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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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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435f4e><tablebgcolor=#435f4e> 파일:김광석 틀 전용5.svg||김광석
金光石 | Kim Kwang-seok ||

[ 정규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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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2집.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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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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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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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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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6. 25.
[ 커버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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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다시부르기 1.jpg
||<width=1000>
파일:김광석 다시부르기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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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3. 2.

1995. 3. 1.
[ 사후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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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인생이야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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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래이야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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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323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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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_다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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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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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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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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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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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관련 음모론 다큐멘터리
김광석의 주요 선정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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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김광석
金光石 | Kim Kwang-seok
[1]
파일:김광석1131.jpg
<colbgcolor=#435f4e> 출생 1964년 1월 22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봉동[2][봉덕동] 번개전업사
(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사망 1996년 1월 6일[4] (향년 31세)[5]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6]
불완전 의사[7]
거주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7길 39 원음빌딩[8]
[ 이전 거주지 ]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봉동[봉덕동](1964 ~ 1965)
경상북도 대구시 동구 범어동(1966~1968)[10]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1969 ~ 1972)
경상북도 대구시 동구 범어동 268(1973 ~ 1974)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창신5길 47[11](1974 ~ 1990)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동안로 283 뉴타운삼호아파트(1990 ~ 1994)
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7길 39 원음빌딩[12](1994 ~ 1996)
장지 경상북도 봉화군 청량산[13]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싱어송라이터
본관 김해 김씨[14]
데뷔 1984년 5월 31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데뷔로부터 D[dday(1984-05-31)]일, [age(1984-05-31)]주년)
서명
파일:김광석 서명.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대봉문화마을협의회 마크.jp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더 보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435f4e><colcolor=#fff> 본적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범어동 268
(現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로18길 22 힐스테이트 범어)[15]
경기도 안양시 비산동 354-10
(現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동안로 283 평촌자이 퍼스니티)[16][사망진단서]
신체 164cm[18], 58kg
학력 서울창신국민학교 (전학)
대구동덕국민학교 (전학)[19]
서울창신국민학교 (졸업)
경희중학교 (졸업)
대광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경상학부 (경영학 82 / 학사)
가족 아버지 김수영(1928년 ~ 2004년 10월 8일)[20]
어머니 이달지(1930년 9월 23일 ~ 2016년 4월 1일)[21]
큰누나 김광나
작은누나 김광득
큰형 김광동(1951년 ~ 1980년 10월 3일)[22]
둘째형 김광복(1959년 ~ )[23]
아내 서해순(1965년 9월 14일 ~ )[24]
외동딸 김서연(1991년 5월 30일 ~ 2007년 12월 23일 / 향년 16세)[25]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이병 소집해제 (방위병)[26]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27]무종교[28] (법명: 원음)[29]
퍼스널 컬러
수박색 (#435f4e)

고동색 (#996633)
별명 가객(歌客), 반쪽, 작은 돌, 또해[30], 아저씨(형)[31]
}}}}}}}}} ||

1. 개요2. 생애
2.1. 학창 시절부터 음악 활동 초반까지 (1964 - 1988)2.2. 솔로 활동 (1989 - 1996)2.3. 사망
2.3.1. 추모글
3. 음악성
3.1. 가창력3.2. 편곡3.3. 성실성3.4. 음악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4. 김광석이 떠난 뒤, 김광석 다시 보기
4.1. 도서4.2. 뮤지컬
4.2.1. 그날들4.2.2. 바람이 불어오는 곳4.2.3.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4.2.4. 기타
4.3. 추모 공간
5. 음반 목록
5.1. 정규음반에 수록되지 않은 노래들5.2. 사후 출시된 앨범
6. 어록
6.1. 노트 및 메모장
6.1.1. 미완성곡
6.2. 방송 및 인터뷰6.3. 콘서트6.4. 노래에 대한 소개6.5. 기타
7. 방송
7.1. 라디오
8. 사건사고
8.1. 마광수와의 라디오 진행
9. 사용 악기10. 가족11. 성격12. 여담13.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김광석, 1995년 9월 『월간 샘터』 인터뷰 中

대한민국가수, 싱어송라이터.

흔히 알려져 있는 별명은 '가객(歌客)'. 진정성 있고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많은 명곡을 남긴 싱어송라이터로, 대한민국에 포크송 붐을 일으켰던 전설적인 가수이다.

사랑으로 아파할 때는 ‘사랑했지만‘, 입대를 앞두었을 때는 ‘이등병의 편지‘, 나이가 들어가며 허무함을 느낄 때는 ‘서른 즈음에‘, 좌절을 극복할 때는 ‘일어나‘, 정의를 외칠 때는 ‘광야에서’, 인생의 황혼기에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의 곡으로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래해 한국인들의 인생과 감성을 감미롭게 표현한 가수다.[32]

2. 생애

김광석의 미공개 연습 영상[33]
파일:김광석_역대 프로필 사진.jpg
파일:김광석_딸과.jpg
딸 김서연 양과 함께 있는 사진
[34]
파일:attachment/김광석/img_20130713_16.jpg
왼쪽부터
안치환김광석배훈
파일:551039944_57FzhU1S_img_20160330171827_686f1cbd.jpg
카페 '고리'를 운영하고 있는 김광석 (1987년 5월 25일)

2.1. 학창 시절부터 음악 활동 초반까지 (1964 - 1988)

김광석 본인이 '렛츠' 1995년 12월호에 기고한 글과, 잡지 '샘터'에서 김광석과 인터뷰한 글, 책 '김광석 평전'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파일:김광석_대광고 학생증.gif
김광석의 대광고등학교 학생증[35]

1964년 1월 22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봉동[봉덕동]에서 김광석이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김수영씨는 대구사범대학 출신의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이 되는 교원노조를 결성하는 데 동참하여 대구지부장과 교원노조 회지의 집필자로 활동하는 등 교원노조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교단에서 추방당했고, 집안사람이 운영하는 전당포에서 일하다가[37] 시장에 전업사를 차려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업사는 장사가 잘 되어가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서울로 가야 더 사업이 탄탄해질 것이라 믿고 김광석이 5살이 되던 해 장충단공원 인근인 서울 중구 장충동으로 이사를 갔고[38],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72년에 옆 동네인 종로구 창신동으로 옮겨간다.[39][40]

경희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특별활동으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41]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혔고, 1978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성가대와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이후 김광석을 눈여겨본 교사가 음대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고, 가족들도 반대를 하지 않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에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결국 관심분야와는 거리가 먼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간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오히려 "안기부, 보안사 다니는(= 자주 불려가는) 사람들은 가끔 사람 구실을 못 해서 문제다"라며 정부의 공포정치를 합리화하는 모습도 보였을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가 군사정권의 피해자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실상은 피해를 본 것도 없고 특유의 강한 생활력으로 생계를 잘 꾸려나갔고 훗날 김광석이 가수 생활 초기 시절 김광석의 불안정한 수입을 메우기 위해 카페까지 차려줄 정도였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기득권 세력들이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부린 횡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고교 때 진실이라고 배웠던 것들 가운데 진실이 아닌 것도 많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의 모습을 하나 둘 깨달으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의욕을 잃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데모 대열에 합류해 구호도 외쳐봤지만, 운동권은 자신이 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삶의 목적을 잃은 채 방황하던 어느 날,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친구에게 '젊은 예수'라는 노래책[42]을 받게 되고, 그 노래책에 있는 노래들을 살피다 그가 생각하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또다른 현실을 다룬 노래를 찾게 된다.[43] 그 노래를 보고 다른 노래들도 찾아보며 본인 왈 '라디오에서 나오던 사랑 노래들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부르는 노래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그는 대학연합 노래패 서클인 '연합메아리'에 가입해 첫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같은 해인 1982년 9월, 그는 이곳저곳 레스토랑을 찾아 다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동에 있는 '코스모스 코러스'라는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노래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도 신촌이대 앞 등지를 떠돌며 밤무대에 섰다. 라이브 카페의 아르바이트와 대학 노래패 활동을 이어가던 1983년 2학기, 기어코 명지대학교로부터 학사경고를 받게 됐고 가족들의 반대는 더욱 심해져 갔다. 바이올린과 기타를 사주며 그의 음악 활동을 가장 많이 지원해준 형 김광복은 그에게 "왜 그러고 사냐"며 질책하기도 했을 정도였다.[44] 학사경고로 대학 생활에 위기가 닥치자 군 입대를 결심하고 휴학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4년 여름, 대학 노래패 '연합메아리'에 초기 멤버로 참가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김민기와 함께 그의 동요 뮤지컬 개똥벌레 이야기 음반 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민기의 작품[45]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탈락했고, 김민기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새벽'이라는 노래패와 음반의 기획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음반은 훗날 노찾사 1집이 된다.

1985년 1월 김광석은 6개월 단기 사병으로 군 복무를 했고, 1986년에는 제대를 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무교동과 대학교는 이전의 모습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라이브 무대를 주무대로 삼던 선배들은 방송으로, 친구들은 군 복무 중이거나 각자의 길을 찾아서 떠난 상태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부모님은 가수라는 직업을 '딴따라'라고 여기며[46] 좀 더 평범한 직업을 가지길 바랬다. 그러나 형 김광복은 달랐다. 동생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김광석이 최소한의 생활비라도 마련하라는 의미로 고려대학교 앞에 '고리'라는 카페를 차려주었다.[47] 그렇게 그는 음악 활동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복학과 함께 노래패 '새벽'의 활동을 재개한 김광석은 1987년 10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첫 공연에서 '녹두꽃'[48]'이 산하에'를 불러 매우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집회 현장에서, 그리고 선거 유세[49]에서 단골 가수로 불러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민중가수로서의 활동은 노찾사의 두 번째 공연으로 마무리했다.

한편, 김광석과 신촌 등지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는 6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함께 그때까지 만들어놓았던 노래를 녹음해보자는 친구 유준열의 제안으로 카세트테이프 음반을 만들어 친구들끼리 기념품 삼아서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테이프를 듣고 김광석을 포함한 7명을 불러 진짜 음반을 내자고 했다. 그는 다름아닌 산울림의 리더인 김창완. '김창완과 꾸러기'에서 같이 활동하던 멤버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음반은 제작에 들어갔고, 테이프에 있던 30개의 곡 중 11개가 추려져 마침내 '동물원'이라는 음반이 발매되었다. 친구들과 재미로 녹음하던 음악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이대생만 공략해도 괜찮겠다', '이런 음반을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이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음반이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매우 잘 팔렸다. 그리고 동물원의 성공은 김광석이 노찾사에서 나와 보다 대중적인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발판이 되었다. 이후 김광석은 음악에 대한 생각 차이로[50], 동물원 2집까지만 활동하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김광석 1을 발매하게 된다.

2.2. 솔로 활동 (1989 - 1996)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
- 김광석, 「나의 노래」중
파일:김광석_89년.png
음악 프로그램 '쇼특급'에 출연한 김광석 (1988년 12월 4일)[51]

1989년 동물원을 나온 김광석은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솔로 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음악 활동을 하던 중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 서해순과 결혼하게 된다.

1991년에 발표한 2집한동준이 제공한 '사랑했지만'과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이 사랑을 받으면서 김광석을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다.

1991년 10월 14일부터 1995년까지는 불교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의 DJ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1992년 김광석은 '나의 노래'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이 담긴 3집을 발매하면서 민중가수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민중가수로의 입지가 다시 재조명받은 것이 3집 이후이다.

1993년 7월,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취지에서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한 달간의 장기 공연을 열고 '다시 부르기 1'을 발표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다시 부르기 1집은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4년 '일어나' 등 그를 대표하는 여러 곡이 실린 4집의 성공으로, 김광석은 한국의 소시민을 대표하는 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 김광석이 30세가 된 해이므로, '서른 즈음에' 를 발매했다.

19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양병집[52]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를 하나의 앨범으로 정리한 '다시 부르기 2'를 발표하면서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 명반이었다.
파일:김광석_1000회공연.jpg
1000회 기념 공연 포스터[53]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로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1995년 8월 11일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54]이라는 금자탑을 이뤘고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 60대 노부부들까지 몰려드는 김광석의 공연은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1월 18일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11월 23일부터 11월 24일까지는 뉴욕 맨해튼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박상원의 '겨울나기'에 출연한 김광석

1996년 1월 5일 박상원이 진행하던 HBS '겨울나기'에 출연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을 부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이 노래를 부른 후, 그의 마지막 7시간 30분[55]은 사망 문서에서 후술한다.

2.3. 사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광석 사망 사건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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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광석 사망 사건/의문사 음모론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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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힘들다.
바쁘고 열심히 사는 것이 돈을 버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날짜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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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공연이 중반을 넘어섰고, 다들 축하해주고 열심이었다고,
특종이라고 악의 없는 칭찬들이다.

나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허전함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를 치열하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나.
후회도, 보람도 아닌 그저 살아 있음에 움직인
그 움직임이 불쌍한가.

무료하다.
즐겁지 않은 이유를 모른 채, 나는 즐겁지 않다.
또 이러다 가라앉는 것인가.
무섭구나.

