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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1:45

서지원 사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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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망 소식3. 사고 전후 과정4. 유서와 마지막 음성 메시지5. 당시 서지원의 상황
5.1. 소속사의 부당한 처우5.2. 체력 저하와 정신적인 스트레스5.3. 2집 앨범 성공에 대한 부담감5.4. 가족 문제
6. 사후
6.1. 죽음에 대한 소문
7. 여담8. 주변인들의 인터뷰와 편지9. 둘러보기

1. 개요

1996년 1월 1일, 가수 서지원자살한 사건.

2. 사망 소식

1996년 1월 1일 저녁 뉴스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인기 가수 서지원이 스무 살[1]의 젊은 나이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평소에 밝은 성격이었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사려깊었기에 자신의 힘듦을 주위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주변인들은 갑자기 찾아온 비보에 더욱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3. 사고 전후 과정

방에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자는 줄 알았어요. 근데 좀 있으니까 형이 몸을 부르르 떨어서 처음에는 추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제 친구가 같이 있었거든요. 친구가 흔들어 보니까 좀 안 좋은 상태인 것 같아서... 집에 전화기[4]가 없어요. 그래서 밖에 나가서 전화하고 들어왔더니 더 심각해진 것 같아서 바로 업고 나갔는데요. 병원에 응급실에 옮겨 놓으니까 병원에서 이미 병원 도착 전에 사망했다고... 약통에 위장약이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위장약을 먹은 것 같은데[5] 얼마나 먹었는지도 모르겠고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의 방 침대에는 노란색 알약 1알[6]과 유서가 적힌 일기장이 놓여 있었으며, 방에서는 평소 그가 복용하던 '위장약'이라고 적힌 빈 약병[7]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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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도착한 9시 경, 심전도 검사 결과 사망 판정을 받았다.[8] 당시 가족들은 전부 미국에 있었기에 그의 시신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보컬 트레이너 겸 가수 박선주가 대신 확인했다고 한다.[9] 이홍렬, DJ DOC, 박선주 등의 동료 연예인들과 소녀 팬들이 그의 빈소에 찾아와 슬퍼했으며, 기자들이 그의 장례식과 빈소의 모습을 취재해갔다.

4. 유서와 마지막 음성 메시지

그의 방 침대에서 세 장의 자필 유서가 발견되었는데 전문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내 눈물 모아> 뮤직비디오에 이 유서의 내용이 화면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몇 차례 나온다.[16]
【유서 전문이 포함되어 있으니 열람에 주의할 것】
>내가 지금 이 모든 일을 한글[17]로 적는 것은 아무래도 유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누군가 이 글을 봤을 때 나를 이해하길 바래서이다.
내가 오랫동안 각오해 왔던 바이지만 드디어 용기를 내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나는 그 동안 약을 복용해왔다. 그 이유는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세상은 내가 존재하기에 너무도 험한 곳이고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다.
2집 활동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자신도 없고... 활동 중 군대도 가야 하고 내 가족들을 또 사무실 가족들을 책임지기엔 너무도 벅차다.
새해를 맞이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난 이제껏 진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사람들에겐 정말 죄송하다.
하나님, 부모님, 전무님, 실장님, 정현, 승만, 세진(이 셋은 동등하다.) 태석이 등등 너무 미안하다.
그들은 남은 인생을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란다.
내가 못 이룬 꿈을 내 동생들이 이루었으면 좋겠다. 난 항상 생각해왔다. 무엇이 날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지...
그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못 이긴 것 같다. 연예인으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난 더 이상 힘이 없다.
차라리 미국에서 평범하게 공부나 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게 할 말은 뚜렷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냥 진실한 세상이었으면 한다.
내 마음을 모두 표현 못하겠지만 나를 정말 지켜오고 나를 아는 사람은 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도 알 것이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정말 없길 바란다.
전무님은 내가 죽은 뒤에라도 PR을 잘해 2집이 많이 성공적이길 빈다.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난 항상 밝게 살아왔으니까...
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
정말, 사랑하고 싶었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전무님께 정말 죄송하구요 실장님께도 죄송하구요 다른 바램은 아무것도 없구요.... 우리 어머니 좀 잘 돌봐주세요.
그리고 정현이 승만이 세진이는 정말 끝까지 책임져 주세요. 그리고 저 용서해주세요.... 그게 저의 마지막 바램이에요.


1996년 1월 1일 아침, 늘 소지하고 다니던 자신의 무선호출기에 마지막 음성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18]
서지원이에요.
여러분 한 해 동안 저 사랑해주신 거 정말 감사하구요.
더 이상 저를 못 보게 되더라도 저를 항상 기억해주시구요.
여러분 다 몸 건강히 새해 복 많이 받으셨으면 좋겠구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간신히 힘겹게 이어가던 마지막 음성은 사후 3집 앨범 《Made In Heaven》의 인트로에 삽입[19]되어 많은 팬들을 눈물 짓게 했다.

