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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51426><colcolor=#ffffff> 출생 | 1940년 5월 9일 ([age(1940-05-09)]세) | ||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면 남천리# (現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남천리) | |||
본관 | 창녕 조씨 | ||
재임기간 | 제29대 합동참모의장 | ||
1999년 10월 26일 ~ 2001년 10월 8일 | |||
제38대 국방부장관 | |||
2003년 2월 27일 ~ 2004년 7월 2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51426><colcolor=#ffffff> 배우자 | 강숙 | |
자녀 | 슬하 1남 2녀 | ||
학력 | 영광국민학교[1] (졸업) 영광중학교 (졸업) 광주숭일고등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국방대학원 (행정학 / 석사)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2] | ||
경력 | 제38대 국방부 장관 | ||
군사 경력 | |||
임관 | 갑종간부후보생 (172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61년 ~ 2001년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합동참모의장 | ||
참전 | 베트남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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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공무원. 합동참모의장과 참여정부의 초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1933년생 군인인 조영길(趙英吉)과는 한자가 다르다.자주국방을 강조했던 박정희, 노무현 정부에서 모두 일익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일선 장교이자 실무 기획자로서, 노무현 정부에서는 후임자인 윤광웅 장관과 함께 국방정책 최고 책임자로서 소임을 수행하였다.
2. 생애
1940년 5월 9일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숭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61년 갑종간부후보생 172기로 지원하여 같은 해 12월에 소위로 임관한 뒤에, 수도사단(통칭 맹호부대) 소속의 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사단이나 연대에서 참모를 거치지 않은 특이경력자이지만, 베트남전에서는 최우수 중대장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베트남 전쟁에서 당초의 임기 1년의 절반인 6개월만을 복무하고서 귀국했다. 곧바로 1970년 육군 연구발전사령부(같은 해 설립된 국방과학연구소의 모체)에 배속되어 연구분석실의 요원들과 함께 일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자주국방에 공헌할 수 있었던 계기이자 첫 기회라고 회고하였다.
1974년에는 육군대학을 졸업해 사단방어 담당 교관을 맡게 되었다. 특히 같은 시기에 박정희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자주국방 노선의 연장선상에서 육군이 진행하던 전시 방어계획의 수정, 발전안 수립에도 동참하였다. 기본적으로 앞선 1972년에 육군본부가 처음으로 세운 독자 전쟁수행 계획(일명 '태극 72')을 좀더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3]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향토사단인 31사단의 사단장을 역임했다. 1992년 사단장 재임 당시 남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서울에서 열린 전대협 집회에 참석하려 했으나 대중교통수단이 경찰의 검문에 의해 모두 막히자 5월 29일 광주역에서 서울로 향하던 기차를 탈취해서 서울로 올라가버린 남총련 열차 강제 정차 사건을 겪었다. 군사정권 때였기에기무부대원들이 각 대학교에 투입되어 정보수집을 하고 있었고, 31사단 예하부대들은 다시 관내 대학들에 투입되는 것에 대비해 사격 등 전술훈련은 모두 미루고 방탄헬멧에 방석망(바이저)를 부착하고, 방석복을 입고, 충정봉,[4] 포승줄로 무장한 채 M16A1소총에 대검을 착검한 후 여러 대형으로 전진하며 공격적으로 시위를 진압을 하는 일명 충정훈련[5]과 이의 측정에만 열중하던 때였기에 국가기간망인 기차가 탈취되는 상황에선 군병력이 투입되는 것이 당연시되던 때였으나 군에서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곤란한 입장에 놓였지만, 다행히 무마되었다.[6] 후임 김영삼 정부에 의해 현재의 제2작전사령부인 2군사령부 사령관으로 진급했다.[7]
2군사령관 시절인 1998년 북한군 반잠수정 격퇴에 공헌했다. 이듬해인 1999년에 전임 김진호(제1 연평해전 당시의 합참의장) 대장의 뒤를 이어 합동참모의장으로 취임했다. 합참의장 시절 인터뷰
2001년 합참의장직을 떠남과 동시에 전역했고, 2003년 2월에 노무현 정부의 첫 국방장관으로 취임했다. 2003년 국군의 날 당시에 대통령에게 우산을 받쳐준 것을 두고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국방장관 재임 시절 원자력잠수함 개발을 추진했지만, 불과 1년 만인 2004년 초 언론에 노출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2004년 5월에 북한군 경비정이 NLL을 넘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고 누락을 이유로 사임했다. 군 사법 개혁 문제로 청와대와 갈등을 빚어 물러났다는 설도 있다.
군 생활을 40년 했는데[8] 17세에 입대한 정호근 대장과 더불어 대한민국 국군에서 가장 군 생활을 오래 한 사람 중 하나이다.