몇 년 전 내 틀을 넘어선 내 외로움을 부정하지 않았는가.
나는 늘 도망가고 싶어 하는, 어쩔 수 없는 쫓기는 자로 태어났는가.
무엇인가?
날 이토록 흔들고 있는 것은.
내 심연의 욕심의 근원을 모르는 것인가.
무얼 위해 보고 먹고 느낀 건가.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내 허무의 기저에서 끊임없이 날 잡아내리는 것은 누구인가.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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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닥치는 대로 일을 벌이고 닥치는 대로 처리하며 흐르다 보니 내 흐름 속의 급류는 좀 긴 듯싶다.
1991년 7월 이후로 적어도 3개월에 한 번씩은 개인 공연이었고, 축제다 행사다 방송이다 눈코 뜰 새 없었다.
공연을 마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두 시간여의 생방송을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곤 했다.
내가 어디쯤을 흐르고 있는지 도저히 강변을, 흐름의 주변을 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렀다.

3월부터의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내 마음의 갈등은 바로 이런 생활 때문이었다.
생활의 규모와 규칙을 정해야 할 때다.
6월의 지방 공연들과 7월 공연을 끝으로 쉴 것이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천천히 흐를 것이다.
1995년 6월 3일 및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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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wkf tkfwl?
1995/12/31 02:03 | 김광석 (김광석)

민석아 나다 광석이 널 보면 나이든 내가 바보 같구나 맑아서 니가 좋다

오늘 송년회라는 면목으로 친구들하고 술 한잔 했는대 왜 니생각이나던지
민석아 잘 지내 도데체 잘 사는것이 뭔지 모르겠다만 빌께
민석아 잘 살아....
1995년 12월 31일, 사망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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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이제 음악에 눈이 뜨이는 것 같다."
1996년 1월 5일, 사망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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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부모님 놔두고, 친구들 다 놔두고, 그냥 실수예요. 그냥 술먹고 장난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56]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 1996년 1월 6일 이상호와의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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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아빠
서우가 벌써 4학년이 됐어요
키도 많이 크고 엄마말도 잘 들어요
아빠 생각 많이나요
그리고 사람들이 아빠노래 좋아하면
저두 너무 기뻐요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보고싶어요 아빠
김광석의 딸 김서우 (1991 ~ 20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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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6일, 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김광석은 그곳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망 전 날까지도 이후의 일정들을 계획해두고 있었고, 갑자기 사망한 것에 대해 많은 추측이 돌아다녔다. 이는 이상호 기자가 동명의 영화를 만들며 사망 관련 음모론의 확산으로 이어지게 된다.

2.3.1. 추모글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우.
오경필 중사(공동경비구역 JSA송강호의 배역)
Q: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
A: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네이버 지식인 답변에서 나온 명언. 김광석과 그의 음악에 대한 정의.
아주 오랜 후에 이 시절의 모든 음악이 다 잊히는 날이 올지라도 김광석의 노래는 기억될 것이다.
90년대를 빛낸 명반 50
김광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우리는 그가 있어서 80년대를 버텨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찬욱
평생을 도닦은 스님들도 이 정도 사리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다. 그가 얼마나 음악세계에 최선을 다했는지, 청정한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법정
김광석의 노래는 인생의 길목길목 우리가 지나가는 문 옆에 있습니다.
박학기
어쩌면 그렇게 쉽게 이 세상 떠나갔나요?
대단한 순정이고 열정이네요. 삶을, 노래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랬을까요?
장선우[58]
속없이 웃고 있는 광석이가 보고 싶다.
남들에게 욕을 먹었으면 좀 더 오래 살았을 텐데. 해맑은 네 목소리라도 실컷 들을 수 있으니 이세상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배철수
사람들은 너의 짧고 뜨거웠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래서 나의 친구가 잊혀지지 않는 것이 고맙기도하지만, 나는 네가 기억되기보다는 내 옆에 있었으면 한단다. 나를 이해해주고 좋아해 주었던 친구는 흔치 않거든. 나 역시 너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었었니?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아 괴롭단다. 네가 우리와 함께 나이 들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너에 대해 시큰둥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예전처럼 웃고 떠들고 취하고 껴안을 수 있으련만... 또 똑같은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할 때면 가끔 너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한 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단다.
김창기
음악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하는 힘이 있다. 암울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깊고 우수 어린 목소리로 젊은 세대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작은 거인 김광석을 그리운 마음으로 추억하며 학창 시절을 회상한다.
정동영
평소 김광석씨의 “서른 즈음에”라는 곡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드라마 <고백> 촬영 시에 직접 부르기도 했구요. 그 곡은 서른에 들어도 또 마흔에 들어도 좋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라디오 DJ시절에 김광석씨도 게스트로 여러 번 나오셨었는데 가수 같지 않은 소탈한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다만, 김광석이란 친구가 너무 일찍 인생을 많이 알았다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송승환
불행하게도 나는 너와 나이 차이가 많아서 깊은 교우를 못 나눴다. 내가 너무 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늘 알고 있었다. 니가 나의 동신교회 새까만 후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윤형주보다 너는 몇 년 후배였다. 나는 윤형주나 너나 같은 교회 성가대 출신이라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너는 나쁜 놈이다. 늙은 선배를 놔두고... 뭐가 급해서 먼저 갔는지... 매우 불쾌하다. 거기서 잘 있길 바란다. 곧 만날 거다. 이만 총총...
조영남
그 분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순수해지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 분, 꽤나 순수했던 사람이었나 봐요. 그런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들을 통해 좋은 에너지, 좋은 영감들을 껴안게 될 것 같군요.
이혜영
김광석은 이 시대가 아끼는 뮤지션이다. 한 때 아꼈던 뮤지션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아끼고 있다는 사실에 밑줄을 그어야 할 것이다. 그는 남은 인연을 다 잇지 못하고 일찍 먼 길을 떠났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은 김광석이란 이름은 그 어떤 추억보다도 더 진하게 박혀 있게 될 것이다.
이상은
독일로 유학간 친구가 잠시 귀국했을 때 강원도로 가는 국도변의 밤 자동차 안에서 처음 들었던 그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일순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여행길에 그의 노래는 먼 불빛이 되어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단 한번만 들으면 금방 다른 목소리들과 구분이 된다. 자갈이 깔린 길을 몇 년쯤 홀로 걸어온 사람이 내는 소리 같으므로. 어느 날 열심히 일을 하다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괜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혼자 있을 때면 가끔 그의 노래 한 소절이 입안에서 맴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에... 그랬음에.
신경숙
요즘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김광석 버전이다. 나는 저녁 공기 속에서 쓸쓸하게 새어 나오는 <거리에서>를 사랑하고, 세월 때문에 마음이 울컥해질 때 문득 떠오르는 <서른 즈음에>를 사랑하고, 그리고 <이등병의 편지>를, <부치지 않은 편지>를 지독히도 사랑한다. 그의 노래에 감염된 나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안도현
나는 삶의 여러 요건 가운데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에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그 사람의 사랑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이유로 김광석을 좋아합니다. 김광석의 말하는 속도, 목소리의 색깔, 그리고 그가 노래할 때의 가라앉은 음색을 떠올리면서 이 글을 적은 마음 안에 가을이 지나 벌써 겨울이 가득합니다.
윤석화
내가 만났던 김광석은 늘 소탈(疏脫)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또 통기타 하나에 하모니카 하나로 온 몸으로 노래 부르던 그를 기억한다. 80년대와 90년대 한국의 모던 포크음악을 대표했던 김광석. 안타깝게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남아 그리운 마음으로 애창된다.
김수철
첫인상, 진짜 후줄근했지.
차림새, 완전 변두리.
목소리, 청승맞다고 생각했지.
이제 내게 기억되는 건 그의 얼굴 가득 주름 지으며 웃던 웃음 뿐.
나 이제 광석이 형 노래 안 들어. 도저히 CD를 손에 들 수가 없어서.
나 형 미워해.
살아있었으면, '나 형 졸라 맘에 안 들어' 라고 꼭 얘기하고 싶은데,
그럼 또 그 주름 쫙 만들면서 웃어줄 텐데.
신해철
광석이형....
형이 지금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의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형이 없기에 저희가 대신 부르렵니다.
형한테 신세 많이 져서 나중에 갚고 싶었는데...
윤도현[59]
그래도 광석이의 미덕이 하나 있다. 젊은애들이 딴따라를 하게 되면 대개 싱어송라이터를 하고 싶어 한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이거지. 근데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곡만 줄기차게 부르려고 해. 광석이는 지가 만든 곡이 여럿 있지만 다른 좋은 노래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부른 거야. 그러기 쉽지 않은데 큰 미덕이지.
김민기
김광석은 무척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다. 그의 노래를 다시 한번 들어보라. 그가 얼마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는지... 김광석은 마치 그의 인생처럼이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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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슬픈 목소리의 가객 김광석

김광석과 필자와의 인연은 91년 필자가 연출하던 FM심야프로에 그를 디스크 자키로 기용하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약 4년간 같이 방송일을 해왔고 타계하기전까지 PD와 DJ라는 공식적 관계를 넘어 호형호제하는 개인적 친분을 유지해 왔다.따라서 이 글에서 그의 음악에 관한 견해 이외에도 91년에서 95년까지 가까이서 본 인간 김광석에 대한 필자의 관점을 피력하는 것도 이제 고인이 된 김광석을 그의 음악과 더불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슈퍼맨, 김광석

김광석하면 가장 떠오르는 것이 그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이다. 그는 근래에 로드매니저를 잠시 고용한적이 있으나, 그의 활동기간을 통틀어 매니저 없이 거의 혼자서 모든 활동을 꾸려왔다. 그의 활동 영역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콘서트, 그리고 봄, 가을로 붐비게 되는 각 대학 축제등의 초대가수, 또 음반 녹음, 방송 프로그램의 DJ, 기타 다른 방송 활동이나 행사 및 공연 등에 초대되는 일들이었다. 이런 활동을 섭외나 홍보 그리고 스케줄 관리를 전담하는 매니저 없이 혼자서 처리한다는 것은 실로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김광석은 홀로 그일을 다해냈다. 그리고 왜 매니저를 두지 않느냐는 질문에 늘 이렇게 말했다. "매니저를 둘만한 가수가 아니라서.."

그의 주된 일과는 아침에 보통 방송사 한 두곳을 가서 녹음이나 녹화를 하고, 오후와 저녁에는 자신의 공연이나, 서울 혹은 전국의 대학이나 단체에서 초청한 행사에 응하고 밤에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신문이나 잡지를 위한 인터뷰, 혹은 음반을 위한 녹음 작업을 하고 새벽에는 컴퓨터통신을 통한 팬들과의 온라인 대화나 작곡이나 작사 또는 연습, 혹은 독서에 몰두하는... 옆에서 보기에 정말 대단하다싶은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보여왔다.

그는 선천적으로 자그마한 체구에 걸맞게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체질이었고, 주변에서는 흔히 그 성실함을 빗대어 슈퍼맨이라 불렀다.

여린 감성과 깊은 통찰력의 타고난 가수

김광석의 성격은 감성적으로는 상당시 여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무척 강한 두가지 면을 동시에 보였다. 자신에게는 혹독하리만큼 철저함을 추구하였지만 주위에 관해서는 동시에 늘 관대히 대해왔다. 음반을 낸 초창기 형편없는 대우에 몇마디 불평만으로 막대한 이윤을 그대로 저버렸으며, 힘들게 살아도 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의 노래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늘 자신의 삶의 방식과 그 해답에 대해 목말라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 젊은이 중의 한 명으로서 우리들이 처한 이 시대 상황에서의 작은 감정의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그 감정의 원인과 이유를 밝히려 애썼다. 그리고 잘 살려고 힘썼고, 늘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철저한 자기훈련의 결과로 매사에 깊은 통찰력을 지닌 그는 자신의 여린 감성으로 이 타락한 세상과 결국 타협치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는 언제나 다정다감했으며, 바르게, 진정으로 착하고 올곧게 이 세상을 살고자 했다. 늘 부모님을 생각하는 효자로 예쁜 딸의 아빠로 그리고 좋은 후배로 선배로 친구로..

김광석 노래의 핵심은 사랑

김광석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의 그룹을 거쳐 모두 6장의 독집앨범을 남겼다. 1989년에 '기다려줘'가 수록된 1집 음반을 시작으로 '사랑했지만'이 수록된 2집이 1991년. '나의 노래'가 수록된 3집이 1992년에, 그리고 '일어나'가 수록된 마지막 앨범 4집이 1994년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사이 1993년에 자신의 곡과 다른 가수의 곡을 리바이벌한 다시 부르기 1이 1993년에, 다시 부르기 2가 1995년에 발표되었다. 따라서 김광석의 음악여정은 노찾사동물원의 그룹시절, 그리고 4장의 독집앨범 그리고 2장의 다시부르기로 나누어 볼수 있다.

노찾사나 동물원시절은 김광석 스스로 나이로나 음악적 연륜으로나 자신의 음악의 형성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찾사라는 그룹의 성격이 가지는 한계, 그리고 결국 아마추어적 성격을 버릴 수 없는 동물원이라는 그룹을 나와서 솔로, 즉 전업가수로 활동을 시작하는 행위부터가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1집에서는 10곡의 수록곡중 6곡의 자작곡을 싣고 있는데 보컬(창법)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김광석 고유의 색채가 드러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김광석 스스로의 음악적 정립이 아직 확고 하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고, 가장 큰 이유는 편곡을 맡은 연석원의 영향이 이 음반에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2집에서는 연주곡 1곡과 이장수가 작사한 '슬픈 노래'에 곡을 붙인것 이외에 나머지 8곡을 모두 다른 작곡가의 곡을 수록했다. 이 때부터 김광석 고유의 음악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조동익이 편곡에 가세함으로서 1집보다 훨씬 더 그의 노래를 심도있게 그려낸다. 그러나 김형석이 대중적인 편곡으로 만든 '사랑했지만'이나 '사랑이라는 이유로' 같은 곡들은 훗날 김광석의 노래와는 음악적 스타일의 측면에서 구별된다.

