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해병대 총기 탈취 사건 | ||
<colbgcolor=#000><colcolor=#fff> 발생일 | 2007년 12월 6일 오후 5시 40분경 | |
발생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해병대 제2사단 황산도 초소 | |
유형 | 민간인의 총기 탈취 및 초병 살해 | |
범인 | 조영국(1972년생, 35세)# | |
원인 | 여러 개인적인 악재에 따른 사회에 대한 분풀이 | |
관련 부대 | 대한민국 해병대 제2사단 | |
인명 피해 | 사망 | 1명[1] |
부상 | 중상 1명[2] | |
재판선고 | 제1심 사형항소심 징역 15년 (확정)[3]상고심 상고기각[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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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방지역인 강화도에서 경계근무를 마치고 귀대하던 해병대 대원 2명이 돌진한 차량에 치인 뒤 칼을 든 남성(조영국, 사건 당시 35세#)에게 공격당해 두 명의 해병 중 한 명은 사망했고 다른 한 명은 중상을 입고 K2 소총 1정과 실탄 75발(15발 × 5탄창), 수류탄 1발, K201 유탄발사기용 유탄 6발을 탈취당한 사건이다. 범인은 사건 발생 6일 만에 체포되었다.
2. 사건의 진행
2.1. 사건 발생
2007년 12월 6일 오후 5시 40분, 해병대 제2사단 소속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위치한 소황산 분초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피해자 이재혁 병장과 박영철 일병은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수제선 수색 정찰작전 수행 중이었다. 그런데 쌍용 뉴 코란도 한 대가 갑자기 두 사람을 덮쳤다.박 일병은 충돌 후 도로 옆 갯벌로 곤두박질쳤다. 도로에 쓰러진 이 병장이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몸을 추스리려 할 때 코란도 승용차는 유턴해 다시 이 병장을 향해 달려왔다. 이 병장 앞에 차량은 멈춰섰고 30대 중반의 괴한은 차에서 내린 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유유히 이 병장 앞으로 걸어왔다. 이 병장은 곧바로 총을 겨눴으나 괴한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다친 데 없냐'고 물었다. 괴한은 그러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흉기를 꺼내든 뒤 쓰러져 있던 이 병장의 팔을 찔렀다. 이 병장은 K2소총의 개머리판으로 괴한의 이마를 가격하며 용감하게 격투했으나 괴한은 피를 흘리면서도 흉기를 계속 휘두르며 이 병장의 허벅지와 입 언저리를 찌르고 K2 소총을 빼앗았다.
이 병장의 비명소리에 주변에서 시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자 괴한은 갯벌 위에 떨어져 있던 박 일병에게 달려갔다. 박 일병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소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소총끈을 손목과 팔에 감고 있었고, 수류탄과 유탄이 들어있는 탄통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범인에게 칼로 7차례나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두 해병은 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도 죽을 힘을 다해 7분에 걸쳐 혈투를 벌였으나 결국 범인은 소총, 실탄, 그리고 수류탄과 유탄이 들어 있는 탄통[5] 등 가져갈 수 있는 무기란 무기를 모조리 털어간 뒤 강화도 북쪽 초지대교 방향으로 도주했다.
2.2. 용의자 수배
다가온 민간인들에게 전화기부터 빌린 이 병장은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해 우선 도주로를 막아야겠다는 생각 후 소초 상황실로 전화를 해서 '나 아무개인데 초지대교 막아!'라고 반복해서 외쳤다. 하지만 부상 상태라 발음이 잘 되지 않아 상대가 알아듣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부대와 부대 윗선에 곧바로 상황이 전파되면서 사건 발생 후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오후 6시 30분경 강화·김포·일산 일대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다. 범행 발생 시 마침 근처에 있던 목격자 2명과 생존 해병의 증언에 의해 범인의 인상착의가 30대 중반 남자, 키 170cm 정도, 베이지색 잠바, 머리에 상처가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고 범인이 떨어뜨리고 간 모자, 안경, 족적 등을 수거했으며 CCTV로 범인의 차종과 번호를 전국에 공개수배했다.
