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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07:31:55

박용하 사망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망 전 행적3. 사망
3.1. 6월 30일3.2. 7월 1일3.3. 7월 2일
4. 증언5. 사망 후6. 전 매니저의 배신
6.1. 전 매니저의 만행6.2. 전 매니저의 횡령
7. 여담8. 둘러보기

1. 개요

2010년 배우가수 박용하가 사망한 사건.

당시 이 소식은 일본에도 빠르게 퍼져나가, 일본이 월드컵에서 파라과이한테 승부차기에서 져서 아깝게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축구 소식 대신 박용하의 비보를 속보로 내보냈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2. 사망 전 행적

약 한 달간 일본과 태국을 도는 콘서트를 하고 나서 사흘 전인 6월 27일 입국했다.

28일부터 이틀간 배우 박희순과 함께 배우 김무열의 부친상을 조문을 했다.[1]

6월 29일, 《러브송》 제작사 관계자와 만나기로 했다가 펑크를 냈다고 한다. 《러브송》의 제작사 베르디미디어 측은 박용하가 최근 일본 활동을 하느라 3일 전엔가 귀국해 드라마와 관련한 미팅을 하기로 했으며 오후 4시께 매니저랑 통화해 저녁 7-8시께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 시간이 되니까 매니저도, 박용하도 연락이 안 됐다고 했다. #

이듬해인 2011년에 초연되는 뮤지컬 《광화문 연가》주인공으로 출연키로 결정했으며, 오후 5시부터 3시간 가량 뮤지컬 '광화문연가' 출연을 놓고 제작사 대표, 제작프로듀서 김모씨, 작곡가 이경섭 등과 미팅을 가졌다. 그리고 당일 밤 10시 2011년 스케줄과 함께 뮤지컬을 같이 하게 돼 영광이라는 내용을 담은 메일을 임대표에게 보냈다. #

이경섭과 오후 8시쯤 만나 1시간여 동안 커피를 마셨고 그의 앨범에 실릴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

청담동에서 평소 사업 구상을 위해 자주 만나던 안모씨와 30일 오전 12시쯤까지 술자리를 가졌으며 귀가하던 중 안씨로부터 문자를 받았으나 답장은 하지 않았다. #

술을 마신 후 귀가 하여 위암 투병 중이었던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한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6월 30일 오전 0시 25분께 매니저 이모씨와 통화하면서 '차 조심하고 술 마시고 운전하지 마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으며, 오전 1시 35분 매니저 이모씨로부터 '차를 주차했다'는 문자를 받았으나 답장을 하지 않았다.

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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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하의 영정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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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6월 30일

2010년 6월 30일 오전 5시 30분, 강남구 논현동의 자택에서 어머니가 발견해 신고했다.[3] 5시 40분 최초 신고를 받고 47분에 구급대원이 현장에 도착했는데 이미 호흡과 맥박이 멈춘 상태였다. 소방파출소 관계자는 사후강직시반(사후에 나타나는 자줏빛 반점)까지 나타나 사망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고 말하면서, 상태로 보아 사망한 직후에 발견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설명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서 현장에 나와있던 경찰에게 사건을 인계하고 철수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에 임시 빈소가 마련됐으며, 낮 12시 고인의 영정 사진이 흰 바탕에 푸른 문양이 들어간 보자기에 싸인 채 유족들에 의해 빈소로 옮겨졌다.

경찰은 오후 3시 30분 공식 브리핑을 통해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더불어 건강상의 문제나 우울증 병력은 없었으며, 유서나 유류품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고인의 핸드폰을 입수해 조사했는데 통화내역은 삭제됐으나 문자 메시지는 보존돼 있어 자살 동기 등을 판단하는 자료가 됐다고 밝혔으며, 부친의 암투병, 사업 압박, 연예활동 등을 병행하는데 따른 스트레스로 술을 마시고 충동적으로 자살을 결행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외부의 침입 흔적, 저항에 의한 외상이 없는 등 자살임이 명백한 점, 유가족이 극구 부검을 원치 않는 점 등을 고려해 "부검을 실시 안 하기로 했다"고 부검 계획이 없음을 알렸다.