'나의 노래'가 수록된 3집부터는 김광석 스스로 전적으로 앨범을 프로듀서하는 본격적인 김광석 음악의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다. 오래전에 써두었다가 3집에서야 수록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포함 '행복의 문'등을 수록, 짧은 그의 인생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발표한 앨범이다.

그리고 '일어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수록된 4집은 이제 담담히 희망과 좌절을 관조하며 삶을 노래하는 모습이 보인다. 본격적인 포크, 컨트리적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하는 4집 음반과 다시 부르기 1, 2집은 예전 앨범과 달리 김광석 고유의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앨범들이기도 하다. 특히 다시 부르기 2는 경지에 이른듯한 보컬과 포크와 컨트리 혹은 블루스의 흔적까지 엿보이는 음악적 성숙도가 깊은 앨범이다. 선곡에 있어서는 다시 부르기 1이 동물원 시절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나 노찾사 시절의 '광야에서', '그루터기'등 자신의 예전 곡들을 중심으로 했다면, 다시 부르기 2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그 생명을 아직 잃지 않는 곡인, 한국 포크의 정신이 담겨진 '바람과 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등의 노래를 과감히 리바이벌하여 김광석 스스로의 음악적 방향의 확고한 설정과 더불어 앞으로의 새로운 영역과 음악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큰음악적 변화기의 단계에 다다른 상태를 보여주었다.

김광석은 생리적으로 포크적 성향을 많이 가진 음악인이었다. 그의 음악자체가 통기타 하나만으로 구성되는 점에서 자연스레 그의 음악이 포크에 가까울 수 있는 점도 있지만, 김광석의 심성 자체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한국화된 장르, 즉 70년대 김민기, 조동진, 한대수 등의 포크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포크적 성향위에 김광석은 늘 컨트리와 블루스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포크음악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메세지송의 전유물이었다면, 김광석은 자신의 음악적 심화를 컨트리나 블루스 특히 '블루 그래스'나 '힐리빌리' 등의 음악에서 찾으려 했다. (생전에 내쉬빌에 처음으로 다녀온 뒤 컨트리 풍의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기억도 새롭기만 하다.) 물론 김광석의 음악감상의 폭은 재즈에서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음악적 방향은 컨트리나 블루스였을 것이다. 그것을 예시한 음반이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된 다시 부르기 2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음악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김광석 노래의 주제는 늘 사랑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그다지 원만히 대해주지 않았고, 그는 늘 처절한 사랑의 아픔으로 속을 삭였다. 그리고 노래로 표현했다. 잊음에 대한 그의 열망은 1집에 '내 꿈', '슬픈 우연'에서, 2집의 '너 하나뿐임을', '슬픈 노래', 3집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행복의 문'으로 그리고 4집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자유롭게' 등 직접 곡을 쓰거나 가사를 붙힌 곡들에서 계속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잊음의 고통과 더불어 '나의 노래'나 '일어나'같은 희망찬 노래들을 동시에 부름으로서 그는 포용하고, 이해하고, 결국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을 담고자 했다. 그의 노래에 그리고 그의 가슴에...

"행복하세요.."

김광석은 방송 때나 헤어질 때나 그리고 사인을 할때에 늘 쭈글쭈글 웃으며 '행복하세요' 라고 인사했다. 얼마나 그가 행복에 대해 갈망했으면 그다지도 외쳤을까. 그는 늘 진솔하게 인생을 살고자 했고, 무엇보다 솔직한 삶을 노래하고 노래를 통해 삶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힘의 원천이 자신의 노래로 스스로의 삶을 지탱해 왔다. 그러나 그 무엇이 그의 노래로도 치유될 수 없었는지..

김광석은 무척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다. 그의 노래를 다시 한번 들어보라. 그가 얼마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는지... 김광석은 마치 그의 인생처럼이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객이었다.}}}

구경모, '김광석의 밤의 창가에서' 담당 PD
오래전 김광석을 그렸다.
사랑을 노래하고, 젊음을 노래하고, 아픔을 노래하고 희망을 노래하고, 정의를 노래하고, 용기를 노래했다.
웃고 울었던 뜨거운 시간들을 기억한다.
열정이 쏟아져 내리던 광석의 목소리와 함박웃음 대학로에서, 학전소극장에서, 우리들 서른즈음이다.
이창우, '다시 부르기 1, 김광석 네번째' 아트디렉터

3. 음악성

3.1. 가창력

김광석의 음악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그의 목소리, 더 정확히 말하면 음색과 거기에 실린 짙은 감정 때문이다. 특히 김광석의 비브라토는 비브라토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다. 기교를 위해서 목소리를 떠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울음을 참듯이 목소리가 떨리기 때문이다.[60] 김광석의 그 창법은 따라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완벽한 모창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론[61][62][63]이다. '서른 즈음에'도 그렇고 영화 클래식 OST에 사용되면서 영화에 너무나도 잘 매치되는 꽤나 주목받기도 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같은 노래들을 김광석보다 잘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김광석은 노래할 때 또박또박하게 발음한다. "광야에서"의 가사 중, '흙이여'는 흔히 [흐기여]로 잘못 발음되는데, 김광석은 [흘기여]로 아주 정확히 발음한다. 라이브를 할 때에도 놀랄 만큼 또박또박 발음을 한다. 다만 처음 이 곡을 부른 안치환 또한 '흙이여'를 [흘기여]라고 발음하므로 이 점 또한 감안해야 할 것이다. #

하지만 테크닉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었다. 그의 라이브 음원이나 영상을 들어보면 '사랑했지만'을 부를 때는 후렴구에서 발음이 살짝 뭉개지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감정을 많이 실어서 부르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인지, 단순히 발음 뿐만 아니라 음정을 내뱉은 입술의 모양도 불안정해진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 중 하나이다. 실제로도 김광석의 다른 공연 영상들을 보면, 일부러 입술을 작게 한다거나 이를 앙다물고 노래를 부르는 등 발성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음낼 때 후두가 너무 올라가서 짜내듯이 소리가 나오는 인골라, 작게 벌리는 입,[64] 목을 잡는 소리[65] 등이 대표적이다. 즉, 좋지 못한 발성으로 노래를 하다보니 테크닉적으로도 떨어지는 것. 발성과 테크닉이 떨어지는 이유는 일단, 김광석이 프로로 데뷔하기 이전에 오늘날의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은 커녕, 과거의 미8군 무대와 같은 트레이닝도 받은 적이 전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박자감각도 떨어지는 편이라 그의 라이브 공연을 보면 발로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중간중간 박자를 자주 틀린다.

하지만 테크닉으로 점철된 교과서적인 기준으로 그의 가창력을 논하는 것은 섣부른 짓이다. 비유컨대, 프로바둑선수에게 왜 정석대로 수를 두지 않느냐고 하는 꼴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만의 느낌과 감성과 연륜[66]이 있고, 그 목소리로 자신이 부른 곡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을 보여준다. 가창력이란 결국 노래를 표현하는 능력,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김광석은 자신의 곡에 한정해서는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가수이기에 엄청난 가창력의 소유자라할 수 있으며, 가수가 표현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본다면, 그가 노래를 부르며 감정을 표현하는 점에 있어서는 가히 표현력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김광석은 생전에 저런 창법으로 10년 넘게 녹음과 공연을 수없이 해왔음에도 라이브에서 기복이 거의 없었다. 김광석은 심지어 1000회 라이브 기록을 세워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가수 기준으로도 라이브 활동을 많이 갖는 가수였으며, 그럼에도 당대에 라이브를 잘하는 가수로 통해 대학 축제 등 여러 무대에서 사랑받던 사람이다.[67]

그런데도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같은 곡에선 3옥타브 레의 고음을 라이브에서도 원키로 안정적으로 소화했다. 즉 이것은 교과서적이지 못하단 소리를 들어도 본인에겐 노래하는데 있어 전혀 무리가 가지 않는 창법이었단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두고 김광석의 발성이 좋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김광석 입장에선 큰 무리도 가지 않고 노래 표현에도 알맞은 좋은 창법인 것이다.[68]

애초에 대중음악은 성악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성공한 가수들이 클래식에서 말하는 정석과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창법을 쓰며, 사람의 성대 역시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김광석이 저런 창법을 안정적으로 사용했던 것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하고 있는 지점들을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힘든 이유도 명확해진다. 흔히 김광석을 가리켜 '우리에게 독특하면서도 큰 울림을 준 음악가'라고 말하는데, 이때 주목할 부분은 '독특함'이다. 그 독특함은 그가 누구나 보편적으로 쓰는 효율 좋은 발성법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요즘에는 실용음악의 발달로 수많은 가수 지망생들이 안정적인 발성을 배우고 데뷔를 준비하지만, 그때의 김광석은 뛰어난 발성보단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과 표현력을 갈고 닦는 데 더 집중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에는 보기 어려운 김광석의 독특한 개성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에도 우리의 마음을 읽는다는 점이다.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김광석을 그리워한다고 할 수 있다.

3.2. 편곡

송창식고래사냥을 부르는 김광석 (1994.08.18 MBC 음악이 있는곳에 (여름날의 추억))[69]
김민기상록수를 부르는 김광석 (1994.04.22 KBS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부르는 김광석
박미경화요일의 비가 내리면을 부른 김광석 (1992.2.21 SBS 쇼 서울 서울) [70]

그의 대표곡으로 알려진 거리에서, 먼지가 되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이등병의 편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등은 사실 그가 편곡하고 리메이크한 커버곡이다.[7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들을 모두 김광석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김광석의 뛰어난 편곡 실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3.3. 성실성

김광석은 엄청난 노력가였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김광석이 만들거나 참여한 초기 앨범들과[72] 중기 앨범[73], 다시 부르기 1~후기 앨범[74]들을 비교해서 들어보자. 초기 앨범들이 그 뒤의 앨범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뒤떨어진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초기 앨범 속에서도 몇곡의 노래들은 그 나름대로 빛나는 좋은 음악들이지만,[75] 그럼에도 적지 않은 곡들이 그 음악적인 면에서나 가창력 즉 노래적인 측면에서나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곡들이다. 작곡적인 측면에 있어도, 1집의 수록곡 중에서 김광석 본인이 작곡한 곡은 5곡이지만 그중에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말할 수 있는 곡은 사실상 없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발매한 4집 앨범 중에서 김광석이 작곡한 곡 4곡 중에서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음악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점하고 있으며, 곡의 질 또한 월등하게 높은 편이다. 게다가 김광석은 사망 전에 제작하고 있었던 5집 앨범에서도 자작곡을 다수 수록할 예정이었다. 즉, 작곡적인 측면을 봐도 크게 발전한 것이다.

실제로도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4집 앨범이나 2장의 다시부르기 앨범 중에서도 특히 2집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3집이나 특히 다시부르기 1집은 일종의 과도기적 앨범, 달리 말하면 김광석이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찾고 정립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앨범으로 평한다. 이것이 무슨말인가 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김광석을 높게 평가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의 후기 앨범들(4집과 다시부르기 2집)이 이룬 성과에 기반해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상대적으로 뒤늦은 음악적 성취가[76] 그의 성실성이나 노력이 아니면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체 그가 성실하고 노력가였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려 소극장 공연을 1000회나 했다. 그가 처음 대학로에서 소극장 공연을 한 날은 91년 7월 1일이었고 1000회를 달성한 년도는 95년 8월 11일인데 91년 ~ 95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2일에 한 번 꼴로 공연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솔로 앨범 발매 년도를 살펴보면 1집(89년) - 2집(91년) - 3집(92년) - 다시부르기 1집(93년) - 4집(94년) - 다시부르기 2집(95)년 순이다. 1집에서 2집의 2년 공백을 제외하면 전부 1년 마다 앨범 작업을 한 셈이며 새 앨범들은 전의 앨범들 보다 음악적으로도 성장한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점들로 판단컨대, 그의 음악적 성취라는 것은 그의 재능이라기 보다는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3.4. 음악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Q. 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
A.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 네이버 지식iN에 올라온 질문과 답변. 이후 성지가 되었다.#
국내의 장덕, 김현식, 유재하, 신해철과 함께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노래해줬다면'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는 가수 중 하나이다. 그는 인품마저 겸비한 대한민국의 마지막 포크 아이콘으로 '19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그의 죽음 이후로 포크 음악은 메이저로 치고 올라오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 장범준이 그 뒤를 잇고 있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물론 그의 음악적 성과를 단지 포크라는 장르 하나만으로 국한시킬 수만은 없다.