해당 차량은 사건으로부터 두 달 전인 2007년 10월 11일에 경기도 이천에서 도둑맞은 것[6]으로 밝혀졌고, 사건 발생 후 몇 시간 만에 범행 장소에서 90km 정도 떨어진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독정리 풍무교 인근 논바닥에서 전소된 채로 발견된다.[7]
범인은 곧바로 강화군을 빠져나와 오후 7시 38분 평택-안성간 고속도로 청북톨게이트를 통과, 39번 국도를 따라 15분여 만에 서해안고속도로 발안톨게이트 인근 도로를 경유해 우정읍을 지나 화성시 장안면 독정리로 도착, 밤 10시 40분경에 차량 증거인멸까지 완료한 것이었다. 조사해보니 차량 번호판이 변조된 상태였으며 차 역시 충돌시 더 큰 충격을 주는 범퍼 보호대[8]가 추가되어 있는 등 도난 당시에 비해 개조된 상태였고, 대리운전에 쓰던 차량이 아님에도 대리운전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범인이 차량 절도와 총기 탈취 사이의 공백 기간 동안 해당 차를 범행에 이용하고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수작을 부렸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톨게이트 통과 당시에도 CCTV를 우려해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밤인데도 햇빛가리개를 설치했으며 운전석 앞에는 티슈곽을 놓아 두는 등 최대한 자신의 모습을 가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요금소 직원의 눈에 띄어 기억에 특별히 남아 목격담을 남겨 추적이 더 잘되는 역효과를 불렀다. 요금소에 용의자가 건넨 차량통행권도 단서가 되었으나 지문 검출에는 실패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범인은 코란도 차량을 화성 논바닥에서 불태운 후 5km 떨어진 자신의 작업실로 걸어서 돌아가 미리 준비해 놨던 차량을 이용해 서울 용산의 자기 집으로 갔다. 해당 차량은 평소 타고 다니던 것으로 범행 전 화성 작업장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 뒤 버스로 상경, 서울 논현동 골목가에 방치해 놨던 코란도 승용차를 몰고 강화도로 가서 범행했던 것이다.
범인의 행동에는 주저가 없었고 빠르고 냉혹했으며 대담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했다. 단독범행인지 아니면 차 안에 다른 범인이 또 있었을지도 알 수 없었고 원인도 남파 간첩, 대선 후보에 대한 테러, 군에 대한 원한으로 인한 보복, 은행강도 목적[9] 등 생각해 볼 수 있는 여러가지의 가능성이 있었고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수사본부는 '강화도의 현장 지리와 초병 근무교대 시간과 이동경로 등을 잘 아는 강화도 부대 전역자', 혹은 '강화도 주민들 중에 특수부대 출신' 등을 우선 용의선상에 올렸는데 뒤에 나오겠지만 이건 틀린 예측이었다. 어쨌든 경찰은 신고포상금 2천만원을 내걸면서 범인의 몽타주를 배포하였다.
강화도 및 김포 일대에 해병대와 경찰의 검문검색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도로가 극심한 교통혼잡을 빚어 많은 사람이 불편을 겪기도 했다. 초지대교로 향하는 김포 일대 같은 경우 강화에서 나오는 쪽은 차량이 못 빠져나오고 들어가는 차량도 거의 움직이질 못했다.
문제는 군경의 검문이 번번이 뚫렸다는 것으로, 군/경의 초동 대처가 영 부실했다. 차량이 지명수배된 직후에 곧바로 서해안고속도로 서서울IC를 지나는 용의차량을 봤다는 신고가 들어왔지만 대응이 늦어서 범인이 지나간 딱 4분 뒤에 검문을 시작하는 바람에 몇 분 차이로 놓쳤다. 이 와중에 실탄 사격까지 발생했는데, 사건 다음날 1차 검문 뒤 용의점을 발견하지 못해 통과시키려던 차량의 끝번호가 용의차량과 같은 것을 본 19살 일병이 재검문을 요구했으나 운전자가 불응하고 도망치는 것으로 보이자[10] 차량에 K2 소총 25발을 발사한 것이다. 하마터면 끔찍한 사달이 날 뻔했으나 다행히 그 중 5발만, 그것도 타이어와 트렁크에만 맞아서 차만 파손되고 운전자는 다치지 않았다.[11][12]
이런 부실한 대처는 여러모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초병이 살해당하고 군용 무기가 탈취된 사건이었다. 그나마 단독범행이었으며 추가범죄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이 사건이 조직적인 범행으로 이루어졌다거나 혹은 범인이 탈취한 총기로 테러 등의 악행을 저질렀을 경우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게다가 범인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전국을 활보했는데, 차량을 이용한 범죄라면 전국 어디든 위험할 수 있었는데도 범인의 흔적이 추적되는 곳만 긴장하고 나머지 장소는 안일했다. 심지어 범인을 잡은 것도 후술하겠지만 사실상 반쯤은 자수해서이지, 군/경이 추적에 성공하여 체포한 것은 아니다.
