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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deded><colcolor=#000> | |||
출생 | 1922년 12월 27일 | ||
함경남도 영흥군 (現 함경남도 금야군) | |||
사망 | 1996년 5월 6일 (향년 73세)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 |||
본관 | 청주 한씨[3] | ||
호 | 청산(淸山) | ||
재임기간 | 제26대 내무부장관 | ||
1961년 5월 18일 ~ 1962년 10월 15일 | |||
제2대 감사원장 | |||
1963년 7월 12일 ~ 1963년 12월 15일 | |||
제13대 합동참모의장 | |||
1972년 6월 2일 ~ 1975년 2월 28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cecec><colcolor=#000000> 부모 | 아버지 한국섭, 어머니 김대아 | |
형제자매 | 3남매 중 장남 | ||
자녀 | 장녀 한정숙, 차녀 한경숙 | ||
학력 |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주오대학 (법학 / 학사) | ||
경력 | 제26대 내무부장관 제2대 감사원장 아시아자동차 사장 아시아자동차 회장 대한중석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아시아자동차 명예회장 | ||
군사 경력 | |||
임관 |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 ||
복무 | 일본제국 육군 | ||
1944년 ~ 1945년 | |||
대한민국 육군 | |||
1946년 ~ 1975년 2월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합동참모의장 | ||
주요 보직 | 육군 수도군단 부군단장 육군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육군 제6군단장 육군참모차장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6.25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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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및 정치인.2. 생애
2.1. 유년기 ~ 군인 시절
1922년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아버지 한국섭(韓國燮)과 어머니 김대아(金大娥) 사이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 변호사로 활동하려다가 1944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가까워지자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일본 본토나 남태평양에서 싸웠다. 이것을 계기로 1946년 육군사관학교 2기[4]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였다.임관 이후에는 춘천의 제8연대에서 소대장, 중대장을 지낸 뒤, 군기사령부 행정관을 거쳐 1948년 11월에 포항에서 창설된 제18연대 작전주임으로 부임하였다. 6.25 전쟁 발발 당시에는 연대장[5] 대리로 의정부 전투와 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1950년 8월 9일에는 수도사단 제1연대장에 임명되어 안강-기계 전투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공세를 완강히 저지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난 뒤 북진이 시작되자 제1연대를 이끌고 강원도를 넘어 함경도로 진군하여 청진까지 북진했다.[6] 흥남 철수작전에서는 국군에서 유일하게 교두보 작전에 참가해, 철수부대의 엄호 임무를 완수했다.
그 후 동해안 전선을 방어하는 백선엽의 제1군단 예하에서 중공군의 1951년 춘계 공세를 맞아 대관령 방어전에 나섰다. 한신은 후방 깊숙히 침투해 영동과 영서를 잇는 핵심 교통로인 대관령을 차단하려는 중공군의 공격을 5월 22~23일에 걸쳐 성공리에 방어해낸다. 이 전공으로 그는 1953년 8월 27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24호)을 수여받는다.
1952년 8월에는 제5사단 참모장, 1953년 5월에는 부사단장으로 금성 전투 등 막바지 고지전을 수행하다 휴전을 맞이하였다.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1956년부터 수도사단장을 맡다가, 1959년에 육군본부 감찰관, 1960년 제2훈련소장(연무대)을 역임한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쿠데타 주체도 참여자도 아니었지만, 절친한 육사 동기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권유로 잠시 내무부장관을 맡았다. 이후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가 1963년에는 제2대 감사원장으로도 재직했다. 다시 군무에 복귀하여 1964년에는 제6군단장, 1968년에는 육군참모차장, 이후 제2야전군 사령관 및 제1야전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1970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1972년에 합참의장(13대)을 마지막으로 1975년에 전역하였다.