그는 늘 소극장 무대를 고집하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길 원했고 결국엔 1,000회라는 기록적인 공연 횟수를 달성했다. 또한 소박한 포크 음악에 애착이 깊었다. 김광석의 바이오그래피는 주류에서 밀려난 모던 포크를 살려내기 위한 혼신이 담긴 노력의 연속이었다. 끝까지 라이브와 콘서트를 고집했으며, 이런 모습은 아직까지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가수 이적은 "콘서트장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열창하는 그의 모습은 나에겐 가수의 원형처럼 남아 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으며 또한 그의 음색과 그의 전반적인 음악색은 삶에 지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80년대 후반 민중가수로 김광석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김광석의 음반을 혹평하기도 했다. 민주화를 이뤄내고 그 직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뜨겁기 그지없던 시절, 김광석이 처음 내놓은 음반은 발라드, 댄스 가수 등이 내놓은 음악과는 색채가 전혀 다르긴 하였으나, 사랑 노래 위주였다. 원래는 사랑 노래 일색은 아니었는데, 1집 앨범에서 유명해진 노래들이 대부분 사랑 노래[77]라서 이런 이미지가 생겼다. 대부분 이 때문에 '변절자', '대중성만 추구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 민주화 운동 시기의 음악을 리메이크해 음반에 수록했으며[78], 3, 4집에서는 리메이크를 넘어선 자작 명곡들을 조금씩 발표하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고히 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광석의 곡은 주제의 분화 또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김광석이 이 시기에 비운의 가수로 세상을 떠나간 것 또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김광석의 모든 노래는 기타 하나로 연주할 수 있는 포크송이라 세월이나 세대를 타지 않는다. 말 그대로 10대부터 80대 노인까지 동감하고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김광석 노래의 힘은 그의 이름을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4. 김광석이 떠난 뒤, 김광석 다시 보기

4.1. 도서

사진작가 임종진은 김광석 팬으로 유명한데, 2008년에 그가 소장하고 있던 미공개 사진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수기, 작가 주변 인물들의 김광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포함한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를 출간한다. 2017년 기준으론 절판된 상태이다.#

2013년 말에 김광석이 생전에 남긴 메모, 편지, 문서[79] 등을 모아 만든 에세이 <미처 다 하지 못한>이 출간되었다. 책 뒷면에 김광석이 남긴 작곡 노트가 있는데,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미완성된 가사들[80]을 그대로 실었다. 이로 인해 페이지의 절반 넘는 부분이 미완성된 채 비어 있는데, 보고 있으면 만약 김광석이 살아 있었으면 이 페이지가 다 차서 노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는 평이 많다. 이 외에도 <김광석 악보집>과 노래 가사 모음집 <김광석 부치지 않은 편지>, <김광석 앤솔로지>등이 있다.

4.2. 뮤지컬

2013년 김광석 탄생 50주년을 맞아 무려 3개의 김광석 쥬크박스 뮤지컬이 초연되었다.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이미 발표된 곡들을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형식으로 흔히 한 가수가 발표한 노래를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최초의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Mamma Mia'(ABBA]) 외에도 'All Shook Up,'(엘비스 프레슬리), 'We Will Rock You'(), '락 오브 에이지즈'(70년대 록 음악) 등이 있다. 2016년에 김광석 20주기 기념으로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그 여름, 동물원'이 시작한다. 2016년은 김광석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4.2.1. 그날들

2013.4.4 대학로 뮤지컬센터 대극장 초연을 시작으로 2016년 충무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세번째 공연이 올라갔다.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형제는 용감했다 등으로 유명한 장유정 연출가의 주크박스 뮤지컬. 장유정 연출이 최초로 발표하는 대극장 작품이기도 하다. 장유정 연출이 극본을 썼고 나는 가수다 출연으로 유명한 장소영 음악감독이 참여했다. 유준상, 지창욱, 오종혁, 오만석, 민우혁, 강태을, 양요섭 등이 출연했다.(#)

김광석의 곡들을 완전히 뮤지컬 작법으로 편곡하고 일부는 매쉬업했다. 이런 탓에 혹자는 김광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의 없다고 비판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혼자 남은 밤'은 김광석 본인은 방에 앉아서 기타치면서 부르던 편한 노래지만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상황은 부모님께 '보내주긴 한다는데 슬슬 불안하다'라는 편지를 보내며 부르는 노래다. 하지만 뮤지션의 감성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감성을 구축한 것이 단점이자 장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연출가 장유정은 이런 비판에 대해 그의 음악 특유의 정서는 극을 관통하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인터뷰 하기도 했다.

장유정 연출답지 않게 스토리라인이 다소 빈약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나 '디셈버'보다는 훨씬 평이 좋은 편이다. '그날들'은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 넘나드는 구성을 취한다. 한중수교의 비밀을 덮으려는 정부와 그 사건에 휘말린 두 남녀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과거와 영애양이라는 지위의 무게에 환멸을 느끼는 영애양과 경호인 대식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현재가 대응을 이뤄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품집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따르면, 장유정 연출은 이 작품 이전에 김광석의 음악으로 쥬크박스 뮤지컬을 준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러 번 재공연되고 있는 형제는 용감했다가 바로 그 작품. 다만 공연 준비 단계에서 새 노래들을 작곡해서 넣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4.2.2. 바람이 불어오는 곳

2012년 11월 30일 대구 떼아뜨르 분도 극장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김광석 추모 뮤지컬의 대표주자다.
(사실, 2008년 5월 15일 홍대 상상마당에서 한 회의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뮤지컬이 아니었음)
대구 초연 이후에 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어쿠스틱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3.3.15 ~ 5.19 대학로 아트센터 K 네모극장 이후, 현재 2017.11.10~2018.1.21 예그린 시어터까지)
참고로, LP STORY 기획사(대표: 이금구)에서 제작한 공연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다.

소극장 뮤지컬로 김광석의 유족들과 팬클럽이 후원하는 작품. 최근 유행인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이다. 박창근 최승렬 박정권 등이 출연했다.# 정통성을 따지자면 가장 앞선다. 특히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김광석 노래들의 감성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주인공 이풍세 역의 최승열은 히든싱어 김광석 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우승은 김광석... 의외로 표차는 크지 않았는데 김광석 45표 최승열 35표.

박창근은 내일은 국민가수에 출연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4.2.3.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

장진이 연출을 맡은 작품. 2013년 12월 19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했다. 김광석을 주제로 한 뮤지컬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으로, 박건형, 김준수 등이 출연했다.# 하지만 작품성으로는 가장 혹평을 받았다. 장진 특유의 연극적인 정서가 뮤지컬에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다수였으며 여주인공 이름은 또 화이. 유화이라는 이름은 장진이 제일 많이 써먹던 여주인공 이름이다. 무엇보다 스토리라인이 조잡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만나는 가수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김광석의 노래들은 삶의 진정성을 노래하는 것들인데, 이런 노래들을 싣고 흘러가기에는 줄거리가 지나치게 빈약했다. 그럼에도 또 김광석의 이름값에는 지나치게 의존했다. 공연 초기에는 2막 시작과 함께 김광석이 홀로그램으로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는 씬이 있었을 정도다. 이 씬은 프리뷰 1회 공연 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평을 받아 삭제되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평가와는 별개로 흥행은 성공한 작품으로, 특히 김광석의 생전 모습을 직접 보아 왔던 중년층 관객들이 많았다. 제작을 맡은 NEW 대표 김우택이 영화 7번방의 선물과 뮤지컬 디셈버의 흥행 수익이 엄청났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4.2.4. 기타

4.3. 추모 공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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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음반 목록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435f4e><tablebgcolor=#435f4e> 파일:김광석 틀 전용5.svg||김광석
金光石 | Kim Kwang-seok ||

[ 정규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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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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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2집.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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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세번째 노래모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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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4집.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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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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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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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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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6. 25.
[ 커버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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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다시부르기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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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다시부르기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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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3. 2.

1995. 3. 1.
[ 사후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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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 인생이야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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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래이야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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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6323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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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광석_다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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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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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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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4. 1.
{{{#!wiki style="background-color: #fff,#2d2f34; 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px; padding: 1px 2px; border-radius: 4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1px; border-color: #000,#FFF;"

2016. 12. 7.
[ 관련 문서 ]
||<-9><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width=1000> 사망 사건 ||<width=13%><|2> 노래 목록 ||<width=13%><|2> 그날들 ||<width=13%><|2> 김광석다시그리기길 ||<width=13%><|2> 둥근소리 ||<width=13%><|2> 동물원 ||
사망 관련 음모론 다큐멘터리
파일:김광석_앨범모음.png
김광석의 음반 (1989 - 1995)
김광석이 살아 생전에 발표한 음반들이다. 정규 앨범을 따졌을 경우 4장이며,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부르기 1,2집을 포함하면 총 6장이다.

5.1. 정규음반에 수록되지 않은 노래들

5.2. 사후 출시된 앨범

김광석이 직접 낸 게 아니라 세상를 떠난 후 추모앨범, 다시부르기1,2, 김광석 베스트, 김광석 나의 노래 BOX 등의 앨범이다. 김광석의 사후 앨범 확인 정보는 비트(BEAT),[82] 네이버 뮤직로 확인이 되었다.

6. 어록

6.1. 노트 및 메모장

{{{#!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일반적 사랑의 결론은?
스스로 선택한 사랑의 방법이 어렵더라도, 그 누군가 만든 기준에 의해 우리 사랑의 방법을 평가할 것인가?
가장 솔직해야 할 사랑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힘들어하는가.
사랑함, 주저함이 없는 것, 사랑함에 떳떳할 수 있는 것,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을.
마음의 평안이나 그저 안일한 평화가 주는 심심함보다, 가슴이 파이고 흐느끼는 밤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쪽을 택하리라.
적어도 내 자신에게만은 부끄럽지 않은 솔직한 사랑을 위해 요구하지 않으며, 내 스스로 사랑함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연도 미상, 12월 17일
}}}||
{{{#!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기대
욕심
바람이 간절하여도 채워지지 않음에 실망하는가.
확실한 모습을 꿈꿀 수 없어 상심하는가.
또 묻는다.
선택함에 주저함 없었듯이
지금에 충실할 수 있는가.
1993년 1월 1일
}}}||
{{{#!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반나절을 멍청히 창밖만 바라보다 왔다.
무엇이 무엇이며, 저것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도 대답도 없었으며 그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마치 뇌사 상태의 육신이 죽지 않았음에도 죽은 육신인 것처럼 그저 창밖만 반나절 동안 바라보았다.
반나절을 그렇게 앉아서 애꿎은 담배만 태우다 왔다.

솔직하게 살고 싶은가.
주위의 시선에 주저하는 내 모습에 실망하는가.

생각도 안 했다.
생각도 어디에서부터 해야 할지를 몰라서 못했다.
그렇다. 솔직한 표현으로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이것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알지를 못해서 못하였다.

창밖만 바라보았다.
반나절 동안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곳에 너 또한 없었고
나 또한 없었다.
그저 무성한 빌딩들만 창밖을 지키고 있었다.
1993년 1월 1일
}}}||
{{{#!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중략) 기형도 산문집을 읽다. 짧은 여행의 기록. 느낌이 많다.
'짜쉭' 스물아홉[오류]신춘문예 당선이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에 목매다는 것이니까.
다른 이들보다 좀 나은 것은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시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스물아홉 살, 어느 삼류 극장에 앉아 조용히 숨을 거둔, 그 짧은 여행의 마지막 눈빛은 어떠했을까.
연도 미상,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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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하루 종일 누군가를 그리워했습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를 그리워하며
내 속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그가 그리워
미치도록 보고팠던 겁니다.
구부러진 환기통 사이로, 내 피워 문 담배 연기는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그도 사라졌습니다.
흔적 없이
내 잘못이 아니라 우기고 싶겠지만
내 잘못입니다
그를 보고 싶습니다
연도 미상,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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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온통 네 생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밤이 싫다.
말없이 웃음으로 모든 걸 감싸 안을 수는 없는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나의 무게와 나를 둘러싼 주위를 거부하는 것
자아의 무게를 책임짐과 동시에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것
연도 미상,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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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시간은 놀라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안타까울 이유도 없는 것
지난 시간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매어놓지도 않는다.
스치는 바람이 끝이나 시작이 없는 것처럼
인생도 애당초 의미 없는 것
삶의 힘을 얻고 싶은 사람들이 애써 만들어놓고
스스로의 행동에 힘겨워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람, 참 어리석은 동물이다.
스스로 함정을 파놓고 그 안에서 행복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민하는 답답한 생물.
연도 미상,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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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비상구는 때로 등한시한다.
어떤 건물에선 아예 잠가놓기도[87] 한다.
도둑 때문일까? 급할 때만 쓰는 걸까?
늘 다니는 곳, 일상적인 비상구의 반대말은
말 그대로 비상사태가 아닌
안정 상태의 '안정구'인가?

비상구
비상구의 위태로움
청소하고 자주 보수해주지 않으면
정말 급할 시에는 정작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

비상구
비상구의 외로움
많은 사람이 없고
어쩌다 이동하는 사람이 있기에
늘 혼자인 듯한 외로움
불안함
작성일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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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1993년을 보내며, 한 달간의 공연이다.

이번 이야기는 잃어버린 꿈이다.
꿈에 보이는 모습은 현실과는 대조적이면서도
현실을 비춰주는 것들이 있다.