서지원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가 수록된 3집 앨범 인트로

5. 당시 서지원의 상황

후술할 내용은 그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정황을 서술한 것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당사자인 그가 아닌 이상 모든 내막을 알 수 없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제3자가 함부로 원인을 추측해선 안 되지만 발생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사건이라 잘못 전달되는 내용이 많아 당시 기사와 잡지 인터뷰 등에 공개된 내용만 발췌하여 정리했다.
'사람들 앞에서 새 노래 부를 생각을 하면 너무 행복해서 소름이 끼친다.'라고 말할 정도로 2집 앨범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군 문제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으며 조만간 재검을 받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로 자살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납득이 안 간다는 것이 측근의 말이다. 부모님의 불화, 군대 문제, 2집에 대한 불안감은 표면적인 것일 뿐 그가 생을 포기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진정한 '사랑'과 따뜻한 '관심'이었다. 그 자신 너무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그동안 그를 외면했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20]
-1996년 기사 내용 中-

일부 언론의 잘못된 보도는 그를 단순히 2집 앨범 성공에 대한 부담감과 우울증 때문에 자살한, 그저 멘탈이 나약한 청년 정도로 비치도록 하는 데 일조했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5.1. 소속사의 부당한 처우

태어나서 가장 기뻤던 일은?
공개오디션에 뽑혔을 때 '나도 가수가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밤잠도 못 자고 설레던 기억. 하지만 현실은?
-주니어 1995년 「스타 청문회 '또 다른 시작'으로 떠오르는 차세대 엔터테이너 후보 서지원 ⓟ235」 中-

2000년대 이전 많은 음반 제작사의 소속 연예인에 대한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는 소속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연예인들을 혹사시키고 수익을 모조리 가로채는 소속사가 많아서 이로 인해 피해를 봤던 가수들이 아주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 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당시 서지원의 소속사였던 옴니뮤직도 이러한 횡포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일각에서는 그의 사망엔 소속사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는 미국 LA에서 미주 중앙일보, 미주 한인 방송국, 한국 음반 제작사가 주최한 공개 오디션에서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 1993년 12월에 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초 가수 데뷔를 약속했던 회사의 숙소에서 지내며 데뷔를 준비했지만 회사의 사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명문대학 입학까지 포기해가면서 한국에 돌아왔지만 겪게 된 좌절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 미용실,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며 직접 여러 기획사와 접촉하던 중 옴니뮤직에 발탁되어 데뷔의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당시 옴니뮤직은 작은 회사였고 그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연예인이었기에 소속사의 모든 직원들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가 소속사 전체를 혼자서 먹여 살리고 있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에게 주어진 책임감과 중압감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 당시의 대우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소속사에서 숙소 하나 마련해주지 않아 그가 한국에서 생활했던 오피스텔의 전세금 대부분을 소속사 계약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21]

아래는 당시 소속사에서 그의 수익 관리를 어떻게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인터뷰 기사 내용이다.
생활비는 거의 매니저가 관리하고 있다. 식비, 의상비는 물론 간식비, CD 구입비, 병원비, 화장품 구입비, 차량 유지비와 집 유지비도 모두 매니저가 관리하고 있다. 서지원 씨는 매니저에게 2~3일에 한 번씩 5~10만 원 용돈을 받고 있다. 자신이 번 돈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지만 불평 한 번 하지 않는다고 매니저가 칭찬을 한다. "어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느냐고요? 월드콘이 제일 좋아요. 맛있고, 싸고. 돈이 있을 때는 배스킨 라빈스를 먹지요." 연예인답지 않게 소박한 그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에꼴 1995년 「혼자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전화 서지원(20세, 가수) ⓟ131」 인터뷰 中-
하루 용돈과 지출 내용: 거의 쓰는 돈이 없다고나 할까요(매니저께서 전적으로 부담하시기 때문)
-주니어 1995년 「스타 청문회 '또 다른 시작'으로 떠오르는 차세대 엔터테이너 후보 서지원 ⓟ235」 中-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가 직접 자신의 수익 관리를 전혀 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가수 김경호의 자서전 『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로커 외길인생 김경호가 전하는 생을 건너는 법』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당시 서지원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 그가 느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힘들어요. 화려해 보여도 실속은 없고요. 혼자 지내는 오피스텔 생활도 너무 외로워요."
당시 연예인들과 소속사의 관계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계약으로 묶여 있지가 않았다. 연예기획사가 투자를 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기획사가 지나치게 많은 이득을 취하는 형태였다. 특히 미국에서 살다가 온 지원이의 입장에서는 기획사의 소속 연예인의 그처럼 부당한 관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몇 번이나 그 문제에 대해서 불만을 이야기했지만 도무지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소속사의 행태에 지원이는 지쳐 있었다.

