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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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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군단
第一軍團
I Cor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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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의 선봉 천하제일 광개토부대
창설일 1950년 6월 28일(시흥지구전투사령부)
1950년 7월 5일(제1군단)
상징명칭 광개토부대(廣開土部隊)[1]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지상작전사령부
규모 군단
역할 경기도 서부전선 방어
군단장 중장 주성운(육사 48기)
부군단장 준장 권영우(육사 45기)
참모장 준장 이종현(학군 34기)[2]
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1. 개요2. 상세3. 편제
3.1. 직할부대3.2. 예하부대
4. 과거부대5. 출신인물
5.1. 군단장5.2. 장교/부사관5.3. 병
6. 기타
6.1. 근무환경6.2. 광개토제일회관6.3. 군단가
7. 사건사고8. 여담
[clearfix]

1. 개요

군단사령부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군단을 두며, 그 관할구역의 작전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기 위하여 군단사령부를 둔다.
② 군단의 명칭은 대통령이 정하고, 군단의 예속(隸屬)은 육군참모총장이, 군단의 배속(配屬)은 합동참모의장이 정하며, 군단 관할구역은 직속상관이 정한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를 근거지로 하는 대한민국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소속 군단. 별칭은 광개토부대천하제일군단.[3]

3개의 사단과 5개의 여단을 예하에 두고 있다. 현재 군단장은 제57대 주성운 중장(육사 48기)이다.

2. 상세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28일에 당시 경기도 시흥군 동면 독산리[4]에서 김홍일 소장에 의해 '시흥지구전투사령부'로 창설되었다. 시흥사는 국군 최초의 군단급 제대였다.

창설 당시 부대 임무는 서울 방어전에서 패퇴하여 흩어진 병력을 재편하고 영등포[5], 시흥군[6] 지역에 형성된 전선을 방어하는 이중임무가 하달되었다. 병력을 수습하고 동시에 방어까지 해야 하는 것. 물론 이는 초대 사령관 김홍일 장군의 탁월한 지휘능력으로 가능했다. 이후 동년 7월 5일에 평택 성동초등학교[7]에서 제1군단으로 재편되었으며,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편제가 지속적으로 바뀌었다가[8] 1972년부로 미국 1군단의 철수 등이 겹치면서 현 위치(고양시, 파주시)로 이전하고 서부지역 작전의 중축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제1군단은 2022년 9월 30일까지 육군 최대 규모의 군단이었다. 상비보병사단 3개뿐 아니라 그 규모가 사단급에 필적하는 포병여단 1개, 기갑 위주의 편제로 일반 보병사단 이상의 전투력을 갖고 있는 기갑여단 2개를 거느리고 있어, 사실상 6개 사단 이상의 전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육군 전체 병력의 12%에 달할 정도라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2년 10월 1일부로 제5군단이 해체된 제6군단의 편제를 흡수하며, 제5군단은 메이커 사단 3개에 28사단까지 총 4개의 전방 상비사단을 갖추게 되며 최대 편제의 군단이라는 타이틀은 내려놓게 되었다.[9]

1군단에 이토록 막강한 전력이 집중된 이유는 전방 군단들 중 서울에서 가장 가깝다는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10] 거기에 고양시, 파주시 지역[11] 향방예비군훈련을 담당하는 부대이기도 하다.

제7기동군단이 지상공격의 최강 군단이라면 지상방어의 최강 군단은 제1군단과 제5군단이다. 군단 예하 기갑여단도 2개씩이나 있고 각기의 기갑여단도 여타 (군단)기갑여단보다 규모가 크다. 군단 예하 (1, 5)포병여단은 명실공히 질이든 양이든 세계최강의 야전포병 부대이다. 사실상의 포병사단인 포병여단이며 대한민국 국방부포방부라 불리게 되는 제1이유이다.

민간급식업체 시범선정 부대로 지정되어 병영식의 질이 무척 좋아졌다.

