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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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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盧泰愚|Roh Tae-woo
파일:President_RTW.jpg
출생 1932년 8월 17일[1]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 용진마을[2]
(現 대구광역시 동구 용진길 172)[3]
사망 2021년 10월 26일[4] (향년 8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사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15안길 69[5]
묘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6]
재임기간 제13대 대통령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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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교하 노씨[7][8]
부모 아버지 노병수, 어머니 김태향
형제자매 남동생 노재우
배우자 김옥숙
자녀 장녀 노소영[9]
장남 노재헌
학력 공산공립국민학교 (졸업)
대구공립공업중학교 (전학)
경북고등학교 (졸업 / 32회)
육군사관학교 (11기)
종교 불교[10]가톨릭 (세례명: 사도 요한)[11][12]
신체 178cm[13] / AB형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2
약칭 [14]
관성(冠星)
용당(庸堂)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1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5년 ~ 1981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9공수특전여단장 (초대)
제9보병사단장 (26대)
수도경비사령관 (8대)
국군보안사령관 (21대)
병과 보병
참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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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태우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일생4. 개인적 평가5. 일화
5.1. 회의를 자주 하는 대통령5.2. 보통 사람 노태우5.3.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발언
6. 전두환과의 비교
6.1. 공통점6.2. 차이점6.3. 애증의 관계
7. 가족 관계8. 여담9. 별명10. 대중매체에서
10.1. 영화/드라마10.2. 만화/소설
11. 선거 이력12. 소속 정당13. 어록14. 각종 타이틀15. 저서1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취임 선서[15]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2. 약력

3.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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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 당시 전두환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태로 시해되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전두환을 따라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였으며 정국을 장악한 전두환이 집권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전향했다.

6월 항쟁 직후 6.29 선언을 발표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고, 신헌법에 따라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최초의 대선인 제13대 대통령 선거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되어 198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5공 청산론을 받아들여 군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정리하였고, 정치 활동이 금지된 재야인사들을 대거 복권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며 중도통합에 나섰다.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발맞추어 북방정책을 펼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여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였다. 또한 북한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등 제6공화국 모든 정부에서 추진할 대북정책의 기초를 수립하였고 19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대통령 각하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지 않은 대통령이며[22][23] 대통령이 국민 앞에 설 경우 처음으로 스스로를 '나'가 아닌 '저'로 표현하는 등 권위주의 시대의 끝을 알리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대통령 퇴임 후 12.12 군사반란5.17 내란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1997년 4월 17일 반란모의참여죄 등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아 확정되었다.[24] 이에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7년 12월 22일김영삼 당시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2002년 전립선암이 발병해 수술을 받은 이후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했다. 뒤이어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으면서 기본적인 거동조차 불편해졌고, 건강악화로 인해 2004년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론에 마지막으로 포착된 건 2007년 6.29 선언 20주년을 기념해 열린 만찬 식사자리에 참석했을 때였는데, 이 때는 이미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지팡이 없이 거동하지 못했으며 대화 역시 힘들어진 상태였다.관련 기사

2021년 숙환으로 인하여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21년 10월 26일, 향년 88세로 병상에서 사망했다.[25] 이로써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시작을 주름잡은 1노 3김시대는 완전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26]

3.1. 노태우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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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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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인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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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화

5.1. 회의를 자주 하는 대통령

파일:노김회담.png
1990년 6월 16일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회담
파일:노태우3김.jpg
1988년 5월 28일 원내 4대 정당 총재 회담
노태우 정부 시기에 회의를 굉장히 자주 했다고 한다.[27] 제5공화국 군정의 이미지를 벗고 문민 이미지를 심기 위해서 회의를 강화했으며, 덩달아서 정부 부처에서도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취임하고 얼마 뒤, 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름부터 '큰() 바보()'니 당신들이 많은 의견을 내 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보좌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서 회의를 자주 했다고 한다.

약간 유사할 수도 있는 증언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윤여준환경부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두 가지 의견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사안이 있으면 참모들끼리 회의를 해서 결정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적지 않은 사안들을 참모나 장관들에게 위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삼민주자유당 대표와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에서 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당 대표와 매주 만나서 국정현안에 논의하고 대화를 했다.

6공의 특징 중 하나인 국민과의 대화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같이 자주 하는 대통령도 있고 박근혜 대통령처럼 거의 안 하는 대통령도 있었지만 대부분 6공 대통령들은 국민과의 대화를 진행하여 소통 능력을 평가받았다.

5.2. 보통 사람 노태우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 선거 유세에서의 발언
대통령 선거에 쓰였던 슬로건인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말이 유명하다.[28] 이는 신군부 출신이지만 집권은 민주헌법 체제에서 이룬 노태우의 입장이 반영된 슬로건이다. 비록 노태우가 박정희, 전두환처럼 군부 독재 체제'에서' 집권한 건 명백히 아니지만, 노태우가 군부 독재 '출신'인 것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선 당시에도 민주화 열기 때문에 김영삼, 김대중에게 많은 부분에서 뒤쳐지고 있었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 둘이 서로 욕심이나 부려서 먼저 대통령 하겠다고 단일화 안 하고 뻗대고 있던 것과 대선 포스터에 걸렸던 이 문구 하나가 대선판을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노태우에게는 어찌 보면 고마운 수식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노태우 선거 캠프에서는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을 접하고 "아니, '보통 사람'이 무슨 대통령을 해? 이미지가 너무 약한 것 아니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노태우 본인은 "일반 국민들에게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구"라며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29]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이 특히 친근감 있게 다가간데는 1980년대 초반 최고 인기 드라마 "보통 사람들"의 영향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드라마는 1982-1984년까지 무려 491화가 방영된 역대 최장기 일일극으로 황정순, 이순재, 김민자, 강석우, 유지인, 이영하, 금보라, 송재호, 한혜숙, 정한용, 한진희, 조용원, 태현실 등 초호화 출연진으로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노태우의 선거 전략가들은 1980년대 경제 발전상과 중산층 확대된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낸 이 드라마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의미를 놓지지 않았고, 큰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대선 이후에도 취임식이나 각종 연설이 있을 때마다 상당히 많이 썼으며, 노태우 집권 당시 대한뉴스에서 가끔씩 선행을 베푸는 일반인들을 취재해 '위대한 보통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쓰면서 보도한 적도 있다. 노태우 선거 운동 조직인 '보통 사람들의 모임'에는 드라마의 히로인 황정순이 참여했다. 그녀는 드라마 팔도강산-보통사람들로 이어지는 한국 경제 성장의 상징이자 힘든 시절을 인내한 현모양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군사정권의 부정적 유산을 누그러뜨리고 긍정적 유산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88 서울 올림픽 성화에 불을 붙인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손기정을 예상했으나 이를 깨고 보통 사람 셋이 점화를 했을 정도로 해당 수식어에 신경을 많이 썼다.[30] 그 때문에 개그맨들이 노태우 성대모사를 할 때마다 이 말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며 본인도 "앞으로는 나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책적으로도 5공과의 고리를 끊고 상술된 문단에서처럼 회의를 장려한다든지 본인도 김영삼, 김종필 등 야당 인사들과 잦은 회동을 가지면서 이전에 있던 군사 정권, 권위주의 이미지를 타파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기에 보통 사람이라는 슬로건은 노태우와 노태우 정부를 상징하는 단어로 남게 되었다.[31]

상기한 바와 같이 대통령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써도 된다고 공언했던 것처럼, 그의 슬로건이었던 '보통 사람들'은 당시 풍자 만화가 주완수의 '보통 고릴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주로 1980년대 말 사회의 일그러진 모순을 고릴라의 모습으로 풍자한 책이었으며, 대표적으로 중간에 다음과 같은 노래 개사가 실려 있다.
새 나라의 대통령은 보통 사람입니다 / 잘난 사람 없는 나라[32] 우리나라 보통 나라
'보통 사람'이 프랑스어알랭 드 보통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이 두 사람을 엮으려는 사람도 있다.

5.3.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발언

1995년 10월 5일,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에서 노태우는 상식 이하의 망언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비난과 논란을 일으켰다.

中國(중국) 문화혁명희생 비하면 光州(광주)사태 아무것도 아니다 노태우씨 동창모임서 발언(동아일보)
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한겨레 신문)
광주사태 별 것 아니다” 노태우 전대통령 충격발언 요지(한겨레 신문)
노태우 대통령 발언 요지(동아일보)

파일:external/cache.clien.net/20150928144834_Ooh62T1Z_EB85B8ED839CEC9AB0_EBA79DEC96B8.jpg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952286-00_01035226.jpg

이날 노태우는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예전 중국에서 문혁 때 수천만 명이 희생 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고, 해당 망언이 동아일보사 시사주간지 <NEWS+(현 주간동아)> 10월 18일자에 보도되면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MBC, KBS) 이로 인하여 노태우는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고 그 당시에 비자금 사건도 터지면서 전두환과 더불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궤변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33] 당시 노태우의 망언에 정치권까지 듫끓게 되었고 집권당인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망언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수습하자고 대응했으나 국민들의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34] 결국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광주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35]

6. 전두환과의 비교

"전 대통령의 성격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뛰다 보면 기회도 많지만 자칫 남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립될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1999년 9월 월간조선에 실린 노태우 육성 회고록 내용

6.1. 공통점


많은 공통점들이 있는데, 특히 국군보안사령관과 민정당 총재, 대통령, 작전차장보는 노태우가 전두환의 후임이라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6.2. 차이점

6.3. 애증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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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대선 전당대회 당시의 노태우와 전두환
"역사는 그들의 우정에 돌이킬 수 없는 애증의 골을 심어 놓았다. 우리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들의 악연은 더욱 깊어져 갔던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 마지막 회 中
서술한 대로 전두환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였다. 군인 시절부터 줄곧 인생의 파트너[44] 이기도 했지만 대통령 재임 중 '5공 숙청'으로 전두환을 백담사[45]로 보내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본인이 직접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된 후 말을 듣지 않아 상당히 괘씸했다고 한다. 반면 노태우는 스스로 직선제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하였고[46] '체육관 대통령'인 전두환과 쌍으로 엮이는 것에 상당히 불쾌해 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자기도 같이 했으면서 이렇게 배신을 때리냐며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며 분노했고[47][48] 노태우는 전두환이 퇴임했으면서도 자신을 조종하려 드는 것에 반발했다. 전두환은 퇴임 직전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정치 기구를 만들고 퇴임 이후 본인이 의장을 맡으려고 했다.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국가 정책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노태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49] 또 노태우에게 닥치는 정치적 위기 대다수가 5공과의 연결 고리에서부터 오는 거라 전두환을 그냥 둘 수가 없었고, 결국 둘 사이의 골은 깊어졌다. 전두환 퇴임 이후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전두환이 백담사로 유폐되고 노태우가 전두환을 멀리하면서 노태우의 집권 기간에 둘은 전혀 만나지 않았다.