가수 한 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투자하는 비용을 감안하더라도 가수가 자신 몫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수익까지 소속사에서 부당하게 편취하여 결국 그가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가 되기까지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중시킨 것은 소속사의 문제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는 겉보기에만 화려한 연예인 생활에 회의를 느끼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서지원의 주변인들은 그가 '진실하지 않고 표면적인 연예계의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끼는 듯했다.'라고 전했다. 만약 그에게 최소한 소속사 내부에라도 진심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5.2. 체력 저하와 정신적인 스트레스

가수 서지원 늑막염 후유증 피로 겹쳐 '얼굴 반쪽'
천고마비의 계절인데도 또 다른 시작의 가수 서지원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주위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원래 183cm 60kg의 가냘픈 몸매인 서지원의 현재 체중은 52kg. 지난 9월 중순 늑막염으로 쓰러져 일주일간 입원했던 그가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가 2집 앨범 제작을 위해 밤낮으로 땀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입원할 당시부터 미국에서 귀국한 어머니가 몸에 좋다는 영양제와 녹용 등 온갖 보약을 구해와 복용했지만 원래 체중을 회복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듯.
-1995년 신문 기사 中-

강행군일 수밖에 없는 직업의 특성상[22] 원래 몸도 약했던 그는 활동 당시 체력 저하와 사생활이 전혀 없는 일상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심리적 안정을 찾지 못해 힘들어했다. 이 때문에 날이 갈수록 체중이 줄어갔고 가슴 통증과 늑막염 증상으로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어 결국 체중이 52kg[23]까지 줄었다고 한다. 소속사에서는 그의 어머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한국에 와서 서지원의 보약을 좀 지어 달라며 부탁했고 이에 어머니가 직접 한국으로 와서 그를 보살펴 주었다.

얼핏 보면 소속 가수가 체력 저하로 힘들어하자 그의 가족에게 보살펴 달라며 부탁하는 별 문제 없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만약 가족들이 그와 가까운 곳에 살았거나 하다 못해 한국에만 있었더라도 이러한 행동이 그렇게까지 비판 받을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당시 미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까지 직접 비행기를 타고 와야 했다. 그리고 보약이 아무리 비싸도 어지간해서는 미국~대한민국 왕복 항공료보단 비쌀 수가 없는데 소속사는 소속 가수를 위해 직접 보약을 지어줄 돈도 아까워해서 외국에 있는 가족을 자비로 오가게 하여 서지원에게는 오히려 심적인 스트레스를 가중시켰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고생하게 만든 셈이다. 당연히 소속사는 그의 팬들에게 '보약 한 첩 지어주기가 그렇게나 아까웠냐'며 큰 비난을 받았다. 2020년대인 현재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알려진 소속사라면 당장 문을 닫아도 할 말이 없다.

5.3. 2집 앨범 성공에 대한 부담감

2집 녹음이 끝나고 지금은 마치 달리기 출발 지점에 서 있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너희들에게 나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날만 기다리고 있어. 많이 기다렸지. 너흰 알 거야. 밤새 편질 써서 보내려고 하면 내용 어느 한 부분 맘에 안 들어 다시 쓰게 되고 또 고민하고... 나도 그랬어.
나 노래를 아무리 잘한다 칭찬 받아도 내 노랠 듣고 있을 너흴 떠올리면 내가 잘 해내지 못한 부분들이 맘에 걸려 쉽게 넘어가질 못했어. 그리고 지금엔 나름대로 '괜찮겠지'하는 마음으로 끝냈어. 그래서 더 떨려.
-팬클럽 푸르매의 회지에 실렸던 팬들에게 쓴 편지 中-
2집부터는 오로지 노래만 부를 거라는 다짐한다. 1집 때는 노래를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를 부수적으로 곁들였지만 이제는 노래만으로 평가 받겠다는 생각. 1집이 신인 가수 '서지원'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게 기회였다면 이번 2집은 그의 진정한 노래 실력을 평가 받는 시험대가 되는 것이다. 노래보다는 연기, MC 활동 등 다재다능한 면으로 많이 부각되었던 것이 사실.
"만족은 물론 못하지만 2집 활동을 위한 발판은 마련했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노래 외의 것을 많이 했는데 그 모든 활동 역시 노래를 위한 것이었어요"
(중략)
인터뷰 마지막까지 노래하는 가수로서만 팬들 앞에 서겠다는 다짐을 몇 번씩이나 되새기는 서지원. 그의 도약을 주목해볼 일이다.
"이번에도 1집 때와 마찬가지로 신인처럼 꾸준히 겸손한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단, 노래만 할 거예요"
-Music Life 1995년 12월호 「기획력 돋보이는 2집 앨범으로 새롭게 다가설 푸르매 왕자 ⓟ196」 中-

1995년~1996년 가요계IMF 이전 한국 가요계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대형 가수들이 많이 나와 엄청난 히트곡들이 탄생했고 가요계의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역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소속사의 판단으로 자신이 원하던 방향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 서지원은 그저 잘생긴 외모의 아이돌 스타 정도라는 인식이 조금 더 강했는데 소속사가 음악 프로그램이나 공연보다는 각종 버라이어티 쇼나 예능 프로그램에 그를 더 많이 출연시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자신의 외모를 어필하기보단 음악으로 승부하길 원했다. 한 사람에게라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신인 시절에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그는 올곧은 성격의 스무 살 청년이었고 아무리 인기가 올라간다고 한들 대중들에게 비디오형 가수[24]로 인식되는 것은 자신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기에 소속사의 판단과 지시가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신인이었기에 각종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해 밝은 모습을 보여줬고 때로는 망가지는 역할도 담당하면서 프로그램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21세기인 현재에는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이미지 쇄신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예능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가수가 이를 본업에도 잘 활용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당시 일부 예능 프로그램에선 진행자가 다소 무례한 언행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았고, 나이가 어린 연예인일수록 무시당하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러한 면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노래를 잘 못 하는 가수로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게 제일 속상해요. 관계자분들도 처음에는'넌 라이브는 안 돼!'하시다가 제가 고집을 피워 직접 무대에 서는 것으로 인정받은 경우가 많았어요. 물론 아직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속단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형편없는 립싱크 가수가 아니란 점만은 확실히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노래마당 1995년 5월호 「여림 속에 강인함 간직한 풋풋한 보이스카웃 서지원 ⓟ152」-

