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제강점기인 1930년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사건 초기에는 쉽게 용의자가 체포되어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으나 충격적인 반전이 있었던 사건이기도 하다.2. 산속에서 발견된 변사체
1930년 4월 29일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용천리 박석산[1]에서 나물을 캐던 이 모 여인이 산중턱 낙엽더미에서 사람의 시체 1구를 발견하고 주재소[2]에 "산 속에 시체가 있다"고 신고해 일본 제국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다.경찰은 시신을 읍내 병원으로 옮기고 부검을 시작했다. 시신은 약 15~16세 가량의 소년으로, 얼굴 부위가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망가지고 폭행의 흔적인 멍자국이 온몸에 남아 있는 등 타살의 흔적이 명백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부검한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이었고 사망 시간은 72시간 이내(4월 26일 추정)였다. 유류품으로는 수건 1장과 지게가 함께 발견되었는데 사인이 질식사인 것으로 보아 수건이 목졸림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되었다.
변사자가 사건이 발생한 장소 인근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일 것으로 판단한 경찰은 마을 주민에 대한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곧 마을 주막에서 머슴 노릇을 하며 살아가던 보령 출신 16살 소년 박창수(1914년생)가 이틀 전인 4월 26일부터 마을에서 실종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주막의 주모였던 21세의 고옥단(1909년생)과 박창수와 같이 일하던 35세의 머슴 조기준(1895년생)을 상대로 강도 높은 조사를 벌여 이틀 만에 조기준으로부터 "나와 고옥단이 박창수를 살해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조기준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피해자인 박창수는 고옥단으로부터 신임과 관심을 받았다. 그렇기에 고옥단은 외상 술값을 받으러 마을을 돌아다닐 때도 신임하던 박창수와 동행을 자주 하였다. 고옥단은 1929년부터 옆마을 부자인 한백원의 첩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은밀히 정을 통하고 있던 마을 사내인 이기문이 있었다. 즉, 한백원의 첩으로 생활하면서도 한백원 모르게 이기문과 정을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상 술값을 받으러 돌아다니다 이기문의 집에 들르게 되었는데 이기문은 고옥단에게 "첩과 주막생활을 정리하고, 나와 함께 강경으로 도망치자"고 그녀를 꼬셨다. 당시 강경은 포구가 크게 발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었다.
고옥단은 "당신이 외상 술값을 먼저 내고 나면 생각해 볼 테니,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이를 머슴 박창수가 대화를 듣고 주인 한백원에게 고자질하는 바람에 한백원은 고옥단을 질책하였고 고옥단은 신임하던 심복인 박창수의 고자질에 격분하여 머슴 조기준을 동원하여 박창수를 구타하고 욕설을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박창수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은 고옥단은 머슴 조기준과 짜고 밤에 "나물을 캐러 가자"는 핑계로 박창수를 산으로 끌고 가 조기준과 함께 그를 폭행하고 수건으로 목을 졸라 죽인 다음 시신을 낙엽더미 속에 파묻은 것이 사건의 정황이 된 것이다.
일본제국 경찰은 피의자들을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하고[3] 보령에서 박창수의 어머니를 수소문해 아들의 시신을 인계하겠다고 했고 시신을 확인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아들이 맞다고 말했고 확인했다고 판단한 경찰은 시신을 인계했다. 공주지방법원은 박창수가 일하던 주막의 머슴 피의자 조기준에게 살인 혐의로 징역 10년을, 살인교사 주막주인 고옥단에게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고옥단은 범행을 부인하고 경성복심법원[4]에 항소했지만 1930년 9월 경성복심법원도 원심을 확정했다.
이렇게 끝났으면 당시 조선에서 흔히 있을 법한 첩[5]의 잔혹한 스캔들 사건이었겠지만 이후 기막힌 반전이 일어났다.
3. 기막힌 반전
사건이 일어난 1930년 4월 26일 박창수가 야산으로 끌려가 폭행을 당한 것은 맞았지만 사실 박창수는 죽지 않고 기절해 쓰러져 있었다. 이후 박창수는 깨어나자마자 자신을 구박하는 주인집에서 더 이상 지내기 싫어져서 산에서 내려오는 길로 마을을 떠나 버렸다. 청양을 떠나 공주로 향한 박창수는 공주 마곡사 부근 절에서 한 달 동안 생활했으며 공주시내로 들어가 노원태라는 사람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3개월 정도 생활하였다. 총 4개월을 공주에서 보낸 것이다. 그러다가 9월이 되고 추석이 다가오자 보령에 있는 어머니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이에 박창수는 고향으로 내려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주를 떠나 한 달 동안 보령으로 이동한 끝에 1930년 10월 18일 고향 보령으로 돌아왔다.남루한 모습으로 집을 찾아온 박창수를 본 어머니는 기겁을 했으나 자세히 보니 아들인 박창수가 맞았다. 그러면서 마을 전체에 죽은 아들이 돌아온 집이 있다고 하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곧바로 경찰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피해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니 일본 사법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법원은 검사국에, 검사국은 일본제국 경찰에, 경찰은 유가족에 서로의 책임을 떠넘기는 처절한 병림픽이 벌어졌다.