사랑이라 쓰면서[88]
금색이 나오니, 왠지
사랑의 느낌이 아닌 듯하다.
1993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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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미완성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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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심하게 어려워도 괜찮아
별 하나 나뭇잎 먹으면 힘이 솟아나네
그럼 수퍼 마리오 그럼 수퍼 마리오
그래 우, 정말 그래
평화를 위해 정의를 위해 힘쓰는 마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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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사랑일기
(시인과 촌장 - 푸른 돛 수록, 하덕규 작사 및 작곡)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는 나그네의 지친 어깨 위에
시장 어귀에 엄마 품에서 잠든 아가의 마른 이마 위에
공원 길에서 돌아오시는 내 아버지의 주름진 황혼 위에
가고 오지 않는 아름다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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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어느 노을 진 강가에

바람 부는 어느 노을 진 강가에
우린 흩날리는 머릴 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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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방송 및 인터뷰

{{{#!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차가워진 바람 속에 서서,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문득 별 하나가 빛을 내며 나를 지켜보기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밤의 창가에서' 김광석입니다.

"어? 김광석이가 웬 일이지?" 뭐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겠죠.
오늘부터 제가 황청원 선생님[89] 뒤를 이어서, 이 시간 여러분들 만나 뵙게 됐습니다.

글쎄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아주 근사하게 첫 인사를 하시던데요,
전 역시 뭐 이렇게 근사한 놈은 못 되나 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꼭 드리고 싶네요.
진짜, 여러분들을 만나게 돼서 정말 너무너무 반갑다는 것.
그리고 정말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것,
그리고 여러분들과 매일 밤마다 할 얘기들이 너무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것.
어떠세요? 여러분들, 잘 아시겠죠?
1991년 10월 14일, 불교방송 라디오 '밤의 창가에서'를 시작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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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이 사회가 기피하는 부분들을 은폐하려고만 하면 아이들은 어디서 알고 어디서 느끼나요?
1993년 2월, 월간 『길』과의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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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주변에, 살아가시는 분들이 다들 자기 직업에 충실해서 직장 다니시고 그러듯이, 저도 제 가수라는 직업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연 열심히 하다 보니까 1,000회 되데요?
1995년 8월 11일, 국내 최초 1000회 공연 기록 달성 직후 SBS와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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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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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삶의 상처를 감싸주는 것>

일상에 쫓겨 바삐 살아가다 보면 가끔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마저 잊어버리곤 한다. 주어진 삶의 무게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어둠과 함께 텅 빈 외로움이 찾아든다. 바로 이런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을 향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인생을 조율하며 친근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김광석(金光石, 32세, 마포구 서교동 398-2[오기] 원음빌딩 202호). 노래는 진실한 삶의 이야기라는 믿음으로 지난 '84년부터 줄곧 관객들과의 만남을 가져온 그가 국내에서는 전례 없는 라이브 공연 1천회를 맞아 서울 동숭동 학전 소극장에서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8.1~8.31)

BBS '밤의 창가에서' 녹음차 불교 방송국에 들른 그를 17층 로비에서 만났다.
"제가 좀 늦었죠?"

바로 이웃집 형을 생각게 하는 외모와 말투, 가슴에 범선이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산뜻해 보였다.

"우선 1천회 공연 기념 콘서트를 축하드립니다. 라이브 무대를 고집해 오신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사실 천(千)을 바라보고 노래하진 않았어요. 바둑을 둘 때처럼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한집 한집 만들어가는 데 정성을 다하듯 매번 공연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84년 민중노래 서클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공연 활동을 시작한 그는 '88년 그룹 '동물원'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라이브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호소력 짙은 그의 음악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듣는 이에게 가슴을 휘어잡는 잔잔한 울림과 함께 조래가 끝난 뒤에도 뭔가를 생각게 하는 독특한 흡인력이 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의 비상구>

"김광석씨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표현하곤 하는데요, 노래와 삶에 관한 철학이 있다면......"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려는 자신의 노래가 자칫 교과서적 충고나 교훈조로 흐르지는 않을까 항상 조심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유당 시절, 아버님께서 교원노조[91]사건으로 교단을 떠나셔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게 대학시절 민중음악을 선택하신 계기가 아닌지......"

"직업적인 계기는 아니었어요. 아버님께서는 항상 남들에게 피해주는 일은 하지 말고, 경우에 바르게 살아갈 것을 말씀하셨어요. 사회라는 체계는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위로보다는 종종 피해를 입히더군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러한 현실이 제겐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죠. 사람들과 함께 따뜻함을 나누며 살아가려던 제겐 다행히도 음악이 있었습니다."

'90년 6월 동갑내기 서해순 씨와 결혼, 다섯 살 난 딸 서연이를 두고 있는 김광석씨는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결혼하고 나서 4, 5개월 동안 통장은 항상 '0'이었어요. 총각 시절엔 그저 내 한몸 버텨가면 그만이었는데 가장이 되어 아내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 하는 것 같아 몹시 괴롭더군요...... 아내는 직장생활로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말없이 나를 밀어주더군요. 인정받는 것은 우선 아내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요즈음은 콘서트 외의 시간은 딸과 함께 놀아주는 시간을 가지려고 애쓴다. 서연이에겐 항상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맑은 향기 나누며 살자>

'94년 4집 앨범 출반 이후 김광석 씨의 30대 가수로서의 완숙미가 한껏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지게 된 때가 있었다. 삶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으로부터 허무가 몰려 왔다고......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20대의 가능성들은 대부분 좌절되고 30대의 한계를 분명 인정해야만 했었죠. '서른 즈음에'라는 곡은 그때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죠."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하지만,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는 그는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 다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어나'를 힘차게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4집 앨범에 수록된 '맑고 향기롭게'라는 곡은 법정 스님이 함께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가까이서 법정 스님을 대한 느낌은 어떠셨는지요?"

"저는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법정 스님을 뵈면서 마음을 잘 닦으신 분은 절로 몸에서 향기가 베어 나옴을 느낄 수 있었어요. '가만히 옆에만 계셔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생각하니 앞뒤 가리지 않고 제 욕심만 앞세우는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노래의 참된 의미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역할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상의 조그마한 얘깃거리, 재밋거리가 모이면 그것이 바로 삶의 큰 힘이라고, 처음부터 너무 큰 의미만 좇다보면 마치 동화속의 '무지개를 찾아가는 소년'의 이야기처럼 허황될 것이라며 웃는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1995년 샘터 9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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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가을철 이맘때 쯤 되면요, 묘하게도 저는 그 대학교 2학년 때, 겨울 방학 지나고 나서 한참 놀 때 생각이 납니다.

그맘때 뭐, 성적표가 일찍 왔나 싶어요. 지금 생각으로는. 근데 아버님이 성적표를 이러고 보시더니, "광슥아, 고마 쉬이라"

그래, 휴학계 내고, 1년 놀고, 그리고 6개월 갔다 오고, 그리고 학기 안 맞는다고 6개월 또 놀고. 노니깐 참 좋데요.
뭐 사실 하는 일 없고, 아침에 일어나서 배고프니깐 "밥 주세요" 밥 먹고. 심심하니깐 나가서 (놀고), 할 일 없죠. 그냥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 구경이나 하고 멀뚱히 보다가 배고파지면 또 집에 가서 "엄마 밥 줘" 그러고 또 밥 먹고 자고.

아마 20대 초반에 누구나 비슷한 경험들 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뭐 기대도 크고, 가능성도 많고. 하지만은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좀 불확실하고요. 구체적이지 못하다 보니깐 아무래도 어떤 조급함이나 답답함, 뭐 이런 것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제가 이 노래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 다음 부를 곡이요. 다는 못 보내드릴 것 같고요. 조금만 보내드리면, '불행아'라고 하는 노래인데요, 그맘때 뭐 허구한 날 부르고 그랬던 노래입니다. 뭐 그런 심정하고 비슷하게 맞아떨어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요. 보내드릴게요.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이문세 : 앞으로도 계속 공연하실 거에요?) 아마 내년부터는 그렇게 많이 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아내가 어디로 공부를 하러 가는데, 아이 봐 줄 사람이 없어서 제가 애 봐야 돼요. (집에서, 아니면 외국에서 같이?) 외국에서 같이요. 해마다 하는 여름 정기 공연은 계속 해야죠. 그래야 생활이 될 테니깐.
1995년 10월 28일 이문세쇼[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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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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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인사'는 이런 말을 하겠습니다.
"행복하셔요" 인데요,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열심히 사시고, 보람도 느끼시고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행복하셔요.
콘서트를 비롯해 그가 언제나 사람들과 헤어질 때의 인사말인 '행복하세요'에 대한 본인의 설명[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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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뭔가 스스로 가진 한계라는것, 꼭 나이 때문만은 아닌것 같습니다. 생활하다보면, 졸업하고 20대가 지나가고, 20대가 참 좋은것 같아요. 제 느낌으로는 이때까지 제 생각으로는 기대도 크고 가능성도 있고 뭐 그래서, 이리저리 시도했다가 또 깨지기도 하고, 그래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설수 있고, '뭐, 그럴수 있지? 뭐' 이러면서, 큰 실패를 보아도,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날수 있는 나이가 20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30대쯤 되면 뭐 하나 정해놓고 아둥바둥, 잡고 있을수밖에 없죠.
1995년 6월 29일, '서른 즈음에'와 '거리에서'를 부르고 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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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다음 곡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인데요. 사실,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상식화되어가는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주변에. 오늘 뭐, 또. 비상식적인 일들이 또 한번 벌어졌더군요. 삼풍백화점 무너졌다고 그래서... 일찍 오신 분들은 모르시죠? 900명이 뭐 이렇게 깔려있다고... 뭐 여튼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고요. (객석이 술렁이자) 술렁거리시네.. 다 끝나고 확인해보십시오. 무너졌다 그래서, 걱정돼서 집에 전화해봤더니 집사람이 삼풍백화점에 갔대요.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봤더니 3시 반에 나왔대요. (웃음소리 들리자) 무슨 얘기인지... 에, 참. 황당한 일이 많이 벌어져서 마음이 좀 붕~뜨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많이들 안 다쳤으면 좋겠고요.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시작하겠습니다.
1995년 6월 29일,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부르고 난 후[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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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그,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뭐, 스스로 투자한 시간이나, 주었던 정이나, 이게 아까워서 아플수도 있구요. 혹은, 자기 마음을 전혀 몰라줘서, 그럴수도 있구요. 그저 자존심이 상해서 아플수도 있습니다. 여튼. 근데 안아프면, 사랑이라고 할수가 없겠죠? 그만큼 희생이 따르고, 그러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1995년 6월 29일,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나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부르고 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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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노래에 대한 소개

{{{#!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이정선씨가 만들고 취입했던 곡이죠
10년 전 쯤에 좋아했던 노래였습니다.

가사를 잘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아주 즐거운 느낌의 곡은 아닌데 음악은 또 그렇지 않죠.

'절묘한 매칭이 필요한 곡'이라고 생각되네요.

왜 가사를 음미해보면 말예요,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참 착했어요.
그가 아무리 잘못해도 웃어주고, 약속시간에 늦게 나와도 미소로 맞아주고..
그가 그녀에게서 한눈을 팔아도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러다가 참다참다 못해 그녀가 처음으로 울어버리죠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요.
한번 울고 간거죠.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왜 가고 나서
'가슴이 온통 무너진다'는 둥
'하늘이 캄캄하다'는 둥 하는지

여러분 모두 있을 때 잘하세요
1995년 6월 3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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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일어나

서른 즈음에 느끼는 스스로의 한계나 답답함,
생활이나 삶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허무한 것임[수정1]을 인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속의 자잘한 재미나 가벼움이 소중하다고 느끼면서
재미나고 즐겁게 열심히 살아가자는 뜻으로 만든 곡입니다.

한 일년 전, 제 스스로 여러가지 힘든 일이 한꺼번에 불규칙하게 터졌을 때,
이런 생각을 했죠.

"인생은 수영장과 같다"

이렇게 힘든 일들이 자꾸만 날 가라앉게 만든다면,
'그래, 한 번 가라앉아 보자.
내려가다 보면, 바닥은 나올 것이고,
바닥이 나오면 차고 올라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그 끝은 더더욱 깊게만 느껴지고,
다시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죠.
'그래, 포기하자. 이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생각하고 떠오르기로 했죠.

요즈음 전 일정 부분 만족하며, 일정 부분 아쉬워하며
그래도 재미있게 지내고 있죠. 그런저런 생각들을 노래로 만든 것이 "일어나"죠
1995년 6월 3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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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사랑했지만

지난 7일날 "길상회" 라는 모임에 갔습니다.
그 모임에 참가하신 칠순 할머니 한 분께서,
24년생 이라고 하시면서,

비 오는 어느 날, 우산도 없이 장 보고 오는 길에
거리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 소리에
내리는 비도 잊은 채 서서 들으셨답니다.

그후 한 2주 후 라디오에서 또 다시 듣게 된 후,
방송국으로 문의, 그 노래 제목을 알았노라고 말씀 하시더군요.

무슨 노래냐고 했더니 '사랑했지만' 이라 하시더군요.

'감정은 나이와는 상관 없다'
라고들 하지만, 할머니나 부모님께는 날 이해 못하실 거라고 단정짓고 (무의식중에)
잘 이야기 하지도 않는 것이 우리들 모습이지요.

저는 그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많이 반성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감정은, 느낌은 나이와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한동안 저 개인적으로는 '사랑했지만' 이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시도하지도 않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는 수동적인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그 할머니의 잊었던 감정을 되살려 준 노래이기에,
조금 더 열심히 부르고, 제 스스로 좋아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1995년 6월 10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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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은 류근이라는 글 써 먹고사는 괜찮은 사람이 가사를 쓰고, 김광석이 곡을 썼지요.