YS가 집권하면서 5공 청산이라는 전 국민적 요구 속에서 역사 바로세우기 정책을 밀어붙이며 둘다 위기감이라는 공통 분모하에 1994년 전두환 퇴임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강남 음식점에서 화해의 만찬을 가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 다 구속되면서 재판정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50]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자택을 지척에 두고서도 통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적으로는 1999년 노태우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07~1999) 여사가 사망했을 때 전두환이 조문해 20여 분간 독대한 것, 공적으로는 2004년 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전직 대통령들이 오찬을 가질 때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13일 전두환이 노태우의 자택을 방문했다. 당시 노태우는 뇌 질환으로 휠체어로 거동하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상당히 나빠져 자택에 갇히다시피 지내면서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전두환은 누워있는 노태우에게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겠는가"라고 물었고, 옆에 있던 부인 김옥숙이 "알아보면 눈을 깜박이라"고 말하자 노 전 대통령이 눈을 깜박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범 이후 근 30년여간 애증이 겹쳤던 묵은 정을 마지막이 되기 전에 미련 없이 풀어내려 했던 듯하다.[51]

그리고 2021년 10월 26일, 자신보다 1살 연상인 전두환보다 먼저 사망했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눈물만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정확히 4주 뒤인 11월 23일 전두환도 친구를 따라갔다.

7. 가족 관계


평균 자녀가 5명인 1930년대생임에도 자녀가 1남 1녀밖에 없다. 그럼에도 처가의 인맥과 사돈들의 인맥은 화려한 편이다. 아들 노재헌은 신동방그룹, 딸 노소영은 SK가와 사돈이었다. 처가 역시 노태우와 같은 군인 집안이다.

8. 여담

파일:/image/001/2015/11/25/PYH2015112505060001300_P2_99_20151125132705.jpg
둘 다 각자의 아버지와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

9.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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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중매체에서

10.1. 영화/드라마

10.2. 만화/소설

11.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5ba6><tablebgcolor=#fff,#1c1d1f><rowbgcolor=#005ba6>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7,040,477 (35.25%) 당선 (3번) 초선[65]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8,282,738 (36.64%) 당선 (1위) [66]
역대 선거 벽보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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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노태우 선거벽보.png
13대 대선 }}}}}}}}}
역대 후보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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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민주정의당 노태우 당선
2 통일민주당 김영삼
3 평화민주당 김대중
4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5 사회민주당 홍숙자 등록 무효*
6 일체민주당 김선적 사퇴
7 한주의통일한국당 신정일
8 무소속 백기완 사퇴
1: 당적이탈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12.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1 - 1990 창당
정계 입문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2 합당[67]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2 - 2021 탈당[68]
정계 은퇴
사망

13. 어록

시대순으로 배열하며, 일부 맞춤법은 현행에 맞춰 고쳤다.
"공산화가 되더라도 민족통일만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감상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볼 때 공산침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온 수십만 형제들의 소망과 울부짖음을 절대로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87년 8월 18일 대학생과의 대화
"우리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난이었고 둘째는 무지였고 셋째는 외침으로 인한 핍박이었습니다. 지금 소득분배의 불균형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지만 빈곤과 무지와 외침으로 인해 맺힌 한은 어느 정도 풀었습니다. 이런 한을 푸는데 급급한 나머지 민주발전은 뒷전에 처지고 만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시급한 것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권리와 자유를 골고루 나누어 갖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1987년 8월 18일 대학생과의 대화
"한국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역량이란 다름아닌 극단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극우이든 극좌이든 극단주의는 민주정치 발전과정에 대한 최대의 적입니다."
1987년 9월 16일 미 내셔널 프레스클럽 연설
"남북문제의 원칙은 ①긴장완화 ②평화공존 ③평화통일입니다. 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남북한 간에 국력의 격차도 생기고 주변의 변화도 올 것입니다. 올림픽을 치르면 우리는 '큰형'의 입장에서 북한과의 대화를 활발하게 촉진시켜 나갈 것입니다."
1987년 9월 19일 일본 기자클럽 회견
"대기업 위주로 경제를 운영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봅니다. 방향전환이 필요해요. 사실 대기업들은 정부지원을 많이 받았어요. 이제는 기업의 도덕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정부지원을 많이 받은 만큼 이를 사회에 환원시킬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69]
1987년 10월 29일 매일경제신문 기자와의 인터뷰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경제정의가 확실히 실현돼야 하며 계층간 지역간 격차의 완화를 위한 차원높은 시책이 이제부터 다듬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11월 10일 기자회견
"6.29 선언에 대해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느냐 항복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에 대해 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에게 굴복했습니다. 항복했습니다. 국민들이 원한다면 한번이 아니라 수백번이라도 항복을 해야죠."
1987년 11월 12일 관훈토론회
"만약 제가 집권할 때는 그야말로 부조리를 나로부터 척결한다는 것을 내정 제1의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70]
1987년 11월 12일 관훈토론회
"'보통사람'이란 잘난 것도 없지만 부끄러운 것도 없는 사람, 뽐낼 것도 없지만 꿀릴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것은 뽐내는 사람, 돈 있다고 해서 날뛰는 사람, 또 너무 많이 배웠다고 해서 독불장군인 사람입니다."
1987년 11월 12일 관훈토론회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 선거 유세에서의 발언[71]
"민주 광주직할시민여러분! 진정합시다!
이 노태우는 이미 6.29 선언에서 국민의 뜻에 따라 항복할 것을 결심한 사람입니다. 국민의 뜻에 이 사람은 따랐고 항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 여러분! 화염병과 돌이라는 폭력 앞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던지고 있는 화염병과 돌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화염병이며, 민족을 분열시키는 돌멩이입니다.
이 노태우, 한 사람의 희생으로 우리의 민주화와 우리의 화합이 이룩될 수만 있다면 이 한 몸 언제고 제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자제할 것을 호소합니다. 모든 모순된 감정을 누르고 우리 모두 화합합시다. 우리가 나아가는 화합의 길, 민주발전의 길은 아무도 가로막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다 같이 애국가를 부릅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1987년 11월 29일 광주광역시 유세 중 폭력시위대와 조우하자
"이 작은 땅덩어리에 남북이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지역 따라 쪼개지고, 종교 따라 갈라지고, 남자와 여자 다 차별하고,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쪼개지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먼저 사람을 쓸 때 지역출신을 묻지도 상관하지도 않고 능력 위주로만 기용할 것입니다.
이 노태우는 6.29 정신을 바탕으로 집권 후 최우선적으로 광주문제 해결에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대화합의 시대를 열어 나아갑시다."