3. 편제

3.1. 직할부대

3.2. 예하부대

4. 과거부대

5. 출신인물

5.1. 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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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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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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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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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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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오
6대
전부일
7대
김익렬
8대
장창국
9대
양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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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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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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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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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드체대장 진급이 된 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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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김홍일 예) 소장[22] [23] 시흥지구전투사령관 한국광복군 참장
국민혁명군 중장
중화민국 대사
외무부장관
2대 김백일 예) 중장 군사영어 00기 각주참고[24]
3대 백선엽 예) 대장 군사영어 1기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제1야전군사령관 교통부장관
4대 이형근 예) 대장 군사영어 1기[25]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제1야전군사령관
05대 김종오 예) 대장 군사영어 1기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제1야전군사령관
6대 최덕신 예) 중장 前 외무부 장관, 서독대사 1986년 북한으로 망명
7대 백인엽 예) 중장 前 제6군단장 선인재단 설립자
8대 장창국 예) 대장 군사영어 1기 합동참모의장, 제2작전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 주 브라질대사
제8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13대 임부택 예) 중장 육사 1기
21대 최우근 예) 중장 육사 3기
22대 박희동 예) 대장 육사 3기 제3야전군사령관
23대 양봉직 예) 중장 육사 6기
24대 이희성 예) 대장 육사 8기 육군참모차장,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26]
25대 황영시 예) 대장 육사 10기 육군참모차장, 육군참모총장, 제3야전군사령관 감사원장[27]
26대 김윤호 예) 대장 육사 10기 합동참모의장
27대 이기백 예) 대장 육사 11기 합동참모의장
28대 백운택 예) 중장 육사 11기 군단장 임기 중 사망
29대 박희도 예) 대장 육사 12기 육군참모총장
30대 최세창 예) 대장 육사 13기 합동참모의장
31대 류승국 예) 중장 육사 13기 병무청장
32대 문영일 예) 중장 육사 14기 前 국가비상기획위원회 부위원장
33대 이필섭 예) 대장 육사 16기 합동참모의장 [28]
34대 이병태 예) 중장 육사 17기 국방부 장관
35대 김상준 예) 중장 육사 19기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36대 조성태 예) 대장 육사 20기 제2야전군사령관 [29]
37대 김척 예) 중장 육사 21기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30] 김훈 중위 사건의 유족,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38대 박영익 예) 중장 육사 23기 육군참모차장 [31]
39대 강신육 예) 중장 육사 24기 병무청장 [32]
40대 정중민 예) 중장 육사 25기 육군군수사령관 [33]
41대 오현구 예) 중장 육사 26기 육군항공작전사령관 [34]
42대 김선홍 예) 중장 육사 28기 육군사관학교장 [35]
43대 임충빈 예) 대장 육사 29기 육군참모총장 [36]
44대 장광일 예) 중장 육사 31기 前 국방부 정책실장, 現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육군부회장 [37]
45대 황중선 예) 중장 육사 32기 前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38]
46대 권오성 예) 대장 육사 34기 육군참모총장,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39][40]
47대 최종일 예) 중장 육사 34기 국방정보본부장, 現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사무총장 [41]
48대 모종화 예) 중장 육사 36기 육군인사사령관 병무청장[42]
49대 엄기학 예) 대장 육사 37기 제3야전군사령관 [43]
50대 김용우 예) 대장 육사 39기 육군참모총장 [44][45]
51대 서욱 예) 대장 육사 41기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46][47]
52대 안영호 예) 중장 육사 42기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48][49]
53대 황대일 예) 중장 육사 43기 육군참모차장 [50]
54대 안병석 예) 대장 육사 45기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51]
55대 이두희 예) 중장 육사 46기 육군미사일전략사령관 [52]
56대 강호필 대장 육사 47기 지상작전사령관[53] [54]
57대 주성운 중장 육사 48기 現 군단장 [55]