그러면서도 비디오형 가수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2집 앨범을 제작할 땐 전보다 더욱 욕심을 냈다. 자신이 직접 작곡가를 섭외하고[25] 본인도 작곡에 참여하는 등 1집 앨범보다 자신의 색을 많이 입힐 수 있게 되면서 더 애착을 가지고 앨범을 준비했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1집 앨범보다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2집 앨범 발매를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 '방송 활동보다 음악 활동에 집중할 것'이라고 연신 포부를 밝히며 아이돌 스타보다는 뮤지션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드러냈으나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음악적으로 평가 받게 되었다.

5.4. 가족 문제

그의 장례식장에서 한 관계자는 '(서지원이) 가정적으로 애정을 많이 못 받고 자라났다.'고 인터뷰했는데 전국에 방영되는 방송 인터뷰임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경솔한 발언으로 들릴 수 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제3자가 함부로 말할 부분이 아니다. 부모의 별거를 매우 마음 아파하면서도 자신이 받게 된 상처보다 오히려 부모를 걱정하고 배려했으며, 7살 터울의 어린 동생을 무척이나 아끼는 걸로 유명했던 그가 애정을 못 받고 자라났다는 말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 다니실 때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사실 제가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랐어요. 그래서 갖고 싶은 건 거의 다 갖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갖고 싶었던 건 없었어요.
-Music Life 1995년 7월호 「애독자 일일 기자회견: 새로운 변신 앞두고 있는 '푸르매' 가수 서지원 ⓟ194」 中-
아픈 기억이지만 92년 LA 폭동은 그에게 상처를 줬다. 거의 10년을 걸쳐 쌓아 올린 희망들을 일순간에 잃어버린 그 이후로 지금까지 힘들다. 얼마 전 미국에 들어가서 보니 하나뿐인 동생이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서지원은 저려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어서 돈을 벌어 동생 신발도 사주고 학비도 대주리라고.
-1995년 잡지 「발라드풍의 <또 다른 시작>으로 인기몰이 예약한 뉴스타 서지원」-
"지원이는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다 알아서 하고 집안일은 물론 동생도 잘 돌보았어요. 책임감이 강한 아이였죠. 지원이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지원이 아버지라는 내색을 안 하고 있으면 지원이가 더 "아버지 걱정 마세요. 꼭 성공해서 아버지 잘 모실 거예요."라며 저를 위로했어요. 12월 31일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밤하늘의 별을 보았어요. 평소 지원이 동생 노는 모습을 비디오에 자주 담아놓았었는데 그날은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를 찍었죠. 그런데 바로 다음날 지원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저녁에 왜 갑자기 옛날 생각을 했을까. 그게 무슨 징크스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Premium)View 1996년 2월호 「슬픔의 흔적, 둘: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 쓴 마지막 일지(ⓟ168)」 中 아버지 인터뷰-

6. 사후

6.1. 죽음에 대한 소문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두 근거 없는 헛소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상한 소문이 돌았는데 사실은 그가 사망 판정을 받았을 때 아직 숨진 게 아니었으며 나중에 병원의 영안실에서 깨어났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시신 안치함에서 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쳤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그는 끝내 그 안에서 숨졌고 나중에 누군가 열어보니 문 안쪽엔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얼굴엔 눈물 자국이 있었다는 내용인데 당연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일단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소속사 및 병원 관계자들이 며칠 동안 밤낮 구분 없이 거의 10분 간격으로 영안실을 들락거리면서 시신을 확인했고 조문을 왔던 팬들, 동료 연예인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만약 그가 정말로 깨어났다면 곧 누군가 알아챘을 것이다. 행여라도 그런 소문을 진실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비웃고 넘기는 게 좋다. 당시 어린 연령대의 팬들 사이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너무나도 큰 비보가 도저히 믿기지 않아 나온 이야기라고 생각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루머를 퍼뜨리는 것은 유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다.