3.2. 7월 1일

7월 1일 입관식에 앞선 오전 10시에는 고인의 빈소가 유족에 의해 5호실에서 3층에 위치한 31호실로 옮겼졌다. 5호실은 협소 한데다 임시 빈소였으며, 31호실은 분향소 중 가장 넓었고 다른 곳과 비교적 격리돼 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취재진이 몰려와서 타 분향소 유족들이 불편을 겪게 되자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기사

입관식은 당초 예정됐던 오후 1시에서 2시로 연기됐으며, 오후 2시 40분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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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전 총리, 부인 아키에 씨가 오후 8시께 그의 장례식장에 대형 근조화환을 보냈다.[4]

3.3.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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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측은 발인식 이전까지 고인의 영정 사진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나 발인식을 한 시간 앞두고 유족은 직접 촬영한 영정 사진 5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직접 촬영한 사진 기사 사진

오전 8시에 예정됐던 발인이 2시간 앞당겨진 오전 6시부터 불교장으로 치러졌다.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부모님은 발인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영정 사진은 절친했던 배우 소지섭이 들었다.[5] 빈소를 떠난 운구차량은 서울 여의도 KBS, MBC, 목동 SBS 등 방송 3사를 경유해 고향인 합정동과 사무실이 있는 청담동, 자택이 있는 논현동을 거쳐 9시께 화장터인 경기도 성남영생원에 도착했다. 예정 시각 보다 빨리 화장터에 도착한 운구행렬은 30여분간 대기한 후, 화장 차례가 되자 운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9시 35분에 화장에 들어갔다. #
파일:박용하 장지.jpg
박용하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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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용하 묘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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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밤 하늘에서만 보이는 반짝이는 별
외로운 밤을 밝게 비쳐주는 홀로 빛나는 별
누구나 언제나 올려다보면 같은 자리에서 반짝이는 수만 개의 별
낮에도 보이진 않지만 똑같이 반짝이고 있는 별처럼,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항상 바라보는 별과 별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하늘에 언제나 함께 있는 것처럼 배우 박용하, 이제는 저 높은 하늘의 별이 돼 늘 우리들 곁에서 반짝거릴거라고 그렇게 약속하며 멀리 멀리 떠나갑니다.
이제는 당신을 볼 순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기억하며, 오래오래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박용하 매니저의 추도사

절차를 마친 후 낮 12시 40분께 장지인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 도착 했으며, 영결식을 거행 했다. 스님의 추도불경이 있은 후 박용하의 소속사 요나엔터테인먼트 이 실장[6]의 추도 낭독식이 진행 되자 영결식장에는 박용하가 생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것으로 알려진《Stars[7] 가 울려 퍼졌다. 추도사가 끝난 뒤 유가족들부터 순서대로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그후 유골함은 납골묘에 안치되었다.

4. 증언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오랜 우울증에 따른 자살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 측근은 "박용하가 20대 때부터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제를 복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박용하 역시 지난 4월 자신의 트위터에 "수면제 복용 경력 14년차이지만 안 좋더라"라고 밝히기도 했다.[8] 힘든일이 있어 평소 내색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사망 2, 3일 전부터 지인들에게 '일도 힘들고 이 생활도 너무 힘들다.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이야기 좀 하자'고 심경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지인은 인터뷰에서 "용하가 '너무 힘들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해 왔다"며 "오늘 새벽 친하게 지내는 후배에게 전화를 해 '죽고 싶다. 너무 힘들다'고 말했는데 이 통화가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한 측근은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중이신데, 아버지가 자신의 병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고 전했으며 또 다른 측근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기 때문에 평소에도 지인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염려를 이따금씩 내비치곤 했다"고 말했다. #

한 측근은 "얼마 전 박용하가 일을 떠나 인간적으로 신뢰관계에 놓였던 사람에게 큰 실망을 했다고 털어 놓은 적이 있다"면서 "당시 박용하는 너무 괴로워하며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 없다'고 통탄했다"고 한다. 또 다른 최측근 역시 "1인 기업 체제로 매니지먼트를 꾸리기 전 일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가족처럼 믿었던 인간관계가 틀어지면서 괴로워했다"고 했다. 박용하와 친분을 나눈 복수의 연예관계자들 역시 투병 중인 아버지에 대한 괴로움, 매니지먼트 운영에 대한 부담, 믿고 의지했던 인간관계의 단절 등으로 힘들어 했을 것이라는 전언을 했다. #