1군단은 군사분계선을 끼고 있는 최전방 부대이기도 한데다 의정부시, 양주시, 파주시, 고양시 등 경기 북부의 주요 대도시들을 끼고 있고 이들 지역은 북한의 남침 시 서울로 들어올 수 있는 주요 관문들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인근 제5군단포천시, 철원군 등 전면전 발발시 1군단처럼 서울로 향하는 관문이자 중요 축선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우주방어급으로 부대를 배치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1군단장 보직은 창군 시절부터 요직이었으며 1군단장을 역임한 이들 중에는 대장 진급은 물론이고 육군참모총장이나 합동참모의장까지 직행했던 케이스도 상당히 많고 1980년대에는 아예 하나회 전용보직으로 통할 정도였다. 제1군단장, 제5군단장 보직은 군단장 중 최요직으로 꼽히며 비육사 출신도 가끔씩 군단장을 맡는 타 군단과 달리 육사 출신만 보임하고 있다.
군단장 재임 후 2차 보직의 중요도에 따라 대장 진급 가능성을 볼수있는데 1군단장을 역임 후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진출한 인원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 1군단장이 얼마만큼의 요직인지를 반증한다.(장광일, 황중선, 권오성, 엄기학, 서욱, 안영호, 강호필)
제1군단장은 제21대 군단장 최우근 중장(육사 3기)부터 현임 군단장인 주성운 중장까지 모두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제5군단도 육사 출신이 계속 군단장을 맡고 있다. 군단장 중 최요직 둘을 육사가 독점하는 셈이다. 또한 제50대 군단장부터 제54대 군단장에 이르기까지 5연속으로 1군단 예하 사단장 출신 장군들이 보임하고 있었으나[56] 제6군단 예하 제28보병사단장을 역임한 제55대 이두희 군단장이 부임하면서 이 콤보는 깨졌다[57].

5.2. 장교/부사관

직할부대 출신만 기재 요망.

이 외에도 군단에서 참모나 실무자로 일한 인물이 고위직으로 승진하여 복귀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안영호, 강호필 군단장은 대령 시절에 작전참모를 지낸 이력이 있으며, 김경수 前 부군단장은 대령 시절에 인사참모를 지낸 이력이 있다.

5.3.

직할부대 출신만 기재 요망.

6. 기타

6.1. 근무환경

사령부 영내에는 직할부대들이 여럿 주둔하고 있다. 부대 경비 및 환경 정비, 차량 운행, 군악 및 의전을 담당하는 본부근무대가 있으며, 통신 업무를 담당하는 제101정보통신단 통신운용대대가 주둔하고 있다. 또한 제1군단 군사경찰단과 제141정보대대 본부가 자리한다.[105] 또한 공군 공군항공지원작전단 예하부대도 주둔하고 있다.[106] 본래 직할대들은 각각 자신들의 막사를 가지고 있었고[107], 병영식당만 공유하고 있었으나, 황대일 군단장 시절부터 영내 직할대 통합막사를 공사하였고, 마침내 이두희 군단장 임기 중에 완공이 이뤄졌다. 그래서 군사경찰단만 독립된 막사를 사용하고[108], 나머지 직할대들이 통합 막사를 사용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부대가 산에 세워져 있는 탓에 영 좋지 않은데 사령부 입구에서부터 각 직할대 막사까지는 계속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구)정보대대 본부와 운용대대가 가장 심각한 입지였으며, 현재는 군사경찰단이 가장 입지가 나쁘다.

사령부급 부대이기 때문에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기본적인 PX와 우체국은 물론 은행 ATM, 이디야 카페[109]와 간부 전용 목욕탕[110], 간부 전용 식당, 이발소, 테니스장, 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젊은 간부들의 거주를 위해 세워진 BOQ가 있으며[111], 군단 사령부 간부들의 편의를 위해 출/퇴근버스를 운행하며[112] 영외에는 아예 아파트 및 영외 PX까지 있다. 이 외에도 고양동에서 출근하는 간부들도 많다.