7. 여담

지원아 내가 너무 세상을 오래 사는 거 같아.
그쪽은 어떤지 가봐야 알겠지만
하느님이 편안하게 해주시겠지...
조만간 만나게 되면, 포옹 한 번 해보자.
지원아... 잘 지내라.
-MBC 라이프 <히스토리 후> 서지원 편 中 아버지 음성 편지-
파일:정재형 놀러와.jpg
▲ MBC <놀러와> 방송 모습

8. 주변인들의 인터뷰와 편지

서지원 -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
더욱 아쉬운 사람이 한 명 있다. 2집 발매를 앞둔 1996년 1월 1일, 만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이가 있었다. 바로 서지원이다. 1994년 10월, 1집 앨범 《Seo Ji Won》으로 데뷔해 미래가 기대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더욱 아쉬운 일이었다. 또한 지원이와 개인적으로 굉장히 친분이 있었던 내 마음은 누구보다 괴로웠다. 사실 사람들을 잘 만나지도, 많은 사람을 사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마음이 통하는 지원이와 만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는 게 외로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처음에는 작곡가와 가수 사이로 만났지만, 음악에 욕심이 많은 친구라 그랬는지 거의 매일 만나 음악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좁은 작업실에 모여 지원이가 글을 쓰면 내가 곡을 붙이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아직도 현실인 듯 새록새록하다. 그래서 더욱 지원이가 죽기 4시간 전까지 함께 술을 마셨던 그날이 잊히지가 않는다.
(중략)
나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좋다. 조금이라도 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고, 오늘보다 내일 더 음악을 잘하고 싶다. 그래서 내 주위엔 음악에 대한 사랑이 깊은 사람들이 많다. 아무래도 인생에 도움이 되는 친구보다는 음악에 도움이 되는 친구 위주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더 지원이가 떠난 1월 1일이 되면 그에 대한 기억에 가슴이 아려온다.
-윤일상(작곡가), 『나는 스무살이다』 中-
지원이는 처음 방송국에서 만났어요. 처음 만나자마자 "형, 저 형 노래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제 2집에 곡을 써주세요."라고 처음 보는 저에게 2집의 음반 작업을 부탁하더군요. 처음에는 "준비해 볼게요."라는 말로 그냥 지나쳤는데 그 이후 지원이가 저희 기획사 사무실로 놀러 오고 방송국에서 자주 만나면서 아주 친한 관계가 되었어요. 그래서 지난 겨울부터 제가 지원이의 2집 몇 곡의 노래를 만들게 되었죠. 지원이는 음악에 대해 욕심이 많았어요. 성격 또한 밝고 명랑해서 동료 연예인들이 지원이를 많이 이뻐했어요. 하지만 가끔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얘기, 부모님의 이혼 얘기 등을 할 때면 나이는 어리지만, 지원이가 살아왔던 날들이 그리 쉬운 인생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얘기를 하면 할수록 지원이가 저와 너무도 비슷하다는 생각에 더 많은 애착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가끔 "형, 나는 다시 태어나면 연예인도 안 되고 연예인 친구도 안 사귈 거야."라고 종종 얘기해 연예인들의 표면적인 인간관계에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지원이한테 지금도 미안한 점이 하나 있어요. 제가 지원이의 2집 '내 눈물 모아'를 녹음하면서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몰라요. 이 한 곡을 10번이나 넘게 녹음하면서 했던 말들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저 자신이 원망스러워요. 지원이를 생각하면 할수록 지원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지금까지 일체 이런 얘기를 언론에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제가 이미 죽은 지원이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지금 세간에 떠도는 많은 소문들이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예요. 이렇게 떠도는 소문을 믿고 그 소문의 진상을 알기 위해 그 소문의 뒤를 쫓아다닌다는 것은 죽은 지원이를 우리가 다시 한번 더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죽은 지원이가 천국에서 이곳에서 느끼지 못했던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빌어 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원아. 올해 네가 성인이 되는 해이구나. 형이 멀리서나마 너의 성년식을 축하한다. 몸 건강해라 지원아……. 그리고 하늘에서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살아라…….
-정재형(베이시스 리더) 인터뷰 1-