얼마전 나 홀로 집에 2를 보는데 센트럴 파크에서 비둘기와 지내는 여인의 얘기가 나오더군요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사랑이 다가오면 도망치고,
어찌하다보니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고.

그에게는 첫사랑의 아픔이 너무나 아파, 또 아프기가 두려워
사랑이 다가올 때마다 도망친 것이죠.

주변에 이렇듯 맘문 꼭 닫아두고, 그 비둘기 아줌마처럼 지내던 사람 몇 명 봤지요
중요한 건 "아프지 않은 사랑이란 없다" 이것이지요
아픔없는 생이 없듯이.
그래서 나이가 들면 참을성이 많아지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순 없지만,
사랑은 많은 부분 인정해야 하고,
사랑은 많은 것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것,
아픔으로 더욱 사랑하게 되고, 아픔으로 더욱 괴로운 것
뭐 이런게 사랑이 아닐런지....

아픈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사실은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지요

사랑에 대하여 글 써주세요. 공개방으로 써놓으시면 저도 할 말 할게요.
1995년 6월 19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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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의 편지

이등병의 편지를 처음 들은 것은 1990년 '겨례의노래' 공연 준비할 때다.
음반에는 전인권 선배가 부른것을, 전국 순회공연에서는 내가 부르게 됐다.

처음 이곡을 부를 때는 어머님과 돌아가신 큰형님 생각이 났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11살 차이 나던 큰 형님이 군대 가셨다.
일주일쯤 지난 뒤에, 누런 봉투에 형님이 입고가셨던 옷가지들이 쌓여 집으로 배달되었고,
어머니께서 빨래하시며 우시던 모습이 생각났고, 1980년 10월 결혼식을 20일 남기고 돌아가신 큰형님 생각이 났다.

그 당시 형님은 육군 대위셨다.
'이등병의 편지'는 나의 훈련소 시절 생각보다는
어머님, 형님 생각에 노래를 부르면서도 울먹거린 적이 여러번 있었다.

형님 돌아가신 후로 김치맛이 변할 정도로 맘 상하신 어머님께선
요즈음엔 그래도 잘지내시는 편이다
1995년 7월 20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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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86년쯤으로 기억된다.
마포대교를 건너는 중이었던 것 같다.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너무 절절해서 나도 모르는 새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오고....

김목경씨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라는 노래였다.
서른세 해를 보내고 음악 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 10년을 넘긴 지가 훨씬 지났다.

95년 3월 어느날 발매된 "다시부르기" 2집에 이 노래를 담기로 했다.
녹음에 들어서 가사 중간의 '막내 아들 대학시험' 이라는 대목에 이르기만 하면,
이상하게 목이 매여와 녹음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인가 시도를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술먹고 노래를 불렀다.
녹음중에 술을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이 노래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음주녹음이라고나 할까? 하하하

여튼 음주녹음에 대한 단속은 없어서 다행이다.
녹음 상태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내기로 했다.
마침 단속도 없으니까.

내 공연엔 나이 드신 분들이 꽤 많이 찾아주시는 편이다.
아픈 기억들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꽤 많은 모양이다.
이 노래를 듣고 86년의 나처럼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이 많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혹은 가까운 사람들중의 누구라도
내게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한다.
울고 싶은 마음이 들면 우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연이라고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공연을 통해서 가끔 이런 얘기를 한다.
1995년 8월 26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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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람이여

지금도 노래마을에서 활동중인 백창우씨가 만든 곡이다.
83년 혹은 84년 카페에서 통키타 가수로 활동할 때 자주 부르던 곡이다.

당시에 젊은 나에게 이 노래는 의미가 있었다.
다른 특별한 것은 아니고 나도 이런 사랑을 한번 해봤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내 사랑의 전형이었다고나 할까?!?!?
요즈음 사람들(신세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랑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여튼 나는 그때 나도 그래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지금의 내 생활은 그때의 순수함에서 이제 많이 벗어나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생긴 후부터, 잘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잘 살고 싶다.

세상에 언제나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하는 것들이 많다.
과거로 치부하고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추억속의 장소/물건/사람 등등...
때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와 함께 찾아가 그때의 얘기들(첫사랑의 추억도 좋고 헤어짐의 아픔을 간직한 장소라도)을 해보고 싶다.
어렸을 때 다니던 국민학교 교정도 이제는 내게 없다.[97]
학교측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그때의 기억이 전부 한꺼번에 없어져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슬프다.

아 모르겠다.
서로 사랑하며 살자구요!!!
1995년 8월 26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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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노래를 부르면서 곡에 대한 느낌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다 다르죠.
제가 발표한 곡들이 60여 곡 되는데,
요즈음 자주 부르는 노래중에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노래가 있어요.

원래는 밥 딜런 곡이었는데,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인가 그럴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양병집씨가 개사해서 불렀었죠
제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느끼는 것은
처음에 들었을 때, '아! 재밌다'

가사가 반전되고 거꾸로 되어있는 이야기죠.
뭔가 모르게 양병집씨가 개사를 할 때가 20년 전 일이라서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시대상황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강해요.
1995년 8월 26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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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는 곳

모 방송국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로고송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든 곡이다.
난 좋은데 곡이 별루인가
왜 안뜨지?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즐거운 마음이 들도록 만든 곡이다.
가끔은 이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1995년 8월 26일, 둥근소리 노래이야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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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기타

{{{#!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나의 무대를 찾는 관객들은 제각기 다른 기대를 가슴에 안고 무대를 지켜본다. 특히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한 소극장 무대에선 눈빛만 마주쳐도 알 수 있다. '그 각각의 기대를 얼마나 만족시켜 주는가'가 관건이다. 그럴 때 나는 광대이다. 무대의 나와 객석의 관객이 혼연일체가 되어 드높아질 때 우리 모두 잠깐이나마 해방을 맛본다. 나는 '이등병의 편지'를 부를 때가 특히 그러하다. 장교로 복무하다[98] 돌아가신 형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나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는데, 와이셔츠 입은 관객들이 이 노래의 동심원 속으로 빨려 드는 저릿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 결국 무대는 '노는' 장소이다. 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는 무대는 모두에게 의미가 없다. 이 이외의 목적이 무대에선 존재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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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우리의 문화에서 가장 큰 위기는 전통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통은 단지 옛날의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존심이며 전통이 없으면 손쉽게 서구의 문화, 특히 미국과 일본의 대중 문화에 경도된다. 하나가 유행하면 너도나도 뒤따라 그 일색이 되는 거리의 패션과, 하다 못해 한 자리에서 5년도 버티지 못하고 간판을 갈아 치우는 카페들을 보라. 뉴욕의 음악 거리인 그리니치의 작은 카페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곳은 별 특징도 없었지만 무려 80년이나 되었단다. 나는 그 곳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아도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대중 문화의 저역을 느꼈다. 나는 아빠가 느낀 것을 딸래미가 그대로 느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2, 3세대가 공유하는 공간이 있는 문화는 손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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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아저씨..가슴이 두근거리면 사랑인가요?
1995/06/28 15:46 | 외기러기 ( 이연수 ) | 조회 56
음.. 그냥 질문이기보다는 좀 그런..
좀 인생선배로서.. 한가지 충고를 부탁드립니다
학교에서 뭐랄까, 좀 관심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시간이 지나고 나도 근1년이 지나고도
그 사람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그게 사랑일까요? 아니면, 뭘까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방법이라도 동원해서
사랑을 쟁취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 사람 앞에서는 너무 작아보이는 제 자신이
너무 애처러워 보입니다
[to연수]사랑의 시작이 설레임일까요?
1995/06/29 23:31 | 김광석 (김광석) | 조회 217
(중략)
내 기본적인 생각은,
'시도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아프고 깨지더라도 시도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 라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일텐데,
그 부담스럽지 않게 하는 것은, '만나서 서로 자잘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서로를 얼마나 많이 이해할 수 있는가' 가 중요한 것이야
앞에서 말했듯이 시도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시도하는 방법은 알아서 하기를
1995년 6월 29일, 둥근소리 물어보기/답해주기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과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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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20px -10px -17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35F4E>
(중략)
'있을때 잘 해'
참 실천하기 힘든 말이다

누군가 옆에 있을때 그에게 충실할 수 있는가?
나는 늘 옆에 누군가 있을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고,
막상 옆에 없으면 그리워 하는가?

모순이다
내안의 모순
1995년 9월 26일 2시 52분, 둥근소리 낙서하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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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방송

7.1. 라디오

<rowcolor=#fff> 날짜 방송사 방송명 비고
1988년
12월 18일#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 게스트[99]
1991년
1월 20일#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100] 게스트[101]
10월 14일 ~ 1995년 파일:BBS불교방송 국문 아이콘.svg 밤의 창가에서 DJ
1992년
1월 12일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 게스트[102]
1993년
1월 10일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 게스트
1994년
9월 4일 ~ 일자미상[103] 파일:EBS 로고(1991-1995).svg 음악의 세계 DJ

8. 사건사고

8.1. 마광수와의 라디오 진행

1992년 5월 4일,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104]가 김광석이 진행하고 있던 ‘밤의 창가에서’ 라디오 방송의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마광수가 간통죄[105]는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이라며 ”곰탕만 먹다가 닭곰탕을 먹을 수도 있지 않느냐“, “여자는 간통을 안하고 남자만 (간통을) 한다 치면, 여자는 모두 성불구자나 불감증 환자라는 말과 똑같다” 등 부적절한 발언과, 혼전순결을 부정하는 발언 또한 했으나 끊지 않고 그대로 송출했고,

사람이 도덕적인 틀에 얽매여서 진실을 왜곡할 때가 많다. 도덕성보다는 솔직성이 중요하다“라는 말에는 맞는 말이라고 동조를 했다는 이유로 같이 방송위원회 출범 이후 처음으로 각각 1개월, 3개월 동안 방송 출연금지를 받았다.[106]

이러한 방송위원회의 조치는 “아주 적절한 대응”, “외설과 상업성이 짙어져 가는 요즘 방송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현 상황에 제동을 걸려는 노력이다”[107] 등 찬성하는 입장도 있었지만, “토론을 거치거나 여론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판단했다”, “문제가 된 출연자를 선정한 제작진이나 방송국에 대한 제재가 더 타당하다”, “실적 쌓기에 급급한 것 아니냐” 등 방송위원회 향한 비판 여론 또한 상당했다.

김광석은 이 사건과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사건 이후 월간 잡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 사회가 기피하는 부분들을 은폐하려고만 하면 아이들은 어디서 알고 어디서 느끼냐, 나는 마 교수가 잘 했다고 본다”며 마광수 교수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 사건은 이후 벌어진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사건의 판결문 내 ‘범죄사실’ 부분에서 언급된다.[내용]

9. 사용 악기

10. 가족

아내 서해순과 결혼하여 1녀를 뒀다. 서해순과는 과거 서 씨가 재수학원을 다니던 시절 우연히 만났지만 얼마 안가 바쁜 스케줄 탓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공연장에서 다시 재회했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은 1990년 6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했지만 김광석의 공연 수입이 일정치 않은 탓에 서해순 씨는 계속 직장을 다니다가 이듬 해 5월 딸 서연이 태어나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딸 김서연은 1991년 5월 20일 생으로 자폐성 발달장애를 앓고 있었다. 김광석은 생전 딸을 끔찍히 사랑했고 딸의 이러한 장애를 가슴 아파했다. 서연은 아버지가 사망한 뒤 어머니 서해순 씨와 함께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외국 생활을 했다. 2002년 여름 어머니 서해순이 김광석 추모앨범 발매를 위해 잠시 대한민국에 들어왔을 때 잠시 한국에서 생활하다 이듬 해 다시 미국으로 떠나 2006년 여름에 완전히 귀국했다. 2006년 8월 김광석의 10주기 추도 콘서트에 직접 보컬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때의 인터뷰를 여길 참고하자. 그 뒤로 정확한 근황이 알려지지 않고 그저 미국 유학중이라고만 나왔으나 2017년 9월 보도를 통해 2007년 12월 23일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향년 16세. 유골이 청량산에 뿌려진 아버지와 달리 서연의 유골은 납골당에 안치되어있다.

11. 성격

좋은 인상답게 성격도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인. 특히, 후배들을 많이 아껴서 돈이 궁한 후배가 있으면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무대에 서기가 힘든 후배들을 위해 노래할 수 있는 무대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치킨 같은 먹을거리를 사서 후배들이 있는 대기실에서 곧잘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그래서 김광석이 오는 날에는 대기실에서는 치킨 냄새가 퍼진 날이 많았다고 한다. 갓 가수가 된 후배들을 위해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고 한다.

성격 까칠하고 주위 가수들과 자주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이은미도 방송에서 종종 김광석 이야기가 나오면 그리움과 슬픔에 눈물을 참았으며 가수 윤종신도 신인 시절에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친절히 말을 걸어 주었던 김광석을 회고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윤도현은 무명시절이 길었는데 힘들었던 무명시절에 김광석은 윤도현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많은 정신적,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110] 이에 윤도현은 김광석이 죽은 이후 매해 그의 추모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답하고 있다.

