 빠뜨릴 수 없다. 나의 작은 기록을 책으로 낼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기회를 주신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님과 정구종 출판국장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올 때까지 고생해주신 동아일보 김대곤 편집위원과 출판국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 후기 (371-3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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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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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의 사진은 권총에 소음기를 장착한 형태이다. 사건에는 체코제 실탄이 사용되었다. 3번째 시도, 암살 단락에서 후술하듯 길이와 무게(장전된 상태 기준일 수도 있다), 사거리가 다소 과장되어 있다.[2] 드라마 아이리스에서는 NSS 블랙요원들이 끈질기게 추적하여 단둥에서 암살범을 사살한 것으로 나온다. 물론 이름만 뒤바뀐 이영한으로 언급된다.[3] 애시당초 중요 인물이 아니었다면 생활비를 주고 보호해 줄 이유가 없었다. 보통의 탈북자들은 정착금만 받고 바로 일반 사람들처럼 살지 이한영처럼 계속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4] 아파트 주민의 강원도 번호판 쏘나타 뒷자리가 38로 끝났다는 증언으로 차량 추적을 하였는데 대포차로 드러났다. 2016년 채널 A에 출연한 김정봉에 의해서 대포차였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김정봉은 1957년생으로, 국가정보원에서 1979년(당시엔 중앙정보부)부터 2007년까지 근무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NSC 정보관리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5] 과거 횡령 혐의로 서울구치소에서 10개월 동안 복역했다.[A] 해외에서 활동하는 북한인은 가명으로 된 여권 이름을 사용한다.[7] 러시아어로 '여보세요'[A] [9] 평안도, 함경도 방언-(주) 탈북자 증언[10] 95년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던 보리스 옐친은 북한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애당초 1990년 9월에 대한민국과 소련이 수교할 때 북한이 '소련은 이제 와서 두 개의 조선을 인정하는 배신자'라고 날뛰자 소련이 '북한은 사회주의도 아닌 세습 왕국'이라고 맞받아칠 정도로 북러관계 이전에 북소관계부터가 이미 나락으로 가고 있었다.[11] 실제로 김정일은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다만 장남 김정남이 아닌 삼남 김정은에게 권력을 물려줬으니 김정남 암살, 최소 축출은 사실상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12] 코가 망치날처럼 생긴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에 대한 성혜림 일가의 은어[13] 김정일은 비공식적으로 수십명의 부인이 있었다. 공식적인 첫째 부인: 홍일천, 둘째 부인: 성혜림, 셋째 부인: 김영숙, 넷째 부인: 고용희[14] 여담으로 나중에 이재용은 실제로 구속됐다(...)[15] 유명한 체코의 탄약 회사인 Sellier & Bellot사의 것인지는 확인 불능이다.[16] 당시 뉴스 보도에서는 35m라고 밝혔으나 이는 과장되었거나 최대 사거리를 오인해 발표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최대 15m로 추정했다.[17] 탄창에 6발이 들어가고 미리 장전까지 시켜놓으면 약실 1발까지 더해져 7발이다. 문답무용으로 7발을 갈기면 비록 살상력이 약한 .25 ACP탄이더라도 머리나 가슴 같은 급소에 피격되면 억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죽는다.[18] 안타깝게도 뇌사 상태로 빠지면 무슨 일이 생겨도 다시는 깨어날 수가 없다. 한 번 죽은 뇌세포는 절대로 다시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19] 이씨가 왼쪽이마에 총격을 받고 흘린 피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 당시 범행이 얼마나 참혹하고 처참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20] 14층에서 지하1층 주차장까지 뛰어서 걸리는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설령 아파트 경비원이 연락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14층까지 올라오기 전에 충분히 탈출이 가능했다. 같은 시각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주차하고 있던 아파트 주민들이 최순호와 윤동철이 내려오는 광경을 목격했는데 주민을 의식이라도 한 듯 안정적인 걸음으로 걸었다고 한다. 차량에 탑승하는 것도 목격하였는데 운전자는 최순호와 윤동철을 제외한 미상 1명(165cm 가량의 키에, 노란색의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이었고 419동에 살던 장씨는 평소처럼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주민들은 통상 주차장 차량 출입구로는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장씨가 지하주차장에서 승용차를 주차시키기 위해 418동쪽으로 차를 모는 순간 418동 출입구 쪽에서 남자 2명이 걸어왔다. 비교적 침착하고 차분하게 걷던 범인들은 주차장 입구 쪽에서 3번째 줄 3번째 칸에 주차시켜 놓은 승용차에 탔다. 장씨는 범인들의 차량이 빠져나갈 경우 그 자리에 승용차를 주차시키기 위해 5분여동안 기다렸지만 범인들이 탄 승용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장씨는 할 수 없이 다른 자리에 주차하고 계단을 통해 집으로 올라갔다. 그 때까지도 범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장씨가 승용차의 종류나 번호판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주민이 차량에 한동안 내리지 않고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해 차종과 번호를 노출 안 하려고 대기하다가 주민이 하차해 집으로 올라가서야 출발했다.[링크:] 1, 2[22] 전향한 고정간첩 봉화 1호가 안기부 명령으로 북한 복귀 무전을 쳐서 사회문화부 간첩들을 봉화 1호가 주지스님으로 있던 사찰로 유인하였다. 봉화 1호는 민간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1983년 부산다대포 간첩사건 때도 유인역할을 맡아 간첩들의 접선 장소인 공중화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한의 북파공작원들이 가죽뭉둥이로 간첩들을 때려 생포했다. 원래 침투한 간첩과 고정간첩이 목적이 아니라 반잠수정 온전한 확보가 목적이었지만 여의치 않아 격침되었다. 다만 총격전 도중 장진희 경사 등 2명이 순직했다.[23] 1992년에 발각된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을 구축한 1917년생 조선로동당 서열 22위 제주도 출신 할머니 고정간첩 이선실을 1990년 인천 강화도를 통해 북한으로 해상 복귀시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5년 부여 사건은 김동식에게는 2차 침투였다.[24] 현재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며 1992년까지 금성정치군사대학이었더. 금성은 김일성을 뜻했다.[25] 안타깝게도 북한 붕괴 후 최순호를 잡아들인다고 해도 살인죄로 처벌은 불가능하다. 이한영 사건은 공소시효가 2012년에 만료되었는데 도피 목적으로 해외에 있으면 그 기간만큼 공소시효를 배제하지만 북한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영토이기 때문에 북한 땅에서 버티는 한 공소시효는 그대로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