【인터뷰 스캔본】
파일:정재형 인터뷰.jpg
녹음 안 돼 힘들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
지원이는 내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애였다. 내가 처음으로 다른 가수에게 곡을 준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지원이가 곡을 써달라고 했을 때 사실은 '음악성은 별로이고 얼굴 예쁜 가수'로만 생각해 '곡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라고 정중하게 거절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2집 작업을 같이 해보니 어린 것에 반해 음악적인 고민과 욕심이 대단하다는 걸 알았다. 지원이도 2집에서 이제까지의 곱기만 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음악으로 승부를 걸고 싶어했는데... 가슴이 굉장히 아프다. 녹음실에서 녹음이 안 돼서 힘들어하던 애를 다그치던 일이 후회된다. 가끔 집에서 지원이의 2집을 듣는데 '어린 것이 뭐가 힘들어서 목숨을 끊었을까?'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 요즘은 꿈에도 잘 나타나 새삼 '가수들이 음악적으로 얼마나 힘들어하나'를 고민하게 만든다.
-정재형(베이시스 리더) 인터뷰 2-
진정한 팬이라면 잊지 말고 그를 기억해주길
솔직히 친한 감정은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가수가 지원이다. 내 코디를 해주던 김현량 누나를 통해서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얘기만 듣고 서로 활동하는 시기가 달라 안타깝게도 만나질 못했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가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아쉽게 생각한다. 대중들은 가수들을 쉽게 평가하고 외면해 버리지만 그 평가를 기다리는 가수들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쉽게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세월이 흘러도 지원이를 잊지 말고 기억해달라는 것이다. 정말 부탁이다.
-김원준(가수)-
욕심과 재능이 대단히 아까운 가수
지원이를 처음 알게 된 건 95년 9월 내 앨범 녹음을 하고 있을 때였다. 녹음실에 찾아와 내 곡을 받고 싶다고 했을 때 처음엔 황당했었다. 곡 분위기가 안 맞는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누나 곡을 받는 게 음악을 시작하기 전부터의 소원'이라고 막무가내로 졸랐다. 그러곤 다음날 또 녹음실에 와서 무작정 5시간을 버티고 앉아 고집을 부리는 거였다. 그래서 '음악 욕심이 많은 아이구나'라고 다시 봤다. 그 후 듀엣곡 <76-70=♥>를 주면서 두 달 가까이 만나 작업도 같이 하고 새벽에 만나 술 마시며 고민도 얘기하며 지냈는데 갑자기 비보를 들은 것이다. 황당하고 허탈했던 그때의 심정은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개인적인 의견으론 지원이가 살아있었다면 1, 2년 후엔 정말 대단한 가수가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정말 감각 있는, 욕심과 재능이 대단한 가수였다.
-박선주(가수, 작곡가)-
며칠 전 꿈속에서 지원이를 만났어요.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거든요. 아마 지원이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꿈속에서 웃으며 나타나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한이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기래요.
-강태석-
2집 녹음 때마다 지원이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그 당시에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만큼 단단한 각오로 최선을 다하는구나 라고 생각해서 기특하게 여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미 그때부터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지훈(2집 프로듀스)-

아래는 잡지 (Premium)View 1996년 5월호 「슬픔에 관하여: 서지원 사망 1백 일에 띄우는 스무 통의 추모 메시지 ⓟ180」 기사에 실렸던 내용으로 일부만 발췌했다.
지원아! 누구보다도 너의 아팠던 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우리일 것이다. 너와 비슷하게 우리 역시 미국에서 살다 고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너의 외로움을 미처 몰라 미안하구나. 너의 감정들을 우리 역시 뼈아프게 경험했지. 그런 내가 너와 같이 많은 얘기를 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구나. 우린 서로 자신의 활동에만 정신을 쏟았을 뿐이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겐 신경을 쓰지 못했어. 2집에 나도 곡을 써주기로 했었지. 내가 만약 곡을 써주고 같이 작업을 했더라면 네가 그런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 텐데…. 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후회스러움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솔리드 정재윤-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단다. 그건 너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겠지. 그런 고통을 나 역시 뼈아프게 겪었으니까 말이야. 넌 혼자라는 생각에 더욱더 힘들었을 거야. 우린 그래도 서로를 위해주면서 아픔을 나누잖아. 우리가 너와 함께 외로움을 나누지 못한 걸 후회한다. 그리고 네가 보다 좋은 세상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게...
-솔리드 이준-