사건 발생 4일째에는 제보를 통해 유력한 용의자[13]를 찾아내고 신병을 확보해 조사했지만 알리바이가 있고 범인이 입은 상처가 없는 등 오해인 것으로 확인돼 풀려나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2.3. 피해
범인에게 순식간에 공격 당해 반격할 틈도 없이 큰 부상을 당한 두 해병은 사건 직후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박영철 일병은 결국 몇 시간 못 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14] 이 병장은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다음날 낮 1시쯤 박 일병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오열했다.2.4. 여파
하필 사건 발생일은 제17대 대통령 선거 단 13일 전이었던지라 더욱 비상이 걸렸다. 그야말로 선거 직전이었고, 공교롭게도 사건 발생 바로 전날 이명박 후보가 검찰로부터 BBK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받은 참이었다. 그날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 대선후보 토론회가 있었고, 사건 발생 3시간 뒤인 9시에 KBS에서 열릴 예정이었다.범인이 서울로 진입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대통령 후보들에게도 이 사실이 알려졌다. 사건 다음날 한나라당 당사에 내가 총기탈취범이라며 '이명박을 죽이겠다'는 장난전화가 오기도 했다. 당연히 이명박 측은 엄청나게 긴장했다. 이날 토론회가 끝난 뒤 다른 후보들은 정문 지상주차장을 통해 차를 타고 돌아간 반면 혼자만은 삼엄한 경계 속에 지하통로를 이용했으며, 모든 야외 일정을 취소하고 실내행사 때는 폭발물 탐지견까지 동원해 전면적으로 수색을 했다. # 이명박 본인도 방탄조끼를 입었다. 그러나 경쟁자 정동영, 이회창은 방탄복을 입지 않고 거리 유세와 시민과의 악수, 포옹 행사를 계속했다. 특히 정동영은 아들이 마침 총기를 빼앗긴 사단에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에 노출된 병사들 생각을 해서라도 방탄복을 입지 않겠다고 사양했다고. 테러 위협에 굴하지 않는 모습으로 열세를 극복해 보겠다는 내심도 있었다.
이후 경호팀의 인력과 장비는 확충되었다. 주변 경계 강화, 경찰특공대 2개에서 5개로 늘리기, 자택에도 전술팀 1개 배치 등. 또 원래 유세장 인근 건물에 비상시를 대비해 특수저격조가 배치되는데 이 일로 인해 2배로 늘었고, 헬기도 근처에 대기시켰다.