일본 사법부는 곧바로 박창수를 소환하여 본인이 박창수가 맞는지를 확인하였고 박창수가 맞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곧바로 당시 시신을 확인했던 박창수의 어머니를 소환하여 "왜 그 당시에 이 시체가 아들인 박창수라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느냐?" 라고 추궁하자 "시신이 부패하여 얼굴의 형태를 확신할 수 없었으며 눈물이 앞을 가려 흐릿한 시신을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 아들인 박창수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기 때문에 내 아들이라는 선입견을 가진채로 봤으니 그렇게 보였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단순 시각적 확인으로 신원을 확인한 것에 대한 헛점이 노출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보령 공동묘지에 박창수의 이름으로 묻혀 있는 발견된 시신은 누구인가? 그것은 영구미제로 남아 신원도 알 수 없고 청양 부근에서 찾는 이도 없어 신원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한편 피의자 고옥단과 조기준은 재심에서 자신들의 진술이 "경찰서에서 너무 가혹하게 문초해서 부득이 거짓자백을 한 것", 즉 경찰의 고문에 의해 자백한 것이라고 진술하면서 무효임을 주장했고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나라 없는 설움으로 인하여 기각되었고 석방되는 것으로 마무 되었다.
결국 조기준은 1931년 6월 30일, 고옥단은 1931년 7월 27일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3.1. 밝혀지지 않은 진실
일본 제국 경찰은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는 한편 박석산에서 발견된 변사체의 사인과 신원에 대해 수사를 시작했지만 범인은커녕 시신의 신원조차 밝혀내지 못했다.무엇보다 책임은 시신에 대한 신원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유가족에게 시신을 내 준 일본제국 경찰에게 있었다. 경찰은 수사를 빨리 종결하기 위해 유족에게 아들의 시신이 맞는지의 여부를 다그치듯 물었고[6] 유가족이 "창수의 인상착의가 평소 입던 옷과 다르다"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류품으로 발견된 옷을 시신과 함께 넘겨 버리는 짓을 저질렀다.
경찰이 유류품을 증거물로 보관만 했더라도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겠지만 시신과 함께 유족에게 넘겨 버린 바람에 그대로 시신과 함께 매장되어 더이상 찾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1930년대에는 주민등록 시스템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age(1930-04-29)]년이 지난 지금은 관련자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아 현재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7]
4. 사건 이후
박창수는 고향인 보령으로 돌아갔고 당시 사건을 기억하던 사람들 덕분에 충청남도 곳곳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후에는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평생을 살았다고 하며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8]억울하게[9] 옥살이를 한 조기준과 고옥단은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당시 일본제국 형법에는 오심에 의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 법안이 없어 기각되었다.
조선이 독립한 후에도 자백 위주의 일본 사법부의 고질병은 계속되었다.
2013년 1월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꿈속의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다. 다만 주요 내용이 각색되어 머슴인 조기준이 다른 소년을 착각해 절벽에서 밀어 죽이고 사체를 유기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5. 같이 보기
- 속초시 콘도살인 암매장사건(2001) - 죄 없는 사람이 누명을 썼으며 당시 사법부의 무능으로 변사체의 신원을 밝히지 못한 것까지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단, 이 사건은 청양 사건처럼 시신이 먼저 발견되고 나서 범인으로 누명을 쓴 사람들의 진술을 받아낸 게 아니라 정반대로 범인으로 누명을 쓴 사람들의 진술을 먼저 받아낸 후에 시신 수색을 하다 제3자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찾아냈다는 차이가 있다.
- 일본 사법부의 오판으로 죄 없는 사람이 용의자로 몰려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들
-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1961)
- 사야마 사건(1963)
- 아시카가 사건(1990)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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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천리 자체는 남아 있으나 박석산이라는 명칭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산업화 과정에서 개발되어 사라졌거나 주민들이 부르는 명칭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2] 8.15 광복과 1990년의 경찰청 분리독립을 거쳐 현재는 파출소와 지구대로 개편되었다.[3] 지금의 대전지방검찰청 공주지청. 당시에는 대전보다 공주가 더 큰 도시였다. 공주는 조선 시대부터 충청도의 중심도시였으며 일제강점기에 대전이 점점 성장하면서 공주지방법원은 1938년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을 대전지방법원으로 승격하는 대신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청으로 격하되었다. 검사국은 지금의 검찰청이다.[4] 현재의 서울고등법원[5] 축첩 제도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이후에도 남아 있었고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구습 타파를 이유로 축첩 공무원에 대해 중징계를 내리면서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6] 당시 조선인들이 느꼈을 일본 제국 경찰의 위세를 생각해 보자. 거기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심리적 위축까지 생각하면 그들의 의도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울면 순사가 잡아간다"고 야단을 쳤다. 이런 드립은 8.15 광복 후에도 남아 있다.[7] 참고로 동시대 미국에서 신원불명 시신의 신원을 밝혀내는 방법은 치과기록과 지문이었다.[8]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197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사이에 사망했을 확률이 높다. 물론 요절하거나 더 장수했을 수도 있다.[9] 사실 사람을 집단으로 폭행하고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한 행위는 최소 살인미수에 해당하는 중범죄가 맞다. 다만 초점이 살인에 맞춰졌고 이것이 뒤집어졌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