박용하의 한 측근은 경찰의 공식 발표와 달리 평소 우울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고 했다. 공식 석상에서는 밝은 모습이었지만 활동을 하지 않을 때는 침울한 분위기일 때가 많았고, 폭음도 자주 했다고 했다. #

5. 사망 후

6월 19부터 9월 4일까지 석 달간 '박용하 콘서트 투어 2010 ~STARS~'라는 타이틀로 일본 여러 도시를 도는 투어를 진행 중이었으며, 전날 7월 2일 효고현 공연을 위해 출국할 예정이었으나 공연이 취소되었고, 6월 26일 가와구치 공연이 마지막 공연이 됐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 4시간이 지난 오전 9시 30분만 해도 일본 요미우리 신문 온라인판 메인 화면에는 8월 31일과 9월 3, 4일 일본서 열리는 박용하의 콘서트 접수 배너가 확인됐는데, 하지만 약 20분 후 배너는 삭제됐다.

일본 TBS는 6월 30일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보도 프로그램 《히루오비》를 통해 박용하 사망 관련 소식을 특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박용하의 장례식장에는 모닝구 무스메[9] 등 일본 연예인들, 일본 기획사에서 보낸 화환 수십 개가 빼곡히 놓였다.
파일:박용하 삼우제.jpg
2010년 7월 4일 삼우제
7월 4일 11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 메모리얼파크에서 삼우제가 진행됐으며, 발인식에 참석하지 못하셨던 부모님도 참석 하셨다.

2010년 7월 9일 인기 그룹 SMAP의 리더 나카이 마사히로가 진행한 TBS 《킨스마》에서는 1시간 동안 박용하 추모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10]

7월 13일 경기도 파주시 약천사에서 이제가 치러졌다.

7월 18일 오전 10시부턴 도쿄 국제포럼에서 '고 박용하 추모 헌화식'이 열려 약 1만 4200명의 추모객들이 고인을 추모했다.

7월 29일 일본의 한류 전문지 '핫 칠리 페이퍼(Hot Chili Paper)'에서 박용하를 추모하는 특별판 '용하 포에버'를 발간했다.

2010년 8월 14일 박용하의 생일(8월 12일)을 맞아 대만 그랜드포모사리전트 호텔(Grand Formosa Regent Hotel)에서 《永遠, 朴容夏 Forever》라는 타이틀로 해외 팬들이 추모 행사를 가졌다. 기사

2010년 8월 17일 파주시 약천사에서 사십구재를 지냈다.

8월 말부터 드라마 《러브송》을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며, 일본, 중국 등 로케이션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출연이 불발됐다. #

2010년 9월 29일 SS501김형준, 이루, , 박효신, FT아일랜드이재진, 송승현[11], 배우 박시연, 재림이 청담동 녹음실에서 아프리카 차드에 설립된 요나스쿨 교가를 녹음을 했다. 박용하와 일본 앨범 작업을 함께 했던 황세준 작곡가가 작곡 및 제작 과정을 총괄했다.

10월 7일 약천사와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서 100일재를 지냈다.

2010년 10월 22일 밤, 위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그의 아버지도 향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들과 같은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

2011년 2월 23일 드라마 제작사 측은 '러브송'의 기획을 접기로 결정했으며, 공식사이트에서도 관련 정보를 모두 삭제했다.

2013년 유가족은 박용하가 아프리카 차드에 설립한 요나스쿨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봉사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박용하 One Love 자선사업회'를 설립하였다.

2021년 6월 27일 약천사에서 천도재를 지냈다.

6. 전 매니저의 배신

6.1. 전 매니저의 만행

사망 당일 A씨는 장례식장에서부터 대표를 바꾸자고 했다. A씨가 장례식 치르는 동안 누나에게 꺼낸 얘기 중 하나가 대표 바꾸자는 얘기였다. 회사 상황을 얘기하면서 큰 일 날것처럼 얘기했다. 당시 회사 대표 명의가 어머니 명의로 돼 있었는데 아버지 명의로 바꾸든지 하자고 했다가[12] 나중에는 자기 명의로 하자고 했다. 경황이 없던 누나는 지금 회사명의 바꾸는 게 뭐가 중요하냐 우선 용하 잘 보내고 차차 상의하자고 했다. 이후 B씨를 데리고 와서 오빠의 컴퓨터에 오빠가 자신의 장지를 결정한 곳이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그날 밤 누나가 12시에 논현동에 갔는데 이때 B씨가 고인의 물건, 컴퓨터, 가방, 핸드폰 이런 걸 다 가져갔다. 경황이 없던 누나는 필요하다고 하니 가져가라고 했다.
7월 2일 늦은 밤에 누나에게 전화로, '박용하의 집 문 좀 열어 달라'고 했다. 원래 집 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는데 사망 당일 어머니가 사위에게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해서 못들어가게 된 것이다. 누나가 왜 그러냐고 하니까 자기가 정리도 하고 청소도 해야 한다고 했다. 동생 물건은 어머니가 처음 만지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대충 정리했다고 말한 후 열어주지 않았다.