이 사건 때문에,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는 대선후보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보험 들었느냐'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고 한다. 혹시 테러라도 일어나서 휘말려 죽으면 큰일이니까 미리 보험이라도 들어놓자는 논리(...). 위에 나온 방탄조끼 이야기도 이명박 후보 측에서 혹시 방탄조끼 착용하셨느냐는 질문에 (혹시 후보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줄까 봐)공식 확인해 주지 않았는데 어느 대담한 기자가 직접 다가가 몸을 만져 보고 나서 확인한 거라고. #
후보와 기자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온갖 무기를 탈취한 범인이 언제 어디서 무고한 사람들한테까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2.5. 검거
일이 너무 커진 게 두려웠는지 범인은 사건 발생 5일째 되던 12월 11일, 경찰에 자수 편지를 보내 총기를 묻은 곳을 밝혔다. 아직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기에 진짜 범인의 편지가 맞음을 확신한 경찰은 탈취된 무기들을 호남고속도로 하행선인 전남 장성군 백양사휴게소 200m 부근 박산교 아래 개천천에서 모두 회수했고[15] 지문 조회를 통해[16] 범인의 신원을 확인했고, 결국 사건 발생 6일째 되던 12월 12일, 서울 종로구 단성사 앞에서 그를 검거했다.범인 조영국(당시 35세)은 경찰의 초기 추정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경찰은 범인이 강화도의 지리와 초병 근무교대 시간 등을 파악하고 있는 강화도 주민 혹은 강화도에서 군복무를 했던 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으나, 오히려 범인은 강화도에서 근무한 적은 커녕 아무 연고도 없었으며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보기 위해 오프로드 차량 동호회에 가입해 다니던 곳이 강화도라 지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고 한다. 일부에선 과감한 행동을 볼 때 특수부대 출신일 가능성도 제기했지만, 실제로는 일반적인 육군 포병 출신이었다. 그리고 전과자도 아니었다. 이렇게 당초의 용의선상과 전혀 거리가 먼 자였기 때문에 만약 자수 편지를 보내지 않았거나, 편지에서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사취 사건처럼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컸다.[17]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어이없게도 변심한 애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세상이 놀랄 만한 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몰락한 모습을 옛 애인이 보고 괴로워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한다.[18]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나온 고학력자로 본래 귀금속 세공업(보석 디자이너) 일을 했으나 사업에 실패하고 월세가 8개월이나 밀릴 정도로 경제난에 빠진 데다 애인한테까지 차이자 절망에 빠지고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으며 자포자기 상태로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범죄였다.
대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며, 다가가는 자신을 향해 총기를 겨눠 본능적으로 찔렀을 뿐 원래는 피해 해병을 죽일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다.[19] 그리고 처음엔 빼앗은 무기로 뭘 할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지만, 경찰의 계속된 추궁에 탈취한 총기와 무기를 나중에 강도질을 할 때 쓰려 했다고 자백했다. #
그리고 범행 3개월 전부터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에서 우울장애 치료를 받아 왔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나마도 경제 사정이 안 좋았던 탓에 치료를 중단했다고. 사건 당일인 12월 6일에 비가 내리자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코란도 차를 운전하며 강화도 일대를 배회하다가 순찰하는 군인들을 본 순간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전술한 상황을 보면 알겠지만 철저한 계획범죄였으므로 이건 그냥 변명이라고 보면 된다. 체포 후 조사해 보니 그가 살던 집에서는 공기총[20]과 전기충격기까지 발견되었다. 다만 공기총은 서울용산경찰서에서 허가를 받은 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요약하자면 애인은 변심하여 떠나버리고 사업에 실패해 경제적으로도 무척 곤란한 상태가 되자 우울장애에 걸렸고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자포자기성 화풀이/사회에 대한 분풀이 겸 돈을 마련하기 위한 강도에 쓸 무기도 얻기 위해서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범행이 너무 흉악하고 사회에 끼친 악영향이 커서 범인은 변호인을 구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조씨는 변호사 입회 하에 진술하겠다고 주장했으나 자신이 지명한 변호사로부터 변호를 거절당했다. 이후 경찰이 섭외에 성공한 인천의 한 변호사와 3시간 가량 단독면담을 가졌으나 이 변호사 역시 조씨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며 변호를 포기해 버렸다. 어찌어찌 다른 변호사를 찾긴 찾았다고 한다. #1, #2
3. 재판
원래 민간인은 군사재판의 대상이 아니지만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경우[21], 군형법 상 간첩, 유해 음식물 공급, 초병에 대한 범죄(살해, 살해미수, 상해, 협박, 폭행), 군용물에 관한 범죄, 초소침범, 포로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민간인이더라도 군인에 준하여 군사재판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사건의 범인도 체포한 주체는 민간경찰이지만 군 헌병대에 넘겨져서 조사를 받은 후 군 검찰로 구속 송치되었고, 군사법원에 구속 기소되어 초병살해, 초병상해, 군용물강도살인, 군용물강도상해[22], 절도, 자동차관리법 위반, 일반자동차방화[23] 혐의로 기소되었다.해병대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가해자는 항소했고, 2심 재판부는 아래와 같이 판결하였다.