1987년 11월 29일 광주광역시 유세 중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너무 잦아 성실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도 했습니다. 이 노태우가 당선되면 어느날 갑자기 식의 변동과 불안을 없애겠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안심하고 설계하고 또 설계한 대로 실현되는 '믿음사회'를 만들겠습니다."
1987년 12월 12일 서울 여의도 유세
"저는 새 공화국 새 정부민정당의 단독정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시켜나가는 전 국민의 화합정부라고 믿고 있습니다."
1987년 12월 17일 대통령 당선 인사
"이제 우리가 나갈 길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먼저 권위주의 체제의 껍질을 모두 철저히 깨뜨리는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구시대적인 권위주의로써는 우리 4천만 국민의 우수한 창의력과 탁월한 근면성을 발휘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헌신적인 봉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1988년 1월 15일 창당기념식
"우리 정부는 국민의 의견을 최대한으로 수렴하여 국민들의 국정 참여의 폭을 외교 측면에서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1988년 2월 4일 외교사절단 초청인사
"물가의 지속적인 안정이 모든 경제정책 목표 달성의 대전제라는 점을 명심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물가 안정의 기조를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주기 바랍니다. 선거기간 중 국민에게 공약한 조화된 사회·경제의 형평 이룩 등은 물가의 안정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88년 2월 4일 경제장관에 대한 지시 출처
"부의 부당한 축적이나 편재가 사라지고 누구든지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람과 결실을 거두면서 희망을 갖고 장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입니다.
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어느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198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나는 제24회 근대 올림픽 대회를 경축하면서, 서울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선언합니다.'
1988 서울 올림픽 개회 선언
"전쟁의 참화와 분단의 고통을 당해온 우리가 이제 화해와 평화의 횃불을 온 인류의 가슴속에 지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에 즈음해 국민께 드리는 감사 말씀’에서
"물, 그것은 마시면 들어가고 흘리면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물의 힘은 참 크지요. '물대통령'이란 별명 참 잘 지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989년 프랑스 교민 리셉션 중 별명 "물태우"를 가지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신사고에 의한 개혁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데 히말라야산맥이 높아서인지 한반도에는 아직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럽만이 아니라 이 지역에도 개방과 개혁의 물결이 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990년 한ㆍ소 정상 간 대화
"북방정책이라는 것은 가까운 길이 막혀서 도저히 갈 수 없다면 우회를 해서라도 가려는 것입니다. 더 먼 길이라고 하더라도 도중에 가시밭길이 있어 다리에 피가 나더라도 그것이 통일로 이르는 길일 때에는 우리는 서슴지 않고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북방정책의 기본 구상이며, 철학이기도 합니다."
1990년 MBC 창사 기념 특별회견에서
"페어플레이를 벌여야 할 경기장에서 난동을 부린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납될 수 없으며 특히 올림픽까지 치른 나라에서 이같은 행위는 더욱 용납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법과 질서를 바탕으로 해야 함에도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으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풍조는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관련자를 가려 법에 따라 엄정 처리하라."
1990년 잠실야구장 패싸움 사건 보고를 받고
"첫째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 둘째는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할 것입니다. 셋째는 과소비와 투기 또 퇴폐와 향락을 바로 잡아 일하는 사회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1990년 10월 13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우리가 유엔 가입을 신청한 지 42년 8개월, 오랜 기다림 끝에 회원국이 됩니다. 이제 남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던 어두운 타율의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1991년 시애틀 교민 오찬 연설에서
"국회는 어디까지나 여당이 이끌어 나가는 '여의도'가 되어야지, 야당에 끌려 다니는 '야의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지난날 여소야대의 국회가 주는 교훈입니다."
3당 합당 후인 1992년 제14대 총선 민주자유당 공천자 공천장 수여식 자리에서
"문화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 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 저거는 아무것도 아니야..."(MBC, KBS)
1995년 10월 5일,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 중(...)
"안 준다."
-1996년 내란혐의로 재판 과정에서 상봉한 전두환이 자신의 구치소에서 계란 후라이를 주는지를 묻자 한 말[72]
"사람들은 이제 고물딱지로 쓰레기통에 버렸겠지만, 10년 전의 오늘 6·29는 나에겐 목숨보다 소중한 길이 물려줄 보물이었다."
1997년 6월 29일, 수감생활 중 쓴 일기에서
"전 대통령의 성격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뛰다 보면 기회도 많지만 자칫 남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립될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1999년 9월 월간조선에 실린 노태우 육성 회고록 중 전두환과의 관계에서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
2020년 아들 노재헌 변호사가 헌화한 조화 리본 문구.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자신의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유언

13.1. 6.29 선언 전문

동지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 우리나라의 장래의 문제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 쌓여진 뿌리 깊은 갈등과 반목이 국가적인 위기로 나타난 이 시대적 상황에서 정치인의 진정한 사명에 대해 깊은 사색과 숱한 번뇌를 하여 왔습니다.

또한 학계, 언론계, 경제계, 종교계, 근로자, 청년, 학생 등 각계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또 국민의 뜻을 확인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의 구상을 주저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구상은 대통령 각하께 건의를 드릴 작정이고 당원 동지 그리고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뒷받침을 받아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본인의 결심입니다.

첫째. 여야 합의 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실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각료의 대다수가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으로 구성이 되어 자율과 개방을 바탕으로 대화와 타협 속에 민주책임정치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제도라는 저의 생각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다수 국민이 당장 원하지 않는다면 필경 그 제도는 국민과 유리되고 이에 따라서 탄생되는 정부는 국민과 꿈과 아픔도 함께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 시점에서 저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는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둘째.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는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새로운 법에 따라서 선거운동 투, 개표과정 등에서 최대한의 공명정대한 선거관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만 직선제라 하더라도 근거 없는 인신공격과 대중선동으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되고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 결국 국가안정을 해치고 진정한 민주발전을 저해해서는 안 되며, 정책대결로 선의의 대결을 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가 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 과거가 어떠하였던 간에 김대중 씨도 사면, 복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들 자손의 존립기반인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를 부인한 반국가사범이나 살상, 방화, 파괴 등으로 국기를 흔들었던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시국관련 사범들도 석방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도 민주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분수령인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 크게 웃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된다면 차기 대통령 선거가 국민의 축제로 승화될 것이고 새로 출현하는 정부는 튼튼한 국민적 기반 위에 위대한 나라 건설에 더욱 매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합니다.

이번의 개헌에는 민정당이 주장한 구속적부심 전면 확대 등 기본권 강화 조항이 모두 포함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정부는 인권침해 사례가 없도록 특별히 유의하여야 하며 민정당은 변호사회 등 인권단체와의 정기적 회합을 통하여 인권 침해 사례의 즉각적 시정과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는 등 실질적 효과 거양에 주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언론 자유의 창달을 위해서 관련 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의도가 좋더라도 언론인 대부분의 비판의 표적이 되어온 언론기본법은 시급히 대폭 개정되거나 폐지되어 다른 법률로 대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방 취재기자를 부활시키고 프레스카드 제도를 폐지하며 지면의 증면 등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여야 합니다.

정부는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하여서도 아니됩니다.

국가 안녕보장을 저해하지 않는 한 언론은 제약받아서는 아니됩니다.

언론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독립된 사법부와 개개인의 국민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여섯째.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각 부문별로 자치와 자율의 확대는 다양하고 균형있는 사회발전을 이룩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개헌 절차에도 불구하고 지방의회구성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하고 시도단위 지방의회 구성도 곧이어 구체적으로 검토 추진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의 자율화와 교육자치도 조속히 실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대학의 인사, 예산, 행정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고 입시, 졸업제도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수한 많은 학생들이 학비 조달에 큰 어려움이 없도록 관련제도를 보완하고 예산에 반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 정당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정당은 국리민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고 결집하는 민주적 조직체여야 합니다.

정당이 이러한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건전한 활동을 하는 한, 국가는 이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당 역시 국법 질서를 준수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의 갈등을 조화와 화합으로 이끌고 국론을 통일해 나아가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폭력을 써서라도 일방적인 주장만을 관철시키려는 야당이 있는 한 여당 역시 항상 양보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여덟째.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하여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시민이 안심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폭력배를 소탕하고 강도, 절도사범을 철저히 단속하는 등 서민생활 침해사범을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잔존하는 고질적인 비리와 모순을 과감히 시정해 나아가야 합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추방되고 지역감정이나 흑백논리와 같은 단어들이 영원히 사라져 서로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국민이 안정된 사회환경 속에 안심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시급한 당면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지속적 발전을 바라는 여러분의 기대를 등에 업고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 저는 이 시간을 감히 갖는 바입니다.

저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이 구상이 대통령 각하와 민정당 전 당원은 물론이고 국민 모두의 성원으로 뽑힐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저의 이 기본 구상이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앞으로는 이에 따른 세부 추가사항들이 추진될 것입니다.

만에 일이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아니할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아울러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 단임제의 실천으로 이 나라 헌정사에 민주주의의 깊은 뿌리를 심기 시작했고 물가 안정과 국제경쟁력 강화로 흑자경제를 이룩하여 국가 안보역량을 대폭 강화하면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우리 제5공화국 정부의 빛나는 업적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와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평화적 정부이양의 화합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눈앞의 크나큰 과제입니다.

또한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아니한 현 시점에서 국론이 분열되어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당하는 국가적 수치를 방지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간직한 채, 청년은 이상을 향하여 실력을 배양하고, 근로자 농민은 안심하고 일하며, 기업가는 창의적 노력을 더하고, 정치인은 대화와 타협의 노력을 기울여 미래를 설계하는 사회를 이룩해 나갑시다.

법과 질서가 준수되면서 생동하고 발전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위하여 저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나라는 우리 모두의 나라입니다.

조상과 선열의 뜨거운 피로 세워지고 다져진 이 나라를 땀과 지혜로 훌륭히 가꾸어 우리 후대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시대적인 책무입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한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려주어 세계사에 공헌할 수 있도록 국민적 슬기를 한데 모아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당원 동지 여러분과 야당 정치인 여러분.

저의 충정이 받아들여져 오늘의 난국이 극복되고 모든 국민 개개인이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나라를 열어가는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13.2. 제13대 대통령 취임사

친애하는 6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우리 헌정발전을 뒷받침해 주신 윤보선, 최규하 전직 대통령과 평화적 정부이양의 역사적 선례를 세우신 전두환 전직 대통령, 그리고 이 자리를 빛내 주신 세계 각국의 경축사절과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기 위해 성스러운 이 민의의 전당 앞에 모였습니다.

동아시아의 변방국가에서 세계의 중심국가로 뛰어오를 민족웅비의 희망찬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 나라에 민주정부를 세운 지 40년,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를 요청하는 역사의 조류 속에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아득한 옛날 이 땅에 민족의 터전을 일구어 오신 모든 선조들에게 깊이 머리 숙입니다.

저는 먼저 반만 년 동안 숱한 외세의 침략과 시련을 이겨내며 빛나는 문화전통을 창조하여 민족의 자존을 면면히 이어온 그 불굴의 민주독립정신을 가슴에 새깁니다.