집요하게도 다음날 새벽 5시에 전화를 해 집 앞이니 비밀번호를 알려달고 했다. 누나는 아침 일찍 사무실에서 A씨를 만났다. A씨는 회사 얘기를 하면서 회사 통장이라며 2개를 보여줬다. 나중에 확인하니 회사 통장은 훨씬 많았다.[13]

후에 법정에서 일본 팬이자 A씨와 친했던 사람이 서면으로 증언을 제출했는데 당시 소식을 듣고 7월 1일에 급하게 입국 후 장례식장에 와서 A씨에게 가족들이 없는 게 의아해 물었다고 했다. A씨는 어머니는 쇼핑을 갔고 누나와 매형은 밥 먹으러 가서 자리에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누나 내외는 새벽에 일산과 분당에 장지를 보러 다니느라고 자리를 비웠고, 부모님은 입원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 일본 팬은 그 얘기를 듣고 가족들이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A씨가 일본 활동을 하며 재력이 많은 팬, 사회적 지위가 있는 팬들을 모아 따로 관리했다는 것도 증언 해줬다. 일본 팬에게 개인적인 일에도 많은 도움을 받아온 것이다.

6.2. 전 매니저의 횡령

박용하의 팬클럽 회장 출신 및 고인의 사망 후 요나 엔터테인먼트에서 직원으로 근무해 왔던 전 매니저는 박용하가 사망한 후 일주일 만인 7월 7일 그의 일본 계좌에서 2억 4천만원을 빼내가려고 시도했으나 사망 소식을 알고 있던 은행 직원이 예금 지급을 거절하는 바람에 돈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날 6000여만원(400만엔) 인출했다. 400만엔은 A씨 명의의 통장에 있는 돈이었는데 실제로는 회사자금으로 회사에서 관리하던 돈이다. 유가족이 한 달 후에 태국에서 돌아온 A씨를 만나 그 얘기를 하니 용하가 세상 떠나기 전 '그거 너 가지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가져갔다고 했다. 8월 중하순께 자기의 돈인데 준다고 하면서 돌려줬다. A씨가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았던 회사 법인도장, 법인인감, 통장 등을 태국에서 돌아온 후에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2010년 7월 14일 회사 소유의 720만원 상당의 박용하 사진집 40장, 2,600만원 상당의 음반, 사무실 비품, 카메라, 사진 등의 유품을 훔쳐간 사실까지 드러나 유가족에게 고발된 사실이 알렸다.

A씨는 오후 3~4시에 서울 청담동 사무실에 와서 난리를 치고 나간 후 오후 7시쯤에 다시 들어와 한 5시간에 걸쳐 A씨, B씨, C씨, D씨 등 4명이 사무실 집기와 회사 서류 등을 가져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인데 수십 차례에 걸쳐 5층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물건을 나르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박스로 30박스가 넘는다. 이때 고인의 CD나 화보집, 트로피 같은 유품들까지 싹 가져갔고 그뿐만 아니라 회사서류를 파쇄해서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2개에 버렸다. A씨는 범행 이후 자기 밑에서 매니저 일을 하던 B씨와 함께 절도한 회사의 자료들을 가지고 한 달 동안 태국과 사이판으로 잠적했다.

주변인들에게 자기가 저지른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인지 사실이 아닌 얘기를 하고 다녔으며, 심지어 가족들 관련 이야기도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인양 떠들고 다녔다.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고 자기는 매니저의 권리로서 했는데 가족들이 자기가 횡령, 절도를 했다고 하고 다니면서 자기를 괴롭힌다는 등 말도 안 되는 많은 얘기를 하고 다녔다.[14] #

2011년 7월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 신인개발팀 실장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2013년 5월 기사에 따르면 아이돌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2011년 11월 검찰에 진정서를 냈고, 이후 A씨에 대한 검찰의 조사와 기소, 재판이 진행됐다.