제1군단 예하 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는 매 기수마다 일정 인원들을 1군단에 자대배치시킨다. 단, 이 때는 세부적인 자대가 나오는게 아니라 1군단이라고 뭉뚱그려서 전속부대가 나온다. 아무 것도 모르는 훈련병들이 군단 사령부에 간다고 기뻐할지도 모르지만, 배치 범위는 상비사단 3개를 제외한 전 부대이다. 사령부 내에서 근무하는 본부근무대는 극소수의 인원들이 배치되며, 그나마 운이 좋아야 정보대대[113], 운용대대, 군사경찰단에 남고 나머지는 다시 인솔간부를 따라서 다른 부대로 간다.[114]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병사라면 휴가 나가기에 용이하다. 택시 타고 10분이면[115] 고양동 시내에 도착하는데 여기서 774번 버스로 갈아타면 서울시내까지 나갈 수 있으며 85번 버스로 갈아타면 김포공항까지 갈 수 있다. 그래서 지방 접근성이 우수한 편이다.

6.2. 광개토제일회관

광개토제일회관
廣開土第一會館
Kwanggaeto First Hall
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사거리 근방에 위치한 회관. 특이하게 군단 내 면회객을 위한 시설이 없고, 부대 밖에 위치해있다. 1989년에 현 위치에서 영업을 시작했으며 2층에 객실, 1층에 고깃집, 목욕탕이 있다.

6.3. 군단가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최초로 횃불 든 호국의 군단
최강의 전사들 용맹한 기상
전승의 역사를 이어가리라
불굴의 투지로 승리하자
새 역사 창조의 제1군단
통일의 선봉엔 우리가 있다
자유 평화 번영 위하여 전진하리라

최초로 38선 돌파한 우린
눈부신 전공에 빛나는 군단
무적의 용사들 혼을 이어서
대한의 조국 강토 굳게 지키자
불굴의 투지로 승리하자
새 역사 창조의 제1군단
통일의 선봉엔 우리가 있다
자유 평화 번영 위하여 전진하리라

파일:제1군단 부대마크.svg

원래는 1973년에 이은상 시인이 작사한 가사를 사용하였으나 2012년에 군단가의 가사를 공보정훈부에서 나태주 시인의 도움을 받아 새로 바꾸면서 현 가사가 되었다.
조국의 강토와 겨례를 위해 피로써 지키는 자유의 군대
멸공의 깃발을 높이 들어라 우리들 가는 곳에 승리가 있다
여기는 벽제관 서부전선 날래고 슬기로운 제1군단
오늘 또 한번 맹세를 짓자 통일 통일 번영 그 목적 이룰때까지

─ (구) 1군단가 1절

청춘의 피끓는 화랑의 후예 나라에 몸바친 정의의 군대
믿어라 뭉쳐라 큰 힘이 되라 우리들 가는 곳에 평화가 있다
여기는 벽제관 서부전선 날래고 슬기로운 제1군단
오늘 또 한번 맹세를 짓자 통일 통일 번영 그 목적 이룰때까지

─ (구) 1군단가 2절

이은상 시인이 작사한 1군단가 (1973~2012)