가까이로는 손 마디마디에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형제자매 동포 여러분에게 새삼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들의 손은 가난과 전쟁에 시달려 아무것도 없는 맨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잘 살아 보겠다는 뜨거운 가슴으로 땀흘려 일한 우리들의 맨손에서 이 나라는 세계가 높이 보는 신흥공업국가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을 이룩한 민주국가로 커졌습니다. 참으로 우리 국민은 위대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국민적 저력은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격려를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민족사의 출발점에 서서 저는 오늘이 있기까지 땀흘린 모든 분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역사는 그동안 우리 민족을 여러 차례 시험해 왔습니다. 인내와 슬기, 국민의 뭉친 힘으로 모든 시험을 이겨낸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가 부과되고 있습니다.

민족 전체가 한 차원 높게 뛰어오르라는 명령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민족자존의 새 시대]를 꽃피우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바로 그 [민족자존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국민 여러분 앞에 엄숙히 선언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야 합니다.

능동적인 자기개혁으로 새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해야 합니다.

새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저 창공으로 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개척자의 창조적 정열로 낡은 틀을 깨뜨리고 온 국민이 민주와 번영을 누리게 하여 자유와 자존의 통일대국으로 비약할 때입니다.

새 시대는 분명히 변화하여 발전하고 쇄신하며 도약하는, 활력에 가득찬 진보의 시대인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의 지나친 다툼을 이제는 멈출 때입니다. 과거는 분명히 우리 모두의 자산이면서 반성의 거울이지만, 그것이 밝은 미래의 세계로 전진해 나가려는 우리의 발걸음에 끝없는 족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해 위대한 국민의 민주적 선택으로 40년 헌정사를 통해 쌓여 온 갈등의 찌꺼기는 모두 씻겨졌습니다.

이제는 지역감정, 당파적 이기심, 개인적 섭섭함을 이 새로운 출발의 광장에 모두 묻읍시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한 발짝씩 물러서는 호양의 정신아래 우리가 오늘 묻어 버리는 미움의 앙금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거두어들일 민주와 복지의 풍요로운 열매를 낳는 값진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 순간부터 온누리에 자유와 행복이 가득한 ´희망의 나라´를 바라보며 넓은 바다를 힘차게 헤쳐 나갑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도와 나침반이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저를 대통령으로 직접 뽑아 주셨을 때 다 함께 확인했고 합의했던 민주주의라는 지도이며 국민화합이라는 나침반입니다.

이제 새 공화정의 출범을 알리는 저 우렁찬 고동소리와 함께, 우리는 민주주의의 항로로 확실하게 전진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오늘의 유행어이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민주주의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정당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만이 모두가 자유롭게 살며 자유롭게 참여하는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 우리를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량성장과 안보를 앞세워 자율과 인권을 소홀히 여길 수 있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힘으로 억압하거나 밀실의 고문이 통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율과 참여를 빙자하여 무책임하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시대도 끝나야 합니다.

침해되지 않는 인권과 책임이 따르는 자율이 확보될 때 경제도 발전하고 안보도 다져지는 성숙한 민주주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성실히 사는 국민이 아무 두려움없이 어디서나 떳떳하고 활기있게 사는 사회, 국민 각자가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 되어 국가발전에 창조적으로 참여하는 민주국가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국민의 뜻을 담은 새 헌법의 발효와 함께 바로 이 시각에 탄생하는 새 정부는 바로 국민이 주인이 된 국민의 정부임을 선언합니다. 제가 이끄는 정부는 민주주의의 시대를 활짝 열어 모든 국민의 잠재력을 꽃피게 할 것입니다.

새 정부는 다원화된 사회 각 부분이 생동감에 넘친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의 권능을 다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국민은 정직한 정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국민의 비원을 반드시 성취시켜 도덕성이 높으며 그 도덕성으로 말미암아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곧바로 서 있는 물체의 그림자가 밝은 대지 위에서 굽어질 리는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지도층이 스스로 정직과 진실의 수범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지난 선거에서 저를 지지한 환성은 힘이 되었고 비판은 약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표를 주지 않았던 국민들의 마음도 깊이 헤아려 꼭 국정에 반영할 것입니다. 그분들의 비판을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야당과 반대세력에 대해서도 간곡히 호소합니다.

우리 서로 나라를 위해 함께 고뇌하면서 대화하고 대화하면서 협력합시다. 민주주의 개화와 겨레의 통일번영을 위해 협력의 동반자로 일해 나갑시다.

국민여러분.

우리는 또한 국민화합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저 푸른 바다를 헤쳐 나갈 것입니다. 70년대 이후의 발전사는 경제성장이 아무리 높고 지속적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이상으로 삼는 조화와 균형있는 행복한 사회에 도달할 수 없다는 냉엄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물론 고도성장은 우리의 물질생활을 보다 넉넉하게 만들었고 1차산업 중심의 우리 사회를 다원적인 산업사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나가는 길 도처에 암초를 만들어 놓은 것도 사실입니다. 계층간·지역간의 격차는 갈등과 분열을 낳아 국민적 통합에 큰 문제점을 던져 주고 있습니 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고는 민주복지국가를 향한 우리의 항해는 좌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갈등과 분열을 녹여 줄 훈훈한 화합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이룩한 고도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미치는 정직하고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와 모든 계층의 국민이 합심할 때입니다. 출신지역이나 성별이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부당한 특혜를 누리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국가 전체의 발전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유보되어 온 개개인의 몫이 더 이상 부당하게 희생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병든 사람은 치료받게 해주고, 어렵고 힘없는 사람은 부축을 받도록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기업인의 창의와 자유를 더욱 북돋는 한편, 근로자와 농어민과 중소상공인의 권익을 저는 최대한 신장시킬 것입니다.

나라의 내일을 짊어질 후세들이 수준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이상과 꿈을 수용하여 항상 개혁하고 새로워지는 진취적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하는 이 시대는 멀지 않은 미래에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넘겨져, 이들이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들의 꿈과 열정은 진보의 값진 영양소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학술과 문화예술의 진흥을 통하여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우리 국민이 찬란한 문예부흥의 시대를 창조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이 질높은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며 이웃을 이해하는 넉넉한 마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도록 힘 쓸 것입니다.

아울러 사회정의의 실현을 가로막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어떠한 형태의 특권이나 부정부패도 단호히 배격하겠습니다. 폭력과 투기와 물가오름세를 반드시 막고자 합니다. 부의 부당한 축적이나 편재가 사라지고 누구든지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람과 결실을 거두면서 희망을 갖고 장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입니다. 민주개혁과 국민화합으로 이제 우리는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화합은 정부의 정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피는 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온 국민의 화합을 정부차원의 해결과제로만 미루지 맙시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너그럽게 풀어 나가야 할 문제로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이런 뜻에서, 앞서가는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을 끌어 주면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가진 사람은 덜 가진 사람에게 자제와 아량을 보여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겨레의 큰 경사인 서울올림픽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50억 인류의 평화대축제가 바로 이 땅에서 열리게 됩니다. 세계 속의 한국을 새롭게 드러내는 민족 재탄생의 자리에, 너와 내가 따로 드러나지 않습니 다. 우리 모두 합심 협력하여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에 길이 기억될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승화시킵시다. 서울올림픽은 민족사적 의미에서, 이를 계기로 우리가 민족통일의 항로로 진입한다는 데 더 큰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의 물줄기를 타고, 12년 만에 처음으로 동과 서, 남과 북의 세계 모든 나라가 참가하는 이 화합의 거대한 합창은 한반도에 마침내 통일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렁찬 합창소리에 화답하여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모든 나라와 국제평화와 협력의 외교적 노력을 더욱더 하고자 합니다. 미국일본을 비롯한 서방과의 유대를 더한층 강화하는 한편 제 3 세계와의 우의를 더욱 굳게 하겠습니다. 우리와 교류가 없던 저 대륙국가에도 국제협력의 통로를 넓게 하여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할 것입니다. 이념과 체제가 다른 이들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북방에의 이 외교적 통로는 또한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분단의 조속한 해소를 열망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민족통일의 길은 낙관할 수 있는 길도 아니요, 비관 할 길은 더욱 아닙니다. 오로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길일뿐입니다.

때마침 우리 내부에서도 민족의 자존을 높이려는 분위기가 크게 자랐습니다. 이 기운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통일과 세계적 진출을 북돋을 힘찬 원동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자존의 바탕 위에서 민주역량을 다지고 안보태세를 강화하면서 통일의 길을 열어 나가야 합니다.

기회는 그저 기다리는 자에게보다 착실히 준비하는 자에게 먼저 온다는 교훈을 항상 기억합시다.

저로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재결합을 위한 길이 보인다면 세계 어느 곳이든 개의하지 않고 방문해 어느 누구와도 진지하게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 당국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공산국가들조차 거부하고 있는 교리적 이념을 민주의식이 체질화된 이 땅의 자유시민들이 수용하리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폭력이 아니라 대화가 분단을 해소하고 민족의 재결합을 가져오는 정직한 지름길임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대화의 문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 열려 있음을 확인합니다. 민족자존의 새 시대에 부응하여, 대화하며 공존하고 공존하며 협력함으로써 휴전선에도 이해의 봄을 가져옵시다. 그리하여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 함께 통일의 열매를 거둡시다.

관련 국가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한반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북한 당사자들이 민주적 방식을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 나갈 것 입니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의 전령사가 그 어느 곳으로부터든 서울을 방문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특별대우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에게 고통과 좌절을 안겨 주는 것으로 시작했던 20세기는 그 극복의 토대를 마련해 준 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수평선 너머에 활짝 핀 통일조국의 미래상이 우리를 손짓하고 있습니다.

이미 치솟고 있는 우리 국민의 저력과 민족적 자존을 국가적 도약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활활 태울 때 우리 조국은 분명히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끄는 세계의 젊은 거인으로 뛰어오를 것입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손에 넣게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선열과 국민이 희생을 했고 땀을 흘렸던 것입니까.

