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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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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3년 5월 28일 ([age(1943-05-28)]세) |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월랑리 | |
학력 |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철학 / 학사) |
군사 경력 | |
임관 | 학군사관 (4기)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1966년 ~ 2003년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최종 보직 | 제2야전군사령관 |
주요 보직 |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장 제51보병사단 제167보병연대장 제51보병사단장 수도군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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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3년 5월 28일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태어났다.[1] 국민학교(現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닌 후 상경하여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1966년 졸업하고 학군사관 4기로 소위 임관했다.[2] 직능은 정보.38년에 이르는 군생활동안 서울대 출신답게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라는 평판이 자자했지만 이상하게 빠른 진급과는 인연이 없었다. 온갖 보직을 다 경험하며 1990년 준장 진급, 1993년 소장 진급을 모두 막차에 아슬아슬하게 했고 1998년 중장 진급을 할 때도 무려 9차만에 진급을 했다. 하지만 2001년에 결국 대장 자리에 올랐으니 비록 잠시 늦더라도 바른(?)길을 간, 대기만성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다.
학군사관, 육군3사관학교, 학사장교 등 비육사 출신 장교의 경우, 같은 해에 임관한 육군사관학교 출신보다 진급이 늦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진급한다는 보장만 있으면 빠른 진급보단 막차까지 버티는게 좋다. 빨리 진급하면 그만큼 빨리 퇴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늦게까지 버티다가 막차에 진급하면 그만큼 월급을 더 받을 수 있고 연금도 늘어난다. 비육사출신은 한직을 맡아서 조금 돌아가더라도 괜찮지만 육사는 진급 경쟁에서 계속 밀리고 메이커 사단, 요직 등의 자력이 없으면 향후의 커리어가 어둡다.[3] 이는 학군사관, 육군3사관학교, 학사장교 등 비육사 출신 장교의 경우, 같은 해에 임관한 육군사관학교 출신보다 한직에 관대한 군 인사정책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이런 식의 진급을 한다면 중령 ~ 대령 언저리에서 제대하게 된다.
여기에 운도 엄청나게 좋았다. 홍순호가 중장에 진급하기 직전까지 김영삼 정부였는데, 김영삼은 육군에서 하나회 물을 빼기 위해 육사 출신을 의도적으로 냉대했으며[4] 사조직은 적발 즉시 군대에서 내보내 버렸는데 홍순호의 경우는 그 틈새를 이용해 막차로 진급이 됐다. 한 마디로 시대를 꽤 잘 타고난 셈. 물론 2020년대 이후 대한민국 국군은 정리할 건 대부분 정리가 된 상황이라 사조직이나 구타 가혹행위가 발생하면 얄짤없이 군대 밖으로 내쫓는 구조가 정착되었으므로[5] 같은 계급에 이렇게 오래 남아있고도 진급할 일은 없게 되었다.
서울대 ROTC 출신 첫 장군[6], 첫 서울대 학군단장, 첫 사단장, 첫 군단장, 첫 야전군사령관의 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정책분야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여 군내에서 정책통으로 꼽힌다.
166cm의 단신[7]이지만 두뇌 회전이 빠르고 순간 판단력이 돋보이며 기획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매사를 꼼꼼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는 일솜씨로 정평이 나있다.
가족으로는 부인 조영순 여사와 세 아들이 있다.
2. 주요 보직
- 소령 - 특수전사령부 지역대장
- 중령 -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책부서
- 대령 - 제17보병사단 507연대장, 제51보병사단 167연대장
- 준장 - 서울대학교 학군단장, 육군본부 기획보안처장
- 소장 - 제51보병사단장 (1993년 10월)[8], 대한민국 국방부 국방정보본부 북한정보부장(1996년)
- 중장 - 수도군단장 (1998년 4월), 국방부 국방정보본부장 겸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정보참모본부장(2000년)
- 대장 - 제2야전군사령부[9] 사령관 (2001년 10월 ~2003년 4월) [10]
[1] 당시 행정구역 상으로는 아산군 음봉면 월랑리.[2] 길형보, 지만원 등 육사 22기와 같은 해에 임관한 기수다.[3] 실제로도 윤의철은 어떻게든 1초라도 빨리 진급하려고 부하들을 갈아 마시다가 결국 중장에서 사실상 진급이 막혔는데 이런 윤의철에 비하면 엄청 훌륭하게 군복무를 한 셈이다.[4] 그래서 전두환 정부 이래 유일하게 육군특수전사령관 출신 대장이 없는 정부가 김영삼 정부였던 것이다. 당시 특전사 수뇌부가 아주 하나회로 떡칠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은 이 "떡"을 다 걷어내느라 특전사 역시 냉대했던 것이다.[5] 가혹행위로 인해 군대 밖으로 쫓겨난 장성이 생겨날 정도로 2020년대 군 장성 인사는 부하 관리 문제에도 매우 엄격해졌다.[6] 사관학교 졸업 후 서울대 위탁교육 과정을 거친 장성들은 많았지만 서울대에 입학해서 4년을 마친 케이스는 처음이다.[7] 대한민국 국군 남자 장교로서는 거의 최단신 수준이다.[8] 서울대학교 출신 최초의 사단장[9] 현 제2작전사령부[10] 학군단 출신 3번째 대장 진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