7. 사건사고


8. 여담



[1] 원래는 천하제일부대였으나 2000년 1월 1일부로 광개토부대로 상징명칭을 바꾸었다. 다만 천하제일이라는 명칭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병행해서 쓴다.[2]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3] 군단 사령부 옆 공원에 한자로 크게 광개토부대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다. 대연병장 시상대에는 한자로 천하제일군단이라고 적혀있다. 1이라는 숫자에 군단이 애착이 강한데,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군단이자 6.25 전쟁 당시에도 군단 중에 제일 큰 활약을 해서인지 1을 상당히 강조한다. 군단에서도 이 점을 이용하여 군단 교환대로 전화를 걸면 교환병이 '통신보안을 준수합시다! 천하제일군단 교환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립니까?'라고 안내멘트를 전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군단 구호로 '천하제일 광개토 전사의 다짐'을 명시하고 있고, 광개토부대라는 애칭 외에도 2000년까지 쓰이던 애칭인 천하제일1군단(천하제일군단)도 꽤 쓰이는 편이다.[4] 현재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동.[5] 지금의 영등포구, 동작구(사당동 제외), 구로구 구로동, 신도림동 일대. 6.25 당시에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에 속했으나 당시만 해도 서울의 온전한 일부라는 인식보다는 독자적인 지역정체성이 남아있었다.[6] 지금의 금천구, 관악구(동작구 사당동 포함), 광명시, 서초구, 안양시, 과천시, 군포시, 안산시, 시흥시 남부. 현재의 시흥시 북부는 당시 부천군 소래면, 의왕시화성군 일왕면.[7] 당시 성동국민학교. 그래서 교내에 1군단 창설비가 있다.[8] 그 때문에 6.25 전시 상황에는 연관성이 전혀 없어보이는 現 3군단 예하사단들이 1군단 휘하에 있기도 했었다.[9] 제3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제28사단. 단 28사단은 2025년 해체되므로 이후론 1군단과 5군단의 규모가 동일해진다. 그리고 '전투력'으로 따지면 당연히 제7기동군단이 육군 최강의 군단이다. 주로 보병여단을 전력의 주축으로 삼고 전쟁 발발 시 방어를 우선시하는 타 군단들과 달리, 7군단은 기계화보병 및 기갑전력이 주력이며, 비축해둔 막대한 기갑전력을 앞세워 북진, 반격하기 위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부대이기 때문에 아예 7군단 vs 나머지 모든 육군 전체와 대결 구도가 성립된다고 해도 말이 될 정도로 대한민국 육군이 보유한 최신예, 최강의 장비들이 모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10] 사실 북한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1군단이 지키는 고양시, 파주시 방면은 임진강이라는 거대한 천연 방벽이 있어 주공이 되기 어렵다. 그래서 철원군-연천군-의정부시로 이어지는 축선이 지상군 주력의 주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설. 이 때문에 포천시 일대에는 제5군단 등, 우주방어 수준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주-고양은 서울까지의 종심이 워낙 가까운 탓에 (최단 40km 이하) 이만한 수준의 전력집중은 불가피하다.[11] 이 중 군단 직할부대인 101정보통신단 712통신대대는 군단 직할부대 중 유일하게 의정부시에 위치해서 의정부도 포함되기도 한다. 또한 25사단의 일부 부대는 양주시와 연천군에 주둔한다.[12] 항공단 야전 군단 직할 배치 계획에 따라, 육군항공작전사령부에서 예속전환. 군단 직할부대로 편성.[13] 군단 그린캠프, 병역심사대, 보충병들이 지내는 중대[14]제30기계화보병사단 中 舊 제90기계화보병여단을 거점으로 하여 재창설된 기갑여단.[A] (구)제6군단의 기동군단 개편을 염두에 두고 28, 65사단을 (구)제6군단에서 받고 30사단을 (구)제6군단으로 넘겨주는 개편이 1993년에 있었으나 (구)제6군단의 기동군단 개편이 무산되자 2000년 1월 1일부로 다시 28, 65사단이 (구)제6군단으로 복귀, 30사단이 제1군단으로 복귀하는 개편이 단행되었다.[16] 2020년 해체 후 제30기갑여단으로 전환. 