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어느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재주보다 평범한 상식을 지닌 여러 사람들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상식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또한 나라의 발전이 곧 국민 개개인의 자유·풍요·행복으로 이어지는 ´복지의 시대´ 입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 이 거룩한 단상에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자리는 국민 여러분이 만든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제가 서 있는 것은 국민 여러분의 명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와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는 국민 여러분들로부터 별개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저는 오로지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 국민과 함께 생각하는 대통령이 되기를 다짐합니다.

저는 국민을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끌려 다니는 대통령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꿈과 아픔을 같이 하는 국민의 동행자, 이것이 제가 진실로 추구하는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함께 걷는 민주주의´의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오늘 영광스러운 이 단상의 주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씩씩하게 그리고 단란하게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디딥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언제나 즐겨 부르는 민족의 노래, ´희망의 나라로···´ 가 그리는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이 가득한 나라´를 향하여 함께 나아갑시다.

국민 여러분.

저와 함께 전진해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1988년 2월 25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

13.3.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환영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성하、

내외 귀빈 여러분、

나는 오늘 세계 천주교 교회의 최고 지도자이시며 평화의 사도이신 교황성하의 두 번째 대한민국 방문을 온 국민과 더불어 환영합니다.

교황성하께서 친히 집전하시는 세계평화와 인류화합을 기원하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국토분단과 동족간의 갈등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한반도의 서울에서 열리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200여 년 전 스스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터득한 선각자에 의해 창설되어 이 나라가 겪은 수난의 근대사에서 늘 민족과 더불어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해왔습니다.

우리나라 천주교인들은 그 시작부터 스스로 깨우친 믿음을 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교회를 창설할 만큼 신앙심이 돈독했습니다. 우리는 천주교의 전교사상 유례가 없는 이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제왕정일본 식민통치의 박해、 그리고 가까이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으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왔으며 많은 거룩한 순교자를 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 천주교회는 방황하는 영혼에게 안식을 주는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무지를 깨우치는 학교였으며 아픈 자를 따뜻하게 치료하는 병원이고、 버림받고 갈데없는 사람들에게는 보금자리였습니다.

우리나라 천주교회가 오늘날 250만 신도를 거느리는 큰 교회로 자라서 이제 세계성체대회를 통하여 전세계 10억의 천주교 신도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된 것을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교황성하.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교황성하의 5년 전 첫 방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목숨으로 지킨 103위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모시는 시성식을 깊은 감동으로 지켜보았고、 성하께서 각계각층의 한국인들을 만나 사랑으로 축복하여 주셨던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후 한국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때 한국민을 갈라놓고 번민케 하던 갈등과 분열을 화해와 용서로 치유하고 모두가 억눌림이 없는 자유로운 사회、 그늘진 곳과 골 패인 곳을 밝히고 메꿔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축복을 받은 새 헌법과 새 공화국이 탄생하였고 모든 정치적 억압은 사라졌습니다.

1년 전에는 바로 이곳 서울에서 갈라진 동서와 반목하는 남북의 세계가 이념과 체제、 인종과 종교의 벽을 넘어 한자리에 모이는 인류 화합의 대축전 서울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는 교황성하께서 특별 메시지를 통하여 서울올림픽을 축원하여 주셨던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지난 세월 식민통치전쟁、 빈곤과 억압이 지배하던 이 땅에서 세계가 함께하는 평화와 우정의 한마당을 열어 화해의 새 국제질서를 앞장서 실현하였던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평화와 진보를 위한 새 국제질서가 널리 그리고 깊게 번져나가 인류의 전진을 막는 장벽이 헐리는 시대를 염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의 염원이 이렇기에 우리 모두는 자유와 평화、 사랑과 정의를 위한 교황성하의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존경과 공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행히 성하의 기구와 같이 오늘날의 국제질서는 오랜 냉전의 갈등과 이념의 대결로부터 화해와 협력의 새 질서로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갈등과 이견을 폭력에 의하지 않고 대화와 이해로 풀어가야 한다는데 전 인류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의 일부지역에서는 자유와 평화를 위배하는 이념의 멍에와 폭력에 대한 유혹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나는 교황성하께서 우리나라에 베풀어 주신 특별한 애정과 관심에 감사드리며 이 한반도의 대치하는 남북 간에도 사랑과 화해가 강물처럼 넘치는 시대가 하루속히 오도록 기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 길을 오신 성하를 손님으로 맞아드리게 된 것을 대한민국 모든 국민과 함께 기쁘게 생각하며 이번 성체대회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 세계에서 실현하는데 큰 진전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89년 10월 7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

14. 각종 타이틀

1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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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권
제7대
고재필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정무제2장관 (1981~1983)
1988년 정무제2장관 재신설
초대
노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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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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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부장관 (1982~1990)
<nopad> 전두환 정부
초대
노태우
제2대
이원경
제3대
이영호
제4대
박세직
<nopad> 전두환 정부 <nopad> 노태우 정부
제5대
이세기
제6대
조상호
제7대
김집
제8대
정동성
체육청소년부장관 (1990~1993)
<nopad> 노태우 정부
제9대
박철언
제10대
이진삼
1993년 문화부와 통합 }}}}}}}}}

파일:정부상징.svg
파일:행정안전부장관.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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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부장관 (1948~1998)
<nopad> 이승만 정부
초대
윤치영
제2대
신성모
제3대
김효석
제4대
백성욱
제5대
조병옥
<nopad> 이승만 정부
제6대
이순용
제7대
장석윤
제8대
이범석
제9대
김태선
제10대
진헌식
<nopad> 이승만 정부
제11대
백한성
제12대
김형근
제13대
이익흥
제14대
장경근
제15대
이근직
<nopad> 이승만 정부 <nopad> 허정 내각
제16대
민병기
제17대
김일환
제18대
최인규
제19대
홍진기
제20대
이호
<nopad> 장면 내각
제21대
홍익표
제22대
이상철
제23대
현석호
제24대
신현돈
제25대
조재천
<nopad> 장도영 내각 <nopad> 김현철 내각 <nopad> 박정희 정부
제26대
한신
제27대
박경원
제28대
엄민영
제29대
양찬우
제30대
엄민영
<nopad> 박정희 정부
제31대
이호
제32대
박경원
제33대
오치성
제34대
김현옥
제35대
홍성철
<nopad> 박정희 정부 <nopad> 최규하 정부 <nopad> 전두환 정부
제36대
박경원
제37대
김치열
제38대
구자춘
제39대
김종환
제40대
서정화
<nopad> 전두환 정부
제41대
노태우
제42대
주영복
제43대
정석모
제44대
김종호
제45대
정호용
전두환 정부 <nopad> 노태우 정부
제46대
고건
제47대
정관용
제48·49대
이상희
제50대
이춘구
노태우 정부
제51대
이한동
제52대
김태호
제53대
안응모
제54대
이상연
제55대
이동호
노태우 정부 <nopad> 문민정부
제56대
백광현
제57대
이해구
제58대
최형우
제59대
김용태
제60대
김우석
<nopad> 문민정부 1998년 총무처정무장관(제1실)과 통합
제61대
서정화
제62대
강운태
제63대
조해녕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행정자치부장관 (1998~2008)
<nopad> 국민의 정부
초대
김정길
제2대
김기재
제3대
최인기
<nopad> 국민의 정부 <nopad> 참여정부
제4대
이근식
제5대
김두관
제6대
허성관
<nopad> 참여정부
제7대
오영교
제8대
이용섭
제9대
박명재
행정안전부장관 (2008~2013)
<nopad> 이명박 정부
초대
원세훈
제2대
이달곤
제3대
맹형규
안전행정부장관 (2013~2014)
<nopad> 박근혜 정부
초대
유정복
제2대
강병규
제3대
정종섭
행정자치부장관 (2014~2017)
<nopad> 박근혜 정부 <nopad> 문재인 정부
초대
정종섭
제2대
홍윤식
제3대
김부겸
행정안전부장관 (2017~현재)
<nopad> 문재인 정부
초대
김부겸
제2대
진영
제3대
전해철
<nopad> 윤석열 정부
제4대
이상민
임시정부 내무부장 }}}}}}}}}}}}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fffff><tablebgcolor=#ffffff> 파일:대한체육회 심볼.svg대한체육회
역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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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일제강점기
초대
장두현
제2대
고원훈
제3대
최린
제4대
박창하
제5대
이동식
일제강점기
제6대
김규면
제7대
신흥우
제8대
유억겸
제9대
윤치호
제10대
유억겸
일제강점기
하지 군정
하지 과도정부
제11대
여운형
제12대
유억겸
제13대
정환범
제14대
신익희
제15대
신흥우
장면 내각
송요찬 내각
제16대
조병옥
제17대
이기붕
제18대
이철승
제19대
김동하
제20대
이주일
김현철 내각
제21대
이효
제22대
민관식
제23대
김용우
제24대
김택수
제25대
박종규
최규하 정부
제26대
조상호
제27대
정주영
제28대
노태우
제29대
김종하
제30대
김종열
제31-33대
김운용
제34대
이연택
제35대
김정길
제36대
이연택
제37대
박용성
제38대
김정행
제39대
강영중
제40대
이기흥
제41대
이기흥
권한대행
김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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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2대 국회의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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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민주정의당
61석
이재형 진의종 노태우 왕상은
유학성 이상재 서정화 박종문
강경식 황인성 ---- 박동진 이용훈
---- 나웅배 조일문 권중동 이성렬
김현자 배성동 현홍주 이영욱
---- 김영작 조상현 김영정 안갑준
---- 김성기 조종호 이상희 류근환
한양순 홍종욱 정창화 김종인
김영구 최병렬 강용식 송용식
지연태 임두빈 정현경 진치범
최영덕 임영득 김집 지갑종
최명헌 ~~~~ 이종률 조경목 김형효
---- 김학준 서정화 김두종 양경자
---- 문희갑 ~~~~ 김양배 정휘동 김장숙
---- 박혜경 이철우 안영화 최상진
이성호 이진 정호근 김중위
박성태 김정균 김태수 홍희표
김문기 정동윤 심국무 김종열
신한민주당
17석
신달수 임춘원 고한준 김형경
정재문 한석봉 윤영탁 신병렬
박종률 조영수 김병수 김동욱
이길범 김용오 장충준 최훈
신경설
민주한국당
9석
이태구 박해충 신재휴 손태곤
정상구 최운지 신동준 황대봉
송현섭
한국국민당
5석
---- 김종철 정시봉 문병하 김규원
최재구 조용직
}}}
}}}}}}