폐쇄적인 성격의 이소라도 김광석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방송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라이브 공연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또한, 가수 채환히든싱어2-김광석 편에서 김광석을 좋아해서 그가 태어난 동네까지 알던 정도로 김광석을 좋아했다고. 이것만으로도 그의 인간성이 증명되는 셈이다. 김광석의 후배 가수들이 그가 눈을 감은 후 그에게 보낸 메시지가 있으니 한 번 보는 것도 좋다.(링크) 알쓸신잡2에서 유희열이 김광석을 "광석이형."이라고 부르자 많은 사람이 이것을 국내에서 유희열이 가진 유일한 특권이라며 부러워할 정도로 국내 팬들과 가수들 사이에서 김광석은 여러모로 받는 대접이 남다르다고 볼수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와 마주해서 좋은 인간성에 감동을 받았다는 팬의 이야기도 여럿 눈에 띈다. 한 팬은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캔커피를 하나 사서 김광석에게 주었다고 한다. 김광석은 "보답할 수 있는 게 노래밖에 없네요"라고 대답하면서 즉석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또 한 팬은 춘천으로 입대를 하는 길이었는데 김광석을 춘천 가는 길에 만났다고 한다. 김광석은 "입대하세요?"라고 물어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주었다고 한다.

12. 여담

40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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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김광석씨가 알고싶다~!?
올린시각:95/08/26

1. 취미
악기 수집,주로 기탄데 아직 좋아하는 모든 기타를 다 갖진 못함. 5개쯤 되는 듯 함.

2. 좋아하는 (색, 음식)
두부, 녹차를 좋아하고 특히 녹차는 광적으로 좋아함.[118] 수박색과 고동색을 좋아함.

3. 용돈과 지출내역
일정치가 않아서 모르겠고, 대개 음반, 책, 술값으로 지출됨.

4. 좋아하는 가수/노래
Donovan, 김민기, 송창식. 노래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음.

5. 좋아하는 배우,영화
더스틴 호프먼, 커크 더글러스

6. 첫사랑
본인의 의사로 답하지 않음.

7. 이상적인 여자, 남자
부인

8. 즐기는 스포츠
수영

9. 스트레스 해소법
잔다

10. 자주 가는 곳
홍대 앞[119]

11. 혼자있을 때 주로 하는 일
책 보고, 텔레비전 보고, 잔다

12.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
새벽[120]

13.밤에 주로하는 일
책 보고,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 시청하거나 얘기

14. 기억나는 팬 선물
오랫동안 써온 일기를 내게 준 학생

15. 좋아하는 패션 스타일
청바지에 조끼

16. 버릇, 습관
목을 운동하듯이 돌리고, 쑥스러우면 웃는다.

17. 징크스
없음

18. 자신의 외모에 대한 생각
짧은 다리가 불만.[121]

19. 가장 아끼는 것


20. 스케줄 없는 날에 하는 것은?
애기하고 놀아주거나, 친구를 만난다.

21. 어릴적 꿈
아버지가 되는 것, 회사원

22. 팬레터는 하루에 몇통이나?
20통

23. 친한 연예인은..?
박학기

24. 신체상의 비밀은?
[122]

25. 즐겨 듣는 음악
포크송

26. 기억에 남는 여행은?
93년도에[123] 미국에 갔을 때..[124] 15박 16일 동안 갔었는데, 새로운 문화에 대한 기억이 인상적이었다. #

27. 노래 연습은 언제 어디서?
노래 연습은 거의 안하고, 기타 연습만 함.

28. 즐겨 부르는 노래(18번)
친구

29. 즐겨보는 TV프로그램
칠협오의[125]

30. 태어나서 가장 슬펐던 일, 기뻤던 일..
큰형이 돌아가셨을 때, 아기 태어난 날

31. 주량
소주 반병 ~ 2병

32. 담배
하루에 2갑[126][127]

33. 좋아하는 음식
두부

34.해보고 싶은 음악 장르
락, 블루스

35. 기억에 남는 콘서트
91년 7월에 마당세실[128]에서 한달동안 6 연했는데[129] 가장 기억에 남았음. 어렵게 혼자해서 기억에 남고, 반응도 좋았고 그 당시에는 콘서트를 자주 안 했기 때문에 공연도중의 멘트가 나의 진솔한 삶의 고백이었다. 그때의 좋은 기억으로 콘서트를 자주 하게 되었다.

36. 가수 이외에 하고 싶은 일
룸펜(..)

37. 어떤 상황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무응답

38. 소원
dobro라는 쇠로 된 기타를 갖고 싶음.

39. 보통 친구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에 하는 일
술을 먹거나 여행을 간다.

40. 노래를 하게된 동기나 루트,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선배가 노래하는 업소에 구경을 갔다가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 시작.