원래는 제6군관구사령부 예하의 향토사단이었으나 1970, 1980년대의 수도군단, 수도방위사령부의 개편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이 제1군단 예하 전방사단으로 예속되었다. 기보사단 감축 계획에 따라 2020년에 제90기계화보병여단만 남아 제30기갑여단으로 개편되고 나머지 2개 여단은 해체가 확정되었다. 이미 예하 92여단이 해체되었다.[A] [18] 2018년 육군동원전력사령부 귀속[19] 2007년 부대 해체. 작전계획지역은 제9보병사단이 인수했다.[20] 단급 부대인 제11방공단으로 승격[21] 국군의무사령부로 이관[22] 예비군으로 예편된 이후 이승만이 직접 중장으로 승진시킴. 1군단장으로 이끌었을때는 소장이었다.[23] 일제강점기 시기인 1920년 이전에 중화민국으로 망명 이후 구이저우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지속하다가 광복 이후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임관했다.[24] 군단장 임기 중인 1951년 3월에 항공기 사고로 인한 순직. 사망 당시에는 소장이었으나 중장으로 추서되었다.[25]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26] 12.12 군사반란에 가담.[27] 12.12 군사반란에 가담.[28] 1987.12 ~ 1989.04[29] 1992.12 ~ 1993.10[30] 군단장 재직기간 1993.10 ~ 1995.10, 3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보직이동 후 1997.11전역[31] 1995.10 ~ 1997.10[32] 1997.10 ~ 1998.10[33] 1998.10 ~ 2000.10[34] 2000.10 ~ 2002.10[35] 2002.10 ~ 2004.10[36] 2004.10 ~ 2006.12[37] 2006.12~2008.4[38] 2008.4~2009.11[39] 군단장 역임 이후 합참 작전본부장을 지내고 2011년 대장으로 진급하여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을 거쳐 2013년에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40] 2009.11 ~ 2010.12[41] 2010.12~2012.05.02[42] 2012.05.03 ~ 2013.10.31[43] 2013.10.31 ~ 2015.04.13.[44] 군단장 역임 이후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을 하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 및 대장으로 진급 후 전역.[45] 2015.04.13 ~ 2016.10.17.[46] 군단장 역임 이후 합참 작전본부장을 지내고 2019년 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으며 2020년 8월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47] 2016.10.17 ~ 2017.09.29[48] 2017.09.29 ~ 2019.05.10[49] 대령 시절 군단 작전참모와 준장 시절에 참모장을 역임했다.[50] 2019.05.10 ~ 2020.12.07[51] 2020.12.07 ~ 2021.12.16[52] 2021.12.16 ~ 2022.12.07[53] 대령 시절 군단 작전참모 역임.[54] 2022.12.07~2023.11.08[55] 2023.11.08~[56] 김용우, 황대일, 안병석 군단장은 9사단장 역임. 서욱, 안영호 군단장은 25사단장 역임.[57] 단 사단장이 아닌 1군단 예하 지휘관 출신으로 확장한다면 이 연속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두희 군단장이 준장시절 1포병여단장을 역임했기 때문이다.[58] 수도군단장직을 끝내고 전역을 앞두고 있었으나 백운택 군단장의 급사로 인해 후임 군단장 인선 전까지 군단장 대행을 맡아 수행했다.[59]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의 양자였음.[60] 육사 14기 대표화랑이었으나 하나회의 견제를 받아 한직만 돌았고 사단장 보직도 방위사단인 제66보병사단장 직에 그치며 1987년에 조용히 예편했다.[61] 준장 시절에 부군단장 역임. 특이하게도 소장 마지막 보직도 부군단장이었는데, 이 때는 6군단에서 맡았었다.[62] 57사단장과 국군복지단장을 거쳐 부군단장으로 이동.[63] 55사단장과 3사교장을 거쳐 부임.[64] 23사단장과 3사교장을 거쳐 부임.[65] 35사단장, 포병학교장, 합참 민군작전참모부장 역임[66] 기수는 권혁신 소장이 더 높으나 실제로는 인성환 소장을 거쳐 권혁신 소장으로 교체되었다.