파일:민주정의당 심볼.svg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총재 및 대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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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총재
초대
전두환
권한대행·제2·3대
노태우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대표
초대
이재형
제2대
진의종
제3대
정래혁
제4대
권익현
제5대
노태우
제6대
채문식
제7대
윤길중
제8대
박준규
제9대
박태준
}}}}}}}}}}}}}}}

파일:민주자유당 심볼.svg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총재 및 대표 파일:민주자유당 심볼2.svg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총재
<rowcolor=#003990,#0070bb> 제1·2대
노태우
제3·4대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및 대표위원
<rowcolor=#003990,#0070bb> 초대
김영삼
제2대
김종필
제3대
이춘구
제4대
김윤환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1960년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1963년 12월 5일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1967년 6월 23일 육영수 영부인 대한민국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 12월 7일 홍기 영부인 대한민국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이순자 영부인 대한민국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손명순 영부인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이희호 영부인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권양숙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김윤옥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문재인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김정숙 영부인 대한민국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빌헬미네 뤼브케 영부인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 2월 1일 2월 7일 이스마일 나시루딘 국왕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7일 틍쿠 인탄 자하라 왕비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시리낏 끼띠야콘 왕비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5일 장제스 총통 중화민국
1968년 5월 10일 5월 18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반티에우 총통 남베트남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티마이아인 제1부인 남베트남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하마니 디오리 대통령 니제르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아이샤 디오리 영부인 니제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 엘살바도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영부인 엘살바도르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가봉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조세핀 봉고 영부인 가봉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 세네갈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영부인 세네갈
1980년 5월 11일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 5월 14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1981년 6월 25일 수하르토 대통령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5일 시티 하티나 영부인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9일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1년 6월 29일 틍쿠 아프잔 왕비 말레이시아
1981년 7월 6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필리핀
1981년 7월 6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필리핀
1981년 10월 13일 로드리고 카라소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1년 10월 13일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영부인 코스타리카
1982년 5월 10일 사무엘 도 대통령 라이베리아
1982년 6월 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자이르
1982년 6월 7일 보비 라다와 영부인 자이르
1982년 8월 25일 압두 디우프 대통령 세네갈
1982년 12월 21일 케난 에브렌 대통령 튀르키예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대통령 수단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영부인 수단
1983년 9월 10일 후세인 1세 국왕 요르단
1983년 9월 10일 누르 왕비 요르단
1984년 4월 9일 하사날 볼키아 국왕 브루나이
1984년 4월 21일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 카타르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감비아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치렐 자와라 영부인 감비아
1985년 5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 파키스탄
1985년 5월 20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6년 9월 4일 4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영국
1986년 9월 4일 4월 16일 보두앵 국왕 벨기에
1987년 4월 7일 아메드 압달라 대통령 코모로
1988년 11월 3일 이스칸다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8년 11월 3일 자나리아 왕비 말레이시아
1989년 11월 3일 11월 20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서독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프랑스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다니엘 미테랑 영부인 프랑스
1990년 6월 21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대통령 파라과이
1990년 11월 5일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 헝가리
1991년 9월 13일 아즐란 샤 국왕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13일 투안쿠 바이눈 왕비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25일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멕시코
1992년 8월 13일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과테말라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피델 라모스 대통령 필리핀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영부인 필리핀
1994년 11월 7일 11월 21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대통령 칠레
1994년 12월 5일 12월 9일 레흐 바웬사 대통령 폴란드
1995년 2월 7일 2월 16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1995년 2월 21일 3월 6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독일
1995년 3월 28일 4월 3일 젤류 젤레프 대통령 불가리아
1995년 6월 26일 7월 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 9월 26일 9월 29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아르헨티나
1996년 7월 23일 9월 4일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과테말라
1996년 7월 23일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브라질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스페인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왕비 스페인
1996년 11월 26일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국왕 말레이시아
1996년 12월 10일 12월 15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우크라이나
2000년 2월 22일 3월 3일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 이탈리아
2000년 2월 22일 3월 6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
2006년 3월 12일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 알제리
2007년 3월 26일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2007년 3월 28일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국왕 카타르
2009년 5월 1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카자흐스탄
2009년 11월 12일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페루
2012년 5월 30일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 스웨덴
2012년 11월 21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2018년 10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2019년 하랄 5세 국왕 노르웨이
2021년 6월 14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 오스트리아
2021년 6월 16일 펠리페 6세 국왕 스페인
2021년 6월 16일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비 스페인
2021년 8월 25일 이반 두케 대통령 콜롬비아
2021년 9월 21일 보루트 파호르 대통령 슬로베니아
2023년 7월 13일 안제이 두다 대통령 폴란드
2023년 11월 21일 찰스 3세 국왕 영국
2024년 11월 16일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 페루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004c97; border-right: 10px solid #004c97; text-align: center; margin: -0px -11px; margin-top: -12.5px; margin-bottom: -6px"
{{{#!wiki style="margin-left:10px; margin-right:-17px;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 display:inline-table"
<tablebordercolor=#ffffff,#1f2024><tablebgcolor=#ffffff,#1f2024> 파일:정부상징(1949-2016).svg }}}{{{#!wiki style="padding: 0px; display: inline-table;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tablebordercolor=#ffffff,#1f2024><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f2024>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004c97; border-right: 10px solid #004c97;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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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경제기획원장관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004c97> 신병현김준성서석준신병현김만제정인용
국토통일원장관 이범석손재식이세기박동진허문도
외무부장관 노신영이범석이원경최광수
내무부장관 서정화노태우주영복정석모김종호정호용고건정관용이상희
재무부장관 이승윤나웅배강경식김만제정인용사공일
법무부장관 오탁근이종원정치근배명인김석휘김성기정해창
국방부장관 주영복윤성민이기백정호용
문교부장관 이규호권이혁손제석서명원
체육부장관 노태우이원경이영호박세직이세기조상호
농림수산부장관 정종택고건박종문황인성김주호
상공부장관 서석준김동휘금진호나웅배
동력자원부장관 박봉환이선기서상철최동규최창락
건설부장관 김주남김종호김성배이규효최동섭
보건사회부장관 천명기김정례이해원
노동부장관 권중동정한주조철권이헌기
교통부장관 고건윤자중이희성손수익차규헌
체신부장관 김기철최광수최순달김성진이자헌이대순오명
문화공보부장관 이광표이진희이원홍이웅희
총무처장관 김용휴박찬긍박세직정관용장기오
과학기술처장관 이정오김성진전학제이태섭박긍식
정무제1장관 최광수정종택오세응이태섭정재철조기상이종률
정무제2장관 노태우
정무제3장관 김기수 }}}
}}}}}}}}}