2013년 2월 19일 예금청구서를 위조해 예금을 인출하려 한 혐의(사문서위조ㆍ사기미수 등) 등으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2013년 10월 16일 검찰은 이 씨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구형했다. 이날 재판에서 이 씨는 절도 혐의에 대해 "우리 회사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절도한 게 아니다"고 주장 했다. 또한 박용하의 예금을 찾으려 한 것에 대해 "사기를 치려고 했으면 당시 박용하의 일본 회사의 은행전표가 들어 있는 봉투를 놓고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항변했으며, 나는 그 돈을 인출할 권리가 있었으며, 박용하의 유품은 생전의 정이 있어서 그리운 마음에 가져간 것이라고 말하며 범행를 부인했다. 최후변론에서는 "나를 믿어주고 있는 현재 회사와 아티스트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

11월 15일, 징역 8개월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되었다.[15] 집행유예가 아닌 실형이 선고됐는데, 인출하려는 시도만 한 게 아니라, 인출을 해서 쓰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6][17] 11월 18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2014년 1월, 전 매니저 이 씨가 연예계에서 퇴출됐다.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는 상벌조정윤리위원회에서 박용하 전 매니저에 대한 퇴출 결정을 의결했다. 사실상 연예 매니지먼트계에서 퇴출당한 셈이다. 연매협 관계자는 “회원사는 물론, ‘매니저등록제’에 따라 이씨는 향후 매니저 활동이 힘들 것”이라고 밝혔다. 관계자는 “이씨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업계 종사자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이 진행 중인 당시에도 모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매니저로 일했다”며 “이씨는 징역형 후에도 일본 등지에서 연예 매니저로 활동할 가능성이 크다. 부적격 연예매니저인 이씨에 대한 정보를 일본 엔터테인먼트 관계사들에게 전달하고, 국내의 모든 엔터테인먼트 단체에도 알려 업계의 건실화를 도모할 것”이라고 전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9부(강을환 재판장)는 2014년 2월 13일 오전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법정구속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피고의 범행이 미수에 그치고 훔친 물품을 모두 돌려준 점, 이미 충분한 사회적 비난을 받아 관련 직업을 유지하기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해 실형은 과하다고 판단했다."고 집행유예 판결 이유를 밝혔다. #

이와 관련하여 유족들이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인터뷰를 실시했다. 이 인터뷰에 의하면 훔친 물품을 돌려준 게 아니라 유족들이 직접 가서 찾아왔다며, "살 날 많은 A씨, 반성하고 살았으면"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18]

7. 여담

비보를 접한 측근들은 하나같이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했으며, 더구나 지인들 역시 평소 박용하의 행실로 미루어 자살을 택할 리 없다는 진술을 일관적으로 했다.
2009년 영화 ‘작전’ 개봉을 앞두고 노컷뉴스를 만나 “지난 10년간 불면증을 앓았었다”고 털어놨다. ‘작전’ 촬영 중반부터 좀 체 숙면을 취하지 못해 한약을 복용해왔던 것을 밝혔으며 예민한 성격이라서 신경 쓸 일이 있으면 잠을 못 자고, 그 문제가 해결돼야 잠이 온다고 말했다. 불면증에 걸린 이유에 대해 "대학에서 연극할 때는 워낙 밤샘 작업을 많이 하니까 습관적으로 잠을 안 잤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다가 방송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이 생기니까 잠이 안 오더라. 그러다 보니 밤이 오면 잘 생각은 않고 딴 짓을 한다. 밤이 의외로 길지 않다”고 덧붙였다. 기사
6월 30일, 세상을 뜨기 불과 몇시간 전 류시원의 기획사인 알스컴퍼니의 현 모 이사를 만나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은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지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연기에 대한 의지를 보이며 기획사도 잘 꾸리겠다고 말했으며[19] 또 "사람들 마음도 이제 알겠다"며 "동갑내기 연예인 친구들이 고민을 털어놓으면 이제 나는 얘기를 들어주게만 된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날 위암 말기로 투병 중인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털어놨다. 아버지가 가시는 날까지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위중하다는 사실을 안 알렸다고 했으며, 고통 받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고 했다. 아버지의 투병이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걸 보면 '내가 나쁜 놈인가'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2010년 7월 13일 파주시 약천사에서 치러진 이제에 참석한 고모부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의 발병 사실을 안 뒤로 많이 괴로워했다고 한다. 지난 4월경 수술이 잘 안 되자 더욱 상심이 컸으며, 두 달 가까이 집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 두문불출했을 정도였다.
박용하 가족과 20년 가까이 친하게 지냈다는 약천사 신도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아프신 것에 대해 죄책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2009년 하와이에서 공연을 크게 열었는데, 그 전에 아버지가 위암이란 걸 알았지만 공연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바람에 병원에 늦게 가서 그렇게(말기) 됐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프신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