[67] 특이하게도 소장 마지막 보직도 부군단장이었는데 이 때는 합동군사대학 총장을 끝내고 2군단에서 맡았었다.[68] 제20기계화보병사단 해체와 동시에 1군단 부군단장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으로 전보되었다. 이후 군수참모부장을 거쳐 임기제 진급 후, 국군방첩사령관으로 이동했다.[69] 제2보병사단장으로 재임했으나 해체 후 제2신속대응사단 창설준비단장을 거쳐 부임. 7개월간의 임기를 수행하고 물러났으며 안병석 군단장이 이전에 수행하던 보직인 육본 정보작전참모부장으로 이동했다가 모교인 육군3사관학교장으로 이동하였고 거기서 중장으로 진급해 제2군단장에 취임했다. 육본 정보작전참모부장은 많은 중장을 배출한 요직인 만큼 중장 진급 가능성이 크다.[70] 제35보병사단장을 지낸 인물로, 직능은 인사. 이후 국군의 날 행사단장과 국군복지단장을 거쳐 최종보직인 1군단 부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전임 군단장인 황대일 중장이 육사 동기이며, 2020년 11월에 취임한 지상작전사령관인 안준석 대장 역시 육사 동기여서 사실상 말년 소장라고 보면 되었다.[71] 2009~2011년에는 대령 계급으로 군단 인사참모를 역임했다.[72] 75사단장을 끝내고 부임했으며, 안병석, 이두희 군단장보다 기수가 더 높기 때문에 전역을 앞둔 말년 준장이라 볼 수 있다.[73] 과거 2기갑여단장을 지냈고, 소장 진급 이후에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과 기계화학교장을 거쳐 부군단장으로 이동. 군단장인보다 선배인데다가 동기인 안병석 전 군단장이 대장 진급을 하면서 전역하였다.[74] 제55보병사단장을 마치고 부임. 3사 동기인 장광선 중장과 달리 진급에 있어 후발주자였고 소장 1차 보직을 상당히 길게 하다가 2차 보직으로 부군단장을 받았다. 3차 보직으로 육군3사관학교장을 받아 군단을 떠났다. 이후 정책 연수를 거쳐, 4차 보직으로 제5군단 부군단장으로 이동했다.[75] 이 쪽은 4차 보직으로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직무대리로 임명되어 떠났다. 한직에서 한직으로 수평 이동한 셈. 단, 저 쪽은 중장 보직이어서 의전 수준도 중장에 맞춰졌다.[76] 소장 2차 보직으로, 여기서 전역할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나, 중장 3차 진급(임기제)과 함께 국방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다.[77] 소장 5차 보직으로, 여기서 전역했다. 과거 1사단장을 역임했고, 합참 작전부장, 작전기획부장을 맡았으나 진급에 비선되고 한직인 국방대학교 총장으로 갔다가 1기수 후배인 임기훈 소장과 보직을 맞바꿨다.[78] 1937년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했으나 후에 왕정위군 장교로 임관했기에 국민혁명군 소속 중국중앙군관학교인지 불분명하다.[79]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80] 39사단장, 육군 제2훈련소장 역임.[81] 이후 102기갑여단장을 거쳤으며 소장진급과 동시에 제22보병사단장으로 이동했으나 경질되어 제2군단 부군단장으로 이동했다. 참모장 재임 당시 내부 평가는 상당히 좋았던 인물인지라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 했다. 이후 제2신속대응사단장을 겨쳐 한직인 육군보병학교장으로 다시 이동했다.[82] 現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前 제22보병사단장. 前 합참 작전본부 작전부 작전1처장. 준장(진)때 부임해서 준장을 여기서 달고 합참으로 영전했다.[83]제5기갑여단장, 부사관 성전환 사건 당시 5기갑여단장이었다. 여기에 기갑병과라는 점까지 겹쳐 다음 보직으로 한직을 받았고, 결국 준장 5차 보직으로 육군기계화학교장을 역임하고 있다.[84]제1공수특전여단장, 제3기갑여단장. 現 제72보병사단[85] 22사단장 시절 조준희 일병 월북사건이 터지면서 전역했다. 청보식품 사장 역임.[86] 원래 인사참모를 맡다가 보직 이동. 군단에서 인사참모와 작전참모를 둘 다 맡는 것은 보기 어려운데 그 중 하나이다.[87] 원래 교훈참모를 맡다가 2001년 12월 대령 인사에서 보직이동. 이후 1년의 작전참모를 끝내고 준장으로 진급.[88]국가위기관리센터[89] 25사단 70연대장을 거친 인물로, 교육사로 이동하여 준장 진급 후 2군단 참모장을 지내고 현재는 소장 진급에 실패하여 1기갑여단장을 거쳐 지금은 30기갑여단장을 지내고 있다.