피해자들의 근무 장소가 '민간 횟집과 숙박업소'가 산재하고 민간인의 통행이 자유로운 곳인 점 등을 고려할 때 피고인이 피해자들이 초병인지 인식했다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또한 피고인이 처음부터 칼을 쓰지 않았다는 점을 보아 살해할 고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상당하다. 편지를 써서 총기가 회수될 수 있도록 조치했고 정상적 가정에서 자라나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 고등교육을 이수하여 전문적 직업을 가진 피고인이 교화,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에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5년에 처한다.
- 고등군사법원 2008노93 판결
즉, 피해자들이 초병인 것은 맞지만 피고인이 '초병을 살해할 고의'와 '초병을 상해할 고의'가 아니라 '일반 군인을 살인하고 상해할 고의'만 있었다고 판단해 초병살해와 초병상해가 아닌 형법상 살인죄와 상해죄를 유죄로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유족들이 합의나 선처를 요청한 적이 전혀 없음에도 15년형으로 대폭 감형되었다.이에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5년에 처한다.
- 고등군사법원 2008노93 판결
아무래도 초병을 살해할 고의라는 것은, 초병을 죽이고 부대 내로 쳐들어가서 피해를 입힐 목적이었냐 아니었냐를 따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피고인과 군검찰 쌍방이 상고하였으나 상고기각되어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판결요지(대법원 2008. 12. 11. 선고 2008도7754 판결)
범인 조영국은 2022년 12월 11일에 만기출소했다.
4. 방송
- 2023년 1월 2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63회에서 이야기 소재로 등장했다.
5. 여담
- 유튜버 개복어가 군복무 중에 해병대 대원 총기탈취 살해범 검거수색작전에 참여했다고 트위치 방송 중 증언했다.
- 상기한 개복어가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를 통해 다양한 썰들을 모아두는 썰왕썰래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드러났는데[24] 위 글의 내용 중 한 부분으로 작성자는 총기를 피탈당했던 병사들의 동기로 추정되며 소속은 해병대 수색대 소속이라고 한다.[25]며칠이 지나서야 범인이 자수를 했고 검거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상황은 해제되었고 후임일병 장례식은 사단장님 특별지시로 다른중대에서 임시로 파견을 나오게되어서 전 중대원 모두 장례식에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슬픈일이 지나고 일상으로 복귀하여 차츰 기억속에서 잊혀져갈쯤 소초장에게서 정말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죽은 일병은 1계급 특진으로 상병으로 장례가 치러졌는데 총기를 뺏기지 않을려고 용의자에서 개머리판으로 상처를 입히고 격렬히 저항하다 칼에 찔려 빈사상태에서 총을 빼앗긴 동기녀석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진짜 지금 글쓰면서도 어이가 없네요;;이후 군사재판이 치러졌단 소식만 들을 수 있었고 위에서 쉬쉬한건지 결과라던지 어떻게 된건지 사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이후 저희소대 해안경계 철수 후 포상휴가 나가기전 대대장의 정신교육이 있었는데혹시나 휴가복차림으로 있다가 누가 해당사건에 대해서 질문하면 가족이든 누구든 모른다고 하라고만 하더군요.뭐 휴가나가면 언론사 인터뷰나 이런건 당연히 하지않는게 맞지만 가족들한테까지 비밀로 하라는거보고 기만 찼습니다.이후 휴가나와서 진짜 영창갈 마음으로 유명언론사 몇곳에 제보를 하였지만 돌아오는답은"군사재판을 본인이 직접 목격하였나?" / "해당 군고위직의 증언을 확보할수 있는가?" 등등병사의 말은 믿을수 없다. 정확한 증거나 증언이 필요하다는 답변밖에 없더군요....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없다는거에 자괴감을 느끼면서 휴가도 대충대충 보내다 복귀하고 저는 부대에 너무 큰 회의감을 느껴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을꺼 같아 중대장 면담 후 전출요청을 하였습니다.하지만 사고당시 소초원이었다는 이유로 전출요청은 승인되지 않았고 그렇게 그냥 포기하고 현실이 ㅈ같음을 느끼며 씁쓸하게 군생활하다 이후 큰일없이 전역하였습니다.복어님도 사건당시 현장에 있으셧다니 제가 적은글이 구라가 아닌걸 아실겁니다.당시 사건당시 소초원이었고 고인이된 ooo일병의 선임이었으며 억울하게 재판받은 ooo상병의 동기였습니다.[출처] 복어형 실제 참여했던 총기피탈사건 직집 겪은 썰(반전있음) (개복어 팬 다 모여라 : 트위치 유튜브 개복어 팬카페) | 작성자 저음
윗 글의 작성자의 말에 따르면 총기를 빼앗기지 않으려 개머리판으로 용의자에게 피해를 입히고 격렬히 저항하다 칼에 찔려 빈사상태에 빠진 피해자를 국방부에서 고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 어느 언론을 찾아봐도 피해 병사가 재판을 받았단 보도는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도중에 취하했거나 병사들 사이에서 돌던 '소문'을 그대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 댓글 중에는 "2수색[26]이 그때는 해안경계도 뛰었나요ㅋㅋ?? 암만 읽어봐도 해병 출신 아닌듯."이라며 작성자를 의심하는 댓글이 있었다. 실제로 해안경계 임무는 수색대가 아닌 보병대대가 맡는다.
