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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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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51426><colcolor=#ffffff> 본관 | 영천 이씨[1] | ||
출생 | 1937년 2월 1일[2] | ||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순호리 237번지[3] | |||
사망 | 2021년 7월 22일 (향년 84세) |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2충혼당 1층-505실-358호 | ||
재임기간 | 제15대 국가보훈처장 | ||
1993년 2월 26일 ~ 1993년 12월 21일 | |||
재임기간 | 제31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 ||
1993년 12월 22일 ~ 1994년 12월 2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51426><colcolor=#ffffff> 학력 | 경남고등학교 (졸업 / 11회) 터프츠 대학교 (국제정치학 / 박사) | |
가족 | 배우자 김성기[4], 아들 이재영[5], 딸 이효정[6] | ||
인척 | 매제 이학봉 | ||
경력 | 제31대 국방부장관 |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17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7] | ||
1961년 ~ 1992년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 ||
주요 보직 | 제26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정책기획실장 제1군단장 | }}}}}}}}} |
윌리엄 페리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과 회담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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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관료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다.이경식 전 경제부총리의 5촌 당질(堂姪)이며, 이학봉 전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은 그의 매제이다.[8]
2. 생애
1937년 2월 1일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순호리 237번지에서 아버지 이완식(李完植, 1915. 4. 19 ~ 1998. 6. 18)과 어머니 진성 이씨 이영자(李榮子, 1915. 4. 13 ~ 2013. 5. 11) 사이의 1남 1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경남고등학교(11회)[9], 육군사관학교(17기)를 졸업하였다.이후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하나회 출신으로 김진영처럼 대표화랑 + 전두환의 총애를 받는 선두주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김연각[10], 이문석과 더불어 2차 진급을 하던 후발주자였다. 1984년 12월에 소장 진급을 확정 짓고 충정부대였던 제26보병사단장과 육군본부 정책기획실장을 역임했다. 이후 1989년 4월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군단장,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등을 지내고 1992년 8월을 끝으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11][12] 다만 이병태 중장은 상황이 달랐는데, 이미 노태우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이문석 1군 사령관은 1990년 6월에 대장 진급했고, 전두환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김진영 한미연합사부사령관은 1990년 12월에 대장에 진급했다. 따라서 합참 작전본부장이 요직으로 바뀌었음[13]에도 선두주자들은 이미 대장 진급을 해버렸기에 그가 희대의 이변인 3~4차 진급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진급에 실패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992년 8월을 끝으로 전역하여 주 호놀룰루 총영사를 맡으면서 잊혀지나 싶었다. 그러다가 대통령이 김영삼으로 바뀌자, 하나회 출신임에도 이례적으로 문민정부에서 중용되었다.[14] 1993년 2월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되었다.[15] 이후 권영해 국방장관이 동생의 비리 의혹 때문에 사임하면서 1993년 12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1년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였다.[16] 간단히 말해, 영변 원자로 공습까지 거론되었던 1차 북핵 위기 당시의 국방장관이었다.[17]
국방장관 재임 중이던 1994년 7월 초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일산신도시가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건설되었다고 답변했다가 일산신도시 주민들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18][19] 이 외에도 각종 기행과 실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국회에서는 답변 도중 갑자기 양말을 벗어 보여 문제가 되었으며, 국방부 장관 취임 당일에는 간부들과의 상견례에서 당시 이수익 국방부 군수본부장을 공개적으로 갈궈서 망신을 준 일도 있었다. 또한 다음 날에는 율곡 사업 재감사를 발표하는 기자 회견도 내용 자체보다는 특이한 진행 방식으로 두고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까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을 대비하여 지하철 6, 7, 8호선에 방공호 설치를 주도했다.
1994년 10월 25일, 국군 포로 조창호를 국군수도병원에서 만나 경례와 함께 귀대를 보고받았다. 이때 꽃다발과 함께 조창호의 손을 잡아주면서 "조국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위로했다.