[90] 이영규 작전참모부터 작전참모가 작전처장으로 바뀌었다. 특이하게도 육사 48기에서 2연속으로 작전참모가 나왔다. 다만 이 중에서 이영규 장군의 진급이 가장 늦었는데, 군단 작전처장을 찍고 교육사에 가서 준장을 달았다.[91] 22사단 56연대장을 거친 인물로 여기서 준장 2차 진급 후 수도군단 참모장으로 이동했다. 이후 제2작전사령부 작전계획처장, 제11공수특전여단장을 거쳐 지금은 육군특수전사령부 참모장이다.[92] 35사단 106연대장을 거친 인물로 여기서 준장 2차 진급 후 8군단 참모장으로 이동했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 차장을 했으나, 진급에서 비선되어 한직인 욱군항공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이동했다.[93] 31사단 93연대장과 합참 작전본부 합동작전과장을 지냈으나 준장 진급에 실패하고 이 보직으로 왔다. 여기서 준장 2차 진급 후 다른 준장 자리로 이동했다.[94]국군체육부대장(1급 계약직 군무원)[95] 現 육군3사관학교장, 육군포병학교장 역임[96] 이후 제30기계화보병사단장, 육군포병학교장, 육군3사관학교장, 제5군단 부군단장 역임.[97]수도방위사령관,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부장. 제52보병사단장 역임.[98] 제101정보통신단장이 겸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99] 이후 제30기계화보병사단장 역임. 최종보직 육군종합군수학교장[100] 제9보병사단장,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을 거쳐 지금은 육군종합군수학교장이다.[101] 현재는 군사경찰단장으로 바뀌었다.[102] 대령 진급을 앞둔 상태에서 잠깐 쉬어가라고 맡은 자리이다.[103] 2020년을 끝으로 전역. 황대일군단장과는 이미 제9보병사단에서 사단장과 사단 주임원사로 같이 일한 이력이 있다.[104] A-JAX 출신[105] 정확히 영내에는 본부중대 밖에 없다. 인력이 가끔씩 크게 늘어나는데 이건 신교대 수료 인원들이 어느 중대로 갈 지가 확정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고, 주말을 보낸 이병들은 다시 소속 부대로 떠난다. 정보대대 특성상 실질적인 근무는 예하부대에서 이뤄지기 때문.[106] 이 외에도 상급부대 특성상 다른 부대에서 파견 온 인력들이 있다. 제1공병여단에서 파견 온 영선대, 국군수송사령부에서 일하는 전장이동통제대 인원, 제11방공단에서 파견 온 방공인원들. 이 들은 사령부에 파견 온 인원들이며 본부근무대에서 숙식을 해결한다.[107] 본부대는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건물이었고, 운용대대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새 막사 건설을 위해 정보대대 근처에 컨테이너 막사를 지어 이전했다. 정보대대 막사는 평범한 수준이었고, 군사경찰단은 영내 골프장 철거 후 후적지에 지은 막사여서 그런지 새삥이었다. 정작 군사경찰단은 본부근무대 컨테이너가 설치되면서 자기네 연병장을 빼앗기지만.[108] 영내 골프장을 없애고 그 자리에 헌병단 막사를 지었다.[109] 점심시간대가 압권인데, 카페 앞에서 대령과 중령들도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그런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장성들이야 다 부관이나 담당병에게 시키니.[110] 사실 둘로 나뉘어 있다. 테니스장에 있는 곳은 장군과 대령들만 들어갈 수 있고 다른 곳은 하사부터 중령까지 이용 가능하다.[111] 다만 시설이 노후된 편이다.[112] 영내 직할대 인원들의 평일 외출도 이 버스를 타고 이뤄진다.[113] 물론 이 쪽도 다시 중대별로 재배치를 하기 때문에 대대본부에 와도 금방 나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114] 물론 이 중에서 정보대대는 상당수가 TOD 인력이며, 101통신단은 단 본부도 코 앞이어서 나쁘지 않다. 다만 1공병이 걸린다면....[115] 3700번 시외버스가 크게 감편된 이후에는 접근성이 많이 악화되었다. 그래서 휴가자들은 웬만해서 택시가 필수가 되었다.[116] 교회 건물과 식당건물은 기록물관리실과 군악대 연습실로 개조되었다. 종교시설을 영외로 보내고 영내 직할대 통합막사와 더불어 영내 편의시설도 대대적으로 재배치하는 계획이 진행중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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