- 본문에 취사병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당시의 해병대에서는 취사병이 아닌 주계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뭐 용어 문제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끔 주계병보다 훨씬 보편적인 용어인 취사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만.
- 결정적으로 탈취된 총기가 K2 소총이었다. 수색대는 계급 불문 K1A를 사용한다. 허나 두 해병 모두 K2 소총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건 당시 유탄이 언급된걸 보면 K201도 들고 있었을 텐데 이건 기본보병 아니면 못 쓰는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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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영철 일병(병 1045기)[2] 이재혁 병장[3] 2008노93[4] 2008도7754[5] 다행히 탄통이 이중 잠금되어 있었고 그 열쇠는 해병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지라 범인이 이 통을 가져갔긴 했어도 열 수는 없었다.[6] 중고차 매장에 방문해 시승해보겠다고 타고 나가더니 적당한 핑계로 직원을 따돌리고 그대로 차를 갖고 달아났다. 중고차 매장에서는 당연히 경찰에 신고하고 차량 절도범이 타고 온 차를 조사했으나, 알고 보니 매장에 방문할 때 타고 온 그 차 역시 전날에 도난당한 차량으로 밝혀졌다.[7] 이 때문에 특전사 병력 600여명이 화성시 일대에 투입되어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을 정밀수색하기도 하였다. 자연재해 복구작업을 제외하고는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래 이 정도 규모의 특전사 병력이 작전에 투입된 사례가 없었다. # 당연히 화성시가 관할인 51사단도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8] 일명 캥거루범퍼. 충돌 효과가 일반 범퍼보다 무려 9배나 크기 때문에 장착이 불법일뿐더러 원래 순정으로 캥거루 범퍼가 장착되는 갤로퍼와 코란도 조차 자동차검사를 받으러 가면 불법은 아니지만 제거할 것을 권장한다. 일반차량으로 사람을 칠 경우 차체가 찌그러져 쉽게 노출될 것에 대비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9] 과거 총기 탈취 사건을 보면 대부분의 범인이 은행강도 등의 2차 범행을 위해 총기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2년 2월 경기도 남태령 인근 군부대 담을 넘어 초병 2명의 손을 철사로 묶어 제압한 후 흉기로 찌른 뒤 K2 소총 2정을 탈취한 일당 4명은 1차 범행엔 성공했으나 실탄을 확보하는 데까지는 실패하자 며칠 뒤 경기도 모 해병부대 하수로를 통해 침입해 절단기로 탄약고 자물쇠를 자르고 K2 실탄 400발을 훔쳤다. 소총 탈취 15일만인 3월 초에는 서울의 한 은행에 총기를 지니고 침입해 직원들을 위협하며 금고를 털려다 여의치 못하자 직원들의 현금 77만원과 신용카드만 빼앗아 달아났다가 15일 뒤 통화내역 분석을 통해 검거망을 좁힌 경찰에 검거됐다. 그래서 군/경은 총기를 탈취한 괴한의 2차 범행에 대비해 금융기관과 국가중요시설 등에 대한 순찰 및 경비를 강화하기도 했다.[10]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실은 재검문을 요구하는 줄 몰랐다고 한다.[11] 정말 천만다행인 게 평범한 일반 승용차의 차체는 고작 권총탄에도 쉽게 관통되고 5.56mm 소총탄에는 차량이 완전 관통되는 수준이다. 운전자를 향해 날아간 총알이 한 발이라도 있었다면 운전자는 최소 중상, 최악의 경우 사망했을 것이다.[12] 다만 초소나 검문 중인 초병의 명령에는 무조건적으로 응해야 하는 것이 맞기에 해당 초병을 비난하기는 어렵다.[13] 몽타주와 외모가 비슷하고, 전과와 특수부대 복무경력이 있으며 유류품에서 DNA를 확보한 결과 범인의 혈액형이 AB형인데 이 사람도 그랬다.[14] 장례는 사단장장으로 치러졌고, 1계급 추서되었다고 한다. 