2.2. 말년
퇴역 후에는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되어 적자이던 대한중석을 흑자로 전환시키는 경영성과를 냈다. 이어 아시아자동차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88년 신민주공화당 국방안보행정특임고문, 1995년 자민련 상임고문을 지낸 뒤 1996년 5월 6일에 사망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 3-10에 안장되었다.3. 평가
- '오늘 죽어도 책임을 다 한다'는 '1일1생'을 좌우명으로 하여 군 전투태세 확립과 청렴결백을 몸소 실천한 강직한 장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역 시절 이한림과 같이 별칭이 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군기 확립에 엄정했으며, 이런 성격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발휘되었다. 일례로 6.25 전쟁 안강-기계 전투의 일부인 비학산 전투 과정에서 제1연대가 105㎜ 야포의 화력지원 하에 순탄하게 진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8부 능선까지 진출한 상황에서 화력지원이 중단되어 공격이 돈좌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연을 알아보니 함께 공격에 나선 제17연대의 공격 속도가 늦어 사단포병 지원을 그쪽으로 전환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신은 작전주임을 대동하고 곧바로 수도사단 백인엽 사단장에게 가서 권총을 뽑아들고 "수도사단이 17연대의 사단[7]이냐? 공격 중에 화력지원을 전환해도 되는거냐?"고 거세게 항의를 했다고 한다. 백인엽도 한신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이에 대답도 못하고 쩔쩔맸다고 한다.[8] 한신은 군기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야전 지휘관으로의 능력 전반도 탁월하여 6.25 전쟁 중에 가장 전투를 잘 한 연대장으로 꼽힌다.- 한신은 이외에도 고급 지휘관으로 있으면서도 '잘 먹이고, 잘 입히며, 잘 재우는' 사병복지의 구현과 이를 통한 교육훈련 제일주의를[9] 실현하는데 노력했다. 6.25 전쟁 이후 한국군은 조직은 엄청나게 비대해진데 반해 가난한 나라 살림에 예산은 적다 보니, 생계형 비리가 극심했다. 병사들은 배를 곯기 일쑤였고, 간부들도 박봉과 진급 적체에 시달린 나머지 군수물자를 빼돌려 착복하고 비리 무마와 진급 청탁을 위해 다시 뇌물을 상납하는 등 각종 부정이 만연했다. 한신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복지예산의 확보는 물론, 기존 비리를 발본색원하는데도 앞장섰다. 예컨대 헬리콥터를 타고 가던 중에 아무 부대에나 불시 착륙하여 1종 보급(식량) 검열을 하고, 여기서 부족분이 적발되면 바로 지휘관을 체포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고 한다. 만약 본인도 비리를 저지르며 진급한 장군이 이랬다면 거꾸로 투서를 당해 고꾸라졌겠지만, 한신은 청렴을 솔선해온 장군이어서 이런 조치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실권이 보잘 것 없던 합참의장 재직 시절에도 국군 현대화 계획을 입안하여 강군 육성과 자주국방의 기틀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평판도 좋고 육군참모차장, 제1야전군 및 제2야전군 사령관 등 군 핵심 보직을 두루 거쳐 육군의 최정점인 육군참모총장의 유력 후보로도 당연히 거론되었다. 1975년 퇴임한 노재현 총장의 후임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박정희는 대신 이세호 제3야전군 사령관을 낙점한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영남 출신을 편애한 인사의 결과라고 주장하나, 이세호도 정작 개성 출신이라 이는 사실과 맞지 않다. 그보다는 상급자에게도 거침 없었던 한신보다 이세호가 대하기 편해서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어쨌건 육군 내에서 강직한 참군인으로 꼽히던 한신과 채명신[10]이 육군참모총장에 올라 육군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면 박정희 정권의 비참한 몰락과 뒤이은 12.12 군사반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많다.
4. 저서
- 『신념의 삶 속에서』- 1994년
5. 기타
- 딸 한경숙씨는 유명 소아과 의사로 활동중이다.
- 한나라의 명장 한신과 동명이인이라 헷갈리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한자 표기조차 똑같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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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명은 한원극(韓元極). 1945년 9월 20일에 한신(韓信)으로 개명했다고 한다.[2] 그 유명한 중국의 명장 한신과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다.[3] 양평공파 31세.[4] 김재규, 박정희가 그의 동기이다.[5] 당시 연대장은 최석 중령[6] 이는 유엔군 최대북진선의 최북단이었다. 수도사단의 전공 중에서는 보통 혜산진에 밀려서 콩라인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곳은 한반도 최북단인 회령과 온성군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이었다.[7] 백인엽은 개전 당시 제17연대장이었다.[8] 결국 졸렬한 지휘 끝에 백인엽은 수도사단장 직에서 물러나고 송요찬이 후임으로 부임한다. 여러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능력과 전공을 보여준 친형 백선엽과 달리, 백인엽은 용맹하기만 한 똥별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나 비리 저지르는데는 선수여서, 전역 후에도 선인학원 사학 비리의 원흉이 되어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9] 60년대 중후반, 6군단장 재임 중에는, 전방서 임무수행하는 초급간부들과 대화하면서, 현재 지형에서 우리 軍이 펼친 전술, 이와 관련된 큰 틀의 전술이나 전략을 설명해주시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 단순히 철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닌, 상황을 크게 바라보고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간부들이 軍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라 기대했을 것으로 추정.[10] 주월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도 5.16 군사정변에도 가담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명장이어서 육군참모총장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공개적으로 유신에 반대하여 박정희도 결국 제2야전군 사령관을 끝으로 그를 예편시키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