3. 기타
인터넷에서는 조영길 전 장관이 이등병 출신이란 소문이 퍼져 있다. 군내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전역자들이 많다.(관련 페이지) 때문에 이등병에서부터 국방부 장관까지 오른 켠김에 왕까지 실사판이라는 게시글도 나왔다.그런데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1961년에 영광안마도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 중에 갑종장교에 지원해 시험을 쳤다고 밝히고 있다. 광주 숭일고를 졸업했기 때문에 그는 갑종간부로 소위로 임관했다.[9] 다만 한국경제신문의 기사 가운데 조영길 대장이 이등병 출신이었단 언급이 있긴 하다.[10] 다만 기사에선 한 줄로 언급할 뿐 정확한 출처가 있음을 밝히진 않는다. 관련기사
경력을 돌이켜보면 관운이 진짜 강한 인물이다. 원래 조영길 전장관은 김영삼 정부시절 갑종출신에 호남 출신이라 소장시절 진급이 안 돼서, 계급정년으로 전역을 몇 달 앞두고 있을 때 겨우 중장 진급을 하고, 2군단장이 됐다. 하지만 군단장을 마치고 다시 한직인 제2야전군 부사령관으로 가서 그때도 전역을 할 뻔 했으나 마침 그 타이밍인 제15대 대통령 선거때 같은 호남(전남 신안군) 출신인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대장 진급을 했다. 제2야전군사령관, 합동참모의장을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비육사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까지 역임해 군인 경력의 마무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안철수 캠프에 참여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2019년 5월, 회고록 <자주국방의 길>(플래닛미디어)을 출간했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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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現 영광초등학교[2] 석사 학위 논문: 戰車 性能別 發展趨勢 硏究(1988)[3] 여기서 도출된 내용은 육군본부가 유엔사(당시에는 한미 연합사가 없어서 유엔사가 작전권을 행사)와 협조해서 "작전계획 5027-74"(즉, 1974년도판 한반도 연합방위 계획)이 세워지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마침 같은 시기에 한미 연합1군단장에 부임한 제임스 홀링스워스 중장도 공세적인 전진 방어를 주창하였고, 이러한 측면들이 반영되어 기존의 수세적인 고수 방어 개념에서 상당 부분 탈피하게 되었다.[4] 대형 목재 진압봉으로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참나무 등으로 제작되고 국방색 천으로 된 커버를 씌워 휴대했다.[5] 매년 특전사에서 효과적인 진압 형을 연구개발을 하면 각 육군부대에서 특전사에 교관단을 파견해 교육을 받은 후 이들이 다시 예하부대에 이를 전파하는 방식으로 실시되텄다. 발구름 소리로 시위대를 제압하기 위해 특유의 무릎을 높이 들었다가 강하게 내딪는 동작 때문에 영원한 무릎통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착검을 하고 전진하기 때문에 보면 광장히 공격적이었다.[6] 당시 군에선 TV 아침뉴스를 보고 일이 터졌다는 것을 알게되어 "뉴스보다 빨리"라는 구호가 생겼다.[7] 그리고는 아침마다 '"신독립군가"를 즐겨 듣는다는 것이 알려져 예하부대 장병들에게 강제로 교육되더니 급기야는 이 "신독립군가"를 지정곡으로 하는 군가경연대회까지 열렸다.[8] 여기서 군 생활은 사관생도를 제외한 정식 군인을 말한다.[9] 중졸은 일등중사로 임관했다. 이는 오늘날의 중사에 해당한다.[10] 갑종장교는 군번이 2개였다. 21X 기 기준으로 병으로 입대하지 않고 지원해서 바로 소위로 임관할 경우 먼저 논산훈련소에서 병으로 10주간 교육을 받은 후 상무대에서 후보생으로 40 주간 훈련을 마친 후 장교로 임관했다. 중간에 휴가 2 주를 포함해서 총 52주로 총 1년이 된다. 따라서 논산 군번(병), 상무대 군번(장교)로 군번이 2 개였다. 이 것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와전되었던 것 같다. 과거 육군 계급이 병의 경우 훈련병(무등병), 일등병(지금의 이등병), 하사(,지금의 병장), 하사관(부사관)의 경우 이등중사(지금의 하사), 일등중사(지금의 중사), 이등상사, 일등상사였던 것이 60년대 후반에 지금과 같이 바뀌었는데 이를 간과한 것 같다. 영화, 드라마 등 매체에서 이에 대한 오류가 종종 발생한다. 영화 고지전(영화)에서도 신임 중대장(조진웅 분)과 함께 짚차을 타고오던 신병(이다윗 분)이 관등성명을 댈 때 "이병 남성식"이라고 당시에는 없었던 "이병"이라는 계급을 댄다. 게급 개편 전에는 고등학교 졸업자는 갑종간부후보생에 지원하여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중학교 졸업자는 을종간부후보생에 지원하여 하사관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