그의 동기는 추도사에서 "어제는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박○○ 해병님이 그러셨어. '박영철 그놈 안되겠다고, 기합이 빠져도 너무 빠져가지고 앰뷸런스 안에서 선임이 그렇게 애타게 불러도 대답도 안하더라'며 눈시울을 붉히더구나… 마지막 순간까지 너의 임무를 다하고자 실탄 한발을 장전하고 그 저주스러웠을 악마의 발톱에 수없이 온몸이 찢기우고서도 병기를 놓지 않았던 너는 내가 아는 가장 멋지고 강한 해병이었다."고 울먹였다. # 참석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날 박 일병의 아버지는 해병들에게 돼지갈비를 사 줬다. 부족할텐데 계속해서 더 먹으라고 했지만 더 시키는 해병은 없었다고.[15] 소총은 개천천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농로 아래 배수관에 들어 있었으며 탄창은 배수관에서 상류쪽 10m 물 속에 있었다. 소총이 발견된 지점에서 20m 아래쪽 개천속에서 수류탄 1발과 실탄, 유탄이 든 탄통을 찾아냈다.[16] 범인은 편지 종이에 지문이 남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아서 장갑을 착용하고 왼손으로 편지를 작성하는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였으나, 정작 편지를 보내기 직전에 장갑을 벗고 편지지를 만져서 봉투에 지문을 남긴 어이없는 실수로 꼬리를 밟혔다.[17] 사실 범인이 자수 편지를 보냈던 것도 정말 자수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이 사건의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실탄과 총기, 수류탄 등 무기를 돌려줘버리면 경찰의 추적이 한 풀 꺾이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그랬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무기를 전부 돌려줄테니 나는 그냥 놔주쇼!"라는 타협의 의도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얘기. 당연한 얘기지만 무기를 돌려준다고 해서 경찰이 엄연한 살인자 추적을 약화시킬 리가 없다. 차라리 편지를 안 보냈으면 안 잡혔을 테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18] 이런 류의 범죄자들은 보통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일반 상식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누군가를 후회하게 해 주겠답시고 엉뚱한 범죄를 벌이는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사고 방식 자체가 다르다. 이 케이스도 따지고 보면 이런 흉악무도한 짓을 했다고 상대방 여성이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됐구나' 하고 자책감을 가진다는 건 진짜 그야말로 본인 위주의 이기적인 생각일 뿐이고 실제로는 저런 흉악한 놈과 헤어지길 잘했다고 안도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자신의 행동을 변명으로 포장하는 졸렬한 행동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으로,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상대방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하는 간접적 공격 행위를 수동공격이라고 한다.[19] 이에 대해 용감한 형사들에 출연한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범인의 발언과 달리 피해장병은 등 부분을 칼로 찔렸다며 형량을 줄이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20] 사건 전 해인 2006년 7월에 구입한 E산업의 '리베로 5.0mm' 공기총으로 전체 길이가 106cm이며 회전 6연발 탄창을 갖추고 있는 사냥총이다.[21] 이 때는 법원이 없거나 해당 관할법원과의 교통이 차단된 경우에 한해 모든 형사사건의 재판이 군사법원에서 이루어진다.[22] 군사보호구역 내에서 군인을 습격해 살인 및 중상해를 입히고 총과 실탄, 수류탄을 탈취.[23] 자동차를 훔치고 번호판을 변조해 추적을 피하려 했으며, 범행 후 불을 질러 증거를 인멸한 부분.[24] 개복어 팬카페에 올라온 폭로.[25] 정황상 2사단 출신인 듯 하다.[26] 해병대 2사단 수색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