#

13. 참고 문헌



[1] 여권에 표기된 정식 영어 표기. # 그의 미국 공연 실황을 담은 영상에서는 'Kim Kwang Suk'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의 음악 행보와 김광석거리를 주제로 다룬 논문들의 표제의 영어 표기에는 'Seok'과 'Suk'이 혼용된다.[2]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특별시로 올라갔기에 출신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이다. 그의 주민등록번호(640122-1001817)의 지역란에는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00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민등록번호가 1968년 말부터 전 국민에게 순차적으로 부여되었고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될 당시에는 대구가 아닌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00이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이 발달하여 개인정보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지금이랑 달리 김광석이 사망한 1996년 당시에는 집 주소와 함께 주민등록번호가 뉴스에 그대로 공개되었고 공개된 시점에선 그가 이미 사망해서 주민등록번호가 말소되었기에 공개될 수 있었다.[봉덕동] 그의 친형인 김광복씨는 김광석의 출생지이자 생가를 남구 봉덕동 구 남도극장네거리 일대로 증언하고 있다. 4남매는 모두 범어동 본가에서 태어났고 막내인 김광석은 봉덕동에 있었던 번개전업사로 이사온 뒤 태어났다고. #[4] 빈소는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되었고 1월 8일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었다.[5] 현재 김광석의 음반 등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가 'With33엔터테인먼트'인데 이는 김광석이 사망할 당시의 세는나이였던 33세에서 따온 것이다.[6] 아내인 서해순이 발견 후 30분 뒤에 신고해 1시간 후인 새벽 4시 30분에야 병원에 도착하는 바람에 (심정지가 일어나고 4분 뒤부터 뇌에 손상이 가기 시작한다.) 서교동 자택에서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의료법상 사망 판정은 의사만 내릴 수 있기 때문에 법률상 사망 장소는 세브란스병원으로 본다.[7] 신체의 일부가 지상 또는 주위의 물체에 지지되어 체중의 일부만이 목을 조여 질식사한 것을 의미.[8] 본인 소유의 건물이었다. 1994년 10월 14일에 전입. 202호에는 팬클럽인 '둥근소리'가 들어와 있었고 403호에는 본인의 자택이 있었다.[봉덕동] [10] 마당이 넓고 옆에 과수원이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11] 김광석이 분가한 이후에도 부모가 살고 있었으며, 김광석의 모친 이달지가 2013년 건강 악화(치매)로 거취를 옮기기 전까지 거주하게 된다. 이후 2015년 11월 2일에 매각된다. #[12] 현재는 이정빌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3] 2003년에 유골과 사리가 뿌려졌다.# 위치는 불명. 유골이 산속에 뿌려진 관계로 추모 관련 행사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한 청광사에서 진행한다.[14] #[15] 1912년 당시 지적원도 참고. 힐스테이트 범어 101, 102동과 경신고등학교(대구) 건물 일대로 추정된다.[16] 결혼 이후부터 1994년 10월 13일까지 거주하였던 뉴타운삼호아파트의 주소. 공교롭게도 본적지 두곳 다 재개발이 진행되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사망진단서] 사망진단서에 적힌 본적지. 분가 등으로 본적지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18] 콘서트 중에 본인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며 밝혔다.[19] 이미 6살 때 서울로 이사를 갔지만 대봉동 본가에 계신 조부모의 건강 문제로 누나와 함께 1년 간 대구에서 보내다가 다시 서울로 간다. #[20] 6.25 전쟁 참전용사로 1953년 12월 28일 국방부장관 명의의 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제8보병사단에서 육군 대위로 복무했다. 아내 이달지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장병2묘역에 안장되었다.[21]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설화리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출신으로 김광석이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생가에서 2013년까지 살다 강북삼성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남편 김수영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장병2묘역에 안장되었다.[22] 사망 당시 최종 계급은 대위. 군복무 중 사고로 1980년에 순직했다고 김광석이 생전 언급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결혼을 이십 일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 생전에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28사단에 마지막으로 근무하였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이 되어있다. 제29묘역 2행 39열에 안장.[23] 김광석의 가족을 대표해서 서해순을 고소하러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다.[24] With33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김광석이 사망했던 해 당시의 세는나이였던 33에서 따서 이름을 지었다.[25] 개명 전 본명은 김서우였으며 자폐성 장애가 있었던 고인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기존에는 미국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2017년 9월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미 10년 전인 2007년 12월 23일에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자택에서 의식불명으로 발견되어 수원 아주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향년 16세로 사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납골함에 성도라는 글자와 크리스천을 뜻하는 십자가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무종교인인 부친과는 달리 크리스천이었던 듯 하나 원래 종교를 안 믿는 사람들고 장례식은 기독교식이나 불교식으로 종종 하기도 하니 확실하진 않다.[26] 큰형 김광동씨의 사망으로 구 병역법 제54조 1항의 4(부 또는 형제중 전사ㆍ순직자가 있는 경우)에 따른 방위병 복무.[27] 대광고등학교가 개신교계 고등학교였던지라 교회에 다녔었다고 한다. 동대문 동신교회에 출석했으며, 조영남의 교회 후배였다고.[28] 흔히 불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종교가 없다고 밝힌 적이 있다. 다만 '둥근 소리'라는 뜻의 원음(圓音)이라는 불교 법명을 받은 적이 있으며, 불교방송의 진행을 맡기도 했고 사망 당시 위패도 수안사에 안치되는 등 불교계와의 교류가 잦았다.[29] 원음이라는 법명은 불교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의 활동에 참가한 인연으로 법정스님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본인은 생전 이 법명을 매우 마음에 들어해 본인의 자택 이름을 '원음빌딩'이라 짓고, 팬클럽 이름도 원음을 직역한 '둥근소리'로 짓기도 하였다.[30] 공연을 계속 하여 '또 해?'라는 별명이 붙었다. 문화방송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려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또해 왔다"고 말해 그 별명을 알게 되었다고. 그러나 김광석 본인은 '해'라고 불러주길 원했다고 한다.[31] 김광석의 팬들과 그와 친했던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 사후에 친근한 이미지였던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붙은 호칭은 아니고,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쓰였다.[32] 또한 포크 음악을 리메이크한 다시 부르기 1다시 부르기 2 음반을 발매, 큰 인기를 끌며 한국 음악계에 '리메이크' 열풍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다.[33] 김광석 생전에 촬영된 영상 중 유일하게 김광석의 집 내부와 가족들의 모습이 나온 영상이다.[34] 위에서 세 번째의 얼굴은 그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이기도 하며, 다시 부르기 2의 앨범 커버에도 들어가게 된다.[35] 본적인 대구시가 별도의 광역자치단체가 아닌 경상북도 소속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대구직할시로 승격되고 범어동이 수성구에 편입되는 것은 그의 학생증이 발급되고 4개월 뒤인 1981년 7월에 이루어진다.[봉덕동] [37] 이때 어떤 사람에게 받은 회중시계에서 북한의 선전 유인물이 발견되어 간첩으로 의심받는 등 큰 곤혹을 치렀었다고 한다. 당시 반공 정서가 극심했던 것도 있었고, 거기에 교원노조 활동 이력이 있었기에 어떤 죄목이 만들어져서 남산으로 갈 지 몰랐기에, 결국 다시 입대해서 대위까지 복무했다.[38] 태극당 본점 뒤 골목이었다고 한다.[39] 김광석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1973년, 범어동 본가에 계신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김광석과 그의 누나는 다시 대구로 내려가 1년여간을 보낸 뒤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40] 원래는 대구 사투리를 썼던 것으로 보이나, 사투리로 또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는 본인의 회고로 보아 스스로 말투를 고친 것으로 보인다. 표준어를 구사한 김광석과는 달리, 그의 가족들은 사투리 억양이 약간 묻어나는 말투를 구사한다.[41] 1992년 6월 13일, 충남 예산에서 책마당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초청공연에서 안치환과 함께 나와 노래 부르는 유튜브 영상들이 있는데, 안치환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를 때 김광석은 바이올린을 주섬주섬 꺼내들고 연주한다.(#)[42] 중간중간 시도 적혀 있고, 노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43]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룬 노래였다. 김광석 본인의 회고로는 이때까지 돈이 생기면 맨날 친구들이랑 술만 마시고 다녀서, 주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생활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44] 사실 김광복은 김광석이 음악을 취미생활로만 즐기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런 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밤무대나 돌다가 대학에서 경고까지 받았다.[45] 과거 발표한 아침 이슬이라는 곡이 학생운동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 컸다.[46] 특히 아버지가 자신의 사촌이 음악판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적이 있었기에 더더욱 반대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생각이 바뀐 건 김광석이 노찾사에서 공연하는 것을 본 이후였다고 한다.[47] 이름은 김광석 본인이 직접 지었는데, 이 카페가 사람들 사이의 인연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길 바라는 의미였다고 한다.[48] 김지하의 시를 원작으로 한 노래.[49]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백기완 후보의 선거 유세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불렀다.[50] 친구들은 아마추어이길 원했으나, 김광석은 이미 음악을 직업으로 하기로 마음 먹은 상태였다.[51] 이때 부른 노래는 '거리에서' 였다.[52]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70년대의 대표 저항 포크가수로 유명했던 가수이다. 2021년 12월 24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53] 오랜 친구이자 학전 동료인 이창우가 만든 포스터[54] 실제로 그의 공연 기록을 보면, 최소 1달에 한 번 이상은 하였고, 1달 내내 하기도 하였다.[55] 1996년 1월 5일 오후 8시 ~ 1996년 1월 6일 오전 3시 30분[56] 20년 후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연극하듯이 장난처럼 갔다'는 비유적 표현이 와전된 것 같다고 해명했고, 이에 대해 손석희가 의문을 제기하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을 바꿨다.[57] 김광석의 사망 5주기였던 2001년에 작성한 딸 서우양의 추모글이다.[58]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유명한 영화감독.[59] 끝말에는 '지금은 Rocker가 된 도현이가' 라고 적었다.[60] 김광석 특유의 비브라토가 나오는 이유는 첫 번째. 김광석이 사람이 울음을 참을 때처럼 목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는 점과 두 번째. 울음을 참다가 터뜨릴 때 목을 잡은 상태에서 힘을 줘서 소리를 내듯이 비브라토를 해서 그렇다.[61] 타고나지 않은 일반인은 김광석처럼 발성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거기다가 완벽한 모창이면 김광석이 노래를 부를 때 느껴지는 필링과 연륜까지 모창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62] 히든싱어 김광석 편에서 예상과 다르게 4라운드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틀렸지만, 가수가 직접 부르는 게 아닌 음원 특성상 음원에 맞춰 연습을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해당 방송에서도 "~계절은~" 부분이 결정타가 되어 최종 우승을 김광석이 했다.[63] 오히려 국내 가수들에게서는 김광석의 이런 비브라토을 찾아볼 수 없고, 현재 전 세계의 트랜드를 선도하는 빌리 아일리시의 보컬에서 김광석의 그것과 흡사한 비브라토를 찾아볼 수 있다. 둘 다 목을 잡고 울먹이는 느낌의 비브라토인데,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64] 이게 뭔 대수인가 하겠지만... 발성에서 소리를 가장 많이 울려주는 주 공명기관이 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안 좋은 습관이다.[65] 목을 잡는 소리는 우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김광석은 '나의 노래'란 곡을 들으면 밝은 노래에서도 목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을 잡으면 노래에 힘을 싣기도 더 어려워져서 밝은 노래 부를 때는 오히려 방해된다. 즉 김광석을 노래를 부를 때 발성적으로 안 좋아서 목을 잡으면서 부른다는 소리. 게다가 목을 잡는 것은 목에 무리도 많이 가는 습관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광석은 1000회 공연을 무리 없이 해내고, 저음부터 고음까지 소리를 안정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66] 대단한 것은 고작 서른초반의 젊은 나이인데도 특유의 감성과 연륜이 느껴진다는 것이다.[67] 당시 라이브 자료는 지금도 유튜브에 업로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68] 록의 전설 로니 제임스 디오의 경우에도 발성학 코치들이 그의 발성법을 칭찬하면서도 성대를 마구 긁는 창법에 대해 목에 무리가 가는 창법이라 지적한다. 그런데 디오는 그 창법으로 60대 후반까지 멀쩡히 라이브를 했으며, 40대까지는 라이브에서 기복도 거의 없었다. 김광석이든 디오든 창법 자체는 일반적으로 봤을때 정석에 벗어났으며 목이 상할 수도 있는 방법은 맞지만, 정작 그 창법으로 부른 본인들이 멀쩡하다면 이것은 단점이라고 볼 수 없다.[69] 댓글을 보면 김광석의 편곡 실력 및 가창력에 감탄하는 내용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70] 댓글을 보면 김광석의 노래 같다., 김광석화 된다., 김광석은 모든 노래를 마치 자신의 노래처럼 부른다.며 감탄하는 내용들이 있다.[71] 이 이외에도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편곡하였고, 장기적으로는 시인과 촌장사랑일기를 편곡해 음반에 실을 예정이었다.[72] 김광석 1집, 2집 혹은 노래만 몇곡 부른 정도긴 하지만 동물원 1집, 2집.[73] 김광석 3집[74] 김광석 4집, 다시 부르기 2[75] 2집의 사랑했지만, 그날들, 사랑이라는 이유로나 1집의 기다려줘 등이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은 초기 대표곡들일 것이다.[76]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84년도에 음악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그의 4집은 94년에, 다시부르기 2집은 95년에 발매되었다.[77] '너에게', '기다려줘' 등[78] 대표적으로 다시 부르기 1의 '그루터기', '광야에서', 그리고 대학가요제에 초청가수로 나와서 편곡해 부른 '타는 목마름으로'가 있었으며, 본인의 노트에도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를 만들려던 흔적이 남아 있다.[79] 일기장에 적은 글, 콘서트에서 했던 어록, 나우누리 '둥근소리' 페이지에 올린 글들이 포함되었다.[80] '슈퍼 마리오 주제가', '마음의 이야기'와 같은 생전에 부른 음원이 남아 있다.[81] 정확하게 말하면 노래는 알아도 김광석이 불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82] 미투데이를 관리하던 회사가 만든 음악 어플리케이션이다. 2016년 11월 30일 이후에 서비스 종료 되었다.[83] 아내 서해순이 한국으로 귀국해 세운 'With33 엔터테인먼트' 가 총괄을 맡은 첫 사후앨범이다.[84] 2000년 긱스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85] 번역가로 활동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가사를 응모해서 당선되었다. 심현보가 어느 정도 가사를 다듬었지만, 정작 심현보는 작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오류] 기형도는 25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87] 현재는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16조에 따라 금지된다.[88] 실제 노트에도 이 부분을 금색으로 썼다.[89] 전남 진도 출신의 시인. 탤런트 김혜정의 전 남편이며, 음악 교과서에 수록된 국악가요 '소금장수'의 작사가이다.[오기] 398의 2번지가 아닌 398의 1번지이다.[91] 4.19 혁명 직후 민주화를 열망하던 교사들에 의해 탄생한 노동조합.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이다.[92] 이 날은 가수 이소라와 훗날 최초 4선 서울특별시장이 되는, 변호사로 큰 인기를 끌던 오세훈도 출연했다.[93] 그는 평소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하였으며, 상단 틀에 있는 서명에도 '행복하세요'를 적기도 하였다.[94] '미처 다 하지 못한', 107p[95] 응답하라1994 12회 # 이 영상 51초 지점에 1995년 김광석 슈퍼 콘서트 장면이 잠깐 나오면서 '사랑이라는 이유로'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서 나온다. 위 영상 1분14초부터.[수정1] 원 글에는 ‘허무함’ 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문맥을 고려하여 ‘허무한 것임’으로 수정하였다. 원문은 하단 링크 참조.[97] 김광석은 창신초등학교와 대구동덕초등학교 출신인데, 이 두 학교의 연혁(창신초 동덕초)을 살펴보면 김광석 사후인 각각 2001년과 1997년에 개축 혹은 이전하였다. 정보가 누락되었거나, 김광석의 출신 국민학교가 다를 수도 있다.[98] 28사단에서 장교로 복무했다.[99] 동물원의 멤버로 출연.[100] 1989년 1월 26일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101] 부산 동구의 국회의원이었던 통일민주당 노무현 의원과 함께 출연.[102] 박학기와 함께 출연.[103] 적어도 동년 10월 9일까지는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동년에 마무리하였을 것으로 추정.[104] 그가 집필한 '즐거운 사라'가 문제가 된 것은 3개월여 뒤인, 1992년 8월 20일의 일이다.[105] 당시에는 아직 현역이었다. 2015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정 이후 2016년 형법 조항에서 삭제된다.[106] 방송위원회는 처음에 각 언론사에 ’둘 다 모든 방송국의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의 출연을 금지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하였으나, 방송법에는 방송위의 이러한 권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출입기자들의 지적을 받고 불교방송 한정으로 출연정지 조치를 내렸다.[107] 원우현 당시 고려대학교 신방과 교수(1942~ )의 의견으로, 방송위원회의 결정에 찬성하긴 했지만 출연자의 발언은 개인적으로 납득이 간다는 입장을 밝혔다.[내용] 피고인 마광수는 (중략) 1991.5.4. 불교방송 F.M.의 "밤의 창가에서" 프로에서의 출연한 외설스런 발언을 이유로 '방송출연금지' 결정을 했다.[109] 일렉기타처럼 픽업장치가 달린 어쿠스틱 기타[110] 대표적으로 위에 언급한 치킨 에피소드. 치킨이 귀했던 당시 윤도현이 대기실에서 대기할 때마다 KFC 치킨이 놓여져 있었고, 공연 순회를 하는 내내 함부로 이 치킨을 먹지 못한 무명 시절의 윤도현은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파서 중간에 김광석에게 이 치킨을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광석은 웃으면서 먹어도 된다고 답했고, 그다음 윤도현이 대기실에 들어갔을 때 치킨 통이 2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 추가된 한 통에는 김광석이 자필로 "도현이 거" 라고 써놓았다고 한다.[111] 원음 圓音. 둥근 소리라는 뜻이다.[112] 위 발언을 한 시기가 죽기 1년전인 95년경이므로 아마 그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포크에서 몇발자국 나아가 락이나 블루스, 컨트리 적인 음악을 접목했거나 시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113] 1995년 8월 15일 콘서트에서 대중들 앞에 공개했다.[114] 별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먼 지역구의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이 분야별 대표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5공청문회'로 불리운 제5공화국의 비리를 조사하는 청문회에 참석하여 스타 정치인이 되었기 때문.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 교양강좌에 같이 참석한 사람 중에는 노무현이 청문회에서 질의했던 정주영있었다.[115] 1000회 공연도 여기서 했다.[116] 김광석은 김제동이 문선대에서 군복무중일 때 사망했기 때문에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이 때문에 김제동은 생전 김광석과 친분이 깊었던 윤도현을 엄청나게 부러워했다고 한다.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여러차례 부른 적이 있다.[117] 맞춤법을 비롯한 일부 수정이 된 글이다. 원본은 마지막에 링크가 있다.[118] 인터뷰중에도 녹차를 마시고 있었고 작성자에게도 먹으라고 했었다고 한다.[119] 자택이 홍대거리 안에 있어 매우 가까웠다.[120] 새벽에 주로 글도 쓰고 음악 작업을 했다고 한다.[121] 본인이 이와 관련하여 공연에서 밝힌 내용이 있다. 아는 지인이 오토바이를 타는 것을 보고, 40살때에(7년 뒤라는 언급으로 보아 공연의 연도가 1995년인걸로 보인다.) 할리데이비슨의 오토바이를 타고 싶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다리가 닿겠니?'라고 걱정을 했다고. 다행히 충무로 매장에서 시승한 결과, 닿긴 닿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122] '발사이즈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라는 언급으로 보아, 발의 크기와 관련이 있었던 듯.[123] 1992년에 미국에 갔지만 김광석이 1993년이라고 잘못 말한 것이다.[124] 10월 23일부터 24일까지 공연을 했었다.[125] 1994년 6월 1일부터 1994년 9월 14일까지 방영된 중화 텔레비전의 드라마. 국내에는 SBS를 통해 방영되었다.[126] 좀 줄이려고 하고 있었다고.[127] 즐겨피던 담배는 말보로 골드였다.[128] 대학로 상권에 있던 극장. 현재는 '씨어터 조이'라는 극장이 들어와 있다.[129] 6일 연속으로 공연하였다는 말인지는 불명. 7월 1일부터 31일까지 공연했다.[130] 김광석을 좋아하는 팬들 중에서는 이 광고를 '본좌의 노래를 망친다'며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실상은 본좌의 노래를 망친다기보다는 싱어송라이터의 본좌인 김광석의 이미지에 편승해서 아이유를 그만큼 노골적으로 띄워주려는 얄팍한 수작으로 보는 시선이 더 크다. 애초에 김광석만큼 서른 즈음에를 잘 부르는 가수 찾는 게 너무 힘들다. 아이유의 팬들로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류의 합성 CF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잡음처럼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아이유 본인은 해당 광고 제안에 김광석에 대한 오마주의 의도로 응한 것으로 보인다.[131] 이 편을 발판삼아 추후에 신해철, 김현식편도 기획에 이어 방송도 성공적으로 마쳤다.[132] 간혹 이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들이 가사에서 반복되는 '그대 잘 가라'를 제목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133] 주인공의 전생인 김석은 사망한 지 30년이 다되어가는(2023년 기준 27주기),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앨범이 실린(6개 음반 중 4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이라는 가사가 실린 노래를 불렀던, 미국에서 콘서트도 한 가수인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런 가수는 김광석밖에 없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김광석은 웹툰과는 달리 일용직을 뛰는 등 어려운 형편 속에서 노래를 시작하지 않았으며, (친구가 준 노래집을 읽고 민중가요에 관심을 가져 노래패에 들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다만 음대 진학을 포기하는 등 집안 형편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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