파일:박용하 트위터.jpg

해당 글귀는 박용하가 생전 사용하던 트위터 계정의 배경 화면로 쓰였었다. 그 당시 네티즌은 이것이 박용하의 죽음 직전 심경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는 반응을 했었다. 그러나 박용하의 트위터 마지막 글 내용은 월드컵 대표팀을 응원하는 내용 뿐이어서, 트위터 배경만으로 이를 예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었다.
파일:박용하 묘비명.jpg

사망하기 21일 전인 2010년 6월 9일에 발매된 일본 정규 5집 수록곡《Stars》의 가사가 묘비명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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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망 및 실종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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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 사람은 영화 《작전》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친해졌다.[2] 박용하의 일본 음반 《ONCE IN A SUMMER》의 자켓 사진이다.[3] 평소 박용하는 어머니가 주무실 때 귀가해 어머니가 이른 아침마다 방문을 열어보는 습관이 있었다.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문을 열었다고 한다.[4] 근조화환에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쓰여 있으며 "일본국 원내각 총리대신 아베신조·아키에"라고 쓰여 있다.[5] 사흘 내내 빈소를 지키며 상주를 자처 했으며, 7월 1일 빈소를 이동할 때도 사진 옮기는 것을 거들었다.[6] 박용하 사후에 배신한 매니저이다.[7] 6월 9일에 발매된 일본 정규 5집에 수록된 곡이다. 훗날 이 노래의 가사 일부분이 묘비명으로 쓰였다.[8] 경찰 측 또한 “박용하가 수면제를 복용해왔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사건 당일 복용했는지 여부는 사망 원인과 관계없어 확인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9] 일본 활동 당시 모무스랑 같은 소속사였다.[10] 나카이는 박용하와 생전에 여러 번 MC와 게스트로 쇼 프로를 여러 차례 같이 진행하기도 했고, 특히 TBS에서는 우타방을 특집으로 1시간 가까이 진행했었다.[11] 2019년 FT아일랜드를 탈퇴했다.[12] 당시 아버지는 병중이라 호스피스병동에 계셨다.[13] 누나가 인터뷰에서 이 얘기를 꺼내면서 '회사에 통장 2개만 있다는 게 말이 되나'라고 생각했다고 했다.[14] 유가족이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15] 증언이 계속 바뀌는 등 신빙성이 떨어지고 도주의 우려가 있어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했다고 한다. 다만 과거 범죄사실이 없다는 점을 참작해 형량을 낮췄다고 했다.[16] 기사[17] 11월 법정에서 '박용하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회사라며 그 권리로 (유족)가족을 지키려 한 것이 이런 결과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18] 범행 이후 태국에서 A씨와 B씨가 퇴직금 달라고 연락이 왔다. 계좌이체 해달라는 것을 얼굴 보고 주겠다고 받으러 오라고 했다. 며칠 후 B씨가 본인의 퇴직금을 달라고 찾아왔고 퇴직금을 지급한 후 가져간 회사의 자료를 내놓으라고 하자 회사 자료가 A씨의 집에 있다고 알려줬다. B씨와 함께 A씨의 집에 가니 그 집에 가니 같이 절도를 한 D씨가 그 집에 있었고 사라진 고인의 물건이 거기에 다 있었다. 변호사에게 물어보니 우리 물건이니 자력구제로 가져올 수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고 한다.[19] "세상을 살면서 여러 일을 겪는데, 나는 한눈 안 팔고 연기를 열심히 해 오랜 시간 연기자로 살고 싶다"며 "내가 운영중인 기획사도 조금 힘든 일이 있었지만 혼자 잘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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