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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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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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군부 단체사진 고화질(컬러).jpg
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소장 박준병 · 대령 이필섭 · 대령 권정달 · 대령 고명승 · 대령 정도영 · 준장 장기오 · 준장 우국일 · 준장 최예섭 · 대령 조홍 · 대령 송응섭 · 대령 장세동 · 대령 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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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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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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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61석
이재형 진의종 노태우 왕상은
유학성 이상재 서정화 박종문
강경식 황인성 ---- 박동진 이용훈
---- 나웅배 조일문 권중동 이성렬
김현자 배성동 현홍주 이영욱
---- 김영작 조상현 김영정 안갑준
---- 김성기 조종호 이상희 류근환
한양순 홍종욱 정창화 김종인
김영구 최병렬 강용식 송용식
지연태 임두빈 정현경 진치범
최영덕 임영득 김집 지갑종
최명헌 ~~~~ 이종률 조경목 김형효
---- 김학준 서정화 김두종 양경자
---- 문희갑 ~~~~ 김양배 정휘동 김장숙
---- 박혜경 이철우 안영화 최상진
이성호 이진 정호근 김중위
박성태 김정균 김태수 홍희표
김문기 정동윤 심국무 김종열
신한민주당
17석
신달수 임춘원 고한준 김형경
정재문 한석봉 윤영탁 신병렬
박종률 조영수 김병수 김동욱
이길범 김용오 장충준 최훈
신경설
민주한국당
9석
이태구 박해충 신재휴 손태곤
정상구 최운지 신동준 황대봉
송현섭
한국국민당
5석
---- 김종철 정시봉 문병하 김규원
최재구 조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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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수 진영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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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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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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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의 각 해마다 시사저널이 각 분야의 전문가 1000명에 칸타퍼블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했으며, 최대 3명까지 중복응답이 가능하였다. 해당 틀에는 1위만 기재함.
1990 1991 1992 1993 1994
노태우 김영삼
1995 1996 1997 1998 1999
김영삼 조사안함 김대중
같이 보기: 한국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종합) / 여권 정치인 / 야권 정치인 / 법조인 / 경제인 / 언론인 / 문화예술인 / 연예인 / 스포츠 스타
연도별 보기: 1990년대 / 2000년대 / 2010년대 /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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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구광역시 휘장_White.svg 대구광역시에 연고가 있는 역대 대통령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전두환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노태우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박근혜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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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적상 생년월일은 1932년 12월 4일생이며 재임 기간 중 양력으로 8월 17일 혹은 그해 기준 음력 7월 16일 # #에 생일잔치를 열었으므로 실제 생년월일은 1932년 8월 17일이다. 당시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아 출생신고가 늦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퇴임 이후 구속영장에 찍힌 출생신고일인 12월 4일이 생일인 것으로 알려져 가족 측에서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 노태우의 영결식날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은 전해철행정안전부장관은 출생일을 출생신고일인 1932년 12월 4일이라고 얘기했다.[2] 경상북도에서는 대부분의 시군이 1988년 이전까지 , 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가 아닌 을 썼다. 다만 상주시, 문경시, 경주시, 봉화군과 1963년 강원도에서 이관된 울진군은 1988년 이전에도 읍면의 하위 행정구역에 리를 썼다.[3] 신용동 596.[4]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날짜와 같다.[5] 제11·12대 대통령이었던 전두환과 이웃사촌이었다.[6]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었다.[7] 창성군파(昌城君派) 30세손 ○우(○愚) 항렬.(족보(1)족보(2))[8] #[9] SK그룹 회장최태원의 배우자이다. 현재 이혼 소송중이지만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나오지 않아 법적으로는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0] 불자였던 조모의 영향으로 참선을 배웠고, 모친은 파계사 신도회장을 지냈고, 노태우 본인도 대구 팔공총림 동화사 신도였는데다 대통령 후보 시절 불교방송국 설립 허가를 공약으로 반영해 재임 시절인 1990년, 불교계 유일의 지상파 방송인 BBS 불교방송의 개국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여러 승려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또한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노태우의 종교가 종교여서 그런지 유독 서유기 관련 만화나 어린이 연극이 활발하게 공연되었다. 특히 노태우 본인은 젊은 시절부터 참선에 몰두해, 한 번 숨을 들이쉬어 1분 동안 천천히 숨을 뱉을 만큼 호흡 조절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11] 출처. 2006년 경, 꽃동네의 창립자인 오웅진 신부에게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며, 부인 김옥숙 여사도 2021년 4월에 남편을 따라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입관식은 가톨릭식으로 진행되었다.[12] 흔히 2012년에 병상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개신교개종했다고 알려져 있었고, 기사도 난 바가 있었지만, 이미 2006년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이 사망 과정에서 알려지면서 틀린 말이 되었다.[13] 노년에는 키가 줄어 175cm였다.[14] 1987년 대선 당시에는 1노3김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노태우의 약칭이었는데 이후 노무현이 훨씬 더 유명해졌다. 현재는 盧라는 약칭은 주로 노무현을 지칭하며, 노태우는 풀네임으로 많이 불리는 편이다.[15] 8차 개헌으로 인해 12대부터 취임 선서의 시작 문구는 국헌을 준수하고에서 헌법을 준수하고로 변경되었다. 즉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이기 때문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바뀐 취임 선서는 전두환이 처음으로 읽었다.[16] 7월 11일 대장 진급신고 후 나흘 만인 15일 전역했다.[17] 재임기간: 1981년 7월 16일 ~ 1982년 3월 20일.[18] 원래는 본인이 살고있고, 또 친구인 전두환이 살고있는 연희동이 포함된 서대문구에 출마하려고 했는데,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돌풍으로 전국구로 순회했다는 말이 있다.[19]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서 대행.[20] 전당대회에서 당 총재로 선출하기 전까지 김영삼을 포함한 김종필, 박태준과 함께 최고위원 신분이었다.[21] 취임한지 3주만인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그해 9월 18일에 명예총재직 사퇴 및 탈당[22] 제6공화국 이전까진 대통령 취임식과 같은 국가 행사를 비롯해 언론에서 대통령을 각하로 호칭했다. 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모두 당대에 각하 호칭이 붙었던 대통령이다.[23] 다만 김영삼 대통령 시절까지는 청와대 내에서는 각하라고 불렸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청와대 내에서도 각하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대통령님으로 부르게 되었다.[24] 대법원 1997.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25]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사망 날짜가 같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10.26으로 인한 타살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참고로 이날 청와대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가 청와대에서 회동했다.[26]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일로부터 4주가 지난 2021년 11월 23일, 그의 오랜 친구였던 전두환도 노태우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27] 총리실에 근무했던 정두언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언급되었다.[28] 이 단어는 남재희김학준이 대선 연설문에서 제시한 단어였다. 남재희가 "위대한 평민의 시대"라는 문장을 만들고 김학준이 평민을 보통 사람으로 다듬은 것.[29]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이 내용이 그대로 언급된다. 극중에서 이미지가 너무 약하다고 타박했던 사람은 경북고-육사 동기인 정호용이었다.[30] 이 문제는 원래 손기정이 예정되어 있으나 손기정 선수가 너무 열성적으로 성화봉송을 연습한 나머지 그만 개막식 2일 전 밤에 기자들에게 들켜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순서를 바꿨다. 손기정 선수는 막판에 결정이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질 정도로 분노했다고 외손자가 증언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성화봉송 점화 직전 마지막 주자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했다.[31] 특히 김영삼은 3당합당 이후 국정운영 방향을 결정할 때 청와대에 불러서 자주 독대하곤 했었고, 임기 막판에는 민자당에서 탈당까지 했던 것도 김영삼의 6공색 탈색에 대한 불만이란 해석 못잖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란 해석도 만만찮다. 이외에도 참모격인 박철언, 김용갑, 최병렬 등도 청와대에 거의 상주시키면서 필요할 때마다 불러서 국정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32] 별난 사람 없는 나라 or 별딴 사람 없는 나라 버전도 존재. ''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군인 출신들이 정치를 하지 않는 나라'를 은유한 것으로도 보인다.[33] 노태우,자신의 광주사태 발언 공식 사과 [34] 盧泰愚(노태우)씨「光州(광주)」발언 커지는 파문…정치권“술렁” "경솔한 언동[35] 盧泰愚(노태우)씨「광주발언」공식사과 기자회견"5.18피해자가족에 상처줘 미안" 국민회의등 與野(여야) 수용태세 盧泰愚(노태우)[36] 이 당시의 제2정무장관은 현재 여성가족부장관과는 업무가 다르다.[37] 전두환은 실제로 육사 입시 도전 전에 갑종장교에 지원하여 떨어졌고, 육사도 추가합격으로 겨우 붙었다. 당시에 6.25 전쟁 중이라, 전쟁터에 끌려갈 것을 걱정하여 수많은 입학 포기자들이 있었다. 일본의 방위대학 역시 이라크 전쟁 당시 파병의 위험성 때문에 입결이 급락하였던 적이 있다.[38] 이 외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도 우리 돈 10억원에 달하는 정치자금을 제공, (예상 못한 자금제공에) 고르바초프가 당황해 하더라는 일화가 95년 비자금 파동 당시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사실 과거에는 외국 국가원수나 고위급 회담이 이루어지면 대통령이 정치자금 등 여러가지 편의를 봐주는게 동양권의 외교 관례였다고 한다.[39] 사실 노소영에 대한 동정 여론이 있는 것도 노태우의 평가와 관련이 없다 보기 힘들다. 노태우가 아니라 전두환의 딸이 같은 일을 겪었으면 아버지의 죄를 딸이 돌려받는다는 여론이 높았을 것이다.[40]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당시 한국 내외 여러 은행 구좌에 돈을 분산해놓은게 탄로나 구설수에 올랐다. 계좌 각각의 액수가 아닌, 총액한도를 문제삼는 규정에 걸려 탈이 난 것.