네 생각을 많이 한단다. 널 아주 좋아했었지. 우린 서로 통하는 게 많았잖아. 자주 연락도 못 하고 미안하다. 우리가 도와주었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텐데... 네 노래 '내 눈물 모아' 정말 좋더라. 너의 노래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불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너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말이야! 너를 위해 기도할게...
-솔리드 김조한-
지원아! 형은 아직도 네 생각을 하면 힘이 드는구나! 네가 떠난 지 어언 100일이 지났는데도 너와 함께 작업하던 일, 같이 술 마시던 일, 녹음실에서 힘들어하던 일, 함께 보낸 6개월이 왜 이리 자꾸 선명해지는지... 항상 웃던 너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점이 나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는데…. 네가 그렇게 힘들어했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아주 아팠단다. 1월 2일 새벽, 연락을 받고 정신 없이 뛰어가 빈소도 없는 너의 자리를 보곤 얼마나 울었는지. 항상 후회하는 일이 많지만 그렇게 자책하고 싶었던, 너무 후회했던 일은 없었지 싶구나. 원망도 많이 했고... 며칠 전 너의 노래가 1위를 하던 날. 형은 집에서 많이 울었단다. 자주 꿈에 나타났던 너의 모습을 차마 대할 수 없어 TV도 보지 않았고, 거기 있는 너의 모습을 보며, 뮤직비디오 안의 너를 보면서 또 많이 힘들었단다. 벌써 100일이구나! 콘서트 때문에 장례식에 가지 못한 형을 용서하고, 언젠가 정말 언젠가 우리 만나자. 그땐 그리고 서로 웃자! 항상 우리 그랬듯이 형도 너를 영원히 기억할게.
-정재형(작곡가, 베이시스 멤버, <내 눈물 모아> 작곡)-
지원아. 듣고 있니? 네가 떠난 지 벌써 100일이 되었니? 네 모습들이 난 아직도 눈에 선한데... 너의 마지막 방송이 뭔지 알지? 바로 내가 진행하는 'FM 데이트'였잖아. 네가 2집을 냈다고 해서 전화 인터뷰를 했었지. 그 목소리가 마지막 너의 방송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방송 많이 틀어달라던 너의 말이 내겐 유언이 될지 난 정말 알지 못했어. 하늘에서도 라디오가 들리니? 만약 들린다면 'FM 데이트'도 듣고 있겠지? 네 노래 많이 틀어. 난 너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거야. '내 눈물 모아'를 틀어놓고 난 늘 네 생각을 한단다.
-박소현(배우)-
난 네가 그럴 줄 몰랐어. 정말 몰랐어. 그래서 처음엔 네가 미웠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사람의 목숨이라는 게 그렇게 하찮은 건 아니잖니. 누구나 적어도 한 번씩은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만 준다고 그랬는데. 너를 생각하면 나는 한편으론 참 행복한 아이라는 생각을 해. 내가 너라면 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테지. 나중엔 그래서 너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 너의 가정환경을 생각하면 네가 너무 불쌍해서 난 가끔 기도를 해. 너는 기독교, 나는 천주교지만 분명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줄 거야. 얼마 전 베이시스를 만났어. 네 얘기를 했지. 난 지원이 네가 지옥에 가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는데 재형 씨가 그러더라. 하나님이 지원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거두어 가신 거라고. 아마도 지원이는 천국에 갔을 거라고. 그래. 생각해보면 넌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웃고 있었어. 난 그때를 생각하며 참 많이 반성해. 넌 분명 천국에 있을 거야? 그렇지? 지원아. 나 사실 요즘 괴로워. '내 눈물 모아' 가사 말이야. 난 정말 아무 뜻 없이 쓴 건데 사람들은 그 가사를 자꾸 네 죽음에 연관시키려고만 해. 뮤직비디오에서 네가 흘리던 그 눈물이 난 잊히지 않아. 난 자꾸 죄책감이 든다. 넌 날 이해해 줄 거지?
-김혜선(작사가, <내 눈물 모아> 작사)-
지원아. 너를 처음 본 건 지난 여름이었지. 그때 넌 태석이랑 우리 View 사무실을 찾아왔었어. 생각나니? 그날은 여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는데. 사진 찍으러 함께 당구장도 가고, 여의도 광장에서 자전거도 타고 굉장히 즐거웠었지. 인터뷰가 끝나고 카페에서 넌 식혜를 주문하여 날 어리둥절하게도 만들었어. 난 네가 미국에서 왔다길래 아메리칸 커피 같은 걸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참. 그때 식혜값은 내가 냈다. 다음에 빚 갚겠다더니 나쁜 놈! 요새 우리 사무실로 너에게 보내는 독자들의 편지가 많이 날아와. 넌 정말 인기가 많았나 봐. 그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고 있자면 약간은 서글퍼지기도 해. 그래서 네 노래를 틀어놓고 아주 가끔은 지난 여름을 떠올린단다. 비가 오고, 당구를 치고, 자전거를 타고, 함께 식혜를 마시고. 난 아직도 얼마든지 식혜를 사줄 수 있는데. 난 아마 식혜를 마실 때마다 네가 생각날 거야.
-조수현((Premium)View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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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망 및 실종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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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병사(D), 아사(H), 익사(W), 의료사고(M), 실종(V), 자살(S), 교통사고(T), 기타(E), 생존한 상태에서 발견(L), 부상자도 존재하는 사건(I), 의문사 및 경위 불명(?)}}}}}}}}}