2017년 80대의 나이로 미국 터프츠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20]
2021년 7월 22일 서울특별시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그의 유해는 2021년 7월 23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충혼당 1층 505실 358호에 안장되었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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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동정공파(領同正公派)-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26세 식(植) 항렬.[2] 영천이씨영동정공파세보 병편 301쪽에는 1938년 3월 1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4] 金聖琦. 1938년 11월 29일생. 경주 김씨 김재은(金裁銀)의 딸이다.[5] 李在英. 1968년 2월 28일생.[6] 李曉庭. 1970년 9월 14일생.[7] 군번 18059[8] 이병태의 여동생 이설혜(李雪惠, 1944. 1. 20 ~ )가 바로 이학봉의 부인이다.[9] 전 법무부 장관, 국회의장인 박희태, 5공 시절 실세 중 하나였던 안기부 2차장 이학봉, 구창회 대장과 고교 동기다.[10] 이 쪽은 하나회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장 진급에는 성공했지만 대장 중에서는 중요도가 떨어지는 2군 사령관에 배치되었으며, 대구경북 출신이었기 때문에 새 정권이 출범할 때 경질되어 군문을 떠났다.[11] 이처럼 1군단장-합참 작전본부장-이후 국방장관을 차례로 역임한 육사 후배로 서욱(육사 41기)이 있다. 중장에 그쳤던 이병태와는 달리, 서욱은 대장(구체적으로는 육참총장)까지 역임하고 장관이 된 것이 차이.[12] 안영호(육사 42기) 중장은 완전히 똑같은 루트를 탔는데, 그도 합참 작전본부장에서 커리어가 끝나버렸다.[13] 이병태 1군단장이 합참 작전본부장에 보임된 것은 1991년 1월의 일이다.[14] YS의 의견은 하나회 핵심이라면 왜 중장만 하고 예편했겠냐는 것. 사실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해 못할 결정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누가 하나회인지는 내가 결정한다[15] 박관용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에 따르면 국가보훈처장 기용도 문민정부 출범 조각 때 보훈처장을 빠뜨린 게 뒤늦게 발견돼 갑자기 '옮겨 심기' 식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 비록 하나회 출신이었지만 김영삼 대통령과 경남고등학교 선·후배지간으로서 학연으로 얽혀있었고 이경식 부총리의 5촌 조카라는 아주 가까운 친척인 점이 감안되어 운이 좋게 살아남는데 성공한 쪽에 가깝다. 의외로 5공 실세 중 하나였던 이학봉과 얽혀있었음에도 살아남았다.[16] 당시 비하나회 + 5.16/12.12 미가담 + 부패 없는 인물이란 조건을 충족하는 대장급 인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하나회 숙청 때 잘려나간 2군 사령관인 김연각이 있었지만 이쪽은 대구경북 출신이기 때문에 하나회는 아니었더라도 김영삼 입장에서는 신뢰가 안 갔던 인사였다). 그만큼 군내 요직에 청렴하지 못한 사람과 하나회 인사가 많아서 숙군 작업 후엔 마땅한 인사가 없었다. 물론 비육군 국방부 장관을 임명시키는 방안도 있었지만 이는 다음 장관으로 바뀌고서 이뤄진다.[17] 또 임기중에 김일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대통령의 지시로 전군에 경계령과 휴가자 전원 복귀 명령을 내리고 NSC에 소집되기도 했다.[18] 특히 일산신도시 아파트를 유사시 적 기동 부대 저지용 장애물로 쓸 수 있다고 발언하여 물의를 빚었다. 야당에서 해당 발언을 문제삼아 해임 건의안 제출까지 추진했지만, 얼마 후 김일성 사망 소식에 묻혀져 유야무야되었다.[19]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박관용에 따르면 이후로 이병태는 경남고 선배인 YS에게 장관직을 떠날 때까지 호명될 때마다 XX 호칭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20] 김재창 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도 이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