[41] 손자녀까지 포함하면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2023년에 사죄한 바가 있지만, 이쪽은 친가와 절연하고 할아버지를 맹비판하는 쪽이기 때문에 엄연히 노태우의 대역 격으로 참석한 노재헌과는 결이 매우 다르다.[42] 노태우는 5.18에 대해 사과하고 추징금도 적극적으로 완납한 반면 전두환은 아무런 반성없이 살면서 결국 추징금도 다 안 내고 사망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노태우는 직접선거, 즉, 국민들이 원해서 뽑아준 합법적인 절차로 대통령이 된 인물이지만 전두환은 간접선거라는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43] 전두환은 구순을 세고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44] 노태우와 부인 김옥숙 여사의 결혼식 사회를 전두환이 보기도 했다.[45] 당시에는 수도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 그야말로 문명과 단절된 곳이었다.[46] 노태우는 이 직선제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떳떳한 직접선거로 대통령이 결정된 마지막 선거가 박정희의 첫 선거였으니 꽤 오래 전 과거이고, 본인이 신군부의 핵심 일원이었던 데다 국민들의 적극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군사정권이 물러났음에도 직후 대선에서 국민들에게 정식 대통령으로서 인정받은 것이다.[47] 정치적으로 여태 있던 비리를 폭로하는 것만이 아니라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전두환의 참석도 막았다. 국민 감정을 고려한 선택이지만 본인의 노력과 지원으로 이룬 올림픽 개최인데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니 상당히 불쾌했을 듯.[48] 노태우는 전두환에게는 친구였다. 그런 이유로 쿠데타도 노태우와 함께 주동했다. 그리고 친구라는 이유로 전두환 입장에선 자기 사람 챙긴답시고 핵심 요직인 내무부 장관 임명, 그리고 끝으로는 대통령 후보 공천까지 줬는데 자신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행동을 취하자 격분해버린 것.[49]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 40회에 나오는 두 사람의 연기로 잘 드러난다. 전두환이 득의양양하게 노태우에게 자신이 정치에 관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을 듣고 똥 씹은 표정이 되는 것을 애써 참고 미소를 짓는 노태우의 모습을 이덕화, 서인석 두 배우가 기가 막히게 표현해냈다.[50] 2005년 MBC에서 방영된 제5공화국의 마지막 화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두 사람이 검사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전두환은 친구라도 너무 가깝게 두고 요직을 주면 언젠가 뒤통수를 칠 것이다.란 걸 강조했고 노태우는 정치적 위기 때 전임자 격하, 언론 장악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안되면 자리 물려주고 도망가라.라고 했다. 이 가상 일화는 노태우는 "청와대에 있었을 적 저걸 그대로 실천했으나 마지막을 실천하지 못해 지금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했을 수도 있다.[51] 비슷하게 김영삼 전 대통령도 2009년 여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여 애증을 풀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식을 찾지 못하던 상태여서 화해를 이루진 못했다. 대신 김대중의 국장이 끝난 이후 동교동계 출신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위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동교동계 의원들도 조문을 하는 등 양김의 복잡한 인연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52] 이혼 소송 중에 있으나 아직까진 사위다.[53] 사실 스스로부터가 노태우랑 합당하는 등 공조 관계를 형성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54] 민관식이 사망하기 직전 중앙일보에 회고록을 연재했는데 전두환은 체육계 전반에 관심이 많아 집무 당시에도 자신을 종종 찾았고, 심지어 퇴임이 임박했을 때도 사람을 보내 몰래 본인 비자금을 풀어 체육시설이나 인프라 확충에 투자를 했다. 하지만 노태우는 아예 관심이 없고 투자도 미비했었다고 밝혔다.[55] 권한대행까지 범위를 넓히면 참여정부 시기 고건국무총리의 아버지 고형곤 전 전북대학교 총장도 포함.[56] 키가 178cm#로, 사실 1930년대 생 치고는 키가 훤칠한 편이고 너무 몸이 옆으로 벌어지거나 골격 전체가 큰 것도 아닌 날씬한 체형이라 외모적으로 어필한 측면도 상당히 있으며, 기본적인 표정이 웃는 상이라 이미지에서 호감을 준 측면도 크다. 대통령 이전과 이후 촬영된 사진들만 봐도 전두환, 김영삼보다 확실히 크며, 김종필보다도 약간 크다. 근데 사실 오히려 노태우는 유전자에 비해 못 큰 편이라고 하는데, 요절한 노태우의 아버지 노병수는 키가 189cm인 엄청난 장신이였다고 한다. 사실 젊은 시절 외모는 김대중, 김영삼이 더 낫다고도 할 수 있다.(특히 김대중은 젊었을 때 언변이 탁월했고, 김영삼은 임기응변이 뛰어났다.) 김대중도 나이가 들어서도 무난한 외모였고, 김영삼은 민주화 운동으로 고생을 많이 했고 60대에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미남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사실 그도 젊었을 때는 외모가 준수했던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양김은 1987년 대선 즈음엔 이미 모두 60대 노인들이었으니...[57] 흔히 노태우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등을 평가할 때 중요하게 다뤄지는 요소 중 하나가 '준수한 외모' 이다. 정치인을 신념이나 재능, 정책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한다는 것이 좀 웃기게 보이기는 하지만 현대와 같이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호감가는 외모가 정치인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정치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창구 자체가 현재보다 훨씬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인 만큼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정치홍보물인 선거 포스터 등에 멋있게 나와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호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뭐 사람 생각이라는 게 순식간에 바뀌는 건 또 아닌지라, 오늘날에도 별반 차이는 없다. 문재인이 당선되었을 때에도 그의 외모를 보고 뽑았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22대 총선 조국혁신당 돌풍 때도 조국의 외모(용모)가 플러스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도 마찬가지인데, 트럼프가 힐러리보다 폼이 난다는 이유로 그를 찍은 유권자들이 많이 있었을 정도. 1920년대에는 워런 G. 하딩이 생소한 인물이었음에도 준수한 외모 덕에 높은 지지도를 얻은 바 있다.[58] 다만, 노동자 출신 시인으로 유명한 박노해 같은 이는 "화이트칼라들은 노태우의 외모가 호감형이라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저렇게 간사해보이고 기분나쁜 얼굴이 또 없다! 사람의 외모를 두고서도 계급적 입장이 이렇게나 다르다!"라고 맹렬하게 디스했다. 기본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을 혐오했던 박노해가 아무 말로 노태우를 디스한 것이기는 하지만... 육체 노동자의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던 당대에도 별로 고생 없이 산 것처럼 탱탱하고 부드러운 인상이 호감가는 외모로 받아들여지고 거친 환경과 고된 노동에 시달려 거칠고 까맣게 타고 주름도 많은 외모는 '초라하고 거칠어 보인다' 고 받아들여지던 세태에 대한 풍자로 보기도 하니, 참고하여 각자 알아서 판단하자.[59] 실제로 '이' 씨도 '리(Ли/Ри)'로 옮긴다. 대체로 북한 쪽 인명의 경우 Ри로 쓴다.[60] 민주자유당과 김복동에게 러브콜을 보내던 통일국민당.[61] 오히려 김영삼과 비슷한 분위기의 외모에 가깝다.[62] 여담이지만, 드라마 제5공화국에 따르면 정무제2장관 임명 당시 노신영의 권유로 부총리급으로(외교상 직책) 격상하여 임명하려 했으나 허화평의 반대로 무산되는 것으로 그려진다.[63] 여담으로 김기섭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쪽도 나름대로 싱크로율이 상당한 편이다. 실존인물이 살집이 더 있고 눈매가 서글서글한 편인걸 감안하면 거의 판박이 수준. 거기에 배우가 증량을 한지라 특수분장까지 더해져서 빼다박은 수준으로 싱크로율이 높다.[64] 상술했듯이 1995년 10월에 했던 망언에 대해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과했고, 소뇌위축증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 아들이 아버지의 반성의 뜻을 이어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사죄하고 헌화했으며, 그의 유서에도 마지막까지 사죄의 뜻을 밝혔다.[65] 1987.12.20. 사퇴. (제13대 대통령 당선)[66] 역대 대선(직접 선거, 간선 모두) 당선인 중 최저 득표율.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 합당)
[67]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68] 대통령 임기 말인 1992년 9월 18일에 탈당계를 제출했고, 약 2주뒤인 10월 5일 탈당.기사[69] 벤처기업, 강소기업, 스타트업 등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한것은 국민의 정부 이후이며 제대로 성과를 보기 시작한건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친 이후이지만 첫 삽을 떴던건 노태우 정부였다. 다만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완전히 버리진 못해서 노태우 본인도 이동통신사 관련해서 사돈인 SK에게 특혜를 줬다는 의혹이 있다.[70] 정작 노태우는 재임 중 수천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1996년 사법처리되었다. 게다가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에서는 친위 쿠데타를 계획했음이 드러났다.[71]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이 파문을 일으켰을 때 KBS 9시 뉴스에서 해당 발언을 인용하여 비자금 의혹을 보도하기도 했다.KBS 9시 뉴스 1995.10.24. 믿어주세요?[72] 이에 전두환은 "우리도 안 줘."라고 답변했다.[73] 이는 후임 대통령들까지 쭉 이어지다 이명박 전 대통령 때서야 깨지게 된다. 다만, 후임 대통령들과 탈당 사유는 다르다. 당시 김대중을 비롯해서 범야권 진영에서 선거를 공정하게 치를 수 있도록 중립 내각 구성을 요구했는데, 노태우가 이를 받아들여서 현승종을 중립내각의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자신 역시도 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것이다. 다시 말해, 후임 대통령들 같은 경우 임기 말 레임덕으로 여당의 대권후보를 중심으로 탈당 요구를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74] 이후 전두환, 노무현, 박근혜, 이명박 순이다.[75] 당선 당시 득표율은 36.64%. 이후에 당선된 김영삼은 41.96%, 김대중이 40.27%, 문재인 41.08%로 40%는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적은 득표율이다. 이는 야권이 3김으로 분열되면서 표가 분산된 것에 따른 영향이 크다. 만약, 3김이 단일 후보를 내세웠으면, 노태우는 역대 대통령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만큼 운이 많이 따랐던 선거. 참고로 가장 많은 득표율은 박근혜의 51.55%이다.[76] 한편 재임중 모친상을 당한 대통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재임중 부친상을 당한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이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77] 취임 당시 만 55세로 현재까지 6공화국 최연소 대통령이며, 이전 대통령들을 포함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 46세로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다.[78] 29%.[79] 25%.[80] 외국에선 이토 히로부미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도 같은 시기에 사살되었다.[81] 역대 한국 대통령 사상 화장 방식으로 장례를 치른 최초의 대통령은 16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유지에 따라 수원 연화장에서 시신이 화장되었다. 노태우 본인도 국법에 따라서 검소하게 하고 화장해서 파주에 안장해 달라는 유지에 따라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고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 이로서 노씨 성을 가진 두 대통령 모두 화장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고 이후 전두환 11.12대 전 대통령도 역대 대통령 사상 3번째로 화장되었다.[82] 이는 공통면제대상 부분은 제외되었기 때문이다.[83] 첫 번째는 김영삼 전 대통령.[84] 다만 대장 진급은 박정희, 전두환 뿐만 아니라 노태우도 비정상적인 경로로 진급하긴 했다. 박정희, 전두환도 집권당시 원래 소장으로 전역할 예정이었는데 셀프진급해서 대장까지 진급하고 전역한 것.[85] 현재 예비역 대장 출신 현역 정치인은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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