[1] 생일 전에 사망하였으므로 향년 만 19세이다.[2] 대표적인 자살 징후(침울한 목소리, 시기를 알기 어려운 인삿말, 지나치게 밝은 모습)가 한꺼번에 나타났다. 명백한 적신호[3] 이후 그룹 스크림으로 데뷔했다. 데뷔곡은 선전한 편이었지만 이후에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고 스크림은 2집 앨범을 끝으로 해체됐다. 당시 또 다른 멤버였던 송호범은 그룹 해체 후 6년 동안 공백기를 거친 뒤 2003년 그룹 원투의 멤버로 다시 활동하게 되었다.[4] 소속사의 주장에 의하면 원래 전화기가 있었으나 팬들의 전화가 쇄도하는 통에 없앴다고 한다.[5] 사실은 위장약이 아닌 신경 안정제였다. 이때는 국과수 부검 결과가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후배도 정확한 사실을 몰랐던 듯하다.[6] 국과수 부검 결과 신경 안정제로 밝혀졌다.[7] 주변에 신경 안정제 복용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8] 병원 도착 전에 이미 숨이 멎었다고 한다.[9] 소속사 사람들은 뭘 했는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10] 그의 가족들은 부검을 반대했지만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려 있는 사안이라는 이유로 부검이 진행됐다.[11] 보통 사람은 300여 정은 고사하고 10~30여 정만 삼켜도 심장발작으로 죽을 수 있거나 죽는다. 그런데 서지원은 치사량의 10배 이상의 신경 안정제를 삼켰으니 아무리 빨리 위세척을 실시했어도 너무 늦은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병원 도착 전 이미 사망했으므로 사실상 위세척의 의미가 없었다.[12] 소화되지 않은 약이 기도로 넘어가 질식을 일으킨 듯하다.[13] 서지원이 방송 활동 당시 SBS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했던 것이 이유인 듯하다.[14] 이 모습은 <내 눈물 모아> 뮤직비디오에도 등장했다. 강태석은 서지원과 함께 SBS 예능 프로그램 <점프챔프>의 공동 MC를 맡았던 것을 계기로 그와 친해졌다고 한다. 서지원이 연예계에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고 한다.[15] 그의 어머니가 훗날 팬들에게 직접 밝힌 내용이며 유해가 뿌려진 정확한 장소는 현재 입산 금지구역이라고 한다.[16] 마지막까지도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는 성품이 보는 사람을 더욱 마음 아프게 한다.[17] 그는 평소에 영어(로마자)로 일기를 썼다고 한다.[18] 친구 강태석의 무선호출기에는 서지원이 1월 1일 오전 7시에 남긴 메시지가 있었다고 한다.[19]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까지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20] 측근의 추측을 바탕으로 하여 기자의 사견을 담아 작성된 기사이기 때문에 걸러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서지원이 스스로 세상을 떠난 이유는 당사자 본인만 알 것이다. 그의 유서에 언급된 내용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측근의 자유지만, 측근의 논리대로라면 2집 앨범 발매가 예정되었고 군 입대를 위해 재검을 앞둔 상태인, 즉 앞으로 다양한 일정을 소화해야 할 서지원은 자살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연예인뿐만 아니라 비연예인의 경우에도 업무나 여행 등 개인 일정을 앞둔 상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는 드물지 않다. '표면적인 이유와 생을 포기한 이유'의 기준 또한 애매모호하다. 당사자인 서지원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가 자살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유서뿐이다. 그런데 고인의 유서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을 믿지 않고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넘겨짚듯 추측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그의 죽음이 워낙 갑작스러웠던 데다가 당시엔 자살에 대한 세간의 이해도가 매우 낮았고 인식 또한 거의 없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기사로 보이지만, 2020년대인 현재의 관점으로 다시 보면 굉장히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내용의 기사이므로 받아들일 때 주의해야 할 것이다.[21] 소속 가수의 숙소는 소속사에서 비용을 부담하여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한데 이 소속사는 그런 것도 없었다.[22] 아이돌들이 활동 중 자주 쓰러지는 걸 보면 상상 이상으로 체력 소모가 심하다는 걸 알 수 있다.[23] 참고로 성인 남성 기준 키 173cm에 체중 52kg도 매우 마른 체형인데 그의 키는 183cm였다. 21세기인 현재였다면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조치를 취할 법도 하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인식이 거의 없었기에 단순히 바쁜 스케줄 때문에 몸이 허약해져서 살이 빠진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24] 외모만 뛰어나고 실력은 부족한 가수[25] 정재형, 박선주에게 직접 작곡을 부탁했다.[26] 그의 화장을 마친 지 바로 몇 시간 뒤인 1월 6일, 인기 가수 김광석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다만 김광석은 이상호 기자에 의해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전 부인인 서해순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의혹에 대해 근거가 없으며 이상호 기자는 1억 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몇 주 뒤에는 그룹 룰라의 3집 앨범 표절 의혹과 멤버 이상민의 자살기도 사건이 발생했고 1월 말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돌연 해체되었다.[27] 다만 근거 없는 첩보에 불과해 조사만 하고 끝난 듯하다.[28] 정재형은 서지원 2집 앨범 작업 전이었던 1995년 여름, SBS 예능 프로그램 <점프챔프>에서 그와 처음 만났는데 이때의 친분으로 타이틀곡을 작곡했으며 3집 앨범의 타이틀곡 <그때가 좋았어>를 작곡했다. 특히 2집 앨범 타이틀곡 <내 눈물 모아>는 정재형이 작곡가로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만들어준 곡이었기에 그에게 특별한 의미의 곡이었고 서지원도 그에게 특별한 동생이었다고 한다.[29] 3집 《MADE in HEAVEN》과 베스트 앨범[30] 그의 육성이 포함된 트랙도 있다.[31] (Premium) View 1996년 5월호 「슬픔에 관하여: 서지원 사망 1백 일에 띄우는 스무 통의 추모 메시지 ⓟ180」에서 확인 가능하다.[32] 그러나 1990년대의 음반 판매량 집계는 투명하게 이뤄지지 않았으며 소속사에서 가수들에게 음반 판매량을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그의 유가족에게 인세가 제대로 지급됐을지 의문이라는 의견도 많다.[33]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다.[34] 안타까운 마음에 팬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모금까지 진행해 보았지만 모두 무산되었다고 한다.[35] 2016년에 나온 서지원 20주기 추모 관련 기사에 옴니뮤직이 서지원 추모 사업을 준비 중이라는 기사는 확인할 수 있으나 이 소속사는 2000년대 초반에 사실상 폐업했다. 이후엔 유령회사로써 명목상으로만 명맥을 이어가다가 결국 공식적인 폐업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36] 참고로 서지원과 박용하는 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에서 같은 회차에 함께 출연하였다. 당시 박용하는 희열팀의 슈가맨, 서지원은 재석팀의 슈가맨이었다.[37] 김재기, 남인수, 김성재, 김정호, 채동하, 차중락, 서지원을 추모하는 특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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